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마17강(12:1-21)/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시는 예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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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마태복음 제 17 강
말씀/마태복음 12:1-21
요절/마태복음 12:20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시는 예수님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
우리는 지난 주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안식을 주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은 진정한 쉼이 어디서부터 오는지 가르쳐주셨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멍에를 메고 온유하고 겸손하신 그를 배우는 것입니다. 오늘은 안식일을 어떻게 지켜야 하는지 가르쳐 주시고 상한 갈대와 같고 꺼져가는 심지와 같은 사람, 한 손 마른 사람을 회복해 주시는 말씀입니다. 안식은 회복을 위해서 있습니다. 진정한 안식은 영육간에 구원을 받고 하나님께서 본래 창조하신 모습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진정한 안식은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서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오심으로 우리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를 맛보며 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진정한 안식을 주고자 오셨습니다. 이 시간 우리가 안식일을 어떻게 보내야 하는지 배우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소생시키시는 주님의 마음을 배우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안식일의 주인되신 예수님(1-8)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로 지나가실 때였습니다. 밀밭의 푸르름과 향기가 배고픈 제자들의 코를 자극했습니다. 예수님은 머리 둘 곳도 없었습니다. 이런 예수님을 따라 다니는 제자들도 불안정하고 배고프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거의 움직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부지런히 심방 다니고 전도하고 말씀을 전하러 다니는 제자들을 위해서 누가 음식을 차려줄 리 없었습니다. 제자들은 굶기를 잘했습니다. 원기 왕성한 제자들이 제 때에 밥을 먹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심히 배가 고팠습니다. 그래서 밀밭에 있는 이삭을 훌터서 손으로 비비어 입에 탁 털어 넣었습니다. 그들이 쫄깃 쫄깃한 맛을 보고 있는 바로 이때 바리새인들이 스톱을 걸었습니다. 그들은 도끼 눈을 하고 예수님께 따져 물었습니다. “보시오 당신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다(2).” 그들은 건수를 잡은 사람처럼 의기양양했습니다. 안식일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시고 선물로 주신 날입니다. 연약한 인간은 쉬면서 영적 회복을 얻고 하나님과의 교제를 누리며 죄에서 구원하신 은혜를 되새기고 풍성한 자유를 누리게 됩니다. 그들은 안식일에 해야 할 일과 할 수 없는 일들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출 20:10에는 “제 칠 일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육축이나 네 문 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이를 문자적으로 지켰습니다. 그 중에는 안식일에 바느질도 못하고 불도 붙이면 안됩니다. 그들은 전기 스위치도 올리지 않고 엘리베이터를 타면 층별 스위치도 누르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방인들에게 몇층을 눌러 달라고 부탁을 합니다. 그들의 내면을 아는 이방인이 그런 부탁을 들으면 기분이 상한다고 합니다. 이런 그들이기에 제자들이 밀이삭을 따서 손으로 비빈 것은 추수와 탈곡에 해당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께 따졌습니다. “당신의 제자들은 안식일을 어떻게 지키고 있는 것입니까?” 그들이 안식일의 근본정신을 붙잡지 않고 하나님께 대한 열심으로 충만했을 때 율법적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시험을 받을 때에 사십일 동안 금식하셨고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배가 좀 고프다고 안식일에 밀이삭을 잘라 먹는 제자들이 잘한 것입니까? 예수님은 제자들을 책망하지 않고 어떻게 변호해 주셨습니까?
첫째로, 다윗의 예를 들어 변호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돕기 위해서 다윗의 예를 들어 제자들을 변호하셨습니다. 다윗은 자기와 함께한 사람들이 시장할 때에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제사장 외에는 자기나 그 함께한 자들이 먹지 못하는 진설병을 먹었습니다. 제사장 아히멜렉이 왕의 일을 하고 있는 시장한 다윗에게 먹을 것이 없자 진설병을 주었습니다. 진설병은 제사장 외에는 먹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부녀를 가까이 하지 아니한 그들이 거룩하였고 또 배가 고팠기 때문에 이웃에 대한 사랑에 기초해서 진설병을 기꺼이 내어 주었습니다. 또 이는 왕의 권세를 가지고 일을 하고 있는 그들에 대한 예의였습니다. 마태는 다윗이 권세를 가졌던 것처럼 예수님도 권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다윗이기 때문에 그렇다면 예수님은 도대체 누구십니까? 그는 메시야시오 다윗보다 더 큰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안식일지라도 성도들은 육신의 생명을 위해서 식사 준비를 자유롭게 할 수 있습니다. 안식일일지라도 정상적으로 의식주 생활을 할 수 있으며 자신과 양들의 생명을 풍성하게 할 수 있습니다.
둘째로, 예수님은 안식일에 제사장들이 성전에서 일하는 것으로 변호하셨습니다. 5,6절을 보십시오. “또 안식일에 제사장들이 성전 안에서 안식을 범하여도 죄가 없음을 너희가 율법에서 읽지 못하였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 안식일에 제사장들이 하나님을 섬기고자 성전에서 일하기 때문에 죄가 없습니다. 성전에서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일하는 것이 안식일에 대한 계명보다 더 우선한다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들이 안식일에 일하지 않으면 성전 일이 돌아가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제자들이 예수님을 섬기기위해서 이삭을 잘라 먹은 것은 죄가 없습니다. 안식일보다 성전이 더 크고 성전보다 예수님께서 더 크시다면 그 결과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을 섬기고자 안식일을 범할 수 있는 것이고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의 주인이 되십니다. 안식일의 주인은 율법이 아니라 예수님이십니다.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빠진 안식일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주일에 모여서 예배를 드릴 때에 예수님이 드러나야 합니다. 예수님을 만나는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섬기는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삼위일체의 하나님이십니다.
8절을 보면 예수님은 안식일의 주인이십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을 제정하시고 예배를 받으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에 예배를 받으시는 당사자로서 안식일을 어떻게 지켜야 하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계십니다. 그리고 안식일에 대한 판단에서 최종 권위를 가지고 계십니다. 우리는 안식일에 하나님을 위하고 사람을 위해야 합니다. 안식일은 사람을 위한 것입니다.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안식일에 하나님을 예배하지만 자신을 위해서도 쉼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을 예배함으로 쉼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는 안식일에 잘 쉬고 받은 은혜로 수요일까지 삼일을 살고 나머지 삼일은 안식일을 바라면서 살아야 합니다. 안식일은 우리 삶의 중심입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이 왜 무죄한 제자들을 정죄하게 되었는지 지적하셨습니다. 7절을 보십시오.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면 무죄한 자를 죄로 정치 아니하였으리라.”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자비로 일을 하셨지만 바리새인들은 규칙과 규범으로 이를 제어하려고 했습니다. 그들은 서기관의 유전 즉 전통을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권위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유대인들이 전통 즉 유전에 부여한 가치가 이렇게 컸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고 유전을 좇게 된 것입니다(15:3). 천주교는 전통을 하나님 말씀보다 우위에 두지만 개신교는 최종 권위를 하나님의 말씀에 둡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서 우리는 끊임없이 개혁을 하고자 합니다. 그것이 종교 개혁자들이 추구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신을 돌아보고 고치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그때 우리는 새가죽 부대가 되어서 새 포도주인 복음을 이 시대에도 변함없이 담을 수 있습니다. 법에는 항상 예외가 있습니다. 율법 속에도 은혜가 있습니다. 율법의 근본 정신은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 긴급 구호차로 병든 세상을 고치고자 하는데 종교 지도자들은 구호차가 속도 위반을 했다고 제지하려고 한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고 하는데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께서 죄를 범한 것이라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 결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대적하게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도 하나님을 위한 열심으로 신자들을 핍박하고 죽이는 일에 동참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눈에서 비늘이 벗겨졌을 때 그를 메시야로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방인의 사도로 수많은 고난을 받으면서 세계선교를 감당했습니다. 우리가 안식일에 말씀을 깊이 깨닫고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려야겠습니다. 그리고 안식일에 생명을 살리고 풍성하게 하는 역사를 열심히 해야겠습니다.
둘째, 한 손 마른 자를 고치신 예수님(9-21)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과의 논쟁을 하던 장소를 떠나 저희 회당에 들어가셨습니다. 마침 한 편 손 마른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회당에 와서 아는 사람을 만나도 반갑게 악수를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오른 손을 내밀 때 자신은 외손을 내밀어야만 했습니다. 그때마다 그는 어색한 미소를 지어야만했습니다. 아주 은혜스러운 소감을 들어도 박수를 치지 못하고 가슴을 쳐야 했습니다. 취직을 하려는데 학교 성적이 아무리 좋아도 면접에서 낙방하기 일쑤였습니다. 남들이 다른 문제로 웃기만 해도 자기를 비웃는 것으로 오해하고 화를 냈습니다. 또 그 문제로 인해 싸움을 하게 되면 다른 사람이 원 투 스트레이트를 때릴 때 자기는 한 대 밖에 때릴 수 없어 항상 분통이 터지는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그는 한 손 마른 장애로 인해 마음까지 말라버려 정신적인 장애인으로 살아야했습니다. 깊은 운명주의와 자학 가운데 어두운 삶을 살았습니다. 한 손 마른 사람에게는 사랑이 필요했고 치료가 필요했습니다. 한 손 마른 사람이 은혜를 받고자 회당 뒤쪽 구석에 앉아서 마른 손을 주머니에 넣고 만지작거리고 있었습니다. 때마침 예수님께서 들어오시는 것을 유대인들이 보고 예수님을 송사하려고 질문을 했습니다.
10b절을 보십시오. “안식일에 병 고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바리새인들은 한 손 마른 자의 슬픔과 비참함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 불쌍하고 어려운 양을 이용하여 예수님을 고소할 꼬투리를 잡고자 했습니다. 그들은 마치 덫을 놓고 기다리는 비정한 사냥꾼과 같았습니다. 거룩한 하나님의 법은 예수님을 잡는 덫에 불과했습니다. 그리고 말라비틀어진 손을 감추고 주님의 은총을 기다리는 불쌍한 양은 덫에 걸어 놓은 미끼에 불과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유전에 따라 안식일에 치료를 할 수 있도록 허용된 경우는 생명이 위태로운 자로 한정되었으므로 한 손 마른 자를 고치는 것은 위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그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셨습니까? 11,12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한 마리가 있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으면 붙잡아 내지 않겠느냐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그러므로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니라 하시고” 유대인들은 양이 구덩이에 빠지면 널빤지를 던져주고 스스로 나오게 했다고 합니다. 그래도 안되면 하루 먹을 음식을 주고 안식일이 지나서 구해주었습니다. 그렇게 해도 생명을 구할 수 없을 경우에는 안식일이라도 구해주었습니다. 그런데 사람은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합니까? 예수님은 한 생명을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십니다. 그러므로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다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이렇게 말만 하고 그들과 물리적인 충돌을 피하기 위해서 잠시 자리를 피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한 손 마른 자에게 안식일이 지나서 오도록 하여 고쳐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자리를 피하지 않았습니다. 바리새인들의 잘못된 안식일 관을 고쳐주기 위해서 일부러 그를 고쳐주셨습니다. 예수님은 한 손 마른 사람을 외면하지 않았습니다. 한 손 마른 사람에 대한 목자의 심정을 가졌습니다. 또한 영적으로 죽어 있고 말라버린 바리새인들에 대한 목자의 심정도 가지셨습니다. 주님은 어떠한 희생을 무릅쓰고서라도 그들의 병을 고쳐주고자 결심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한 손 마른 사람을 어떻게 고쳐주셨습니까? 13절을 보십시오. “이에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손을 내밀라 하시니 저가 내밀매 다른 손과 같이 회복되어 성하더라.” 주님은 구약의 율법에 얽매여 생명력을 잃어버린 종교 지도자들에게 도전했습니다. 그들은 영적인 분별력을 잃었고 생명이 얼마나 귀한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유대인의 전통인 유전에 얽매여 인간의 소중한 생명의 가치마저 망각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말씀과 행동으로 인간의 귀중한 생명이 얼마나 가치가 있는가를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생명을 구하기 위해서 자신의 죽음도 불사했습니다. 주님은 안식일에 병 고치는 일을 공개적으로 하심으로 바리새인들로부터 어떤 반응이 올 것인가 다 아셨습니다. 그러나 그런 위험을 각오하고 한 손 마른 자를 구하셨습니다. 14절을 보십시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서 한 손 마른 자를 고치자 자리를 박차고 나가서 어떻게 하여 예수님을 죽일꼬 의논했습니다. 그들은 안식일에 생명을 멸하는 궁리를 했습니다. 그들은 안식일에 악을 행했습니다. 그들은 안식일에 하나님을 대적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안식일 율법을 지키기 위해서 모든 일을 금지했습니다. 마카비 시대에 유대인들은 안티오쿠스의 헬라화 정책에 극렬하게 항거했습니다. 그런데 안티오쿠스 군대는 안식일에 공격하여 유대인들을 무참히 학살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이때 철저히 패배하고 나서 안식일에 생명을 지키기 위해서 싸우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이 율법의 근본 정신을 망각하고 규칙 준수에만 얽매였을 때 무고한 생명을 죽음에 몰아넣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안식일 법의 근본 정신도 사랑으로 보셨습니다. 율법의 대 강령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22:40). 율법의 근본정신은 금지하고 옭아매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데 있습니다. 이것을 망각하면 율법은 인간의 생명력을 억압하고 인간을 율법의 노예로 만듭니다. 우리는 사람을 도울 때 그를 어떻게 살리고 그 생명력을 왕성케 할 것인가 연구해야 합니다. 히딩크는 축구 선수들을 훈련시키는데 한번 트레이닝을 끝내면 입에서 단내가 나고 녹초가 되게 만들면서도 그들이 즐겁고 재미있게 훈련을 받도록 했다고 합니다. 그의 훈련 방법은 매우 과학적이면서도 창조적이었습니다. 우리가 은혜로 구원을 받고 성령의 능력을 덧입어서 율법을 온전히 지킴으로 성숙한 하나님의 사람들로 성장해야겠습니다. 성장을 위해서 하나님과 이웃 사랑에 기초한 영적인 훈련을 받아야겠습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위협 속에서도 적극적으로 병을 고치시며 사람을 살리는 일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과 다투지 않고 들레지 아니하면서 긍휼과 자비를 베푸는 일을 하셨습니다. 20,21절을 보십시오.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 또한 이방들이 그 이름을 바라리라.” 유대인들은 갈대로 피리를 만들고 펜을 만들어 썼다고 합니다. 요즈음은 갈대를 꽃꽂이나 장식으로 씁니다.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라고 파스칼은 말했습니다. 인간은 연약하지만 생각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우주를 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인간을 상한 갈대라고 하십니다. 상한 갈대는 인간의 연약함을 극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상한 갈대는 고생하며 유리하는 자들을, 꺼져가는 심지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을 말합니다. 상한 갈대는 유대 사회에서 율법주의자들에 의해 죄인으로 낙인찍힌 세리와 죄인들을, 꺼져가는 심지는 그들의 영혼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상한 갈대와 꺼져가는 심지는 인간이 우상 숭배의 죄와 자신의 부도덕한 죄로 인하여 짓이겨지고 부수어진 상태를 말합니다. 상한 갈대는 쓸모가 없습니다. 소망이 없습니다. 경쟁 사회에서 인간의 이기심과 무정함으로 인해서 상처를 받은 사람은 상한 갈대와 같습니다. 상한 갈대는 정신적으로 부수져 쇠잔해 있는 영혼들을 가리킵니다. 요즈음은 외모로는 든든하고 성해 보이지만 가슴 속에는 많은 상처를 입고 시커멓게 멍든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은 바람이 조금만 불어도 완전히 꺾이고 끊어져 버릴 것 같은 연약한 존재들입니다.
뿐만 아니라 인간은 꺼져가는 심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지금과 같이 밝은 전기가 없던 약 40년 전의 한국 시골에는 등잔불로 밤을 밝혔습니다. 조그만 호롱에 석유 기름을 넣고 심지에 불을 붙이면 따스함이 느껴지고 책을 볼 수 있을 정도로 밝아집니다. 그런데 기름이 떨어지고 심지에 문제가 있으면 불이 가물가물 꺼져 갑니다. 심지가 꺼멓게 굳어져서 기름이 잘 공급되지 않으면 불완전 연소로 인해서 연기를 내게 됩니다. 주인은 꺼져가는 불을 살리기 위해서 심지를 바늘로 긁어 줍니다. 심지에 붙어 있는 찌꺼기를 깨끗하게 해 주거나 기름을 넣어 주어야합니다. 꺼져가는 심지란 양심의 빛을 잃고 타락해 가는 사람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양심의 빛, 영혼의 빛을 잃어버리고 흑암 가운데 만신창이가 되어 있는 젊은이들을 회복하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은 사랑이 많으셔서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십니다. 세상 사람들은 상한 갈대는 여지 없이 꺾어버리고 짓밟아 버립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사랑이 많으시고 온유하십니다. 한 손 마른 자와 같이 상한 갈대와 같은 자도 예수님은 불쌍히 여기시고 싸매시고 용기를 북돋워 주십니다. 상한 갈대는 오직 하늘의 기운으로 소생합니다. 예수님은 꺼져가는 심지를 살리기 위해서 기름을 넣어 주시고 심지를 깨끗하게 하십니다. 예수님은 참 위로자요 치료자이십니다. 예수님은 비전을 잃어버린 사람의 의욕을 꺾는 것이 아니라 용기를 북돋워 주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십니다.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란 세상에 공의 세우기에 이른다는 말로서 메시야 사역의 목적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법을 인간의 마음에 새기사 이루기를 원하십니다. 고난의 종인 메시야는 세상 사람들이 기대하는 바 영광과 강압에 의해서가 아니라 온유와 겸손과 섬김의 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공의를 세상의 악의 세력 위에 세울 때까지 하십니다. 이는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의미합니다. 그는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자에게 부탁하시(벧전2:23)”는 분이십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고난을 당할 때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습니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과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사53:7).” 주님은 곤욕과 심문을 당할 때에도 끝까지 겸손과 온유한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써 죽음을 정복하셨고 하나님의 공의를 이 땅 위에 굳게 세우셨습니다.
세리 마태는 갈릴리의 꺼져가는 심지와 같았습니다. 그는 양심의 불이 꺼졌고 영혼의 불마저 꺼져가고 있었습니다. 그에게는 도저히 희망이 없었습니다. 그의 영혼은 상한 갈대와 같이 짓이겨지고 부수어졌습니다. 사람들이 그를 소외시킴으로 인해 마음에 멍이 들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제자로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끝까지 그를 감당하사 그의 상처를 싸매어 주시고 꺼져가는 등불에 기름을 넣으셔서 더 밝고 환한 불빛이 되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아주 이기적인 사람들을 섬기고자 할 때 내가 이 사람에게 이용당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될 때가 있습니다. 그런 생각이 들면 더 이상 이기적인 사람을 섬길 수 없습니다. 조용히 관계를 끊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기적인 세리 마태를 섬기셨습니다. 자신의 시간과 물질과 에너지를 그를 섬기기 위해서 아낌없이 희생하셨습니다. 결국은 자신의 생명마저도 십자가에서 내어 주셨습니다. 그는 상한 갈대가 되셨습니다. 그의 영혼은 십자가에서 꺼져가는 심지와 같이 꺼져갔습니다. 그러나 그는 마침내 부활하사 승리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와 부활로 인간의 죄를 이기셨고 죽음을 이기셨습니다. 예수님의 온유와 겸손과 섬김을 통해서 어두움 가운데 있던 세리 마태는 말씀의 불빛을 비춰주는 사도로서 구속 역사를 섬기게 되었습니다.
결론적으로 예수님은 안식일에 제자들의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해서 밀이삭을 잘라 비비어먹은 것을 변호해 주시고 한 손 마른 자를 고쳐주셨습니다.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고 선을 행하시고 생명을 살리는 일을 하셨습니다. 우리도 온유와 겸손과 섬김의 도로 죄를 이기는 그날 까지 다른 사람의 죄를 감당해 주고 생명을 살리는 일을 감당하기를 기도합니다.
말씀/마태복음 12:1-21
요절/마태복음 12:20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시는 예수님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
우리는 지난 주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안식을 주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은 진정한 쉼이 어디서부터 오는지 가르쳐주셨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멍에를 메고 온유하고 겸손하신 그를 배우는 것입니다. 오늘은 안식일을 어떻게 지켜야 하는지 가르쳐 주시고 상한 갈대와 같고 꺼져가는 심지와 같은 사람, 한 손 마른 사람을 회복해 주시는 말씀입니다. 안식은 회복을 위해서 있습니다. 진정한 안식은 영육간에 구원을 받고 하나님께서 본래 창조하신 모습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진정한 안식은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서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오심으로 우리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를 맛보며 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진정한 안식을 주고자 오셨습니다. 이 시간 우리가 안식일을 어떻게 보내야 하는지 배우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소생시키시는 주님의 마음을 배우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안식일의 주인되신 예수님(1-8)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로 지나가실 때였습니다. 밀밭의 푸르름과 향기가 배고픈 제자들의 코를 자극했습니다. 예수님은 머리 둘 곳도 없었습니다. 이런 예수님을 따라 다니는 제자들도 불안정하고 배고프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거의 움직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부지런히 심방 다니고 전도하고 말씀을 전하러 다니는 제자들을 위해서 누가 음식을 차려줄 리 없었습니다. 제자들은 굶기를 잘했습니다. 원기 왕성한 제자들이 제 때에 밥을 먹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심히 배가 고팠습니다. 그래서 밀밭에 있는 이삭을 훌터서 손으로 비비어 입에 탁 털어 넣었습니다. 그들이 쫄깃 쫄깃한 맛을 보고 있는 바로 이때 바리새인들이 스톱을 걸었습니다. 그들은 도끼 눈을 하고 예수님께 따져 물었습니다. “보시오 당신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다(2).” 그들은 건수를 잡은 사람처럼 의기양양했습니다. 안식일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시고 선물로 주신 날입니다. 연약한 인간은 쉬면서 영적 회복을 얻고 하나님과의 교제를 누리며 죄에서 구원하신 은혜를 되새기고 풍성한 자유를 누리게 됩니다. 그들은 안식일에 해야 할 일과 할 수 없는 일들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출 20:10에는 “제 칠 일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육축이나 네 문 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이를 문자적으로 지켰습니다. 그 중에는 안식일에 바느질도 못하고 불도 붙이면 안됩니다. 그들은 전기 스위치도 올리지 않고 엘리베이터를 타면 층별 스위치도 누르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방인들에게 몇층을 눌러 달라고 부탁을 합니다. 그들의 내면을 아는 이방인이 그런 부탁을 들으면 기분이 상한다고 합니다. 이런 그들이기에 제자들이 밀이삭을 따서 손으로 비빈 것은 추수와 탈곡에 해당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께 따졌습니다. “당신의 제자들은 안식일을 어떻게 지키고 있는 것입니까?” 그들이 안식일의 근본정신을 붙잡지 않고 하나님께 대한 열심으로 충만했을 때 율법적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시험을 받을 때에 사십일 동안 금식하셨고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배가 좀 고프다고 안식일에 밀이삭을 잘라 먹는 제자들이 잘한 것입니까? 예수님은 제자들을 책망하지 않고 어떻게 변호해 주셨습니까?
첫째로, 다윗의 예를 들어 변호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돕기 위해서 다윗의 예를 들어 제자들을 변호하셨습니다. 다윗은 자기와 함께한 사람들이 시장할 때에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제사장 외에는 자기나 그 함께한 자들이 먹지 못하는 진설병을 먹었습니다. 제사장 아히멜렉이 왕의 일을 하고 있는 시장한 다윗에게 먹을 것이 없자 진설병을 주었습니다. 진설병은 제사장 외에는 먹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부녀를 가까이 하지 아니한 그들이 거룩하였고 또 배가 고팠기 때문에 이웃에 대한 사랑에 기초해서 진설병을 기꺼이 내어 주었습니다. 또 이는 왕의 권세를 가지고 일을 하고 있는 그들에 대한 예의였습니다. 마태는 다윗이 권세를 가졌던 것처럼 예수님도 권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다윗이기 때문에 그렇다면 예수님은 도대체 누구십니까? 그는 메시야시오 다윗보다 더 큰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안식일지라도 성도들은 육신의 생명을 위해서 식사 준비를 자유롭게 할 수 있습니다. 안식일일지라도 정상적으로 의식주 생활을 할 수 있으며 자신과 양들의 생명을 풍성하게 할 수 있습니다.
둘째로, 예수님은 안식일에 제사장들이 성전에서 일하는 것으로 변호하셨습니다. 5,6절을 보십시오. “또 안식일에 제사장들이 성전 안에서 안식을 범하여도 죄가 없음을 너희가 율법에서 읽지 못하였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 안식일에 제사장들이 하나님을 섬기고자 성전에서 일하기 때문에 죄가 없습니다. 성전에서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일하는 것이 안식일에 대한 계명보다 더 우선한다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들이 안식일에 일하지 않으면 성전 일이 돌아가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제자들이 예수님을 섬기기위해서 이삭을 잘라 먹은 것은 죄가 없습니다. 안식일보다 성전이 더 크고 성전보다 예수님께서 더 크시다면 그 결과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을 섬기고자 안식일을 범할 수 있는 것이고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의 주인이 되십니다. 안식일의 주인은 율법이 아니라 예수님이십니다.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빠진 안식일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주일에 모여서 예배를 드릴 때에 예수님이 드러나야 합니다. 예수님을 만나는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섬기는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삼위일체의 하나님이십니다.
8절을 보면 예수님은 안식일의 주인이십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을 제정하시고 예배를 받으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에 예배를 받으시는 당사자로서 안식일을 어떻게 지켜야 하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계십니다. 그리고 안식일에 대한 판단에서 최종 권위를 가지고 계십니다. 우리는 안식일에 하나님을 위하고 사람을 위해야 합니다. 안식일은 사람을 위한 것입니다.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안식일에 하나님을 예배하지만 자신을 위해서도 쉼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을 예배함으로 쉼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는 안식일에 잘 쉬고 받은 은혜로 수요일까지 삼일을 살고 나머지 삼일은 안식일을 바라면서 살아야 합니다. 안식일은 우리 삶의 중심입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이 왜 무죄한 제자들을 정죄하게 되었는지 지적하셨습니다. 7절을 보십시오.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면 무죄한 자를 죄로 정치 아니하였으리라.”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자비로 일을 하셨지만 바리새인들은 규칙과 규범으로 이를 제어하려고 했습니다. 그들은 서기관의 유전 즉 전통을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권위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유대인들이 전통 즉 유전에 부여한 가치가 이렇게 컸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고 유전을 좇게 된 것입니다(15:3). 천주교는 전통을 하나님 말씀보다 우위에 두지만 개신교는 최종 권위를 하나님의 말씀에 둡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서 우리는 끊임없이 개혁을 하고자 합니다. 그것이 종교 개혁자들이 추구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신을 돌아보고 고치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그때 우리는 새가죽 부대가 되어서 새 포도주인 복음을 이 시대에도 변함없이 담을 수 있습니다. 법에는 항상 예외가 있습니다. 율법 속에도 은혜가 있습니다. 율법의 근본 정신은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 긴급 구호차로 병든 세상을 고치고자 하는데 종교 지도자들은 구호차가 속도 위반을 했다고 제지하려고 한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고 하는데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께서 죄를 범한 것이라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 결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대적하게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도 하나님을 위한 열심으로 신자들을 핍박하고 죽이는 일에 동참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눈에서 비늘이 벗겨졌을 때 그를 메시야로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방인의 사도로 수많은 고난을 받으면서 세계선교를 감당했습니다. 우리가 안식일에 말씀을 깊이 깨닫고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려야겠습니다. 그리고 안식일에 생명을 살리고 풍성하게 하는 역사를 열심히 해야겠습니다.
둘째, 한 손 마른 자를 고치신 예수님(9-21)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과의 논쟁을 하던 장소를 떠나 저희 회당에 들어가셨습니다. 마침 한 편 손 마른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회당에 와서 아는 사람을 만나도 반갑게 악수를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오른 손을 내밀 때 자신은 외손을 내밀어야만 했습니다. 그때마다 그는 어색한 미소를 지어야만했습니다. 아주 은혜스러운 소감을 들어도 박수를 치지 못하고 가슴을 쳐야 했습니다. 취직을 하려는데 학교 성적이 아무리 좋아도 면접에서 낙방하기 일쑤였습니다. 남들이 다른 문제로 웃기만 해도 자기를 비웃는 것으로 오해하고 화를 냈습니다. 또 그 문제로 인해 싸움을 하게 되면 다른 사람이 원 투 스트레이트를 때릴 때 자기는 한 대 밖에 때릴 수 없어 항상 분통이 터지는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그는 한 손 마른 장애로 인해 마음까지 말라버려 정신적인 장애인으로 살아야했습니다. 깊은 운명주의와 자학 가운데 어두운 삶을 살았습니다. 한 손 마른 사람에게는 사랑이 필요했고 치료가 필요했습니다. 한 손 마른 사람이 은혜를 받고자 회당 뒤쪽 구석에 앉아서 마른 손을 주머니에 넣고 만지작거리고 있었습니다. 때마침 예수님께서 들어오시는 것을 유대인들이 보고 예수님을 송사하려고 질문을 했습니다.
10b절을 보십시오. “안식일에 병 고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바리새인들은 한 손 마른 자의 슬픔과 비참함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 불쌍하고 어려운 양을 이용하여 예수님을 고소할 꼬투리를 잡고자 했습니다. 그들은 마치 덫을 놓고 기다리는 비정한 사냥꾼과 같았습니다. 거룩한 하나님의 법은 예수님을 잡는 덫에 불과했습니다. 그리고 말라비틀어진 손을 감추고 주님의 은총을 기다리는 불쌍한 양은 덫에 걸어 놓은 미끼에 불과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유전에 따라 안식일에 치료를 할 수 있도록 허용된 경우는 생명이 위태로운 자로 한정되었으므로 한 손 마른 자를 고치는 것은 위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그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셨습니까? 11,12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한 마리가 있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으면 붙잡아 내지 않겠느냐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그러므로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니라 하시고” 유대인들은 양이 구덩이에 빠지면 널빤지를 던져주고 스스로 나오게 했다고 합니다. 그래도 안되면 하루 먹을 음식을 주고 안식일이 지나서 구해주었습니다. 그렇게 해도 생명을 구할 수 없을 경우에는 안식일이라도 구해주었습니다. 그런데 사람은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합니까? 예수님은 한 생명을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십니다. 그러므로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다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이렇게 말만 하고 그들과 물리적인 충돌을 피하기 위해서 잠시 자리를 피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한 손 마른 자에게 안식일이 지나서 오도록 하여 고쳐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자리를 피하지 않았습니다. 바리새인들의 잘못된 안식일 관을 고쳐주기 위해서 일부러 그를 고쳐주셨습니다. 예수님은 한 손 마른 사람을 외면하지 않았습니다. 한 손 마른 사람에 대한 목자의 심정을 가졌습니다. 또한 영적으로 죽어 있고 말라버린 바리새인들에 대한 목자의 심정도 가지셨습니다. 주님은 어떠한 희생을 무릅쓰고서라도 그들의 병을 고쳐주고자 결심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한 손 마른 사람을 어떻게 고쳐주셨습니까? 13절을 보십시오. “이에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손을 내밀라 하시니 저가 내밀매 다른 손과 같이 회복되어 성하더라.” 주님은 구약의 율법에 얽매여 생명력을 잃어버린 종교 지도자들에게 도전했습니다. 그들은 영적인 분별력을 잃었고 생명이 얼마나 귀한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유대인의 전통인 유전에 얽매여 인간의 소중한 생명의 가치마저 망각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말씀과 행동으로 인간의 귀중한 생명이 얼마나 가치가 있는가를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생명을 구하기 위해서 자신의 죽음도 불사했습니다. 주님은 안식일에 병 고치는 일을 공개적으로 하심으로 바리새인들로부터 어떤 반응이 올 것인가 다 아셨습니다. 그러나 그런 위험을 각오하고 한 손 마른 자를 구하셨습니다. 14절을 보십시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서 한 손 마른 자를 고치자 자리를 박차고 나가서 어떻게 하여 예수님을 죽일꼬 의논했습니다. 그들은 안식일에 생명을 멸하는 궁리를 했습니다. 그들은 안식일에 악을 행했습니다. 그들은 안식일에 하나님을 대적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안식일 율법을 지키기 위해서 모든 일을 금지했습니다. 마카비 시대에 유대인들은 안티오쿠스의 헬라화 정책에 극렬하게 항거했습니다. 그런데 안티오쿠스 군대는 안식일에 공격하여 유대인들을 무참히 학살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이때 철저히 패배하고 나서 안식일에 생명을 지키기 위해서 싸우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이 율법의 근본 정신을 망각하고 규칙 준수에만 얽매였을 때 무고한 생명을 죽음에 몰아넣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안식일 법의 근본 정신도 사랑으로 보셨습니다. 율법의 대 강령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22:40). 율법의 근본정신은 금지하고 옭아매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데 있습니다. 이것을 망각하면 율법은 인간의 생명력을 억압하고 인간을 율법의 노예로 만듭니다. 우리는 사람을 도울 때 그를 어떻게 살리고 그 생명력을 왕성케 할 것인가 연구해야 합니다. 히딩크는 축구 선수들을 훈련시키는데 한번 트레이닝을 끝내면 입에서 단내가 나고 녹초가 되게 만들면서도 그들이 즐겁고 재미있게 훈련을 받도록 했다고 합니다. 그의 훈련 방법은 매우 과학적이면서도 창조적이었습니다. 우리가 은혜로 구원을 받고 성령의 능력을 덧입어서 율법을 온전히 지킴으로 성숙한 하나님의 사람들로 성장해야겠습니다. 성장을 위해서 하나님과 이웃 사랑에 기초한 영적인 훈련을 받아야겠습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위협 속에서도 적극적으로 병을 고치시며 사람을 살리는 일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과 다투지 않고 들레지 아니하면서 긍휼과 자비를 베푸는 일을 하셨습니다. 20,21절을 보십시오.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 또한 이방들이 그 이름을 바라리라.” 유대인들은 갈대로 피리를 만들고 펜을 만들어 썼다고 합니다. 요즈음은 갈대를 꽃꽂이나 장식으로 씁니다.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라고 파스칼은 말했습니다. 인간은 연약하지만 생각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우주를 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인간을 상한 갈대라고 하십니다. 상한 갈대는 인간의 연약함을 극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상한 갈대는 고생하며 유리하는 자들을, 꺼져가는 심지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을 말합니다. 상한 갈대는 유대 사회에서 율법주의자들에 의해 죄인으로 낙인찍힌 세리와 죄인들을, 꺼져가는 심지는 그들의 영혼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상한 갈대와 꺼져가는 심지는 인간이 우상 숭배의 죄와 자신의 부도덕한 죄로 인하여 짓이겨지고 부수어진 상태를 말합니다. 상한 갈대는 쓸모가 없습니다. 소망이 없습니다. 경쟁 사회에서 인간의 이기심과 무정함으로 인해서 상처를 받은 사람은 상한 갈대와 같습니다. 상한 갈대는 정신적으로 부수져 쇠잔해 있는 영혼들을 가리킵니다. 요즈음은 외모로는 든든하고 성해 보이지만 가슴 속에는 많은 상처를 입고 시커멓게 멍든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은 바람이 조금만 불어도 완전히 꺾이고 끊어져 버릴 것 같은 연약한 존재들입니다.
뿐만 아니라 인간은 꺼져가는 심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지금과 같이 밝은 전기가 없던 약 40년 전의 한국 시골에는 등잔불로 밤을 밝혔습니다. 조그만 호롱에 석유 기름을 넣고 심지에 불을 붙이면 따스함이 느껴지고 책을 볼 수 있을 정도로 밝아집니다. 그런데 기름이 떨어지고 심지에 문제가 있으면 불이 가물가물 꺼져 갑니다. 심지가 꺼멓게 굳어져서 기름이 잘 공급되지 않으면 불완전 연소로 인해서 연기를 내게 됩니다. 주인은 꺼져가는 불을 살리기 위해서 심지를 바늘로 긁어 줍니다. 심지에 붙어 있는 찌꺼기를 깨끗하게 해 주거나 기름을 넣어 주어야합니다. 꺼져가는 심지란 양심의 빛을 잃고 타락해 가는 사람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양심의 빛, 영혼의 빛을 잃어버리고 흑암 가운데 만신창이가 되어 있는 젊은이들을 회복하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은 사랑이 많으셔서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십니다. 세상 사람들은 상한 갈대는 여지 없이 꺾어버리고 짓밟아 버립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사랑이 많으시고 온유하십니다. 한 손 마른 자와 같이 상한 갈대와 같은 자도 예수님은 불쌍히 여기시고 싸매시고 용기를 북돋워 주십니다. 상한 갈대는 오직 하늘의 기운으로 소생합니다. 예수님은 꺼져가는 심지를 살리기 위해서 기름을 넣어 주시고 심지를 깨끗하게 하십니다. 예수님은 참 위로자요 치료자이십니다. 예수님은 비전을 잃어버린 사람의 의욕을 꺾는 것이 아니라 용기를 북돋워 주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십니다.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란 세상에 공의 세우기에 이른다는 말로서 메시야 사역의 목적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법을 인간의 마음에 새기사 이루기를 원하십니다. 고난의 종인 메시야는 세상 사람들이 기대하는 바 영광과 강압에 의해서가 아니라 온유와 겸손과 섬김의 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공의를 세상의 악의 세력 위에 세울 때까지 하십니다. 이는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의미합니다. 그는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자에게 부탁하시(벧전2:23)”는 분이십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고난을 당할 때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습니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과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사53:7).” 주님은 곤욕과 심문을 당할 때에도 끝까지 겸손과 온유한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써 죽음을 정복하셨고 하나님의 공의를 이 땅 위에 굳게 세우셨습니다.
세리 마태는 갈릴리의 꺼져가는 심지와 같았습니다. 그는 양심의 불이 꺼졌고 영혼의 불마저 꺼져가고 있었습니다. 그에게는 도저히 희망이 없었습니다. 그의 영혼은 상한 갈대와 같이 짓이겨지고 부수어졌습니다. 사람들이 그를 소외시킴으로 인해 마음에 멍이 들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제자로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끝까지 그를 감당하사 그의 상처를 싸매어 주시고 꺼져가는 등불에 기름을 넣으셔서 더 밝고 환한 불빛이 되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아주 이기적인 사람들을 섬기고자 할 때 내가 이 사람에게 이용당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될 때가 있습니다. 그런 생각이 들면 더 이상 이기적인 사람을 섬길 수 없습니다. 조용히 관계를 끊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기적인 세리 마태를 섬기셨습니다. 자신의 시간과 물질과 에너지를 그를 섬기기 위해서 아낌없이 희생하셨습니다. 결국은 자신의 생명마저도 십자가에서 내어 주셨습니다. 그는 상한 갈대가 되셨습니다. 그의 영혼은 십자가에서 꺼져가는 심지와 같이 꺼져갔습니다. 그러나 그는 마침내 부활하사 승리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와 부활로 인간의 죄를 이기셨고 죽음을 이기셨습니다. 예수님의 온유와 겸손과 섬김을 통해서 어두움 가운데 있던 세리 마태는 말씀의 불빛을 비춰주는 사도로서 구속 역사를 섬기게 되었습니다.
결론적으로 예수님은 안식일에 제자들의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해서 밀이삭을 잘라 비비어먹은 것을 변호해 주시고 한 손 마른 자를 고쳐주셨습니다.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고 선을 행하시고 생명을 살리는 일을 하셨습니다. 우리도 온유와 겸손과 섬김의 도로 죄를 이기는 그날 까지 다른 사람의 죄를 감당해 주고 생명을 살리는 일을 감당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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