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마12강(8:18-34)/바람과 바다를 잔잔케 하신 예수님
페이지 정보

본문
2003년 마태복음 제 12 강
말씀 / 마태복음 8:18-34
요절 / 마태복음 8:26
바람과 바다를 잔잔하게 하신 예수님
“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하시고 곧 일어나사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신대 아주 잔잔하게 되거늘.”
제 방에는 폭풍우치는 바다에 떠 있는 일엽편주와 같은 그림이 있습니다. 그 그림은 공룻 선교사님이 그린 작품입니다. 그 그림은 절망적인 상황에서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며 항해하는 돛단배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험한 세상을 항해하지만 하나님 나라를 향하여 나아가는 항해자들입니다. 우리의 인생 항해에 주님께서 함께 하심을 인하여 감사를 드립니다. 여러 모양의 인생 문제들을 통해서 믿음을 배우고 체험하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대가를 지불해야 하는 제자도(18-22)
예수님께서 무리가 자기를 에워쌈을 보시고 저편으로 건너가기를 명하셨습니다(18).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쉼이 필요함을 아시고 잠시 쉬게 하고자 하셨습니다. 목자는 사람들을 상대해서 섬겨야 할 일이 많기 때문에 분주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자기와의 조용한 만남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이런 고독한 시간을 통해서 우리의 영성은 자라고 풍성해지는 것입니다. 사람이 분주하면 경박해지고 내면이 메마르기 쉽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매일 새벽 한적한 곳으로 나가사 하나님 아버지와 조용한 시간을 가지셨고 큰 역사를 마치고 난 뒤나 분주함을 뒤로 하고 조용한 시간을 가지셨습니다. 현대인들은 분주하게 일하는 것을 영성이 뛰어나고 능력있는 생활을 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물론 생명력이 있는 곳은 어수선하고 무질서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위대한 일들은 조용하게 일어납니다. 예수님은 들레지 아니하시면서 위대한 제자 양성과 하나님의 일을 하셨습니다. 우리가 매일 새벽 주님과의 만남을 사모하므로 무리를 떠나서 저편으로 건너가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여름 수양회를 통해서 이런 쉼을 갖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해변으로 나아가실 때 한 서기관이 나아와 예수님께 말씀을 드렸습니다. “선생님이여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좇으리이다(19).” 서기관이면 성경을 많이 알고 성경을 필사하는 사람입니다. 그는 율법의 전문가요 율법의 해석자였습니다. 이런 그가 무엇이 부족하여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자 했을까요? 그는 아마 예수님의 명성을 보고 좇고자 했던 것 같습니다. 아니면 율법을 공부하고 해석하고 가르쳤지만 거기서 어떤 생명력을 느끼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산상 수훈을 통해서 나타난 예수님의 율법 해석과 그의 가르침은 영혼을 뒤흔드는 힘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화살이 날아가 꽂히듯, 도끼로 내리치듯, 혹은 달콤한 과즙으로 적시는듯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예수님의 기르침은 저희 서기관들과 같지 않았습니다(7:29). 그는 구도자로서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 싶었습니다. 진리에 대한 목마름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어디를 가시든지 좇고 싶었습니다. 당시 랍비의 제자들은 랍비의 가르침을 듣고 그것에 따라서 사는 것뿐만 아니라 랍비의 일과를 관찰함으로서 랍비를 좇았다고 합니다. 그는 예수님과 함께 살면서 그를 배우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에게 무엇이라고 대답하셨습니까? 20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학교 기숙사에 들어가는 것과는 다른 것입니다. 예수님의 삶은 거처도 없고 쉴 곳도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삶은 안정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면 고난을 각오해야 합니다. 가난을 각오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가능한 한 많은 추종자들을 얻기 위해서 사람들에게 다급하게 달려들지 않으셨습니다. 그는 아무나 제자가 될 수 없다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좇음으로 치러야 할 대가를 이해하는 참 제자를 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은 특권입니다. 예수님을 가까이서 배울 수 있는 것이 특권입니다. 그를 통해서 영적 비밀을 배우는 것도 특권입니다. 예수님은 집이라고 부를 처소를 소유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는 그렇게 살다가 십자가에서 속옷까지도 다 내어주고 벌거숭이로 돌아가셨습니다. 그의 삶은 가난했지만 힘이 있었습니다. 그 속에는 겸손이 있고 소망이 있고 사랑이 있고 믿음이 자랄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비밀을 알았기에 자기의 약함을 자랑했습니다.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고후12:9,10).” 우리가 주님을 좇을 때 치루어야 할 대가가 있습니다. 그것은 물질을 포기하는 것일 수도 있고 정처없는 나그네로 살아야 할 때도 있습니다. 전셋집을 계속해서 옮겨야 할 수도 있습니다. 주말 부부로 살면서 순례자로 살아야 할 때도 있습니다. 예수님 안에 있는 보화를 발견한 사람만이 가서 자기 소유를 팔아 그것을 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라는 부르심을 받았다면 그것은 은혜이고 우리로 따르도록 하셨기 때문에 값비싼 은혜입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의 것을 사랑하면서 쉽게 제자의 길을 가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지금도 도전하고 계십니다.
저는 인턴 훈련을 받으면서 2년 동안 센타 바닥에 스치로플을 깔고 잠을 잤습니다. 종로 센타가 나의 집이었습니다. 그렇게 하다가 국민대 장막에 들어가 그들을 섬기면서 지내게 되었습니다. 방바닥에서 잔다는 것이 얼마나 편안한가를 그때 깊이 느꼈습니다. 몸이 녹았습니다. 그러다가 결혼을 하고 푹신한 이불 위에서 잠을 잤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침대에서 잠을 잡니다. 잠자리가 편안해 지면서 스피릿도 비례하여 다운된 것 같습니다. 제가 돌이켜보건대 고난 가운데 있을 때 영적인 소원도 더 강했던 것 같습니다. 우리에게는 휴식도 필요하고 쉼도 필요하지만 영적인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고난도 필요합니다.
제자 중에 또 하나가 예수님께 나아와 먼저 가서 자기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해 달라고 했습니다(21). 그는 이미 제자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제자로서 자신을 온전히 희생하는 것에 대해서 망설이고 있었습니다. 그는 제자가 걷는 길이 어떻다는 것을 이해했기 때문에 망설이게 되었을 것입니다. 특히 그는 아직 가정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가족으로서의 의무를 다한 후에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사람이 죽으면 그날 장사를 지냈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부친은 아직 죽지 않았습니다. 그는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후에 예수님을 좇겠다는 것입니다. 그가 장자였다면 자기에게 돌아올 유산에 대한 권리를 확실히 한 다음에 예수님을 좇고자 한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좇기 위해서 가정 일을 미루어 놓음으로 아버지의 노여움을 사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부모의 장래를 지내는 것은 자식으로서 엄숙한 의무였습니다. 부모를 장사지내는 데 대해서 아무런 관심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불효이고 무엄한 일이고 죄받을 일이고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무엇이라고 하십니까? 22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가라사대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 하시니라.”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하나님 나라는 생명과 죽음의 문제만큼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어떤 나라에 속했는가를 잘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어느 나라에 충성을 다하는가? 생명이 없는 옛 시대에 충성을 다하는가 아니면 하나님 나라에 충성을 다하는가? 우리가 영생을 누리고자 하면서도 이 세상에서의 삶도 즐기고자 한다면 이는 마치 한 발은 해변에 한 발은 배에 있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헌신이 완전히 무조건적이 되어야 함을 깊이 생각하라고 촉구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먼저’라는 그의 말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먼저’가 되어야 하고 다른 모든 인간적인 충성들은 그 다음이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이는 무정한 것이 아니라 그 사람에게 자신의 최우선적인 충성을 점검하라고 요청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고 하셨습니다(22). 예수님은 전적으로 자기에게 충성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리고 가족에게 충실하는 것도 예수님께 대한 순종의 요구보다 앞서서는 안됩니다. 예수님의 제자된 자는 예수님을 좇는데 최우선 순위를 두어야 합니다.
둘째, 광풍을 잠잠케 하신 예수님(23-27)
예수님과 제자들이 배에 올랐습니다. 그들은 휴양회를 떠나는 들뜬 기분에 휘파람을 불고 마음이 가벼워졌습니다. 저녁 노을을 따라서 붉은 길이 물 위에 생겼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 하는 삶의 풍요함과 은혜를 마음껏 느낄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시원한 바닷 바람을 맞으시면서 어느새 깊은 잠에 빠지셨습니다. 제자들의 마음에도 깊은 평안이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의 인생 항해에서 어떤 예기치 않는 일이 일어났습니까? 24절을 보십시오. “바다에 큰 놀이 일어나 물결이 배에 덮이게 되었으되 예수는 주무시는지라.” 바다가 지진이 일어나는 것처럼 흔들렸고 배는 물결로 뒤덮이게 되었습니다. 참으로 무시무시한 장면이었습니다. 우리 인생에도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나아가는데도 환란이 생깁니다. 요나가 불순종했을 때 폭풍우가 쳐서 바다에 빠져 죽게 된 경우도 있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나아갔고 주님께서 함께 하시는데도 불구하고 우리의 삶에 환난이 생길 수 있습니다. 말씀대로 순종하여 살고자 하는데 갑작스럽게 폭풍우에 부딪치게 되면 우리는 당황하게 됩니다. 그러나 인생은 수학과 같이 딱 맞아떨어지지 않습니다. 훌륭한 믿음을 가진 목자님들에게도 이런 환란이 닥칩니다. 가정을 책임지고 있는 가장이 급작한 실직을 당하게 되면 앞이 캄캄해지게 됩니다. 새벽 일찍 직장을 다니던 분이 의미없이 거리를 걷다 보면 우울함과 슬픔이 몰려온다고 합니다. 어떤 선교사님은 열심히 일하다가 피곤을 느껴 검사를 해보니 간 경화로 판명이 났습니다. 이제 삶을 정리해야 한다고 생각할 때 그 두려움이란 어떠하겠습니까? 우리나라는 한 해 교통 사고로 1만명이 죽고, 30만명이 불구자가 된다고 합니다. 누가 교통사고가 날 줄 알고 당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이런 경우를 당하게 되면 하나님께서도 해결하실 수 없는 문제가 있다고 느낄 정도가 됩니다.
그런데 이런 긴박한 상황에서 예수님은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극도로 피곤하셨습니다. 소음과 격렬한 배의 흔들림, 그리고 차가운 물의 흩뿌림도 예수님을 깨우지 못했다는 것은 지상 사역 동안 예수님께서 육체적으로 얼마나 소진하셨는지를 어렴풋이 엿보게 합니다. 그런데 다른 때도 아니고 제자들이 절실히 주님의 도움을 필요로 할 때 주무시고 계신 것을 보면 야속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때로 우리의 자원이 바닥이 났는데도 예수님은 아직 시작도 하지 않으십니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 외에는 아무도 어떤 일도 할 수 없는데 말입니다. 그러나 인생의 폭풍우 속에서 예수님은 지금도 여전히 주인이십니다. 상황이 아무리 나쁘더라도 하나님께서 다스리고 계십니다. 절망스러운 상태는 하나님의 보호하시는 능력을 신뢰해야 할 명백한 경우가 됩니다. 우리는 용기를 교실에서는 배울 수 없고, 파괴된 세상에 나가 살 때에만 배울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칭찬하시는 믿음은 위기와 고투에 의해 판가름 납니다. 우리가 이때를 위해서 믿음을 배웠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주무실지라도 우리가 직면한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으십니다.
그러면 이때 제자들은 어떻게 했습니까? 25절을 보십시오. “그 제자들이 나아와 깨우며 가로되 주여 구원하소서 우리가 죽겠나이다.” 제자들은 주님께 간절히 부르짖어 도움을 구하였습니다. 이것은 제자들의 기도입니다. 환란을 당하여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제자들과 같이 부르짖어 믿음의 기도를 드리는 것입니다. 사실 제자들 중에는 베테랑 어부들이 몇 명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힘은 폭풍우 앞에서 한계를 드러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자기 힘으로 어찌해 볼 도리가 없을 때 하나님께 나아가 부르짖어 기도해야 합니다. 근심하고 염려하는 대신에 믿음의 기도를 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깨우는 소리를 듣고 눈을 뜨셨습니다. 그리고 태연히 말씀하셨습니다.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하시고 곧 일어나사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신대 아주 잔잔하게 되었습니다.(27a)” 예수님은 제자들이 극한 상황에서도 믿음을 잃지 않기를 바라셨습니다. 믿음으로 두려움을 극복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죤 웨슬레가 미국에서 영국으로 돌아올 때 폭풍우를 만났습니다. 그는 두려움에 부들부들 떨고 있는데 모리비안들이 평화롭게 찬송하며 기도하는 모습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 후에 죤 웨슬레는 거듭남을 체험하고 위대한 복음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믿음을 강화하기 위해서 이런 시련을 허용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믿음이 적은 것을 책망하셨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주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믿음의 사람들이 되도록 부지런히 말씀을 가르치시고 믿음의 훈련을 시키셨습니다. 제자들은 여러 번 실수했지만 이를 성장의 기회로 삼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믿음을 통로로 쓰셔서 우리 가운데 강하게 역사하십니다. 그리고 그 영광을 드러내십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풍랑 가운데서 주님께 대한 믿음을 갖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믿음 없음을 지적하시고 일어나사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셨습니다. 그러자 바람과 바다가 아주 잔잔하게 되었습니다. 바다에서 무서운 폭풍를 만났고 물벽이 배를 동요시키는 것을 본 사람이라면 바다가 갑자기 잠잠하게 된 것은 정말 믿을 수 없는 장면이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자연 법칙을 거스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일은 인간의 이성으로 기대할 수 없었던 일입니다. 그들은 순간이나마 바다가 그렇게 잔잔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말씀만으로 바다를 잔잔하게 하셨습니다. 태풍을 잔잔하게 하신 기적은 그들이 이제까지 경험했던 것과는 차원이 다른 새로운 경험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이 장면을 보고 기이히 여겼습니다. “이 어떠한 사람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고(27)” 이를 통해서 예수님은 메시야이시고 천지 만물을 그 뜻대로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시는 분이심이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피곤하여 주무셔야 하는 인간이시며, 동시에 전능한 능력을 지니신 하나님이십니다. 이 주님이 우리와 일생토록 함께 있다는 것은 얼마나 멋진 일입니까!
우리는 예기치 못한 어려움에 직면하게 되면 쉽게 낙망하거나 부정적이 되거나 절망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이런 문제들 속에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어려움 중에도 하나님께서 친히 역사를 주관하신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찾아야 합니다. 그때 우리는 하나님의 역사를 섬길 수 있습니다.
셋째, 귀신을 쫓아내신 예수님(28-34)
예수님께서 건너편 가다라 지방에 이르렀을 때였습니다. 귀신들린 자 둘이 무덤 사이에서 나와 예수님 일행을 만났는데 그들이 야수와 같이 심히 사나와 아무도 그 길로 지나갈 수 없을 만하였습니다. 마가복음에는 이 사람이 전에는 돌로 자기 몸을 상하고 사슬로 묶인 것을 풀고 소리를 지르며 다녔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마태는 귀신들린 사람에게 관심을 보이기보다는 귀신의 세력을 멸하는 능력을 가진 예수님께 관심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귀신들린 사람이 얼마나 난폭한지 아무도 그 길로 지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한 마디 말씀으로 귀신을 쫓아내셨습니다. 이는 초자연적인 영역에 대한 예수님의 능력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사람들이 왜 귀신이 들리는지 그 이유를 알기는 어렵습니다. 그런데 대개 자기정체성이 부족한 사람에게 쉽게 들어온다고 합니다. 마음이 약하고 죄의식이 강한 사람에게도 잘 들어옵니다. 특히 정욕에 사로잡힌 경우나 상처로 인해서 귀신들리는 경우도 많습니다. 또한 악령의 분위기에 친숙한 경우에도 그렇습니다. 우리 시대는 귀신 문화가 확산되어 가고 있습니다. 그림도 정신분열증적인 것이 많고 죄악된 문화들이 수없이 양산되고 있습니다. 마당 앞에 있는 ‘붉은 귀 청거북’ 세 마리와 같이 철갑으로 자기 주위를 꼭꼭 감싸고 머리만 내밀고 사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은 자기 세계 속에 갇혀서 관계성을 맺지 못합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과 관계성을 맺어 조화롭게 살지 못하고 닥치는 대로 잡아먹는 파괴적인 동물입니다.
귀신들린 자들이 소리를 질렀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여 우리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때가 이르기 전에 우리를 괴롭게 하려고 여기 오셨나이까(29)?” 그들은 자기들이 멸망할 때를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심판하실 때가 되면 “사람들을 미혹하는 마귀가 불과 유황 못에 던지우니 거기는 그 짐승과 거짓 선지자도 있어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게 될 것입니다.(계 20:10)” 사람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는데 귀신들은 귀신같이 알아보았습니다. 귀신들린 사람들은 예수님과 인격적인 관계성을 맺기를 싫어합니다. 귀신은 대적하고 반역하는 세력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사람의 생명을 살리고 풍성케 하려고 오신 것에 반하여 귀신은 죽이고 멸망시키는 목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예수님과 함께 할 수 없습니다.
마침 멀리서 많은 돼지 떼가 꿀꿀거리며 즐겁게 먹고 있었습니다. 귀신들은 예수님께 간구하였습니다. “만일 우리를 쫓아내실진대 돼지 떼에 들여 보내소서(31).” 귀신들은 살아있는 존재를 사로잡기를 원했습니다. 귀신들은 부정한 육체에 거하기를 좋아합니다. 귀신들이 살아있는 생명체에 들어가기를 원하는 것은 괴롭힐 육체가 없이 지내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고 최종적인 멸망을 지연시키려고 노력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들의 파괴적인 의도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귀신을 그냥 쫓아버리거나 멸하시지 않고 가라고 허락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귀신들을 멸할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기 때문이요 귀신들의 파괴적인 능력과 의도를 사람들에게 보여주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최후의 심판이 이르기 전까지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모든 악을 그치게 하지 않으십니다.
귀신들은 예수님께서 가라하시는 말씀에 나와서 돼지에게로 들어갔습니다. 그러자 맛있게 꿀꿀이 죽을 먹고 있던 돼지들이 트위스트를 치더니 온 떼가 비탈로 내리달아 바다에 들어가 몰사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귀신들에게 들어가라고 하지 않고 가라고 하셨습니다. 그들이 요청한 일을 하라고 허락하셨습니다. 이를 통해서 귀신들에 대한 예수님의 능력과 권세를 입증하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한 사람의 생명을 구원하기 위해서 돼지떼를 희생하셨습니다. 또한 물질주의에 만연한 그 시대 사람들에게 생명이 물질보다 더 귀중함을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자신의 생명을 온전히 희생하셨습니다. 희생이 없이는 생명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돼지를 치던 자들이 달아나 시내에 들어가 이 모든 일과 귀신들린 자의 일을 고했습니다.그러자 온 시내가 예수님을 만나려고 나가서 보고 그 지방에서 떠나시기를 간구하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권세와 능력을 알고 그를 영접하고 경배해야 마땅했지만 두려움 때문에 자기들을 떠나달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그들의 엄청난 실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다시 그곳에 돌아오셨다는 기록이 성경에 전혀 없습니다. 그들은 경제적인 손실을 두려워하여 생명을 얻는 일을 포기한 것입니다. 오늘날도 돈을 사랑함으로 인해서 신앙 생활을 포기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런 지성인들이 예수님을 통해서 물신의 세력으로부터 자유함을 얻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이상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로서 살려면 대가를 지불해야 함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우리가 환란 과 광풍 중에서도 믿음을 유지하기를 원하심을 배웁니다. 우리는 사나운 귀신을 만날 때에 악한 세력을 몰아낼 수 있는 영력과 믿음이 있어야 함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군사로서 영적인 싸움을 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말씀의 능력과 믿음의 능력을 주셔서 이 싸움에서 승리하도록 우리와 함께 하심을 찬양합니다.
말씀 / 마태복음 8:18-34
요절 / 마태복음 8:26
바람과 바다를 잔잔하게 하신 예수님
“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하시고 곧 일어나사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신대 아주 잔잔하게 되거늘.”
제 방에는 폭풍우치는 바다에 떠 있는 일엽편주와 같은 그림이 있습니다. 그 그림은 공룻 선교사님이 그린 작품입니다. 그 그림은 절망적인 상황에서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며 항해하는 돛단배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험한 세상을 항해하지만 하나님 나라를 향하여 나아가는 항해자들입니다. 우리의 인생 항해에 주님께서 함께 하심을 인하여 감사를 드립니다. 여러 모양의 인생 문제들을 통해서 믿음을 배우고 체험하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대가를 지불해야 하는 제자도(18-22)
예수님께서 무리가 자기를 에워쌈을 보시고 저편으로 건너가기를 명하셨습니다(18).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쉼이 필요함을 아시고 잠시 쉬게 하고자 하셨습니다. 목자는 사람들을 상대해서 섬겨야 할 일이 많기 때문에 분주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자기와의 조용한 만남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이런 고독한 시간을 통해서 우리의 영성은 자라고 풍성해지는 것입니다. 사람이 분주하면 경박해지고 내면이 메마르기 쉽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매일 새벽 한적한 곳으로 나가사 하나님 아버지와 조용한 시간을 가지셨고 큰 역사를 마치고 난 뒤나 분주함을 뒤로 하고 조용한 시간을 가지셨습니다. 현대인들은 분주하게 일하는 것을 영성이 뛰어나고 능력있는 생활을 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물론 생명력이 있는 곳은 어수선하고 무질서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위대한 일들은 조용하게 일어납니다. 예수님은 들레지 아니하시면서 위대한 제자 양성과 하나님의 일을 하셨습니다. 우리가 매일 새벽 주님과의 만남을 사모하므로 무리를 떠나서 저편으로 건너가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여름 수양회를 통해서 이런 쉼을 갖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해변으로 나아가실 때 한 서기관이 나아와 예수님께 말씀을 드렸습니다. “선생님이여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좇으리이다(19).” 서기관이면 성경을 많이 알고 성경을 필사하는 사람입니다. 그는 율법의 전문가요 율법의 해석자였습니다. 이런 그가 무엇이 부족하여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자 했을까요? 그는 아마 예수님의 명성을 보고 좇고자 했던 것 같습니다. 아니면 율법을 공부하고 해석하고 가르쳤지만 거기서 어떤 생명력을 느끼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산상 수훈을 통해서 나타난 예수님의 율법 해석과 그의 가르침은 영혼을 뒤흔드는 힘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화살이 날아가 꽂히듯, 도끼로 내리치듯, 혹은 달콤한 과즙으로 적시는듯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예수님의 기르침은 저희 서기관들과 같지 않았습니다(7:29). 그는 구도자로서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 싶었습니다. 진리에 대한 목마름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어디를 가시든지 좇고 싶었습니다. 당시 랍비의 제자들은 랍비의 가르침을 듣고 그것에 따라서 사는 것뿐만 아니라 랍비의 일과를 관찰함으로서 랍비를 좇았다고 합니다. 그는 예수님과 함께 살면서 그를 배우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에게 무엇이라고 대답하셨습니까? 20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학교 기숙사에 들어가는 것과는 다른 것입니다. 예수님의 삶은 거처도 없고 쉴 곳도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삶은 안정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면 고난을 각오해야 합니다. 가난을 각오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가능한 한 많은 추종자들을 얻기 위해서 사람들에게 다급하게 달려들지 않으셨습니다. 그는 아무나 제자가 될 수 없다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좇음으로 치러야 할 대가를 이해하는 참 제자를 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은 특권입니다. 예수님을 가까이서 배울 수 있는 것이 특권입니다. 그를 통해서 영적 비밀을 배우는 것도 특권입니다. 예수님은 집이라고 부를 처소를 소유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는 그렇게 살다가 십자가에서 속옷까지도 다 내어주고 벌거숭이로 돌아가셨습니다. 그의 삶은 가난했지만 힘이 있었습니다. 그 속에는 겸손이 있고 소망이 있고 사랑이 있고 믿음이 자랄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비밀을 알았기에 자기의 약함을 자랑했습니다.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고후12:9,10).” 우리가 주님을 좇을 때 치루어야 할 대가가 있습니다. 그것은 물질을 포기하는 것일 수도 있고 정처없는 나그네로 살아야 할 때도 있습니다. 전셋집을 계속해서 옮겨야 할 수도 있습니다. 주말 부부로 살면서 순례자로 살아야 할 때도 있습니다. 예수님 안에 있는 보화를 발견한 사람만이 가서 자기 소유를 팔아 그것을 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라는 부르심을 받았다면 그것은 은혜이고 우리로 따르도록 하셨기 때문에 값비싼 은혜입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의 것을 사랑하면서 쉽게 제자의 길을 가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지금도 도전하고 계십니다.
저는 인턴 훈련을 받으면서 2년 동안 센타 바닥에 스치로플을 깔고 잠을 잤습니다. 종로 센타가 나의 집이었습니다. 그렇게 하다가 국민대 장막에 들어가 그들을 섬기면서 지내게 되었습니다. 방바닥에서 잔다는 것이 얼마나 편안한가를 그때 깊이 느꼈습니다. 몸이 녹았습니다. 그러다가 결혼을 하고 푹신한 이불 위에서 잠을 잤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침대에서 잠을 잡니다. 잠자리가 편안해 지면서 스피릿도 비례하여 다운된 것 같습니다. 제가 돌이켜보건대 고난 가운데 있을 때 영적인 소원도 더 강했던 것 같습니다. 우리에게는 휴식도 필요하고 쉼도 필요하지만 영적인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고난도 필요합니다.
제자 중에 또 하나가 예수님께 나아와 먼저 가서 자기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해 달라고 했습니다(21). 그는 이미 제자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제자로서 자신을 온전히 희생하는 것에 대해서 망설이고 있었습니다. 그는 제자가 걷는 길이 어떻다는 것을 이해했기 때문에 망설이게 되었을 것입니다. 특히 그는 아직 가정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가족으로서의 의무를 다한 후에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사람이 죽으면 그날 장사를 지냈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부친은 아직 죽지 않았습니다. 그는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후에 예수님을 좇겠다는 것입니다. 그가 장자였다면 자기에게 돌아올 유산에 대한 권리를 확실히 한 다음에 예수님을 좇고자 한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좇기 위해서 가정 일을 미루어 놓음으로 아버지의 노여움을 사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부모의 장래를 지내는 것은 자식으로서 엄숙한 의무였습니다. 부모를 장사지내는 데 대해서 아무런 관심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불효이고 무엄한 일이고 죄받을 일이고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무엇이라고 하십니까? 22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가라사대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 하시니라.”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하나님 나라는 생명과 죽음의 문제만큼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어떤 나라에 속했는가를 잘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어느 나라에 충성을 다하는가? 생명이 없는 옛 시대에 충성을 다하는가 아니면 하나님 나라에 충성을 다하는가? 우리가 영생을 누리고자 하면서도 이 세상에서의 삶도 즐기고자 한다면 이는 마치 한 발은 해변에 한 발은 배에 있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헌신이 완전히 무조건적이 되어야 함을 깊이 생각하라고 촉구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먼저’라는 그의 말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먼저’가 되어야 하고 다른 모든 인간적인 충성들은 그 다음이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이는 무정한 것이 아니라 그 사람에게 자신의 최우선적인 충성을 점검하라고 요청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고 하셨습니다(22). 예수님은 전적으로 자기에게 충성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리고 가족에게 충실하는 것도 예수님께 대한 순종의 요구보다 앞서서는 안됩니다. 예수님의 제자된 자는 예수님을 좇는데 최우선 순위를 두어야 합니다.
둘째, 광풍을 잠잠케 하신 예수님(23-27)
예수님과 제자들이 배에 올랐습니다. 그들은 휴양회를 떠나는 들뜬 기분에 휘파람을 불고 마음이 가벼워졌습니다. 저녁 노을을 따라서 붉은 길이 물 위에 생겼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 하는 삶의 풍요함과 은혜를 마음껏 느낄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시원한 바닷 바람을 맞으시면서 어느새 깊은 잠에 빠지셨습니다. 제자들의 마음에도 깊은 평안이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의 인생 항해에서 어떤 예기치 않는 일이 일어났습니까? 24절을 보십시오. “바다에 큰 놀이 일어나 물결이 배에 덮이게 되었으되 예수는 주무시는지라.” 바다가 지진이 일어나는 것처럼 흔들렸고 배는 물결로 뒤덮이게 되었습니다. 참으로 무시무시한 장면이었습니다. 우리 인생에도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나아가는데도 환란이 생깁니다. 요나가 불순종했을 때 폭풍우가 쳐서 바다에 빠져 죽게 된 경우도 있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나아갔고 주님께서 함께 하시는데도 불구하고 우리의 삶에 환난이 생길 수 있습니다. 말씀대로 순종하여 살고자 하는데 갑작스럽게 폭풍우에 부딪치게 되면 우리는 당황하게 됩니다. 그러나 인생은 수학과 같이 딱 맞아떨어지지 않습니다. 훌륭한 믿음을 가진 목자님들에게도 이런 환란이 닥칩니다. 가정을 책임지고 있는 가장이 급작한 실직을 당하게 되면 앞이 캄캄해지게 됩니다. 새벽 일찍 직장을 다니던 분이 의미없이 거리를 걷다 보면 우울함과 슬픔이 몰려온다고 합니다. 어떤 선교사님은 열심히 일하다가 피곤을 느껴 검사를 해보니 간 경화로 판명이 났습니다. 이제 삶을 정리해야 한다고 생각할 때 그 두려움이란 어떠하겠습니까? 우리나라는 한 해 교통 사고로 1만명이 죽고, 30만명이 불구자가 된다고 합니다. 누가 교통사고가 날 줄 알고 당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이런 경우를 당하게 되면 하나님께서도 해결하실 수 없는 문제가 있다고 느낄 정도가 됩니다.
그런데 이런 긴박한 상황에서 예수님은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극도로 피곤하셨습니다. 소음과 격렬한 배의 흔들림, 그리고 차가운 물의 흩뿌림도 예수님을 깨우지 못했다는 것은 지상 사역 동안 예수님께서 육체적으로 얼마나 소진하셨는지를 어렴풋이 엿보게 합니다. 그런데 다른 때도 아니고 제자들이 절실히 주님의 도움을 필요로 할 때 주무시고 계신 것을 보면 야속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때로 우리의 자원이 바닥이 났는데도 예수님은 아직 시작도 하지 않으십니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 외에는 아무도 어떤 일도 할 수 없는데 말입니다. 그러나 인생의 폭풍우 속에서 예수님은 지금도 여전히 주인이십니다. 상황이 아무리 나쁘더라도 하나님께서 다스리고 계십니다. 절망스러운 상태는 하나님의 보호하시는 능력을 신뢰해야 할 명백한 경우가 됩니다. 우리는 용기를 교실에서는 배울 수 없고, 파괴된 세상에 나가 살 때에만 배울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칭찬하시는 믿음은 위기와 고투에 의해 판가름 납니다. 우리가 이때를 위해서 믿음을 배웠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주무실지라도 우리가 직면한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으십니다.
그러면 이때 제자들은 어떻게 했습니까? 25절을 보십시오. “그 제자들이 나아와 깨우며 가로되 주여 구원하소서 우리가 죽겠나이다.” 제자들은 주님께 간절히 부르짖어 도움을 구하였습니다. 이것은 제자들의 기도입니다. 환란을 당하여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제자들과 같이 부르짖어 믿음의 기도를 드리는 것입니다. 사실 제자들 중에는 베테랑 어부들이 몇 명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힘은 폭풍우 앞에서 한계를 드러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자기 힘으로 어찌해 볼 도리가 없을 때 하나님께 나아가 부르짖어 기도해야 합니다. 근심하고 염려하는 대신에 믿음의 기도를 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깨우는 소리를 듣고 눈을 뜨셨습니다. 그리고 태연히 말씀하셨습니다.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하시고 곧 일어나사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신대 아주 잔잔하게 되었습니다.(27a)” 예수님은 제자들이 극한 상황에서도 믿음을 잃지 않기를 바라셨습니다. 믿음으로 두려움을 극복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죤 웨슬레가 미국에서 영국으로 돌아올 때 폭풍우를 만났습니다. 그는 두려움에 부들부들 떨고 있는데 모리비안들이 평화롭게 찬송하며 기도하는 모습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 후에 죤 웨슬레는 거듭남을 체험하고 위대한 복음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믿음을 강화하기 위해서 이런 시련을 허용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믿음이 적은 것을 책망하셨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주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믿음의 사람들이 되도록 부지런히 말씀을 가르치시고 믿음의 훈련을 시키셨습니다. 제자들은 여러 번 실수했지만 이를 성장의 기회로 삼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믿음을 통로로 쓰셔서 우리 가운데 강하게 역사하십니다. 그리고 그 영광을 드러내십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풍랑 가운데서 주님께 대한 믿음을 갖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믿음 없음을 지적하시고 일어나사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셨습니다. 그러자 바람과 바다가 아주 잔잔하게 되었습니다. 바다에서 무서운 폭풍를 만났고 물벽이 배를 동요시키는 것을 본 사람이라면 바다가 갑자기 잠잠하게 된 것은 정말 믿을 수 없는 장면이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자연 법칙을 거스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일은 인간의 이성으로 기대할 수 없었던 일입니다. 그들은 순간이나마 바다가 그렇게 잔잔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말씀만으로 바다를 잔잔하게 하셨습니다. 태풍을 잔잔하게 하신 기적은 그들이 이제까지 경험했던 것과는 차원이 다른 새로운 경험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이 장면을 보고 기이히 여겼습니다. “이 어떠한 사람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고(27)” 이를 통해서 예수님은 메시야이시고 천지 만물을 그 뜻대로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시는 분이심이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피곤하여 주무셔야 하는 인간이시며, 동시에 전능한 능력을 지니신 하나님이십니다. 이 주님이 우리와 일생토록 함께 있다는 것은 얼마나 멋진 일입니까!
우리는 예기치 못한 어려움에 직면하게 되면 쉽게 낙망하거나 부정적이 되거나 절망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이런 문제들 속에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어려움 중에도 하나님께서 친히 역사를 주관하신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찾아야 합니다. 그때 우리는 하나님의 역사를 섬길 수 있습니다.
셋째, 귀신을 쫓아내신 예수님(28-34)
예수님께서 건너편 가다라 지방에 이르렀을 때였습니다. 귀신들린 자 둘이 무덤 사이에서 나와 예수님 일행을 만났는데 그들이 야수와 같이 심히 사나와 아무도 그 길로 지나갈 수 없을 만하였습니다. 마가복음에는 이 사람이 전에는 돌로 자기 몸을 상하고 사슬로 묶인 것을 풀고 소리를 지르며 다녔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마태는 귀신들린 사람에게 관심을 보이기보다는 귀신의 세력을 멸하는 능력을 가진 예수님께 관심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귀신들린 사람이 얼마나 난폭한지 아무도 그 길로 지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한 마디 말씀으로 귀신을 쫓아내셨습니다. 이는 초자연적인 영역에 대한 예수님의 능력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사람들이 왜 귀신이 들리는지 그 이유를 알기는 어렵습니다. 그런데 대개 자기정체성이 부족한 사람에게 쉽게 들어온다고 합니다. 마음이 약하고 죄의식이 강한 사람에게도 잘 들어옵니다. 특히 정욕에 사로잡힌 경우나 상처로 인해서 귀신들리는 경우도 많습니다. 또한 악령의 분위기에 친숙한 경우에도 그렇습니다. 우리 시대는 귀신 문화가 확산되어 가고 있습니다. 그림도 정신분열증적인 것이 많고 죄악된 문화들이 수없이 양산되고 있습니다. 마당 앞에 있는 ‘붉은 귀 청거북’ 세 마리와 같이 철갑으로 자기 주위를 꼭꼭 감싸고 머리만 내밀고 사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은 자기 세계 속에 갇혀서 관계성을 맺지 못합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과 관계성을 맺어 조화롭게 살지 못하고 닥치는 대로 잡아먹는 파괴적인 동물입니다.
귀신들린 자들이 소리를 질렀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여 우리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때가 이르기 전에 우리를 괴롭게 하려고 여기 오셨나이까(29)?” 그들은 자기들이 멸망할 때를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심판하실 때가 되면 “사람들을 미혹하는 마귀가 불과 유황 못에 던지우니 거기는 그 짐승과 거짓 선지자도 있어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게 될 것입니다.(계 20:10)” 사람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는데 귀신들은 귀신같이 알아보았습니다. 귀신들린 사람들은 예수님과 인격적인 관계성을 맺기를 싫어합니다. 귀신은 대적하고 반역하는 세력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사람의 생명을 살리고 풍성케 하려고 오신 것에 반하여 귀신은 죽이고 멸망시키는 목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예수님과 함께 할 수 없습니다.
마침 멀리서 많은 돼지 떼가 꿀꿀거리며 즐겁게 먹고 있었습니다. 귀신들은 예수님께 간구하였습니다. “만일 우리를 쫓아내실진대 돼지 떼에 들여 보내소서(31).” 귀신들은 살아있는 존재를 사로잡기를 원했습니다. 귀신들은 부정한 육체에 거하기를 좋아합니다. 귀신들이 살아있는 생명체에 들어가기를 원하는 것은 괴롭힐 육체가 없이 지내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고 최종적인 멸망을 지연시키려고 노력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들의 파괴적인 의도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귀신을 그냥 쫓아버리거나 멸하시지 않고 가라고 허락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귀신들을 멸할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기 때문이요 귀신들의 파괴적인 능력과 의도를 사람들에게 보여주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최후의 심판이 이르기 전까지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모든 악을 그치게 하지 않으십니다.
귀신들은 예수님께서 가라하시는 말씀에 나와서 돼지에게로 들어갔습니다. 그러자 맛있게 꿀꿀이 죽을 먹고 있던 돼지들이 트위스트를 치더니 온 떼가 비탈로 내리달아 바다에 들어가 몰사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귀신들에게 들어가라고 하지 않고 가라고 하셨습니다. 그들이 요청한 일을 하라고 허락하셨습니다. 이를 통해서 귀신들에 대한 예수님의 능력과 권세를 입증하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한 사람의 생명을 구원하기 위해서 돼지떼를 희생하셨습니다. 또한 물질주의에 만연한 그 시대 사람들에게 생명이 물질보다 더 귀중함을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자신의 생명을 온전히 희생하셨습니다. 희생이 없이는 생명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돼지를 치던 자들이 달아나 시내에 들어가 이 모든 일과 귀신들린 자의 일을 고했습니다.그러자 온 시내가 예수님을 만나려고 나가서 보고 그 지방에서 떠나시기를 간구하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권세와 능력을 알고 그를 영접하고 경배해야 마땅했지만 두려움 때문에 자기들을 떠나달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그들의 엄청난 실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다시 그곳에 돌아오셨다는 기록이 성경에 전혀 없습니다. 그들은 경제적인 손실을 두려워하여 생명을 얻는 일을 포기한 것입니다. 오늘날도 돈을 사랑함으로 인해서 신앙 생활을 포기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런 지성인들이 예수님을 통해서 물신의 세력으로부터 자유함을 얻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이상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로서 살려면 대가를 지불해야 함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우리가 환란 과 광풍 중에서도 믿음을 유지하기를 원하심을 배웁니다. 우리는 사나운 귀신을 만날 때에 악한 세력을 몰아낼 수 있는 영력과 믿음이 있어야 함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군사로서 영적인 싸움을 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말씀의 능력과 믿음의 능력을 주셔서 이 싸움에서 승리하도록 우리와 함께 하심을 찬양합니다.
첨부파일
-
data/message1/03mt12.hwp (0byte)
85회 다운로드 | DATE : 2003-05-25 10:19:28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