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마태복음 11강(마 8:1-17) / 우리의 연약함을 담당하신 예수님
페이지 정보

본문
2003년 마태복음 제 11 강
우리의 연약함을 담당하신 예수님
말씀 / 마태복음 8:1-17 요절 / 마태복음 8:17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에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을 마치시고 산에서 내려오시자 많은 병자와 귀신들린 자들이 예수님께 나왔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을 일일이 사랑으로 영접하시고 병을 고쳐 주시며 귀신을 쭃아내 주셨습니다. 이를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제자 마태는 이사야 말씀을 인용하여 예수님은 우리의 연약한 것을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신 분이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우리 연약함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심으로 우리에게 나음을 주십니다. 이 시간 이 예수님을 통하여 연약한 우리가 영 육간 강건해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1-4)
1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을 마치시고 산에서 내려오시자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길모퉁이에서 얼굴과 손발을 붕대로 감은 흉찍한 모습을 한 문둥병자가 나타나 예수님 앞에 엎드려 절하였습니다. 사람들은 마치 사스 환자나 나타난 양 기겁하며 뒤로 물러났습니다. 이 문둥병자는 엎드려 예수님께 간구하였습니다.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게 하실 수 있나이다.” 문둥병자가 예수님께 병을 고쳐 달라고 하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닙니까? 그러나 당시 문둥병에 대한 율법의 규정과 사람들의 인식을 생각할 때 이 문둥병자의 행동은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문둥병은 학술적으로는 나병, 영어로는 Leprosy, 사회적으로는 한센병이라고 불리는 만성 전염성 질환입니다. 나균이라 불리는 균이 피부나 말초신경, 연골 등에 침입하여 신경을 파괴하고 조직을 파괴합니다. 그래서 피부의 지각이 없어지고 시신경의 파괴로 시력을 잃게 되는 경우도 있고, 연골조직의 파괴로 손가락 발가락이 떨어져 나가기도 합니다. 특히 얼굴의 피부와 연골의 파괴로 아름답던 얼굴이 사자 얼굴과 같이 흉하게 변하므로 문둥병자를 Leper(Lion's Face)라 부르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건강하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살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눈썹이 다 빠지고 코가 문드러져 떨어져 나가 코 있던 자리에 구멍 2개만 덩그러니 나 있는 해골 같은 자신의 얼굴을 볼 때 얼마나 고통스러웠겠습니까? 이병은 전염성이 강한 불치병이기 때문에 환자들은 초기에 진 밖으로 격리되어 살아야 했습니다.
이런 육체적, 정신적 고통보다도 더 견디기 어려웠던 것은 고독과 죄의식이었습니다. 율법에서는 문둥병을 부정한 병으로 규정하여 공동체에서 쫓아내 한적한 곳에 격리 수용하도록 했습니다. 그들은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들과도 떨어져 일생을 어두컴컴한 곳에서 살다 아무도 임종을 지켜봐 주지 않는 채로 죽어야 했습니다. 더욱이 죄로 인해서 하나님께 이런 형벌을 받았다는 죄의식과 심판에 대한 두려움, 사회의 냉대에 대한 분노 등으로 죽은 자와 방불한 나날을 보내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그에게 놀라운 소식이 들렸습니다. 예수라는 사람이 어떤 몹쓸 병에 걸린 사람도 고쳐주고, 어떤 죄인도 용납해 주신다는 믿기 지 않는 소식이었습니다. 그는 이 소식을 듣고 새로운 삶의 희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예수님께 나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사람들 앞에 자신의 괴물 같은 모습을 보여야 했습니다. 혹 사람들에게 돌에 맞아 죽을지도 모를 일이었습니다. 또 예수님이 자신을 영접하고 병을 고쳐 줄지도 확실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오직 믿음으로 모든 불신을 극복하고 예수님께 나왔습니다. 그는 예수님께 간구하였습니다.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 그는 예수님께서 자신을 영접하시고 자신의 문둥병을 깨끗케 하실 수 있는 사랑과 능력의 주님이심을 굳게 믿었습니다. 무엇보다도 그는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깨끗하고 건강한 삶을 살기를 바라신다고 믿었습니다. 그리할 때 그는 많은 장애와 불신을 극복하고 예수님께 나올 수 있었습니다. 우리들도 영적으로 문둥병자와 같이 더럽고 추한 죄를 가지고 예수님께 나가는 것이 어렵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 있는 모습 그대로 나와야만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예수님께 나아와 일방적으로 고쳐달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겸손하게 주님의 은혜와 긍휼을 구했습니다. 그는 주님의 주권에 자신을 맡겼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를 어떻게 도와주셨을까요? 3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저에게 대시며 가라사대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신대 즉시 그의 문둥병이 깨끗하여진지라” 예수님은 그의 상처에 손을 대시고 어루만져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말씀만으로도 문둥병자를 깨끗케 하실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그에게 손을 대시고 어루만지신 것은 그를 향한 예수님의 지극한 사랑의 표현이었습니다. 지금까지 그에게 손을 대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그가 가까이 오는 것조차 부담스러워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손을 대시고 어루만지시므로 그의 모든 내면의 고독과 상처를 일시에 치료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동역자나 양이 아플 때 그냥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으라고 말만해서는 안되겠습니다. 먼저 머리에 손을 얹어 열이 있는가 보고 함께 병원에 가서 진찰을 받아 치료를 받도록 도와주어야 하겠습니다.
메시지를 준비하는 이번 주 동역자가 갑자기 뱃속에서 발작을 일으켜 심하게 토하고 드러눕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동역자를 대신하여 아이들을 어린이집에 대려다 주고 오고 식사를 준비하여 먹이고 잠자리를 봐주었습니다. 그러나 약이든 음식이든 먹으면 다 되넘기기 때문에 정작 동역자에게는 손을 따준 것 외에는 별달리 해준 게 없었습니다. 저는 말씀을 묵상하던 중 손을 대시며 문둥병자에게 지극한 사랑을 표현하는 주님을 보고 회개가 되었습니다. 저는 좀 늦었지만 동역자의 머리와 배에 손을 대고 본문의 예수님의 말씀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고 외쳤습니다. 동역자는 곧 일어나 미음을 먹고 다름 날은 밥을 먹기까지 회복되게 되었습니다. 제가 예수님과 같이 섬세하고 진실한 사랑으로 섬기는 목자로 성장하기를 기도합니다.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예수님께서는 진정 문둥병자가 문둥병으로부터 깨끗한 사람이 되기를 바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가 믿음으로 나왔을 때 기꺼이 그의 소원을 들어주시기를 원하셨습니다. 그의 육신의 병뿐 아니라 마음과 영혼의 병까지도 깨끗케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가 본래 하나님의 형상대로 회복되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인생을 살게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영 육간 건강하고 깨끗한 삶을 살길 원하십니다. 그리고 기꺼이 우리를 영접하시고 우리의 모든 병을 깨끗케 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아무리 부끄러운 죄든 추한 상처든 가지고 예수님의 사랑과 능력을 믿고 예수님께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저희들을 영 육간 건강하고 깨끗하게 하셔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사람들로 축복해 주시길 기도합니다. 예수님은 그의 문둥병을 고쳐 주시고 제사장에게 가서 병이 나은 것을 보이고 예물을 드려 증거 하라고 하였습니다.
2. 네 믿은대로 될찌어다(5-13)
예수님께서 문둥병자를 깨끗케 하신 후 가버나움에 들어가셨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로마 군인 백부장이 예수님께 나와 간구하였습니다. “주여 내 하인이 중풍병으로 집에 누워 몹시 괴로워하나이다.” 이 백부장은 가버나움에 주둔한 로마 군대의 지휘관이었습니다. 로마 군대에 있어서 백부장은 로마 군인의 꽃으로 불릴 만큼 오직 전투를 위해서만 존재하는 군인정신이 투철한 사람이었습니다. 특히 유대와 같은 식민지에 치안 유지 군으로 파견된 로마군을 지휘하는 백부장은 백성들의 폭동에 대비하여 더 무자비하고 냉정하였습니다. 그러나 본문에 나오는 백부장은 달랐습니다. 그에게는 자비와 사랑이 있었습니다. 당시에 하인이나 종은 재산의 일부일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종이 병들어 쓸모가 없게 되면 죽이거나 버려도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 백부장은 중풍병으로 고통받고 있는 하인을 불쌍히 여겼습니다. 그는 하인을 집안의 도구가 아닌 식구와 같이 여겼습니다. 그는 하인이 중풍병으로 고통하고 있을 때 함께 마음 아파하였습니다. 그는 진정 이웃의 기쁨을 함께 기뻐하고 이웃의 슬픔을 함께 슬퍼하는 인간애가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하인을 위해서 로마 군대의 백부장이라는 체면과 권위를 버리고 예수님께 도움을 청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백부장의 종을 향한 순수한 사랑에 감동 받으시고 “내가 가서 고쳐주리라” 하시며 그를 따라나셨습니다. 그런데 이때 백부장은 예수님께 아주 기이한 말을 하였습니다. 8절을 보십시오. “백부장이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삽나이다.” 백부장은 예수님이 자신의 집에 들어오는 것을 감당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그가 예수님을 인간적인 눈으로 보지 않고 영적으로 오성장군보다도 권세가 있고 로마 황제보다도 높으신 분으로 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천지를 창조하신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보았습니다. 그가 이 예수님을 알게 되었을 때 자신이 얼마나 초라하고 비천한 존재인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는 예수님 앞에 지극히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무엇보다도 기이한 것은 백부장에게는 예수님의 말씀의 권세를 믿는 믿음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직접 오시지 않고 말씀만 하셔도 하인의 병이 낫게 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삽나이다.” 그는 예수님의 말씀에는 절대적인 권세가 있어 병마도 그 말씀을 듣고 벌벌 떨며 순종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는 참으로 놀라운 믿음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절대적인 믿음이 있는 사람은 말씀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 갈 바를 알지 못하였지만,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고 말씀에 순종하여 나아갔습니다. 또한 그는 독자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들었을 때 밤새 고민하였으나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으로 말씀에 순종하였습니다. 이때 아브라함은 복의 근원이 되었고 그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말씀을 절대적으로 믿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방인인 백부장이 어떻게 이런 말씀의 권세를 믿는 훌륭한 믿음을 가질 수 있었을까요? 9절에서 백부장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그는 군대 생활을 하면서 명령의 본질을 깊이 깨달았습니다. 군대에서 상관의 명령은 절대적입니다. 상관이 가라 하면 가고, 오라 하면 와야 합니다. 백부장은 로마 군대의 장교로서 훈련을 통해 자존심과 반발심을 꺽고 상관에게 절대적으로 복종하는 것을 배웠습니다. 이때 그는 자기도 부하에게 어떻게 명령하는가를 배울 수 있었습니다. 그는 이를 통해서 명령의 권세를 체험하였고 상관의 명령은 그대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그는 이 명령의 본질을 기초로 예수님의 말씀도 그대로 적용될 것을 믿었습니다. 그 믿음은 단순하고 절대적이었습니다. 그는 명령에 살고 명령에 죽는 훌륭한 군인이었기에 영적으로 훌륭한 믿음의 사람이 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백부장의 말씀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은 명령에 절대적으로 복종하는 것을 통해서 갖게 되었다는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온전한 믿음은 말씀을 절대적으로 믿는 것입니다. 말씀에 대한 믿음은 말씀에 절대적인 순종을 통해서 얻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온전한 믿음에 이르기 위하여 말씀을 절대적으로 믿고 순종하는 사람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우리는 언제부턴가 하나님의 말씀을 오늘날 그대로 적용하며 순종하기는 무리가 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생기기 시작하였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순종하기보다 말씀을 합리적으로 적용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할 때 점점 우리는 말씀에 대한 믿음을 잃어가고 있었습니다. 말씀을 절대적으로 믿고 순종하여 믿음의 승리를 체험하였던 것이 마치 전설 속의 이야기처럼 되어 버렸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 지금도 말씀을 있는 그대로 영접하고 순종하므로 전설을 만들어 가는 분들이 있습니다. 독일의 김 예레미야 선교사님은 미국 국제 수양회에 참석하려 하였으나 미국 대사관에서 비자를 주지 않았습니다. 선교사님은 포기치 않고 다시 비자를 신청하였으나 역시 거절당했습니다. 선교사님은 낙망치 않고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지우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룰 줄 믿고 마음에 의심치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는 마가복음 11장 23절 말씀을 굳게 붙들고 미국 대사관 앞에서 산을 들어 바다에 던지는 시늉을 계속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선교사님의 믿음을 축복하사 미국 비자를 허락하셨습니다. 미국 영사가 선교사님이 산을 던지는 시늉을 대사관에 폭탄을 던지는 모습으로 보고 겁을 먹고 얼른 비자를 주었다고 합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당신의 말씀을 그대로 믿고 절대적으로 순종하는 자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합리적으로 생각하기 보다 절대적인 자세로 순종하고 삶에 적용하므로 말씀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을 회복하고 능력있게 캠퍼스 지성인들을 믿어 순종케 하는 역사에 귀하게 쓰임 받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백부장의 믿음을 매우 기뻐하시고 크게 칭찬해 주셨습니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기이히 여겨 좇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예수님은 이 한사람 이방인 백부장의 믿음을 통하여 장차 이방인들 가운데 일어날 놀라운 믿음의 역사를 보셨습니다. 이방인이라도 믿음이 있으면 천국에 앉게 되는 특권을 누리게 될 것이요, 이스라엘 백성이라도 믿음이 없으면 바깥 어두운데 쫓겨나 이를 갈며 슬피 울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세계는 믿음의 사람의 것이요, 하나님은 온전한 믿음의 사람을 귀하게 써주십니다.
예수님은 백부장의 말씀을 믿는 믿음을 축복해 주셨습니다. “네 믿은 대로 될찌어다” 그러자 그 시로 하인의 병이 낫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우리의 믿음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배우게 됩니다. 예수님은 백부장의 믿음을 통해서 하인의 병을 낫게 역사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무엇이든지 하실 수 있는 무한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 분이시지만 믿음의 사람을 통해 그 능력을 행사하십니다. 또 우리의 믿음을 보시고 믿은 대로 역사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백부장과 같이 사랑의 사람이요, 믿음의 종이 되어 병든 캠퍼스 양들을 구원하는 데 귀하게 쓰임 받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3. 우리의 연약함을 담당해 주시는 예수님(14-17)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집에 들어가셔서 그의 장모가 열병으로 앓아누운 것을 보셨습니다. 아마도 늙으신 분이 과로를 하신 모양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따랐지만 장모의 일로 마음 한편이 무거웠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장모의 손을 꼭 잡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장모를 사랑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사위를 하나님의 역사에 동역자로 드린 장모의 희생과 수고를 감사하였고, 손을 꼭 잡아주시므로 위로해 주셨습니다. 그러자 장모는 곧 나아 예수님의 수종을 들어주었습니다.
날이 저물자 사람들이 귀신들린 자를 많이 예수님께 데려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말씀으로 귀신들을 쫓아내시고, 병든 자를 다 고쳐주셨습니다. 이를 지켜보던 저자 마태는 이사야 선지자의 글이 생각났습니다. 17절을 보십시오.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에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 일찍이 이사야 선지자는 인간의 모든 연약함과 병을 담당하실 그리스도를 예언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이 귀신들리고 병든 것은 연약하기 때문임을 아셨습니다. 육신이 연약하여 육신의 병이 생깁니다. 마음이 연약하여 의존적이 되고, 다른 사람의 말에 쉽게 상처를 입게 됩니다. 영혼이 연약하여 사단의 유혹에 잘 넘어가고 세상의 죄에 쉽게 빠집니다. 우리가 어떻게 이런 연약함에서 구원을 받아 강하고 담대한 그리스도의 군사가 될 수 있을까요? 베드로는 큰 소리는 잘 쳤지만 그 내면은 연약하여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해야 할 때 잠자기에 바빴습니다. 그는 연약함 때문에 계집종 앞에서 사랑하는 스승을 세 번이나 부인하는 부끄러운 일을 행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의 연약함을 아시고 그에게 다시 찾아 오셔서 조반을 손수 지어 먹이시고 사랑의 대화를 하시며 연약함을 담당해 주셨습니다. 다윗은 돌맹이 5개로 거인 골리앗을 때려눕힌 강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왕이 된 후 연약함으로 탐심을 다스리지 못하고 왕의 권세로 충신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와 간음을 하고 이를 은폐하기 위해 우리아를 살해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윗의 연약함을 담당해 주셨습니다. 다윗이 자신의 죄를 깨닫고 침상이 다 젖도록 눈물로 회개하였을 때 하나님은 밧세바를 통해 솔로몬을 나게 하시고 다윗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의 왕이 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태어난 솔로몬의 이름을 ‘여호와께 사랑함을 입다’는 뜻의 여디디아라 하심으로 다윗과 솔로몬의 왕국이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에 기초한 것임을 드러내셨습니다.
사람은 강한 것 같지만 실상 연약한 존재입니다. 우리는 순결한 인생을 살기 원하지만 연약하여 원치 않게 유혹에 넘어가 죄를 짓고 후회한 적이 얼마나 많습니다. 요즘에는 심한 스트레스로 인해 또는 아무 이유도 없이 슬프거나 울적함이 도를 지나쳐, 생활을 할 수 없을 정도로 무기력해지거나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며, 생각이 비관적으로 되는 우울증에 고통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특히 요즘 젊은 대학생들 중에는 다른 사람과 관계성을 잘 못 맺고, 힘들거나 부담스러운 일은 아예 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분은 만성이 된 피부병으로 남모르는 고통을 하고 계신분도 있습니다. 우리 인간은 근본적으로 연약한 존재입니다. 그런데 이 인간의 연약함은 죄에서 오는 것입니다. 죄를 짓기 전의 인간은 세상을 정복하고 다스리는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죄를 범한 후 인간은 얼굴에 땀을 흘리며 겨우 먹고살기 위해 일생을 수고해야 하는 존재로 전락하였습니다. 하나님 없이, 사명이 없이 단순히 먹고살기 위해 땀을 흘러야 할 때 사람들은 연약해 질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인간을 불쌍히 여기사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 독생자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사 우리 연약함을 담당해 주셨습니다. 세상에서는 연약하고 부족한 자를 무시하고 업신여깁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 연약함을 무시하지 많으시고 이해하시며 섬겨주셨습니다. 마침내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우리의 죄와 연약함을 친히 담당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있는 모습 그대로 예수님께 나아갈 때 예수님은 우리를 있는 모습 그대로 영접하시고 우리의 연약함을 담당해 주십니다. 예수님께 나의 연약함을 내려놓을 때 병든 내면이 나음을 받아, 강하고 담대한 믿음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서 점점 더 강한 자로 빚어지게 됩니다.(딤후 2:1) 우리가 있는 모습 그대로 주님께 믿음으로 나아가 죄 사함을 받고 연약함을 치료받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담당해 주시는 예수님의 은혜와 사랑에 감사를 드립니다.
오늘 예수님은 문둥병자의 믿음을 보시고 그의 연약함을 친히 담당해 주셨습니다. 또 백부장의 믿음을 보시고 그 하인의 연약함을 친히 담당해 주셨습니다. 또 베드로의 장모의 연약함을 담당해 주셨고 많은 귀신들린 자들과 병자들의 연약함을 담당해 주셨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친히 담당하시고 우리의 병을 짊어지심으로 우리를 강건케 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이 시간 우리들도 우리의 연약함을 있는 모습 그대로 예수님께 들고 나아가 내려놓음으로 우리 내면의 병을 고침 받고 강건한 하나님의 종이 되어 다스리고 정복하는 삶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담당하신 예수님
말씀 / 마태복음 8:1-17 요절 / 마태복음 8:17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에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을 마치시고 산에서 내려오시자 많은 병자와 귀신들린 자들이 예수님께 나왔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을 일일이 사랑으로 영접하시고 병을 고쳐 주시며 귀신을 쭃아내 주셨습니다. 이를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제자 마태는 이사야 말씀을 인용하여 예수님은 우리의 연약한 것을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신 분이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우리 연약함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심으로 우리에게 나음을 주십니다. 이 시간 이 예수님을 통하여 연약한 우리가 영 육간 강건해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1-4)
1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을 마치시고 산에서 내려오시자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길모퉁이에서 얼굴과 손발을 붕대로 감은 흉찍한 모습을 한 문둥병자가 나타나 예수님 앞에 엎드려 절하였습니다. 사람들은 마치 사스 환자나 나타난 양 기겁하며 뒤로 물러났습니다. 이 문둥병자는 엎드려 예수님께 간구하였습니다.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게 하실 수 있나이다.” 문둥병자가 예수님께 병을 고쳐 달라고 하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닙니까? 그러나 당시 문둥병에 대한 율법의 규정과 사람들의 인식을 생각할 때 이 문둥병자의 행동은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문둥병은 학술적으로는 나병, 영어로는 Leprosy, 사회적으로는 한센병이라고 불리는 만성 전염성 질환입니다. 나균이라 불리는 균이 피부나 말초신경, 연골 등에 침입하여 신경을 파괴하고 조직을 파괴합니다. 그래서 피부의 지각이 없어지고 시신경의 파괴로 시력을 잃게 되는 경우도 있고, 연골조직의 파괴로 손가락 발가락이 떨어져 나가기도 합니다. 특히 얼굴의 피부와 연골의 파괴로 아름답던 얼굴이 사자 얼굴과 같이 흉하게 변하므로 문둥병자를 Leper(Lion's Face)라 부르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건강하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살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눈썹이 다 빠지고 코가 문드러져 떨어져 나가 코 있던 자리에 구멍 2개만 덩그러니 나 있는 해골 같은 자신의 얼굴을 볼 때 얼마나 고통스러웠겠습니까? 이병은 전염성이 강한 불치병이기 때문에 환자들은 초기에 진 밖으로 격리되어 살아야 했습니다.
이런 육체적, 정신적 고통보다도 더 견디기 어려웠던 것은 고독과 죄의식이었습니다. 율법에서는 문둥병을 부정한 병으로 규정하여 공동체에서 쫓아내 한적한 곳에 격리 수용하도록 했습니다. 그들은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들과도 떨어져 일생을 어두컴컴한 곳에서 살다 아무도 임종을 지켜봐 주지 않는 채로 죽어야 했습니다. 더욱이 죄로 인해서 하나님께 이런 형벌을 받았다는 죄의식과 심판에 대한 두려움, 사회의 냉대에 대한 분노 등으로 죽은 자와 방불한 나날을 보내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그에게 놀라운 소식이 들렸습니다. 예수라는 사람이 어떤 몹쓸 병에 걸린 사람도 고쳐주고, 어떤 죄인도 용납해 주신다는 믿기 지 않는 소식이었습니다. 그는 이 소식을 듣고 새로운 삶의 희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예수님께 나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사람들 앞에 자신의 괴물 같은 모습을 보여야 했습니다. 혹 사람들에게 돌에 맞아 죽을지도 모를 일이었습니다. 또 예수님이 자신을 영접하고 병을 고쳐 줄지도 확실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오직 믿음으로 모든 불신을 극복하고 예수님께 나왔습니다. 그는 예수님께 간구하였습니다.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 그는 예수님께서 자신을 영접하시고 자신의 문둥병을 깨끗케 하실 수 있는 사랑과 능력의 주님이심을 굳게 믿었습니다. 무엇보다도 그는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깨끗하고 건강한 삶을 살기를 바라신다고 믿었습니다. 그리할 때 그는 많은 장애와 불신을 극복하고 예수님께 나올 수 있었습니다. 우리들도 영적으로 문둥병자와 같이 더럽고 추한 죄를 가지고 예수님께 나가는 것이 어렵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 있는 모습 그대로 나와야만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예수님께 나아와 일방적으로 고쳐달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겸손하게 주님의 은혜와 긍휼을 구했습니다. 그는 주님의 주권에 자신을 맡겼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를 어떻게 도와주셨을까요? 3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저에게 대시며 가라사대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신대 즉시 그의 문둥병이 깨끗하여진지라” 예수님은 그의 상처에 손을 대시고 어루만져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말씀만으로도 문둥병자를 깨끗케 하실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그에게 손을 대시고 어루만지신 것은 그를 향한 예수님의 지극한 사랑의 표현이었습니다. 지금까지 그에게 손을 대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그가 가까이 오는 것조차 부담스러워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손을 대시고 어루만지시므로 그의 모든 내면의 고독과 상처를 일시에 치료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동역자나 양이 아플 때 그냥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으라고 말만해서는 안되겠습니다. 먼저 머리에 손을 얹어 열이 있는가 보고 함께 병원에 가서 진찰을 받아 치료를 받도록 도와주어야 하겠습니다.
메시지를 준비하는 이번 주 동역자가 갑자기 뱃속에서 발작을 일으켜 심하게 토하고 드러눕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동역자를 대신하여 아이들을 어린이집에 대려다 주고 오고 식사를 준비하여 먹이고 잠자리를 봐주었습니다. 그러나 약이든 음식이든 먹으면 다 되넘기기 때문에 정작 동역자에게는 손을 따준 것 외에는 별달리 해준 게 없었습니다. 저는 말씀을 묵상하던 중 손을 대시며 문둥병자에게 지극한 사랑을 표현하는 주님을 보고 회개가 되었습니다. 저는 좀 늦었지만 동역자의 머리와 배에 손을 대고 본문의 예수님의 말씀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고 외쳤습니다. 동역자는 곧 일어나 미음을 먹고 다름 날은 밥을 먹기까지 회복되게 되었습니다. 제가 예수님과 같이 섬세하고 진실한 사랑으로 섬기는 목자로 성장하기를 기도합니다.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예수님께서는 진정 문둥병자가 문둥병으로부터 깨끗한 사람이 되기를 바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가 믿음으로 나왔을 때 기꺼이 그의 소원을 들어주시기를 원하셨습니다. 그의 육신의 병뿐 아니라 마음과 영혼의 병까지도 깨끗케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가 본래 하나님의 형상대로 회복되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인생을 살게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영 육간 건강하고 깨끗한 삶을 살길 원하십니다. 그리고 기꺼이 우리를 영접하시고 우리의 모든 병을 깨끗케 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아무리 부끄러운 죄든 추한 상처든 가지고 예수님의 사랑과 능력을 믿고 예수님께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저희들을 영 육간 건강하고 깨끗하게 하셔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사람들로 축복해 주시길 기도합니다. 예수님은 그의 문둥병을 고쳐 주시고 제사장에게 가서 병이 나은 것을 보이고 예물을 드려 증거 하라고 하였습니다.
2. 네 믿은대로 될찌어다(5-13)
예수님께서 문둥병자를 깨끗케 하신 후 가버나움에 들어가셨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로마 군인 백부장이 예수님께 나와 간구하였습니다. “주여 내 하인이 중풍병으로 집에 누워 몹시 괴로워하나이다.” 이 백부장은 가버나움에 주둔한 로마 군대의 지휘관이었습니다. 로마 군대에 있어서 백부장은 로마 군인의 꽃으로 불릴 만큼 오직 전투를 위해서만 존재하는 군인정신이 투철한 사람이었습니다. 특히 유대와 같은 식민지에 치안 유지 군으로 파견된 로마군을 지휘하는 백부장은 백성들의 폭동에 대비하여 더 무자비하고 냉정하였습니다. 그러나 본문에 나오는 백부장은 달랐습니다. 그에게는 자비와 사랑이 있었습니다. 당시에 하인이나 종은 재산의 일부일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종이 병들어 쓸모가 없게 되면 죽이거나 버려도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 백부장은 중풍병으로 고통받고 있는 하인을 불쌍히 여겼습니다. 그는 하인을 집안의 도구가 아닌 식구와 같이 여겼습니다. 그는 하인이 중풍병으로 고통하고 있을 때 함께 마음 아파하였습니다. 그는 진정 이웃의 기쁨을 함께 기뻐하고 이웃의 슬픔을 함께 슬퍼하는 인간애가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하인을 위해서 로마 군대의 백부장이라는 체면과 권위를 버리고 예수님께 도움을 청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백부장의 종을 향한 순수한 사랑에 감동 받으시고 “내가 가서 고쳐주리라” 하시며 그를 따라나셨습니다. 그런데 이때 백부장은 예수님께 아주 기이한 말을 하였습니다. 8절을 보십시오. “백부장이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삽나이다.” 백부장은 예수님이 자신의 집에 들어오는 것을 감당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그가 예수님을 인간적인 눈으로 보지 않고 영적으로 오성장군보다도 권세가 있고 로마 황제보다도 높으신 분으로 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천지를 창조하신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보았습니다. 그가 이 예수님을 알게 되었을 때 자신이 얼마나 초라하고 비천한 존재인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는 예수님 앞에 지극히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무엇보다도 기이한 것은 백부장에게는 예수님의 말씀의 권세를 믿는 믿음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직접 오시지 않고 말씀만 하셔도 하인의 병이 낫게 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삽나이다.” 그는 예수님의 말씀에는 절대적인 권세가 있어 병마도 그 말씀을 듣고 벌벌 떨며 순종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는 참으로 놀라운 믿음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절대적인 믿음이 있는 사람은 말씀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 갈 바를 알지 못하였지만,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고 말씀에 순종하여 나아갔습니다. 또한 그는 독자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들었을 때 밤새 고민하였으나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으로 말씀에 순종하였습니다. 이때 아브라함은 복의 근원이 되었고 그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말씀을 절대적으로 믿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방인인 백부장이 어떻게 이런 말씀의 권세를 믿는 훌륭한 믿음을 가질 수 있었을까요? 9절에서 백부장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그는 군대 생활을 하면서 명령의 본질을 깊이 깨달았습니다. 군대에서 상관의 명령은 절대적입니다. 상관이 가라 하면 가고, 오라 하면 와야 합니다. 백부장은 로마 군대의 장교로서 훈련을 통해 자존심과 반발심을 꺽고 상관에게 절대적으로 복종하는 것을 배웠습니다. 이때 그는 자기도 부하에게 어떻게 명령하는가를 배울 수 있었습니다. 그는 이를 통해서 명령의 권세를 체험하였고 상관의 명령은 그대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그는 이 명령의 본질을 기초로 예수님의 말씀도 그대로 적용될 것을 믿었습니다. 그 믿음은 단순하고 절대적이었습니다. 그는 명령에 살고 명령에 죽는 훌륭한 군인이었기에 영적으로 훌륭한 믿음의 사람이 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백부장의 말씀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은 명령에 절대적으로 복종하는 것을 통해서 갖게 되었다는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온전한 믿음은 말씀을 절대적으로 믿는 것입니다. 말씀에 대한 믿음은 말씀에 절대적인 순종을 통해서 얻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온전한 믿음에 이르기 위하여 말씀을 절대적으로 믿고 순종하는 사람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우리는 언제부턴가 하나님의 말씀을 오늘날 그대로 적용하며 순종하기는 무리가 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생기기 시작하였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순종하기보다 말씀을 합리적으로 적용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할 때 점점 우리는 말씀에 대한 믿음을 잃어가고 있었습니다. 말씀을 절대적으로 믿고 순종하여 믿음의 승리를 체험하였던 것이 마치 전설 속의 이야기처럼 되어 버렸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 지금도 말씀을 있는 그대로 영접하고 순종하므로 전설을 만들어 가는 분들이 있습니다. 독일의 김 예레미야 선교사님은 미국 국제 수양회에 참석하려 하였으나 미국 대사관에서 비자를 주지 않았습니다. 선교사님은 포기치 않고 다시 비자를 신청하였으나 역시 거절당했습니다. 선교사님은 낙망치 않고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지우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룰 줄 믿고 마음에 의심치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는 마가복음 11장 23절 말씀을 굳게 붙들고 미국 대사관 앞에서 산을 들어 바다에 던지는 시늉을 계속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선교사님의 믿음을 축복하사 미국 비자를 허락하셨습니다. 미국 영사가 선교사님이 산을 던지는 시늉을 대사관에 폭탄을 던지는 모습으로 보고 겁을 먹고 얼른 비자를 주었다고 합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당신의 말씀을 그대로 믿고 절대적으로 순종하는 자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합리적으로 생각하기 보다 절대적인 자세로 순종하고 삶에 적용하므로 말씀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을 회복하고 능력있게 캠퍼스 지성인들을 믿어 순종케 하는 역사에 귀하게 쓰임 받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백부장의 믿음을 매우 기뻐하시고 크게 칭찬해 주셨습니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기이히 여겨 좇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예수님은 이 한사람 이방인 백부장의 믿음을 통하여 장차 이방인들 가운데 일어날 놀라운 믿음의 역사를 보셨습니다. 이방인이라도 믿음이 있으면 천국에 앉게 되는 특권을 누리게 될 것이요, 이스라엘 백성이라도 믿음이 없으면 바깥 어두운데 쫓겨나 이를 갈며 슬피 울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세계는 믿음의 사람의 것이요, 하나님은 온전한 믿음의 사람을 귀하게 써주십니다.
예수님은 백부장의 말씀을 믿는 믿음을 축복해 주셨습니다. “네 믿은 대로 될찌어다” 그러자 그 시로 하인의 병이 낫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우리의 믿음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배우게 됩니다. 예수님은 백부장의 믿음을 통해서 하인의 병을 낫게 역사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무엇이든지 하실 수 있는 무한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 분이시지만 믿음의 사람을 통해 그 능력을 행사하십니다. 또 우리의 믿음을 보시고 믿은 대로 역사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백부장과 같이 사랑의 사람이요, 믿음의 종이 되어 병든 캠퍼스 양들을 구원하는 데 귀하게 쓰임 받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3. 우리의 연약함을 담당해 주시는 예수님(14-17)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집에 들어가셔서 그의 장모가 열병으로 앓아누운 것을 보셨습니다. 아마도 늙으신 분이 과로를 하신 모양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따랐지만 장모의 일로 마음 한편이 무거웠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장모의 손을 꼭 잡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장모를 사랑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사위를 하나님의 역사에 동역자로 드린 장모의 희생과 수고를 감사하였고, 손을 꼭 잡아주시므로 위로해 주셨습니다. 그러자 장모는 곧 나아 예수님의 수종을 들어주었습니다.
날이 저물자 사람들이 귀신들린 자를 많이 예수님께 데려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말씀으로 귀신들을 쫓아내시고, 병든 자를 다 고쳐주셨습니다. 이를 지켜보던 저자 마태는 이사야 선지자의 글이 생각났습니다. 17절을 보십시오.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에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 일찍이 이사야 선지자는 인간의 모든 연약함과 병을 담당하실 그리스도를 예언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이 귀신들리고 병든 것은 연약하기 때문임을 아셨습니다. 육신이 연약하여 육신의 병이 생깁니다. 마음이 연약하여 의존적이 되고, 다른 사람의 말에 쉽게 상처를 입게 됩니다. 영혼이 연약하여 사단의 유혹에 잘 넘어가고 세상의 죄에 쉽게 빠집니다. 우리가 어떻게 이런 연약함에서 구원을 받아 강하고 담대한 그리스도의 군사가 될 수 있을까요? 베드로는 큰 소리는 잘 쳤지만 그 내면은 연약하여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해야 할 때 잠자기에 바빴습니다. 그는 연약함 때문에 계집종 앞에서 사랑하는 스승을 세 번이나 부인하는 부끄러운 일을 행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의 연약함을 아시고 그에게 다시 찾아 오셔서 조반을 손수 지어 먹이시고 사랑의 대화를 하시며 연약함을 담당해 주셨습니다. 다윗은 돌맹이 5개로 거인 골리앗을 때려눕힌 강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왕이 된 후 연약함으로 탐심을 다스리지 못하고 왕의 권세로 충신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와 간음을 하고 이를 은폐하기 위해 우리아를 살해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윗의 연약함을 담당해 주셨습니다. 다윗이 자신의 죄를 깨닫고 침상이 다 젖도록 눈물로 회개하였을 때 하나님은 밧세바를 통해 솔로몬을 나게 하시고 다윗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의 왕이 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태어난 솔로몬의 이름을 ‘여호와께 사랑함을 입다’는 뜻의 여디디아라 하심으로 다윗과 솔로몬의 왕국이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에 기초한 것임을 드러내셨습니다.
사람은 강한 것 같지만 실상 연약한 존재입니다. 우리는 순결한 인생을 살기 원하지만 연약하여 원치 않게 유혹에 넘어가 죄를 짓고 후회한 적이 얼마나 많습니다. 요즘에는 심한 스트레스로 인해 또는 아무 이유도 없이 슬프거나 울적함이 도를 지나쳐, 생활을 할 수 없을 정도로 무기력해지거나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며, 생각이 비관적으로 되는 우울증에 고통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특히 요즘 젊은 대학생들 중에는 다른 사람과 관계성을 잘 못 맺고, 힘들거나 부담스러운 일은 아예 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분은 만성이 된 피부병으로 남모르는 고통을 하고 계신분도 있습니다. 우리 인간은 근본적으로 연약한 존재입니다. 그런데 이 인간의 연약함은 죄에서 오는 것입니다. 죄를 짓기 전의 인간은 세상을 정복하고 다스리는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죄를 범한 후 인간은 얼굴에 땀을 흘리며 겨우 먹고살기 위해 일생을 수고해야 하는 존재로 전락하였습니다. 하나님 없이, 사명이 없이 단순히 먹고살기 위해 땀을 흘러야 할 때 사람들은 연약해 질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인간을 불쌍히 여기사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 독생자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사 우리 연약함을 담당해 주셨습니다. 세상에서는 연약하고 부족한 자를 무시하고 업신여깁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 연약함을 무시하지 많으시고 이해하시며 섬겨주셨습니다. 마침내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우리의 죄와 연약함을 친히 담당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있는 모습 그대로 예수님께 나아갈 때 예수님은 우리를 있는 모습 그대로 영접하시고 우리의 연약함을 담당해 주십니다. 예수님께 나의 연약함을 내려놓을 때 병든 내면이 나음을 받아, 강하고 담대한 믿음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서 점점 더 강한 자로 빚어지게 됩니다.(딤후 2:1) 우리가 있는 모습 그대로 주님께 믿음으로 나아가 죄 사함을 받고 연약함을 치료받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담당해 주시는 예수님의 은혜와 사랑에 감사를 드립니다.
오늘 예수님은 문둥병자의 믿음을 보시고 그의 연약함을 친히 담당해 주셨습니다. 또 백부장의 믿음을 보시고 그 하인의 연약함을 친히 담당해 주셨습니다. 또 베드로의 장모의 연약함을 담당해 주셨고 많은 귀신들린 자들과 병자들의 연약함을 담당해 주셨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친히 담당하시고 우리의 병을 짊어지심으로 우리를 강건케 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이 시간 우리들도 우리의 연약함을 있는 모습 그대로 예수님께 들고 나아가 내려놓음으로 우리 내면의 병을 고침 받고 강건한 하나님의 종이 되어 다스리고 정복하는 삶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첨부파일
-
data/message1/1053311070/2003mt11.hwp (0byte)
137회 다운로드 | DATE : 2003-05-19 11:09:42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