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마18강(13:1-23)/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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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마태복음 제 18 강
말씀 / 마태복음 13:1-23
요절 / 마태복음 13:23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
“좋은 땅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혹 백 배, 혹 육십 배, 혹 삼십 배가 되느니라.”
예수님께서는 무리들을 가르치실 때 비유를 사용하셨습니다. 오늘 말씀은 천국 비유 중에서 가장 중요한 씨 뿌리는 자의 비유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어떻게 듣는가에 따라서 열매를 맺을 수도 있고 맺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말씀을 제대로 듣고 지키면 백배의 결실을 하게 됩니다. 말씀의 씨를 뿌리는 것이 너무 낭비하는 것 같지만 한 말씀이라도 심겨서 자라면 풍성한 추수를 하게 됩니다. 추수 때에는 씨를 뿌리던 때의 모든 노고를 잊고 감사와 기쁨이 충만하게 됩니다. 우리가 오늘 말씀을 통해서 백배의 열매를 맺는 비결을 배우기를 기도합니다.
I. 씨 뿌리는 자의 비유(1-17)
예수님께서 집에서 나가서 바닷가에 앉으셨습니다. 시원한 바닷가에는 배들이 있었고 새들이 버려진 고기를 주워 먹으려고 떼를 지어 몰려 다녔습니다. 영적으로 굶주린 큰 무리가 예수님 주위로 하나 둘 모여 들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은 무리들에게 떠밀려 배에 올라가 앉으시고 온 무리는 해변에 섰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바람을 타고 무리들의 귓가에 울려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무리들은 행복했습니다. 그들의 영혼은 배부름을 느끼고 하나님 나라의 소망으로 인해 큰 위로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을 전하실 때 멀리 보이는 들판에서 농부들이 씨를 뿌리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비유로 여러 가지를 저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비유란 빗대어 말하는 것인데 예수님께서 쓰신 가장 보편적이고 특징있는 대화법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일상적인 일들을 기초로 천국의 비밀을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의 1/3이 비유입니다. 비유가 진리를 나타내는 도구 역할을 하지만 비유 자체가 진리입니다. 예수님의 비유는 대중성이 있었고 그 주제는 하나님 나라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씨 뿌리는 자가 나가서 씨를 뿌렸습니다. 유대인들은 먼저 씨를 뿌린 다음에 경작하는 농사법을 택했습니다. 우리나라의 산골에서 화전민들은 그런 방식을 택합니다. 무조건 씨를 뿌리고 나중에 밭을 일굽니다. 한 농부가 씨를 뿌렸는데 더러는 길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고 더러는 흙이 얇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해가 돋은 후에 타져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라버렸습니다.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혹 백배, 혹 육십 배, 혹 삼십 배의 결실을 하였습니다.
씨를 뿌리는 농부는 씨앗을 아끼지 않고 뿌렸습니다. 그래서 씨앗은 이곳저곳 어느 곳에나 떨어졌습니다. 아낌없이 씨를 뿌리는 농부는 마치 하늘나라를 위해 일하는 사람과 같습니다. 그는 씨앗을 허비하듯이 뿌려댔고 될 수 있는 대로 넓은 곳으로 뿌려댔습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자비와 긍휼을 모든 사람에게 쏟아 부으시는 것과 같았습니다. 당연히 이 농부는 잃는 것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아무 문제도 되지 않았습니다. 비록 농부의 수고한 것이 헛되고 씨앗의 낭비는 많았지만 이 농부는 백 배, 육십 배, 삼십 배의 결실을 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일을 하면 농부가 씨를 뿌리는 것처럼 손해도 많이 나지만 엄청난 열매를 추수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어느 곳에 씨를 뿌려야 좋은지 모른 채 복음을 들고 캠퍼스로 나갑니다. 전도자는 많은 어려움을 당합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지만 때로는 냉소를 당하기도 하고 복음을 아무리 전해도 교회가 성장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비유의 약속은 놀랍습니다. 우리는 씨를 계속 뿌려야 합니다. 끊임없이 복음을 선포하고 하나님 나라의 긍휼과 자비를 아낌없이 보여 주어야 합니다. 우리가 전도하지 않고 일대일에 열심을 내지 않는다면 추수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당장 많은 열매를 거두려고 하기보다 먼저 많이 넓게 뿌려야 합니다. 개인 전도도 해야 하고 전도지를 잘 만들어서 뿌리기도 해야 하고 인터넷 방송으로도 말씀의 씨를 뿌리고 간증을 하면서 말씀의 씨를 뿌려야 합니다. 우리가 당장 열매를 거두지 못해도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때에 거두십니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방법으로, 보지 못하는 장소에서 이 복음의 씨앗이 옥토에 떨어지고 하나님께서는 풍요로운 추수를 거두십니다. 귀 있는 자는 들으라(9). 귀 있는 사람은 들으라는 말씀은 주의를 집중해서 듣되 마음을 열고 들으라는 요청입니다. 예수님께서 천국 비밀을 비유로 가르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첫째, 천국의 진리를 더 쉽게 더 깊게 전하기 위해서였습니다(10-12,16-17,35). 35절을 볼 때 비유는 창세로부터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려 함입니다. 비유는 일상생활의 친숙한 상황을 예를 들어 말함으로써 천국의 비밀을 쉽게 납득하도록 합니다. 우리는 누가복음 15장에서 탕자의 비유를 통해 잃어버린 아들을 기다리는 하나님의 간절한 사랑과 마음을 감동력 있게 깨달을 수 있습니다. 또한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통해서 참 내 이웃이 누구인가를 쉽게 깨달을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주님은 참으로 신비롭고 깊은 천국의 비밀을 제자들에게 쉽게 가르치고자 비유를 사용하였습니다.
둘째, 배척하는 자들에게 진리를 감추기 위해서였습니다(13-15).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를 예수님에 대해 반대하고 배척하는 사람들이 주시하는 가운데 말씀하셨습니다. 들을 귀가 있어서 말씀을 영접하는 자들은 구원에 이르게 되지만 말씀을 영접치 않고 완악하여 예수님을 배척하고 핍박하고 말씀을 듣고 꼬투리를 잡아 예수님을 고소하고자 하는 자들에 대해서 진리를 감추십니다. 주님은 이사야서 말씀(6:9,10)을 인용하여 그 당시 유대인들의 완악한 반대와 배척 가운데서 말씀이 전파된다고 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은 완악하여 포로로 잡혀가고 심한 고난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회개치 않았고 예수님께서 오셔서 말씀을 전해도 듣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완고하여 말씀을 영접치 않는 책임은 결국 그들에게 있습니다.
이와 같이 완악한 자들과는 대조적으로 천국의 비밀의 깨닫는 자들의 축복이 어떠합니까? 16,17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많은 선지자와 의인이 너희 보는 것들을 보고자 하여도 보지 못하였고 너희 듣는 것들을 듣고자 하여도 듣지 못하였느니라” 예수님은 그 당시 종교지도자들의 완악함과는 대조적으로 제자들과 무리들이 말씀을 민감하게 알아듣자 그 축복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이 복이 있는 것은 메시야를 친히 보고 그 말씀을 들을 수 있는 특권을 누렸기 때문입니다. 그 동안 수많은 선지자들이 지금 그들이 보고 있는 메시야를 보고 싶었으나 직접 보지 못했고 또한 메시야의 말씀을 직접 듣고 싶었으나 듣지 못했습니다. 오늘날 신자들은 믿음을 통해 이미 오신 메시야를 바라볼 수 있습니다(히11:1).
II. 씨 뿌리는 자의 비유 해석(18-23)
첫째, 길가(18,19)
19절을 보십시오. “아무나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는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리운 것을 빼앗나니 이는 곧 길가에 뿌리운 자요” 길가에 뿌려진 씨는 새들이 와서 먹어버렸다고 했습니다. 새는 사탄을 의미합니다. 사탄은 하나님의 영광을 훼방하고 사람들이 구원에 이르지 못하도록 방해를 합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습니다. 그러므로 사탄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하도록 방해를 합니다. 말씀을 들을 때에 졸게 한다든지 헛생각을 하도록 하여 말씀 듣는 것을 방해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정보화 시대입니다. 정보들이 홍수처럼 넘치고 있습니다. 너무 많은 정보로 인해 현대 지성인들은 심히 피곤하고 지친 가운데 있습니다. 그 많은 정보를 하나 하나 진지하게 다 듣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도 세상에 넘치는 정보와 같이 생각하고 취급합니다. 특히 사단은 오늘날 청년들의 마음을 인터넷과 영상을 통해서 빼앗고 성경에 나오는 인물들을 패러디해서 말씀에 대한 선입관을 갖게 합니다. 영상을 통해서 보는 것에 익숙한 사람들은 말씀을 듣고 생각하지를 못하고 멍한 상태로 앉아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길가에 아무리 많은 씨를 뿌려봤자 씨는 싹을 낼 수 없을 것입니다. 길가와 같은 마음의 특징은 완악하다는 것입니다. 길가의 특징은 단단하고 굳은 상태입니다. 굳어진 마음은 마음 문을 꼭 닫고 폐쇄적입니다. 마음 문이 굳게 닫혀 있기 때문에 말씀의 씨가 떨어지더라도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말씀을 이해할 수도 없고 용납할 수도 없습니다. 길가와 같은 마음은 깨닫지 못한 마음 밭을 말합니다. 길가와 같은 마음은 진리의 말씀을 듣더라도 그 뜻을 전혀 깨닫지 못합니다. 말씀의 뜻을 깨닫지 못한 사람은 믿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 사람은 니고데모와 같이 세상에서 아무리 많은 세상적인 지식과 지혜를 가졌다 하더라도 무지몽매한 사람입니다. 구원의 진리인 복음을 듣고도 깨닫지 못하고 영접치 않은 사람처럼 어리석은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때로는 우리들도 마음이 완악할 때가 있습니다. 말씀을 들을 때 길가와 같은 강퍅한 심령을 가질 때가 있습니다. 그 때마다 회개하고 겸손하고 온유한 심령으로 돌이켜야 겠습니다.
길가와 같은 마음 밭도 영원히 운명적으로 희망이 없는 밭은 아닙니다. 길바닥도 괭이로 파고 뒤집어 잘 가꾸면 좋은 밭으로 만들 수가 있습니다. 여러 차례 땅을 파서 뒤집고 물을 주고 가꾸면 옥토로 변화될 수가 있습니다. 아무리 완악하고 깨닫지 못하는 사람도 환란을 당하면서 심령이 부드러워 지고 말씀을 영접하는 것을 우리는 가끔 보게 됩니다. 하나님은 길바닥과 같은 완악한 사람도 사람 막대기와 인생 환난을 통해서 그 완악한 마음을 깨고 옥토로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양들을 위해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그 심령을 돌이키고 변화시킬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둘째, 돌밭(20,21)
20,21절을 보십시오. “돌밭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을 인하여 환난이나 핍박이 일어나는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돌밭과 같은 마음 밭의 특징은 얕은 마음입니다. 바위 위에 흙이 얕게 쌓여 있는데 그곳에 말씀의 씨앗이 뿌려진 경우를 말합니다. 바위는 햇빛을 받아 따뜻해져서 뿌려진 씨앗은 쉽게 싹을 냅니다. 그러나 흙이 얕기 때문에 씨앗은 뿌리를 깊게 내릴 수가 없습니다. 돌밭과 같은 마음의 특징은 말씀이 마음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말씀을 듣고 쉽고 쉽게 깨닫습니다. 돌밭과 같은 사람은 말씀을 삼켜 버립니다. 말씀이 소화가 되지 않고 설사를 합니다. 말씀을 매우 감정적으로 받습니다. 그러니 뿌리를 제대로 내리지 못하는 것이 특징입니다. 뿌리가 없다는 것은 어떤 상태를 말합니까? 돌밭과 같은 마음은 말씀이 삶에 적용이 되지 않습니다. 그들은 말씀을 즐깁니다. 그래서 말씀으로 인한 환난이나 핍박이 올 때 곧 넘어지게 됩니다. 사실 환난이나 핍박은 우리의 신앙을 자라나게 하는 태양과 같습니다. 환난과 핍박을 통해서 우리는 믿음이 깊어지고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을 깊이 체험할 수 있습니다.
돌밭과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은 말씀에 대한 문제의식도 없습니다. 일대일 공부를 적당히 쉽게 쉽게 합니다. 공부할 때 잔잔한 기쁨도 조금 있습니다. 그러나 말씀을 공부하되 소감을 쓰지 않고자 합니다. 억지로 소감을 쓰더라도 깊이가 없습니다. 소감을 쓰지만 말씀을 깊게 묵상하지 않고 영적인 투쟁이 없습니다. 오늘날 젊은 세대들의 특징 중 하나는 독서는 하지만 묵상은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주로 영상을 통해 정보를 얻기 때문에 지식이 깊이가 없습니다. 그들은 영상매체를 통해서 얻은 정보만 가지고 그때그때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자기의 인생관과 가치관이 확고하게 서 있지 못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가는 대세대로 따라가기를 잘합니다. 그리하여 정보는 많지만 사고력이 퇴화하여 지혜가 없습니다. 우리가 마음의 돌을 캐내고 말씀이 뿌리를 내리기 까지 묵상을 하고 적용을 하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셋째, 가시떨기 밭과 같은 마음(22)
22절을 보십시오. “가시떨기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치 못하는 자요.” 가시떨기와 같은 마음 밭은 말씀도 잘 받고 세상의 잡초도 잘 자랍니다. 그러나 잡초가 너무 무성하여 쭉정이 열매만 맺게 됩니다. 가시 떨기 밭에 심겨진 잡초는 무엇입니까?
첫째로, 세상의 염려입니다. 본래 염려라는 의미는 분열을 말합니다. 감정과 생각과 판단이 세상의 욕심으로 인하여 혼돈되고 분열이 되어 모든 일에 분명한 결단이 없습니다. 가시떨기 밭과 같은 마음은 세속주의로 인해서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관심이 없습니다. 세상에 대한 지나친 염려는 그 사람의 기운을 소진시킵니다. 가시밭과 같은 마음 밭을 가진 사람은 말씀을 듣고 잘 깨달아 어느 정도 뿌리를 내립니다. 그러나 세상 염려와 근심이 매우 커서 열매의 모양은 있지만 쭉정이만 맺고 제대로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잃어버리면 염려의 종이 됩니다. 우리 가운데 성실히 일하면서도 직장에서 구조조정을 당하면 굶어죽지 않을까 또한 자녀들을 제대로 교육을 시킬 수 있을까, 건강이 갑자기 악화되어 죽지는 않을까 하는 세상 염려가 들어올 때가 있습니다. 이런 사람에게 예수님은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1-33).” 이와 같이 세상 염려가 우리 마음에 가득하면 영적인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세상 염려를 회개하고 열매가 풍성한 인생을 살아야겠습니다.
둘째로, 재리의 유혹(22b). 재리의 유혹은 속이는 것입니다. 재리의 유혹에 빠지면 사업적인 마음이 되어 마음을 뜨게 만들고 허황되게 만듭니다. 마음이 부자되는 꿈에 빼앗겨서 하나님의 말씀에 마음을 쓰지 못합니다. 그리고 마음이 유혹되어 위험 요소는 보지 못하고 다 잘되는 것만 생각하다가 망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재리의 욕심에 눈이 어두운 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딤전6:9-10a)” 이 시대는 물질주의 시대입니다. 물질이면 모든 문제를 다 해결할 수 있을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돈으로 인생의 가장 중요하고 근본적인 문제는 하나도 해결할 수 없습니다. 영적인 생명과 믿음과 성령과 지성과 인격은 돈으로 살 수 없습니다. 믿음이 잘 자라다가도 재리의 가시에 기운이 막혀 열매를 맺지 못한 신자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물질에 대한 염려가 생기면 부담감으로 인해서 영적인 일에 힘을 쓰지를 못합니다.
세상 염려와 재리의 유혹 등은 열매를 맺지 못하게 함으로 심각하게 다루어야 합니다. 우리는 염려와 탐욕이 들어올 때 잡초를 뽑듯이 자라기 전에 뿌리 뽑아야 합니다. 세상의 염려는 부족하기 때문에, 재리의 유혹은 더 가지고자 하는 탐욕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소원자체가 세상에 가 있기 때문에 마음을 하나님 나라로 향하도록 힘써야 합니다. 우리는 물질에 대한 염려대신에 자족하기를 배우고 검소하고 절제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마음이 하나님 나라의 소망으로 채워지게 해야 합니다. 스피릿이 충만해서 열매를 맺는데 모든 에너지와 마음과 물질을 써야 합니다.
넷째, 좋은 마음 밭(23)
23절을 보십시오. “좋은 땅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혹 백 배, 혹 육십 배, 혹 삼십 배가 되느니라 하시더라.” 좋은 땅이란 옥토를 말합니다. 앞에서 말한 열매 맺지 못한 세 가지 마음 밭에 있는 약점들이 다 제거된 마음을 말합니다. 좋은 땅만이 제대로 열매를 맺습니다. 좋은 땅은 굳어 있지 않고 흙이 얕지 않고 가시떨기가 자라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과 같이 심령이 가난하고 겸손하여 말씀을 영접하고 깨닫는 마음 밭입니다. 그리하여 인내로 결실을 하는 마음입니다(눅8:15). 좋은 땅과 같은 마음 밭은 성령으로 거듭난 마음입니다. 좋은 땅을 항상 유지하기 위해서는 항상 땅을 갈아주고 잡초를 뽑아주는 노동이 필요합니다. 또한 마음을 새롭게 하므로 변화를 받아야 합니다(롬12:2). 마음을 새롭게 하기 위해서는 항상 말씀을 공부하고 말씀에 의거해 진실되게 회개할 때 성령이 역사해서 마음이 새롭게 됩니다.
그러면 열매 맺는 비결이 무엇입니까?
먼저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23a). 23a를 보십시오. “좋은 땅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아무리 마음 밭이 옥토라고 해도 말씀을 들어 말씀의 씨가 뿌려지지 않으면 열매를 맺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말씀을 읽고 메시지도 듣고 일대일로 말씀을 공부 해야 합니다. 우리가 말씀을 들을 때는 정확하게 듣는 것이 중요합니다. 정확하게 듣기 위해 우리는 귀를 어떻게 사용해야할까요? 정확하게 듣기 위해 우리는 상대방이 하는 말을 끝까지 들어야 합니다. 상대방이 하는 말을 끝까지 듣지 않으면 오해에 빠지게 됩니다. 오해란 내가 상대방을 부분적으로만 알 때 자주 생기게 됩니다. 상대방의 말을 끝까지 듣는다는 말은 곧 상대방을 이해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상대방의 말을 듣는 것은 곧 상대방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상대방의 말이 들린다는 것은 곧 상대방의 마음이 들리기 시작한다는 뜻입니다. 상대방의 마음이 들리기 시작한다는 것은 곧 내가 상대에 대해 하나의 “마음”이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보아야 하는 존재가 아니라 들어야 하는 인격입니다. 하나님은 마음으로 들어야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말씀이십니다. 예수님은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통해서 자신을 계시하십니다.
다음으로 말씀을 깨달아야 합니다(23b). 23b를 보십시오. “깨닫는 자니” 말씀을 깨닫기 위해서는 말씀을 묵상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가 복 있는 자라 했습니다(시1:2). 우리는 말씀을 공부하고 깊게 묵상을 할 때 그 의미를 깨닫고 말씀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됩니다. 말씀을 안다는 것과 깨닫는 것은 차이가 있습니다. 깨달음은 눈을 뜨는 것이요 자기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깨달음이 있을 때 그의 생각과 삶이 변화됩니다. 이러한 단계에 이르기 위해서 말씀을 정확하게 보아야 하지만 무엇보다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자 힘써야 합니다. 하나님과 마음이 통해야 합니다. 우리가 복음의 핵심인 십자가와 부활에 대한 말씀을 묵상하고 확신을 가질 때 믿음의 뿌리를 깊게 내릴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말씀에 순종할 수 있습니다. 그 때 백 배, 육십 배, 삼십 배의 열매를 맺습니다. 여기에서 열매는 무엇을 말합니까? 내적으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말합니다. 예수님의 내면성의 열매를 말합니다(갈5:22,23). 또한 외적인 열매로서 일대일을 통한 제자 양성의 열매를 말합니다. 제자 양성의 열매까지 맺으려면 상당한 시간이 필요합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깨달아 열매를 맺어야겠습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 안에 있는 완악한 마음 밭을 갈아엎어야 합니다. 말씀을 듣고 회개하여 돌을 제거하고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이라는 잡초를 뽑아내야 합니다. 그리고 말씀을 깊이 묵상하고 소감을 쓰는 가운데 말씀의 씨가 우리 마음에서 자라도록 힘써야겠습니다. 주님께서 저희들 안에 백 배, 육십 배, 삼십 배의 열매를 맺도록 축복해주시기를 기도합니다.
말씀 / 마태복음 13:1-23
요절 / 마태복음 13:23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
“좋은 땅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혹 백 배, 혹 육십 배, 혹 삼십 배가 되느니라.”
예수님께서는 무리들을 가르치실 때 비유를 사용하셨습니다. 오늘 말씀은 천국 비유 중에서 가장 중요한 씨 뿌리는 자의 비유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어떻게 듣는가에 따라서 열매를 맺을 수도 있고 맺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말씀을 제대로 듣고 지키면 백배의 결실을 하게 됩니다. 말씀의 씨를 뿌리는 것이 너무 낭비하는 것 같지만 한 말씀이라도 심겨서 자라면 풍성한 추수를 하게 됩니다. 추수 때에는 씨를 뿌리던 때의 모든 노고를 잊고 감사와 기쁨이 충만하게 됩니다. 우리가 오늘 말씀을 통해서 백배의 열매를 맺는 비결을 배우기를 기도합니다.
I. 씨 뿌리는 자의 비유(1-17)
예수님께서 집에서 나가서 바닷가에 앉으셨습니다. 시원한 바닷가에는 배들이 있었고 새들이 버려진 고기를 주워 먹으려고 떼를 지어 몰려 다녔습니다. 영적으로 굶주린 큰 무리가 예수님 주위로 하나 둘 모여 들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은 무리들에게 떠밀려 배에 올라가 앉으시고 온 무리는 해변에 섰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바람을 타고 무리들의 귓가에 울려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무리들은 행복했습니다. 그들의 영혼은 배부름을 느끼고 하나님 나라의 소망으로 인해 큰 위로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을 전하실 때 멀리 보이는 들판에서 농부들이 씨를 뿌리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비유로 여러 가지를 저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비유란 빗대어 말하는 것인데 예수님께서 쓰신 가장 보편적이고 특징있는 대화법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일상적인 일들을 기초로 천국의 비밀을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의 1/3이 비유입니다. 비유가 진리를 나타내는 도구 역할을 하지만 비유 자체가 진리입니다. 예수님의 비유는 대중성이 있었고 그 주제는 하나님 나라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씨 뿌리는 자가 나가서 씨를 뿌렸습니다. 유대인들은 먼저 씨를 뿌린 다음에 경작하는 농사법을 택했습니다. 우리나라의 산골에서 화전민들은 그런 방식을 택합니다. 무조건 씨를 뿌리고 나중에 밭을 일굽니다. 한 농부가 씨를 뿌렸는데 더러는 길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고 더러는 흙이 얇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해가 돋은 후에 타져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라버렸습니다.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혹 백배, 혹 육십 배, 혹 삼십 배의 결실을 하였습니다.
씨를 뿌리는 농부는 씨앗을 아끼지 않고 뿌렸습니다. 그래서 씨앗은 이곳저곳 어느 곳에나 떨어졌습니다. 아낌없이 씨를 뿌리는 농부는 마치 하늘나라를 위해 일하는 사람과 같습니다. 그는 씨앗을 허비하듯이 뿌려댔고 될 수 있는 대로 넓은 곳으로 뿌려댔습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자비와 긍휼을 모든 사람에게 쏟아 부으시는 것과 같았습니다. 당연히 이 농부는 잃는 것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아무 문제도 되지 않았습니다. 비록 농부의 수고한 것이 헛되고 씨앗의 낭비는 많았지만 이 농부는 백 배, 육십 배, 삼십 배의 결실을 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일을 하면 농부가 씨를 뿌리는 것처럼 손해도 많이 나지만 엄청난 열매를 추수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어느 곳에 씨를 뿌려야 좋은지 모른 채 복음을 들고 캠퍼스로 나갑니다. 전도자는 많은 어려움을 당합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지만 때로는 냉소를 당하기도 하고 복음을 아무리 전해도 교회가 성장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비유의 약속은 놀랍습니다. 우리는 씨를 계속 뿌려야 합니다. 끊임없이 복음을 선포하고 하나님 나라의 긍휼과 자비를 아낌없이 보여 주어야 합니다. 우리가 전도하지 않고 일대일에 열심을 내지 않는다면 추수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당장 많은 열매를 거두려고 하기보다 먼저 많이 넓게 뿌려야 합니다. 개인 전도도 해야 하고 전도지를 잘 만들어서 뿌리기도 해야 하고 인터넷 방송으로도 말씀의 씨를 뿌리고 간증을 하면서 말씀의 씨를 뿌려야 합니다. 우리가 당장 열매를 거두지 못해도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때에 거두십니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방법으로, 보지 못하는 장소에서 이 복음의 씨앗이 옥토에 떨어지고 하나님께서는 풍요로운 추수를 거두십니다. 귀 있는 자는 들으라(9). 귀 있는 사람은 들으라는 말씀은 주의를 집중해서 듣되 마음을 열고 들으라는 요청입니다. 예수님께서 천국 비밀을 비유로 가르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첫째, 천국의 진리를 더 쉽게 더 깊게 전하기 위해서였습니다(10-12,16-17,35). 35절을 볼 때 비유는 창세로부터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려 함입니다. 비유는 일상생활의 친숙한 상황을 예를 들어 말함으로써 천국의 비밀을 쉽게 납득하도록 합니다. 우리는 누가복음 15장에서 탕자의 비유를 통해 잃어버린 아들을 기다리는 하나님의 간절한 사랑과 마음을 감동력 있게 깨달을 수 있습니다. 또한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통해서 참 내 이웃이 누구인가를 쉽게 깨달을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주님은 참으로 신비롭고 깊은 천국의 비밀을 제자들에게 쉽게 가르치고자 비유를 사용하였습니다.
둘째, 배척하는 자들에게 진리를 감추기 위해서였습니다(13-15).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를 예수님에 대해 반대하고 배척하는 사람들이 주시하는 가운데 말씀하셨습니다. 들을 귀가 있어서 말씀을 영접하는 자들은 구원에 이르게 되지만 말씀을 영접치 않고 완악하여 예수님을 배척하고 핍박하고 말씀을 듣고 꼬투리를 잡아 예수님을 고소하고자 하는 자들에 대해서 진리를 감추십니다. 주님은 이사야서 말씀(6:9,10)을 인용하여 그 당시 유대인들의 완악한 반대와 배척 가운데서 말씀이 전파된다고 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은 완악하여 포로로 잡혀가고 심한 고난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회개치 않았고 예수님께서 오셔서 말씀을 전해도 듣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완고하여 말씀을 영접치 않는 책임은 결국 그들에게 있습니다.
이와 같이 완악한 자들과는 대조적으로 천국의 비밀의 깨닫는 자들의 축복이 어떠합니까? 16,17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많은 선지자와 의인이 너희 보는 것들을 보고자 하여도 보지 못하였고 너희 듣는 것들을 듣고자 하여도 듣지 못하였느니라” 예수님은 그 당시 종교지도자들의 완악함과는 대조적으로 제자들과 무리들이 말씀을 민감하게 알아듣자 그 축복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이 복이 있는 것은 메시야를 친히 보고 그 말씀을 들을 수 있는 특권을 누렸기 때문입니다. 그 동안 수많은 선지자들이 지금 그들이 보고 있는 메시야를 보고 싶었으나 직접 보지 못했고 또한 메시야의 말씀을 직접 듣고 싶었으나 듣지 못했습니다. 오늘날 신자들은 믿음을 통해 이미 오신 메시야를 바라볼 수 있습니다(히11:1).
II. 씨 뿌리는 자의 비유 해석(18-23)
첫째, 길가(18,19)
19절을 보십시오. “아무나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는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리운 것을 빼앗나니 이는 곧 길가에 뿌리운 자요” 길가에 뿌려진 씨는 새들이 와서 먹어버렸다고 했습니다. 새는 사탄을 의미합니다. 사탄은 하나님의 영광을 훼방하고 사람들이 구원에 이르지 못하도록 방해를 합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습니다. 그러므로 사탄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하도록 방해를 합니다. 말씀을 들을 때에 졸게 한다든지 헛생각을 하도록 하여 말씀 듣는 것을 방해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정보화 시대입니다. 정보들이 홍수처럼 넘치고 있습니다. 너무 많은 정보로 인해 현대 지성인들은 심히 피곤하고 지친 가운데 있습니다. 그 많은 정보를 하나 하나 진지하게 다 듣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도 세상에 넘치는 정보와 같이 생각하고 취급합니다. 특히 사단은 오늘날 청년들의 마음을 인터넷과 영상을 통해서 빼앗고 성경에 나오는 인물들을 패러디해서 말씀에 대한 선입관을 갖게 합니다. 영상을 통해서 보는 것에 익숙한 사람들은 말씀을 듣고 생각하지를 못하고 멍한 상태로 앉아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길가에 아무리 많은 씨를 뿌려봤자 씨는 싹을 낼 수 없을 것입니다. 길가와 같은 마음의 특징은 완악하다는 것입니다. 길가의 특징은 단단하고 굳은 상태입니다. 굳어진 마음은 마음 문을 꼭 닫고 폐쇄적입니다. 마음 문이 굳게 닫혀 있기 때문에 말씀의 씨가 떨어지더라도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말씀을 이해할 수도 없고 용납할 수도 없습니다. 길가와 같은 마음은 깨닫지 못한 마음 밭을 말합니다. 길가와 같은 마음은 진리의 말씀을 듣더라도 그 뜻을 전혀 깨닫지 못합니다. 말씀의 뜻을 깨닫지 못한 사람은 믿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 사람은 니고데모와 같이 세상에서 아무리 많은 세상적인 지식과 지혜를 가졌다 하더라도 무지몽매한 사람입니다. 구원의 진리인 복음을 듣고도 깨닫지 못하고 영접치 않은 사람처럼 어리석은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때로는 우리들도 마음이 완악할 때가 있습니다. 말씀을 들을 때 길가와 같은 강퍅한 심령을 가질 때가 있습니다. 그 때마다 회개하고 겸손하고 온유한 심령으로 돌이켜야 겠습니다.
길가와 같은 마음 밭도 영원히 운명적으로 희망이 없는 밭은 아닙니다. 길바닥도 괭이로 파고 뒤집어 잘 가꾸면 좋은 밭으로 만들 수가 있습니다. 여러 차례 땅을 파서 뒤집고 물을 주고 가꾸면 옥토로 변화될 수가 있습니다. 아무리 완악하고 깨닫지 못하는 사람도 환란을 당하면서 심령이 부드러워 지고 말씀을 영접하는 것을 우리는 가끔 보게 됩니다. 하나님은 길바닥과 같은 완악한 사람도 사람 막대기와 인생 환난을 통해서 그 완악한 마음을 깨고 옥토로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양들을 위해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그 심령을 돌이키고 변화시킬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둘째, 돌밭(20,21)
20,21절을 보십시오. “돌밭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을 인하여 환난이나 핍박이 일어나는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돌밭과 같은 마음 밭의 특징은 얕은 마음입니다. 바위 위에 흙이 얕게 쌓여 있는데 그곳에 말씀의 씨앗이 뿌려진 경우를 말합니다. 바위는 햇빛을 받아 따뜻해져서 뿌려진 씨앗은 쉽게 싹을 냅니다. 그러나 흙이 얕기 때문에 씨앗은 뿌리를 깊게 내릴 수가 없습니다. 돌밭과 같은 마음의 특징은 말씀이 마음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말씀을 듣고 쉽고 쉽게 깨닫습니다. 돌밭과 같은 사람은 말씀을 삼켜 버립니다. 말씀이 소화가 되지 않고 설사를 합니다. 말씀을 매우 감정적으로 받습니다. 그러니 뿌리를 제대로 내리지 못하는 것이 특징입니다. 뿌리가 없다는 것은 어떤 상태를 말합니까? 돌밭과 같은 마음은 말씀이 삶에 적용이 되지 않습니다. 그들은 말씀을 즐깁니다. 그래서 말씀으로 인한 환난이나 핍박이 올 때 곧 넘어지게 됩니다. 사실 환난이나 핍박은 우리의 신앙을 자라나게 하는 태양과 같습니다. 환난과 핍박을 통해서 우리는 믿음이 깊어지고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을 깊이 체험할 수 있습니다.
돌밭과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은 말씀에 대한 문제의식도 없습니다. 일대일 공부를 적당히 쉽게 쉽게 합니다. 공부할 때 잔잔한 기쁨도 조금 있습니다. 그러나 말씀을 공부하되 소감을 쓰지 않고자 합니다. 억지로 소감을 쓰더라도 깊이가 없습니다. 소감을 쓰지만 말씀을 깊게 묵상하지 않고 영적인 투쟁이 없습니다. 오늘날 젊은 세대들의 특징 중 하나는 독서는 하지만 묵상은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주로 영상을 통해 정보를 얻기 때문에 지식이 깊이가 없습니다. 그들은 영상매체를 통해서 얻은 정보만 가지고 그때그때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자기의 인생관과 가치관이 확고하게 서 있지 못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가는 대세대로 따라가기를 잘합니다. 그리하여 정보는 많지만 사고력이 퇴화하여 지혜가 없습니다. 우리가 마음의 돌을 캐내고 말씀이 뿌리를 내리기 까지 묵상을 하고 적용을 하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셋째, 가시떨기 밭과 같은 마음(22)
22절을 보십시오. “가시떨기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치 못하는 자요.” 가시떨기와 같은 마음 밭은 말씀도 잘 받고 세상의 잡초도 잘 자랍니다. 그러나 잡초가 너무 무성하여 쭉정이 열매만 맺게 됩니다. 가시 떨기 밭에 심겨진 잡초는 무엇입니까?
첫째로, 세상의 염려입니다. 본래 염려라는 의미는 분열을 말합니다. 감정과 생각과 판단이 세상의 욕심으로 인하여 혼돈되고 분열이 되어 모든 일에 분명한 결단이 없습니다. 가시떨기 밭과 같은 마음은 세속주의로 인해서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관심이 없습니다. 세상에 대한 지나친 염려는 그 사람의 기운을 소진시킵니다. 가시밭과 같은 마음 밭을 가진 사람은 말씀을 듣고 잘 깨달아 어느 정도 뿌리를 내립니다. 그러나 세상 염려와 근심이 매우 커서 열매의 모양은 있지만 쭉정이만 맺고 제대로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잃어버리면 염려의 종이 됩니다. 우리 가운데 성실히 일하면서도 직장에서 구조조정을 당하면 굶어죽지 않을까 또한 자녀들을 제대로 교육을 시킬 수 있을까, 건강이 갑자기 악화되어 죽지는 않을까 하는 세상 염려가 들어올 때가 있습니다. 이런 사람에게 예수님은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1-33).” 이와 같이 세상 염려가 우리 마음에 가득하면 영적인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세상 염려를 회개하고 열매가 풍성한 인생을 살아야겠습니다.
둘째로, 재리의 유혹(22b). 재리의 유혹은 속이는 것입니다. 재리의 유혹에 빠지면 사업적인 마음이 되어 마음을 뜨게 만들고 허황되게 만듭니다. 마음이 부자되는 꿈에 빼앗겨서 하나님의 말씀에 마음을 쓰지 못합니다. 그리고 마음이 유혹되어 위험 요소는 보지 못하고 다 잘되는 것만 생각하다가 망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재리의 욕심에 눈이 어두운 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딤전6:9-10a)” 이 시대는 물질주의 시대입니다. 물질이면 모든 문제를 다 해결할 수 있을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돈으로 인생의 가장 중요하고 근본적인 문제는 하나도 해결할 수 없습니다. 영적인 생명과 믿음과 성령과 지성과 인격은 돈으로 살 수 없습니다. 믿음이 잘 자라다가도 재리의 가시에 기운이 막혀 열매를 맺지 못한 신자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물질에 대한 염려가 생기면 부담감으로 인해서 영적인 일에 힘을 쓰지를 못합니다.
세상 염려와 재리의 유혹 등은 열매를 맺지 못하게 함으로 심각하게 다루어야 합니다. 우리는 염려와 탐욕이 들어올 때 잡초를 뽑듯이 자라기 전에 뿌리 뽑아야 합니다. 세상의 염려는 부족하기 때문에, 재리의 유혹은 더 가지고자 하는 탐욕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소원자체가 세상에 가 있기 때문에 마음을 하나님 나라로 향하도록 힘써야 합니다. 우리는 물질에 대한 염려대신에 자족하기를 배우고 검소하고 절제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마음이 하나님 나라의 소망으로 채워지게 해야 합니다. 스피릿이 충만해서 열매를 맺는데 모든 에너지와 마음과 물질을 써야 합니다.
넷째, 좋은 마음 밭(23)
23절을 보십시오. “좋은 땅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혹 백 배, 혹 육십 배, 혹 삼십 배가 되느니라 하시더라.” 좋은 땅이란 옥토를 말합니다. 앞에서 말한 열매 맺지 못한 세 가지 마음 밭에 있는 약점들이 다 제거된 마음을 말합니다. 좋은 땅만이 제대로 열매를 맺습니다. 좋은 땅은 굳어 있지 않고 흙이 얕지 않고 가시떨기가 자라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과 같이 심령이 가난하고 겸손하여 말씀을 영접하고 깨닫는 마음 밭입니다. 그리하여 인내로 결실을 하는 마음입니다(눅8:15). 좋은 땅과 같은 마음 밭은 성령으로 거듭난 마음입니다. 좋은 땅을 항상 유지하기 위해서는 항상 땅을 갈아주고 잡초를 뽑아주는 노동이 필요합니다. 또한 마음을 새롭게 하므로 변화를 받아야 합니다(롬12:2). 마음을 새롭게 하기 위해서는 항상 말씀을 공부하고 말씀에 의거해 진실되게 회개할 때 성령이 역사해서 마음이 새롭게 됩니다.
그러면 열매 맺는 비결이 무엇입니까?
먼저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23a). 23a를 보십시오. “좋은 땅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아무리 마음 밭이 옥토라고 해도 말씀을 들어 말씀의 씨가 뿌려지지 않으면 열매를 맺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말씀을 읽고 메시지도 듣고 일대일로 말씀을 공부 해야 합니다. 우리가 말씀을 들을 때는 정확하게 듣는 것이 중요합니다. 정확하게 듣기 위해 우리는 귀를 어떻게 사용해야할까요? 정확하게 듣기 위해 우리는 상대방이 하는 말을 끝까지 들어야 합니다. 상대방이 하는 말을 끝까지 듣지 않으면 오해에 빠지게 됩니다. 오해란 내가 상대방을 부분적으로만 알 때 자주 생기게 됩니다. 상대방의 말을 끝까지 듣는다는 말은 곧 상대방을 이해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상대방의 말을 듣는 것은 곧 상대방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상대방의 말이 들린다는 것은 곧 상대방의 마음이 들리기 시작한다는 뜻입니다. 상대방의 마음이 들리기 시작한다는 것은 곧 내가 상대에 대해 하나의 “마음”이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보아야 하는 존재가 아니라 들어야 하는 인격입니다. 하나님은 마음으로 들어야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말씀이십니다. 예수님은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통해서 자신을 계시하십니다.
다음으로 말씀을 깨달아야 합니다(23b). 23b를 보십시오. “깨닫는 자니” 말씀을 깨닫기 위해서는 말씀을 묵상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가 복 있는 자라 했습니다(시1:2). 우리는 말씀을 공부하고 깊게 묵상을 할 때 그 의미를 깨닫고 말씀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됩니다. 말씀을 안다는 것과 깨닫는 것은 차이가 있습니다. 깨달음은 눈을 뜨는 것이요 자기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깨달음이 있을 때 그의 생각과 삶이 변화됩니다. 이러한 단계에 이르기 위해서 말씀을 정확하게 보아야 하지만 무엇보다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자 힘써야 합니다. 하나님과 마음이 통해야 합니다. 우리가 복음의 핵심인 십자가와 부활에 대한 말씀을 묵상하고 확신을 가질 때 믿음의 뿌리를 깊게 내릴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말씀에 순종할 수 있습니다. 그 때 백 배, 육십 배, 삼십 배의 열매를 맺습니다. 여기에서 열매는 무엇을 말합니까? 내적으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말합니다. 예수님의 내면성의 열매를 말합니다(갈5:22,23). 또한 외적인 열매로서 일대일을 통한 제자 양성의 열매를 말합니다. 제자 양성의 열매까지 맺으려면 상당한 시간이 필요합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깨달아 열매를 맺어야겠습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 안에 있는 완악한 마음 밭을 갈아엎어야 합니다. 말씀을 듣고 회개하여 돌을 제거하고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이라는 잡초를 뽑아내야 합니다. 그리고 말씀을 깊이 묵상하고 소감을 쓰는 가운데 말씀의 씨가 우리 마음에서 자라도록 힘써야겠습니다. 주님께서 저희들 안에 백 배, 육십 배, 삼십 배의 열매를 맺도록 축복해주시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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