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마25강(19장)/영생을 얻으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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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마태복음 제 25 강
말씀/마태복음 19:1-30
요절/마태복음 19:21
영생을 얻으려면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
지난 주 우리는 천국에서 진정으로 큰 자가 어떤 자인가 배웠습니다. 어린 아이처럼 겸손하게 자기를 낮추고, 믿음이 어린 소자 하나를 예수님처럼 대하고, 형제를 용서하는 사람이 진정으로 위대한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배우는 사람은 위대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행복한 결혼과 영생에 관한 말씀입니다. 요즈음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결혼 진리가 땅에 떨어지고 이혼이 급증하고 있습니다. 미국에서는 심지어 동성 결혼까지 옳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45%나 된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없는 사람들은 결국 이혼을 넘어 동성애자가 되고 동성 결혼까지 주장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 다음은 멸망 밖에 남은 것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시대 젊은이들에게 결혼에 대한 성경적인 가치관을 분명히 가르치고 거룩한 백성이요 제사장 나라가 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결혼의 진리는 무엇입니까?
우리는 후반부에서 영생을 얻기 원하는 부자 청년에게 영적 세계의 비밀을 가르쳐 주시는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부자 청년과 같이 눈에 보이는 것은 추구하지만 진정으로 가치 있는 일을 위해서 자신을 투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영생입니다. 영생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러나 이 청년은 자기의 노력을 통해서 영생을 얻기를 원했습니다. 왜 이 부자 청년이 영생을 얻기 원했는지 공부해 봅시다.
I. 행복한 결혼의 의미(1-12)
예수님께서 갈릴리에서 떠나 요단 강 건너 유대 지경에 이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를 떠나 예루살렘에 입성하기까지의 사역을 베뢰아 전도라고 부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심으로 인류 구속 역사를 이루고자 예루살렘으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자신의 문제가 심각할 때 남을 돌본다는 것은 힘든 일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기를 따르는 큰 무리 가운데서 병든 자들을 고쳐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은혜와 긍휼이 풍성하신 목자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은혜로운 사역을 감당하고 계실 때 바리새인들이 나아와 그를 시험했습니다. “사람이 아무 연고를 물론하고 그 아내를 내어 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3) 그들의 질문이 어떤 점에서 예수님께 시험이 될까요? 만일 예수님이 모세의 법에 따라 이혼하는 것이 옳다 하면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서로 사랑하라는 가르침과 모순이 됩니다. 만일 옳지 않다 하면 모세의 법을 어기게 됩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이혼율이 급증하고 있습니다. 정확한 통계로는 47.8%라고 합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이혼이 사회 문제였는데 바리새인들은 이혼에 대한 관심이 많이 있었습니다. 학자들은 이 부분의 제목을 이혼으로 잡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혼보다 행복한 결혼의 의미에 대해서 생각해 보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대답하셨습니다. “사람을 지으신 이가 본래 저희를 남자와 여자로 만드시고 말씀하시기를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하신 것을 읽지 못하였느냐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워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4-6).”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하실 때 남자만 창조하시지 않고 남자와 여자를 만드사 조화있게 하셨습니다. 세상에 남자만 있다면 매우 삭막할 것입니다. 반대로 여자만 있다면 얼마나 시끄럽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남자와 여자를 만드사 사랑이 넘치고 풍성하게 하셨습니다. 또한 그들의 결혼을 축복하기 위해서 세상과 인간을 만드셨습니다. 대개 부모들은 자기의 자녀들을 가장 사랑하고 영원히 자기 소유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열심히 일해서 자녀들에게 투자를 합니다. 부모들은 자기 자녀들에게 큰 기대를 걸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이들이 자라서 학업을 마치고 나면 장래 자신들의 아름다운 결혼에 대해서만 생각을 합니다. 부모들은 아이들을 떠나보낼 준비를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고 하셨습니다. 결혼은 하나님께서 창설하신 것이므로 신성하고 거룩하고 고결합니다. 하나님께서 결혼을 창설하시되 창조의 주권에 기초하여 창설하셨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변개할 수 없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 부시 대통령은 “결혼은 남자와 여자가 하는 것이다”라고 선언했습니다. 미국 사회에 기본적인 결혼의 진리마저도 무너져 내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결혼은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하나님 안에서 하나 되는 연합의 뜻이 있습니다. 여기서 연합은 육신의 연합뿐만 아니라 인격의 연합, 정신적 연합, 더 나아가 영적 연합을 의미합니다. 결혼을 하게 되면 육적으로나 영적으로 이제는 둘이 아니요 한 몸이 됩니다. 둘이 한 몸이 된다는 것은 참으로 신비로운 일입니다. 결혼한 부부들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얼굴도 닮아갑니다.
6절을 다시 보십시오. “하나님이 짝 지워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우리는 여기서 이혼은 절대 불가능함을 볼 수 있습니다. 결혼은 하나님께서 창설하신 것입니다. 결혼은 하나님이 정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결혼을 축복하셨습니다. 결혼은 우연히 서로 만나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결혼은 하나님의 창조역사의 초점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짝 지워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결혼은 행복한 사건입니다. 결혼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섭리 가운데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번에 결혼 회사에서 맞춤형 결혼을 한 부부가 3개월 만에 이혼했다고 합니다. 인간조건만보고 결혼할 때 비극적인 결과를 맞게 됩니다. 우리가 믿음을 중요시 여겨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서 믿음의 결혼을 하고 거룩한 가정 교회를 이루어야 합니다. 믿음으로 결합한 두 사람에게는 불가능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해서 결혼 진리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이 진리를 영접치 않고 계속해서 예수님을 공격했습니다. “그러하면 어찌하여 모세는 이혼 증서를 주어서 내어 버리라 명하였나이까?”(7) 모세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의 노예 생활에 젖어 감정적이고 육신적이었습니다. 그들은 여자들을 정욕의 대상이나 노예와 같은 소유물처럼 취급을 하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고물을 버리듯이 내어버렸습니다. 모세는 이런 무책임한 남자로부터 여자의 권리를 보호하고 이혼을 방지하기 위해서 여인에게서 수치되는 일이 발견될 때만 이혼증서를 써 주도록 허락했습니다(신24:1). 8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가라사대 모세가 너희 마음의 완악함을 인하여 아내 내어 버림을 허락하였거니와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실 때, 노예와 같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목자 모세의 슬픔과 고뇌를 깊이 이해하시고 예수님은 우셨습니다. 마음이 완악하다는 말은 거칠고 잔인하고 완고한 마음을 뜻합니다. 당시에 자유주의 학자들은 이혼의 사유를 광범위하게 적용시켰습니다. 예를 들어 아내가 자식을 낳지 못한다든지, 밥을 태운다든지, 요리를 잘 못하는 것도 수치스러운 일이라고 하여 이혼 조건으로 삼았습니다. 율법은 사람의 죄악된 본성을 제어하기 위해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본성이 변화되지 않는 한 사람들은 오히려 법을 이용하여 합법적으로 죄를 지었습니다. 이를 볼 때 법이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완악함이 문제입니다. 완악한 마음이 변화되어야만 법을 올바로 지킬 수 있습니다.
9절을 보십시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연고 외에 아내를 내어 버리고 다른 데 장가드는 자는 간음함이니라.”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제자들의 반응이 어떠했습니까? “만일 사람이 아내에게 이같이 할진대 장가들지 않는 것이 좋삽나이다(10).”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믿음이 없고 아직 결혼할 믿음도 없었습니다. 또 한 가정을 책임질 믿음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마음에도 안드는 여자와 결혼하여 일생 마음고생하며 살 바에야 차라리 결혼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들에게 독신으로 사는 것도 마음대로 할 수 없고 하나님의 뜻이 있어야 함을 가르쳐 주셨습니다(11,12).
13절을 보십시오. “때에 사람들이 예수의 안수하고 기도하심을 바라고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꾸짖거늘” 예수님과 제자들이 행복한 결혼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있을 때 갑자기 아이들이 그들 주위로 모여들어서 시끄럽게 했습니다. 아마 결혼 문제로 심각했던 안드레와 빌립이 그들을 꾸짖었을 것입니다. “너희 어린애들은 가! 꺼져! 꺼지라니까!”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어린아이들을 용납하고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 천국이 이런 자의 것이니라 하시고 저희 위에 안수하시고 거기서 떠나시니라.” 결혼 문제가 심각한 그들은 어린 아이와 같이 순수해져야만 합니다.
II. 부자 청년과 영생(16-30)
예수님께서 길을 가실 때에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나아와 물었습니다.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16)” 그는 어떤 사람입니까? 그는 청년이었고 부자였습니다. 게다가 관원이었습니다(눅18:18). 그는 사회적인 지위와 권세를 얻었습니다. 대개 부와 권세와 명예를 가지고 있으면 그것을 유지하고자 무진 애를 쓰고, 타락하기 쉬운데 그는 선을 추구했습니다. 그는 계명을 흠이 없이 지킬 만큼 도덕적으로 깨끗하고 선한 생활을 했습니다. 이 사람은 모든 것을 다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행복해야 마땅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돈으로 행복을 살 수 없었습니다. 그가 자신의 인생에 대해서 생각할 때 아무 것도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는 생존을 위해서 투쟁하는 가난한 사람들이 부러웠습니다. 그들은 애국심으로 충만했습니다. 그런데 자신은 부와 명예를 지키기 위해서 원수같은 로마에 대해서 뜨뜻미지근한 자세를 취하였습니다. 노인과 바다에 나오는 그 어부처럼 인생의 참된 의미를 찾지 못했습니다. 지식으로도 공허감을 채울 수 없었습니다. 그는 종교적인 열심으로도 하나님의 평화를 맛볼 수 없었습니다. 그는 자신 안에 풍성한 생명이 없음을 느꼈습니다. 마귀는 그의 절망을 통하여 들어오고 거의 정신병자가 되게 했습니다. 의미없는 인생, 자살 시도 등 그를 괴롭히는 것들에서 그나마 부와 명예는 바람막이가 되었습니다. 우리 나라 대 그룹의 회장이 얼마 전에 자살을 하였습니다. 부와 명예가 그를 구원할 수 없었습니다. 이 부자 청년은 예수님에게서 뭔가 다른 것이 있음을 느끼고 영적 진리를 찾고자 나아왔습니다.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님은 그의 질문에 무엇이라고 대답하셨습니까? 17a절을 보십시오.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그의 선에 대한 상대적인 개념을 바로 잡아 주고자 하신 것입니다. “선이란 무엇인가?” 이는 인류 역사 이래로 끊임없이 물어온 질문입니다. 힘 있는 자들은 “약한 것은 악이고 힘이 곧 선이다”라고 정의했습니다. 또 예술가들은 “아름다운 것은 선이고 추한 것은 악이다”라고 생각했습니다. 실용주의자들은 “내게 유익이 되는 것이 선이고 나에게 해가 되는 것은 악이다”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개념에 불과합니다. 선이란 절대적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선한 이는 오직 하나님 한 분이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은 지고의 선으로서 모든 선의 절대 표준이 되는 선 그 자체가 되심을 의미합니다. 또한 인간은 근본적으로 선하지 못함을 말해 줍니다. 성경은 세상에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롬3:10).”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범죄함으로 지고의 선이신 하나님으로부터 이탈되어 선을 상실하게 되었습니다. 또 선을 행하고자 하는 선의지는 있으나 선을 행할 능력을 상실하게 되었습니다(롬7:18). 인간이 아무리 선한 일을 많이 한다할지라도 이는 어디까지나 상대적으로 비교해서 선할 뿐, 근본적으로 하나님 앞에서는 선할 수 없습니다. 부자 청년은 선을 도덕적인 차원에서 생각하고 선을 행하면 그 대가로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을 선하다고 생각하고 자기 의가 강합니다. 그들은 자신이 죄인됨을 깊이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복음을 잘 영접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부자 청년의 선의 개념을 바로 잡아 주신 후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고 하셨습니다. 이 청년은 어느 계명을 지켜야 하느냐고 물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 증거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18,19).” 예수님은 십계명 중에서 제 5계명에서 9계명까지 말하고 마지막으로 레19:18절 말씀을 덧붙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이웃 사랑을 말씀하신 것은 특별히 청년이 가지고 있던 외적 선행에 대한 ‘자만’을 지적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가 도덕주의자였기 때문에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 대한 율법만 언급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큰 죄에서부터 작은 죄로 또한 소극적으로 죄를 안 짓는 데서 적극적으로 선을 행해야 하는 것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이 청년의 대답이 무엇입니까?
20절을 보십시오. “그 청년이 가로되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오니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 그의 말을 볼 때 몰라도 한참 모르는 사람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말씀을 깊이 공부하지 않았고 형식적이고 의식적인 신앙생활을 해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가운데 이웃 사랑에 대해서 죄의식을 느끼지 않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이웃 사랑은 권면 사항이 아니라 복종해야 할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의를 주장하는 그에게 무엇이라 말씀하셨습니까? 21절을 보십시오.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이것은 부자 청년에게 큰 도전이었습니다. 이 말씀에서 예수님께서 부자 청년에게 가르쳐 주고자 하시는 바가 무엇입니까?
첫째로, 계명의 정신을 지키도록 하셨습니다. 그는 계명의 외적인 규례는 어느 정도 지켰으나 그 근본정신을 실천하지 못했습니다. 십계명의 근본정신은 사랑입니다. 그의 마음에는 사랑이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가 잘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신앙생활이란 소극적으로 죄 안 짓고 예배 출석 잘하고 헌금 하는 정도가 아닙니다. 신앙생활은 적극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자기부인과 희생이 필요합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는 생활이 곧 말씀에 순종하는 생활입니다. 그는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자아를 합리화할 만큼만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이기적인 죄인이었습니다.
둘째, 하나님 나라에 소망을 두도록 하였습니다. 부자 청년의 치명적인 약점은 재물에 소망을 두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재물은 그에게 우상이었습니다. 돈은 이상한 마력을 지니고 있어서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놀라운 힘이 있습니다. 그는 돈 맛을 알게 되자 점점 재물을 사랑하게 되고 재물에 소망을 두게 되었습니다. 그는 영생을 갈구했지만 땅의 것에 소망을 두었습니다. 예수님은 그가 세상 소망을 끊고 하나님 나라의 산 소망을 갖도록 도우셨습니다. 그래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고 도전하셨습니다. 마귀는 세상 보화가 인간에게 구원을 준다고 속삭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뿐인 마음을 세상 보화에 붙들어 놓음으로써 하나님을 떠나 세상 것에 미치게 합니다. 우리에게 재물과 명예, 권세, 예술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필요를 위해 이런 것들을 공급해 주십니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하나님 보다 더 사랑하게 되면 그것은 팔아버려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는 세상 보화가 진정한 보화를 얻는데 방해가 되기 때문입니다. 세상 보화는 일시적인 것으로서 우리에게 참된 의미와 생명을 주지 못합니다. 반면 하늘 보화는 어떠합니까? 하늘 보화는 영원하며 결코 쇠하거나 더러워지거나 없어지지 않습니다. 하늘 보화는 우리에게 참된 만족과 기쁨을 줍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평화를 주고 무엇보다도 영생을 줍니다. 하늘 보화는 우리가 진정으로 추구해야 할 참 보화입니다.
셋째, 나를 좇으라. 예수님께서 본질적으로 말씀하신 내용은 바로 이것입니다. “와서 나를 좇으라.” 예수님을 좇지 않고는 영생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부자 청년이 그 분을 좇아가는 일을 가로막는 장애 요소에 대해서 개입하십니다. 이 젊은 청년이 주님을 따라가는 것을 가로막았던 요인은 재물이었습니다. 재물이 그에게는 하나님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모든 것을 팔아 좇을 만한 참 보화가 되십니다. 성 프란시스는 예수님을 얻기 위해서 모든 세상 보화를 판 좋은 예입니다. 모세는 애굽 제국의 왕자로서 많은 세상 보화를 누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 안에서 참된 보화를 보았기 때문에 바로의 공주의 아들로서 누릴 수 있는 모든 특권과 영화를 초개같이 버리고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 보다 더 좋아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귀히 쓰신 사람들은 한결같이 하늘 보화를 얻기 위해 세상 보화를 판 이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늘 보화가 얼마나 귀한가를 알기 때문에 세상 보화를 파는 것을 조금도 아까와 하거나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오히려 영광스럽게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을 위해 조금 희생하고 나서 손해의식을 느끼고 인상을 쓰거나 자기 소유를 파는 것을 아까와 하고 주저하는 사람은 아직도 참 보화 되신 예수님을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참 보화가 되십니다. 그 안에 생명이 있습니다(요1:4). 그 안에 참 자유가 있습니다(요8:26). 진리가 있습니다(요14:6). 그 안에 죄사함의 은혜가 있습니다(골1:14). 그 안에 죽음의 권세도 이기는 승리가 있습니다(고전15:27). 그 안에 산 소망이 있습니다(벧전1:3,4). 그 안에 진정한 사랑이 있습니다. 이 예수님을 소유한 사람은 모든 것을 소유한 가장 부요한 자입니다.
“모든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에게 주라”고 하자 청년의 반응이 어떠합니까? 22절을 보십시오.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 근심이란 헬라어로 뤼페오(λυπεω)로서 ‘마음이 상할 정도로 슬퍼하다, 고통스러워하다’는 뜻입니다. 부자 청년은 예수님의 말씀을 못마땅해 하며 얼굴을 찡그리고 돌아갔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약속보다 재물을 택했습니다. 오늘날 많은 젊은이들이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임을 압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보다도 돈을 더 사랑합니다. 이는 그들이 물질주의에 병들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부자 청년이 돈을 사랑하여 영원한 파멸의 길을 택하는 것을 보고 슬프셨습니다.
23,24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이 말씀은 한마디로 재물에 소망을 두는 자는 구원을 얻기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듣고 심히 놀라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까?(25)”라고 말했습니다. 그들에게는 주님을 따르면 언젠가는 부자가 되리라는 희망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부자가 구원을 얻을 수 없다면 과연 우리의 미래는 무엇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밤낮으로 돈버는 일에 대해서 생각하고 어떻게 그것을 보존하고 재투자해서 이익을 많이 남길 것인가를 생각합니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 시간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물질중심적인 그들의 마음을 너무나 잘 아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그러나 예수님은 놀라는 제자들에게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할 수 있느니라(26)”고 말씀하셨습니다.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것 뿐 아니라 믿음의 성장도 마찬가지입니다. 오기드온목자님이 변화된 것은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곽누가목자님이 두려움과 인생의 허무에서 구원받은 것도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27절을 보십시오. 이에 베드로가 말했습니다.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사오니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 예수님은 이런 그들에게 영광스러운 약속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28,29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좇는 너희도 열 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 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 이 말씀은 주와 복음을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한 자는 반드시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게 됩니다. 주님을 위해서 버린 것이 없는 사람은 주님께 받을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함께 고난을 받는 자는 장차 예수님과 함께 영광을 누리게 됩니다. 예수님과 함께 영원토록 왕노릇 하게 됩니다. 또 이 세상에서도 영육간에 여러 배의 축복을 받고 영생을 상속받게 됩니다.
그러나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될 수 있음으로 조심해야 합니다. 항상 허리를 굽히고 겸손하게 예수님을 좇아야 합니다. 교만은 금물입니다. 우리 모두 세상 보화를 팔고 진정한 보화되신 예수님을 좇음으로 영생을 소유하기를 기도합니다.
말씀/마태복음 19:1-30
요절/마태복음 19:21
영생을 얻으려면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
지난 주 우리는 천국에서 진정으로 큰 자가 어떤 자인가 배웠습니다. 어린 아이처럼 겸손하게 자기를 낮추고, 믿음이 어린 소자 하나를 예수님처럼 대하고, 형제를 용서하는 사람이 진정으로 위대한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배우는 사람은 위대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행복한 결혼과 영생에 관한 말씀입니다. 요즈음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결혼 진리가 땅에 떨어지고 이혼이 급증하고 있습니다. 미국에서는 심지어 동성 결혼까지 옳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45%나 된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없는 사람들은 결국 이혼을 넘어 동성애자가 되고 동성 결혼까지 주장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 다음은 멸망 밖에 남은 것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시대 젊은이들에게 결혼에 대한 성경적인 가치관을 분명히 가르치고 거룩한 백성이요 제사장 나라가 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결혼의 진리는 무엇입니까?
우리는 후반부에서 영생을 얻기 원하는 부자 청년에게 영적 세계의 비밀을 가르쳐 주시는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부자 청년과 같이 눈에 보이는 것은 추구하지만 진정으로 가치 있는 일을 위해서 자신을 투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영생입니다. 영생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러나 이 청년은 자기의 노력을 통해서 영생을 얻기를 원했습니다. 왜 이 부자 청년이 영생을 얻기 원했는지 공부해 봅시다.
I. 행복한 결혼의 의미(1-12)
예수님께서 갈릴리에서 떠나 요단 강 건너 유대 지경에 이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를 떠나 예루살렘에 입성하기까지의 사역을 베뢰아 전도라고 부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심으로 인류 구속 역사를 이루고자 예루살렘으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자신의 문제가 심각할 때 남을 돌본다는 것은 힘든 일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기를 따르는 큰 무리 가운데서 병든 자들을 고쳐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은혜와 긍휼이 풍성하신 목자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은혜로운 사역을 감당하고 계실 때 바리새인들이 나아와 그를 시험했습니다. “사람이 아무 연고를 물론하고 그 아내를 내어 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3) 그들의 질문이 어떤 점에서 예수님께 시험이 될까요? 만일 예수님이 모세의 법에 따라 이혼하는 것이 옳다 하면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서로 사랑하라는 가르침과 모순이 됩니다. 만일 옳지 않다 하면 모세의 법을 어기게 됩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이혼율이 급증하고 있습니다. 정확한 통계로는 47.8%라고 합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이혼이 사회 문제였는데 바리새인들은 이혼에 대한 관심이 많이 있었습니다. 학자들은 이 부분의 제목을 이혼으로 잡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혼보다 행복한 결혼의 의미에 대해서 생각해 보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대답하셨습니다. “사람을 지으신 이가 본래 저희를 남자와 여자로 만드시고 말씀하시기를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하신 것을 읽지 못하였느냐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워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4-6).”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하실 때 남자만 창조하시지 않고 남자와 여자를 만드사 조화있게 하셨습니다. 세상에 남자만 있다면 매우 삭막할 것입니다. 반대로 여자만 있다면 얼마나 시끄럽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남자와 여자를 만드사 사랑이 넘치고 풍성하게 하셨습니다. 또한 그들의 결혼을 축복하기 위해서 세상과 인간을 만드셨습니다. 대개 부모들은 자기의 자녀들을 가장 사랑하고 영원히 자기 소유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열심히 일해서 자녀들에게 투자를 합니다. 부모들은 자기 자녀들에게 큰 기대를 걸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이들이 자라서 학업을 마치고 나면 장래 자신들의 아름다운 결혼에 대해서만 생각을 합니다. 부모들은 아이들을 떠나보낼 준비를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고 하셨습니다. 결혼은 하나님께서 창설하신 것이므로 신성하고 거룩하고 고결합니다. 하나님께서 결혼을 창설하시되 창조의 주권에 기초하여 창설하셨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변개할 수 없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 부시 대통령은 “결혼은 남자와 여자가 하는 것이다”라고 선언했습니다. 미국 사회에 기본적인 결혼의 진리마저도 무너져 내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결혼은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하나님 안에서 하나 되는 연합의 뜻이 있습니다. 여기서 연합은 육신의 연합뿐만 아니라 인격의 연합, 정신적 연합, 더 나아가 영적 연합을 의미합니다. 결혼을 하게 되면 육적으로나 영적으로 이제는 둘이 아니요 한 몸이 됩니다. 둘이 한 몸이 된다는 것은 참으로 신비로운 일입니다. 결혼한 부부들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얼굴도 닮아갑니다.
6절을 다시 보십시오. “하나님이 짝 지워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우리는 여기서 이혼은 절대 불가능함을 볼 수 있습니다. 결혼은 하나님께서 창설하신 것입니다. 결혼은 하나님이 정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결혼을 축복하셨습니다. 결혼은 우연히 서로 만나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결혼은 하나님의 창조역사의 초점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짝 지워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결혼은 행복한 사건입니다. 결혼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섭리 가운데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번에 결혼 회사에서 맞춤형 결혼을 한 부부가 3개월 만에 이혼했다고 합니다. 인간조건만보고 결혼할 때 비극적인 결과를 맞게 됩니다. 우리가 믿음을 중요시 여겨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서 믿음의 결혼을 하고 거룩한 가정 교회를 이루어야 합니다. 믿음으로 결합한 두 사람에게는 불가능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해서 결혼 진리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이 진리를 영접치 않고 계속해서 예수님을 공격했습니다. “그러하면 어찌하여 모세는 이혼 증서를 주어서 내어 버리라 명하였나이까?”(7) 모세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의 노예 생활에 젖어 감정적이고 육신적이었습니다. 그들은 여자들을 정욕의 대상이나 노예와 같은 소유물처럼 취급을 하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고물을 버리듯이 내어버렸습니다. 모세는 이런 무책임한 남자로부터 여자의 권리를 보호하고 이혼을 방지하기 위해서 여인에게서 수치되는 일이 발견될 때만 이혼증서를 써 주도록 허락했습니다(신24:1). 8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가라사대 모세가 너희 마음의 완악함을 인하여 아내 내어 버림을 허락하였거니와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실 때, 노예와 같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목자 모세의 슬픔과 고뇌를 깊이 이해하시고 예수님은 우셨습니다. 마음이 완악하다는 말은 거칠고 잔인하고 완고한 마음을 뜻합니다. 당시에 자유주의 학자들은 이혼의 사유를 광범위하게 적용시켰습니다. 예를 들어 아내가 자식을 낳지 못한다든지, 밥을 태운다든지, 요리를 잘 못하는 것도 수치스러운 일이라고 하여 이혼 조건으로 삼았습니다. 율법은 사람의 죄악된 본성을 제어하기 위해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본성이 변화되지 않는 한 사람들은 오히려 법을 이용하여 합법적으로 죄를 지었습니다. 이를 볼 때 법이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완악함이 문제입니다. 완악한 마음이 변화되어야만 법을 올바로 지킬 수 있습니다.
9절을 보십시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연고 외에 아내를 내어 버리고 다른 데 장가드는 자는 간음함이니라.”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제자들의 반응이 어떠했습니까? “만일 사람이 아내에게 이같이 할진대 장가들지 않는 것이 좋삽나이다(10).”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믿음이 없고 아직 결혼할 믿음도 없었습니다. 또 한 가정을 책임질 믿음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마음에도 안드는 여자와 결혼하여 일생 마음고생하며 살 바에야 차라리 결혼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들에게 독신으로 사는 것도 마음대로 할 수 없고 하나님의 뜻이 있어야 함을 가르쳐 주셨습니다(11,12).
13절을 보십시오. “때에 사람들이 예수의 안수하고 기도하심을 바라고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꾸짖거늘” 예수님과 제자들이 행복한 결혼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있을 때 갑자기 아이들이 그들 주위로 모여들어서 시끄럽게 했습니다. 아마 결혼 문제로 심각했던 안드레와 빌립이 그들을 꾸짖었을 것입니다. “너희 어린애들은 가! 꺼져! 꺼지라니까!”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어린아이들을 용납하고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 천국이 이런 자의 것이니라 하시고 저희 위에 안수하시고 거기서 떠나시니라.” 결혼 문제가 심각한 그들은 어린 아이와 같이 순수해져야만 합니다.
II. 부자 청년과 영생(16-30)
예수님께서 길을 가실 때에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나아와 물었습니다.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16)” 그는 어떤 사람입니까? 그는 청년이었고 부자였습니다. 게다가 관원이었습니다(눅18:18). 그는 사회적인 지위와 권세를 얻었습니다. 대개 부와 권세와 명예를 가지고 있으면 그것을 유지하고자 무진 애를 쓰고, 타락하기 쉬운데 그는 선을 추구했습니다. 그는 계명을 흠이 없이 지킬 만큼 도덕적으로 깨끗하고 선한 생활을 했습니다. 이 사람은 모든 것을 다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행복해야 마땅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돈으로 행복을 살 수 없었습니다. 그가 자신의 인생에 대해서 생각할 때 아무 것도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는 생존을 위해서 투쟁하는 가난한 사람들이 부러웠습니다. 그들은 애국심으로 충만했습니다. 그런데 자신은 부와 명예를 지키기 위해서 원수같은 로마에 대해서 뜨뜻미지근한 자세를 취하였습니다. 노인과 바다에 나오는 그 어부처럼 인생의 참된 의미를 찾지 못했습니다. 지식으로도 공허감을 채울 수 없었습니다. 그는 종교적인 열심으로도 하나님의 평화를 맛볼 수 없었습니다. 그는 자신 안에 풍성한 생명이 없음을 느꼈습니다. 마귀는 그의 절망을 통하여 들어오고 거의 정신병자가 되게 했습니다. 의미없는 인생, 자살 시도 등 그를 괴롭히는 것들에서 그나마 부와 명예는 바람막이가 되었습니다. 우리 나라 대 그룹의 회장이 얼마 전에 자살을 하였습니다. 부와 명예가 그를 구원할 수 없었습니다. 이 부자 청년은 예수님에게서 뭔가 다른 것이 있음을 느끼고 영적 진리를 찾고자 나아왔습니다.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님은 그의 질문에 무엇이라고 대답하셨습니까? 17a절을 보십시오.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그의 선에 대한 상대적인 개념을 바로 잡아 주고자 하신 것입니다. “선이란 무엇인가?” 이는 인류 역사 이래로 끊임없이 물어온 질문입니다. 힘 있는 자들은 “약한 것은 악이고 힘이 곧 선이다”라고 정의했습니다. 또 예술가들은 “아름다운 것은 선이고 추한 것은 악이다”라고 생각했습니다. 실용주의자들은 “내게 유익이 되는 것이 선이고 나에게 해가 되는 것은 악이다”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개념에 불과합니다. 선이란 절대적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선한 이는 오직 하나님 한 분이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은 지고의 선으로서 모든 선의 절대 표준이 되는 선 그 자체가 되심을 의미합니다. 또한 인간은 근본적으로 선하지 못함을 말해 줍니다. 성경은 세상에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롬3:10).”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범죄함으로 지고의 선이신 하나님으로부터 이탈되어 선을 상실하게 되었습니다. 또 선을 행하고자 하는 선의지는 있으나 선을 행할 능력을 상실하게 되었습니다(롬7:18). 인간이 아무리 선한 일을 많이 한다할지라도 이는 어디까지나 상대적으로 비교해서 선할 뿐, 근본적으로 하나님 앞에서는 선할 수 없습니다. 부자 청년은 선을 도덕적인 차원에서 생각하고 선을 행하면 그 대가로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을 선하다고 생각하고 자기 의가 강합니다. 그들은 자신이 죄인됨을 깊이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복음을 잘 영접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부자 청년의 선의 개념을 바로 잡아 주신 후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고 하셨습니다. 이 청년은 어느 계명을 지켜야 하느냐고 물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 증거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18,19).” 예수님은 십계명 중에서 제 5계명에서 9계명까지 말하고 마지막으로 레19:18절 말씀을 덧붙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이웃 사랑을 말씀하신 것은 특별히 청년이 가지고 있던 외적 선행에 대한 ‘자만’을 지적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가 도덕주의자였기 때문에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 대한 율법만 언급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큰 죄에서부터 작은 죄로 또한 소극적으로 죄를 안 짓는 데서 적극적으로 선을 행해야 하는 것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이 청년의 대답이 무엇입니까?
20절을 보십시오. “그 청년이 가로되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오니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 그의 말을 볼 때 몰라도 한참 모르는 사람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말씀을 깊이 공부하지 않았고 형식적이고 의식적인 신앙생활을 해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가운데 이웃 사랑에 대해서 죄의식을 느끼지 않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이웃 사랑은 권면 사항이 아니라 복종해야 할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의를 주장하는 그에게 무엇이라 말씀하셨습니까? 21절을 보십시오.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이것은 부자 청년에게 큰 도전이었습니다. 이 말씀에서 예수님께서 부자 청년에게 가르쳐 주고자 하시는 바가 무엇입니까?
첫째로, 계명의 정신을 지키도록 하셨습니다. 그는 계명의 외적인 규례는 어느 정도 지켰으나 그 근본정신을 실천하지 못했습니다. 십계명의 근본정신은 사랑입니다. 그의 마음에는 사랑이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가 잘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신앙생활이란 소극적으로 죄 안 짓고 예배 출석 잘하고 헌금 하는 정도가 아닙니다. 신앙생활은 적극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자기부인과 희생이 필요합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는 생활이 곧 말씀에 순종하는 생활입니다. 그는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자아를 합리화할 만큼만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이기적인 죄인이었습니다.
둘째, 하나님 나라에 소망을 두도록 하였습니다. 부자 청년의 치명적인 약점은 재물에 소망을 두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재물은 그에게 우상이었습니다. 돈은 이상한 마력을 지니고 있어서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놀라운 힘이 있습니다. 그는 돈 맛을 알게 되자 점점 재물을 사랑하게 되고 재물에 소망을 두게 되었습니다. 그는 영생을 갈구했지만 땅의 것에 소망을 두었습니다. 예수님은 그가 세상 소망을 끊고 하나님 나라의 산 소망을 갖도록 도우셨습니다. 그래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고 도전하셨습니다. 마귀는 세상 보화가 인간에게 구원을 준다고 속삭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뿐인 마음을 세상 보화에 붙들어 놓음으로써 하나님을 떠나 세상 것에 미치게 합니다. 우리에게 재물과 명예, 권세, 예술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필요를 위해 이런 것들을 공급해 주십니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하나님 보다 더 사랑하게 되면 그것은 팔아버려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는 세상 보화가 진정한 보화를 얻는데 방해가 되기 때문입니다. 세상 보화는 일시적인 것으로서 우리에게 참된 의미와 생명을 주지 못합니다. 반면 하늘 보화는 어떠합니까? 하늘 보화는 영원하며 결코 쇠하거나 더러워지거나 없어지지 않습니다. 하늘 보화는 우리에게 참된 만족과 기쁨을 줍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평화를 주고 무엇보다도 영생을 줍니다. 하늘 보화는 우리가 진정으로 추구해야 할 참 보화입니다.
셋째, 나를 좇으라. 예수님께서 본질적으로 말씀하신 내용은 바로 이것입니다. “와서 나를 좇으라.” 예수님을 좇지 않고는 영생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부자 청년이 그 분을 좇아가는 일을 가로막는 장애 요소에 대해서 개입하십니다. 이 젊은 청년이 주님을 따라가는 것을 가로막았던 요인은 재물이었습니다. 재물이 그에게는 하나님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모든 것을 팔아 좇을 만한 참 보화가 되십니다. 성 프란시스는 예수님을 얻기 위해서 모든 세상 보화를 판 좋은 예입니다. 모세는 애굽 제국의 왕자로서 많은 세상 보화를 누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 안에서 참된 보화를 보았기 때문에 바로의 공주의 아들로서 누릴 수 있는 모든 특권과 영화를 초개같이 버리고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 보다 더 좋아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귀히 쓰신 사람들은 한결같이 하늘 보화를 얻기 위해 세상 보화를 판 이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늘 보화가 얼마나 귀한가를 알기 때문에 세상 보화를 파는 것을 조금도 아까와 하거나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오히려 영광스럽게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을 위해 조금 희생하고 나서 손해의식을 느끼고 인상을 쓰거나 자기 소유를 파는 것을 아까와 하고 주저하는 사람은 아직도 참 보화 되신 예수님을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참 보화가 되십니다. 그 안에 생명이 있습니다(요1:4). 그 안에 참 자유가 있습니다(요8:26). 진리가 있습니다(요14:6). 그 안에 죄사함의 은혜가 있습니다(골1:14). 그 안에 죽음의 권세도 이기는 승리가 있습니다(고전15:27). 그 안에 산 소망이 있습니다(벧전1:3,4). 그 안에 진정한 사랑이 있습니다. 이 예수님을 소유한 사람은 모든 것을 소유한 가장 부요한 자입니다.
“모든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에게 주라”고 하자 청년의 반응이 어떠합니까? 22절을 보십시오.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 근심이란 헬라어로 뤼페오(λυπεω)로서 ‘마음이 상할 정도로 슬퍼하다, 고통스러워하다’는 뜻입니다. 부자 청년은 예수님의 말씀을 못마땅해 하며 얼굴을 찡그리고 돌아갔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약속보다 재물을 택했습니다. 오늘날 많은 젊은이들이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임을 압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보다도 돈을 더 사랑합니다. 이는 그들이 물질주의에 병들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부자 청년이 돈을 사랑하여 영원한 파멸의 길을 택하는 것을 보고 슬프셨습니다.
23,24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이 말씀은 한마디로 재물에 소망을 두는 자는 구원을 얻기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듣고 심히 놀라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까?(25)”라고 말했습니다. 그들에게는 주님을 따르면 언젠가는 부자가 되리라는 희망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부자가 구원을 얻을 수 없다면 과연 우리의 미래는 무엇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밤낮으로 돈버는 일에 대해서 생각하고 어떻게 그것을 보존하고 재투자해서 이익을 많이 남길 것인가를 생각합니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 시간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물질중심적인 그들의 마음을 너무나 잘 아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그러나 예수님은 놀라는 제자들에게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할 수 있느니라(26)”고 말씀하셨습니다.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것 뿐 아니라 믿음의 성장도 마찬가지입니다. 오기드온목자님이 변화된 것은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곽누가목자님이 두려움과 인생의 허무에서 구원받은 것도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27절을 보십시오. 이에 베드로가 말했습니다.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사오니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 예수님은 이런 그들에게 영광스러운 약속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28,29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좇는 너희도 열 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 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 이 말씀은 주와 복음을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한 자는 반드시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게 됩니다. 주님을 위해서 버린 것이 없는 사람은 주님께 받을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함께 고난을 받는 자는 장차 예수님과 함께 영광을 누리게 됩니다. 예수님과 함께 영원토록 왕노릇 하게 됩니다. 또 이 세상에서도 영육간에 여러 배의 축복을 받고 영생을 상속받게 됩니다.
그러나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될 수 있음으로 조심해야 합니다. 항상 허리를 굽히고 겸손하게 예수님을 좇아야 합니다. 교만은 금물입니다. 우리 모두 세상 보화를 팔고 진정한 보화되신 예수님을 좇음으로 영생을 소유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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