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마21강(15:1-28)/ 네 믿음이 크도다
페이지 정보

본문
2003년 마태복음 제 21 강
말씀 / 마태복음 15:1-28
요절 / 마태복음 15:28
네 믿음이 크도다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시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우리는 지난 주 오병이어로 오천명을 먹이신 예수님을 공부했습니다. 예수님은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고 하심으로 제자들이 하나님을 믿고 오천명의 무리들을 먹일 뿐만 아니라 목자로서 책임감을 갖도록 도우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과 동역을 하심으로 기적의 역사를 이루셨습니다.
오늘 본문은 1-20절에서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을 말씀하고 있고, 21-28절은 가나안 여인의 믿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오늘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을 감동시킨 가나안 여인의 믿음을 배우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1-20)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으로부터 갈릴리에 계신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떡 먹을 때에 손을 씻지 아니함으로 장로들의 유전을 범한다고 따지러 왔습니다. 여기서 손을 씻는 것은 위생과 청결을 위한 것이 아니라 종교적 관습이었습니다. 팔레스틴은 물이 귀했기 때문에 달걀 껍질에 담을 만한 물을 손 끝에서 팔꿈치 까지 흘려 보내는 것이 정결의식이었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함으로 부정한 것에 접촉됨으로 발생하게 되는 부정을 씻고 거룩하게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레 15:11절에는 “유출병 있는 자가 물로 손을 씻지 아니하고 아무든지 만지면 그 자는 옷을 빨고 물로 몸을 씻을 것이며 저녁까지 부정하리라.”고 했습니다. 여자가 달거리를 할 때에 무엇을 만지거나 의자에 앉거나 접촉하면 그것도 부정하게 여겼습니다. 오늘날 그런 규례를 지키라고 하면 많은 사람들이 웃을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부정하게 된 사람들은 물로 씻으면 정하게 된다고 가르쳤습니다. 율법에 열심이 있는 사람들은 이 가르침을 확대하여 더욱 엄격하게 지키려고 했고 만의 하나라도 실수를 하지 않기 위해서 식사 전에는 언제든지 손을 씻어야 한다는 것으로 강화를 시켰습니다. 이것을 잘 하는가 그렇지 않은가에 따라서 그 사람의 신실성을 판가름하였습니다. 그런 것을 잘 하지 못하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과 같았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살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데서 자라기를 기도합니다. 진정한 예배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마음을 보십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의 잘못된 관행을 하나 지적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네 부모를 공경하라고 하셨습니다. 또 아비나 어미를 훼방하는 자는 반드시 죽으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누구든지 아비에게나 어미에게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그 부모를 공경할 것이 없다 하여 그들의 유전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였습니다. 이것을 고르반이라고 합니다. 그들은 부모님을 공양할 것을 하나님께 드리겠다 서원하고는 얼마는 성전에 바치고 나머지는 자기 소유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부모님을 봉양해야 할 의무에서 자유하다고 여겼습니다. 그들은 장로들의 유전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장로의 유전을 앞세움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이 수천년을 지나면서도 유대인의 정체성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은 전통을 중히 여겼기 때문입니다. 전통은 하루 아침에 생긴 것이 아닙니다. 그 속에는 조상들의 지혜가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 담겨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이 좋은 전통을 지키면서 외식에 빠진 원인이 무엇입니까?
8,9절을 보십시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나님의 마음을 알지 못할 때, 하나님께 대한 사랑을 잃어버렸을 때, 하나님의 말씀보다 전통을 앞세웠을 때 그들은 외식하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의 병든 내면을 고치는 능력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병든 자아를 발견하고 말씀의 검으로 병든 것을 잘라내야 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내면적인 투쟁을 하기보다 쉬운 율법주의를 택했습니다. 장로들은 유전으로 권위를 세우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참된 권위는 말씀을 지키고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데서 나옵니다.
예수님은 무리를 불러 말씀하셨습니다. “듣고 깨달으라. 입에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11).” 예수님은 참된 정결이 무엇인지 말씀해 주셨습니다. 입으로 들어가는 것은 뒤로 나오기 때문에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마음에서 나오는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합니다. 사람의 마음 속에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적질과 거짓 증거와 훼방입니다.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요 씻지 않은 손으로 먹는 것은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합니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이를 누가 능히 알리요 마는(렘17:9). 복음 신앙은 인간의 전적 부패를 인정하고 오직 예수님과 함께 죽고 다시 살아야 새 사람이 됨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우리의 구원자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믿음으로 죄사함을 받고 성령의 충만함을 받을 때 거룩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둘째, 네 믿음이 크도다(21-28)
예수님께서 갈릴리에서 나가사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쉼을 갖고 제자들을 섬기기를 원하셨습니다. 이때 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질렀습니다.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히 귀신들렸나이다.” 가나안 여인은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족속이었습니다. 수로보니게는 시리아의 페니키아를 말하는데 여기서 알파벳이 나왔고 매우 발달된 문명이 있었습니다. 이 여인은 이방인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원수였던 가나안인이었습니다. 이런 여인이 예수님께 나아온 것은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h
그런데 이 여인의 사랑하는 딸이 흉악한 귀신에 들렸습니다. 귀신이 들려서 괴성을 지르고 눈이 뒤집히고 사단의 지배를 받아서 미친 듯이 거리를 쏘다니고 욕을 하고 사람의 힘으로 제어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혀를 차며 이 여인을 동정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흉악한 귀신의 세력에서 딸을 해방시킬 수 있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러던 차에 예수님께서 두로와 시돈에 오셨다는 소문을 들었는데 그 분이 자기 동네에 들어오셨다는 것이었습니다. 여인은 예수님께 나아가서 소리를 질렀습니다. 소리를 질렀다는 말은 산고를 겪는 여인의 부르짖음과 같은 단어입니다. 이 여인은 이방인임에도 예수님을 메시야로 고백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방 지역에서 자신을 메시야로 부르는 여인을 볼 때 기특하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흉악히 귀신들린 딸을 고쳐 달라는 여인의 말은 가슴을 저미게 하는 호소력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여인의 고통을 잘 아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여인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이 여인이 예수님을 메시야로 인정한다고 하지만 믿음이 약했습니다. 그러나 훈련을 받을 만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분명한 의도를 가지고 여인을 대하기 시작하셨습니다. 예수님의 태도가 어떠했습니까? 예수님은 한 말씀도 대답지 아니하셨습니다. 여인이 볼 때 예수님이 무뚝뚝하고 너무 냉담해 보였습니다. 여인의 간절한 호소에도 불구하고 한 말씀도 대답지 않는 것을 볼 때 여인은 상당히 당황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인은 예수님을 변함없이 신뢰했습니다. 예수님의 태도에 감정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목자님의 태도가 냉담한 것 같으면 나를 미워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기 쉽습니다. 상처를 받고 여러 가지 오해를 하기 쉽습니다. 특히 우리나라 사람들은 매우 감정적이기 때문에 냉담한 반응을 보면 원수같이 여깁니다. 또 우리는 예수님이 침묵하실 때 답답함을 느낍니다.
이런 분위기를 감지한 제자들은 여인의 처지를 딱하게 여기고 예수님께 와서 간청을 하였습니다.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보내소서(23).” 제자들의 말을 볼 때 여인은 침묵하시는 예수님의 뒤를 따라오면서 계속 도와달라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제자들은 이 여인이 귀찮았습니다. 제자들은 명령조로 예수님께 부탁을 드렸습니다. 여인을 고쳐서 보내든지 쫓아 보내든지 보내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대답하셨습니다.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이 말을 여인이 들었을 때 인종차별을 느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 대한 실망과 혐오감을 나타내기 쉬웠습니다. 세상의 구원자로 왔다더니 거짓이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반대로 제자들은 유대인으로서 자부심을 느꼈습니다. 구원이 유대인으로부터 이방인으로 흘러간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한편 예수님은 자기의 사역의 한계를 말씀하시면서 여인을 훈련하셨습니다. 여인은 예수님의 분명한 태도를 볼 때 이방인으로서 열등감을 느끼고 포기하기 쉬웠습니다.
그런데 여자는 다시 겸손한 자세로 예수님께 도우심을 구했습니다. 25절을 보십시오. “여자가 와서 예수께 절하며 가로되 주여 저를 도우소서” 절했다는 것은 경배했다는 것입니다. 이는 동방 박사들이 경배한 것과 같은 자세요, 문둥병자가 절하면서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 라면서 간구했던 자세요, 나이 많은 회당장 야이로가 예수님께 절하였던 자세요, 제자들이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했던 자세입니다. 여인은 예수님의 배척하는 듯한 말씀에도 물러서지 않고 예수님을 경배의 대상으로 높였습니다. 이 정도 되면 여인도 대단한 사람입니다. 딸에 대한 사랑과 구원의 길이 예수님뿐이라는 것을 알았기에 여인은 끈질기게 예수님을 붙잡았습니다. 꿇어 절하는 여인의 자세는 진지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여자에게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26절을 보십시오. “대답하여 가라사대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우리는 이런 경우를 설상가상(雪上加霜)이라고 합니다. 추운 겨울에 떨고 있는데 그 얼굴에 찬물을 끼얹는 것과 같습니다. 엎친 데 덮친 격이라는 말입니다. 여인은 최대한 겸손하게 은혜를 구하는데 개라 말씀하시니 너무 하신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예수님은 겸손하고 온유하신 분이신데 이 말씀을 들으면 온유라는 것이 얼마나 강한 속성을 가진 것인가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자녀는 유대인들이요 개는 이방인들을 지칭하는 것입니다. 개라는 말이 애완용 개를 가리킨다고 할지라도 이는 매우 신랄할 말씀입니다. 여인의 마음에 아픔을 느끼게 하는 말씀입니다. 여인의 자존심이 팍 상하고 모멸감을 느끼게 하는 말씀이었습니다. 여자들은 감정이 매우 예민하고 분위기에 민감합니다. 그리고 여인의 자존심에 상처를 내면 누구나 혹독한 댓가를 치루게 됩니다. 자존심에 상처를 받은 여인은 복수심으로 타오르게 됩니다. 여자의 마음이 상하면 오뉴월에도 서릿발이 내린다고 합니다. 이 여인이 칼을 들고 덤벼들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아니면 그래 나보고 개라고 그럼 어디 한번 물려봐라 하고 물어뜯고자 대들 수도 있었습니다. 여인이 열등감이 있었다면 마음이 무너져 내렸을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며 통곡을 할 수도 있었습니다.
사랑이 많고 무리들을 불쌍히 여기시는 예수님께서 왜 이러시는 것입니까? 예수님은 여인의 믿음을 시험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여인의 믿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믿음을 더 강하게 하기 위해서 이렇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흉악히 귀신들린 딸을 둔 여인을 불쌍히 여기고 금방 고쳐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여인을 제자로 키우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믿음이 자라도록 강하게 도전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을 키우기 원하시는데 특히 믿음을 키워주기를 원하십니다. 이방 땅에서 여인이 믿음으로 살려면 강한 믿음이 필요했습니다. 예수님은 여인의 인생 전체를 돕고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키우실 때 죽은 개 훈련을 시키십니다. 다윗도 왕으로 세움을 입었지만 그가 통일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사명을 감당하려면 연단이 필요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광야에서 사울에게 쫓겨 다니면서 고난을 받게 하시고 믿음을 연단하셨습니다. 그는 사울에게 쫓겨 다닐 때 “이스라엘 왕이 누구를 따라 나왔으며 누구를 쫓나이까 죽은 개나 벼룩을 쫓음이니이다(삼상 24:14).” 그는 자신을 죽은 개요 벼룩이라고 불렀습니다. 또 한번은 블레셋 왕의 부하들이 그를 의심하자 살기 위해서 “그들의 앞에서 그 행동을 변하여 미친 체하고 대문짝에 그적거리며 침을 수염에 흘렸습니다(삼상 21:13).” 다윗은 압살롬의 반역으로 도망을 갈 때에 시므이가 따라오면서 피를 흘린 자여 비루한 자여 가거라 가거라는 저주를 들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다윗의 부하들은 분노하여 그를 당장에 죽이고자 했지만 그는 여호와께서 저에게 다윗을 저주하라 하심이니 저주하게 버려두라고 했습니다. 다윗은 정말로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주권을 믿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이런 그를 하나님께서는 사랑하시고 높여주셨습니다. 우리도 믿음으로 살다보면 죽은 개와 같을 때가 있습니다. 낮아질 대로 낮아지고 밟힐 대로 밟혀서 찍소리도 못하고 있어야할 때가 있습니다. 앞뒤로 길이 막히고 도망갈 구멍도 없이 하나님의 훈련을 받아야 할 때가 있습니다. 이런 훈련을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를 겸손하게 하시고 믿음의 사람으로 연단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그리스도의 강한 군사로 키우기 위해서 죽은 개 훈련을 시키십니다. 밑바닥을 박박 기는 가운데 자기를 발견하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열매 문제로 이렇게 낮추시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우리를 낮추기 위해서 사람 막대기와 인생 채찍을 쓰십니다.
서울대 미대를 다니던 한 자매님이 있었습니다. 그 분은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가정의 핍박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 아버지는 추운 겨울날 혁대로 그 딸을 사정없이 때리고 쫓아냈습니다. 이 자매님은 죽도록 얻어 맞고 이사무엘 선교사님의 위로를 받기 위해서 그 집을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이사무엘 선교사님은 머리만 빼꼼 내미시더니 들어오라고도 하지 않으시고 문을 닫아버리셨습니다. 위로와 보살핌을 받기 위해서 찾아 왔는데 이렇게 매몰차게 대하시다니 서운한 생각이 들었지만 이 자매님은 이로 인해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바라보고 개인 신앙을 갖게 되었습니다. 가정의 핍박을 극복하고 강인한 믿음의 여인이 되었습니다. 이 분은 여성이었지만 스탭목자로 세움을 입고 전요한목자님을 동역하면서 종로 학생회를 섬기셨습니다. 그리고 무수히 많은 믿음의 용사들을 키워내셨습니다. 그분은 지금도 시카고에서 가장 큰 요회 역사를 섬기고 계십니다.
여자는 예수님의 모욕적인 말씀에 어떻게 대답했습니까? 27절을 보십시오. “여자가 가로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 여자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주님의 말씀이 옳다고 했습니다. 여인은 주권 신앙이 있었습니다. 여인은 자신을 개라고 인정했습니다. 여인은 겸손했습니다. 이 여인의 마음 밭은 좋은 마음 밭이었습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의 말씀을 그대로 단순하게 영접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용기를 주든 실망을 주든지 간에 무조건 믿는 순수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과 싸우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있었습니다. 이 여인은 풍부한 유우머 감각이 있었습니다. 이 여인의 내면은 참으로 건강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겸손한 여인의 마음에 지혜를 주셨습니다.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서양사람들은 빵을 찢어서 먹었기 때문에 부스러기가 나왔습니다. 여인은 주님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 같은 은혜만으로도 자기의 딸이 나음을 받을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여인은 예수님의 부스러기 같은 능력으로도 흉악한 귀신을 쫓아낼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예수님의 상은 풍성해서 부스러기도 많이 나옵니다.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요1:16).” 믿음이 있는 사람을 세상이 감당하지 못합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을 주님은 어떻게 여기십니까?
28절을 보십시오.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시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헬라어 원문에는 “오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라로 되어 있습니다. 오! 여자야, 오! 여자야, 예수님은 여인의 믿음에 감탄과 놀라움을 그대로 표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앞에서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로 인해서 마음이 울적하셨습니다. 그런데 여인의 믿음으로 인해서 매우 기쁘셨습니다. 여인의 믿음을 볼 때 힘들었던 마음이 씻은 듯이 사라지고 기쁨이 충만해지셨습니다. 예수님은 믿음이 있는 여자를 마음껏 축복하셨습니다.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시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여자의 믿음 속에는 주님께 대한 신뢰, 확신, 겸손, 인내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11:6).”
우리는 하나님의 역사를 섬길 때 사단의 공격을 받습니다. 사단은 여인의 딸을 공격하여 흉악하게 만들었습니다. 사단이 역사할 때 우리는 사람과 싸우기 쉽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원수는 마귀 사단입니다. 마귀와의 싸움은 기도로 싸우는 것입니다. 마귀는 기도하는 사람을 가장 두려워합니다. 마귀는 대적해야 합니다. 마귀는 우는 사자와 같이 우리를 삼키려고 달려듭니다. 우리로 하여금 자기 연민에 빠지게 합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 사이를 이간질을 시킵니다. 마귀는 우리의 공동체를 허무는 여우와 같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하려고 하면 마귀와의 싸움에 능해야 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고 기도하는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은 그 능력을 나타내십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고 기도하는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은 역사하십니다. 싸움에는 영적인 싸움과 육적인 싸움이 있습니다. 육적인 싸움은 인간 갈등을 증폭시킵니다. 그러나 영적인 싸움을 할 때 자기를 발견하게 되고 영적인 눈이 뜨이고 성장하게 됩니다. 영적인 싸움에서 승리할 때 우리는 더욱 강하게 됩니다. 우리가 사단과의 싸움을 할 때 하나님의 말씀인 성령의 검을 사용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두 날 가진 검과 같습니다. 영과 혼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는 힘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면 귀신의 세력이 떠나갑니다. 이번 수양회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여 모든 악령의 세력이 떠나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자 멀리 있던 딸이 그 시로 나음을 입게 되었습니다. 믿음의 기도는 한국에서 할지라도 미국과 영국과 우즈베키스탄과 태국과 일본과 중국과 독일에서도 능력있게 역사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면 치료와 평화가 찾아옵니다.
이상에서 우리는 외식하는 크리스챤이 되지 말고 심정의 사람들이 되고 긍휼의 사람들이 되어야 함을 배웠습니다. 그때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고 우리의 믿음을 키우실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강하게 연단되어 어려운 이 시대를 이기고 흉악히 귀신들린 양떼들을 능히 치료하는 믿음의 용사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마음을 시원하게 하는 믿음의 사람들이 다 되기를 기도합니다.
말씀 / 마태복음 15:1-28
요절 / 마태복음 15:28
네 믿음이 크도다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시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우리는 지난 주 오병이어로 오천명을 먹이신 예수님을 공부했습니다. 예수님은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고 하심으로 제자들이 하나님을 믿고 오천명의 무리들을 먹일 뿐만 아니라 목자로서 책임감을 갖도록 도우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과 동역을 하심으로 기적의 역사를 이루셨습니다.
오늘 본문은 1-20절에서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을 말씀하고 있고, 21-28절은 가나안 여인의 믿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오늘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을 감동시킨 가나안 여인의 믿음을 배우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1-20)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으로부터 갈릴리에 계신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떡 먹을 때에 손을 씻지 아니함으로 장로들의 유전을 범한다고 따지러 왔습니다. 여기서 손을 씻는 것은 위생과 청결을 위한 것이 아니라 종교적 관습이었습니다. 팔레스틴은 물이 귀했기 때문에 달걀 껍질에 담을 만한 물을 손 끝에서 팔꿈치 까지 흘려 보내는 것이 정결의식이었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함으로 부정한 것에 접촉됨으로 발생하게 되는 부정을 씻고 거룩하게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레 15:11절에는 “유출병 있는 자가 물로 손을 씻지 아니하고 아무든지 만지면 그 자는 옷을 빨고 물로 몸을 씻을 것이며 저녁까지 부정하리라.”고 했습니다. 여자가 달거리를 할 때에 무엇을 만지거나 의자에 앉거나 접촉하면 그것도 부정하게 여겼습니다. 오늘날 그런 규례를 지키라고 하면 많은 사람들이 웃을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부정하게 된 사람들은 물로 씻으면 정하게 된다고 가르쳤습니다. 율법에 열심이 있는 사람들은 이 가르침을 확대하여 더욱 엄격하게 지키려고 했고 만의 하나라도 실수를 하지 않기 위해서 식사 전에는 언제든지 손을 씻어야 한다는 것으로 강화를 시켰습니다. 이것을 잘 하는가 그렇지 않은가에 따라서 그 사람의 신실성을 판가름하였습니다. 그런 것을 잘 하지 못하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과 같았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살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데서 자라기를 기도합니다. 진정한 예배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마음을 보십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의 잘못된 관행을 하나 지적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네 부모를 공경하라고 하셨습니다. 또 아비나 어미를 훼방하는 자는 반드시 죽으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누구든지 아비에게나 어미에게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그 부모를 공경할 것이 없다 하여 그들의 유전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였습니다. 이것을 고르반이라고 합니다. 그들은 부모님을 공양할 것을 하나님께 드리겠다 서원하고는 얼마는 성전에 바치고 나머지는 자기 소유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부모님을 봉양해야 할 의무에서 자유하다고 여겼습니다. 그들은 장로들의 유전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장로의 유전을 앞세움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이 수천년을 지나면서도 유대인의 정체성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은 전통을 중히 여겼기 때문입니다. 전통은 하루 아침에 생긴 것이 아닙니다. 그 속에는 조상들의 지혜가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 담겨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이 좋은 전통을 지키면서 외식에 빠진 원인이 무엇입니까?
8,9절을 보십시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나님의 마음을 알지 못할 때, 하나님께 대한 사랑을 잃어버렸을 때, 하나님의 말씀보다 전통을 앞세웠을 때 그들은 외식하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의 병든 내면을 고치는 능력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병든 자아를 발견하고 말씀의 검으로 병든 것을 잘라내야 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내면적인 투쟁을 하기보다 쉬운 율법주의를 택했습니다. 장로들은 유전으로 권위를 세우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참된 권위는 말씀을 지키고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데서 나옵니다.
예수님은 무리를 불러 말씀하셨습니다. “듣고 깨달으라. 입에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11).” 예수님은 참된 정결이 무엇인지 말씀해 주셨습니다. 입으로 들어가는 것은 뒤로 나오기 때문에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마음에서 나오는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합니다. 사람의 마음 속에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적질과 거짓 증거와 훼방입니다.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요 씻지 않은 손으로 먹는 것은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합니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이를 누가 능히 알리요 마는(렘17:9). 복음 신앙은 인간의 전적 부패를 인정하고 오직 예수님과 함께 죽고 다시 살아야 새 사람이 됨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우리의 구원자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믿음으로 죄사함을 받고 성령의 충만함을 받을 때 거룩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둘째, 네 믿음이 크도다(21-28)
예수님께서 갈릴리에서 나가사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쉼을 갖고 제자들을 섬기기를 원하셨습니다. 이때 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질렀습니다.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히 귀신들렸나이다.” 가나안 여인은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족속이었습니다. 수로보니게는 시리아의 페니키아를 말하는데 여기서 알파벳이 나왔고 매우 발달된 문명이 있었습니다. 이 여인은 이방인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원수였던 가나안인이었습니다. 이런 여인이 예수님께 나아온 것은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h
그런데 이 여인의 사랑하는 딸이 흉악한 귀신에 들렸습니다. 귀신이 들려서 괴성을 지르고 눈이 뒤집히고 사단의 지배를 받아서 미친 듯이 거리를 쏘다니고 욕을 하고 사람의 힘으로 제어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혀를 차며 이 여인을 동정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흉악한 귀신의 세력에서 딸을 해방시킬 수 있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러던 차에 예수님께서 두로와 시돈에 오셨다는 소문을 들었는데 그 분이 자기 동네에 들어오셨다는 것이었습니다. 여인은 예수님께 나아가서 소리를 질렀습니다. 소리를 질렀다는 말은 산고를 겪는 여인의 부르짖음과 같은 단어입니다. 이 여인은 이방인임에도 예수님을 메시야로 고백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방 지역에서 자신을 메시야로 부르는 여인을 볼 때 기특하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흉악히 귀신들린 딸을 고쳐 달라는 여인의 말은 가슴을 저미게 하는 호소력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여인의 고통을 잘 아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여인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이 여인이 예수님을 메시야로 인정한다고 하지만 믿음이 약했습니다. 그러나 훈련을 받을 만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분명한 의도를 가지고 여인을 대하기 시작하셨습니다. 예수님의 태도가 어떠했습니까? 예수님은 한 말씀도 대답지 아니하셨습니다. 여인이 볼 때 예수님이 무뚝뚝하고 너무 냉담해 보였습니다. 여인의 간절한 호소에도 불구하고 한 말씀도 대답지 않는 것을 볼 때 여인은 상당히 당황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인은 예수님을 변함없이 신뢰했습니다. 예수님의 태도에 감정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목자님의 태도가 냉담한 것 같으면 나를 미워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기 쉽습니다. 상처를 받고 여러 가지 오해를 하기 쉽습니다. 특히 우리나라 사람들은 매우 감정적이기 때문에 냉담한 반응을 보면 원수같이 여깁니다. 또 우리는 예수님이 침묵하실 때 답답함을 느낍니다.
이런 분위기를 감지한 제자들은 여인의 처지를 딱하게 여기고 예수님께 와서 간청을 하였습니다.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보내소서(23).” 제자들의 말을 볼 때 여인은 침묵하시는 예수님의 뒤를 따라오면서 계속 도와달라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제자들은 이 여인이 귀찮았습니다. 제자들은 명령조로 예수님께 부탁을 드렸습니다. 여인을 고쳐서 보내든지 쫓아 보내든지 보내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대답하셨습니다.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이 말을 여인이 들었을 때 인종차별을 느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 대한 실망과 혐오감을 나타내기 쉬웠습니다. 세상의 구원자로 왔다더니 거짓이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반대로 제자들은 유대인으로서 자부심을 느꼈습니다. 구원이 유대인으로부터 이방인으로 흘러간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한편 예수님은 자기의 사역의 한계를 말씀하시면서 여인을 훈련하셨습니다. 여인은 예수님의 분명한 태도를 볼 때 이방인으로서 열등감을 느끼고 포기하기 쉬웠습니다.
그런데 여자는 다시 겸손한 자세로 예수님께 도우심을 구했습니다. 25절을 보십시오. “여자가 와서 예수께 절하며 가로되 주여 저를 도우소서” 절했다는 것은 경배했다는 것입니다. 이는 동방 박사들이 경배한 것과 같은 자세요, 문둥병자가 절하면서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 라면서 간구했던 자세요, 나이 많은 회당장 야이로가 예수님께 절하였던 자세요, 제자들이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했던 자세입니다. 여인은 예수님의 배척하는 듯한 말씀에도 물러서지 않고 예수님을 경배의 대상으로 높였습니다. 이 정도 되면 여인도 대단한 사람입니다. 딸에 대한 사랑과 구원의 길이 예수님뿐이라는 것을 알았기에 여인은 끈질기게 예수님을 붙잡았습니다. 꿇어 절하는 여인의 자세는 진지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여자에게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26절을 보십시오. “대답하여 가라사대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우리는 이런 경우를 설상가상(雪上加霜)이라고 합니다. 추운 겨울에 떨고 있는데 그 얼굴에 찬물을 끼얹는 것과 같습니다. 엎친 데 덮친 격이라는 말입니다. 여인은 최대한 겸손하게 은혜를 구하는데 개라 말씀하시니 너무 하신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예수님은 겸손하고 온유하신 분이신데 이 말씀을 들으면 온유라는 것이 얼마나 강한 속성을 가진 것인가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자녀는 유대인들이요 개는 이방인들을 지칭하는 것입니다. 개라는 말이 애완용 개를 가리킨다고 할지라도 이는 매우 신랄할 말씀입니다. 여인의 마음에 아픔을 느끼게 하는 말씀입니다. 여인의 자존심이 팍 상하고 모멸감을 느끼게 하는 말씀이었습니다. 여자들은 감정이 매우 예민하고 분위기에 민감합니다. 그리고 여인의 자존심에 상처를 내면 누구나 혹독한 댓가를 치루게 됩니다. 자존심에 상처를 받은 여인은 복수심으로 타오르게 됩니다. 여자의 마음이 상하면 오뉴월에도 서릿발이 내린다고 합니다. 이 여인이 칼을 들고 덤벼들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아니면 그래 나보고 개라고 그럼 어디 한번 물려봐라 하고 물어뜯고자 대들 수도 있었습니다. 여인이 열등감이 있었다면 마음이 무너져 내렸을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며 통곡을 할 수도 있었습니다.
사랑이 많고 무리들을 불쌍히 여기시는 예수님께서 왜 이러시는 것입니까? 예수님은 여인의 믿음을 시험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여인의 믿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믿음을 더 강하게 하기 위해서 이렇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흉악히 귀신들린 딸을 둔 여인을 불쌍히 여기고 금방 고쳐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여인을 제자로 키우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믿음이 자라도록 강하게 도전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을 키우기 원하시는데 특히 믿음을 키워주기를 원하십니다. 이방 땅에서 여인이 믿음으로 살려면 강한 믿음이 필요했습니다. 예수님은 여인의 인생 전체를 돕고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키우실 때 죽은 개 훈련을 시키십니다. 다윗도 왕으로 세움을 입었지만 그가 통일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사명을 감당하려면 연단이 필요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광야에서 사울에게 쫓겨 다니면서 고난을 받게 하시고 믿음을 연단하셨습니다. 그는 사울에게 쫓겨 다닐 때 “이스라엘 왕이 누구를 따라 나왔으며 누구를 쫓나이까 죽은 개나 벼룩을 쫓음이니이다(삼상 24:14).” 그는 자신을 죽은 개요 벼룩이라고 불렀습니다. 또 한번은 블레셋 왕의 부하들이 그를 의심하자 살기 위해서 “그들의 앞에서 그 행동을 변하여 미친 체하고 대문짝에 그적거리며 침을 수염에 흘렸습니다(삼상 21:13).” 다윗은 압살롬의 반역으로 도망을 갈 때에 시므이가 따라오면서 피를 흘린 자여 비루한 자여 가거라 가거라는 저주를 들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다윗의 부하들은 분노하여 그를 당장에 죽이고자 했지만 그는 여호와께서 저에게 다윗을 저주하라 하심이니 저주하게 버려두라고 했습니다. 다윗은 정말로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주권을 믿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이런 그를 하나님께서는 사랑하시고 높여주셨습니다. 우리도 믿음으로 살다보면 죽은 개와 같을 때가 있습니다. 낮아질 대로 낮아지고 밟힐 대로 밟혀서 찍소리도 못하고 있어야할 때가 있습니다. 앞뒤로 길이 막히고 도망갈 구멍도 없이 하나님의 훈련을 받아야 할 때가 있습니다. 이런 훈련을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를 겸손하게 하시고 믿음의 사람으로 연단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그리스도의 강한 군사로 키우기 위해서 죽은 개 훈련을 시키십니다. 밑바닥을 박박 기는 가운데 자기를 발견하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열매 문제로 이렇게 낮추시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우리를 낮추기 위해서 사람 막대기와 인생 채찍을 쓰십니다.
서울대 미대를 다니던 한 자매님이 있었습니다. 그 분은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가정의 핍박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 아버지는 추운 겨울날 혁대로 그 딸을 사정없이 때리고 쫓아냈습니다. 이 자매님은 죽도록 얻어 맞고 이사무엘 선교사님의 위로를 받기 위해서 그 집을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이사무엘 선교사님은 머리만 빼꼼 내미시더니 들어오라고도 하지 않으시고 문을 닫아버리셨습니다. 위로와 보살핌을 받기 위해서 찾아 왔는데 이렇게 매몰차게 대하시다니 서운한 생각이 들었지만 이 자매님은 이로 인해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바라보고 개인 신앙을 갖게 되었습니다. 가정의 핍박을 극복하고 강인한 믿음의 여인이 되었습니다. 이 분은 여성이었지만 스탭목자로 세움을 입고 전요한목자님을 동역하면서 종로 학생회를 섬기셨습니다. 그리고 무수히 많은 믿음의 용사들을 키워내셨습니다. 그분은 지금도 시카고에서 가장 큰 요회 역사를 섬기고 계십니다.
여자는 예수님의 모욕적인 말씀에 어떻게 대답했습니까? 27절을 보십시오. “여자가 가로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 여자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주님의 말씀이 옳다고 했습니다. 여인은 주권 신앙이 있었습니다. 여인은 자신을 개라고 인정했습니다. 여인은 겸손했습니다. 이 여인의 마음 밭은 좋은 마음 밭이었습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의 말씀을 그대로 단순하게 영접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용기를 주든 실망을 주든지 간에 무조건 믿는 순수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과 싸우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있었습니다. 이 여인은 풍부한 유우머 감각이 있었습니다. 이 여인의 내면은 참으로 건강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겸손한 여인의 마음에 지혜를 주셨습니다.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서양사람들은 빵을 찢어서 먹었기 때문에 부스러기가 나왔습니다. 여인은 주님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 같은 은혜만으로도 자기의 딸이 나음을 받을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여인은 예수님의 부스러기 같은 능력으로도 흉악한 귀신을 쫓아낼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예수님의 상은 풍성해서 부스러기도 많이 나옵니다.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요1:16).” 믿음이 있는 사람을 세상이 감당하지 못합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을 주님은 어떻게 여기십니까?
28절을 보십시오.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시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헬라어 원문에는 “오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라로 되어 있습니다. 오! 여자야, 오! 여자야, 예수님은 여인의 믿음에 감탄과 놀라움을 그대로 표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앞에서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로 인해서 마음이 울적하셨습니다. 그런데 여인의 믿음으로 인해서 매우 기쁘셨습니다. 여인의 믿음을 볼 때 힘들었던 마음이 씻은 듯이 사라지고 기쁨이 충만해지셨습니다. 예수님은 믿음이 있는 여자를 마음껏 축복하셨습니다.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시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여자의 믿음 속에는 주님께 대한 신뢰, 확신, 겸손, 인내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11:6).”
우리는 하나님의 역사를 섬길 때 사단의 공격을 받습니다. 사단은 여인의 딸을 공격하여 흉악하게 만들었습니다. 사단이 역사할 때 우리는 사람과 싸우기 쉽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원수는 마귀 사단입니다. 마귀와의 싸움은 기도로 싸우는 것입니다. 마귀는 기도하는 사람을 가장 두려워합니다. 마귀는 대적해야 합니다. 마귀는 우는 사자와 같이 우리를 삼키려고 달려듭니다. 우리로 하여금 자기 연민에 빠지게 합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 사이를 이간질을 시킵니다. 마귀는 우리의 공동체를 허무는 여우와 같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하려고 하면 마귀와의 싸움에 능해야 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고 기도하는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은 그 능력을 나타내십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고 기도하는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은 역사하십니다. 싸움에는 영적인 싸움과 육적인 싸움이 있습니다. 육적인 싸움은 인간 갈등을 증폭시킵니다. 그러나 영적인 싸움을 할 때 자기를 발견하게 되고 영적인 눈이 뜨이고 성장하게 됩니다. 영적인 싸움에서 승리할 때 우리는 더욱 강하게 됩니다. 우리가 사단과의 싸움을 할 때 하나님의 말씀인 성령의 검을 사용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두 날 가진 검과 같습니다. 영과 혼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는 힘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면 귀신의 세력이 떠나갑니다. 이번 수양회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여 모든 악령의 세력이 떠나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자 멀리 있던 딸이 그 시로 나음을 입게 되었습니다. 믿음의 기도는 한국에서 할지라도 미국과 영국과 우즈베키스탄과 태국과 일본과 중국과 독일에서도 능력있게 역사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면 치료와 평화가 찾아옵니다.
이상에서 우리는 외식하는 크리스챤이 되지 말고 심정의 사람들이 되고 긍휼의 사람들이 되어야 함을 배웠습니다. 그때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고 우리의 믿음을 키우실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강하게 연단되어 어려운 이 시대를 이기고 흉악히 귀신들린 양떼들을 능히 치료하는 믿음의 용사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마음을 시원하게 하는 믿음의 사람들이 다 되기를 기도합니다.
첨부파일
-
data/message1/03mt21.hwp (0byte)
69회 다운로드 | DATE : 2003-07-20 12:13:40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