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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2023년 신년2강(행 2:42-47)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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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엘리야
댓글 0건 조회 75회 작성일 23-01-08 15:37

본문

2023년 신년 제 2 강
말씀 | 사도행전 2:42-47
요절 | 사도행전 2:42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

  우리는 새해를 맞이하여 새 일을 행하실 하나님을 바라보고 기대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가운데서 일하고 계시고 구속 역사를 줄기차게 이어가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구원역사를 이루어 가시지만 구원하시는 방법은 달라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루살렘 교회를 통해서 어떻게 일하셨는지를 배우고자 합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예수님께서 세우고자 하셨던 공동체의 좋은 모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야고보, 요한 세 제자를 중심으로 열 두 제자들이 자신의 성품과 사역을 본받도록 가르치셨습니다. 그가 승천하신 이후에는 사도들을 중심으로 교회가 개척되었습니다. 서신서에 가면 교회가 공동체를 통한 제자양성이 이루어집니다. 우리는 지금 서신서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믿는 자의 마음에 살아계시며 일하고 계십니다. 신자 한 사람, 한 사람이 작은 그리스도입니다. 우리는 공동체 안에서 형제자매 속에 계신 그리스도를 보면서 예수님의 성품과 사역을 닮아갑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서로를 사랑하며 배우는 가운데 예수님의 제자로 성장해 갑니다. 우리는 서로를 스승으로 삼고 배워야 합니다. 그러면 예루살렘 교회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첫째, 그들은 사도의 가르침을 받는 일에 몰두했습니다. 42절을 영어로 보면 “They devoted themselves to the apostles’ teaching”라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에 40일 동안 사도들에게 율법과 예언서에 기록된 하나님 나라의 일을 가르치셨습니다. 이 가르침을 통해서 제자들은 그렇게 듣기 싫었던 주님의 고난과 죽음,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는 이유가 무엇인지 명확히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하고 나서 그가 왜 십자가에 죽으셨는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의 죄를 속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는 죄없는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서 우리를 대속하기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오순절에 진리의 성령이 강림하시자 제자들은 감겼던 영적인 눈이 떠지고 닫혔던 귀가 열리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을 때에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서 진리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마음에 생명이 충만하고 하나님의 임재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말씀을 받게 되자 거듭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영적인 눈이 떠지자 사람을 보는 눈이 달라졌습니다. 그들이 말씀을 듣고 깨닫자 찔림을 받고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죄사함을 받자 마음이 가벼워지고 기쁨이 충만해졌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너무나 사랑스럽고 그들 속에 있는 장점이 보이고 살려주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사랑으로 서로의 단점은 감당해주게 되었습니다. 사도의 가르침으로 인해서 그들의 실제 삶이 변화하기 시작했습니다. 죄를 회개하고 거룩한 삶을 사모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영접하자 미워하던 사람을 용서하고 사랑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껄끄러웠던 인간관계가 사라지고 서로 화해하고 하나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누가복음을 공부하면서 예수님과 바리새인들의 성경에 대한 자세에 차이가 있음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율법 교사가 예수님을 시험하여 질문을 했습니다.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눅 10:25)” 예수님은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고 되물으셨습니다(눅 10:26). 바리새인들은 지식적인 성경공부를 했습니다. 예수님을 시험하고 자기의 지식을 자랑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실천적인 공부를 하도록 율법 교사를 도우셨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을 행하라 그리하면 살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 묻는 그에게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말씀해 주시면서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고 권면하셨습니다. 우리가 새해에는 좀 더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고 가르치는 일에 몰두하며 깨달은 말씀대로 살고자 힘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둘째, 서로 교제하였습니다. 교제는 서로 사귀어 가까이 지내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려면 다른 사람에 대한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할 것 없이 다 사랑받고 싶고 인정받고 싶어 합니다. 남에게 사랑받고 싶고 인정받고 싶으면 내가 먼저 상대방을 인정해 주고 사랑해주면 됩니다. 그러면 서로 행복해집니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에 만족하면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힘이 생깁니다. 형제들은 특히 자매님들의 인정에 목말라 하고 자매님들은 형제님들의 사랑에 목말라 합니다. 그런데 사마리아 여인과 같이 사람의 인정과 사랑을 받으면 그때뿐 목마름은 해결되지 않고 더 목마르게 됩니다. 이 목마름은 생수의 근원되신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할 때 해결됩니다. 이사무엘선교사님의 전기에 보면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많은 남편들이 아내로부터 사랑과 인정받기를 원합니다. 아내가 자기를 인정해 줄 때는 사는 재미가 있지만 아내가 인정해 주지 않을 때는 힘들어집니다. 저도 이 문제를 가지고 고민했습니다. 저는 어머니를 일찍 잃었기 때문에 어머니의 사랑을 받고 싶어 25년간 울었습니다. 결혼 후 아내에게서 어머니의 사랑을 얻고자 했으나 원하는 사랑을 받지 못해 슬퍼하며 밤거리를 헤맨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영적 투쟁을 통해서 마침내 예수님의 사랑을 어머니의 사랑으로 영접하고 그 사랑에 만족하리라는 믿음의 결단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아내를 딸같이 사랑하고자 결단했을 때 성령이 내 마음 가운데 역사하셨습니다. 그 이후로 저는 사람으로부터 사랑을 구걸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가정에서 남편은 아내에게 사랑과 인정을 구걸하지 않고 아버지와 같은 역할을 해야 합니다. 내가 가정에서 아내를 아버지와 같이 대하자 가정에 화평과 사랑이 넘치게 되었습니다. 저는 아내 앞에서 꼼짝 못하는 UBF의 제 1호 애처가요 공처가로 알려지게 되었습니다(이사무엘선교사전기 인물편 p480, 481).”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이웃을 사랑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서로 교제하는 일에도 힘을 써야 합니다. 가만히 있으면 누가 알아서 나를 인정해주고 사랑해 주는 것이 아닙니다. 안요셉 선교사님은 학생 시절에 껌을 나누어 줌으로 사람들과 교제하는 물꼬를 텄다고 합니다. 사람을 만날 때 내가 먼저 다가가서 인사하면 성공적인 관계가 시작됩니다. 요회 모임에서 내가 먼저 마음을 열고  받은 죄사함의 은혜를 나눌 때 서로 깊이 교제하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6:2에서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고 권면했습니다. 서로 짐을 져주는 것은 서로의 연약함을 담당하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서로 사랑하는 행위입니다. 신앙생활은 혼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 공동체에 속하여 서로 교제하고 가진 것을 나누면서 함께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도 간에 교제를 나눌 때 자기만 아는 세상에서 외롭지 않고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환난이 많은 세상에서 우리에게는 안정된 짝이 필요합니다. 독일 히틀러의 나치 정권에서 자행된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끝까지 살아남은 사람들의 특징은 안정된 짝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삼겹줄은 쉽게 끊어지지 않습니다. 공동체 속에서 교제가 깊이 이루어지면 내면의 상처들이 치료가 됩니다. 오늘날 모임에서 중요한 것이 3F라고 합니다. 즉 Food(음식), Fun(재미), Fellowship(교제)입니다. 우리가 함께 MT도 가고 영화도 보고 보드 게임도 같이 하고 탁구도 치면서 교제를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말씀을 받고 주님 안에서 즐거움을 누리며 교제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셋째, 음식을 함께 먹었습니다. “떡을 떼며” 이는 식탁교제입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집집마다 돌아가면서 집에서 함께 식사를 하고 떡을 떼었습니다. 본래 유대인들은 이방인들과 식사를 하지 않았습니다. 주인과 노예도 함께 식사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초대교회는 남녀 차별없이, 유대인과 이방인의 차별없이, 주인과 노예가 함께 밥을 먹었습니다. 함께 밥을 먹으면 입만 열리는 것이 아니라 마음도 열립니다. 관계가 부드러워집니다. ‘떡을 떼’는 것은 식사 외에도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성찬식을 말합니다. 그들은 모일 때에 식사를 하고 식사 후에 성찬식을 하였습니다. 성찬식을 하였다는 것은 예배를 드렸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밥을 먹고 국을 먹기 때문에 애찬식과 성찬식을 동시에 하기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주식이 빵이었기 때문에 식사와 성찬식을 함께 진행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함께 식사하는 것에 성찬의 의미를 부여할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24장의 70%가 예수님이 함께 식사를 하시면서 말씀을 가르치신 내용입니다. 「예수님이 차려주신 밥상」의 저자는 누가복음을 예수님이 사람들과 함께 식사하심으로 복음을 전하며 제자를 양성하신 것으로 풀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불평하면서 말했습니다. “어찌하여 당신들은 세리들과 죄인들과 어울려서 먹고 마시는 거요?” 엠마오로 낙향하던 두 제자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본 것은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떡을 떼어 주실 때였습니다(누가복음 24:30,31). 부활하신 후 예수님은 갈릴리 해변에서 친히 빵을 굽고 고기를 구워서 제자들에게 아침식사를 대접하셨습니다. 이때 제자들이 예수님의 사랑을 맛보고 깨어진 관계성을 회복하였습니다. 잘 차려진 한 끼의 밥상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합니다. 

넷째, 오로지 기도에 힘쓰니라. 예루살렘에서 제자들은 예수님 승천 이후에 십일 동안 마가의 다락방에서 전심하여 기도하였고 성령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 이후에도 예루살렘 교회는 기도하는 일에 힘을 썼습니다. 복음 역사를 섬기면서 기도에 힘을 쓸 수밖에 없는 이유는 나의 한계를 절감하기 때문입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지혜를 주시고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시고 친히 역사하심을 경험합니다. 기도할 때 마음에 평강과 담대함을 덧입게 됩니다. 오늘날 시대가 어려울수록 기도에 힘써야 하는데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눅 18:8b)”고 안타까워하셨습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오로지 기도에 힘을 썼습니다. 기도하는 일에 헌신하였습니다. 사도들도 말씀과 기도하는 일에 전무하였습니다. 기도에 헌신하는 사람들이 하나님 보시기에 매우 귀합니다. 코로나 이후에 가정예배를 드리는 가정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서 부부사이에, 부모와 자녀 사이에 소통이 원활해지고, 자녀들을 제자로 키우는 역사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우리가 가족기도모임을 통해서 기도에 힘쓰고 건강한 가정교회를 세워나가길 기도합니다.

우리가 어려울수록 기본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운동도 실력이 늘지 않으면 재미가 없습니다. 실력이 늘려면 기본기를 닦아야 합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생활이 어려울수록 성경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예루살렘교회와 같이 사도의 가르침에 몰두하며, 서로 사귀는 일과 함께 식사를 하며 기도하는 일에 힘쓰는 것입니다. 그때 신앙생활에 만족과 기쁨이 있습니다. 저는 매주 요회 식사를 준비하고 섬기면서 섬기는 기쁨을 새롭게 맛보게 되었습니다. 딸과 함께 장도 보고, 아내의 도움을 받아 요리를 준비하니 아내의 고통도 이해하게 되고 자녀에게 섬기는 본을 보여주고 실제적인 훈련도 됩니다. 아내가 지난 30년 동안 저에게 최소한 3만끼를 섬겼다고 생각하니 너무나 감사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식사를 준비하고 섬기는 사모님들의 고충을 깊이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이들의 사랑의 수고가 얼마나 컸는가를 깨닫고 감사를 드립니다. 특히 올해 누가복음에 이어 사도행전 공부를 함으로 신약교회를 깊이 배울 수 있어서 기대가 됩니다. 우리가 이런 사역에 힘을 쓸 때에 각 요회에서 각 사람이 예수님을 닮아가고, 모임에 즐거움과 기쁨을 주십니다. 
사도들로 말미암아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났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능력을 보고 두려워하였습니다. 이는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귀신이 떠나가고, 질병이 치유되고, 초자연적인 일들이 말씀을 통해서 일어날 때 나타납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놀라운 일들을 이루십니다. 지난 해 성탄연합예배 후에 목자님들과 대화를 나누는 가운데 참으로 하나님께서 행하신 놀라운 일들이 많이 일어났음을 듣게 되었습니다. 난방을 성탄 예배 삼일 전에 신청을 해야 하는데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날 아침에 연대 교수님을 백요셉 목자님이 만남으로 난방이 바로 시작되었습니다. 연극 연출을 맡았던 조웨슬레 목자님은 처음에 모인 인원을 보고 연극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에게 까마귀를 통해서 먹을 것을 갖다 주듯이 어려운 일들을 하나하나 해결해주심으로 은혜와 감동이 풍성한 연극을 올리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기도의 응답을 받은 것을 매주 요회모임에서 나눌 때에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깨닫고 기도에 더욱 힘을 쓰게 됩니다.

  이렇게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이 깊어지고 성도 간에 교제가 이루어지고 기도에 힘을 쓰게 되자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표적과 기사가 많이 나타났습니다. 또한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사도들의 가르침과, 나타나는 표적과 기사를 통해 그들의 물질에 대한 가치관이 달라졌습니다. 생명이 소유의 넉넉한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 있는 것을 팔아 가난한 이웃을 돌보고 나누는 데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이로 인해 그들의 삶의 중심이 자기 자신의 유익과 기쁨에서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역사로 옮겨졌습니다. 그 믿음이 이론으로 머물지 않고 삶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런데 이 같은 일이 예루살렘교회에만 일회성으로만 나타난 사건일까요? 물론 공동소유는 일시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을 통해 개척된 빌립보 교회나 고린도 교회가 사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고, 전도자들을 물심양면으로 지원하며, 또 큰 기근으로 고통받는 예루살렘 교회에 구제헌금을 보내는 역사가 있었습니다. 성령께서 함께하시는 교회 공동체에서는 어디서나 이런 일이 일어납니다. 지금 우리 모임 안에서도 실제로 일어나고 있습니다. 코로나 팬데믹과 우크라이나 – 러시아 전쟁으로 인해 영육간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선교사님과 현지목자들을 돕고 지원하는 역사가 코로나 기간에 왕성하게 일어났습니다. 이를 통해 선교사님들이 적지 않은 위로를 받고 계속해서 선교역사를 감당할 힘을 얻었다고 보고하였습니다. 상황이 여의치 않는 가운데서도 우리 모임 안에 여전히 초대교회와 같은 따뜻한 사랑이 있고, 돌봄의 마음이 있고, 헌신이 있고, 섬김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받는 자보다 주는 자가 복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는 생활을 할 때 하나님께서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채우시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46,47절을 보십시오.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에게는 기쁨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썼습니다. 장작불은 모아놓으면 활활 타오릅니다. 그러나 흩어 놓으면 금방 힘을 잃고 불씨가 꺼져버립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말씀합니다.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히 10:25).” 모이기를 힘쓰는 행위 자체가 신앙생활입니다. 우리가 모이기를 힘쓰는 것은 말세에 믿음을 지키는 길입니다. 모이기를 힘쓰는 것이 자신에게 유익합니다. 우리는 모일 때 힘을 얻습니다. 모일 때 서로의 사정을 알게 되고 많은 아이디어가 떠오르고 할 일을 발견하게 됩니다. 모일 때 각자의 은사가 발휘되고 성장하게 됩니다. 코로나로 인해서 흩어지면 살고 모이면 죽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코로나가 끝나가고 있습니다. 이제는 “흩어지면 죽고 모이면 산다”는 말이 더 적절합니다. 사실 코로나 기간에도 온라인으로 모이고, 소그룹으로 모인 교회는 큰 타격이 없었습니다. 도리어 이 기간에 성장을 이루었습니다. 우리가 주일 예배와 겨울 방학 기간에도 전국 연합학생수양회에 모이기를 힘써야겠습니다. 또한 요회모임, 가족모임에 힘쓰는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섬기기를 기도합니다. 혼자 사는 가구가 많아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집에서, 센터에서 함께 모여 식사를 하며 서로 사귀고 기도에 힘을 씁시다.
 
  예루살렘 교회 신자들의 생활을 보고 믿지 않는 사람들이 두려워하며 감탄하였습니다. 당시 신자들은 외부로부터 좋은 평판을 받았습니다. 세상에 소금과 빛의 역할을 하였습니다. 신자들에 대한 좋은 소문은 어떤 결과를 낳았습니까?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교회가 사도의 가르침에 몰두하고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고 오로지 기도에 힘쓸 때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교회가 성장하기를 원하십니다. 한 사람이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오면 하늘에서는 잔치가 벌어집니다. 새해에는 우리도 이런 기쁨을 자주 누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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