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ntitled Document
주일말씀 성경별메시지 심포지엄 성경 검색
문제지 성경별문제지

마태복음 마22강(16:1-28)/ 주는 그리스도시요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이엘리야
댓글 0건 조회 3,062회 작성일 03-08-03 09:23

본문

2003년 마태복음 제 22 강                                                   
말씀 / 마태복음 16:1-28
요절 / 마태복음 16:16

주는 그리스도시요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시작할 때는 어려움이 많았지만 믿음으로 섬긴 이번 여름 수양회를 크게 축복하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의 심령을 회복하시고 새 힘을 주셔서 감사를 드립니다. 이 시간 우리는 다시 한번 예수님을 주요 그리스도로 고백하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제자의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세우신 교회는 영원하며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합니다. 우리가 여러 가지 어려움 가운데서도 일생 동안 예수님의 교회를 세우고 건강하고 성숙한 공동체를 세우는 일에 전념하기를 기도합니다. 

I. 어떤 영향력을 끼칠 것인가(1-12)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와서 예수님을 시험하여 하늘로서 오는 표적 보이기를 청했습니다. 사람이 답답하거나 무기력할 때 기적을 구하게 됩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은 서로 앙숙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공격하는 데는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믿기 위해서 표적을 구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시험해보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들은 이제까지 예수님께서 전하신 말씀이나 행하신 일들을 보고도 믿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믿을 마음이 전혀 없었습니다. 이런 그들에게 하늘로서 오는 표적을 보여 준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싹수가 노란 그들을 어떻게 책망하셨습니까? 예수님은 먼저 그들의 훌륭한 점을 인정하셨습니다. 너희가 저녁에 하늘이 붉으면 날이 좋겠다 하고 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오늘은 날이 궂겠다 하나니 너희가 천기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2,3). 그들은 과학이 발달된 오늘도 맞추기 어려운 일기예보를 기가 막히게 맞추었습니다. 그들은 기상 예보관이 될 수 있는 명석한 두뇌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대의 표적은 분별하지 못했습니다. 시대의 표적은 예수님이 오셔서 소경의 눈을 뜨게 하고 앉은뱅이를 걷게 하며 문둥병자를 낫게 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시대의 표적이셨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예수님을 약속된 메시야로 보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영적인 소경이요 귀머거리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영적인 통찰력이 없었습니다. 그 시대를 통찰하고 백성들을 인도해야할 그들이 소경이었기 때문에 백성들도 유리방황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악하고 음란한 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여 줄 표적이 없느니라 하시고 저희를 떠나가셨습니다.

  예수님이 칠병이어로 4000명을 먹이고 나서 건너편으로 갈 때 제자들이 떡 가져가기를 잊었습니다. 배 안에서 예수님은 “삼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누룩하니까 빵을 생각했습니다. 이는 마치 노처녀가 무슨 말이든지 결혼문제와 연관을 짓는 것과 같았습니다. 그들이 누룩에 관한 세미나를 하였는데 우리가 떡을 가져오지 아니하였도다라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8-11절에서 예수님은 그들에게 네 가지 질문을 하셨습니다. “믿음이 적은 자들아 어찌 떡이 없음으로 서로 의논하느냐 너희가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고 주운 것이 몇 바구니며 떡 일곱 개로 사천 명을 먹이고 주운 것이 몇 광주리이던 것을 기억지 못하느냐 어찌 내 말한 것이 떡에 관함이 아닌 줄을 깨닫지 못하느냐 오직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시니” 예수님은 불과 몇일 전에 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신 것을 기억하게 했습니다. 바로 얼마 전에는 떡 일곱 개로 사천 명을 먹인 것을 기억하도록 도우셨습니다. 그들은 이것들을 생각하고 빵 문제로 염려하지 말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믿음이 적었습니다. 그래서 먹고 사는 문제로 염려했습니다. 그들이 먹고 사는 문제로 근심하고 염려에 빠질 때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누룩에 뜨기 쉽습니다. 누룩이란 악한 영향력입니다. 바리새인의 누룩은 형식주의와 외식이요 율법주의라면 사두개인의 누룩은 세속주의입니다. 그들은 양들을 불쌍히 여기지 않고 돈벌 생각만 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택함받은 족속이요 거룩한 백성이요 제사장 나라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택하사 많은 열매를 맺도록 구별하셨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양떼를 돌보도록 택함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양들을 돌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형식적인 신앙생활을 하면서 율법주의로 하나님의 양떼들을 힘들게 하였습니다. 그들은 양들이 삶의 기쁨을 잃어버릴 때까지 짓눌러버렸습니다. 악한 영향력은 그들을 선한 목자가 아니라 강도가 되게 했습니다. 

  반대로 예수님은 지상 사역 동안 병자를 고치시고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시며 제자 양성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부지런히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들과 함께 생활하시면서 제자 훈련을 하셨습니다. 제자 훈련은 큰 홀에 사람들을 모아 놓고 특강을 한다고 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생활을 하는 가운데 제자 양성을 하셨습니다. 제자 훈련은 그의 좋은 영향력를 통하여 이루어졌습니다.

  예수님께서 유월절 어린 양이 되기 위해서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에 올라가셨습니다. 그는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실 때가 가까이 왔기 때문에 몸을 사려야 마땅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는 아침 일찍 일어나 성전에 나아가사 그에게 나아오는 자들을 가르치셨습니다(눅21:37,38). 그것은 정말로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였습니다. 마침내 그는 십자가에 못박히셨습니다. 십자가 밑에는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와 여인들이  깊은 슬픔으로 눈물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울고 있는 여인들을 위로하거나 자신을 구원하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그는 십자가에 그대로 매달려 계셨습니다. 짧은 순간에 로마 군병이 예수님의 옆구리를 창으로 푹 찔렀습니다. 물과 피가 쏟아졌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아니라 세상의 죄를 위해 부르짖으셨습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이는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23:34).”

  예수님은 부활하신 이후에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을 심방하사 앞치마를 하시고 맛있는 아침 식사를 대접하셨습니다. 그들의 눈은 빛나기 시작했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 순간 하나님의 사랑이 그들의 마음으로부터 영혼에까지 휘돌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나라의 산 소망으로 충만해졌습니다. 예수님은 많은 일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영향력의 깊이는 측량할 수 없었습니다. 그의 영향력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예수님의 영향력을 배워야 합니다. 

II.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13-28)

  예수님께서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물으셨습니다.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이는 객관식 문제로서 대답하기가 쉬웠습니다. 제자들은 한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제자들의 객관식 문제에 대한 답변은 A⁺였습니다. 당시 종교적인 사람들은 예수님을 선지자 중의 하나라고 생각했습니다.

  사람들의 견해를 들으신 예수님은 이제 제자들에게 주관식 문제를 냈습니다. 주관식은 좀 어렵습니다. 그들의 마음 속에 있는 것을 대답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이는 예수님께서 이제까지 말씀을 가르치시고 여러 가지 기적을 보이시고 공동생활을 한 결과를 물으시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챤스다” 생각하고 재빨리 대답했습니다. 16절을 보십시오.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베드로의 이 고백은 자신 뿐만 아니라 역사 속에 살고 있는 인생들에게 깊은 의미를 줍니다. 그리스도란 약속된 메시야 곧 세상 만민을 죄로부터 구원하신 구세주란 뜻입니다. 그리스도란 기름부음을 받은 자란 뜻입니다. 이 말은 이스라엘의 역사적인 배경을 통하여 볼 때 하나님께서 세우신 왕을 뜻합니다. 예수님은 아담의 범죄와 그로 말미암은 모든 저주를 온전히 거두어 가시며 각 심령 가운데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할 구주시오 만왕의 왕이십니다. 또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란 그리스도의 신성을 가리키는 말로서 그 본체가 영존하시는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이 신앙 고백은 기독교 신앙의 근본이 되는 매우 중요한 고백입니다. 로마서 10:9절은 말씀합니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라.” 이 신앙 고백은 우리의 구원과 관계된 것이므로 매우 중요합니다. 초대 성도들의 경우에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것은 사회에서 핍박받고 심지어 화형을 당하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어떤 불이익과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면서도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것은 예수님께서는 자신들을 죄와 사망의 권세로부터 구원하시는 생명의 주가 되시며 나의 인생을 다스리시는 왕이 되신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이 신앙 고백은 구원의 기초요 신앙 생활의 출발점입니다. 이 신앙고백을 하게 될 때 예수님과 나의 관계는 구주와 죄인, 왕과 신하,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가 됩니다. 또한 이 신앙고백을 하게 되면 나는 더 이상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예수님께 속한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황태자요 황공주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신앙 고백을 회피하게 되면 우리는 마음으로 이상한 고백을 하게 됩니다. “오! 전능한 돈이여! 당신은 나의 능력이시니이다. 오 멋진 형제여! 가문 좋고 학벌 좋은 형제여! 당신은 나의 기쁨이요 소망이시니이다. 오! 세상의 권력과 명예여, 당신은 나의 구주시니이다.” 이런 엉뚱한 고백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께 대한 신앙 고백을 해야 합니다. 예수님만이 나의 구주가 되심을 고백해야 합니다. 예수님만이 나의 왕이 되시고 나의 전부가 되심을 고백해야 합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나를 구원해 주시고 내 인생을 책임져 주십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베드로의 고백은 매우 정확했고 그것은 기독교 신앙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에게 조차도 그의 고백은 매우 놀랄만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를 칭찬하셨습니다. 17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을 아는 방법은 인간의 사색이나 지식이 아님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을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로 아는 지식은 위로부터 주어져야만 합니다. 위로부터 오는 지식을 얻기 위하여 우리는 베드로처럼 세상의 것들을 기탄없이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야 합니다. 예수님이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지식은 인간의 지적인 노력에 의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사람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요 세상의 구주로 믿을 때 위로부터 얻어지는 것입니다. 또한 그와 공동생활을 하거나 성경을 공부하고 실제적인 적용을 함으로써 얻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로 알고 고백할 수 있는 사람은 참으로 복된 사람입니다.

  사람이 예수님을 그리스도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로 분명히 알게 될 때 그는 내적으로 견고하고 안정된 사람이 됩니다. 이 세상을 사는 동안 그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습니다. 그는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는 미혹하는 자들에게 속지 않습니다. 그는 죄악된 본성에 이끌리지 않습니다. 그는 반석과 같은 사람이 됩니다. 18절을 보십시오.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여기서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한다는 말은 예수님을 그리스도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 사람은 죄와 죽음의 권세를 격퇴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유월절 어린 양으로서 모든 인류의 구원을 위해서  십자가에서 피흘리심으로서 사단의 권세를 깨뜨리셨기 때문입니다.

  18절에서 우리는 베드로가 반석이 됨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교회를 그 반석 위에 세우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여기서 교회의 개념이 분명히 나옵니다. 교회는 건물이 아니라 사람입니다. 일반적으로 교회는 예수님을 그리스도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는 사람들의 공동체를 뜻합니다. 교회는 일반 사회 단체나 자연 종교를 가진 사람들의 모임과 구별됩니다. 교회의 특징은 단일성, 사도성, 거룩성, 보편성, 영원성에 있습니다. 
  19절을 보십시오.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 천국 열쇠를 네게 준다는 말씀은 베드로가 하나님 나라를 보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는 뜻입니다. 그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다른 사람들을 하나님 나라로 인도하게 될 것입니다. 20절을 보십시오. “이에 제자들을 경계하사 자기가 그리스도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아직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메시야의 사역이 완성되지 않았으므로 자신이 그리스도인 것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고 경계하셨습니다.

  21절을 보십시오.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 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시니” 베드로의 고백 후에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과 부활의 의미에 대해서 가르치기 시작하셨습니다. 먼저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셔야만 합니다. 당시에 예루살렘은 사단의 소굴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예루살렘을 하나님의 도성이요 세계 선교 센타로 만들고자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곳은 사단의 요새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신다는 말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자 결심하셨음을 뜻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것은 사단에게 패배한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죽으심으로서 사단에게 영원히 승리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단의 미움과 죄와 죽음을 십자가에 못 박히는 사랑을 통해 이기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위에서의 죽음은 시작에 불과합니다. 그의 마지막 승리는 제 삼일에 부활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사단의 미움과 죽음과 죄의 권세를 이기고 영적인 승리를 하셨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승리는 예수님께서 죽은 지 삼일 만에 무덤에서 부활하신 것입니다. 행2:24절은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망의 고통을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게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 하나님께서는 그를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좋으신 예수님을 죽음으로부터 살리시고 사랑의 관계를 회복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셨을 때 그는 너무나 많은 죄인들을 보고 슬퍼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이 가장 슬펐던 이유는 하나님과 분리되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가장 슬픈 기도는 마27:46절에 나타나 있습니다. “제 구 시 즈음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질러 가라사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지금까지 예수님에게는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의 성육신, 인간의 육신을 취하심으로 인한 고통, 십자가에서의 죽음조차도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죽음 후에 돌 무덤에 버려질 때가 문제였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과의 분리를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부르짖으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그와 사랑의 관계를 회복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회개하고 자기에게 나아오는 모든 죄인들에게 죄사함을 선포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예언을 들은 베드로의 반응이 어떠합니까? 실제로 예수님은 자신의 부활에 대해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부활에 대한 말씀은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베드로는 오직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예언만 듣고 두려워하고 분노하였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억센 팔로 예수님을 붙들고 간했습니다.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주님, 무슨 말씀이십니까?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그리스도가 되셔야 할 분이 왜 죽으십니까?” 실제로 그는 예수님을 책망했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인간적인 야망과 꿈이 산산히 깨어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세우실 메시야 왕국에서 총리가 될 것을 생각하면서 취임연설을 연습하였습니다. “친애하는 이스라엘 국민 여러분! 저는 이번에 국무 총리에 취임한 베드로올시다.” 이렇게 시작하는 연설문을 써놓고 연습을 하고 있었는데 예수님께서 공공연히 자신의 죽음과 부활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것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죽음만을 알아차리고 부활에 대해서는 놓쳤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을 책망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베드로가 예수님을 그리스도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한 것이 머리에만 있는 지식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참된 믿음이 없었습니다. 머리로만 아는 지식이 얼마나 위험한가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참된 지식을 우리의 마음으로 간직할 수 있도록 하나님의 긍휼을 구해야 합니다.

  이제 예수님은 베드로는 책망하셨습니다. 23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우리는 이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세상의 것들로 채워져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의 것들을 생각하는 것은 쉽습니다. 이 세상에 살면서 사람의 일이 아무리 선하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뜻에 기초하지 아니할 때 결국 하나님의 역사를 방해하는 사단적인 생각이 되어 버립니다. 그러나 우리 마음이 하나님의 살아있는 말씀으로 채워지고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의 참된 의미로 채워질 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게 됩니다. 

  예수님은 이에 자기를 따르는 제자들이 반드시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 말씀하셨습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24).”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좇는 것은 인생을 낭비하는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생명을 풍성하게 하는  길입니다. 우리가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겠습니까?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습니까? 우리가 주와 복음을 위해서 희생하고 헌신할 때 예수님의 영광에 동참하게 될 것입니다.

  이 시간 주님께서 질문하십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이 질문에 머리가 아니라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신앙고백을 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은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우리가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래서 이 세상을 사는 동안 하나님 나라를 체험하며 장차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예수님을 보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첨부파일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Total 1,323건 80 페이지

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