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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마13강(9:1-17)/ 죄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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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엘리야
댓글 0건 조회 3,159회 작성일 03-06-01 1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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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마태복음 제 13 강                                                       
말씀/마태복음 9:1-17
요절/마태복음 9:13

죄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님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마태는 예수님의 행적을 주제별로 정리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8,9장에서 아홉 가지 기적들을 볼 수 있습니다. 8장에는 문둥병자, 백부장의 하인, 베드로의 장모를 치료하심, 갈릴리 바다를 잠잠케 하신 권능과 귀신들린 자를 치료하신 사건이 나옵니다. 그리고 9장에서 중풍병자를 치료하시고 야이로의 딸과 혈루증 여인을 살리시고 벙어리 되고 귀먹은 귀신들린 자를 고치신 사건이 나옵니다. 예수님은 단순히 질병을 고치시는 분이 아니라 자연과 초자연 세계를 다스리시며, 죄와 죽음에 대한 권세를 가지신 분이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통해서 죄사함을 받고 질병이 치료되어 건강한 삶을 살고 제자의 길을 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마태가 예수님의 제자로 부르심을 받고 세리와 죄인들의 목자가 되었듯이 우리도 이 시대의 목자 역할을 잘 감당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중풍병자를 치료하신 예수님(1-8)
 
  예수님께서 가다라 지방에서 배를 타고 돌아 오사 본 동네인 가버나움에 이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집에 들어가 가정 교회에서 말씀을 가르치고 있을 때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데리고 왔으나 사람이 하도 많아 발디딜 틈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친구를 예수님께 데리고 가는 일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지붕에 올라가서 기왓장과 나무들을 뜯어내고 흙을 파내고 구멍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중풍병자를 침상 채 예수님 앞으로 달아 내렸습니다. 예수님의 말씀 선포는 중단되었습니다. 중풍병자의 모습은 어떠했을까요? 그는 두려워 떨고 있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의 입만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이때 예수님의 말씀이 무엇입니까? 2b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소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예수님은 그들의 행동을 보고 무례하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도리어 믿음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믿음으로 자기에게 나아오는 자들을 기뻐하십니다(히11:6). 그리고 그들의 믿음을 축복해주십니다. 예수님은 믿음으로 나아온 그를 ‘내 아들’이라고 영접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중풍병을 고치러 나온 그에게 죄사함을 주셨습니다.

  “소자야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방금 뭐라고 했지? 너 들었어?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어떻게 감히 저 사람이 그런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하나님 외에는 아무도 죄사함을 줄 권세가 없어. 죄사함을 줄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자신이 하나님이라는 거야. 이 사람은 지독한 참람죄를 짓고 있군. 그는 돌에 맞아 죽어야 마땅해.’ 이것은 서기관들이 속으로 생각했던 말입니다. 바리새인들의 말은 맞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문제는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지 못했다는데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의 생각을 아시고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마음에 악한 생각을 하느냐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 그러나 인자가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4b-6).” 중풍병의 근본문제는 죄였습니다. 죄로 인해서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피조계는 모든 것이 뒤틀리게 되자 인간의 육체도 깊이 병들게 되었습니다. 인간은 죄로 인해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권세에 사로잡혔고 그 권세가 명하는 대로 행동합니다. 예수님께서 죄사함을 주실 때는 바로 이런 세력으로부터 자유를 선포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Get up, take your mate and go home(6)” 그러자 그가 일어나 완전히 치료되어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사람들은 이 장면을 보고 놀라며 두려워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권세를 사람에게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8).

  우리는 여기서 두 가지 교훈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로, 인간의 근본 문제는 죄문제입니다. 우리가 구체적으로 알 수는 없지만 중풍병자는 죄인이고 그 죄가 중풍병을 일으킨 원인입니다. 대개 혈기가 많은 사람이 혈압이 올라서 중풍이 됩니다. 정욕 죄에 깊이 빠졌던 사람이 죄의 중압감에 눌려 무기력하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중풍병자는 생각은 많지만 행동으로 옮기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온갖 원망과 불평을 했습니다. 마땅히 해야 할 것은 알지만 할 수 없는 그는 다스리고 정복하라는 말씀에 순종할 수 없었습니다.
 
둘째로, 예수님의 죄사함의 권세는 그의 신성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기적을 본 후에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어떤 속죄의 권세를 예수님께 주신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신성모독으로 고소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만이 죄를 용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죄를 용서하심으로서 그가 아직 말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신성이 확증되었습니다. 그 때문에 여기에 나온 치료의 예는 너무나 중요한 것입니다. 예수님께는 죄를 사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중풍병자의 죄를 사할 뿐만 아니라 그를 치료하셨습니다. 이로 인해서 그는 죄사함의 권세가 있는 분임을 나타내셨습니다.

  육체적 질병을 고치는 것보다 죄를 극복하는 것이 훨씬 더 어렵습니다. 마비된 육체를 고치는 것이 파도를 막는 것이라면 죄의 권세를 소멸하는 것은 바닷물을 모두 끌어당기는 것과도 같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미 육체의 질병을 고치실 능력이 있다는 것을 보여 주셨습니다. 이제 그 분은 이보다 더 큰 대적 즉 죄를 다루십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증상이 아니라 그 근원을 다루기 시작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고 선포하신 것은 죄의 처분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마치 전혀 죄를 짓지 않았던 사람처럼 용서를 받았다는 뜻입니다. 그가 지은 죄 때문에 마땅히 치러야할 죄 값을 예수님께서 치르셨으므로 율법과 공의를 만족시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이심을 뜻하는 것입니다.

둘째, 마태를 제자로 부르심(9-17)

  마태는 중풍병자를 고치신 사건 이후에 자신의 부르심을 기록했습니다. 그는 자신도 역시 예수님에 의해서 치료받아야 할 병자요 죄사함을 받아야 할 죄인으로서 생각했습니다. 동시에 자기와 마찬가지로 치료 받아야 할 친구들의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9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거기서 떠나 지나 가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은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나를 좇으라 하시니” 마태는 세리였습니다. 세리는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종교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먼저 세리는 자기 나라를 식민 통치하는 로마의 앞잡이였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세리라는 말만 들어도 침을 뱉었습니다. 왜냐하면 세리들은 로마와 계약을 맺고 일을 했는데 자기에게 부과된 할당량만 납부하면 얼마든지 재주껏 더 거두어서 사유재산으로 삼아도 무방했기 때문입니다. 세리는 당시에 합법화된 도둑질이요 착취였는데 거기에는 어떤 제한이나 한계가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세리를 날도둑놈으로 생각했습니다. 세리 마태는 이기심과 거짓의 영으로 충만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로고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지독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세리 마태를 제자로 부르신 것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사람을 제자로 부르신 것입니다. 마태에게 소망을 두고 키우시는 주님을 찬양합니다. 

  세리는 종교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는 부정한 사람으로 여겨졌습니다. 유대인의 법에서 세리는 회당 예배에 참석할 수 없었습니다. 정통 유대인들은 세리를 창기와 같은 죄인으로 여겼습니다. 그들은 법정에서 증인으로 설 자격도 없었습니다.

  세리는 사회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정통 유대인들은 세리와 함께 여행을 하거나 함께 식사를 하거나, 무슨 사업을 하거나, 무엇을 주거나 받지도 못하도록 금지했습니다. 자기 집에 손님으로 영접할 수 없었습니다. 마태는 고독하였습니다. 그는 사랑받기를 원했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사랑이 그리워서 자기가 기르는 개에게서라도 사랑받기를 원합니다. 마태는 개라도 키우면 좋았겠지만 그들은 개를 부정하게 여겨서 기를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마태는 어디서든지 용납되지 않고 배척받음으로 고독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나를 좇으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세리 마태를 있는 모습 그대로 영접하셨습니다. 그것은 기이한 일이었습니다. 자기 의가 강한 유대인들이 받아들일 수 없는 그를 예수님은 받아들이셨으므로 정말로 문제 많은 그를 하나님께서도 받아들이신 것입니다. 그만큼 세리가 예수님의 제자가 됐다는 것은 파격적인 뉴스였습니다.

  나를 좇으라는 말씀은 먼저 방향을 바꾸라는 촉구입니다. 즉 자기 중심적인 삶에서 예수님을 중심으로 한 삶으로 방향 전환을 하라는 것입니다. 그는 돈을 좇아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돈을 사랑하는 자는 근심으로써 자기 마음을 찌른다고 한 말씀처럼 참 행복이 없었습니다. 그는 열심히 일하여 많은 돈을 벌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삶을 돌아볼 때 마음이 텅 비어 있고 황량한 것을 발견하고 후회를 했습니다. 마태는 허무하게 사라질 존재였지만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생명을 살리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제까지 남에게 해를 끼치는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남을 섬기고 돕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나를 좇으라는 말씀은 제자에로의 부르심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참된 만족과 충만함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부르사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며 전도도 하며 귀신을 내어 쫓는 권세도 주셨습니다(막3:14). 예수님은 제자들을 부르사 자신과 인격적인 교제를 나누기를 원하셨고 그들을 목자로 키우셨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는 영적 지도자로 부르심을 입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좇으려면 끊임없이 자기를 부인하고 배워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을 좇기보다 편안하게 신앙생활을 하고 싶은 소원이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좇는데 일순위를 두지 않으면 직장이나 세속적인 일에 헌신하며 살 수 밖에 없습니다.

  “나를 좇으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마태는 어떤 반응을 보였습니까? 그는 일어나 좇았습니다. 이는 중풍병자가 일어나 걸어간 것과 같습니다. 그에게 믿음이 없었다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행동으로 옮기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일어났고 좇았습니다. 누가복음에 보면 그가 예수님은 좇을 때 모든 것을 버리고 좇았다고 했습니다. 그는 자기의 직업과 지위와 수입을 버리고 예수님을 좇았습니다. 그는 과거의 죄도 버리고 예수님을 좇았습니다. 마태는 완전히 변화되었습니다.

  10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마태의 집에서 앉아 음식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 예수와 그 제자들과 함께 앉았더니” 마태는 세리 친구들과 죄인들을 불러 모아 놓고 예수님을 초청하여 말씀 공부를 했습니다. 마태는 친구들에게 예수님을 소개하고 싶었습니다. 이것은 구원받은 자의 자연스러운 행동입니다. 우리가 사람을 변화시킬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나도록 최선을 다해서 환경을 만들 수는 있습니다. 우리가 위대한 증인이 될 수 있을까요? 우리는 친구들을 예수님께 소개할 수 있습니다. 친구들을 크리스챤이 되게 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에 대해서 그들에게 말해 주고 그들이 예수님을 만나도록 가능한 모든 일을 해야 합니다. 마태 한 사람을 통해서 수많은 죄인들이 예수님의 공동체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인격적인 교제를 통해서 사람들과 교제를 하시고 가르치셨습니다. 기독교는 “신적인 인격에 감염된 사람들의 종교”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11절을 보십시오. “바리새인들이 보고 그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도덕성을 공격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천한 것들과 교제함으로써 그들의 죄를 좋아하고 그들과 죄를 나누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이에 대해서 예수님은 그들이 배워야 할 것이 무엇이라고 하셨습니까? 12,13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있느니라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오늘날은 사람이 병들면 치료를 받기 위해서 의사나 병원을 찾아갑니다. 그런데 예수님 당시에는 병원도 의사의 사무실도 없었습니다. 의사가 환자들을 찾아갔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영혼의 의사로서 그 패턴을 따르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영적인 리더라면 잃어버린 자들을 찾아 구원하고자 노력해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목자는 양들이 찾아오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호세아서 말씀을 인용하셨습니다.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13a).”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매우 좋아하셨던 말씀입니다. 그래서 12:7절에서도 다시 인용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정말로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리더라면 잃어버린 자들에 대한 긍휼을 보이고 그들을 불러 회개를 하고 믿음을 갖도록 섬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긍휼이 없고 공의만 주장한다면 살아남을 양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양이 없는 목자가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힘들어도 양이 있기 때문에 목자의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너만 양이냐 다른 양도 많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보내주신 양을 감당하지 못하면 다른 양을 아무리 보내어 주어도 감당하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그들과의 대화의 결론을 이렇게 맺으셨습니다.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13b).” 여기서 부른다는 것은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도록 회개와 믿음을 촉구하는 것입니다.

  당시 자기 의가 충만한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경건 생활에서도 실패했다고 생각했습니다. 14절을 보십시오. “그 때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우리와 바리새인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 유대인들은 월요일과 목요일에 금식을 했습니다. 아마 예수님께서 세리 마태의 집에서 식사하실 그때가 금식기간이었던 것 같습니다. 자기들은 금식하는 중에 음식 냄새를 맡고 고통을 받고 있는데 예수님의 제자들은 즐겁게 웃고 떠들며 잔치를 즐기고 있으니 화가 났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과 제자들의 삶에는 경건이 결핍된 것이 아닌가라고 생각했습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어떻게 응답하셨습니까?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 슬퍼할 수 있느뇨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때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지금은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하나님의 임재가 함께 하는 시기이고 천국의 즐거움을 축하하는 시기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계시는 동안 금식한다는 것은 승리의 축제를 벌이는 동안 슬피 우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 즉 예수님께서 참혹하게 죽으시는 때는 금식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면서 이 세상의 고통과 슬픔에 참여하고 금식해야 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규례에서 자유할 수 있는 비결이 무엇인가 생각해 보아야겠습니다. 지금 예수님의 제자들이 금식하지 않아도 되는 이유는 신랑되신 예수님과 함께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내신 신랑입니다. 우리는 장차 하나님 나라에서 혼인 잔치에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신앙생활을 즐겁게 하라고 하십니다. 성령의 열매는 희락입니다. 우리가 성령의 충만함을 받을 때 하나님의 임재를 누리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곳은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가득하게 됩니다. 금식은 해야 할 때가 있고 안 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할 때는 기뻐해야 하지만 예수님이 떠나실 때는 금식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중심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는 복음과 율법, 은혜와 훈련의 관계를 잘 알아야 합니다. 복음으로 거듭난 자만이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인지 알게 되고, 그 은혜를 누리는 사람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공동체를 세우기 위해서 헌신을 하고, 영적인 성숙을 위해서 몸부림치는 영적 투쟁을 합니다. 우리가 사랑으로 서로 권면하는 가운데 거룩한 삶을 살도록 돕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영적 성숙을 돕는 것은 한 개인의 일이 아니라 공동체 전체가 힘써야 할 일입니다. 특히 우리는 이 시대 양들이 은혜와 감동의 바다에 빠져서 예수님을 만날 수 있도록 연구하고 기도하며 환경을 만들어야겠습니다. 

  더 나아가 예수님은 그들에게 놀라운 교훈을 주셨습니다. 16,17절을 보십시오.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이는 기운 것이 그 옷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게 됨이요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지 아니하나니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도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됨이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둘이 다 보전되느니라.” 생베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고 옷을 빨면 생베조각이 줄어들어서 낡은 옷을 당기게 되어 옷이 빨리 찢어지게 됩니다. 새 포도주는 낡은 가죽 부대에 넣지 않습니다. 발효하면서 새 포도주는 낡은 가죽 부대를 터뜨리고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사역은 놀랄 만큼 새로운 사역이고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행하시는 일들은 당시 전통적이고 융통성이 없는 사고방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과거의 것을 모두 부정하고 파괴하신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과 선지자를 폐하기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니라 온전케 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5:17). 예수님께서는 매우 새로운 방법으로 하나님의 뜻과 약속들을 이루셨습니다. 옛것을 새 방법으로 이루신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옛 것과 새 것을 다 보전하셨습니다. 

  우리는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히 굳어 버리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새로워지려면 속 사람이 새롭게 되어야 합니다. 새 포도주인 복음을 받아들이는데 장애물이 되는 것들을 제거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이를 위해서 말씀을 새롭게 공부해야 합니다. 말씀에 대한 감동이 새로워져야합니다. 우리가 알지만 행하지 않는 것을 회개하고 순종해야합니다. 한 말씀에 대해서 순종하고자 몸부림치는 투쟁을 하고 있습니까? 영적인 투쟁이 있습니까? 우리가 바리새인들과 같이 되지 않으려면 본질적인 것을 지키고 비본질적인 것에 대해서 자유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들은 장로들의 유전을 하나님의 말씀과 같이 중하게 여겼습니다. 그들이 말씀을 잘 지키기 위해서 장로의 유전을 만들었지만 말씀의 정신을 잃어버리고 틀만 붙잡게 되었을 때 외식하는 자들이 되고 말았습니다. 주님께서 우리 마음에 말씀을 새롭게 하시고 형식적인 제사보다 긍휼을 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하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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