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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마23강(17:1-23)/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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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엘리야
댓글 0건 조회 2,844회 작성일 03-08-10 0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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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마태복음 제 23 강                                                       
말씀 / 마태복음 17:1-23
요절 / 마태복음 17:5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말할 때에 홀연히 빛난 구름이 저희를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

  예수님께서는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신앙고백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머리로만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그랬을 때 예수님께서 십자가와 부활에 대해서 말씀하시자 그는 “주여 그리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라며 주님을 책망했습니다. 제자들은 아직 십자가와 부활의 의미를 알지 못했기 때문에 인간적인 말을 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십자가 뒤에 있는 영광을 보여주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이 십자가와 부활의 말씀을 영접하도록 돕고자 하셨습니다. 같은 시간에 나머지 아홉 제자들은 귀신들린 한 아이를 고치지 못해서 쩔쩔매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믿음이 적은 것을 책망하시고 불가능이 없는 삶을 사는 법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 시간 저희가 주님의 말씀을 듣고 불가능을 가능하게 하는 역사에 동참하기를 기도합니다.

 I.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1-13)

  제자들의 신앙 고백을 받으신 후 엿새 후에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습니다. 이 산은 다볼 산이라고도 하고 헬몬 산이라고도 합니다. 그러나 가장 확실한 것은 변화산입니다. 예수님은 그 산에 세 제자만 데리고 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열 두 제자들을 동등하게 사랑하셨지만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는데 영적 질서가 필요함을 아시고 세 제자를 리더 목자 그룹으로 키우셨습니다. 이들 세 제자는 특권도 있었지만 책임도 많습니다.

  예수님과 세 제자들이 산에 올라갔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예수님과 세 제자가 간절히 기도할 때에 예수님께서 저희 앞에서 변형되셨습니다.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습니다. 성경에서 희다는 것은 거룩함을 상징합니다. 예수님의 얼굴이 해같이 빛났다는 것은 그의 영광과 위엄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변화된 모습은 그의 거룩하심과 위엄과 신성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예수님의 이미지를 볼 수 있습니다. 이미지는 영적인 특성이요 영적인 본래 모습입니다. 16장에서 공부한 대로 사람들은 예수님을 선지자 중의 하나라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은 지상 사역을 하시는 가운데 죄인들을 섬기느라 상한 모습이었습니다. 그는 머리 둘 곳 없이 가난하시고,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배척당하시고 멸시를 받으시고 핍박을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인생들의 모든 죄악과 슬픔과 운명을 감당하시기 위해서 고난의 사람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의 모습은 일찍이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대로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와 같이 비틀어지시고 상하셨습니다.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사람들의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었습니다(사53:2).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통 사람들조차 예수님을 하나님께로부터 온 선지자로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이미지는 베드로에 의해서 잘 표현되었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베드로가 했던 것처럼 사람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보았습니다. 예수님은 세계만민을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기까지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셨습니다. 히5:8,9절은 말씀합니다.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었은즉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세계 만민을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 위해서 그는 모든 것을 버리셨고 심지어 자기 생명까지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이미지를 우리 마음에 기억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사도 요한은 매우 현명하고 야심에 차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지상 메시야가 되시면 베드로를 제치고 총리 자리에 앉기를 원했습니다. 또한 그는 자신의 정치적인 목적을 위해서 다른 사람의 삶을 희생시킬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 후에 예수님께 영향을 받고 변화되었습니다. 그는 정치적인 죄인이 되어 밧모 섬에 귀양을 가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의 이미지가 그의 영혼에 각인되어 있었습니다. 그는 세상에서 악한 이미지를 가진 사람들을 보지 않았습니다. 그는 오직 왕의 왕이시오 주의 주시오 세상의 구주이신 예수님의 이미지를 생각했습니다. 그는 계시록에서 예수님의 이미지가 어떠한가 말했습니다.  “그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으며 그의 눈은 불꽃같고 그의 발은 풀무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그의 음성은 많은 물소리와 같으며 그 오른손에 일곱별이 있고 그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그 얼굴은 해가 힘 있게 비취는 것 같더라(계 1:14-16).” 요한이 추방되어 언제 사형을 당할지 알 수 없었지만 그는 위엄차고 영광스럽고 거룩하시고 긍휼이 풍성하신 예수님의 이미지를 생각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이미지로 충만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밧모 섬에 추방되어 있었지만 정말로 행복했습니다.

  베드로는 많은 고난을 받으면서도 능력과 영광으로 충만했습니다. 그는 소아시아에 흩어져 있던 초대 교회 성도들을 말씀으로 섬겼습니다. 그는 고난받는 성도들에게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거룩한 백성이요 왕같은 제사장”이니 그렇게 살도록 믿음을 심었습니다. 벧후 1:16-18절에서 그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강림하심을 너희에게 알게 한 것이 공교히 만든 이야기를 좇은 것이 아니요 우리는 그의 크신 위엄을 친히 본 자라 지극히 큰 영광 중에서 이러한 소리가 그에게 나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실 때에 저가 하나님 아버지께 존귀와 영광을 받으셨느니라 이 소리는 우리가 저와 함께 거룩한 산에 있을 때에 하늘로서 나옴을 들은 것이라.” 이를 볼 때 변화산에서 본 예수님의 영광이 그의 일생을 지배했고 그를 능력과 영광이 충만한 사람으로 만들었습니다. 이미지는 돈으로 만들 수 없습니다. 직분으로도 이미지를 만들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을 배울 때 우리는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더 좋은 이미지를 가질 수 있습니다.
  3절을 보십시오. “때에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로 더불어 말씀하는 것이 저희에게 보이거늘” 모세와 엘리야는 율법과 선지자를 대표합니다. 그들은 둘 다 고난의 종이었습니다. 그들은 둘 다 무덤이 없습니다. 그들은 이 세상에서 사명을 감당할 때 많은 고난을 받았지만 영광 가운데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에 대해서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그들은 예루살렘에서 고난을 받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실 예수님을 격려했습니다. 베드로는 대화의 내용은 파악하지 못하고 그 영광에 취해 버렸습니다. 그래서 한 가지 제안을 했습니다.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주께서 만일 원하시면 내가 여기서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4).” 그는 갑자기 상상력이 풍부한 시인이 되었습니다. 그는 본래 시를 쓸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변화산에 올라가서 모세와 엘리야와 같은 하나님의 종들과 대화하시는 예수님을 보았을 때 신비로운 환상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즉시 그는 편안하고 영광스러운 상태에 빠져들었습니다. 그는 은쟁반 위로 굴러가는 옥구슬과 같이 시적 리듬이 뛰어나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 내가 여기서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 사실 그는 “하나는 베드로를 위하여 …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오는 것을 참았습니다. 그의 말 속에 죄악된 속 마음이 그대로 나타나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르는 삶, 끝없이 계속되는 고난을 더 이상 원치 않았습니다. 이제는 좀 쉬면서 쉽고 편하게 살고 싶었습니다. 그가 예수님의 영광을 보았지만 변화산 위에만 있으면 신비주의자가 됩니다. 모든 신비주의는 타락하게 됩니다. 이 세상을 쉽게 살고자 하는 사람들은 열심히 일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라”고 했습니다(살후3;10). 열심히 일하지 않고 부자가 되려고 하는 사람들은 감옥에 갈 확률이 매우 높습니다. 통계에 의하면 감옥에 있는 사람들의 93%가 전혀 일하지 않고 부자가 되기를 원했다고 합니다.

  반대로 다른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그들은 저주받은 이 세상에서 자신의 영광을 추구하는 사람들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죄로 병들어 있습니다. 정신적 육체적으로 병든 사람 앞에서 영광스럽게 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정말로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자기 영광을 구하는 사람은 매우 열정이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 영광을 구하는 사람은 매우 위험한 사람들입니다. 한철이 지나면 사그라질 초막에 그 영광을 간직하고 싶다는 베드로의 말은 얼마나 어리석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자기 영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도록 창조하셨습니다. 우리는 영원한 하나님의 영광과 그 나라를 소망해야 합니다. 영원한 영광과 하나님 나라의 소망을 간직할 때 우리는 힘있게 사명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우리 마음에 영광스러운 예수님의 모습이 새겨져 있을 때 고난 가운데서도 즐겁게 사명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가 헛소리를 할 때에 홀연히 빛난 구름이 저희를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났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5).” 제자들이 들어야 할 예수님의 말씀은 십자가와 부활에 관한 것입니다. 제자들은 십자가 이야기만 나오면 알레르기 반응을 보였습니다. 그러나 십자가는 인류를 죄에서 구속하기 위한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일찍이 아담이 범죄하여 타락하였을 때 여인의 후손 가운데서 구원자를 보낼 것을 약속하셨습니다(창3:15). 이 메시야의 인격과 사역에 대한 가장 구체적인 예언은 B.C. 8세기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주어졌습니다. 그는 한 아기로 오실 메시야가 모든 인생들에게 “기묘자요 모사요 전능하신 하나님이요 영존하시는 아버지요 평강의 왕”이 되심을 말씀했습니다(사9:6). 그러나 그가 먼저 우리 인생들의 질고와 슬픔을 지고 고난을 당하며 우리의 허물과 죄악을 지고 징벌을 받을 것을 예언했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53:5,6).” 예수님은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영광을 얻으셔야 합니다. 십자가가 없이는 부활의 영광도 없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이 말씀을 듣기 싫어하는 이유는 자신들도 주님의 십자가의 길을 따라야 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제자들을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은혜와 축복의 말씀이나 자기가 좋아하는 말씀은 귀를 기울이고 잘 듣습니다. 예를 들어 결혼에 대한 이야기는 세미하게 잘 듣습니다. 또 식사 초대가 있다거나 휴양회를 간다는 이야기는 마음 문을 활짝 열고 듣습니다. 그러나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희생하고 헌신하고 훈련을 받으라는 말은 듣지 않고 튕겨 버리고 싶습니다. 그러나 십자가 없는 신앙 생활은 그 자체가 죽은 것입니다.

  많은 분들이 이번 여름 수양회와 선교 보고회를 통해서 제자 양성에 따르는 십자가와 고난을 기꺼이 감당하고자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분들을 보면 얼굴 자체가 바뀌어졌습니다. 그 얼굴에서는 빛이 나고 삶은 생동감이 있고 힘이 느껴집니다. 이런 분들은 희생하면서도 기쁨이 있고 모든 역사에 매우 적극적입니다. 이들은 언제나 단 마음으로 감사를 표현합니다. 이들은 믿음의 승리를 체험했습니다. 믿음의 승리를 간증하는 그 얼굴과 마음에는 기쁨이 충만합니다. 저도 매일 새벽 기도를 하고 학생들과 일용할 양식을 나누고 일대일을 하는 가운데 기쁨이 있습니다. 말씀을 통해서 변화되어 가는 목자님들이나 양들을 보고 있노라면 기쁨이 있고 새 힘이 생깁니다. 우리가 성경을 공부하는 가운데 예수님에게서 듣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의 의미를 배워야 합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이해하게 될 때 우리는 산 소망을 갖게 되고 인생의 방향을 잡게 됩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이해하게 될 때 우리는 인생의 의미를 발견하게 됩니다.

  6절을 보십시오. 제자들은 구름 속에서 들려오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심히 두려워 엎드렸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나아와 저희에게 손을 대시며 “일어나라 두려워 말라”고 위로하셨습니다. 그들이 눈을 들고 보니 예수님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모세도 가고 엘리야도 가고 초막을 짓고 그 속에 간직하고 싶었던 영광도 사라져 버렸습니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은 헛되이 사라져 버리고 오직 예수님만 남았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예수님만을 믿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그때 우리는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서 영광과 위엄과 기쁨과 평강 가운데 영원히 함께 살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에서 내려올 때에 제자들에게 명하셨습니다.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기 전에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지금 영광스러운 예수님을 말하면 십자가를 통해 이루어야 할 구속 역사가 훼방을 받을 수 있고 믿음이 어린 사람들이 오해할 소지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본 영광을 마음에 간직하고 있도록 하셨습니다. 이때 제자들은 그러면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하리라 하느냐고 물었습니다. 유대인의 회당에서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엘리야가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님은 메시야가 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제자들을 곤혹스럽게 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엘리야가 이미 왔으되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임의로 대우하였다고 하시자 제자들은 그가 바로 세례 요한인 줄 깨달았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II. 산을 옮기는 겨자씨만한 믿음(14-23)

  예수님께서 산에서 내려와 무리에게 이르셨을 때 한 사람이 와서 꿇어 엎드려 말했습니다. “주여 내 아들을 불쌍히 여기소서 저가 간질로 심히 고생하여 자주 불에도 넘어지며 물에도 넘어지는지라. 내가 주의 제자들에게 데리고 왔으나 능히 고치지 못하더이다(14-16).” 예수님께서는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를 참으리요 그를 이리로 데려오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꾸짖으시니 귀신이 나가고 아이가 그 때부터 나음을 입었습니다.

  이 때에 제자들이 종용히 예수님께 나아와 물었습니다. “우리는 어찌하여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19)” 예수님은 너희 믿음이 적은 연고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소망스런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20).”
 
  아홉 제자들은 이미 귀신을 쫓아낼 수 있는 권세를 받았습니다(10:1). 그런데 그들은 세 제자들에 대한 경쟁심과 시기심, 그리고 이번 기회에 뭔가를 보여 주어야 되겠다는 과시욕에 사로잡혔습니다. 그리고 과거의 경험을 의지하여 폼을 잡았습니다. 그리고 “아이야 네가 나음을 입었느니라!”고 소리쳤지만 아이는 그대로였습니다. 과거의 경험이 지금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과거 승리의 경험을 의지했을 때 현재 문제 있는 양을 도울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과거에 비해서 믿을 만한 것이 많이 있었습니다. 경험과 연륜과 비교 의식 등으로 그들의 마음은 산만해졌습니다. 그리고 한번 귀신을 쫓는데 실패하자 두려움에 휩싸이게 되었습니다. 주위에 있던 바리새인들은 그들을 비웃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큰 믿음이 아니라 씨 중에서 가장 작다고 하는 겨자씨만한 믿음이 있어도 불가능이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작지만 생명력 있는 믿음, 단순한 믿음이 있을 때 제자들이 비록 숫자는 적고 약하다 할지라도 장애물의 산을 옮길 수 있습니다. 믿음의 다른 표현은 기도하는 것입니다. 마가는 믿음이라는 말뿐아니라 기도라는 말씀을 더하였습니다. 막11:24절은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믿음을 갖기 위해서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킹제임스 번역판은 21절을 “그러나 이런 종류는 기도와 금식에 의하지 않고는 나가지 아니하느니라"는 말씀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말씀에 대한 믿음이 안 생기면 금식을 해서라도 말씀을 받고 믿음을 덧입어야 합니다.

  우리가 옮겨야 할 산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학업에서 승리하기, 전도해서 일대일 양을 얻는 것, 일대일을 시작하여 3강을 넘기는 것, 사람들과 관계성을 맺는 것, 학생 제자 양성, IMF 시대보다 더 어려운 지금 직장을 얻는 것, 결혼의 산, 자녀 양육, 가정 경제를 다스리는 것, 등등 개인적으로 극복해야 할 문제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이런 문제들을 하나님께 들고 나아가 믿음으로 기도하는 가운데 해결함을 받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를 기도합니다.

  임요한 형제님은 눈에 띄지 않는 학생이었습니다. 그는 청소년 시절 많은 방황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캠퍼스 목자로 살도록 부르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영접하고 대학 편입을 준비하였습니다. 편입 시험을 준비하는 가운데 여름 수양회에서 태권무를 섬겨야 했습니다. 그는 다리가 아프니 2주간 동안 운동을 하지 말라는 의사의 진단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을 믿으라”는 말씀과 마6:33절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는 말씀을 붙잡고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는 수양회 다다음 날 편입 시험을 치루어야 했지만 먼저 여름 수양회에 참석하고 태권무를 통해서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그가 겨자씨만한 믿음으로 공부했을 때 3개의 자격증 시험과 네 개 대학의 편입 시험에 모두 합격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믿음을 축복하시고 숭실대 경영학부에 편입하게 도우셨습니다. 그가 앞으로 캠퍼스 목자로서 세 명의 양을 치고 장학금을 받아서 학업을 마치고 열매가 풍성한 평신도 목자요 선교사로 쓰임 받기를 기도합니다.
 
  우리는 올 해 새롭게 12제자를 양성하고 10년 내에 학생이 학사의 네 배가 넘는 역사를 이루어 주시도록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나라가 통일이 되어 거룩한 백성이요 제사장 나라로 쓰임 받도록 기도하고 있습니다. 때때로 이러한 기도제목들은 헛되게 보이고 우리에게는 너무 큰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한 기도제목들은 우리가 이루기에 불가능한 것처럼 보입니다. 물론 우리가 그것을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기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그 기도에 응답하시도록 믿음으로 간구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약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에 모든 것이 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음에 참된 믿음, 겨자씨만한 믿음을 주시도록 기도합시다.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실 줄로 믿어야 합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하여 우리 마음에 능력을 부어주실 것입니다. 아홉 명의 제자들처럼 우리는 예수님을 슬프시게 해서는 안됩니다. 그들은 겨자씨만한 믿음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아이의 영혼으로부터 귀신을 쫓아낼 수 없었습니다.

  우리가 무슨 일을 할 때 믿음과 기도없이 행한다면 그것은 정말로 헛된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믿음과 기도없이 행한다면 모래 위에 집을 짓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분명한 기도 제목을 주시고 겨자씨만한 작은 믿음을 주시도록 기도합시다. 하나님께서 우리나라를 통일 한국, 제사장 나라가 되게 하시기를 기도합시다. 또한 10년 내에 우리 모임에 학생이 학사의 네 배가 넘는 역사를 이루어 주시도록 기도합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우사 믿음이 없는 세대를 극복하고 학생 복음 역사를 흥왕히 이루게 해주시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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