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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마24강(18:1-35)/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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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엘리야
댓글 0건 조회 2,966회 작성일 03-08-17 1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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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마태복음 제  24 강                                               
말씀 : 마태복음 18:1-35
요절 : 마태복음 18:35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라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오늘 말씀은 위대해지는 길과 예수님의 은혜에 대해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위대해 지기를 바랍니다. 소시민으로 살기 원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위대한 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진정으로 위대한 자는 예수님의 은혜를 아는 자입니다. 예수님의 은혜를 아는 자는 겸손하고 남을 용서하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오늘 말씀을 통해서 주님의 은혜를 마음에 새기기를 기도합니다.

I. 천국에서 큰 자(1-14)

  1절 말씀은 제자들의 질문으로 시작되고 있습니다. “그때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 제자들은 공개적으로 예수님께 나아와 천국에서 누가 크냐고 질문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위대하게 되고자 하는 소원이 있습니다. 천국에서 위대하게 되고자 한 것은 헛된 야망이 아니라 사람들이 추구할 만한 합당한 목표입니다. 세상에서는 권력을 가진 사람, 재력이 있는 사람, 많이 배운 사람을 큰 자라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남의 위에서 명령하고 지시하는 자가 큰 자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천국에서는 어떤 사람이 위대한지 제자들은 알고 싶었습니다. 

  2-4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한 어린아이를 불러 저희 가운데 세우시고 가라사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그이가 천국에서 큰 자니라.” 제자들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고 천국에서는 누가 크냐는 것에만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이 변화되어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아니하면 천국에 들어갈 수조차 없다고 하십니다.

  어린아이와 같이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어린아이는 단순하고 순종적입니다. 또 내면이 순수하고 진실됩니다. 어린아이는 가진 것이 없기 때문에 자기를 내세우지 않습니다. 자기의 부족함을 알기 때문에 끊임없이 묻고 배웁니다. 어린 아이들은 한마디로 겸손합니다.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는 큰 자입니다. 세상에서는 큰 자가 되기 위해서 남을 깎아 내리고 자기는 높입니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반대로 자기를 낮추는 자 곧 겸손한 자가 큰 자입니다. 모세는 애굽의 왕자로 40년 동안 길러졌습니다. 그러나 나이 40이 되어서 자기 백성을 돌아볼 마음이 생겼는데 감정이 욱하여 한 애굽 군인을 죽이고 미디안에서 방랑자 생활을 했습니다. 그는 말이 많은 일곱 처제들 틈에 끼여서 말 한 마디 제대로 해보지 못하고 살았습니다. 그리고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양을 치면서 낮아졌습니다. 때가 되자 하나님께서 가시떨기 나무의 불꽃 가운데서 그를 부르시고 60만 이스라엘 백성을 바로의 압제 하에서 구원해 내라는 사명을 주셨습니다. 그는 40년 동안 광야에서 그들을 섬기면서 수많은 불평과 원망을 들어야 했습니다. 그의 누나 미리암도 권력욕에 어두워서 모세를 대적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죽이고자 했지만 모세는 하나님께 엎드려 죄사함을 간구했습니다.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했습니다(민12:3). 이와같이 자기를 낮추는 것은 방법적인 문제가 아니라 본질적인 문제입니다. 겉모양만 겸손한 척하고 속마음은 교만하다면 결코 겸손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겸손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얼마나 비참한 죄인인가를 깨닫고 회개하고 성령의 능력으로 변화되어 새 사람이 될  때 형성되는 내적인 열매입니다. 이는 본질적인 변화요 인격의 변화입니다. 이렇게 인격이 변화되어 겸손한 자가 될 때 진정으로 큰 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큰 자가 되길 원한다면 하나님 앞에서 자아를 발견하고 자기를 낮추는 투쟁을 해야 합니다.

  겸손은 모든 면에서 행복의 기초가 됩니다. 자기를 낮추고 겸손한 마음을 품을때 심령에 잔잔한 은혜와 평강이 차고 넘치게 됩니다. 겸손한 자는 어딜 가나 남에게 은혜를 끼치고 복의 근원이 됩니다. 우리는 흔히 세상에서 겸손한 자들은 짓밟힐 것이라는 생각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 신앙이 성숙해 진다는 것은 결국 점점 더 자기를 낮추고 겸손해진다는 것입니다. 성숙한 자일수록 벼이삭과 같이 머리를 숙이고, 어린 자일수록 보리 이삭과 같이 머리를 꼿꼿이 세웁니다. 겸손한 자는 만나는 사람마다 예수님의 겸손과 행복을 나누어 줍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겸손해 질 수 있습니까? 이는 예수님의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겸손의 본체가 되십니다. 사도 바울은 큰 자가 되고자 서로 다투는 빌립보 교회의 자매님들에게 이렇게 권면했습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예수님은 자기를 가장 낮추셨기 때문에 가장 위대한 자가 되었습니다. 누구든지 이 예수님의 마음을 품을 때 위대한 자가 될 수 있습니다.

  천국에서 큰 자는 자기를 낮추는 자일뿐만 아니라 타인과의 관계에서 소자 하나를 귀히 여기는 자입니다. 높이 되고자 하는 자가 범하기 쉬운 죄는 소자 하나를 업신여김으로 실족시키기 쉽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소자 하나가 얼마나 귀중한지 가르쳐 주십니다. 5절을 보십시오. “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 여기서 어린아이의 특성은 3,4절에 있는 것과는 다르게 연약하고 무력한 상태를 의미합니다. 영적으로 볼 때 믿음이 어린 자, 내면이 연약하여서 도움이 필요한 자를 뜻합니다. 치열한 경쟁 사회에서는 악착같고 유능하고 똑똑한 자만이 인정을 받고 힘이 없고 연약한 자는 무시를 받습니다. 아무도 연약한 자에게 관심을 가지고 도와주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참으로 위대한 자는 연약한 자에게 깊은 관심을 가지고 도와주는 자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뒤에서 연약한 자들을 돌보고 섬김으로써 진정으로 위대한 자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소자 하나를 영접하면 이는 곧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소자를 대할 때 함부로 대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대하듯이 대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무시하기 쉬운 소자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나타나시기 때문입니다(마25:40).

  6-9절은 소자 하나를 실족케 하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죄인가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6절을 보십시오.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깊은 바다에 빠뜨리는 것이 나으니라.” 실족케 하는 것은 상대방으로 하여금 불신과 회의에 빠지게 하여 믿음을 잃고 넘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이 어린 자를 무시하거나 판단할 때 실족시키기 쉽습니다. 또 감당치 못할 무리한 요구를 할 때 실족시키기 쉽습니다. 오늘날 믿는 자로서 좋지 못한 영향력을 끼칠 때 이로 인해 실족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믿음이 어린 소자 하나를 실족시키는 것은 연자 맷돌을 목에 매고 바다에 빠지는 것이 나을 만큼 심각한 죄입니다. 우리는 육의 몸을 입고 있기 때문에 100% 완전히 행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실족케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지만 그래도 실족케 하면 화가 임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다른 사람을 실족시키지 않기 위해서는 자신에 대해서 엄격하고 남에게 대해서는 관대해야합니다. 만일 내 손이나 발이 나로 하여금 범죄케 하면 찍어 내버려야 합니다. 또 눈이 범죄케 하면 뽑아 버려야합니다. 왜냐하면 두 손과 두 발, 두 눈을 가지고 지옥 불에 던지우는 것보다 불구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낫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정말 우리가 손이나 발을 찍고 눈을 뽑아야합니까? 신앙생활 하다가 병신되라는 말입니까? 이는 자신과의 싸움입니다. 사도 바울이 자기를 쳐서 복종시키기에 힘썼다는 것은 바로 이를 의미하는 것입니다(고전9:27). 자기의 옳다 하는 바로 책하지 않는 사람은 복된 사람입니다. 우리가 비록 실족케 하는 일이 있었다 해도 예수님의 피를 믿을 때 지옥의 권세를 이기는 죄사함을 받습니다.

  10-14절은 우리가 소자 하나를 귀히 여겨야 할 이유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10절을 보십시오. “삼가 이 소자 중에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 너희에게 말하노니 저희 천사들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 저희 천사들은 신자 개개인마다 수호천사가 있다는 뜻이 아니라 천사의 역할이 신자들을 보호하고 지킨다는 것을 뜻합니다. 믿음이 어린 자는 특히 보호가 많이 필요함으로 천사들도 자연히 신경을 쓰게 될 것입니다. 소자 하나를 무시하고 판단하게 될 때 천사들이 하나님께 상소를 하게 되어 그 사람이 하나님으로부터 벌을 받게 됩니다.

  예수님은 잃은 양 비유를 통해 소자 하나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을 가르쳐주십니다. 어떤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를 잃었습니다. 실리적으로 따지면 100마리에서 한 마리쯤 잃어버리는 것은 대수롭지 않은 것 같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길 잃은 양 하나를 희생양으로 삼고 잊어버리고 는 행복해 합니다. 한 마리 때문에 시간과 물질과 정열을 허비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 같아 보입니다. 그러나 파스칼이 말한대로 “하나는 전체의 총화”입니다. 한 사람은 천하보다 귀합니다. 예수님은 한손 마른 자를 돕기 위해서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셨습니다. 목자는 잃은 양 하나 때문에 잠도 못자고 마음이 상하여서 견딜 수 없었습니다. 목자는 잃은 양을 찾아 산과 들을 헤맵니다. 만일 찾으면 길을 잃지 아니한 아흔 아홉 마리보다 더 기뻐합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마음이요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14절을 보십시오. “이와 같이 이 소자 중에 하나라도 잃어지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 소자는 상대적으로 평가하여 업신여길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절대적으로 평가하여 귀히 여겨야 할 존재입니다. 우리는 제자 양성을 하기 때문에 자칫 잘못하면 소자 하나를 가볍게 여기기 쉽습니다. 그리고 말 잘 듣고 쓸만한 사람만 키우고자 하기 쉽니다. 그러나 제자 양성이란 강한 자를 키우는 것이 아니라 죄로 인해 연약해진 소자를 품고 살려 내어 쓸만한 예수님의 제자로 키우는 것입니다.

II. 형제를 용서하는 자(15-35)

  신자의 공동생활 중 중요한 것 중의 하나가 형제를 용서하는 것입니다. 형제를 용서하는 자는 참으로 위대한 자입니다. 형제가 나에게 죄를 범할 경우 어떻게 해야 합니까? 15절을 보십시오.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우리는 형제가 나에게 죄를 범할 경우 마음에 좋지 못한 감정을 품고 복수의 칼을 갈기 쉽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할 때 우리 마음은 평화를 상실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형제 사이의 좋지 못한 감정문제를 적극적으로 해결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먼저 내가 나에게 범죄한 형제를 일대일로 찾아가서 그의 죄를 깨닫게 해 주고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도록 해야 합니다. 사람에게는 자기 보호 본능이 있기 때문에 처음부터 공개적으로 책망하면 마음 문을 닫고 반발하게 됩니다. 그러나 인격적으로 말씀에 기초해서 섬세하게 권고하면 마음을 열고 돌이키게 됩니다. 그런데 내가 먼저 찾아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여기에는 예수님의 용서하시는 사랑과 용기가 필요합니다. 만일 형제가 나의 권고를 듣고 죄를 회개하면 그 형제를 얻게 됩니다. 그러면 둘 사이에는 깊은 사랑의 관계성이 맺어지게 됩니다.

  그러나 만일 형제가 죄를 회개하기를 거부하고 반발하고 계속해서 마음이 완악할 때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 때는 두 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증참케 하여 자기 죄를 분명히 깨닫도록 해야 합니다(신19:15). 그래도 듣지 않으면 신자의 공동체인 교회에 공개적으로 알려야합니다. 이는 죄의 누룩이 신자의 공동체에 퍼지지 않도록 경계하기 위함입니다. 교회의 말도 듣지 않으면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고 하십니다. 이는 그가 회개할 때까지 교회 밖의 사람으로 취급하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볼 때 교회는 최종적인 권위를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18절을 보십시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의 모임에 하늘의 권위를 부여하셨습니다. 이 권위는 성도들의 합심기도를 통해서 나타납니다. 19,20절을 보십시오.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이 말씀에서 볼 때 성도들의 합심기도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인간조건이나 능력을 따라 역사하시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이름으로 합심해서 기도하는 자들을 통해서 친히 능력으로 역사하십니다. 개개인이 아무리 열심히 일한다 할지라도 마음과 뜻을 합하여 합심해서 기도하지 않을 때 아무런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깨어진 그릇에는 아무리 물을 부어도 소용이 없듯이, 성령의 그릇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 성령께서 역사하실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부족한 점이 많이 있더라도 주님 안에서 서로 사랑하고 한 마음으로 기도할 때 성령께서 놀랍게 역사하십니다. 우리 가운데 합심 기도를 통해서 가을 학기 12제자 양성 역사를 이룰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21절을 보십시오. 그때에 말씀을 통해 은혜를 받고 있던 베드로가 한 마디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아마 베드로는 사사건건 자기를 물고 늘어지는 야고보와 요한을 용서하기 힘들었던 모양입니다. 당시 랍비들의 교훈에는 사람의 죄는 세 번까지는 용서하고 그 이상은 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큰 관용을 베풀어야 되겠다고 결심하고 일곱 번 정도 용서하면 되겠습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로부터 칭찬받을 것을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22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 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지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 와 이는 490번 아니 무한정 용서하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습니까? 또 왜 그렇게 해야 합니까? 예수님은 한 비유로 설명해 주셨습니다.

 어떤 임금이 회계할 때에 일만 달란트 빚진 종을 데리고 왔습니다. 한 달란트는 6,000데나리온이며 한 데나리온은 일꾼 하루 품삯입니다. 한 달란트를 벌기 위해서는 하루도 쉬지 않고 일한다 하더라도 16년이 넘게 걸입니다. 종이 일만 달란트를 벌려면 16만년이 걸리게 됩니다. 하루 품삯을 5만원만 잡아도 30조원입니다. 임금은 종의 몸과 처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빚을 갚도록 명했습니다. 빚 때문에 그의 인생은 파산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는 헤어나올 수 없는 절망 상태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는 할 수 없이 엎드려서 주인에게 긍휼을 구했습니다. 제발 한 번만 봐주십시오. 꼭 벌어서 갚겠습니다. 그의 말은 주인이 볼 때는 웃기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주인은 그를 불쌍히 여겨 그 빚을 전부 탕감해 주었습니다. 어떤 조건도 없었습니다. 상식적으로 주인의 태도는 납득할 수 없었습니다. 한 푼도 남김없이 철저하게 탕감해주었습니다. 그는 사형선고를 받은 죄수가 특사로 풀려나는 것 같이 무한한 해방감과 자유를 맛보았습니다. 그는 주인으로부터 말할 수 없는 은혜를 덧입었습니다.

  그런데 그 종은 나가다가 자기에게100데나리온, 약 500만원 정도 빚진 동관 하나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는 그 동관의 목을 잡고 “야 이놈아 빚 안갚을테야! 니 내 돈 떼먹고 살 것 같아”하며 목을 졸랐습니다. 그 동관은 엎드리어 간구했습니다. “참아 주소서. 갚으리이다” 그러나 그는 허락지 않고 그 동관을 옥에 가두었습니다. 이를 본 동료들은 심히 민망하여 이 사실을 주인에게 고했습니다. 그러자 주인은 노발대발하여 무정하고 무자비하고 이기적인 종을 옥에 가두었습니다. 이는 빚 때문이 아니라 그의 악함 때문이었습니다. 이 비유를 통해 예수님은 결론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35).”

  이 비유는 우리가 하나님께 진 빚은 일만 달란트요 형제가 우리에게 진 빚은 100데나리온에 불과함을 말해 줍니다. 헬라어로 빚은 죄를 의미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지은 죄는 일만 달란트 빚과 같이 우리의 힘으로는 도저히 갚을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죄의 빚에 짓눌려 일년 동안 지옥 불에 들어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년 동안 지옥 불에 들어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영원히 지옥 불에 들어가 고통해야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예수 그리스도를 피흘려 죽게 하심으로 모든 죄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예수님은 믿는 우리에게 참 자유와 기쁨과 평화를 주셨습니다. 이 큰 은혜를 덧입은 자로서 형제가 나에게 지은 조그마한 죄는 무조건 용서해 주어야 마땅합니다. 우리가 중심으로 형제의 죄를 용서할 때 심령에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사랑이 샘솟게 됩니다. 그러나 마음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않을 때 그 형제와 관계성이 단절되고 더 나아가 하나님과의 관계성도 단절되어 버리게 됩니다.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덧입고 형제를 긍휼히 여기고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는 자는 참으로 위대한 자입니다.

  결론적으로 천국에서 큰 자는 자기를 낮추며 소자 하나를 귀히 여기며 마음으로 형제를 용서하는 자입니다. 이런 내적 투쟁을 통해서 진정으로 위대한 자로 성장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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