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2023년 눅 24강(13:1-21) 회개하지 않으면 망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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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누가복음 제 24 강
말씀 | 누가복음 13:1-21
요절 | 누가복음 13:3
회개하지 않으면 망하리라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오늘 말씀은 12장의 제자도에 이어서 회개를 촉구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삶이 변화가 되려면 회개해야 합니다. 회개하지 않으면 삶의 변화가 없고 결국 망하게 됩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회개를 촉구하신 후에 안식일에 등이 굽은 여자를 치유하시는 사건이 나옵니다. 18년 동안 앓아왔지만 예수님이 그녀를 치료해 주시자 허리를 펴고 자유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에 예수님은 겨자씨와 누룩의 비유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가 어떻게 확장되는가를 말씀해 주십니다. 예수님은 한 사람 한 사람 치료하시지만 이는 누룩과 같이 겨자씨와 같이 자라고 퍼져나갑니다. 우리가 회개함으로 새롭게 되며 하나님 나라를 누리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회개하지 않으면 망하리라(1-9). 그 때 마침 두어 사람이 예수님께 와서 빌라도가 어떤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그들의 제물에 섞은 일을 말하였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로마의 압제에 항거하여 자주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반란은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명절에 예루살렘 성전 주위에서 일어났습니다. 역사가 요세푸스는 유월절 기간에 유대인들이 반란을 일으켰다가 3천명이 제물처럼 학살당했다고 했습니다. 어떤 때는 2만 명이 학살되어 성전 뜰이 시체로 가득 차기도 했습니다. 반란의 주동자들은 주로 갈릴리 사람들이었습니다. 갈릴리는 열심당원들의 본거지였습니다. 이때도 어떤 갈릴리 사람들이 예루살렘으로 올라왔습니다. 사람들이 많이 모인 성전에서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빌라도는 로마 군인들을 급히 보내서 반란을 진압했습니다. 다시 반란을 일으키지 못하도록 반란에 가담한 사람들을 무참히 살해했습니다. 그들은 이런 사건들을 예수님은 어떻게 해석하시는지 알고 싶었습니다.
예수님의 대답이 무엇입니까? “너희는 이 갈릴리 사람들이 이같이 해 받으므로 다른 모든 갈릴리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예수님은 정치적인 문제에 초점을 맞추지 않으시고 여기에 두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하십니다. 예수님은 그 갈릴리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악한 죄인들이기 때문에 그와 같은 죽임을 당한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재앙을 당한 사람이나 재앙을 당하지 않는 사람이나 다 죄인입니다. 어떤 사람은 재앙을 당하는데 어떤 사람은 재앙을 당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회개할 기회를 더 주시기 위함입니다. 그 기회를 통해 회개를 하는 사람은 재앙을 피하고 복을 받게 됩니다. 회개할 때 우리의 마음이 새롭게 됩니다. 새롭게 된 사람은 하나님의 역사에 귀히 쓰임을 받게 됩니다.
4,5절을 보십시오. “또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다른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실로암은 예루살렘 근처 기혼 샘에서 물을 끌어다가 만든 못입니다. 예루살렘 주민의 식수로 사용되었습니다. 망대는 감시나 방어를 위해서 세운 탑인데 빌라도는 성전 보물창고에서 불법으로 자금을 인출하여 실로암 망대를 세웠습니다. 망대를 세우다가 망대가 무너져서 노동자 열여덟 사람이 죽었습니다. 사람들은 이 사건이 발생하자 하나님의 징벌을 받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거주한 다른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어서 불의의 사고를 당한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오히려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반복해서 경고하십니다. 갈릴리 사람들이 빌라도에게 죽은 사건이나 망대가 무너져서 죽은 소식은 하나님의 심판에 직면해 있다는 사실입니다. 튀르키예에서의 지진으로 21000명 이상의 사상자가 나왔습니다. 튀르키예는 2월이 가장 추운데 11개 도시의 지진 피해 난민들이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들을 위해서 구제헌금을 하고자 합니다. 동시에 우리도 언제 이런 일이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지진 소식을 듣고도 회개하지 않으면 망하게 될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판결이 결정되면 돌이킬 수 없기 때문에 늦기 전에 회개해야 합니다.
회개는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이요, 삶을 총체적으로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참된 회개의 실행은 무엇보다도 먼저 자신이 의롭다는 교만이 무너지는 데에서 시작됩니다. 이어서 이런 자신의 모습을 보고 슬퍼하며 애통합니다. 은혜로우신 하나님 아버지를 대적해 왔던 자신의 삶에 대한 후회와 쓰라린 애통함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권위에 대한 의지적인 반항을 하며 살았습니다. 내 주먹을 믿고 내가 하나님이 되어 살아왔습니다. 회개는 자기가 하나님 노릇을 하고 권위자들에 대해서 반항하며 살았던 모든 죄를 미워하고 혐오합니다. 하나님을 대적하고 내 뜻대로 살고자 하는 죄가 그토록 내 안에 뿌리 깊게 있음을 탄식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고개를 들지 못한 채 부끄러워 어쩔 줄을 몰라 합니다. 이제 하나님 앞에서 백일하에 드러나는 자신의 죄과와 악함을 감히 감추려 시도하지 않습니다.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자신이야말로 하나님의 영광을 훼손한 죄인임을 고백합니다. 자신이 지은 죄에 대한 철저한 책임을 인정합니다. 어떤 변명이나 구실도 내세울 수 없음을 발견합니다. 이런 고백이야말로 회개와 죄의 자각에 있어 절대적으로 본질적인 부분입니다. 회개는 죄로부터 돌이켜 하나님을 향해 나가는 일입니다. 우리가 남은 인생을 허비하지 않고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최고의 복은 행한 대로 심판하지 않으시고 회개하면 용서해주신다는 것입니다. 과거에 어떤 삶을 살았더라도 회개하면 모든 죄를 깨끗이 씻어주시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새로운 삶을 살게 하십니다. 지속적인 회개가 있을 때 우리가 변화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회개는 하나님께 대하여 살기 시작하려고 자신에 대하여 죽는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를 살립니다. 하나님께 대한 거룩과 경건을 향해서 새롭게 열망하는 은혜가 우리에게 있기를 기도합니다. 기도는 죄를 죽이고 죄는 기도를 죽입니다. 우리가 오로지 기도에 힘쓰는 가운데 거룩한 삶에서 진전이 있기를 소망합니다.
예수님은 포도원지기의 비유를 통해서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하십니다. 한 사람이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은 것이 있었는데 와서 그 열매를 구하였으나 얻지 못하였습니다. 주인이 포도원지기에게 말합니다. 내가 삼 년을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서 열매를 구하되 얻지 못하니 찍어버리라 어찌 땅만 버리게 하겠느냐? 그러나 포도원지기가 대답합니다. 주인이여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니 이 후에 만일 열매가 열면 좋거니와 그렇지 않으면 찍어버리소서 하였습니다. 이 비유는 지금이 회개의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기회임을 알려 줍니다. 지금은 복음의 시대요, 은혜의 시대입니다. 누구든지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영접하면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구원의 문이 모든 사람들에게 활짝 열려있습니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기회의 문이 열려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인생은 짧습니다. 회개할 시간이 조금 남아 있습니다. 기회가 있을 때 우리는 회개해야 합니다. 회개는 하나님께서 지적하시는 죄를 동의하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 1:9).”
둘째, 귀신 들려 앓으며 꼬부라진 여인을 고치신 예수님(10-17).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한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였습니다. 열여덟 해 동안이나 귀신 들려 앓으며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하는 한 여자가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보시고 불러 이르셨습니다. “여자여 네가 네 병에서 놓였다 하시고 안수하시니 여자가 곧 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지라.” 참으로 놀라운 일이 순식간에 일어난 것입니다. 이 여자는 의학적으로는 척추병으로 인한 꼬부라짐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귀신들려서 이렇게 되었습니다. 귀신은 그 여인을 열여덟 해 동안이나 사로잡아 한 순간도 똑바로 서 있을 수 없었습니다. 디스크로 인해서도 고통스러운데 이 여인은 눌려서 지냈으니 얼마나 힘들었을까요? 여인은 병을 고쳐달라고 요청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이 먼저 그 여인을 불러 고쳐주십니다. 예수님이 여인을 불쌍히 여기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자연스러운 마음가짐입니다.
그런데 이를 보고 회당장은 왜 분노했습니까? 14절을 보십시오. “회당장이 예수께서 안식일에 병 고치시는 것을 분 내어 무리에게 이르되 일할 날이 엿새가 있으니 그 동안에 와서 고침을 받을 것이요 안식일에는 하지 말 것이니라 하거늘” 회당장은 예수님이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열여덟해 동안 앓던 여인을 고친 것을 의료행위로 여겼습니다. 병을 고치기를 원한다면 안식일이 아닌 다른 날에 해야 한다는 장로의 유전에 따라 이렇게 판단하고 분노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정한 규례는 안식일을 주신 하나님의 뜻에 반하는 것입니다. 물론 회당장의 입장에서는 사회의 질서를 지켜야 하기에 당연하다고 강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이 옳은지 스스로 판단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회당장과 그에게 동조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꾸짖었습니까? “외식하는 자들아 너희가 각각 안식일에 자기의 소나 나귀를 외양간에서 풀어내어 이끌고 가서 물을 먹이지 아니하느냐 그러면 열여덟 해 동안 사탄에게 매인 바 된 이 아브라함의 딸을 안식일에 이 매임에서 푸는 것이 합당하지 아니하냐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매 모든 반대하는 자들은 부끄러워하고 온 무리는 그가 하시는 모든 영광스러운 일을 기뻐하니라(15-17).”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짐승을 위해 물을 긷는 것은 허용했습니다. 안식일에 목마른 짐승들에게 자비를 베푼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에게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18년 동안 사탄에 매여 고통당하던 여인이 고침 받는 것은 용납하지 못합니다. 이에 예수님은 가축을 외양간에서 풀어내어 물을 마시게 하는 것보다 사탄에게 매인 아브라함의 딸을 풀어서 쉬게 하는 것이 더 합당하지 아니하냐고 물으십니다. 그들은 짐승을 도우면서 아브라함의 딸을 돕는 것은 거부합니다. 이 얼마나 왜곡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까? 이들은 다른 사람보다 자기 재산이 더 중요했습니다. 성경해석을 하나님의 편이 아니라 자신의 유익을 중심으로 했습니다. 자기중심적으로 해석하다 보니 이런 왜곡이 생겼습니다. 예수님께서 열여덟해 동안 꼬부라져 있던 여인을 고치시자 평소 자신들의 의로움을 자랑하던 종교지도자들이 수치를 당하고 부끄러워합니다. 반면에 평소 율법대로 살지 못한다고 천대받고 무시 받던 무리들은 예수님이 행하시는 일로 인해서 기뻐하였습니다. 우리는 성경 공부를 통해서 율법을 잘 알게 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잘못된 점들이 무엇인지 눈에 잘 들어옵니다. 그래서 판단과 정죄를 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 공부를 통해서 내가 먼저 회개하기를 힘써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는 일에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또한 어떤 사람일지라도 그의 연약함을 불쌍히 여기고 긍휼을 베푸는 일에 게을러서는 안 됩니다. 우리 가운데 성령의 능력으로 기가 눌린 사람들이 펴지는 역사가 이루어지길 기도합니다. 낙담한 사람들이 용기를 얻고 다시 일어설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이번 학생연합수양회를 통해서 학생들이 큰 힘을 얻었습니다. 하나님과 나라는 주제로 말씀과 소감을 들었습니다. 찬양을 통해서 하나님의 임재를 누렸습니다. 이 세상에서 여러 모양의 두려움에 직면하지만 “나니 두려워하지 말라”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 불가능한 일에 도전하는 믿음의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셋째, 겨자씨와 누룩의 비유(18-21).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무엇으로 비교하셨습니까? 19절을 보십시오. “마치 사람이 자기 채소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자라 나무가 되어 공중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였느니라.”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님을 주와 구주로 영접할 때 그 마음에 이루어집니다. 또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영접할 때 그 사람 마음에서 이루어집니다. 팔레스틴 지역에서 씨앗 중에 가장 작은 씨앗은 겨자씨입니다. 바늘 귀 정도의 크기입니다. 이런 작은 겨자씨를 땅에 뿌리면 몇 주일 만에 3m까지 자라난다고 합니다. 날아가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여 겨자씨를 먹으며 쉼을 얻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 나라는 작게 시작하지만 복음 안에 놀라운 생명력이 있습니다. 복음을 들을 때 죄와 어둠의 권세로 영혼이 죽은 자들이 살아나고 병든 자들이 고침을 받습니다.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고 성장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을 통해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그 복음은 열두 명의 제자들을 통해서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으로 퍼졌습니다. 예수님은 나사렛의 가난한 목수의 아들이었고 12명의 제자들은 대부분 갈릴리 촌부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너무나 작고 보잘 것 없었지만 그 안에 하나님의 생명이 있었기 때문에 30년 후에는 소아시아와 그리스와 로마에까지 복음이 전파되었습니다. 로마 황제들은 기독교를 두려워하기 시작했습니다. AD 64년 네로 황제부터 313년 콘스탄틴 황제가 밀라노칙령을 통해서 기독교를 공인하기까지 기독교를 잔멸하고자 엄청난 박해를 가했습니다. 그때 복음을 영접한 사람들은 로마 제국 안에서 정상적인 삶을 살 수가 없었습니다. 카타콤이란 지하 동굴에 숨어서 살아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음은 계속해서 퍼져나가서 로마 제국을 덮어버렸습니다. 그 이후에도 영국과 미국과 한국까지 퍼졌습니다. 지금은 중국을 덮고 이슬람권인 중동과 힌두교권인 인도까지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지난 번 아시아 지부장 수양회에 참석하여 발견한 것은 하나님 나라가 모슬렘권, 불교권, 힌두권에서도 힘있게 자라고 있음을 보게 되었습니다. UBF 역사는 겨자씨 한 알처럼 작게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전 세계 캠퍼스 영혼들을 섬기는 큰 모임으로 성장했습니다. 이번 학생연합 수양회에서 학생들이 말씀을 전하고 소감을 나누고 찬양하는 모습을 통해서 앞으로 UBF를 통한 복음 역사가 더욱 힘있게 퍼져나갈 비전을 보게 되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 안에는 놀라운 생명력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이를 믿고 힘써 말씀을 배우고 충성된 사람들에게 전할 때 그들이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치며 복음이 전수될 것입니다. 그때 세계 온 캠퍼스를 덮는 구원의 역사가 예수님의 재림 전에 이루어질 것입니다.
21절을 보십시오. “또 이르시되 내가 하나님의 나라를 무엇으로 비교할까 마치 여자가 가루 서 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 하셨더라.” 가루 서 말은 100명이 먹을 수 있는 분량입니다. 이런 많은 양의 밀가루에 누룩을 조금만 넣고 하루 밤을 지내면 전부가 부풀게 됩니다. 이처럼 누룩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전부를 부풀게 하는 내적인 힘이 있습니다. 누룩처럼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을 변화시키고 사회와 나라와 전 세계를 변화시키는 힘이 있습니다. 우리는 한 팀의 일대일 성경공부를 마음을 들여서 하지만 처음에는 별로 달라지는 것이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조금씩 조금씩 변화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변화는 성장한다는 뜻입니다. 아모스 선지자는 사람들의 가장 큰 문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한 영적 기갈이라고 말했습니다(암8:11).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 마음에는 은혜가 생기고 기쁨과 감사가 솟아나기 시작합니다. 메마른 심령에 하나님의 말씀이 심기면 하나님 나라가 자라기 시작합니다. 딱딱한 얼굴이 조금씩 펴지고 얼굴이 밝아지고 미소를 띠게 됩니다. 말씀을 듣고 회개하면 마음이 새롭게 됩니다. 웃음이 생기고 찬송을 흥얼거립니다. 삶에 활기가 생기고 생동감이 넘칩니다. 생각과 말과 행동이 달라지고 습관이 바뀌고 인격이 변화되고 인생이 달라집니다.
한 사람의 변화는 가족의 변화로 이어집니다. 나중에는 친척들이 변화되고 사회와 국가가 변화됩니다. 한국 근대화 과정에서 지대한 영향을 끼쳤던 조만식, 안창호, 김구, 이승만, 서재필, 이동휘, 이동녕 등은 일찍부터 선교사들을 통해서 성경말씀을 배우고 깨우친 사람들입니다. 권서들은 백성들이 글을 깨우치는데 지대한 공헌을 했습니다. 1800년대 말과 1900년대 초에 권서들은 쪽 복음을 들고 온 마을로 돌아다니면서 성경을 읽어주고 팔았습니다. 사람들은 성경에 관심을 갖고 쪽 복음을 사서 읽기 시작했습니다. 한글을 모르는 사람들은 성경을 읽고자 한글을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일이 전국적으로 일어나서 문맹률이 거의 없는 지혜로운 백성들이 되었습니다. 이런 일들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돈과 성공, 육체의 쾌락을 중요하게 여기는 이 시대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계속해서 우리의 삶에 큰 영향력을 끼치고 있습니다. 자기중심적인 시대 속에서 하나님 중심적인 삶을 살게 합니다. 우리가 성경을 배우고 실천하는 일을 할 때 인내와 기다림이 있어야 합니다. 지난 주 영상에서 보았던 것처럼 성공보다 의미에 초점을 두며 살아야 합니다. 유대인들은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에 힘을 썼는데 예수님은 한 사람을 고치는데 힘을 쏟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왜 겨자씨 한 알을 강조하셨을까요? 실제로 씨를 뿌릴 때는 한 움큼씩 잡고 막 뿌려야 합니다. 그러나 한 알의 겨자씨가 자라서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이는 것처럼 예수님을 영접하고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 속에는 놀라운 일들이 일어납니다. 예수님께서 살아서 일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복음역사는 누룩과 같이 소리없이 한 개인을 변화시키고 공동체를 변화시킵니다. 이런 일들은 하나님께서 살아계시기 때문에 이루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야 합니다. 무엇보다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를 통해서 일하시는 주님을 찬양합니다.
말씀 | 누가복음 13:1-21
요절 | 누가복음 13:3
회개하지 않으면 망하리라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오늘 말씀은 12장의 제자도에 이어서 회개를 촉구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삶이 변화가 되려면 회개해야 합니다. 회개하지 않으면 삶의 변화가 없고 결국 망하게 됩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회개를 촉구하신 후에 안식일에 등이 굽은 여자를 치유하시는 사건이 나옵니다. 18년 동안 앓아왔지만 예수님이 그녀를 치료해 주시자 허리를 펴고 자유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에 예수님은 겨자씨와 누룩의 비유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가 어떻게 확장되는가를 말씀해 주십니다. 예수님은 한 사람 한 사람 치료하시지만 이는 누룩과 같이 겨자씨와 같이 자라고 퍼져나갑니다. 우리가 회개함으로 새롭게 되며 하나님 나라를 누리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회개하지 않으면 망하리라(1-9). 그 때 마침 두어 사람이 예수님께 와서 빌라도가 어떤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그들의 제물에 섞은 일을 말하였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로마의 압제에 항거하여 자주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반란은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명절에 예루살렘 성전 주위에서 일어났습니다. 역사가 요세푸스는 유월절 기간에 유대인들이 반란을 일으켰다가 3천명이 제물처럼 학살당했다고 했습니다. 어떤 때는 2만 명이 학살되어 성전 뜰이 시체로 가득 차기도 했습니다. 반란의 주동자들은 주로 갈릴리 사람들이었습니다. 갈릴리는 열심당원들의 본거지였습니다. 이때도 어떤 갈릴리 사람들이 예루살렘으로 올라왔습니다. 사람들이 많이 모인 성전에서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빌라도는 로마 군인들을 급히 보내서 반란을 진압했습니다. 다시 반란을 일으키지 못하도록 반란에 가담한 사람들을 무참히 살해했습니다. 그들은 이런 사건들을 예수님은 어떻게 해석하시는지 알고 싶었습니다.
예수님의 대답이 무엇입니까? “너희는 이 갈릴리 사람들이 이같이 해 받으므로 다른 모든 갈릴리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예수님은 정치적인 문제에 초점을 맞추지 않으시고 여기에 두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하십니다. 예수님은 그 갈릴리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악한 죄인들이기 때문에 그와 같은 죽임을 당한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재앙을 당한 사람이나 재앙을 당하지 않는 사람이나 다 죄인입니다. 어떤 사람은 재앙을 당하는데 어떤 사람은 재앙을 당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회개할 기회를 더 주시기 위함입니다. 그 기회를 통해 회개를 하는 사람은 재앙을 피하고 복을 받게 됩니다. 회개할 때 우리의 마음이 새롭게 됩니다. 새롭게 된 사람은 하나님의 역사에 귀히 쓰임을 받게 됩니다.
4,5절을 보십시오. “또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다른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실로암은 예루살렘 근처 기혼 샘에서 물을 끌어다가 만든 못입니다. 예루살렘 주민의 식수로 사용되었습니다. 망대는 감시나 방어를 위해서 세운 탑인데 빌라도는 성전 보물창고에서 불법으로 자금을 인출하여 실로암 망대를 세웠습니다. 망대를 세우다가 망대가 무너져서 노동자 열여덟 사람이 죽었습니다. 사람들은 이 사건이 발생하자 하나님의 징벌을 받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거주한 다른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어서 불의의 사고를 당한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오히려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반복해서 경고하십니다. 갈릴리 사람들이 빌라도에게 죽은 사건이나 망대가 무너져서 죽은 소식은 하나님의 심판에 직면해 있다는 사실입니다. 튀르키예에서의 지진으로 21000명 이상의 사상자가 나왔습니다. 튀르키예는 2월이 가장 추운데 11개 도시의 지진 피해 난민들이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들을 위해서 구제헌금을 하고자 합니다. 동시에 우리도 언제 이런 일이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지진 소식을 듣고도 회개하지 않으면 망하게 될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판결이 결정되면 돌이킬 수 없기 때문에 늦기 전에 회개해야 합니다.
회개는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이요, 삶을 총체적으로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참된 회개의 실행은 무엇보다도 먼저 자신이 의롭다는 교만이 무너지는 데에서 시작됩니다. 이어서 이런 자신의 모습을 보고 슬퍼하며 애통합니다. 은혜로우신 하나님 아버지를 대적해 왔던 자신의 삶에 대한 후회와 쓰라린 애통함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권위에 대한 의지적인 반항을 하며 살았습니다. 내 주먹을 믿고 내가 하나님이 되어 살아왔습니다. 회개는 자기가 하나님 노릇을 하고 권위자들에 대해서 반항하며 살았던 모든 죄를 미워하고 혐오합니다. 하나님을 대적하고 내 뜻대로 살고자 하는 죄가 그토록 내 안에 뿌리 깊게 있음을 탄식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고개를 들지 못한 채 부끄러워 어쩔 줄을 몰라 합니다. 이제 하나님 앞에서 백일하에 드러나는 자신의 죄과와 악함을 감히 감추려 시도하지 않습니다.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자신이야말로 하나님의 영광을 훼손한 죄인임을 고백합니다. 자신이 지은 죄에 대한 철저한 책임을 인정합니다. 어떤 변명이나 구실도 내세울 수 없음을 발견합니다. 이런 고백이야말로 회개와 죄의 자각에 있어 절대적으로 본질적인 부분입니다. 회개는 죄로부터 돌이켜 하나님을 향해 나가는 일입니다. 우리가 남은 인생을 허비하지 않고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최고의 복은 행한 대로 심판하지 않으시고 회개하면 용서해주신다는 것입니다. 과거에 어떤 삶을 살았더라도 회개하면 모든 죄를 깨끗이 씻어주시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새로운 삶을 살게 하십니다. 지속적인 회개가 있을 때 우리가 변화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회개는 하나님께 대하여 살기 시작하려고 자신에 대하여 죽는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를 살립니다. 하나님께 대한 거룩과 경건을 향해서 새롭게 열망하는 은혜가 우리에게 있기를 기도합니다. 기도는 죄를 죽이고 죄는 기도를 죽입니다. 우리가 오로지 기도에 힘쓰는 가운데 거룩한 삶에서 진전이 있기를 소망합니다.
예수님은 포도원지기의 비유를 통해서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하십니다. 한 사람이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은 것이 있었는데 와서 그 열매를 구하였으나 얻지 못하였습니다. 주인이 포도원지기에게 말합니다. 내가 삼 년을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서 열매를 구하되 얻지 못하니 찍어버리라 어찌 땅만 버리게 하겠느냐? 그러나 포도원지기가 대답합니다. 주인이여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니 이 후에 만일 열매가 열면 좋거니와 그렇지 않으면 찍어버리소서 하였습니다. 이 비유는 지금이 회개의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기회임을 알려 줍니다. 지금은 복음의 시대요, 은혜의 시대입니다. 누구든지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영접하면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구원의 문이 모든 사람들에게 활짝 열려있습니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기회의 문이 열려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인생은 짧습니다. 회개할 시간이 조금 남아 있습니다. 기회가 있을 때 우리는 회개해야 합니다. 회개는 하나님께서 지적하시는 죄를 동의하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 1:9).”
둘째, 귀신 들려 앓으며 꼬부라진 여인을 고치신 예수님(10-17).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한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였습니다. 열여덟 해 동안이나 귀신 들려 앓으며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하는 한 여자가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보시고 불러 이르셨습니다. “여자여 네가 네 병에서 놓였다 하시고 안수하시니 여자가 곧 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지라.” 참으로 놀라운 일이 순식간에 일어난 것입니다. 이 여자는 의학적으로는 척추병으로 인한 꼬부라짐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귀신들려서 이렇게 되었습니다. 귀신은 그 여인을 열여덟 해 동안이나 사로잡아 한 순간도 똑바로 서 있을 수 없었습니다. 디스크로 인해서도 고통스러운데 이 여인은 눌려서 지냈으니 얼마나 힘들었을까요? 여인은 병을 고쳐달라고 요청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이 먼저 그 여인을 불러 고쳐주십니다. 예수님이 여인을 불쌍히 여기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자연스러운 마음가짐입니다.
그런데 이를 보고 회당장은 왜 분노했습니까? 14절을 보십시오. “회당장이 예수께서 안식일에 병 고치시는 것을 분 내어 무리에게 이르되 일할 날이 엿새가 있으니 그 동안에 와서 고침을 받을 것이요 안식일에는 하지 말 것이니라 하거늘” 회당장은 예수님이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열여덟해 동안 앓던 여인을 고친 것을 의료행위로 여겼습니다. 병을 고치기를 원한다면 안식일이 아닌 다른 날에 해야 한다는 장로의 유전에 따라 이렇게 판단하고 분노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정한 규례는 안식일을 주신 하나님의 뜻에 반하는 것입니다. 물론 회당장의 입장에서는 사회의 질서를 지켜야 하기에 당연하다고 강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이 옳은지 스스로 판단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회당장과 그에게 동조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꾸짖었습니까? “외식하는 자들아 너희가 각각 안식일에 자기의 소나 나귀를 외양간에서 풀어내어 이끌고 가서 물을 먹이지 아니하느냐 그러면 열여덟 해 동안 사탄에게 매인 바 된 이 아브라함의 딸을 안식일에 이 매임에서 푸는 것이 합당하지 아니하냐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매 모든 반대하는 자들은 부끄러워하고 온 무리는 그가 하시는 모든 영광스러운 일을 기뻐하니라(15-17).”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짐승을 위해 물을 긷는 것은 허용했습니다. 안식일에 목마른 짐승들에게 자비를 베푼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에게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18년 동안 사탄에 매여 고통당하던 여인이 고침 받는 것은 용납하지 못합니다. 이에 예수님은 가축을 외양간에서 풀어내어 물을 마시게 하는 것보다 사탄에게 매인 아브라함의 딸을 풀어서 쉬게 하는 것이 더 합당하지 아니하냐고 물으십니다. 그들은 짐승을 도우면서 아브라함의 딸을 돕는 것은 거부합니다. 이 얼마나 왜곡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까? 이들은 다른 사람보다 자기 재산이 더 중요했습니다. 성경해석을 하나님의 편이 아니라 자신의 유익을 중심으로 했습니다. 자기중심적으로 해석하다 보니 이런 왜곡이 생겼습니다. 예수님께서 열여덟해 동안 꼬부라져 있던 여인을 고치시자 평소 자신들의 의로움을 자랑하던 종교지도자들이 수치를 당하고 부끄러워합니다. 반면에 평소 율법대로 살지 못한다고 천대받고 무시 받던 무리들은 예수님이 행하시는 일로 인해서 기뻐하였습니다. 우리는 성경 공부를 통해서 율법을 잘 알게 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잘못된 점들이 무엇인지 눈에 잘 들어옵니다. 그래서 판단과 정죄를 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 공부를 통해서 내가 먼저 회개하기를 힘써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는 일에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또한 어떤 사람일지라도 그의 연약함을 불쌍히 여기고 긍휼을 베푸는 일에 게을러서는 안 됩니다. 우리 가운데 성령의 능력으로 기가 눌린 사람들이 펴지는 역사가 이루어지길 기도합니다. 낙담한 사람들이 용기를 얻고 다시 일어설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이번 학생연합수양회를 통해서 학생들이 큰 힘을 얻었습니다. 하나님과 나라는 주제로 말씀과 소감을 들었습니다. 찬양을 통해서 하나님의 임재를 누렸습니다. 이 세상에서 여러 모양의 두려움에 직면하지만 “나니 두려워하지 말라”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 불가능한 일에 도전하는 믿음의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셋째, 겨자씨와 누룩의 비유(18-21).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무엇으로 비교하셨습니까? 19절을 보십시오. “마치 사람이 자기 채소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자라 나무가 되어 공중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였느니라.”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님을 주와 구주로 영접할 때 그 마음에 이루어집니다. 또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영접할 때 그 사람 마음에서 이루어집니다. 팔레스틴 지역에서 씨앗 중에 가장 작은 씨앗은 겨자씨입니다. 바늘 귀 정도의 크기입니다. 이런 작은 겨자씨를 땅에 뿌리면 몇 주일 만에 3m까지 자라난다고 합니다. 날아가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여 겨자씨를 먹으며 쉼을 얻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 나라는 작게 시작하지만 복음 안에 놀라운 생명력이 있습니다. 복음을 들을 때 죄와 어둠의 권세로 영혼이 죽은 자들이 살아나고 병든 자들이 고침을 받습니다.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고 성장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을 통해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그 복음은 열두 명의 제자들을 통해서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으로 퍼졌습니다. 예수님은 나사렛의 가난한 목수의 아들이었고 12명의 제자들은 대부분 갈릴리 촌부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너무나 작고 보잘 것 없었지만 그 안에 하나님의 생명이 있었기 때문에 30년 후에는 소아시아와 그리스와 로마에까지 복음이 전파되었습니다. 로마 황제들은 기독교를 두려워하기 시작했습니다. AD 64년 네로 황제부터 313년 콘스탄틴 황제가 밀라노칙령을 통해서 기독교를 공인하기까지 기독교를 잔멸하고자 엄청난 박해를 가했습니다. 그때 복음을 영접한 사람들은 로마 제국 안에서 정상적인 삶을 살 수가 없었습니다. 카타콤이란 지하 동굴에 숨어서 살아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음은 계속해서 퍼져나가서 로마 제국을 덮어버렸습니다. 그 이후에도 영국과 미국과 한국까지 퍼졌습니다. 지금은 중국을 덮고 이슬람권인 중동과 힌두교권인 인도까지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지난 번 아시아 지부장 수양회에 참석하여 발견한 것은 하나님 나라가 모슬렘권, 불교권, 힌두권에서도 힘있게 자라고 있음을 보게 되었습니다. UBF 역사는 겨자씨 한 알처럼 작게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전 세계 캠퍼스 영혼들을 섬기는 큰 모임으로 성장했습니다. 이번 학생연합 수양회에서 학생들이 말씀을 전하고 소감을 나누고 찬양하는 모습을 통해서 앞으로 UBF를 통한 복음 역사가 더욱 힘있게 퍼져나갈 비전을 보게 되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 안에는 놀라운 생명력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이를 믿고 힘써 말씀을 배우고 충성된 사람들에게 전할 때 그들이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치며 복음이 전수될 것입니다. 그때 세계 온 캠퍼스를 덮는 구원의 역사가 예수님의 재림 전에 이루어질 것입니다.
21절을 보십시오. “또 이르시되 내가 하나님의 나라를 무엇으로 비교할까 마치 여자가 가루 서 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 하셨더라.” 가루 서 말은 100명이 먹을 수 있는 분량입니다. 이런 많은 양의 밀가루에 누룩을 조금만 넣고 하루 밤을 지내면 전부가 부풀게 됩니다. 이처럼 누룩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전부를 부풀게 하는 내적인 힘이 있습니다. 누룩처럼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을 변화시키고 사회와 나라와 전 세계를 변화시키는 힘이 있습니다. 우리는 한 팀의 일대일 성경공부를 마음을 들여서 하지만 처음에는 별로 달라지는 것이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조금씩 조금씩 변화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변화는 성장한다는 뜻입니다. 아모스 선지자는 사람들의 가장 큰 문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한 영적 기갈이라고 말했습니다(암8:11).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 마음에는 은혜가 생기고 기쁨과 감사가 솟아나기 시작합니다. 메마른 심령에 하나님의 말씀이 심기면 하나님 나라가 자라기 시작합니다. 딱딱한 얼굴이 조금씩 펴지고 얼굴이 밝아지고 미소를 띠게 됩니다. 말씀을 듣고 회개하면 마음이 새롭게 됩니다. 웃음이 생기고 찬송을 흥얼거립니다. 삶에 활기가 생기고 생동감이 넘칩니다. 생각과 말과 행동이 달라지고 습관이 바뀌고 인격이 변화되고 인생이 달라집니다.
한 사람의 변화는 가족의 변화로 이어집니다. 나중에는 친척들이 변화되고 사회와 국가가 변화됩니다. 한국 근대화 과정에서 지대한 영향을 끼쳤던 조만식, 안창호, 김구, 이승만, 서재필, 이동휘, 이동녕 등은 일찍부터 선교사들을 통해서 성경말씀을 배우고 깨우친 사람들입니다. 권서들은 백성들이 글을 깨우치는데 지대한 공헌을 했습니다. 1800년대 말과 1900년대 초에 권서들은 쪽 복음을 들고 온 마을로 돌아다니면서 성경을 읽어주고 팔았습니다. 사람들은 성경에 관심을 갖고 쪽 복음을 사서 읽기 시작했습니다. 한글을 모르는 사람들은 성경을 읽고자 한글을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일이 전국적으로 일어나서 문맹률이 거의 없는 지혜로운 백성들이 되었습니다. 이런 일들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돈과 성공, 육체의 쾌락을 중요하게 여기는 이 시대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계속해서 우리의 삶에 큰 영향력을 끼치고 있습니다. 자기중심적인 시대 속에서 하나님 중심적인 삶을 살게 합니다. 우리가 성경을 배우고 실천하는 일을 할 때 인내와 기다림이 있어야 합니다. 지난 주 영상에서 보았던 것처럼 성공보다 의미에 초점을 두며 살아야 합니다. 유대인들은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에 힘을 썼는데 예수님은 한 사람을 고치는데 힘을 쏟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왜 겨자씨 한 알을 강조하셨을까요? 실제로 씨를 뿌릴 때는 한 움큼씩 잡고 막 뿌려야 합니다. 그러나 한 알의 겨자씨가 자라서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이는 것처럼 예수님을 영접하고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 속에는 놀라운 일들이 일어납니다. 예수님께서 살아서 일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복음역사는 누룩과 같이 소리없이 한 개인을 변화시키고 공동체를 변화시킵니다. 이런 일들은 하나님께서 살아계시기 때문에 이루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야 합니다. 무엇보다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를 통해서 일하시는 주님을 찬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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