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마16강(11:1-30)/ 내게로 와서 쉬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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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마태복음 제 16 강
말씀/마태복음 11:1-30
요절/마태복음 11:28
내게로 와서 쉬어라
“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시고 병든 사람들을 치료하고 죄사함을 주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사역의 후반기에 접어들면서 제자 양성에 힘을 쓰셨습니다. 그리고 고난을 당하시고 그 강도는 더욱 거세어지고 있었습니다. 이런 가운데 선구자 세례 요한이 힘들어하고, 사람들은 영적으로 무관심하고, 권능을 가장 많이 베푸신 고을들이 회개치 아니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상황에 직면해서 힘드셨지만 도리어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인생들을 자기에게 초청하여 쉼을 주고자 하십니다. 우리 주님은 정말로 목자이시고 우리의 아버지이시고 사랑이 풍성한 분이십니다. 주님의 사랑은 아무리 생각해도 기이합니다. 주님은 고난의 종이셨지만 그의 내면은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와 같았습니다. 그에게서 말할 수 없는 평안과 행복이 흘러나왔습니다. 우리가 고난이 많은 이 세상에서 어떻게 쉼을 누릴 수 있을까요? 이 시간 영적 비밀을 배우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세례 요한의 회의(1-14)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들에게 명하시기를 마치시고 이에 저희 여러 동네에서 가르치시며 전도하려고 거기를 떠나가셨습니다(1). 예수님은 친히 가르치시며 전도하셨습니다. 그런데 요한이 옥에서 그리스도의 하신 일을 듣고 제자들을 보내어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3)? 세례 요한은 지금 옥에 갇혀서 죽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그 당시 헤롯왕의 불륜을 책망했다가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헤롯왕은 자기 동생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를 아내로 취해버렸습니다. 요한은 담대하게 헤롯 왕을 책망했습니다. 그 여자를 취한 것은 옳지 않소라며 죄를 회개하도록 권면했습니다. 그러자 헤롯왕은 세례 요한을 붙잡아다가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비참한 옥중 생활에서 견딜 수 없는 고통을 받고 있었을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기약없이 시간이 지났지만 끝까지 옥중의 고통을 참았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는 헤롯과 같은 악한 자들을 심판할 생각은 하지 않고 이 동네 저 동네를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세례요한은 예수님이 정말 성경에서 예언된 그리스도인가 의심이 들었습니다. 3:11,12절에서 그는 예수님에 대해서 증언하기를 능력이 많고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분이시오 손에 키를 들고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시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일들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 대한 그의 기대가 미치지 못하자 이런 회의가 생긴 것입니다. 우리도 오랫동안 고난을 당하게 되면 신앙생활에 회의가 생깁니다. 그리고 십년 이상 헌신했는데도 눈에 보이는 열매가 없고 인정을 받고 있는 것 같지도 않으면 마음에 의심이 들어옵니다. 내가 정말 목자로 부르심을 입었는가? 목자로서 자격이 있는가? 내가 제대로 가고 있는지 자꾸 회의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연약해진 그의 믿음을 돕기 위해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4,5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예수님은 자신이 하시는 일들을 그대로 전하도록 했습니다. 이는 예수님을 통해서 이루어지고 있는 이사야서의 예언들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이루어지고 있는 현재 모습을 볼 때 그는 메시야이심이 분명합니다.
7-15절에서 예수님은 세례 요한의 질문을 듣고 예수님의 제자들과 무리들이 요한이 타락한 것으로 오해해서 실족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구속 역사에 있어서의 세례 요한의 위치와 그 인격에 대해 증거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무리들에게 세례 요한의 위대성에 대해서 어떻게 증거하셨습니까? 세례 요한이 유대 광야에 나타나 외쳤을 때 유대의 온 백성들과 종교 지도자들까지도 요한에게 가서 그의 메시지를 들었습니다. 요한은 흔들리는 갈대처럼 그의 신념이 흔들리지 않는다고 증거했습니다(7). 또한 요한은 왕궁의 사람들과 같이 사치스러운 옷을 입고 쾌락을 즐기는 사람이 아니라고 증거했습니다(8). 요한은 오랜 감옥의 고통 가운데서도 마음이 변할 사람이 아니라고 증거했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 그러면 예수님을 따르는 자는 가장 작은 자라도 요한보다 위대하다는 뜻이 무엇입니까? 요한은 예수님의 사역의 일부만 보았습니다. 그러나 신약 신자들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과 성령의 강림을 직접 보았고 올바른 메시야관을 갖고 믿을 수 있었습니다. 또한 모든 족속을 제자로 삼는 역사에 쓰임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천국 시민권을 가진 자는 이 세상에서 많은 업적을 남긴 자 보다도 더 위대한 자입니다. 세례 요한 이후 예수님을 통해서 이방인이나 죄인들이 복음을 영접하고 천국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12).
둘째, 영적으로 무관심한 세대(15-19)
예수님은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라고 하시면서 사람들의 관심을 집중하도록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그 시대를 분별하도록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세대를 어떻게 비유하셨습니까? 16-19절은 그 당시 어린 아이들이 장터에서 혼례와 장례 놀이를 하는 것을 묘사한 것입니다. 먼저 아이들은 혼인 행렬을 흉내 내었습니다. 그 중에 몇 명이 피리를 불고 나머지 아이들은 열심히 뛰며 춤을 추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피리 부는 아이가 피리를 아무리 감동적으로 불어도 아이들은 춤을 추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무관심하고 무감각하고 딱딱한 얼굴로 외면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피리 부는 아이들은 그 놀이를 장례식 놀이로 바꾸었습니다. 그들은 그 당시 유대 장례 풍습대로 큰 소리로 애곡하기 시작했습니다. 다른 아이들은 당연히 가슴을 치고 울어야 마땅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얼굴이 딱딱하고 무관심하고 무감각한 상태로 무반응이었습니다. 그들은 마치 개구리 얼굴에 물을 끼얹어도 눈만 껌벅껌벅하는 것처럼 무표정하게 바라만 보고 있었습니다. 이는 정신의학에서 정서 장애자로 진단을 합니다. 그래서 배반당한 아이들은 화가 나서 불평을 했습니다.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애곡하여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이 비유의 말씀은 예수님 당시 종교 지도자들과 백성들이 얼마나 예수님의 말씀에 무관심하고 무감각하며 무반응한가를 탄식하시고 책망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니 놀랍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그 시대를 대할 때 그들의 영적 무관심으로 인해서 놀랐습니다.
오늘날 이 시대의 지성인들은 어떤 상태에 있습니까? 오늘날 캠퍼스 지성인들은 무관심한 세대입니다. 현대인들은 하나님에 대해서 관심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구속역사에도 관심이 없습니다. 이웃에 대해서도 관심이 없습니다. 오직 자기 자신에만 관심을 갖고 살아가는 동물적인 이기주의자들이 되었습니다. 무관심은 자신만을 지나치게 사랑하는 이기주의의 발로입니다. 이기적인 사람은 남에게 관심을 가질 여유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두번째 중요한 계명으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막12:31)고 말씀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지성인들은 이웃에 대해 관심이 없습니다. 모든 죄는 무관심에서 시작됩니다. 우리는 무관심의 죄악된 본성을 버려야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이웃에게 관심을 갖고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봐야겠습니다.
또한 이 세대는 무감각의 세대입니다. 오늘날 세대는 기뻐할 줄도 모르고 슬퍼할 줄도 모르며 감각이 없고 반응이 없는 세대입니다. 아무리 예수님의 구속의 사랑의 피리를 불어도 무감각하고 반응이 없는 세대입니다. 무감각하고 반응이 없는 것은 정서장애질환에 해당이 됩니다. 그렇게 된 이유는 그 심령이 낡은 가죽부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심령을 회개하고 새 심령을 덧입어야겠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의 말씀에 감동할 줄 아는 심령을 가져야겠습니다. 또한 말씀을 전하는 제가 피리를 잘 불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십시오.
셋째, 회개치 않는 고을들(20-24)
20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권능을 가장 많이 베푸신 고을들이 회개치 아니하므로 그 때에 책망하셨습니다. 그들이 병고침을 받고 나서 믿음이 자라야 하는데 그것으로 끝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은혜를 받고서도 회개치 않는 그들을 어떻게 책망하셨습니까? 21-24절을 보십시오. “화가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가 있을진저 벳새다야 너희에게서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면 저희가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두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네게서 행한 모든 권능을 소돔에서 행하였더면 그 성이 오늘날까지 있었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하시니라.” 그들은 자기 의에 빠졌습니다. 자신들이 무슨 자격이 있어서 그렇게 된 것인 양 교만을 부렸습니다. 그들의 마음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게 되자 부요해진 것입니다. 그들은 스스로 자신들은 지혜롭고 슬기롭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복음을 접했으나 회개하지 않을 때 비극적인 결과를 맞이하게 됩니다. 진리를 알지 못하는 것은 슬픈 일입니다. 그러나 진리를 보고서도 이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더욱 중한 심판을 받게 됩니다.
넷째, 남아 있는 제자들로 인해 감사하심(25-27)
25,26절을 보십시오.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예수님은 기적을 베푸셨으나 사람들이 받아들이지 않는 때에도 감사의 기도를 드리셨습니다. 비록 강하고 부한 자들이 그분을 배척했지만 하나님께서 그분의 주위에 천하고 가난하고 약한 자들을 모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복음을 어린 아이들에게 나타내시고 지혜롭고 슬기롭다고 하는 자들에게는 숨기심을 인해서 감사하셨습니다. 복음이 숨겨진 것은 심판이고 나타내게 된 것은 구원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뜻을 겸손하고 배우고자 하는 자들에게 드러내십니다. 그러나 교만하고 가르치고자만 하는 자들에게는 숨기십니다. 27절을 보십시오.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다섯째, 내게로 와서 쉬어라(28-30)
28-30절에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인생들에 대한 예수님의 초청입니다. 예수님께 오기 전 인생들은 어떠한 상태에 있었습니까?
첫째, 수고로 인한 피곤과 권태 속에 있었습니다(28a). 28a절을 보십시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수고하고”란 말은 피곤에 지쳐 있고 권태로운(weary) 삶을 살아가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그 이유는 인간의 조상 아담이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고 선악과를 따먹은 결과 에덴동산에서의 신성한 노동이 저주의 노동으로 바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다음과 같은 벌을 내리셨습니다.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창 3:17) 아담은 에덴 낙원에서 동역자와 같이 만물을 다스리고 관리하는 신성하고 행복한 노동을 했습니다. 에덴 낙원에서는 일하는 것이 즐거웠으며, 피곤하고 권태롭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에덴 낙원에서는 하나님과 항상 교제를 했고 일하는 목적이 하나님의 영광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담의 범죄 이후 에덴 낙원은 저주를 받아 땅은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며 광야와 같이 박토가 되었습니다. 아담은 저주받은 땅에서 먹고살기 위해서 얼굴에 땀을 흘려야 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과잉 교육열로 인해 어렸을 때부터 수고로운 인생을 살아갑니다. 유치원 때부터 영어 학원, 속셈 학원, 컴퓨터 학원, 피아노 학원, 태권도 도장을 다니며 무거운 가방의 짐을 지는 인생을 살아갑니다. 우리가 제일 많이 쓰는 인사말이 무엇입니까? “수고하십니다”, “수고하십시오”입니다. 우리가 타락한 세상에서 살기 때문에 매일 치열한 경쟁 사회에서 생존 경쟁을 위해 수고를 해야 합니다. 이렇게 안하면 백수가 되거나 삼십팔년 병자처럼 인생의 낙오자가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침부터 코피를 쏟으며 출근을 합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고등학교 생활을 졸업하면 자유와 낭만이 있을 대학을 기대하고 대학에 들어왔습니다. 그러나 1학년 때부터 취직 걱정을 하며 경쟁적으로 공부를 해야 합니다. 또한 국제화 정보화 시대에 뒤쳐지지 않기 위해서 토익이나 제 2 외국어를 배우기 위해서 죽기 살기로 매달려야 합니다. 평신도 목자님들은 수고스러운 직장의 짐이 있습니다. 요즘에는 사오정 즉 45세에 정년퇴직하는 때라서 장래가 불안합니다. 자매님들은 결혼을 하면 해산의 고통을 감당해야 하고(창 3:16) 자녀들의 양육과 교육시키는 수고를 감당해야 합니다.
둘째, 예수님을 만나기 전 인간의 삶은 무거운 짐진(heavy-laden) 자의 삶입니다(28a). 에덴 낙원에서는 이런 짐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러나 아담의 범죄로 인해서 실낙원에서는 매우 무거운 죄짐을 지고 살아야 했습니다. 인간은 죄를 지은 결과 죄의 종이 되었고(요8:34) 탐욕에 빠지게 되었으며(벧후2:14), 죄의 결과 사망 권세에 짓눌리고 괴로움을 당하다가 죽음에 이르게 되었습니다(롬6:23). 죄로 인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성이 깨지고 하나님과 교제를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인간들은 무거운 죄짐과 사망권세의 짐을 지고 신음하고 고통스러운 인생길을 가고 있습니다. 마치 100kg나 되는 무거운 짐을 지고 가는 힘든 인생과 같습니다.
28절을 보십시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예수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에게 내게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예수님께 오면 쉼을 얻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 와서 어떻게 해야 참 쉼을 얻을 수 있습니까? 28절을 다시 보십시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첫째, 예수님께 와야 합니다(28b). 참으로 예수님께 와서 예수님과 인격적으로 만나기 위해서는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사죄의 은혜를 덧입어야 합니다. 인간이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이유는 죄로 인해서 죄짐을 지고 죄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참 안식을 누릴 수 있는 비결은 예수님께 와서 죄의 용서함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죄를 고백하고 회개하면 예수님의 보혈로 인해 모든 불의에서 깨끗함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마귀의 유혹에 빠져 심한 죄의식 가운데 시달리는 사람도 많습니다. 그 사람들은 자기 죄가 이미 사해졌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죄악 속에서 죄책감으로 고통받고 죄의 짐에 눌려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내게 오라는 말씀은 현재형입니다. 한번만 예수님께 가서 죄의 용서함을 받은 것으로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매일 매일 계속적으로 예수님께 가서 사죄의 은혜를 덧입고 예수님과 영적인 교제를 나눌 때 참 쉼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과 기쁨의 교제를 꾸준히 나눠야 합니다.
둘째, 예수님을 배우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29). 29절을 다시 보십시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예수님은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십니다. 이렇게 온유하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침대를 주시는 것이 아니라 멍에를 주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멍에를 메고 그에게 배우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멍에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명령에 순종하고 다른 사람들을 겸손히 섬기고 돌보는 것입니다. 멍에는 그가 우리에게 주신 사명입니다. 우리가 이런 일에 힘쓸 때 쉼이 있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섬기면서도 자기 생각이 앞서고 조급하면 쉼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멍에를 매지 아니하면 우리는 세상의 멍에를 메게 됩니다. 사단이 주는 멍에를 메게 됩니다. 그것은 더욱 힘이 듭니다.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은 가장 큰 고통입니다. 허무한 일에 일생 힘을 써야 하는 것은 저주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온유하심과 겸손하심과 그의 사랑과 화평과 인내심을 배워야겠습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의 내면성과 인격을 배우고 덧입는 삶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 가장 가난하고 힘든 목수의 노동을 하셨습니다. 머리 둘 곳 없는 불안정한 사명인의 삶을 사셨습니다. 또한 바쁜 제자양성의 삶을 사셨습니다. 또한 힘든 십자가를 지시고 온 인류의 죄를 대속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광풍을 만난 배 가운데서도 참 쉼을 누리고 편안히 잠을 주무셨습니다. 예수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이 세상의 삶 가운데서도 참 쉼과 평안과 기쁨을 누리는 삶을 사셨습니다. 사람들이 쉼이 없는 이유를 보면 하나님을 대적하고 교만하고 성급하고 반발하고 자기 마음대로 살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탐욕으로 인해 동역자들과 비교하고 시기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매일 예수님을 배우는 생활을 하고 예수님의 온유하심과 겸손함을 덧입을 때 우리는 예수님과 가까워지고 예수님과 기쁨으로 교제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그 때 마음에 참 쉼이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의 멍에를 메고 예수님을 배우라고 했습니다. 두 마리의 소가 같이 멍에를 메고 수레를 끌듯이 예수님과 같이 사명의 멍에를 메고 갈 때 참 쉼이 있습니다.(30)
결론적으로 우리는 참 쉼을 누리기 위해서 매일 주님께 나와 영적인 교제를 가져야겠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내면성을 배우는 삶을 살아야겠습니다. 이번 여름 수양회를 맞이해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지성인들을 예수님의 말씀 잔치에 초대해야겠습니다.
말씀/마태복음 11:1-30
요절/마태복음 11:28
내게로 와서 쉬어라
“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시고 병든 사람들을 치료하고 죄사함을 주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사역의 후반기에 접어들면서 제자 양성에 힘을 쓰셨습니다. 그리고 고난을 당하시고 그 강도는 더욱 거세어지고 있었습니다. 이런 가운데 선구자 세례 요한이 힘들어하고, 사람들은 영적으로 무관심하고, 권능을 가장 많이 베푸신 고을들이 회개치 아니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상황에 직면해서 힘드셨지만 도리어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인생들을 자기에게 초청하여 쉼을 주고자 하십니다. 우리 주님은 정말로 목자이시고 우리의 아버지이시고 사랑이 풍성한 분이십니다. 주님의 사랑은 아무리 생각해도 기이합니다. 주님은 고난의 종이셨지만 그의 내면은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와 같았습니다. 그에게서 말할 수 없는 평안과 행복이 흘러나왔습니다. 우리가 고난이 많은 이 세상에서 어떻게 쉼을 누릴 수 있을까요? 이 시간 영적 비밀을 배우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세례 요한의 회의(1-14)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들에게 명하시기를 마치시고 이에 저희 여러 동네에서 가르치시며 전도하려고 거기를 떠나가셨습니다(1). 예수님은 친히 가르치시며 전도하셨습니다. 그런데 요한이 옥에서 그리스도의 하신 일을 듣고 제자들을 보내어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3)? 세례 요한은 지금 옥에 갇혀서 죽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그 당시 헤롯왕의 불륜을 책망했다가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헤롯왕은 자기 동생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를 아내로 취해버렸습니다. 요한은 담대하게 헤롯 왕을 책망했습니다. 그 여자를 취한 것은 옳지 않소라며 죄를 회개하도록 권면했습니다. 그러자 헤롯왕은 세례 요한을 붙잡아다가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비참한 옥중 생활에서 견딜 수 없는 고통을 받고 있었을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기약없이 시간이 지났지만 끝까지 옥중의 고통을 참았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는 헤롯과 같은 악한 자들을 심판할 생각은 하지 않고 이 동네 저 동네를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세례요한은 예수님이 정말 성경에서 예언된 그리스도인가 의심이 들었습니다. 3:11,12절에서 그는 예수님에 대해서 증언하기를 능력이 많고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분이시오 손에 키를 들고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시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일들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 대한 그의 기대가 미치지 못하자 이런 회의가 생긴 것입니다. 우리도 오랫동안 고난을 당하게 되면 신앙생활에 회의가 생깁니다. 그리고 십년 이상 헌신했는데도 눈에 보이는 열매가 없고 인정을 받고 있는 것 같지도 않으면 마음에 의심이 들어옵니다. 내가 정말 목자로 부르심을 입었는가? 목자로서 자격이 있는가? 내가 제대로 가고 있는지 자꾸 회의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연약해진 그의 믿음을 돕기 위해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4,5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예수님은 자신이 하시는 일들을 그대로 전하도록 했습니다. 이는 예수님을 통해서 이루어지고 있는 이사야서의 예언들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이루어지고 있는 현재 모습을 볼 때 그는 메시야이심이 분명합니다.
7-15절에서 예수님은 세례 요한의 질문을 듣고 예수님의 제자들과 무리들이 요한이 타락한 것으로 오해해서 실족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구속 역사에 있어서의 세례 요한의 위치와 그 인격에 대해 증거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무리들에게 세례 요한의 위대성에 대해서 어떻게 증거하셨습니까? 세례 요한이 유대 광야에 나타나 외쳤을 때 유대의 온 백성들과 종교 지도자들까지도 요한에게 가서 그의 메시지를 들었습니다. 요한은 흔들리는 갈대처럼 그의 신념이 흔들리지 않는다고 증거했습니다(7). 또한 요한은 왕궁의 사람들과 같이 사치스러운 옷을 입고 쾌락을 즐기는 사람이 아니라고 증거했습니다(8). 요한은 오랜 감옥의 고통 가운데서도 마음이 변할 사람이 아니라고 증거했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 그러면 예수님을 따르는 자는 가장 작은 자라도 요한보다 위대하다는 뜻이 무엇입니까? 요한은 예수님의 사역의 일부만 보았습니다. 그러나 신약 신자들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과 성령의 강림을 직접 보았고 올바른 메시야관을 갖고 믿을 수 있었습니다. 또한 모든 족속을 제자로 삼는 역사에 쓰임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천국 시민권을 가진 자는 이 세상에서 많은 업적을 남긴 자 보다도 더 위대한 자입니다. 세례 요한 이후 예수님을 통해서 이방인이나 죄인들이 복음을 영접하고 천국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12).
둘째, 영적으로 무관심한 세대(15-19)
예수님은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라고 하시면서 사람들의 관심을 집중하도록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그 시대를 분별하도록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세대를 어떻게 비유하셨습니까? 16-19절은 그 당시 어린 아이들이 장터에서 혼례와 장례 놀이를 하는 것을 묘사한 것입니다. 먼저 아이들은 혼인 행렬을 흉내 내었습니다. 그 중에 몇 명이 피리를 불고 나머지 아이들은 열심히 뛰며 춤을 추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피리 부는 아이가 피리를 아무리 감동적으로 불어도 아이들은 춤을 추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무관심하고 무감각하고 딱딱한 얼굴로 외면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피리 부는 아이들은 그 놀이를 장례식 놀이로 바꾸었습니다. 그들은 그 당시 유대 장례 풍습대로 큰 소리로 애곡하기 시작했습니다. 다른 아이들은 당연히 가슴을 치고 울어야 마땅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얼굴이 딱딱하고 무관심하고 무감각한 상태로 무반응이었습니다. 그들은 마치 개구리 얼굴에 물을 끼얹어도 눈만 껌벅껌벅하는 것처럼 무표정하게 바라만 보고 있었습니다. 이는 정신의학에서 정서 장애자로 진단을 합니다. 그래서 배반당한 아이들은 화가 나서 불평을 했습니다.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애곡하여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이 비유의 말씀은 예수님 당시 종교 지도자들과 백성들이 얼마나 예수님의 말씀에 무관심하고 무감각하며 무반응한가를 탄식하시고 책망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니 놀랍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그 시대를 대할 때 그들의 영적 무관심으로 인해서 놀랐습니다.
오늘날 이 시대의 지성인들은 어떤 상태에 있습니까? 오늘날 캠퍼스 지성인들은 무관심한 세대입니다. 현대인들은 하나님에 대해서 관심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구속역사에도 관심이 없습니다. 이웃에 대해서도 관심이 없습니다. 오직 자기 자신에만 관심을 갖고 살아가는 동물적인 이기주의자들이 되었습니다. 무관심은 자신만을 지나치게 사랑하는 이기주의의 발로입니다. 이기적인 사람은 남에게 관심을 가질 여유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두번째 중요한 계명으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막12:31)고 말씀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지성인들은 이웃에 대해 관심이 없습니다. 모든 죄는 무관심에서 시작됩니다. 우리는 무관심의 죄악된 본성을 버려야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이웃에게 관심을 갖고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봐야겠습니다.
또한 이 세대는 무감각의 세대입니다. 오늘날 세대는 기뻐할 줄도 모르고 슬퍼할 줄도 모르며 감각이 없고 반응이 없는 세대입니다. 아무리 예수님의 구속의 사랑의 피리를 불어도 무감각하고 반응이 없는 세대입니다. 무감각하고 반응이 없는 것은 정서장애질환에 해당이 됩니다. 그렇게 된 이유는 그 심령이 낡은 가죽부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심령을 회개하고 새 심령을 덧입어야겠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의 말씀에 감동할 줄 아는 심령을 가져야겠습니다. 또한 말씀을 전하는 제가 피리를 잘 불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십시오.
셋째, 회개치 않는 고을들(20-24)
20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권능을 가장 많이 베푸신 고을들이 회개치 아니하므로 그 때에 책망하셨습니다. 그들이 병고침을 받고 나서 믿음이 자라야 하는데 그것으로 끝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은혜를 받고서도 회개치 않는 그들을 어떻게 책망하셨습니까? 21-24절을 보십시오. “화가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가 있을진저 벳새다야 너희에게서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면 저희가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두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네게서 행한 모든 권능을 소돔에서 행하였더면 그 성이 오늘날까지 있었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하시니라.” 그들은 자기 의에 빠졌습니다. 자신들이 무슨 자격이 있어서 그렇게 된 것인 양 교만을 부렸습니다. 그들의 마음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게 되자 부요해진 것입니다. 그들은 스스로 자신들은 지혜롭고 슬기롭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복음을 접했으나 회개하지 않을 때 비극적인 결과를 맞이하게 됩니다. 진리를 알지 못하는 것은 슬픈 일입니다. 그러나 진리를 보고서도 이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더욱 중한 심판을 받게 됩니다.
넷째, 남아 있는 제자들로 인해 감사하심(25-27)
25,26절을 보십시오.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예수님은 기적을 베푸셨으나 사람들이 받아들이지 않는 때에도 감사의 기도를 드리셨습니다. 비록 강하고 부한 자들이 그분을 배척했지만 하나님께서 그분의 주위에 천하고 가난하고 약한 자들을 모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복음을 어린 아이들에게 나타내시고 지혜롭고 슬기롭다고 하는 자들에게는 숨기심을 인해서 감사하셨습니다. 복음이 숨겨진 것은 심판이고 나타내게 된 것은 구원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뜻을 겸손하고 배우고자 하는 자들에게 드러내십니다. 그러나 교만하고 가르치고자만 하는 자들에게는 숨기십니다. 27절을 보십시오.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다섯째, 내게로 와서 쉬어라(28-30)
28-30절에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인생들에 대한 예수님의 초청입니다. 예수님께 오기 전 인생들은 어떠한 상태에 있었습니까?
첫째, 수고로 인한 피곤과 권태 속에 있었습니다(28a). 28a절을 보십시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수고하고”란 말은 피곤에 지쳐 있고 권태로운(weary) 삶을 살아가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그 이유는 인간의 조상 아담이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고 선악과를 따먹은 결과 에덴동산에서의 신성한 노동이 저주의 노동으로 바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다음과 같은 벌을 내리셨습니다.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창 3:17) 아담은 에덴 낙원에서 동역자와 같이 만물을 다스리고 관리하는 신성하고 행복한 노동을 했습니다. 에덴 낙원에서는 일하는 것이 즐거웠으며, 피곤하고 권태롭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에덴 낙원에서는 하나님과 항상 교제를 했고 일하는 목적이 하나님의 영광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담의 범죄 이후 에덴 낙원은 저주를 받아 땅은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며 광야와 같이 박토가 되었습니다. 아담은 저주받은 땅에서 먹고살기 위해서 얼굴에 땀을 흘려야 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과잉 교육열로 인해 어렸을 때부터 수고로운 인생을 살아갑니다. 유치원 때부터 영어 학원, 속셈 학원, 컴퓨터 학원, 피아노 학원, 태권도 도장을 다니며 무거운 가방의 짐을 지는 인생을 살아갑니다. 우리가 제일 많이 쓰는 인사말이 무엇입니까? “수고하십니다”, “수고하십시오”입니다. 우리가 타락한 세상에서 살기 때문에 매일 치열한 경쟁 사회에서 생존 경쟁을 위해 수고를 해야 합니다. 이렇게 안하면 백수가 되거나 삼십팔년 병자처럼 인생의 낙오자가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침부터 코피를 쏟으며 출근을 합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고등학교 생활을 졸업하면 자유와 낭만이 있을 대학을 기대하고 대학에 들어왔습니다. 그러나 1학년 때부터 취직 걱정을 하며 경쟁적으로 공부를 해야 합니다. 또한 국제화 정보화 시대에 뒤쳐지지 않기 위해서 토익이나 제 2 외국어를 배우기 위해서 죽기 살기로 매달려야 합니다. 평신도 목자님들은 수고스러운 직장의 짐이 있습니다. 요즘에는 사오정 즉 45세에 정년퇴직하는 때라서 장래가 불안합니다. 자매님들은 결혼을 하면 해산의 고통을 감당해야 하고(창 3:16) 자녀들의 양육과 교육시키는 수고를 감당해야 합니다.
둘째, 예수님을 만나기 전 인간의 삶은 무거운 짐진(heavy-laden) 자의 삶입니다(28a). 에덴 낙원에서는 이런 짐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러나 아담의 범죄로 인해서 실낙원에서는 매우 무거운 죄짐을 지고 살아야 했습니다. 인간은 죄를 지은 결과 죄의 종이 되었고(요8:34) 탐욕에 빠지게 되었으며(벧후2:14), 죄의 결과 사망 권세에 짓눌리고 괴로움을 당하다가 죽음에 이르게 되었습니다(롬6:23). 죄로 인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성이 깨지고 하나님과 교제를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인간들은 무거운 죄짐과 사망권세의 짐을 지고 신음하고 고통스러운 인생길을 가고 있습니다. 마치 100kg나 되는 무거운 짐을 지고 가는 힘든 인생과 같습니다.
28절을 보십시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예수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에게 내게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예수님께 오면 쉼을 얻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 와서 어떻게 해야 참 쉼을 얻을 수 있습니까? 28절을 다시 보십시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첫째, 예수님께 와야 합니다(28b). 참으로 예수님께 와서 예수님과 인격적으로 만나기 위해서는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사죄의 은혜를 덧입어야 합니다. 인간이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이유는 죄로 인해서 죄짐을 지고 죄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참 안식을 누릴 수 있는 비결은 예수님께 와서 죄의 용서함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죄를 고백하고 회개하면 예수님의 보혈로 인해 모든 불의에서 깨끗함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마귀의 유혹에 빠져 심한 죄의식 가운데 시달리는 사람도 많습니다. 그 사람들은 자기 죄가 이미 사해졌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죄악 속에서 죄책감으로 고통받고 죄의 짐에 눌려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내게 오라는 말씀은 현재형입니다. 한번만 예수님께 가서 죄의 용서함을 받은 것으로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매일 매일 계속적으로 예수님께 가서 사죄의 은혜를 덧입고 예수님과 영적인 교제를 나눌 때 참 쉼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과 기쁨의 교제를 꾸준히 나눠야 합니다.
둘째, 예수님을 배우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29). 29절을 다시 보십시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예수님은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십니다. 이렇게 온유하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침대를 주시는 것이 아니라 멍에를 주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멍에를 메고 그에게 배우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멍에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명령에 순종하고 다른 사람들을 겸손히 섬기고 돌보는 것입니다. 멍에는 그가 우리에게 주신 사명입니다. 우리가 이런 일에 힘쓸 때 쉼이 있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섬기면서도 자기 생각이 앞서고 조급하면 쉼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멍에를 매지 아니하면 우리는 세상의 멍에를 메게 됩니다. 사단이 주는 멍에를 메게 됩니다. 그것은 더욱 힘이 듭니다.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은 가장 큰 고통입니다. 허무한 일에 일생 힘을 써야 하는 것은 저주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온유하심과 겸손하심과 그의 사랑과 화평과 인내심을 배워야겠습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의 내면성과 인격을 배우고 덧입는 삶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 가장 가난하고 힘든 목수의 노동을 하셨습니다. 머리 둘 곳 없는 불안정한 사명인의 삶을 사셨습니다. 또한 바쁜 제자양성의 삶을 사셨습니다. 또한 힘든 십자가를 지시고 온 인류의 죄를 대속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광풍을 만난 배 가운데서도 참 쉼을 누리고 편안히 잠을 주무셨습니다. 예수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이 세상의 삶 가운데서도 참 쉼과 평안과 기쁨을 누리는 삶을 사셨습니다. 사람들이 쉼이 없는 이유를 보면 하나님을 대적하고 교만하고 성급하고 반발하고 자기 마음대로 살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탐욕으로 인해 동역자들과 비교하고 시기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매일 예수님을 배우는 생활을 하고 예수님의 온유하심과 겸손함을 덧입을 때 우리는 예수님과 가까워지고 예수님과 기쁨으로 교제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그 때 마음에 참 쉼이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의 멍에를 메고 예수님을 배우라고 했습니다. 두 마리의 소가 같이 멍에를 메고 수레를 끌듯이 예수님과 같이 사명의 멍에를 메고 갈 때 참 쉼이 있습니다.(30)
결론적으로 우리는 참 쉼을 누리기 위해서 매일 주님께 나와 영적인 교제를 가져야겠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내면성을 배우는 삶을 살아야겠습니다. 이번 여름 수양회를 맞이해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지성인들을 예수님의 말씀 잔치에 초대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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