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2023년 눅26강(14:1-35)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길
페이지 정보

본문
2023년 누가복음 제 26 강
말씀 | 누가복음 14:1-35
요절 | 누가복음 14:33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길
“이와 같이 너희 중의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예수님의 제자는 그의 성품과 사역을 배워서 전수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성품을 생각할 때 섬김과 순종으로 특징지어집니다. 섬기려면 겸손해야 합니다. 순종하려면 자기 부인을 해야 합니다. 오늘 말씀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않으면 능히 예수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보통 세상의 가치관은 더 올라가라고 하고 더 움켜쥐라고 합니다. 모든 것이 높은 곳을 향해서 나아가도록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가르침은 낮아지고 버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제자는 낮은 곳을 향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말씀을 잘 배우고 순종함으로 예수님의 좋은 제자가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차라리 가서 끝자리에 앉으라(1-11). 예수님이 안식일에 한 바리새인 지도자의 집에 식사하러 들어가셨습니다. 주의 앞에 수종병 든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수종 병은 근육조직이나 혈관 속에 물이 고여서 몸이 붓는 병입니다. 나중에는 숨쉬기도 어렵고 소변도 잘 나오지 않는다고 합니다. 랍비들은 부도덕한 생활 때문에 수종 병이 발병한다고 정의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병자에게는 관심이 없었고 다만 그 사람을 미끼로 사용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시는가 엿보고 있다가 병을 고치면 잡고자 계획을 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율법교사들과 바리새인들에게 물으셨습니다. “안식일에 병 고쳐 주는 것이 합당하냐 아니하냐?” 그들이 잠잠했습니다. 예수님은 그 사람을 데려다가 고쳐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중에 누가 그 아들이나 소가 우물에 빠졌으면 안식일에라도 곧 끌어내지 않겠느냐?” 그들이 이에 대하여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할 말이 없었을 것입니다. 율법교사들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올무에 빠뜨릴 기회를 엿보고 있었는데, 예수님은 오히려 이 기회를 이용하여 그들의 잘못된 신앙을 고쳐주시고자 하십니다. 예수님은 고침을 받아야 할 수종병 든 사람을 앞에 두고 바리새인들과 싸우지 않으셨습니다. 그 사람을 먼저 고쳐 주시고 보내셨습니다. 그 다음에 율법교사들과 바리새인들의 잘못된 점을 고쳐주고자 하십니다. 이는 병든 사람에 대한 배려였습니다.
하나님은 안식일에는 아무 일도 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종들이나 집 안에 머무는 손님이나 가축까지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이는 사람들과 피조물에게 쉼을 주기 위해서입니다. 또한 그 백성들이 함께 모여서 하나님을 예배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단순하게 생각하면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이 어떤 것인가에 생각할 때에 일상적인 일을 쉬는 것입니다. 그런데 생각이 많고 복잡한 사람들은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 정의를 내리기가 어려웠습니다. 유대 랍비들은 많은 고민과 토론을 통하여 안식일에 하지 말아야 할 39가지를 규정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매이게 되었습니다. 안식일은 하나님의 천지창조와 죄의 노예 생활에서 해방된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우리는 율법의 완성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죄와 죽음 권세에서 해방되었습니다. 그래서 안식일 대신에 예수님이 부활하신 주일에 예배를 드립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 지도자의 식사 자리에서 사람들이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자 신경전을 벌이는 모습을 보셨습니다. 8-10절을 보십시오. “네가 누구에게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았을 때에 높은 자리에 앉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보다 더 높은 사람이 청함을 받은 경우에 너와 그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이 사람에게 자리를 내주라 하리니 그 때에 네가 부끄러워 끝자리로 가게 되리라. 청함을 받았을 때에 차라리 가서 끝자리에 앉으라 그러면 너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벗이여 올라 앉으라 하리니 그 때에야 함께 앉은 모든 사람 앞에서 영광이 있으리라.” 어떤 모임이나 행사를 할 때에 의전은 매우 중요합니다. 사람이 어떤 자리에 앉아 있는 지를 보면 그의 지위를 알 수 있습니다. 높은 자리에는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고 존경과 명예가 있습니다. 자리에 따라서 신분이 달라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초청을 받은 사람들은 서로 상석에 앉고자 경쟁을 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들에게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람이 자신을 낮추고 남을 높이게 되면 평화와 기쁨이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겸손한 사람들의 마음에 임합니다. 반대로 서로를 높이고자 하면 경쟁심과 다툼, 시기심이 생기고 불안합니다. 거기가 지옥입니다. 자기를 낮추는 것 곧 겸손은 자기 비하가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보다 자신을 열등하게 생각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재능을 무시하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비천함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동시에 하나님께 자신이 얼마나 존귀함을 받는 존재인가를 깊이 깨닫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겸손과 자존감을 가지고 있을 때 자신을 낮추고 다른 사람들을 높이며 섬기는 성숙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가장 높고 영화로운 분이시지만 자기를 비워서 종의 형체를 입고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일생 동안 종의 자세를 가지고 병든 자들을 치료해주시고 제자들의 냄새나는 발을 씻겨주셨습니다. 결국에는 사람들의 죄와 죽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죄인 중의 죄인으로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한 없이 자신을 낮추어 섬기셨을 때, 하나님은 그를 높이시고 온 우주를 통치하는 만왕의 왕이시오 만주의 주로 삼으셨습니다. 예수님을 본 받아 자신을 낮추어서 섬기는 인생을 사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천국 잔치에서 높은 자리에 앉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청한 자에게 이르셨습니다. “네가 점심이나 저녁이나 베풀거든 벗이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한 이웃을 청하지 말라 두렵건대 그 사람들이 너를 도로 청하여 네게 갚음이 될까 하노라. 잔치를 베풀거든 차라리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저는 자들과 맹인들을 청하라. 그리하면 그들이 갚을 것이 없으므로 네게 복이 되리니 이는 의인들의 부활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라 하시더라.” 세상에서 수고한 일에 대해서 보상을 받으면 하나님 나라에서 받을 상급이 없습니다. 인간의 마음에는 보상심리가 있어서 수고한 만큼 보상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열심히 수고했지만 아무도 알아주지 않고 어떤 보상도 없으면 손해의식에 시달립니다. 사람들이 인정해주고 칭찬해줄 때 신이 나서 더욱 열심히 섬깁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열심히 수고했지만 아무런 보응도 받지 못한 것이 오히려 복되다고 말씀하십니다. 가난한 사람들, 병든 사람들, 사회에서 소외된 사람들처럼 갚을 것이 없는 사람들을 섬기는 것이 복되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무엇을 바라는 것 없이 섬길 때 진정성이 느껴집니다. 또 사람에게서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우리의 상급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이미 상급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구원에 대한 감사와 기쁨이 원동력이 되어 섬기는 것입니다. 또한 의인들의 부활시에 섬긴 것에 대해서 보상을 받습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6장 3,4절에서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 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을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나의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캠퍼스에서 진리를 알지 못한 채 방황하는 영혼들을 돕는 것은, 갚을 것이 없는 사람들을 섬기는 일입니다. 열심히 전도하고 말씀을 가르쳐도 수고한 만큼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그럴지라도 우리가 포기하지 않고 복음 역사를 섬길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은 반드시 우리의 수고에 보응해주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진심으로 사랑을 나누고 물질을 나누고 기쁨을 나눌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섬김의 비밀은 하나님과 자신만이 아는 기쁨에 있습니다.
둘째, 큰 잔치에로의 초대(15-24). 함께 먹는 사람 중 하나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의 나라에서 떡을 먹는 자가 복되다고 말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말을 받아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베풀고 많은 사람을 청한 이야기를 해 주십니다. 어떤 사람은 큰 잔치를 위해서 음식과 포도주와 노래할 사람들, 춤 출 사람들, 연주할 사람들 등 모든 것을 준비하고 손님들을 청하였습니다. “잔치할 시각에 그 청하였던 자들에게 종을 보내어 이르되 오소서 모든 것이 준비되었나이다.” 잔치를 준비한 주인은 큰 기대감을 가지고 문 밖에 나와서 손님들이 오는 것을 내다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보이는 것은 힘없이 돌아오는 종들뿐이었습니다. 청함 받은 사람들은 다 일치하게 사양하였습니다. 이들은 여러 변명을 늘어 놓았습니다. 이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요? 그들은 다 현재 생활에 만족하고 있었습니다. 더 이상 큰 잔치가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밭을 돌보는 기쁨, 열 마리의 소를 바라보기만 해도 배가 불렀습니다. 결혼한 사람은 깨가 쏟아졌습니다. 세상에서 아무런 부족함이 없이 즐겁게 사는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세상 일에 바쁜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시간을 쓰는 것을 매우 아까워합니다. 그들은 하나님 나라의 잔치에 참석하는 것보다 세상 일에 더 가치를 느낍니다. 또한 그들은 자신들을 초청한 주인에 대한 경외심이 없습니다. 한마디로 무례하였습니다. 주인을 무시하였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을 초청한 주인의 마음을 잘 몰랐습니다. 그의 기쁨에 함께 참여하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종의 보고를 들은 주인의 마음은 어떠합니까? 집 주인이 노하였습니다. 주인은 오랫동안 정성껏 잔치를 준비했는데 아무도 참석하지 않겠다고 하자 크게 실망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준비한 잔치를 취소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는 종에게 “빨리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맹인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오라”고 명령하였습니다. 이들은 13절에 기록된 사람들과 일치합니다. 문맥은 어떤 사람이 베푼 큰 잔치가 하나님 나라에서 먹는 잔치임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들은 갚을 것이 없는 가난하고 버림받고 소외된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하나님 나라에 은혜로 초청을 받습니다.
종이 돌아와 주인이 명한 대로 하였으되 아직도 자리가 있다고 보고하였습니다. 주인은 종에게 다시 명령합니다. “길과 산울타리 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전에 청하였던 그 사람들은 하나도 내 잔치를 맛보지 못하리라.” 여기서 길과 산울타리 가로 나가는 것은 시외로 나가는 것입니다. 그곳에는 사람들이 많지 않습니다. 또 잔치 집에서 멀리 떨어진 곳입니다. 여기에 있는 사람들을 잔치에 데려오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인은 종들에게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고 명령합니다. “강권하여 채우라”는 것은 물리력을 동원하여 협박해서라도 데려오라는 뜻은 아닙니다. 잔치에 참석할 수 있도록 간곡하게 촉구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사람들은 집 주인이 어떤 인물인지 잘 몰라서 잔치에 참석하기를 주저할 수 있습니다. 이 말씀 속에는 큰 잔치에 사람들이 가득 차기를 바라는 주인의 간절한 마음이 담겨져 있습니다. 관대한 집 주인은 아직도 밖에 있는 다른 사람들이 이 잔치에 참석해서 즐기기를 간절히 바라십니다. 이것은 자비로운 하나님이 구원 받을 사람들을 계속해서 찾고 계시는 모습을 나타내줍니다. 우리는 입학식 때 학생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일대일 성경공부에 초청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학생들을 만나서 복음을 전하는 기쁨이 있었습니다. 이번 주 개학이 되면 학생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학생들을 말씀 공부에 초청하기를 기도합니다.
셋째, 예수님의 제자가 치루어야 할 대가(25-35). 수많은 무리가 함께 갈새 예수님께서 돌이키사 이르셨습니다.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이 말씀은 부모를 공경하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가족 간의 사랑의 관계성을 깨뜨리라는 뜻도 아닙니다. 예수님이 “미워해야 한다” 말씀하신 것은 그럴 각오를 하고 따라야 한다는 뜻입니다. 유대인 사회에서 부모의 권위는 절대적이었습니다. 부모의 권위로 예수님의 제자가 되지 못하게 막을 수 있습니다. 그런 부모의 뜻을 거스르게 되면 매를 맞거나 버림받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자 한다면 부모로부터 버림받을 각오를 해야 합니다. 가족과 이웃과 친구들에게도 버림받을 각오를 해야 합니다. 심지어는 목숨까지 잃을 각오를 해야 합니다. 이런 각오가 없이는 예수님을 끝까지 따를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자 한다면 사명을 수행할 때 따르는 고난도 기꺼이 감당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면 어떤 계산을 해야 합니까? 망대를 짓고자 한다면 먼저 그 비용을 계산해보아야 합니다. 비용을 계산하지 않고 무작정 건물을 짓게 되면 기초만 쌓고 그만둘 수 있습니다. 또 전쟁을 할 때는 자신의 나라와 대적할 나라의 군사력을 비교해 보고 전력을 따져보아야 합니다. 군인들의 사기가 어떤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자 할 때, 반드시 그 대가를 헤아려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면 가족들로부터 미움을 받고 쫓겨날 수 있습니다. 사회적인 지위나 재물을 상실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라면 자신의 꿈과 욕심도 포기해야 합니다. 제자의 삶에는 전적인 헌신과 희생이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전에 신중하게 생각하고 어떤 희생과 손해라도 감수하고자 하는 각오와 결단을 한 후에 따라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고난이 닥치고 희생과 손해가 요구될 때 제자의 길을 포기해버리고 말 것입니다. 모든 소유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그것을 맡은 청지기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빈 손으로 왔다가 빈 손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이런 물질관을 가질 때 하나님의 뜻대로 자신의 소유를 사용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서 하늘 영광을 버리고 자신의 생명까지 주셨습니다. 이런 절대적인 사랑을 베푸신 주님께서 그를 따르는 제자들을 위해서 무엇을 아끼시겠습니까? 주님을 소유한 사람, 영생을 소유한 사람은 모든 것을 다 얻은 사람입니다.
34,35절을 보십시오. “소금이 좋은 것이나 소금도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땅에도, 거름에도 쓸 데 없어 내버리느니라 들을 귀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하시니라.” 우리가 맛을 내는 소금과 같이 제자다운 제자가 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요? 예수님의 제자는 세상에서 소금과 빛과 같은 역할을 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진리를 보존하고 살맛이 나는 세상을 만들어야 합니다. 제자다운 제자는 예수님의 냄새를 내며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갑니다. 이 세상에서 소금을 대체할 것이 없는 것처럼 제자를 대체할 것이 없습니다. 신자들의 공동체인 교회를 대체할 것이 없습니다. 교회는 이 세상의 소망입니다. 우리가 천국의 보화를 얻은 자로서 기쁨과 자부심을 가지고 주님을 따르기를 기도합니다.
말씀 | 누가복음 14:1-35
요절 | 누가복음 14:33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길
“이와 같이 너희 중의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예수님의 제자는 그의 성품과 사역을 배워서 전수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성품을 생각할 때 섬김과 순종으로 특징지어집니다. 섬기려면 겸손해야 합니다. 순종하려면 자기 부인을 해야 합니다. 오늘 말씀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않으면 능히 예수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보통 세상의 가치관은 더 올라가라고 하고 더 움켜쥐라고 합니다. 모든 것이 높은 곳을 향해서 나아가도록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가르침은 낮아지고 버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제자는 낮은 곳을 향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말씀을 잘 배우고 순종함으로 예수님의 좋은 제자가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차라리 가서 끝자리에 앉으라(1-11). 예수님이 안식일에 한 바리새인 지도자의 집에 식사하러 들어가셨습니다. 주의 앞에 수종병 든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수종 병은 근육조직이나 혈관 속에 물이 고여서 몸이 붓는 병입니다. 나중에는 숨쉬기도 어렵고 소변도 잘 나오지 않는다고 합니다. 랍비들은 부도덕한 생활 때문에 수종 병이 발병한다고 정의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병자에게는 관심이 없었고 다만 그 사람을 미끼로 사용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시는가 엿보고 있다가 병을 고치면 잡고자 계획을 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율법교사들과 바리새인들에게 물으셨습니다. “안식일에 병 고쳐 주는 것이 합당하냐 아니하냐?” 그들이 잠잠했습니다. 예수님은 그 사람을 데려다가 고쳐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중에 누가 그 아들이나 소가 우물에 빠졌으면 안식일에라도 곧 끌어내지 않겠느냐?” 그들이 이에 대하여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할 말이 없었을 것입니다. 율법교사들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올무에 빠뜨릴 기회를 엿보고 있었는데, 예수님은 오히려 이 기회를 이용하여 그들의 잘못된 신앙을 고쳐주시고자 하십니다. 예수님은 고침을 받아야 할 수종병 든 사람을 앞에 두고 바리새인들과 싸우지 않으셨습니다. 그 사람을 먼저 고쳐 주시고 보내셨습니다. 그 다음에 율법교사들과 바리새인들의 잘못된 점을 고쳐주고자 하십니다. 이는 병든 사람에 대한 배려였습니다.
하나님은 안식일에는 아무 일도 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종들이나 집 안에 머무는 손님이나 가축까지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이는 사람들과 피조물에게 쉼을 주기 위해서입니다. 또한 그 백성들이 함께 모여서 하나님을 예배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단순하게 생각하면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이 어떤 것인가에 생각할 때에 일상적인 일을 쉬는 것입니다. 그런데 생각이 많고 복잡한 사람들은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 정의를 내리기가 어려웠습니다. 유대 랍비들은 많은 고민과 토론을 통하여 안식일에 하지 말아야 할 39가지를 규정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매이게 되었습니다. 안식일은 하나님의 천지창조와 죄의 노예 생활에서 해방된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우리는 율법의 완성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죄와 죽음 권세에서 해방되었습니다. 그래서 안식일 대신에 예수님이 부활하신 주일에 예배를 드립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 지도자의 식사 자리에서 사람들이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자 신경전을 벌이는 모습을 보셨습니다. 8-10절을 보십시오. “네가 누구에게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았을 때에 높은 자리에 앉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보다 더 높은 사람이 청함을 받은 경우에 너와 그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이 사람에게 자리를 내주라 하리니 그 때에 네가 부끄러워 끝자리로 가게 되리라. 청함을 받았을 때에 차라리 가서 끝자리에 앉으라 그러면 너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벗이여 올라 앉으라 하리니 그 때에야 함께 앉은 모든 사람 앞에서 영광이 있으리라.” 어떤 모임이나 행사를 할 때에 의전은 매우 중요합니다. 사람이 어떤 자리에 앉아 있는 지를 보면 그의 지위를 알 수 있습니다. 높은 자리에는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고 존경과 명예가 있습니다. 자리에 따라서 신분이 달라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초청을 받은 사람들은 서로 상석에 앉고자 경쟁을 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들에게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람이 자신을 낮추고 남을 높이게 되면 평화와 기쁨이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겸손한 사람들의 마음에 임합니다. 반대로 서로를 높이고자 하면 경쟁심과 다툼, 시기심이 생기고 불안합니다. 거기가 지옥입니다. 자기를 낮추는 것 곧 겸손은 자기 비하가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보다 자신을 열등하게 생각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재능을 무시하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비천함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동시에 하나님께 자신이 얼마나 존귀함을 받는 존재인가를 깊이 깨닫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겸손과 자존감을 가지고 있을 때 자신을 낮추고 다른 사람들을 높이며 섬기는 성숙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가장 높고 영화로운 분이시지만 자기를 비워서 종의 형체를 입고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일생 동안 종의 자세를 가지고 병든 자들을 치료해주시고 제자들의 냄새나는 발을 씻겨주셨습니다. 결국에는 사람들의 죄와 죽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죄인 중의 죄인으로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한 없이 자신을 낮추어 섬기셨을 때, 하나님은 그를 높이시고 온 우주를 통치하는 만왕의 왕이시오 만주의 주로 삼으셨습니다. 예수님을 본 받아 자신을 낮추어서 섬기는 인생을 사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천국 잔치에서 높은 자리에 앉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청한 자에게 이르셨습니다. “네가 점심이나 저녁이나 베풀거든 벗이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한 이웃을 청하지 말라 두렵건대 그 사람들이 너를 도로 청하여 네게 갚음이 될까 하노라. 잔치를 베풀거든 차라리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저는 자들과 맹인들을 청하라. 그리하면 그들이 갚을 것이 없으므로 네게 복이 되리니 이는 의인들의 부활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라 하시더라.” 세상에서 수고한 일에 대해서 보상을 받으면 하나님 나라에서 받을 상급이 없습니다. 인간의 마음에는 보상심리가 있어서 수고한 만큼 보상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열심히 수고했지만 아무도 알아주지 않고 어떤 보상도 없으면 손해의식에 시달립니다. 사람들이 인정해주고 칭찬해줄 때 신이 나서 더욱 열심히 섬깁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열심히 수고했지만 아무런 보응도 받지 못한 것이 오히려 복되다고 말씀하십니다. 가난한 사람들, 병든 사람들, 사회에서 소외된 사람들처럼 갚을 것이 없는 사람들을 섬기는 것이 복되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무엇을 바라는 것 없이 섬길 때 진정성이 느껴집니다. 또 사람에게서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우리의 상급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이미 상급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구원에 대한 감사와 기쁨이 원동력이 되어 섬기는 것입니다. 또한 의인들의 부활시에 섬긴 것에 대해서 보상을 받습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6장 3,4절에서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 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을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나의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캠퍼스에서 진리를 알지 못한 채 방황하는 영혼들을 돕는 것은, 갚을 것이 없는 사람들을 섬기는 일입니다. 열심히 전도하고 말씀을 가르쳐도 수고한 만큼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그럴지라도 우리가 포기하지 않고 복음 역사를 섬길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은 반드시 우리의 수고에 보응해주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진심으로 사랑을 나누고 물질을 나누고 기쁨을 나눌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섬김의 비밀은 하나님과 자신만이 아는 기쁨에 있습니다.
둘째, 큰 잔치에로의 초대(15-24). 함께 먹는 사람 중 하나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의 나라에서 떡을 먹는 자가 복되다고 말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말을 받아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베풀고 많은 사람을 청한 이야기를 해 주십니다. 어떤 사람은 큰 잔치를 위해서 음식과 포도주와 노래할 사람들, 춤 출 사람들, 연주할 사람들 등 모든 것을 준비하고 손님들을 청하였습니다. “잔치할 시각에 그 청하였던 자들에게 종을 보내어 이르되 오소서 모든 것이 준비되었나이다.” 잔치를 준비한 주인은 큰 기대감을 가지고 문 밖에 나와서 손님들이 오는 것을 내다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보이는 것은 힘없이 돌아오는 종들뿐이었습니다. 청함 받은 사람들은 다 일치하게 사양하였습니다. 이들은 여러 변명을 늘어 놓았습니다. 이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요? 그들은 다 현재 생활에 만족하고 있었습니다. 더 이상 큰 잔치가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밭을 돌보는 기쁨, 열 마리의 소를 바라보기만 해도 배가 불렀습니다. 결혼한 사람은 깨가 쏟아졌습니다. 세상에서 아무런 부족함이 없이 즐겁게 사는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세상 일에 바쁜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시간을 쓰는 것을 매우 아까워합니다. 그들은 하나님 나라의 잔치에 참석하는 것보다 세상 일에 더 가치를 느낍니다. 또한 그들은 자신들을 초청한 주인에 대한 경외심이 없습니다. 한마디로 무례하였습니다. 주인을 무시하였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을 초청한 주인의 마음을 잘 몰랐습니다. 그의 기쁨에 함께 참여하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종의 보고를 들은 주인의 마음은 어떠합니까? 집 주인이 노하였습니다. 주인은 오랫동안 정성껏 잔치를 준비했는데 아무도 참석하지 않겠다고 하자 크게 실망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준비한 잔치를 취소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는 종에게 “빨리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맹인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오라”고 명령하였습니다. 이들은 13절에 기록된 사람들과 일치합니다. 문맥은 어떤 사람이 베푼 큰 잔치가 하나님 나라에서 먹는 잔치임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들은 갚을 것이 없는 가난하고 버림받고 소외된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하나님 나라에 은혜로 초청을 받습니다.
종이 돌아와 주인이 명한 대로 하였으되 아직도 자리가 있다고 보고하였습니다. 주인은 종에게 다시 명령합니다. “길과 산울타리 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전에 청하였던 그 사람들은 하나도 내 잔치를 맛보지 못하리라.” 여기서 길과 산울타리 가로 나가는 것은 시외로 나가는 것입니다. 그곳에는 사람들이 많지 않습니다. 또 잔치 집에서 멀리 떨어진 곳입니다. 여기에 있는 사람들을 잔치에 데려오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인은 종들에게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고 명령합니다. “강권하여 채우라”는 것은 물리력을 동원하여 협박해서라도 데려오라는 뜻은 아닙니다. 잔치에 참석할 수 있도록 간곡하게 촉구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사람들은 집 주인이 어떤 인물인지 잘 몰라서 잔치에 참석하기를 주저할 수 있습니다. 이 말씀 속에는 큰 잔치에 사람들이 가득 차기를 바라는 주인의 간절한 마음이 담겨져 있습니다. 관대한 집 주인은 아직도 밖에 있는 다른 사람들이 이 잔치에 참석해서 즐기기를 간절히 바라십니다. 이것은 자비로운 하나님이 구원 받을 사람들을 계속해서 찾고 계시는 모습을 나타내줍니다. 우리는 입학식 때 학생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일대일 성경공부에 초청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학생들을 만나서 복음을 전하는 기쁨이 있었습니다. 이번 주 개학이 되면 학생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학생들을 말씀 공부에 초청하기를 기도합니다.
셋째, 예수님의 제자가 치루어야 할 대가(25-35). 수많은 무리가 함께 갈새 예수님께서 돌이키사 이르셨습니다.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이 말씀은 부모를 공경하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가족 간의 사랑의 관계성을 깨뜨리라는 뜻도 아닙니다. 예수님이 “미워해야 한다” 말씀하신 것은 그럴 각오를 하고 따라야 한다는 뜻입니다. 유대인 사회에서 부모의 권위는 절대적이었습니다. 부모의 권위로 예수님의 제자가 되지 못하게 막을 수 있습니다. 그런 부모의 뜻을 거스르게 되면 매를 맞거나 버림받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자 한다면 부모로부터 버림받을 각오를 해야 합니다. 가족과 이웃과 친구들에게도 버림받을 각오를 해야 합니다. 심지어는 목숨까지 잃을 각오를 해야 합니다. 이런 각오가 없이는 예수님을 끝까지 따를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자 한다면 사명을 수행할 때 따르는 고난도 기꺼이 감당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면 어떤 계산을 해야 합니까? 망대를 짓고자 한다면 먼저 그 비용을 계산해보아야 합니다. 비용을 계산하지 않고 무작정 건물을 짓게 되면 기초만 쌓고 그만둘 수 있습니다. 또 전쟁을 할 때는 자신의 나라와 대적할 나라의 군사력을 비교해 보고 전력을 따져보아야 합니다. 군인들의 사기가 어떤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자 할 때, 반드시 그 대가를 헤아려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면 가족들로부터 미움을 받고 쫓겨날 수 있습니다. 사회적인 지위나 재물을 상실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라면 자신의 꿈과 욕심도 포기해야 합니다. 제자의 삶에는 전적인 헌신과 희생이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전에 신중하게 생각하고 어떤 희생과 손해라도 감수하고자 하는 각오와 결단을 한 후에 따라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고난이 닥치고 희생과 손해가 요구될 때 제자의 길을 포기해버리고 말 것입니다. 모든 소유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그것을 맡은 청지기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빈 손으로 왔다가 빈 손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이런 물질관을 가질 때 하나님의 뜻대로 자신의 소유를 사용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서 하늘 영광을 버리고 자신의 생명까지 주셨습니다. 이런 절대적인 사랑을 베푸신 주님께서 그를 따르는 제자들을 위해서 무엇을 아끼시겠습니까? 주님을 소유한 사람, 영생을 소유한 사람은 모든 것을 다 얻은 사람입니다.
34,35절을 보십시오. “소금이 좋은 것이나 소금도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땅에도, 거름에도 쓸 데 없어 내버리느니라 들을 귀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하시니라.” 우리가 맛을 내는 소금과 같이 제자다운 제자가 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요? 예수님의 제자는 세상에서 소금과 빛과 같은 역할을 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진리를 보존하고 살맛이 나는 세상을 만들어야 합니다. 제자다운 제자는 예수님의 냄새를 내며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갑니다. 이 세상에서 소금을 대체할 것이 없는 것처럼 제자를 대체할 것이 없습니다. 신자들의 공동체인 교회를 대체할 것이 없습니다. 교회는 이 세상의 소망입니다. 우리가 천국의 보화를 얻은 자로서 기쁨과 자부심을 가지고 주님을 따르기를 기도합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