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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양회 2003년 개강맞이 수양회 주제 2 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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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섬김이
댓글 0건 조회 3,950회 작성일 03-03-02 1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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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개강맞이 수양회 주제 2 강

예수를 바라보자
말씀 / 히브리서 12:1-13                       
요절 / 히브리서 12:2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히브리서는 AD65년에서 70년 사이에 로마에 있는 유대 크리스챤들에게 쓰여진 책입니다. 로마에 있는 유대 크리스챤들은 AD64년 네로의 박해 때에 믿음을 포기하게 하는 협박과 위협에도 굴하지 않고 믿음을 지켜내었습니다(10:32-34). 그들은 비방과 환난과 사람들에게 구경거리가 되는 것과 자기 사업을 빼앗기는 것도 기쁘게 감당해 내었습니다. 그러나 영적인 아버지 베드로가 순교한 후 기독교는 불법적인 범죄단체로 낙인찍히게 되었습니다. 유대 크리스챤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믿음이 약해지기 시작하였습니다. 신앙을 포기하고, 그리스도를 배반하고 전과 같이 유대교로 돌아가려고 하는 위기에 처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신앙을 지키다가 소망과 의욕과 믿음을 잃고, 무기력과 정체에 빠진 사람들에게 본 서신을 통해 말씀합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오늘날 믿음의 경주를 하다가 지치고, 힘들어하는 분이 계십니까?  말씀을 통해 우리가 믿음의 주요, 우리의 믿음을 온전케 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고 새 힘을 얻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 예수를 바라보자(1~4)
  히브리서 저자는 먼저 11장에서 많은 믿음의 승리자들을 소개하였습니다. 그리고 1a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히브리서 저자가 우리에게 믿음의 증인들이 있다는 것을 상기시키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는 우리의 믿음의 싸움이 나 혼자만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믿음의 싸움을 하다가 힘겨운 투쟁을 하게 될 때 ‘이 지구상에 나 혼자만 남아있는 것 같은’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신앙 생활이 외롭고 힘이 듭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먼저 우리와 같이 외롭고 힘든 투쟁을 했지만 승리하여 끝까지 믿음의 경주를 달린 많은 선배 증인들이 있습니다. 이 믿음의 증인들이 지금 하나님 나라에서 우리들을 응원하고 있습니다. 지난 6월 월드컵 경기장을 온통 붉게 물들이고 우뢰와 같은 함성으로 우리 선수들을 응원하던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대한민국~ 대한민국” 폐색이 짙던 이탈리아 전에서 국민들이 모아준 성원에 힘입어 문전에서 늘 헛발질만 하던 설기현 선수가 극적인 동점골을 넣지 않았습니까? 또 연장후반 안정환 선수의 멋진 헤딩 골든골로 대한민국이 강적 이탈리아를 침몰시키지 않았습니까? 아담으로부터 시작하여 많은 믿음의 증인들이 하나님 나라 메인 스타디움에서 흰색 옷을 입고 우리를 응원하고 있습니다. “힘내라 ○○○~” “힘내라 △△△” “힘내세요 평신도 목자님들” 그뿐 아닙니다. 우리 주위를 둘러보십시오. 우리 옆에도 함께 천성을 향해 달려가는 많은 믿음의 동역자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힘들 때 기도해 주며 함께 뛰는 믿음의 동역자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결코 혼자가 아닙니다. 나만 홀로 외롭고 힘든 투쟁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우리 믿음의 싸움을 장거리 달리기에 비유하였습니다. 그럼 믿음의 경주를 하는 자가 가져야 하는 자세가 무엇일까요? 1b절을 보십시오.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달리기 경주를 하는 사람은 최대한 몸을 간편하고 가볍게 해야 합니다. 그럼 믿음의 경주를 하는 자에게 무겁게 하는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는 무엇일까요? 유대 크리스찬들에게는 율법주의가 무거운 것이었습니다. 우리들에게 근심과 걱정은 무겁게 하는 것입니다. IMF이후에 우리 학생 목자들과 평신도 목자님들에게 부쩍 근심과 걱정이 늘었습니다. 학생들은 졸업을 해도 당장 취직이 되지 않아 근심이 됩니다. 평신도 목자님들은 직장에서 실직될까 근심이 되고, 회사에 다니면서도 급여 삭감과 불안한 장래로 인해 근심이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자나 더할 수 있느냐(마 6:27)”,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요14:1)” 하나님은 우리에게 있어야 할 것들을 다 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모든 인생의 근심과 걱정을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벗어 버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또 우리들의 마음을 무겁게 하는 것은 마음에 회개하지 않은 죄입니다. 어떤 분은 목자로서 고상한 죄는 소감에 들어내고 회개하지만 부끄러운 죄는 들어내지 않습니다. 이렇게 회개하지 않은 죄가 심령에 쌓이면 목자 생활이 무겁습니다.

  또 우리가 믿음의 경주를 잘 하기 위해서는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려야 합니다. 우리는 신앙 생활이 오래 되어도 특히 약하고, 쉽게 빠지는 죄가 있습니다. 특별히 육신의 정욕은 신실히 영적 투쟁을 하면서도 쉽게 빠지게 되는 죄입니다. 이는 우리 안에 육신의 소욕을 근본적으로 회개하기 보다 즐기고자 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또 어떤 분은 신앙 생활을 하면서 많은 세속적 모임에 매이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분은 세상의 것에 매여 집중해서 예수님을 배우고 믿음의 경주를 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를 얽매이는 모든 것을 믿음의 경주를 위하여 과감히 벗어 버려야 하겠습니다.

  또한 장거리 경주에 있어서 제일 중요한 것은 인내입니다. 42.195Km를 달리는 마라톤 경기에서도 포기하고 싶은 고비가 3-4회가 있다고 합니다. 인내가 없는 사람은 이 고비에서 포기하고 맙니다. 믿음의 경주를 하는 사람들에게도 인생의 고비가 있습니다. 삶을 포기하고 싶거나, 신앙을 포기하고 싶을 정도의 인생의 고비가 찾아올 때가 있습니다. 인생에 있어서 큰 실패를 경험하였을 때 모든 것을 포기하고 주저앉고 싶습니다. 열정을 드려 목자 생활을 했는데도 남는 열매가 보이지 않을 때 포기하고 싶습니다. 오랫동안 자신의 현실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힘겨운 믿음의 경주를 하게 될 때 주저앉고 싶습니다. 인간 갈등으로 영적 회의와 좌절에 빠질 때 누워버리고 싶습니다. 그러나 이 때야말로 우리에게 인내가 필요한 때입니다. 우리가 인내를 가지고 끝까지 믿음의 경주를 하게 되면 우리의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승리의 면류관을 씌워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떠한 고비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믿음의 경주를 달릴 수 있는 인내를 주시길 기도합니다.

  2절 말씀은 믿음의 경주를 하는 자들이 바라보아야 할 목표가 무엇인지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2절을 보십시오.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믿음의 경주를 하는 자들이 바라보아야 할 목표는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분이십니다. 이 말씀은 믿음의 경주를 하는 우리에게 믿음을 주시고, 우리의 믿음을 성숙케 하시어 끝까지 믿음의 경주를 할 수 있도록 해 주시는 분이 예수님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떠한 경우에도 바라보고 목표로 해야할 믿음의 대상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친히 우리에게 어떻게 믿음의 경주를 해야 하는지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2b절을 다시 보십시오.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믿음의 경주를 하셨습니까? 예수님은 십자가를 참으셨습니다. 예수님에게 십자가는 너무도 큰 고통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인류의 모든 죄의 값을 십자가에서 담당하셔야 했습니다. 예수님은 1,000번을 까무라치는 고통을 당하셨지만 이를 참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아버지 하나님께 철저히 버림받는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때가 너무도 고통스러워 이렇게 외치셨습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그러나 예수님은 이때도 참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벌거벗긴 채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수치와 부끄러움을 당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수치를 당하실 때에 참으셨습니다. 또한 부끄러움을 당하실 때 개의치 않았습니다. 이뿐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생애를 볼 때 많은 고통과 부끄러움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부끄럽게도 마굿간에서 탄생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일생 사생자라는 꼬리표를 달고 다녀야 했습니다. 예수님이 사역을 시작하셨을 때 동족들은 그를 배척하였습니다. 끝내는 동족에게 버림받고 사랑하는 제자에게 배반당하셔야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모든 고통을 참으셨고 모든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으셨습니다. 어떻게 예수님께서 그렇게 온갖 십자가의 고통을 참고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을 수 있었을까요? 이는 예수님께서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보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는 십자가의 고통 이후에 오는 부활과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보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질 때 오는 믿음의 승리를 보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믿음대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세상을 다스리시고 모든 피조물의 영광과 존귀와 찬송을 받으시는 왕의 왕이요, 주의 주가 되셨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고난을 통해 영광을 받으신 예수님을 바라볼 때 우리는 끝까지 믿음의 경주를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십자가를 참으신 예수님을 바라볼 때 내가 받는 고통을 함께 받으시는 예수님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나의 눈물을 아십니다. 예수님은 나의 외로움을 아십니다. 예수님은 내가 당하는 무시를 아시고 함께 해 주십니다. 예수님을 바라보십시오. 내 마음에 말할 수 없는 평강이 밀려옴을 느낄 것입니다. 십자가를 참으신 예수님을 바라볼 때 나의 상처에 손을 대사 위로해 주시는 주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믿음을 온전케 하사 끝까지 믿음의 경주를 할 수 있도록 해 주십니다. 믿음의 경주를 하다가 낙심하고 지쳐서 포기하고 싶어하는 분이 계십니까?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십시오.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해 십자가를 참으시고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으신 예수님을 바라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여러분의 믿음을 온전케 해 주시고 십자가를 지며 끝까지 믿음의 경주를 감당할 수 있도록 해 주실 것을 믿습니다. 나의 짐을 함께 지시는 주님을 찬양합니다.

  우리 중에는 쉽게 해결되지 않는 자신의 죄 문제로 투쟁하다가 피곤하여 지쳐 있는 분이 있습니다. 또 양들의 죄와 인생문제를 돕다가 낙심하여 지쳐 있는 분도 있습니다. 언제까지 자신의 문제와 양들의 문제와 싸워야 하는가 생각하다 이제 그만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이때 3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치 않기 위하여 죄인들의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자를 생각하라” 예수님은 죄인들이 당신을 거역하는 죄를 끝까지 참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또한 나의 쉽게 해결되지 않는 죄와 양들의 죄와 인생문제도 끝까지 참고 감당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죄인들을 끝까지 참으신 예수님을 생각하며 믿음의 경주를 감당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4절을 보면 유대 크리스찬들은 영적인 싸움을 하는데 땀흘리기까지 하고 지쳐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저자는 이런 그들을 인간적으로 위로하기 보다 순교의 피를 흘릴 각오로 끝까지 믿음의 싸움을 하도록 도전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순교의 각오로 죄와 싸우고 믿음의 경주를 경주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2. 하나님의 훈련(5~13)
  5절을 보십시오. “또 아들들에게 권하는 것 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을 잊었도다 일렀으되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여기서 ‘징계’란 말은 영어 성경에는 discipline, 즉 훈련으로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네로의 박해를 통해 로마의 크리스찬들을 훈련하셨습니다. 그런데 로마의 유대 크리스찬들은 하나님의 훈련을 받을 때, 열심히 영적인 싸움을 싸우다가 낙담하고 말았습니다. 그들 중에는 자신들에게 닥친 어려움들을 생각하고 하나님께 불신의 마음을 품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하나님께서 왜 훈련하시며, 어떠한 자세로 하나님의 훈련을 받아야 하는지 가르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당신의 백성들을 훈련하시는 것일까요? 6,7절을 보십시오.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 하였으니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비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훈련하시고 채찍질하는 것입니다. 자식에게 회초리를 대는 것은 아버지의 사랑의 표현입니다. 만일 자식에게 훈련이 없다면 그는 매우 이기적이고 나약하여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사람이 되고 말 것입니다. 또한 자식이 죄를 지었을 때 징계가 없다면 그는 영원히 죄의 종 된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또 하나님의 아들다운 믿음과 내면성을 갖도록 하기 위해 훈련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대개 사람 막대기와 인생 채찍으로 우리를 훈련하십니다(삼하 7:14). 하나님은 1:1 목자님이나 팀 목자님을 통해 우리를 훈련하십니다. 또는 바로와 같은 직장의 상사나 내면 투쟁케 하는 동역자나 양을 통해서도 훈련하십니다. 또한 하나님은 인생의 시련과 환란을 통해서도 훈련하십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또 하나님의 구속역사에 귀하게 쓰시기 위해 훈련하십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이스라엘의 구원자로 쓰시기 위해 40년간 광야에서 양치는 훈련을 시키셨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을 이스라엘의 목자요 왕으로 쓰시기 위해 17년 간이나 사울왕에게 쫓겨다니는 훈련을 시키셨습니다. 야곱도 삼촌의 훈련을 받았고, 요셉도 노예 훈련, 감옥 훈련을 받았습니다.

  그럼 우리가 하나님의 훈련을 어떠한 자세로 받아야 할까요? 8절을 보십시오.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 6.25 동란 이후 거지로 지내다가 미국으로 입양 되 미국 상원의원까지 된 신호범 박사라는 분이 있습니다. 이분은 미국 내 입양아들을 돕는 일을 하고 있는데 한번은 시애틀에 사는 부부에게서 도와달라는 전화가 왔습니다. 열 다섯 살 된 한국 소년을 입양했는데 아무리 잘 해줘도 겉돌기만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신 박사는 농구선수인 그 아이를 찾아가 아이의 어려움과 불만을 들어주었습니다. 그런데 피터라는 이 아이는 눈물을 흘리며 가족들이 자기를 가족 대우를 하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그 집 아이들은 겨우 일곱 살과 네 살 밖에 안 됐는데도 일을 시키고 말을 안 들으면 때리면서도 나한테는 손님처럼 대접만 하는데 어떻게 내가 그 집 자식입니까”라고 말했습니다. 신 박사는 그의 양부모에게 피터의 마음을 말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농구장에 갔더니 피터가 웃으며 말했습니다. “닥터 신!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세요? 어제 우리 아버지가 나를 때렸어요. 내가 아버지한테 맞았다니까요? 하하하”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훈련이 없으면 우리는 사생자요 아버지의 참 아들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훈련이 없는 사람은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주시는 훈련을 받을 때 감사한 마음으로 받아야 하겠습니다.

  또 우리가 하나님의 훈련을 받을 때 공경함으로 순종하는 자세를 가져야 하겠습니다. 9,10절을 보십시오. “또 우리 육체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거든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여 살려 하지 않겠느냐? 저희는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예케 하시느니라” 우리의 육신의 아버지는 자녀가 바르게 자라도록 책망을 합니다. 그러나 때로는 아버지도 연약한 인간인지라 자기 꿈과 감정에 기초하여 자녀를 징계하여 자녀에게 상처를 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근본적으로 아버지의 사랑을 확신하기 때문에 아버지를 공경합니다. 우리의 하나님은 연약한 육신의 아버지와는 달리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참예 하도록 우리를 징계하십니다. 즉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거룩하신 성품을 덧입도록 훈련하는 것입니다. 거지에게는 왕도와 품격이 필요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 즉 하나님의 황태자요 황공주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거룩하신 성품을 닮도록 훈련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훈련을 받을 때 하나님을 공경함으로 순종하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닮는 영적 투쟁을 해야 하겠습니다.

  11절을 보십시오.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달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나니” 사실 우리가 하나님의 훈련의 의미를 알지만 막상 훈련을 받게 되면 훈련이 그렇게 즐거워 보이지만은 않습니다. 또 때로는 훈련받는 자신이 슬퍼 보일 때도 있습니다. 어떤 분은 “왜 나만 훈련을 주는 거야” 라고 하고, “난 목자님께 찍혔어”라고 생각하는 분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훈련은 힘든 것입니다. 훈련이 힘들지 않으면 훈련이 안됩니다. 어린 아이들도 키가 자랄 때 성장통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훈련을 인내로 감당하여 연달한 자가 되면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게 됩니다. 의의 평강한 열매는 하나님의 종으로서 성숙한 믿음과 내면성을 소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구별하여 순종할 줄 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참 맛을 알게 되며, 세상의 잔재미가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하나님 나라의 평강을 누리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구약 성경에 나오는 야곱은 갖고 싶은 것은 속임수를 써서라도 반드시 차지하고 마는 사기꾼과 같은 사람이요 바늘에 찔려도 피 한 방울 나지 않는 강한 인간성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믿음의 3대 조상으로 세우셨지만 강한 인간성 때문에 야곱은 하나님께 쓰임 받을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20년 동안 삼촌댁에서 머슴살이와 처가살이를 하게 하심으로 그의 강한 인간성을 깨뜨리고 하나님의 거룩한 내면성을 갖도록 훈련하셨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쉽게 변화되지 않았습니다. 결국 야곱은 얍복 강가에서 하나님과 씨름하다가 하나님께 맞아 환도뼈가 부러진 후에야 이스라엘로 변화되었습니다. 변화된 후, 야곱은 자신이 낳은 12 아들에게 믿음으로 하나님의 축복을 계승하여 이스라엘 12 지파의 기초를 세우는 은혜를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 성경읽기선교회는 훈련받는 제자들의 모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한국과 세계의 캠퍼스 지성인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구원하고 그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훈련하는 사명을 주셨습니다. 우리 선배님들은 우리 모임을 영적 사관학교라 부르며 자부심을 가지고 하나님의 훈련을 받았고, 또한 훈련을 했습니다. 우리 선배님들은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절대적으로 순종하는 훈련을 받았습니다. 우리 모임이 훈련받는 모임이라는 것이 제자선서에 잘 나와 있습니다. “하나, 나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군이다.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변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쓴다. 하나, 나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군이다. 성서 한국과 세계 선교를 위해 자신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한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종로 센타에 자매님 소감모임이 있는 날이었습니다. 그런데 한 자매님이 몸이 아파 팀 목자님께 전화를 해서 오늘은 좀 쉬었으면 좋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팀 목자님은 “기어갈 힘이라도 있으면 나오세요” 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이 말을 듣고 그 자매님은 자기를 부인하고 순종하여 센타에 나와 소감모임에 참석했는데 이분이 후에 헌신적인 자매 목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경성 센타의 서제임스 목자님의 일화도 유명합니다. 목자님이 레지던트 시절에 양과 새벽 5시에 병원에서 1:1성경 공부를 약속했습니다. 그런데 그날 눈이 몹시 내렸습니다. 목자님은 ‘오늘 같이 눈이 오는 날 양이 성경 공부하러 올 리가 없지’라고 생각하고 가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그러다가 양이 오지 않더라도 목자는 가서 기다려야 하지 않는가 라는 생각이 들어 택시를 타고 병원으로 가고자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택시가 오는데 보니 그 곳에는 그 양이 타고 있었습니다. 두 사람은 같이 타고 가서 신나게 말씀 공부를 했다고 합니다. 이런 훈련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 성경읽기선교회는 캠퍼스에서 복음운동을 이끌어 왔고 오늘과 같은 세계 선교 기관이 될 수 있었습니다. 우리 모임이 앞으로 40년간 10만명의 선교사를 파송하려면 변함없이 제자를 훈련하는 영적 사관학교가 되어야 합니다. 무엇보다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훈련을 경외함으로 받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훈련을 사모함으로 받아 성숙한 하나님의 종으로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게 될 때 하나님은 우리 모임을 앞으로도 귀하게 쓰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훈련을 사랑하는 마음을 주시길 기도합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오늘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믿음의 목표가 예수님이신 것을 배웠습니다. 특히 우리가 믿음의 경주를 하며 지치고 포기하고 싶을 때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신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하는 것을 배웠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를 아들로 사랑하시기 때문에 훈련하신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저희가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고 2003년 봄 학기 믿음의 경주를 힘차게 달려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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