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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2023년 눅27강(15:1-32) 잃은 아들을 찾은 아버지의 기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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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엘리야
댓글 0건 조회 56회 작성일 23-03-05 1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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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누가복음 제 27 강                                                   
말씀 | 누가복음 15:1-32
요절 | 누가복음 15:24

잃은 아들을 찾은 아버지의 기쁨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

  어떤 사람이 스마트 폰을 잃어버렸습니다. 스마트 폰에 나의 신상에 관한 여러 정보가 다 들어가 있습니다. 은행에 대한 정보도 있습니다. 마음이 불안해지기 시작합니다. 어디서 잃어버렸지 생각합니다. 집에 있을까, 카페에 있을까, 센터에 있을까 스마트 폰을 찾기 위해서 오늘 하루 머물렀던 장소를 역으로 찾기 시작합니다. 집안의 서랍들은 도둑이 뒤진 것처럼 다 열려 있고 전쟁터와 같습니다. 여기저기 다 뒤져보고, 가족들에게 전화를 하고 친구에게도 전화를 합니다. 친구는 차를 뒤집니다. 드디어 친구와 함께 탔던 차의 바닥에서 스마트 폰이 나왔습니다. 친구와 함께 기뻐합니다. 이런 경험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는 세 가지 비유가 나옵니다. 잃은 양의 비유, 잃은 드라크마의 비유, 잃은 아들의 비유입니다. 이 비유들은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실존과 잃어버린 죄인들을 찾고자 하는 하나님의 마음을 잘 묘사해 줍니다. 우리가 봄 학기를 시작하면서 잃은 양을 찾는 하나님의 기쁨에 참여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예수님께 가까이 나아오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수군거렸습니다.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당시 유대인들은 같은 식탁에서 식사하는 것은 가족이나 동류로 여기고, 비슷한 부류의 사람들끼리 식사를 했습니다. 예수님은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나왔을 때 함께 식사를 했습니다. 이는 파격적인 일이었습니다.

  첫째, 잃은 양의 비유(4-6).  죄인들에 대해 아무런 심정이 없고 긍휼이 없는 종교지도자들에게 예수님의 모습은 비난거리일 뿐이었습니다. 세리와 죄인들을 향한 예수님의 마음이 어떠한지 예수님은 세 가지 비유를 통해 드러내 주셨습니다. 4-6절을 읽겠습니다.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아내기까지 찾아다니지 아니하겠느냐 또 찾아낸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아내었노라 하리라.” 양은 귀는 잘 발달되었지만 눈이 어두워 잘 보지 못합니다. 목자의 음성을 잘 듣지 않으면 쉽게 길을 잃습니다. 아마 잃어버린 양은 고집 세고 목자의 말을 잘 듣지 않는 양일 것입니다. 목자는 잃은 양을 찾기 위해서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찾아 나섭니다. 그 양을 찾으려고 온갖 수고를 아끼지 않습니다. 목자에게 잃은 양 한 마리는 1/100의 가치가 아닙니다. 한 마리, 한 마리가 절대적인 가치가 있습니다. 목자는 아흔 아홉 마리 양을 동료에게 맡기고 잃어버린 양을 찾아 나섭니다. 수풀을 뒤지고, 산에도 가보고 드디어 절벽 나무에 걸려 있는 양을 발견하고 목자의 지팡이로 끌어냅니다. 그리고 다리를 다친 양을 어깨에 매고 즐거워 하며 옵니다. 7절을 보십시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두 번째 비유는 잃은 드라크마 비유입니다. 어떤 여자가 열 드라크마가 있는데 하나를 잃으면 등불을 켜고 집을 쓸며 찾아내기까지 부지런히 찾지 아니하겠습니까? 그 당시 정혼의 징표였던 드라크마는 열 개가 한 꾸러미가 되어 신랑으로부터 신부에게 보내졌습니다. 이것은 결혼식 때 자신의 신부임을 확인하는 증표였습니다. 그러니 이 여인은 잃어버린 이 동전 한 닢을 잃고 얼마나 애타게 찾겠습니까? 동전은 자기가 무리를 떠나고 싶어서 떠난 것이 아닙니다. 어둡고 칙칙하고 먼지 나는 곳이 좋아서 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결정적으로 그곳에서 스스로 빠져나올 방법이 전혀 없습니다. 누군가 그 냄새나고 어둡고 먼지 쌓여 있는 곳으로 찾아와야 합니다. 그래서 자기에게 구원의 손길을 펼치지 않는다면 그 어둠에서 빠져나올 방법이 없습니다. 이 땅에 사는 사람 중에 어떤 사람은 자신은 죄가 없는데 어릴 때부터 죄인 취급을 당하고 살고 있습니다. 처참한 가난도 대물림 됩니다. 어떤 사람은 분명히 영적으로 어두운 환경 속에 있는데 본인은 모를 뿐만 아니라 빛으로 가고 싶은 마음도 없습니다. 아무 것도 의지할 것 없는 외롭고 고독한 절망의 상태에 있습니다. 이런 그를 빛으로 나오도록 하기 위해 여인은 낮아졌습니다. 냄새나는 곳까지 엎드려 더렵고 먼지 많은 곳으로 찾아가는 희생을 감수했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입니다. 스스로의 힘으로 도저히 빠져 나올 수 없는 우리를 찾아오셔서 자신이 망가지고 더러워지고 결국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면서까지 우리를 찾아내십니다. 여인은 드라크마를 찾아낸즉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잃은 드라크마를 찾아내었노라 할 것입니다. 10절을 보십시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

  두 비유에 나타난 공통점은 잃어버린 대상을 찾을 때까지 찾는 것입니다. 그리고 찾았을 때 주위 모든 사람들을 불러서 잔치를 벌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죄인을 찾기 위해서 온갖 노력을 기울이십니다. 포기치 않고 끈질기게 돌이키도록 역사하십니다. 또 하나의 공통점은 ‘하나에 대한 관심’입니다. 우리는 가끔 아흔아홉에 만족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나’에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하나님에게 한 사람은 천하보다 귀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 지구에 나 하나 밖에 없는 것처럼 나를 사랑하십니다. 그만큼 나 한 사람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온 땅에서 죄인들이 죄에서 돌이켜 하나님께 돌아와 구원을 받기를 열망하십니다. 어떤 죄인이 뉘우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면 천국에서 잔치를 벌이십니다. 잃어버린 한 양은 1/100이 아닙니다. 잃어버린 한 드라크마는 1/10이 아닙니다. 주인에게는 하나가 전체와 같이 동일하게 중요합니다. 또 하나의 공통점은 즐거움입니다. 목자는 즐거워 양을 어깨에 메고 함께 즐기고, 여인도 이웃과 함께 즐기고, 탕자의 비유에서도 잔치를 벌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도 잃은 자를 찾는 진정한 기쁨을 맛볼 수 있게 역사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세 번째 비유는 그 유명한 탕자의 비유입니다.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그 둘째가 아버지에게 말하였습니다.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이 말은 사실 배은망덕한 요구입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주고 그 말씀에 순종하도록 돕지만 둘째 아들은 아버지의 가르침을 자신을 얽어매는 율법으로 생각합니다. 늘 부담스럽게 여깁니다. 아버지를 떠나서 먼 나라로 가서 자유롭게 살기를 원했습니다. 아버지는 둘째 아들이 유산을 요구했을 때 이런 망나기 같은 놈하고 책망하거나, 그를 잡아두면 더욱더 관계성만 파괴될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스스로 판단하고 돌아올 수 있도록 기회를 주고 기다렸습니다. 하나님은 전능한 분이십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은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인간만이 하나님의 명령대로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다루기 힘들다고 강제로 굴복시키지 않습니다. 인간이 스스로 깨닫고 체험하고 자원하는 마음으로 결정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를 원하십니다.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낭비하였습니다. 다 없앤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그가 비로소 궁핍하였습니다. 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한 사람에게 붙여 사니 그가 그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그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었습니다. 돼지를 치는 것을 보니 그 땅은 이방 땅으로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도 없고 율법도 없었습니다. 누구 하나 간섭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자기의 마음과 감정대로 원하는 대로 살았습니다.

  사람이 마음이 원하는 대로 살면 어떻게 될까요? 선을 행하며 거룩하고 고상한 삶을 살까요?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린 인간은 육신의 본성대로 살 수밖에 없습니다. 둘째 아들은 창기들과 함께 모든 돈을 탕진했습니다. 먼 나라에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과 어울려서 술 마시고 노래하고 춤을 췄습니다. 창기들과 어울려서 정욕의 죄를 짓고 밤새도록 노름을 했습니다. 그는 허랑방탕한 생활을 하다가 모든 재산을 탕진합니다. 그가 탕진한 것은 물질적인 것만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과 재능과 젊음과 기회까지도 허비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고 육체의 욕심을 따를 때 남는 것은 피곤함과 죄의식과 후회뿐입니다. 그가 재산을 모두 낭비했을 때 설상가상으로 큰 흉년이 들었습니다. 돈이 있을 때는 친구들이 많이 붙어다녔는데 궁핍하게 되자 함께 어울렸던 친구들도 떠나버렸습니다. 그가 빈털터리가 되어서 그 나라 백성 중 한 사람에게 붙여 살며 돼지를 치며 생계를 유지하였습니다. 돼지를 치게 되었다는 것은 그가 얼마나 비참한 상태로 전락했는가를 말해줍니다. 그는 돼지를 치면서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합니다. 하지만 그것조차 주는 이가 없습니다. 그는 굶주림으로 죽게 될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짐승만도 못한 삶을 살며 인생의 밑바닥까지 내려갔습니다.

  17절을 보십시오.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둘째가 스스로 돌이켰다는 것은 정신을 차렸다는 뜻입니다. 모든 것을 잃고 굶주리게 되자 둘째 아들은 스스로 돌이켜 아버지 집을 생각합니다. 아버지 집에는 모든 것이 풍족했습니다. 양식도 풍족하고 말씀도 풍족하고 사랑도 넘쳐났습니다. 그는 아버지 집에서 살 때는 그 집이 얼마나 풍족한지 몰랐습니다. 아버지의 은혜와 사랑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는 감사할 줄을 몰랐습니다. 모든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 집을 떠나서 모든 것을 잃고 비참한 상태가 되자 비로소 그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번에 학생 수양회에서 안암센터 스탭이신 이창무 목자님이 “만약 하나님이 없다면”이란 주제로 강의를 했습니다. 그의 강의를 통해서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실존에 대해서 깊이 배울 수 있었습니다. 토스토예프스키는 까라마조프의 형제들 중에서 “신과 내세가 없다면 무슨 일이든 가능하다. 사람이 못할 일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없다면 도덕적 의무도 없다는 말입니다. 오늘날 하나님을 떠난 서구인들의 모습을 보면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동성애, 레즈비언, 몇 번의 이혼과 재혼, 동성애 부부, 트랜스젠더, 마약의 남용 등등 어떻게 인간이 저럴 수 있지?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일들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문제는 로마서 1장 후반부에 이미 예견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버리고 살고자 할 때 하나님은 인간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셨습니다. 그 결과 모든 불의와 추악한 죄를 짓게 됩니다(롬 1:29-33). 하나님을 떠난 사람은 인생의 의미와 목적도 상실하고 맙니다. 사는 것이 죽을 맛입니다.

  둘째 아들은 이렇게 죽느니 일어나 아버지 집에 돌아가서 품꾼의 하나로 사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이에 일어나 아버지께로 돌아갔습니다. 이것이 회개입니다. 회개란 자신의 잘못을 진실하고 애통한 마음으로 깨닫고 돌이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풍성한 용서의 사랑을 믿고 하나님께로 나아오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집으로 돌아오는 둘째 아들을 어떻게 맞이합니까?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아버지는 둘째 아들이 집을 나간 후 하루도 쉬지 않고 동네 어귀로 나왔을 것입니다.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아들을 기다리고 또 기다렸습니다. 어느 날 거지같은 행색을 하고 축 늘어진 상태로 터벅터벅 걸어오는 한 사람을 발견합니다. 아직도 거리가 멀었지만 아버지는 허둥지둥 달려갑니다. 희끗희끗 머리칼을 날리며 노쇠한 다리가 어디라도 걸려 넘어질까 위태롭게 보입니다. “아들아~” 아버지는 따뜻한 양 팔로 아들을 안습니다. 부끄러워 고개를 들지 못하는 아들, 돼지 똥으로 얼룩진 옷에서 나는 냄새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아들을 덥석 끌어안고 볼을 부비며 입을 맞춥니다. 아들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립니다.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은 그의 허다한 죄와 허물을 덮습니다. 둘째 아들은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라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종들에게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고 말합니다. 이런 반지를 끼는 것은 그가 가족의 한 사람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신발을 신는 것은 자유인의 신분과 부요함을 상징합니다. 당시 노예들은 신을 신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고 합니다. 왜 이렇게 잔치를 할까요?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아버지의 즐거움에 함께 한 사람들이 다 즐거워합니다. 아버지는 자신의 죄악을 철저하게 깨닫고 회개한 둘째 아들의 과거를 묻지 않습니다. 지난날의 방탕한 삶을 조금도 문제 삼지 않습니다. 다만 잃어버린 아들이 돌아온 사실 하나만으로 기뻐합니다. 이것이 회개하고 돌아온 죄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지난 달에 이요한 선교사님의 어머님이 예수님을 주와 구주로 영접하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자신의 주먹을 믿고 살아왔던 분인데 폐암 4기 판정을 받았습니다. 죽음 앞에서 자신을 돌아보고 하나님께 마음을 돌이켰습니다. 세례를 받을 때 이요한 선교사님도 울고 어머님도 우셨습니다. 저도 눈물이 났습니다. 이런 구원의 역사가 계속될 때 신앙 생활에 감격과 기쁨이 있습니다. 

  그러나 맏아들의 마음은 달랐습니다. 맏아들은 밭에 있다가 돌아와 집에 가까이 왔을 때에 풍악과 춤추는 소리를 듣고 한 종을 불러 이 무슨 일인가 물었습니다.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으매 당신의 아버지가 건강한 그를 다시 맞아들이게 됨으로 인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았나이다”라고 말하자 그가 노하여 들어가고자 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가 나와서 맏아들을 권합니다. 그러나 아들은 반발합니다.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맏아들은 자기 동생이 돌아온 것에 대해서 아무런 관심이 없습니다. 오직 자기 자신에게만 초점을 맞춥니다. 아버지 집에서 열심히 일을 하며 지냈지만 기쁨이 없었습니다. 맏아들은 아버지의 풍성한 사랑과 은혜를 알지 못했습니다. 아버지 집에서 누리는 풍족한 삶은 자신의 성실과 노력 때문에 얻은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당연하게 받을 것을 받았다고 생각하니 감사가 없습니다. 또한 고통 중에 있는 동생에 대해 불쌍히 여기는 마음도 없습니다. 작은 아들을 잃고 한 없이 슬퍼하시는 아버지의 심정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동생도 사랑하지 않고 아버지도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제까지 아버지 집에 있었지만 아들이 아니라 종처럼 살았습니다. 몸은 집 안에 있지만 마음은 아버지를 떠나 집 안에 있는 탕자였습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큰 아들과 같았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무엇을 깨우쳐 줍니까? 31,32절을 보십시오.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아버지는 맏아들이 충실하게 자기 곁에 있었다고 인정해 줍니다. 또한 자기의 재산이 다 맏아들의 소유라고 말합니다. 자기의 마음 속에 특별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음을 알려 줍니다. 둘째 아들이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고 해서 맏아들이 가진 지위를 상실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와 사랑의 관계가 깨지는 것도 아닙니다. 상속 받을 재산도 그대로입니다. 맏아들이 그동안 누린 삶은 오늘 하루의 잔치보다도 훨씬 더 좋은 것입니다. 물질보다 더 큰 축복은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하나님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알아갈수록 우리는 그의 성품을 닮아갑니다. 또한 하나님을 알아갈수록 더 큰 믿음을 소유하게 되고 더 큰 능력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크신 능력은 살진 송아지 한 마리 잡는다고 해서 조금도 줄어들지 않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오래하다 보면 첫째 아들과 같은 마음을 가지기가 쉽습니다. 구원받았을 때의 감격이 사라지고 나만 홀로 수고하고 하나님의 역사를 섬기고 있다는 자기 의가 생깁니다. 그러나 우리가 구원받은 것도 하나님의 은혜요, 주님의 양떼들을 맡아서 섬기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탕자의 비유는 Prodigal Son 이라고 부릅니다. Prodigal은 “낭비하는”, “아낌없이 쓰는”이란 뜻입니다. 쉽게 말하면 “못 쓰게 될 정도로 빠져버린”, “눈이 먼”이란 뜻입니다. 팀켈러 목사는 Prodigal God 이란 책을 썼습니다. 바로 하나님이 사랑에 눈이 멀어 자기 아들을 원수들을 위해 내어 주셨습니다. 우리가 이 사랑을 받았고 우리도 사랑에 눈이 먼 목자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우리도 아무리 해도 변화가 없는 사람들을 미워하고 정죄하고 소망 없다고 잘라버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돌아오기까지 불쌍히 여기며 사랑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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