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2023년 눅 21강(11:37-12:12) 마땅히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하라
페이지 정보

본문
2023년 누가복음 제 21 강
말씀 | 누가복음 11:37-12:12
요절 | 누가복음 12:5
마땅히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하라
“마땅히 두려워할 자를 내가 너희에게 보이리니 곧 죽인 후에 또한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 있는 그를 두려워하라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를 두려워하라.”
오늘은 설날입니다. 가족 친지들이 함께 모이기 때문에 차례를 지내는 집안에서는 우상숭배를 하지 않고자 하는 신자들이 욕을 먹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사람을 두려워하기보다 마땅히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실 때에 한 바리새인이 자기와 함께 점심 잡수시기를 청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집에 들어가 앉으셨는데 잡수시기 전에 손을 씻지 아니하였습니다. 이를 보고 그 바리새인이 이상하게 여겼습니다. 유대인들이 식사를 하기 전에 손을 씻는 것은 위생적인 문제도 있지만 정결예식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의도적으로 손을 씻지 않으셨습니다. 제사장에게 명령하신 정결예식을 모든 백성에게 요구하는 전통의 문제를 예수님은 심각하게 여기셨습니다. “너희 바리새인은 지금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나 너희 속에는 탐욕과 악독이 가득하도다. 어리석은 자들아 겉을 만드신 이가 속도 만들지 아니하셨느냐? 그러나 그 안에 있는 것으로 구제하라 그리하면 모든 것이 너희에게 깨끗하리라.” 잔과 대접은 반질반질하게 닦아 놓았는데 그들 속에는 탐욕과 악독이 가득한 것을 예수님은 보고 계셨습니다. 사람은 외모를 보지만 하나님은 속을 살피십니다.
사람이 손을 씻지 않아서 더러운 것보다 더 더러운 것은 속에 있는 탐욕과 악독입니다. 탐욕이 왜 더러운 것일까요? 탐욕은 자기 생활에 필요한 것보다 더 갖고자 남의 것을 빼앗는 것입니다. 탐욕을 부림으로 남에게 해를 끼치고 자신도 진정한 만족과 기쁨을 누리지 못합니다.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 1:14,15).” 탐심에 끌려 미혹이 되면 죄를 낳고 그 죄가 사람을 더럽게 합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람들은 돈을 벌고자 하는 생각으로 충만합니다. 주식과 갭투자로 인해서 많은 사람들이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쉽게 얻은 재산은 줄어드나, 조금씩 조금씩 손수 모은 재산은 늘어납니다(잠 13:11). 문제는 사람이 자기 안에 탐심이 있다는 것을 잘 모르거나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했습니다(16:14). 그들은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했지만 과부의 가산을 삼키는 더러운 자들이었습니다(20:47). 그들은 예수님이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말씀하시자 비웃었습니다. 그러니 자기들이 더럽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자기중심적인 생각과 행동이 죄의 뿌리입니다. 이 죄가 사람을 더럽고 추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 속에 있는 탐심으로 인해서 탄식을 했습니다. 우리 속에는 재물에 대한 탐심, 육체에 대한 탐심, 음식에 대한 탐심, 권력에 대한 탐심, 명예에 대한 탐심, 지식에 대한 탐심 등이 있습니다. 탐심은 우상숭배입니다(골 3:5, 엡 5:5).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자기를 깨끗하게 할 수 있을까요? 마음의 욕심이 문제이니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 주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내가 가진 것을 나누어 주기를 힘쓰면 욕심이 자랄 수 없습니다. 아무리 가난한 사람이라도 나누어 줄 것이 있습니다. 내가 많이 가진 상태에서 나누어 주는 것도 귀한 것이지만, 없는 가운데서 나누어 주는 것은 더욱 사람을 감동시킵니다. 또 나누어 주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더 많은 것을 채워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6:38a).” 하나님께서 이 나라를 축복하신 데는 많은 이유가 있지만 나누어 주는 것도 중요한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선교사를 파송하여 복음을 나누어 주고 사랑을 주고 물질로 나누었습니다. 지난 주 아시아 지부장 수양회에 참석하였는데 이반석, 데비 선교사님과 태국의 동역자들은 아브라함과 같이 선교사님들을 풍성히 섬겼습니다. 선교현장에서 고생하시는 선교사님들을 위로하고 쉼을 갖도록 최선을 다해서 섬김으로 참석한 아시아 지부장들이 기쁨을 누리며 교제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태국 UBF를 축복하시고 올해는 센터 구입과 주일 예배가 배가 되는 역사를 이루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다른 사람을 책망하는 일은 사실 살 떨리는 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초대 받은 바리새인의 집에서 거침이 없으셨습니다. 식사 자리에서 충성된 책망은 그 사람을 사랑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입니다. 또한 예수님은 바리새인들과 율법 교사들의 자세를 보고 여섯 가지 화에 대해서 따발총을 쏘듯이 말씀하십니다. 42절을 보십시오. “화 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의 십일조는 드리되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버리는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십일조는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거룩한 생활을 하려면 말만 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을 마음과 성품과 힘을 다해서 사랑하는 사람은 그 증거로 십일조를 드리는 것이 마땅합니다. 물질이 있는 곳에 마음이 있습니다. 레위기는 제사에 대한 규례로서 하나님의 백성이 그의 거룩하심과 같이 거룩하도록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맨 마지막에 십일조에 대한 말씀이 나옵니다. 모든 율법이 십일조로 귀착이 됩니다. 바리새인은 집 뒷마당에서 키우는 채소의 십일조 까지 드렸지만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십일조는 드렸지만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버렸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은 제사가 아니라 공의와 인애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공의와 인애로 다스려지는 곳입니다. 사랑만 있고 공의가 없으면 약육강식의 사회가 됩니다. 여기서 특히 주목해 볼 것은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의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 없음을 지적한 점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 없으면 이웃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알지 못하면서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은 사실 불가능한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공의를 행할 뿐만 아니라 십일조를 통해서 그 사랑을 표현합니다.
예수님은 두 번째 화를 선언하십니다. 43절을 보십시오. “화 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회당의 높은 자리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을 기뻐하는도다. 그들이 회당의 높은 자리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을 기뻐하는 이유는 사람들에게 인정과 존경을 받으려고 애쓰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에게 인정과 존경을 받고자 하는 것은 자연스럽습니다. 하지만 사람의 인정은 참 만족을 주지 못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발견하고 건강한 자존감을 가질 때 사람 앞에서 당당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사람의 인정을 구걸하는 거지가 되기 쉽습니다.
예수님은 세 번째 화를 선언하십니다. ““화 있을진저 너희여 너희는 평토장한 무덤 같아서 그 위를 밟는 사람이 알지 못하느니라(44).” 이 책망은 단도직입적입니다. 평토장한 무덤은 평평해서 그 위를 밟는 사람이 잘 알지 못합니다. 즉 바리새인들은 자신도 모르게 다른 사람들을 부정하게 만드는 자들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을 정결함의 수호자라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들이 그들을 따르게 되면 영적으로 부정함에 이르게 된다고 경고하십니다. 외식하는 그들의 신앙생활은 사람들을 생명의 길로 인도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의 길로 인도하고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의 근본 문제는 영적 무지요 하나님과 자기 욕심을 우상처럼 함께 섬기는 혼합주의 신앙입니다. 우둔해서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자기 자신의 영광과 탐욕을 섬기고 있었습니다. 그 결과로 나타나는 것이 외식입니다. 외식은 가면을 쓴 상태를 가리킵니다. 겉모습과 내면의 모습이 다릅니다. 신앙생활은 하나님 앞에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안고 일어섬을 아시고 가까운 데도 계시고 멀리 외국에 갈지라도 거기에도 계십니다. 환한 곳에도 계시고 깜깜한 곳에도 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행동을 보실 뿐만 아니라 속마음도 아십니다. 우리가 행동하는 동기까지도 살펴 알고 계십니다. 이 하나님을 의식하며 살 때 진실한 사람, 정직한 사람, 충성된 사람이 됩니다.
우리에게는 사람들에게 보이고 싶지 않고 드러내고 싶지 않는 숨은 자아가 있습니다. 내 안에 있는 그 자아의 모습은 상처 받은 모습일 수 있습니다. 두려움에 사로잡힌 모습일 수 있습니다. 외롭고 고독한 모습일 수 있습니다. 때로는 울고 있는 모습일 수 있습니다. 죄로 얼룩져 있는 모습일 수 있습니다. 영적으로 성장하지 못한 성인 아이 같은 모습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런 내면을 치료받지 못하면 미성숙하고 사람과의 관계에서 문제를 일으키게 됩니다. 우리가 건강한 관계를 회복하려면 자기의 상처들, 숨겨진 죄악들을 고백하고 드러내야 합니다. 그때 치료가 이루어집니다. 하나님께서는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받아주십니다. 죄로 얼룩진 마음을 깨끗이 씻어주십니다. 예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크신 사랑 안에서 자라날 때 건강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영적인 거목으로 계속해서 자라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의 잘못된 신앙을 책망하자 한 율법 교사가 발끈하여 말했습니다. “선생님 이렇게 말씀하시니 우리까지 모욕하심이니이다(45).” 예수님은 율법교사에게도 화를 선포하십니다.이 사람은 혹을 떼려고 하다가 도리어 혹을 붙이고 말았습니다. 46절을 보십시오. “화 있을진저 또 너희 율법교사여 지기 어려운 짐을 사람에게 지우고 너희는 한 손가락도 이 짐에 대지 않는도다.” 율법교사들 가운데 바리새인들이 많았습니다. 또한 그들은 율법을 해석하여 바리새인들을 도와주었습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에 대한 예수님의 책망을 자신들에 대한 책망으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그들은 율법에 대한 잘못된 해석으로 자신들도 지키기 힘든 까다로운 규례들을 만들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율법 준수를 강요하면서 자신들은 지키지 않았습니다. 성경 선생들은 가르치는 것으로 자기가 할 일을 다 했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사실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일대일 성경 공부 몇 팀을 하고 나면 마음이 뿌듯해집니다. 그러나 우리는 말로 가르칠 뿐만 아니라 본을 보임으로 가르쳐야 합니다. 내가 실천해 보고 가르치는 성경공부는 힘이 있습니다.
그러나 율법 교사들은 지기 어려운 율법의 짐을 백성들의 어깨에 지우고, 그 짐을 잘 지고 갈 수 있도록 조금도 도와주지 않았습니다. 이로 인해서 율법에 얹어진 세부 규정들로 인해서 백성들은 짓눌리고 죄책감으로 시달렸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그들이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그들이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그들은 말만 하고 행하지 아니하며 또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한다(마23:3,4).”
예수님께서 율법 교사에게 두 번째 화를 선언하십니다. 47-51절을 보십시오. 그들은 선지자들의 무덤을 아름답게 단장을 하였습니다. 겉보기에는 선지자들을 존경해서 그들의 무덤을 단장하지만 선지자 중의 선지자인 예수님을 미워하고 적대시합니다. 나중에는 죽이는데 주동이 되었습니다. 사도행전에는 유대인들이 베드로, 요한, 스데반, 야고보, 바울 등 사도들과 초대 교회 성도들을 쫓아다니면서 박해하고 죽이는데 앞장서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일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기독교인들을 핍박하고, 이슬람교도들은 기독교인들을 죽이는 일까지도 서슴치 않고 자행하고 있습니다. 아프가니스탄, 북한, 예멘, 소말리아, 나이지리아, 인도 등 많은 나라에서 기독교인들이 박해를 받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신앙의 자유가 있지만 기독교인들에 대한 악성댓글이 꾸준히 늘어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현실을 인식하고 사람을 두려워하지 말아야합니다.
예수님은 율법 교사들에게 한 방을 먹이십니다. 52절을 보십시오. “화 있을진저 너희 율법교사여 너희가 지식의 열쇠를 가져가서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고자 하는 자도 막았느니라 하시니라.” 율법 교사들은 율법에 대한 지식의 열쇠를 가지고서 자신들도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않고 백성들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들은 성경을 연구하고 가르침으로 지식의 열쇠를 가진 자들입니다. 그들을 자신을 진리의 교사이며 수호자라고 자부했습니다. 그러나 잘못된 성경해석 때문에 백성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배척하고 대적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들은 교인을 얻어서 배나 더 지옥 자식으로 만들었습니다(마 23:15).
예수님이 그 집에서 나오실 때에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거세게 달려들어 여러 가지 일을 따져 묻고 그 입에서 나오는 말을 책잡고자 하여 노리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충고를 전적으로 거부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자신들의 원수로 여기고 어찌하든지 그의 길을 막고자 하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성령의 역사를 거부하였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율법 교사들이 예수님을 때리면 때릴수록 무리들은 더욱 더 그의 가르침을 받고자 모여들었습니다. 12장 1절을 보십시오. “그 동안에 무리 수만 명이 모여 서로 밟힐 만큼 되었더니 예수께서 먼저 제자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바리새인들의 누룩 곧 외식을 주의하라.” 예수님은 사람들이 그에게 모여들수록 제자들에게 집중하십니다. 수만 명이 예수님 주위로 모여드는 것을 보고 제자들은 자신들이 무엇이나 된 듯이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들이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기를 힘쓰기보다 수많은 사람들 앞에 자기를 드러내고자 한다면 외식에 빠질 수 있습니다. 누룩은 빵을 만들기 위해서 밀가루에 넣는 효소인데 밀가루에 조금만 넣어도 빠르게 전체를 부풀게 합니다. 우리에게 있는 누룩은 무엇일까요? 쉽고 편안하게 신앙생활을 하고자 하는 누룩이 코로나 기간에 많이 퍼진 것을 봅니다. 우리가 자기를 부인하고 모이기를 힘써야 합니다. 누룩은 자신만 부패하게 할 뿐만 아니라 공동체를 부패하게 합니다. 우리가 누룩을 제거하며 영적으로 깨어 신앙생활 하기를 기도합니다.
2,3절을 보십시오.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긴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나니 이러므로 너희가 어두운 데서 말한 모든 것이 광명한 데서 들리고 너희가 골방에서 귀에 대고 말한 것이 지붕 위에서 전파되리라.” 세상에 비밀은 없습니다. 감추고 숨긴 모든 것이 다 드러나고 알려질 것입니다. 사람들은 은밀하게 하면 아무도 알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은밀하게 죄 짓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은 몰라도 자기 자신은 알고 있습니다. 양심이 고소를 합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은 우리의 생각과 행동을 모두 알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늘 하나님을 의식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친구라고 부르십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몸을 죽이고 그 후에는 능히 더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마땅히 두려워할 자를 보이십니다. 곧 죽인 후에 또한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 있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잊어버리지 아니하십니다. 심지어 우리의 머리털까지도 다 세신 바 되었습니다. 그러니 사람을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10절을 보십시오.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받으려니와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사하심을 받지 못하리라.” “성령을 모독하는 것”은 성령에 대한 단순한 일회적인 거부가 아니라 성령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말씀 사역을 일관되게 완고하게 거부하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서 이적을 행하시는 것을 보고 귀신의 역사라고 왜곡하고 폄훼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성령의 능력으로 말씀을 전하시며 회개하도록 도왔지만 바리새인들은 거부했습니다. 이렇게 하면 그들 안에 구원의 역사가 일어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사람들에게 핍박을 받을 때에 무엇으로 대답할까 염려하지 말아야 합니다. 12절을 보십시오. “마땅히 할 말을 성령이 곧 그 때에 너희에게 가르치시리라.” 우리가 세상 권세 자들에게 끌려갔을 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마땅히 할 말을 성령께서 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늘 하나님을 의식하고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살아계시고 우리를 늘 인도하십니다. 우리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그의 뜻을 분별하고 따르는 일에 힘쓰기를 기도합니다.
말씀 | 누가복음 11:37-12:12
요절 | 누가복음 12:5
마땅히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하라
“마땅히 두려워할 자를 내가 너희에게 보이리니 곧 죽인 후에 또한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 있는 그를 두려워하라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를 두려워하라.”
오늘은 설날입니다. 가족 친지들이 함께 모이기 때문에 차례를 지내는 집안에서는 우상숭배를 하지 않고자 하는 신자들이 욕을 먹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사람을 두려워하기보다 마땅히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실 때에 한 바리새인이 자기와 함께 점심 잡수시기를 청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집에 들어가 앉으셨는데 잡수시기 전에 손을 씻지 아니하였습니다. 이를 보고 그 바리새인이 이상하게 여겼습니다. 유대인들이 식사를 하기 전에 손을 씻는 것은 위생적인 문제도 있지만 정결예식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의도적으로 손을 씻지 않으셨습니다. 제사장에게 명령하신 정결예식을 모든 백성에게 요구하는 전통의 문제를 예수님은 심각하게 여기셨습니다. “너희 바리새인은 지금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나 너희 속에는 탐욕과 악독이 가득하도다. 어리석은 자들아 겉을 만드신 이가 속도 만들지 아니하셨느냐? 그러나 그 안에 있는 것으로 구제하라 그리하면 모든 것이 너희에게 깨끗하리라.” 잔과 대접은 반질반질하게 닦아 놓았는데 그들 속에는 탐욕과 악독이 가득한 것을 예수님은 보고 계셨습니다. 사람은 외모를 보지만 하나님은 속을 살피십니다.
사람이 손을 씻지 않아서 더러운 것보다 더 더러운 것은 속에 있는 탐욕과 악독입니다. 탐욕이 왜 더러운 것일까요? 탐욕은 자기 생활에 필요한 것보다 더 갖고자 남의 것을 빼앗는 것입니다. 탐욕을 부림으로 남에게 해를 끼치고 자신도 진정한 만족과 기쁨을 누리지 못합니다.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 1:14,15).” 탐심에 끌려 미혹이 되면 죄를 낳고 그 죄가 사람을 더럽게 합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람들은 돈을 벌고자 하는 생각으로 충만합니다. 주식과 갭투자로 인해서 많은 사람들이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쉽게 얻은 재산은 줄어드나, 조금씩 조금씩 손수 모은 재산은 늘어납니다(잠 13:11). 문제는 사람이 자기 안에 탐심이 있다는 것을 잘 모르거나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했습니다(16:14). 그들은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했지만 과부의 가산을 삼키는 더러운 자들이었습니다(20:47). 그들은 예수님이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말씀하시자 비웃었습니다. 그러니 자기들이 더럽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자기중심적인 생각과 행동이 죄의 뿌리입니다. 이 죄가 사람을 더럽고 추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 속에 있는 탐심으로 인해서 탄식을 했습니다. 우리 속에는 재물에 대한 탐심, 육체에 대한 탐심, 음식에 대한 탐심, 권력에 대한 탐심, 명예에 대한 탐심, 지식에 대한 탐심 등이 있습니다. 탐심은 우상숭배입니다(골 3:5, 엡 5:5).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자기를 깨끗하게 할 수 있을까요? 마음의 욕심이 문제이니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 주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내가 가진 것을 나누어 주기를 힘쓰면 욕심이 자랄 수 없습니다. 아무리 가난한 사람이라도 나누어 줄 것이 있습니다. 내가 많이 가진 상태에서 나누어 주는 것도 귀한 것이지만, 없는 가운데서 나누어 주는 것은 더욱 사람을 감동시킵니다. 또 나누어 주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더 많은 것을 채워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6:38a).” 하나님께서 이 나라를 축복하신 데는 많은 이유가 있지만 나누어 주는 것도 중요한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선교사를 파송하여 복음을 나누어 주고 사랑을 주고 물질로 나누었습니다. 지난 주 아시아 지부장 수양회에 참석하였는데 이반석, 데비 선교사님과 태국의 동역자들은 아브라함과 같이 선교사님들을 풍성히 섬겼습니다. 선교현장에서 고생하시는 선교사님들을 위로하고 쉼을 갖도록 최선을 다해서 섬김으로 참석한 아시아 지부장들이 기쁨을 누리며 교제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태국 UBF를 축복하시고 올해는 센터 구입과 주일 예배가 배가 되는 역사를 이루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다른 사람을 책망하는 일은 사실 살 떨리는 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초대 받은 바리새인의 집에서 거침이 없으셨습니다. 식사 자리에서 충성된 책망은 그 사람을 사랑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입니다. 또한 예수님은 바리새인들과 율법 교사들의 자세를 보고 여섯 가지 화에 대해서 따발총을 쏘듯이 말씀하십니다. 42절을 보십시오. “화 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의 십일조는 드리되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버리는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십일조는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거룩한 생활을 하려면 말만 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을 마음과 성품과 힘을 다해서 사랑하는 사람은 그 증거로 십일조를 드리는 것이 마땅합니다. 물질이 있는 곳에 마음이 있습니다. 레위기는 제사에 대한 규례로서 하나님의 백성이 그의 거룩하심과 같이 거룩하도록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맨 마지막에 십일조에 대한 말씀이 나옵니다. 모든 율법이 십일조로 귀착이 됩니다. 바리새인은 집 뒷마당에서 키우는 채소의 십일조 까지 드렸지만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십일조는 드렸지만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버렸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은 제사가 아니라 공의와 인애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공의와 인애로 다스려지는 곳입니다. 사랑만 있고 공의가 없으면 약육강식의 사회가 됩니다. 여기서 특히 주목해 볼 것은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의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 없음을 지적한 점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 없으면 이웃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알지 못하면서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은 사실 불가능한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공의를 행할 뿐만 아니라 십일조를 통해서 그 사랑을 표현합니다.
예수님은 두 번째 화를 선언하십니다. 43절을 보십시오. “화 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회당의 높은 자리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을 기뻐하는도다. 그들이 회당의 높은 자리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을 기뻐하는 이유는 사람들에게 인정과 존경을 받으려고 애쓰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에게 인정과 존경을 받고자 하는 것은 자연스럽습니다. 하지만 사람의 인정은 참 만족을 주지 못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발견하고 건강한 자존감을 가질 때 사람 앞에서 당당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사람의 인정을 구걸하는 거지가 되기 쉽습니다.
예수님은 세 번째 화를 선언하십니다. ““화 있을진저 너희여 너희는 평토장한 무덤 같아서 그 위를 밟는 사람이 알지 못하느니라(44).” 이 책망은 단도직입적입니다. 평토장한 무덤은 평평해서 그 위를 밟는 사람이 잘 알지 못합니다. 즉 바리새인들은 자신도 모르게 다른 사람들을 부정하게 만드는 자들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을 정결함의 수호자라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들이 그들을 따르게 되면 영적으로 부정함에 이르게 된다고 경고하십니다. 외식하는 그들의 신앙생활은 사람들을 생명의 길로 인도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의 길로 인도하고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의 근본 문제는 영적 무지요 하나님과 자기 욕심을 우상처럼 함께 섬기는 혼합주의 신앙입니다. 우둔해서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자기 자신의 영광과 탐욕을 섬기고 있었습니다. 그 결과로 나타나는 것이 외식입니다. 외식은 가면을 쓴 상태를 가리킵니다. 겉모습과 내면의 모습이 다릅니다. 신앙생활은 하나님 앞에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안고 일어섬을 아시고 가까운 데도 계시고 멀리 외국에 갈지라도 거기에도 계십니다. 환한 곳에도 계시고 깜깜한 곳에도 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행동을 보실 뿐만 아니라 속마음도 아십니다. 우리가 행동하는 동기까지도 살펴 알고 계십니다. 이 하나님을 의식하며 살 때 진실한 사람, 정직한 사람, 충성된 사람이 됩니다.
우리에게는 사람들에게 보이고 싶지 않고 드러내고 싶지 않는 숨은 자아가 있습니다. 내 안에 있는 그 자아의 모습은 상처 받은 모습일 수 있습니다. 두려움에 사로잡힌 모습일 수 있습니다. 외롭고 고독한 모습일 수 있습니다. 때로는 울고 있는 모습일 수 있습니다. 죄로 얼룩져 있는 모습일 수 있습니다. 영적으로 성장하지 못한 성인 아이 같은 모습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런 내면을 치료받지 못하면 미성숙하고 사람과의 관계에서 문제를 일으키게 됩니다. 우리가 건강한 관계를 회복하려면 자기의 상처들, 숨겨진 죄악들을 고백하고 드러내야 합니다. 그때 치료가 이루어집니다. 하나님께서는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받아주십니다. 죄로 얼룩진 마음을 깨끗이 씻어주십니다. 예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크신 사랑 안에서 자라날 때 건강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영적인 거목으로 계속해서 자라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의 잘못된 신앙을 책망하자 한 율법 교사가 발끈하여 말했습니다. “선생님 이렇게 말씀하시니 우리까지 모욕하심이니이다(45).” 예수님은 율법교사에게도 화를 선포하십니다.이 사람은 혹을 떼려고 하다가 도리어 혹을 붙이고 말았습니다. 46절을 보십시오. “화 있을진저 또 너희 율법교사여 지기 어려운 짐을 사람에게 지우고 너희는 한 손가락도 이 짐에 대지 않는도다.” 율법교사들 가운데 바리새인들이 많았습니다. 또한 그들은 율법을 해석하여 바리새인들을 도와주었습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에 대한 예수님의 책망을 자신들에 대한 책망으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그들은 율법에 대한 잘못된 해석으로 자신들도 지키기 힘든 까다로운 규례들을 만들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율법 준수를 강요하면서 자신들은 지키지 않았습니다. 성경 선생들은 가르치는 것으로 자기가 할 일을 다 했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사실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일대일 성경 공부 몇 팀을 하고 나면 마음이 뿌듯해집니다. 그러나 우리는 말로 가르칠 뿐만 아니라 본을 보임으로 가르쳐야 합니다. 내가 실천해 보고 가르치는 성경공부는 힘이 있습니다.
그러나 율법 교사들은 지기 어려운 율법의 짐을 백성들의 어깨에 지우고, 그 짐을 잘 지고 갈 수 있도록 조금도 도와주지 않았습니다. 이로 인해서 율법에 얹어진 세부 규정들로 인해서 백성들은 짓눌리고 죄책감으로 시달렸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그들이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그들이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그들은 말만 하고 행하지 아니하며 또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한다(마23:3,4).”
예수님께서 율법 교사에게 두 번째 화를 선언하십니다. 47-51절을 보십시오. 그들은 선지자들의 무덤을 아름답게 단장을 하였습니다. 겉보기에는 선지자들을 존경해서 그들의 무덤을 단장하지만 선지자 중의 선지자인 예수님을 미워하고 적대시합니다. 나중에는 죽이는데 주동이 되었습니다. 사도행전에는 유대인들이 베드로, 요한, 스데반, 야고보, 바울 등 사도들과 초대 교회 성도들을 쫓아다니면서 박해하고 죽이는데 앞장서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일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기독교인들을 핍박하고, 이슬람교도들은 기독교인들을 죽이는 일까지도 서슴치 않고 자행하고 있습니다. 아프가니스탄, 북한, 예멘, 소말리아, 나이지리아, 인도 등 많은 나라에서 기독교인들이 박해를 받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신앙의 자유가 있지만 기독교인들에 대한 악성댓글이 꾸준히 늘어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현실을 인식하고 사람을 두려워하지 말아야합니다.
예수님은 율법 교사들에게 한 방을 먹이십니다. 52절을 보십시오. “화 있을진저 너희 율법교사여 너희가 지식의 열쇠를 가져가서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고자 하는 자도 막았느니라 하시니라.” 율법 교사들은 율법에 대한 지식의 열쇠를 가지고서 자신들도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않고 백성들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들은 성경을 연구하고 가르침으로 지식의 열쇠를 가진 자들입니다. 그들을 자신을 진리의 교사이며 수호자라고 자부했습니다. 그러나 잘못된 성경해석 때문에 백성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배척하고 대적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들은 교인을 얻어서 배나 더 지옥 자식으로 만들었습니다(마 23:15).
예수님이 그 집에서 나오실 때에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거세게 달려들어 여러 가지 일을 따져 묻고 그 입에서 나오는 말을 책잡고자 하여 노리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충고를 전적으로 거부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자신들의 원수로 여기고 어찌하든지 그의 길을 막고자 하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성령의 역사를 거부하였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율법 교사들이 예수님을 때리면 때릴수록 무리들은 더욱 더 그의 가르침을 받고자 모여들었습니다. 12장 1절을 보십시오. “그 동안에 무리 수만 명이 모여 서로 밟힐 만큼 되었더니 예수께서 먼저 제자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바리새인들의 누룩 곧 외식을 주의하라.” 예수님은 사람들이 그에게 모여들수록 제자들에게 집중하십니다. 수만 명이 예수님 주위로 모여드는 것을 보고 제자들은 자신들이 무엇이나 된 듯이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들이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기를 힘쓰기보다 수많은 사람들 앞에 자기를 드러내고자 한다면 외식에 빠질 수 있습니다. 누룩은 빵을 만들기 위해서 밀가루에 넣는 효소인데 밀가루에 조금만 넣어도 빠르게 전체를 부풀게 합니다. 우리에게 있는 누룩은 무엇일까요? 쉽고 편안하게 신앙생활을 하고자 하는 누룩이 코로나 기간에 많이 퍼진 것을 봅니다. 우리가 자기를 부인하고 모이기를 힘써야 합니다. 누룩은 자신만 부패하게 할 뿐만 아니라 공동체를 부패하게 합니다. 우리가 누룩을 제거하며 영적으로 깨어 신앙생활 하기를 기도합니다.
2,3절을 보십시오.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긴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나니 이러므로 너희가 어두운 데서 말한 모든 것이 광명한 데서 들리고 너희가 골방에서 귀에 대고 말한 것이 지붕 위에서 전파되리라.” 세상에 비밀은 없습니다. 감추고 숨긴 모든 것이 다 드러나고 알려질 것입니다. 사람들은 은밀하게 하면 아무도 알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은밀하게 죄 짓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은 몰라도 자기 자신은 알고 있습니다. 양심이 고소를 합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은 우리의 생각과 행동을 모두 알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늘 하나님을 의식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친구라고 부르십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몸을 죽이고 그 후에는 능히 더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마땅히 두려워할 자를 보이십니다. 곧 죽인 후에 또한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 있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잊어버리지 아니하십니다. 심지어 우리의 머리털까지도 다 세신 바 되었습니다. 그러니 사람을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10절을 보십시오.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받으려니와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사하심을 받지 못하리라.” “성령을 모독하는 것”은 성령에 대한 단순한 일회적인 거부가 아니라 성령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말씀 사역을 일관되게 완고하게 거부하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서 이적을 행하시는 것을 보고 귀신의 역사라고 왜곡하고 폄훼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성령의 능력으로 말씀을 전하시며 회개하도록 도왔지만 바리새인들은 거부했습니다. 이렇게 하면 그들 안에 구원의 역사가 일어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사람들에게 핍박을 받을 때에 무엇으로 대답할까 염려하지 말아야 합니다. 12절을 보십시오. “마땅히 할 말을 성령이 곧 그 때에 너희에게 가르치시리라.” 우리가 세상 권세 자들에게 끌려갔을 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마땅히 할 말을 성령께서 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늘 하나님을 의식하고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살아계시고 우리를 늘 인도하십니다. 우리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그의 뜻을 분별하고 따르는 일에 힘쓰기를 기도합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