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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마14강(9:18-38)/ 너희 믿음대로 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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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엘리야
댓글 0건 조회 3,130회 작성일 03-06-08 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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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마태복음 제 14 강                                               
말씀/마태복음 9:18-38
요절/마태복음 9:29

너희 믿음대로 되라
  “이에 예수께서 저희 눈을 만지시며 가라사대 너희 믿음대로 되라 하신대”

  우리는 하나님의 선물로 믿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는 가운데 믿음이 자라나고 있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능력이 역사하는 통로입니다. 예수님께 대한 믿음이 있을 때 죄사함을 받고, 병 고침을 받고, 고난을 견디고 승리할 수 있습니다. 믿음이 있을 때 기적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온전히 믿는 자들을 지금도 찾고 계십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믿음으로 자기를 찾는 자에게 상을 주십니다. 이 시간 우리가 믿음을 배우고 믿음으로 하나님의 역사에 귀히 쓰임받기를 기도합니다.

I.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18-31)

  예수님께서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둘이 다 보전된다는 말씀을 하실 때에 한 직원이 와서 절하였습니다. 그리고 내 딸이 방장 죽었사오나 오셔서 그 몸에 손을 얹으소서 그러면 살겠나이다라며 간구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일어나 따라 가시매 제자들도 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도중에 뜻밖의 일이 일어났습니다.

  20,21절을 보십시오. “열 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던 여자가 예수님의 뒤로 와서 그 겉옷 가를 만지니 이는 제 마음에 그 겉옷만 만져도 구원을 받겠다 함이라.” 혈루증은 자궁 출혈증입니다. 모세의 율법에 의하면 혈루증은 부정한 병으로서 그녀가 만지는 것은 무엇이나 부정하게 되었습니다. 마이더스의 손은 만지는 것은 무엇이든지 금으로 만든다는데, 이 여인은 만지는 것마다 부정하게 되니 그 수치심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게다가 이 여인은 용하다는 의원을 다 찾아다녀 보았지만 많은 괴로움을 받고 있던 재산도 다 허비하고 아무 효험도 없이 도리어 더 중하게 될 뿐이었습니다(막 5:26). 열 두 해 동안 끊임없이 흐르는 피와 악취나는 몸 그리고 대꼬챙이같이 말라버린 몰골, 탱탱하던 피부는 흙빛으로 변하고 종기가 많이 났을 것입니다. 보통 여인을 꽃으로 비유합니다. 이 여인을 굳이 꽃으로 비유하자면 다 시들어버린 할미꽃과 같았습니다. 이 여인이 처녀라면 결혼은 꿈도 꿀 수 없었습니다. 만약 결혼한 여인이라면 남편의 사랑도 받을 수 없었고 12년 동안을 독수공방하며 살아야 했습니다. 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하면 아이라도 키우면서 사는 재미가 있으련만 아이를 낳을 수도 없었습니다. 이 여인은 수없이 많은 밤을 눈물로 지샜을 것입니다. 이 여인은 아무런 희망도 가질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예수님께 대한 소문을 들었습니다. 문둥병자가 고침을 받고 귀신이 쫓겨나고 중풍병도 나음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희망의 빛이 그 마음에 비추이기 시작했습니다. 그 분이 어떤 분이실까 호기심도 생기고 만나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는 길목에 있다가 따라 붙기 시작했습니다. 율법에는 겉옷 네 귀에 술을 달도록 하였는데(민 15:38), 이 여인이 예수님을 접촉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뒤로 가서 자유롭게 흔들거리는 그 술을 만지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뒤로 다가가자 이 여인은 좌우를 살피더니 그 손을 내밀어 예수님의 옷 가를 만졌습니다. 이는 제 마음에 그 겉옷만 만져도 구원을 받겠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21). “그 겉옷만 만져도 나음을 입겠다.” 이는 그녀의 마음에 숨겨진 믿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믿음을 선물로 주십니다. 그 겉옷만 만져도 구원을 받겠다는 것은 이 여인이 예수님의 말씀과 소문을 듣고 마음에 생겨진 믿음입니다. 이러한 믿음이 심겨졌을 때 여인의 마음은 예수님의 겉옷을 만져야겠다는 소원으로 강렬하게 불타올랐습니다. 그리고 그 소원을 이루기 위해서 현기증이 나는 몸을 일으켜 세우고 예수님께 한발 한발 나아갔습니다. 믿음은 행함으로 나타납니다. 여인은 자기의 믿음을 표현했습니다. 여인이 예수님의 겉옷 가에 원터치를 했습니다. 여기까지가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무리들 가운데는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는 자들이 많았습니다. 손을 대는 정도가 아니라 몸을 비벼대는 자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행동은 의미없는 몸짓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믿음으로 한 여인의 행동을 금방 알아차리셨습니다.

  우리도 말씀을 듣다가 이렇게 각자의 믿음이 생길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내가 백 명에게 전도하면 한 명의 양은 얻을 수 있겠다”는 믿음이 생깁니다. 그는 그 일을 이루기 위해서 간절히 기도하고 믿음으로 사람을 만나야 합니다. 백 명을 만나기까지 자신의 믿음이 자라야 합니다.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포도주가 떨어졌을 때 하인들은 마리아의 말을 듣고 예수님께 대한 믿음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여섯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고 했을 때 믿음으로 아구까지 채웠습니다. 그리고 물을 떠다가 연회장에게 가져다가 주라고 했을 때 믿음으로 퍼다 주었습니다. 그때 그들은 물이 포도주로 변화되는 기적을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한 가지 기도 제목을 가지고 백일기도를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솔로몬은 마음에 믿음이 생긴대로 일천 번제를 드렸습니다. 그때 하나님을 만나 지혜를 구할 수 있었고 그 응답으로 가장 지혜로운 왕이 되었습니다.

  22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돌이켜 그를 보시며 가라사대 딸아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시니 여자가 그 시로 구원을 받으니라.” 예수님은 돌이켜 그녀를 보셨습니다. 그를 보시는 예수님의 마음은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충만해지셨습니다. 그리고 이 여인의 믿음을 마음으로 느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던 길을 멈추고 갑자기 멈추어 섰을 때 여인의 심장은 일순간 멎고 말았을 것입니다. 이를 어쩌나 들켰구나, 큰 일 났다. 여인은 두려워 떨고 있었습니다. 어디로 도망을 칠 수도 없었습니다. 자신의 속마음이 예수님께 드러났을 때 여인은 떨었습니다. 지금 사람들은 야이로의 집으로 가기에 정신이 없었습니다. 빨리 가서 죽은 아이를 살려내야 한다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혈루증으로 부정한 여인, 냄새나는 여인, 소외된 여인을 뚫어져라 쳐다보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셨습니다. “딸아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예수님은 이 여인을 딸로 맞아주셨습니다. 딸아 안심하라. 이는 병든 딸을 애뜻하게 사랑하는 영원한 하늘 아버지의 음성이었습니다. 딸아 안심하라. 이 말씀은 열 두 해의 긴긴 밤을 눈물로 지샌 여인의 눈물을 닦아 주시는 아버지의 따뜻한 손길이었습니다. 이 말씀은 배 아파 신음하는 아이의 배를 문대 주시는 어머니의 약손이었습니다. 딸아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천지 만물을 말씀으로 창조하신 예수님의 선포가 입에서 떨어지자마자 여자가 그 시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혈루증은 죄와 매우 흡사합니다. 혈루증은 생명의 근원인 피를 흘리는 병으로서 점차로 죽어가는 병입니다. 혈루증은 부정한 병으로서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입니다. 음욕을 흘리면서 다니는 사람들은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더럽게 합니다. 혈루증은 다른 사람과 교제할 수 없게 합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과 분리를 시키는 병입니다. 죄가 꼭 그와 같습니다. 죄인으로서 자기를 발견하는 사람은 부정하다고 소리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사야도 성전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을 때 부르짖었습니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사6:5).” 그 때에 천사가 단에서 취한 바 핀 숯을 손에 가지고 와서 그의 입에 대며 말하였습니다.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 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사6:6).” 혈루증에 시달리던 여인이 구원을 받게 되었다는 것은 일차적으로는 병이 나음을 받은 것이요 이차적으로는 죄사함을 받은 것입니다. 그리고 이 여인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새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제 그녀는 남편의 사랑도 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처녀라면 결혼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아마 이 여인은 사마리아 여인과 같이 그 지방에서 위대한 선교사가 되었을 것입니다.

  이제 우리의 시선을 한 직원의 외동딸을 고치신 사건으로 돌려 봅시다. 예수님께서 요한의 제자들에게 그들의 패러다임(경계를 분명히 정하고 이 경계 안에서 무엇을 해야 성공할 숭 있을 지를 말해주는 규칙과 규정)을 바꾸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고 계실 때였습니다. 한 직원이 황급히 예수님께 달려와 절하며 “내 딸이 방금 죽었습니다. 그러나 오셔서 그 몸에 손을 얹어주십시오. 그러면 그 아이가 살아날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사람은 회당장 야이로였으며, 그 딸은 이제 12살 된 외동딸이었습니다(눅 8:41,42). 야이로는 이 딸을 금지옥엽같이 고이고이 키웠습니다. 어버이 날 딸이 만들어온 카네이션을 가슴에 달아 주면서 “엄마 아빠 이렇게 키워 주셔서 고맙습니다” 할 때에 그는 아이를 안고 볼에 입을 맞추어 주며 얼굴을 부비어 주었습니다. 그 때에 이 딸은 삶의 기쁨이요 열 아들 부럽지 않은 보배였습니다. 이러한 딸이 어느 날 현장 학습을 다녀오면서 찬 비바람을 맞고 시름시름 앓더니 그의 눈앞에서 숨을 헐떡이며 생이별을 고했습니다. 오늘날로 하면 사스에 감염된 것입니다. 야이로는 생각조차 하고 싶지 않은 일이 현실로 닥쳐온 것입니다. 일순간 모든 생각이 멈추고 시간도 멈추어 버린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야이로는 이때 예수님을 기억하고 그에게 나아왔습니다. 절망적인 분위기 가운데서 그가 예수님께 나올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열린 마음과 딸에 대한 극진한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께 적대적이었고 그를 함께 할 수 없는 사람으로 여기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는 시도가 점증되어 가고 있는 때였습니다. 그런데 그가 이런 분위기 가운데서 예수님께 나아와 절하고 도움을 구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그는 새 가죽 부대였습니다. 그는 예수님 중심의 변화를 영접하고 동참하였습니다.

 이 직원이 예수님께 나아와 간구하는 것을 볼 때 그의 믿음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
첫째, 그는 딸을 죽은데서 살려주시기를 구하는 부활 신앙이 있었습니다. 죽음 앞에 인간은 철저히 자신의 나약함을 절감하게 되고, 죽음은 인간이 아무리 발버둥쳐 보아도 누구도 해결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천하의 재벌도, 천하장사나 세기의 영웅도 죽음 앞에선 소용이 없습니다. 죽음은 모든 것의 끝이요 절망 그 자체입니다. 사람들은 이 죽음의 문제 앞에 절망하고, 어떤 이들은 죽음을 운명적으로 받아들이고 미화하여 ‘사의 찬미’를 부르기도 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직원은 예수님을 죽음 문제의 해결자로 믿었습니다. 자신의 딸이 방금 죽었을 때에 절망하지 않고 예수님에게 절대적인 소망을 두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생명의 주, 부활의 주로 믿는 온전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둘째, 그는 모든 한계를 뛰어넘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 직원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딸이 방금 죽었사오나 오셔서 그 몸에 손을 얹으소서. 그리하면 그 아이가 살아날 것입니다.” 이 직원이 예수님께 구한 딸의 생명은 죽어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자기 눈앞에서 죽어 이미 시체가 되어 있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직 숨이 붙어있을 때까지는 열심히 기도하고 믿다가도 숨이 끊어지면 그 믿음도 함께 장례시켜 버립니다. 그러나 이 직원은 죽음의 한계 너머로 역사하시는 부활의 주, 생명의 주님을 믿었습니다. 진정한 믿음은 어떤 가능성이나 눈에 보이는 확률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믿음이란 모든 한계를 뛰어넘어 역사하시는 하나님, 언약하신 말씀을 신실하게 이루시는 인격적이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믿은 바 그의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시는 분”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그가 백세가 되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아니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롬 4:17-20). 우리에게도 현실상황은 너무나 절망적이고 한계적인데 믿음 없는 자신을 볼 때 깊은 수치심에 빠질 때가 많습니다. 여름수양회는 다가오는데 양들은 하나 둘 관계성이 끊어지고 양들의 영적소원은 죽은 지가 벌써 나흘이나 되어 냄새가 날 지경입니다. 양들을 보면 시름시름 앓다가 죽어가는 야이로의 외동딸과 같습니다. 이들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애를 쓰지만 고집이 세고, 세상 소원이 많고, 죄의 소욕을 따라가는 그들을 어찌해 보지 못합니다. 우리는 이런 양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품고 주님 앞에 나아가 그들을 살려 주시도록 기도해야겠습니다. 또한 무지한 나를 불쌍히 여기사 양들을 살려 주시도록 기도해야겠습니다. 우리가 모든 한계를 넘어 역사하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바라고 믿을 때 능치 못할 일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직원의 집에 가사 피리 부는 자들과 훤화하는 무리를 보시고 “물러가라 이 소녀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슬피 울던 것을 멈추고 비웃었습니다. 그들은 죽음의 권세에 사로잡혀 냉소적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너무나 상황인식을 못하신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은 것과 자는 것도 분별하지 못한다고 비웃었습니다. 그들은 엉덩이에 뿔난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무리를 내어 보낸 후에 소녀가 누워 있는 방으로 베드로, 야고보, 요한과 부모들과 함께 들어가셨습니다. 그리고 소녀의 손을 잡으시매 소녀가 눈을 뜨고 일어났습니다. 예수님께서 문둥병자를 만지시자 그가 깨끗함을 받았고 혈루증 여인이 예수님의 겉옷을 만지자 나음을 입은 것처럼 예수님께서 죽은 소녀의 손을 잡자 일어났습니다. 이 세 경우의 공통점은 주님께서 만지신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 영혼을 어루만지시면 우리는 구원을 받습니다.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같이 아들도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요5:21).” 주님께서 말씀으로 우리의 영혼을 만지시기를 기도합니다.

  27-31절에는 예수님께서 두 소경을 고치신 사건이 나옵니다. 27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거기서 떠나가실새 두 소경이 따라오며 소리질러 가로되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더니” 두 소경은 듀엣으로 소리질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들은 육신의 눈은 감겨 있으나 영적인 눈은 뜨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간구를 듣지 않으신 양 집에 들어가셨습니다. 두 소경은 포기치 않고 집까지 따라 들어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물으셨습니다. “내가 능히 이 일 할 줄을 믿느냐” 그들은 주여 그러하오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신앙 고백을 받으시고 저희 눈을 만지시며 너희 믿음대로 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그들의 눈이 밝아졌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마음으로 눈을 뜨고자 하는 강한 소원과 믿음이 있음을 확인하시고 너희 믿음대로 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의 능력은 소경의 눈을 뜨게 했습니다.

  우리는 이상에서 예수님은 믿음을 기뻐하시고, 그 믿음대로 역사하시는 분이심을 배울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기 위해서 인간적인 능력이나 사회적인 신분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역사는 인간조건이나 개인의 능력에 있지 않고 믿음에 있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 11:6).” 예수님은 신분고하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그 마음에 믿음이 있는 자들을 기뻐하시고 그 믿음을 따라 일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의 인간조건이나 능력, 환경을 탓하고 절망할 것이 아닙니다. 내 마음에 믿음이 없는 것을 애통하며 회개해야 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 큰 믿음을 주시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의 분량을 따라 일하시는 분이십니다. “네 믿음대로 되라” 이 말씀은 우리가 큰 믿음을 가지면 큰 복을 받고 작은 믿음을 소유하면 작은 복을 받는다는 의미입니다. 믿음이 없는 자는 하나님의 축복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믿음의 분량만큼 그의 자녀에게 복을 주십니다. 시 81:10절은 말씀합니다. “네 입을 넓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 우리는 자신이 소유한 믿음의 분량만큼 제자양성을 할 수 있고, 일생 자신이 품은 믿음의 분량만큼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크신 능력을 체험하고 하나님께 크게 쓰임 받고자 한다면 믿음의 분량과 크기를 키워야 합니다. 우리가 믿음대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역사의 원리를 영접해야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도 큰 믿음을 소유한 믿음의 사람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큰 믿음은 큰 소원과 비전을 동반합니다. 믿음은 두려움의 반대입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은 모험을 즐깁니다. 변화를 즐깁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새 역사를 창조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II.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어 주소서(32-38)

  두 소경들이 믿음으로 눈을 뜨고 집을 나갈 때에 사람들이 귀신들려 벙어리 된 자를 예수님께 데리고 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귀신을 쫓아내시고 벙어리가 말하게 하셨습니다. 무리들은 기이히 여기며 말했습니다. “이스라엘 가운데서 이런 일을 본 때가 없다.” 지금은 메시야의 때였고 천국이 그들에게 임하였습니다. 그런데 똑같은 사실을 보고서 바리새인들은 말했습니다. “저가 귀신의 왕을 빙자하여 귀신을 쫓아낸다(34).” 이것은 하나님의 역사를 사단의 역사로 매도하는 것이요 이단의 역사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어찌해서 그들은 이런 해석을 하는 것일까요? 이는 그들의 관점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관점이 다르기 때문에 해석도 다르게 나오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서 그들이 아는 하나님의 사람들처럼 행동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거룩한 사람이란 이방인들이나 문둥병자나 돼지나 피를 흘리는 여인이나 죽은 자와 같은 거룩하지 못한 사람들과 접촉을 피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문둥병자에게 손을 내미시고 이방인을 고치시고 돼지와 귀신이 우글거리는 곳에서도 사역하시고 피 흘리는 여인이 그 분을 만지는 것을 칭찬하셨고 죽은 자의 손을 잡으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거룩한 것에 대한 견해가 달랐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은 긍휼을 베푸는 사역이며 죄인을 심판하거나 종교적 순결을 지키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자비하신 뜻을 따라 행하셨고 그래서 문둥병자나 귀신들린 자에게 손을 내미셨고 이방인을 격리시키는 벽을 허무셨고 죄인들을 부르셔서 함께 식사를 하셨습니다. 이런 일은 이스라엘에서 예전에는 없었던 일이었습니다. 포도주를 담았던 낡은 가죽 부대가 터지고 하나님 나라의 새 포도주가 흘러나와 땅을 적시고 하나님께서 추수하시는 때를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통해서 변화되고 새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핍박에 대항하지 아니하시고 모든 성과 촌에 두루 다니시면서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제 새로운 단계의 사역을 하고자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이 보실 때 그 시대의 문제는 양을 불쌍히 여기는 목자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36절을 보십시오. “무리를 보시고 민망히 여기시니 이는 저희가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유리함이라.” 목자가 없을 때 양들은 고생하며 유리할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도 양을 아는 목자, 양을 위해서 풍성한 꼴을 공급하는 목자, 양을 위해서 자기 생명을 희생하는 목자가 필요합니다. 양은 목자의 말을 듣습니다. 목자는 양을 알뿐만 아니라 양을 위해서 자기를 개방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목자로서 그들과 함께 하시며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보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자신이 하신 일들을 이양하고자 하십니다. 자신의 권한을 위임하고자 하십니다. 권한 위임을 통해서 제자들을 키우기를 원하셨습니다. 이제 예수님이 하셨던 일을 제자들이 해야 하고 그것이 제자들의 운명이기도 합니다. 제자들이 이러한 일을 지속하면 풍성한 수확을 거두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핍박을 받을 때에 중단하지 않고 하나님의 일을 열심히 하셨습니다. 그들과 싸우지 않고 복음 역사를 힘써 섬기심으로 그들의 비난에 대답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새로운 단계의 역사를 위해서 제자들에게 한 가지 기도 제목을 제시하셨습니다.  37,38절을 보십시오.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은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어 주소서 하라 하시니라.” 추수할 일꾼을 보내어 주소서라고 기도하게 하십니다. 추수하는 일꾼이 필요하다는 것은 이 일이 긴급하다는 뜻입니다. 추수가 임박한 때에는 시간을 낭비할 여유가 없습니다. 추수하는 자는 추수의 현장에 즉각 나타나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오늘날 캠퍼스 지성인들을 보시고도 “그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유리함을 인하여 심히 민망히 여기실 것”입니다. 오늘날 캠퍼스의 신세대양들, X 세대의 양들은 기성세대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정신세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기성세대가 아날로그세대였다면 신세대양들은 속도지향적인 디지털세대요, 기성세대는 Go!하면 갔지만 신세대 양들은 Let's go!해야 움직이는 세대입니다. 이 시대는 모든 경계와 영역을 타파하는 ‘탈쟝르화’, ‘탈영토화’ 그리고 절대적인 기준이 없이 ‘이리보아도 맞고 저리보아도 맞고, 이리보아도 틀리고 저리보아도 틀리는’ 결론과 정답이 없는 시대입니다. 과거에는 10년 사이로 세대 차이를 느꼈지만 오늘날은 1년 사이에도 세대 차이를 느끼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시대에 신세대 양들은 엄청난 정신적, 육체적 자유를 누리지만 그 영혼은 절대 진리를 잃고 사단의 공격과 유린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 영혼의 고독과 죄의 고통을 이해하고 감당해줄 목자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캠퍼스의 신세대들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어린 양들로 영접하고 그리스도의 강한 군사로 훈련해야 합니다. 훈련하다 보면 떠나는 양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군으로 부르심을 받은 대로 이들을 영적 지도자로 훈련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들을 세계를 감당할 추수하는 일꾼으로 키우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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