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2022성탄2(눅2:1-14)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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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성탄 연합예배
말씀 | 누가복음 2:1-14
요절 | 누가복음 2:11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즐거운 성탄절입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은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입니다. “너희”를 대신에 “자기 이름”을 넣고 읽어보겠습니다. “엘리야”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여러분에게 정말 구주가 필요하십니까? 주님이 도우시고 이 메시지를 통해서 우리 각자에게 말씀해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누가복음의 저자 누가는 역사가요, 의사였습니다. 그는 의사로서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에 대해서 많은 의문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당시에 여인과 가까이서 대화를 할 수 있는 사람은 의사뿐이었습니다. 누가는 마리아가 아플 때 진료를 하면서 예수님의 탄생에 대해 궁금한 것들을 묻고 듣고 하면서 중요한 정보를 자세히 들을 수 있었습니다. 마리아는 천사들과 목자들에게 전해 들은 이야기를 마음에 간직하고 있다가 누가에게 자세히 들려주었습니다. 그래서 누가복음이 예수님의 탄생에 대해서 가장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죄에 빠진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 많은 선지자들을 보내사 말씀하시고 여러 가지 이적들을 보이셨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무관심과 반역하는 마음과 이기심으로 인해서 별로 효과가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최종적으로 하나님이 사람이 되셔서 오심으로 구원역사를 성취하십니다. 성부 하나님은 성자 예수님을 연약한 한 아기로 이 땅에 태어나게 하시고 마구간 구유에 누이셨습니다. 가장 영광스러우신 분이 비천한 곳에 인류의 구원자로 오셨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입니다. 이 시간 그 이유를 생각해 보고 우리도 함께 기뻐하고자 합니다.
첫째, 구약의 예언을 성취하러 오신 예수님.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 할 때였습니다. 로마에 의한 평화가 지배할 때였지만 가난한 백성들에게는 그림의 떡이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호적하러 각각 고향으로 돌아가는데 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이므로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를 향하여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 그 약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하러 올라갔습니다. 마리아는 이미 잉태하였습니다. 예수님이 탄생하기 700년 전에 이사야 선지자와 동시대에 살았던 미가 선지자는 이렇게 예언했습니다.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미가 5:2).” 하나님께서는 역사의 주관자이십니다. 그는 가이사 아구스도의 호적 명령을 사용하여 미가 선지자의 예언을 성취하셨습니다. 고레스 왕을 통해서 이스라엘을 바벨론 포로에서 해방시키신 하나님은 가이사 아구스도의 호적 명령를 통해서 요셉과 마리아를 베들레헴으로 가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역사의 주관자이십니다. 지금도 그는 세상 왕들을 통해서 자신의 목적하신 바를 이루어 가십니다.
요셉과 마리아가 베들레헴에 도착하여 있을 그 때에 해산할 날이 차서 첫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습니다. 이는 여관에 있을 곳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갈릴리 나사렛에서 베들레헴까지 145Km의 거리를 일주일 동안 만삭의 몸으로 여행을 하는 것이 매우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안전하게 나사렛에서 아이를 낳고 싶었지만 가이사의 명령과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서 힘든 여행을 했습니다. 그 힘든 여행이 결국 선지자의 예언을 이루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세상 많은 일들을 통해서 우리에게 두신 그의 뜻을 성취해 가십니다(롬8:28). 우리는 때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고난과 환난을 만나지만 돌이켜보면 그것이 나를 부르시고 쓰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였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는 거의 3년 동안 코로나로 인해서 연합모임을 하지 못했고 또 외롭고 힘든 세월을 보냈습니다. 이번에 동교, 화랑, 신촌, 항공, 정릉 다섯 개 센터가 연합하여 성탄예배를 드리게 된 것도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섯 개 센터의 형제자매들이 연합하여 성탄을 준비하면서 하나님을 섬기는 기쁨을 누렸습니다. 또한 연합예배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새롭게 만나 주시고 구원의 감격을 회복하며 주의 일꾼으로 써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둘째, 말 구유에 누이신 아기 예수님. 마리아는 첫 아들을 낳아 어디에 뉘었습니까? 요셉과 마리아는 첫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습니다. 여행길에 당황한 요셉은 이리저리 뛰면서 방을 구했을 것입니다. 여관은 오늘날 민박과 같이 일반 가정이 자기 집을 찾는 사람을 영접하고 묵게 하는 장소입니다. 그런데 당시에는 호적을 하러 온 사람이 너무 많아서 방을 구할 수가 없었습니다. 방들은 이미 지위가 있는 사람들이나 돈 좀 있는 사람들이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가난했던 요셉과 마리아는 어쩔 수 없이 마구간에 가서 아이를 낳아 구유에 뉘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랑하는 아이를 구유에 뉘여야 하는 마리아의 마음은 아프고 슬펐을 것입니다. 천지만물의 주인이신 하나님은 자기의 아들을 얼마든지 화려하고 따뜻한 곳에 누일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의 아들이 이렇게 낮아져야 했을까요? 인간의 운명과 고난에 참여하고자 하심입니다. 아기 예수님은 자기를 비우고 가장 비천한 자리로 낮아지셨습니다. 예수님은 구유에 아기로 오셨고 자라서 목수로 사셨습니다. 공생애 기간 중에는 제자들을 섬기는 삶을 사셨습니다.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낮아져야 한다고 말씀하시며 종의 도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결국 그는 십자가에서 비난의 표적이 되셨습니다. 온갖 조롱과 모욕과 수치를 당하심으로 내가 당해야 할 저주를 대신 지셨습니다. 이를 통해 나의 죄를 깨끗하게 하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받아들여지게 하십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언약을 받고 하나님께 나아가 내가 누구입니까? 묻습니다. 그리고 나서 나는 사람이 아니요 벌레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벌레도 사실 황송한 말입니다. 우리는 먼지로부터 온 존재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티끌만도 못한 죄인들을 재창조하시어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게 하시고 새 피조물이 되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에 감사하며 섬기는 것이 마땅합니다. 무익한 종의 자세를 갖고 섬기는 것은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일입니다. 우리가 무시를 받을 때, 구유에 누이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생각하면 자기 발견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회개하고 마음이 치유가 됩니다. 우리는 무시를 받으면서 겸손하신 예수님을 닮아갑니다.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동네는 베들레헴입니다. 베들레헴은 “떡집”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떡집에서 구유에 누이셨습니다. 구유는 말 밥통입니다. 구유에 누이신 아기 예수님은 생명의 떡으로 자신을 우리에게 주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기 전에 제자들과 유월절 만찬을 드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또 빵을 들어서 감사를 드리신 다음에, 떼어서 그들에게 주시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c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다. d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억하여라."(눅 22:19) 오병이어 사건 이후에 사도 요한은 그 의미를 깨닫고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모세가 너희에게 하늘로부터 떡을 준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너희에게 하늘로부터 참 떡을 주시나니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 그들이 이르되 주여 이 떡을 항상 우리에게 주소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요 6:32-35).” 이 시간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믿고 영접함으로 생명의 떡을 취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배부름을 얻을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됩니다. 참된 만족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가이사의 통치 아래 사는 백성들은 먹고살기에 힘들고 지쳐서 산모에게 방 한 칸 내어줄 마음의 여유가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마리아가 산통으로 울부짖을 때 귀를 틀어막고 못들은 체 했습니다. 그러나 마구간의 짐승들은 그들을 환영했습니다. 짐승들은 거절하는 말을 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내가 거기에 있었다면 방을 내어주고 수건을 준비하고 아기를 맞이하였을 것이야”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마틴 루터는 “오늘날에도 이런 아기 예수님이 수 없이 탄생하고 있지만 무관심한 것이 아닌가?”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오늘날도 버림받은 사람의 모습으로, 울고 있는 모습으로, 상처 받은 모습으로 우리 곁에 계십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무지와 무관심 속에서 탄생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인류의 구원자가 탄생하셨지만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 자리에 오신 분들은 예수님을 마음에 영접하고 경배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여러분의 마음에 기쁨과 평화를 넘치게 부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은 비천한 사람들, 가난하고 배척당하는 사람들과 함께 하기 위해서, 그들의 친구가 되시기 위해서 이런 모습으로 찾아오셨습니다. 고린도후서 8장 9절은 말씀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님의 탄생 소식은 가장 먼저 누구에게 전해졌을까요? 목자들입니다. 목자들이 밤에 밖에서 자기 양떼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당시 목자들은 사회에서 인정도 받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법정에서 증인으로서도 자격이 없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메시아 탄생 소식을 목자들에게 가장 먼저 전해주었을까요? 헤롯 대왕이나 대제사장들에게 전했으면 그들이 찾아갔을까요? 아기를 찾아 죽이던지, 그 말을 무시하고 찾아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목자들은 구유에 가장 익숙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양치는 목자들로서 냄새가 많이 났습니다. 목자들에게 잘 어울리는 곳이 짐승들의 거처요, 구유입니다. 또한 이 목자들은 충성스러웠습니다. 밤이지만 밖에서 양떼들을 지키며 자기 일에 충실하였습니다. 유대에서 목자들은 양을 제물로 바치기 위해서 돌보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오신 예수님을 영접하기에 목자들만큼 좋은 사람들은 없었습니다. 수렁에 빠져 있고 도움이 절실하게 필요한 사람들에게 구원자가 필요합니다. 그들은 목자로서 살고 있지만 마음은 깨어지고 상해 있었습니다. 그들은 당시 사회로부터 “짓밟히고 업신여김을 당하는 사람들”을 대표합니다. 고린도전서 1장 26-29절은 말씀합니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오늘날 젊은이들은 구원자가 절실히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목회데이터 연구소의 통계입니다. 대학생들의 감정상태를 살펴보면 거의 매일 피곤하거나 에너지가 생기지 않는다는 사람이 47%, 앞으로 내 생활이 더 나아질 것이라는 희망이 없다는 사람이 28%나 되었습니다. 거의 75%에 해당하는 청년들이 비관적인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4명 중 한 명은 자살을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한 청년이 허무주의에 시달리며 살았습니다. 그는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라는 생각을 가지고 인생을 즐기다가 일찍 죽고자 생각을 했습니다. 죄의 밑바닥까지 가보고자 하는 미친 생각까지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전도를 받아 성경을 공부하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자 기쁨이 생기고, 삶의 목적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도 목자로 헌신하고 있습니다.
셋째, 나를 위해 오신 예수님. 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그들을 두루 비추자 그들이 크게 무서워하였습니다. 천사가 말했습니다.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누구를 위하여 구주가 오셨습니까? 바로 “나를 위하여”입니다. 왜 나에게 구주가 필요합니까? 죄와 이 어두운 세상의 주관자 아래 고통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가이사의 호적 명령은 사람들에게 삶의 무거운 짐과 고통을 가져다주었습니다. 이 세상 사람들이 돈의 노예로 살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바라는 최고의 가치가 돈입니다. 돈으로 인해서 많은 사람들이 고통하며 울고 있습니다. 그러나 돈이 우리를 구원하지 못합니다. 돈이 참된 행복을 주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이렇게 살다가 죽어야 합니다. 인류에게 공통된 가장 슬프고 나쁜 소식은 죄로 인해서 모두 죽는다는 것입니다. 각종 사고나 질병으로 사람이 죽을 때마다 우리는 슬퍼하고 통곡합니다. 죽음은 인류의 공동의 적이며 예외가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한 번 죽는 것은 정해진 것이요 그 이후에는 영원한 심판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누가 이런 죄로 인한 죽음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요? 누가 나의 죄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요?
천사들이 가져온 소식은 온 백성에게 미치는 큰 기쁨의 좋은 소식입니다. 좋은 소식은 복음입니다. 복음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구주 곧 그리스도 주는 하나님에 의해서 기름부음을 받은 왕 중의 왕을 뜻합니다. 예수님은 사랑의 왕, 평화의 왕이십니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사9:6).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구원의 복음을 전파하시며 병든 사람들을 고쳐주시고 죄인들을 정죄하지 않으시고 죄 사함을 선포하십니다. 마침내는 인류의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셔서 왕 중의 왕, 생명의 주가 되셨습니다.
모든 사람이 자립적이고 멋있어 보입니다. 그러나 예외없이 모두가 사랑 받기를 원합니다. 평화를 누리기를 원합니다. 그리스도의 통치를 받는 곳에 두려움이나 정죄가 없습니다. 거기에는 오직 사랑과 평화와 용서가 있습니다.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은 “우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이 구원은 우리의 혈통이나, 행위나 율법을 잘 지켜서 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고 영접함으로 받습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공짜로 받는 것입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긍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누구를 위하여 오셨습니까? 선교사님들을 위해서 오셨습니까? 목자님들을 위해서 오셨습니까? 옆에 있는 분을 위해서 오셨습니까? 네, 맞습니다. 무엇보다 예수님은 바로 나를 위해서 오셨습니다. 내가 당하는 마음의 고통은 내가 알고, 마음의 즐거움은 타인이 참여하지 못합니다(잠 14:10). 그러나 예수님은 바로 이런 나를 위해서 오셨습니다. 나의 슬픔, 나의 고통, 운명, 나의 외로움에 함께 하고 위로하기 위해서, 죄와 영원한 심판으로부터 구원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누구를 위해서 오셨습니까? 네, 바로 당신을 위해서 오셨습니다.
구주의 표적이 무엇입니까? 12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가 구주되신 표적입니다. 이 표적은 예수님이 어떤 구원자인지를 잘 말해줍니다. 구유 속에 십자가가 있습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빌 2:6-9)” 예수님은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오 동등이시지만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제를 가지셨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심으로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런 자기 비움, 자기 비하, 자기 부인을 통해서 그리스도가 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십자가에 죽으신 그를 부활하게 하셔서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습니다. 그는 주의 주, 만왕의 왕이 되셨습니다. 이제 누구든지 그를 통해서 죄와 사망 권세에서 구원을 받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 5:24).”
구주가 왜 이런 방법으로 탄생하셨을까요? 가장 높으신 분이 왜 가장 낮은 곳에 태어나셨을까요? 가장 영광스러우신 분이 왜 가장 비천한 분이 되셨을까요? 가장 강하신 분이 왜 가장 약한 분이 되셨을까요? 우리와 함께 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의 고난에 동참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런 방식이 아니면 우리가 그를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가장 연약하고 비천한 자가 되셨지만 그 분은 메시아이십니다. 그가 이렇게 태어나심으로 앞으로 그가 어떤 생애를 사시고 어떤 사역을 하실지 나타내줍니다. 마구간에서 태어나셔서 구유에 누이신 예수님은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가 되셨습니다. 무기력한 중풍병자를 일으켜 세우고, 간음 중에 잡힌 여인을 만나 죄 사함을 주시고,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영생수를 주십니다. 그는 세리 삭개오를 부르시고 그의 집에 유하시며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이 겪는 인생의 슬픔과 고통을 깊이 체휼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 인생들의 고달픔을 깊이 이해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이런 모습으로 찾아오셨기 때문에 누구나 부담없이 다가갈 수 있습니다. 사람을 살리는 생명의 역사는 가이사의 보좌가 아니라 자기를 낮추고 비우고 종이 되는 가운데서 일어납니다.
구주가 탄생하심으로 하나님과 우리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13,14절을 보십시오. “홀연히 수많은 천군이 그 천사와 함께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냄새나는 구유에 누이신 예수님을 세상 사람들은 외면하고 배척했지만 하늘의 수많은 군대와 천사들이 그의 탄생을 축하하며 장엄한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들의 찬송은 우리 중창단의 찬송처럼 그야말로 영혼을 울리는 감동 자체였습니다. 천사들의 찬송은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입니다. 구주 성탄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고 사람들에게 평화가 임하였습니다. 사람들의 내면이 치료될 때 그 마음에 평화가 임합니다. 그들의 인생에 두신 하나님의 목적이 분명해 지면 그 마음에 평화가 임합니다. 예수님의 피를 믿음으로 하나님과 화해할 때 그 사람의 마음에 평화가 임합니다. 이 시간 바로 나를 위해 오신 예수님을 영접하고 구원의 기쁨과 평화를 누리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말씀 | 누가복음 2:1-14
요절 | 누가복음 2:11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즐거운 성탄절입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은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입니다. “너희”를 대신에 “자기 이름”을 넣고 읽어보겠습니다. “엘리야”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여러분에게 정말 구주가 필요하십니까? 주님이 도우시고 이 메시지를 통해서 우리 각자에게 말씀해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누가복음의 저자 누가는 역사가요, 의사였습니다. 그는 의사로서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에 대해서 많은 의문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당시에 여인과 가까이서 대화를 할 수 있는 사람은 의사뿐이었습니다. 누가는 마리아가 아플 때 진료를 하면서 예수님의 탄생에 대해 궁금한 것들을 묻고 듣고 하면서 중요한 정보를 자세히 들을 수 있었습니다. 마리아는 천사들과 목자들에게 전해 들은 이야기를 마음에 간직하고 있다가 누가에게 자세히 들려주었습니다. 그래서 누가복음이 예수님의 탄생에 대해서 가장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죄에 빠진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 많은 선지자들을 보내사 말씀하시고 여러 가지 이적들을 보이셨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무관심과 반역하는 마음과 이기심으로 인해서 별로 효과가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최종적으로 하나님이 사람이 되셔서 오심으로 구원역사를 성취하십니다. 성부 하나님은 성자 예수님을 연약한 한 아기로 이 땅에 태어나게 하시고 마구간 구유에 누이셨습니다. 가장 영광스러우신 분이 비천한 곳에 인류의 구원자로 오셨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입니다. 이 시간 그 이유를 생각해 보고 우리도 함께 기뻐하고자 합니다.
첫째, 구약의 예언을 성취하러 오신 예수님.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 할 때였습니다. 로마에 의한 평화가 지배할 때였지만 가난한 백성들에게는 그림의 떡이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호적하러 각각 고향으로 돌아가는데 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이므로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를 향하여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 그 약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하러 올라갔습니다. 마리아는 이미 잉태하였습니다. 예수님이 탄생하기 700년 전에 이사야 선지자와 동시대에 살았던 미가 선지자는 이렇게 예언했습니다.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미가 5:2).” 하나님께서는 역사의 주관자이십니다. 그는 가이사 아구스도의 호적 명령을 사용하여 미가 선지자의 예언을 성취하셨습니다. 고레스 왕을 통해서 이스라엘을 바벨론 포로에서 해방시키신 하나님은 가이사 아구스도의 호적 명령를 통해서 요셉과 마리아를 베들레헴으로 가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역사의 주관자이십니다. 지금도 그는 세상 왕들을 통해서 자신의 목적하신 바를 이루어 가십니다.
요셉과 마리아가 베들레헴에 도착하여 있을 그 때에 해산할 날이 차서 첫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습니다. 이는 여관에 있을 곳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갈릴리 나사렛에서 베들레헴까지 145Km의 거리를 일주일 동안 만삭의 몸으로 여행을 하는 것이 매우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안전하게 나사렛에서 아이를 낳고 싶었지만 가이사의 명령과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서 힘든 여행을 했습니다. 그 힘든 여행이 결국 선지자의 예언을 이루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세상 많은 일들을 통해서 우리에게 두신 그의 뜻을 성취해 가십니다(롬8:28). 우리는 때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고난과 환난을 만나지만 돌이켜보면 그것이 나를 부르시고 쓰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였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는 거의 3년 동안 코로나로 인해서 연합모임을 하지 못했고 또 외롭고 힘든 세월을 보냈습니다. 이번에 동교, 화랑, 신촌, 항공, 정릉 다섯 개 센터가 연합하여 성탄예배를 드리게 된 것도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섯 개 센터의 형제자매들이 연합하여 성탄을 준비하면서 하나님을 섬기는 기쁨을 누렸습니다. 또한 연합예배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새롭게 만나 주시고 구원의 감격을 회복하며 주의 일꾼으로 써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둘째, 말 구유에 누이신 아기 예수님. 마리아는 첫 아들을 낳아 어디에 뉘었습니까? 요셉과 마리아는 첫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습니다. 여행길에 당황한 요셉은 이리저리 뛰면서 방을 구했을 것입니다. 여관은 오늘날 민박과 같이 일반 가정이 자기 집을 찾는 사람을 영접하고 묵게 하는 장소입니다. 그런데 당시에는 호적을 하러 온 사람이 너무 많아서 방을 구할 수가 없었습니다. 방들은 이미 지위가 있는 사람들이나 돈 좀 있는 사람들이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가난했던 요셉과 마리아는 어쩔 수 없이 마구간에 가서 아이를 낳아 구유에 뉘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랑하는 아이를 구유에 뉘여야 하는 마리아의 마음은 아프고 슬펐을 것입니다. 천지만물의 주인이신 하나님은 자기의 아들을 얼마든지 화려하고 따뜻한 곳에 누일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의 아들이 이렇게 낮아져야 했을까요? 인간의 운명과 고난에 참여하고자 하심입니다. 아기 예수님은 자기를 비우고 가장 비천한 자리로 낮아지셨습니다. 예수님은 구유에 아기로 오셨고 자라서 목수로 사셨습니다. 공생애 기간 중에는 제자들을 섬기는 삶을 사셨습니다.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낮아져야 한다고 말씀하시며 종의 도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결국 그는 십자가에서 비난의 표적이 되셨습니다. 온갖 조롱과 모욕과 수치를 당하심으로 내가 당해야 할 저주를 대신 지셨습니다. 이를 통해 나의 죄를 깨끗하게 하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받아들여지게 하십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언약을 받고 하나님께 나아가 내가 누구입니까? 묻습니다. 그리고 나서 나는 사람이 아니요 벌레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벌레도 사실 황송한 말입니다. 우리는 먼지로부터 온 존재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티끌만도 못한 죄인들을 재창조하시어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게 하시고 새 피조물이 되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에 감사하며 섬기는 것이 마땅합니다. 무익한 종의 자세를 갖고 섬기는 것은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일입니다. 우리가 무시를 받을 때, 구유에 누이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생각하면 자기 발견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회개하고 마음이 치유가 됩니다. 우리는 무시를 받으면서 겸손하신 예수님을 닮아갑니다.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동네는 베들레헴입니다. 베들레헴은 “떡집”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떡집에서 구유에 누이셨습니다. 구유는 말 밥통입니다. 구유에 누이신 아기 예수님은 생명의 떡으로 자신을 우리에게 주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기 전에 제자들과 유월절 만찬을 드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또 빵을 들어서 감사를 드리신 다음에, 떼어서 그들에게 주시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c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다. d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억하여라."(눅 22:19) 오병이어 사건 이후에 사도 요한은 그 의미를 깨닫고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모세가 너희에게 하늘로부터 떡을 준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너희에게 하늘로부터 참 떡을 주시나니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 그들이 이르되 주여 이 떡을 항상 우리에게 주소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요 6:32-35).” 이 시간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믿고 영접함으로 생명의 떡을 취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배부름을 얻을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됩니다. 참된 만족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가이사의 통치 아래 사는 백성들은 먹고살기에 힘들고 지쳐서 산모에게 방 한 칸 내어줄 마음의 여유가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마리아가 산통으로 울부짖을 때 귀를 틀어막고 못들은 체 했습니다. 그러나 마구간의 짐승들은 그들을 환영했습니다. 짐승들은 거절하는 말을 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내가 거기에 있었다면 방을 내어주고 수건을 준비하고 아기를 맞이하였을 것이야”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마틴 루터는 “오늘날에도 이런 아기 예수님이 수 없이 탄생하고 있지만 무관심한 것이 아닌가?”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오늘날도 버림받은 사람의 모습으로, 울고 있는 모습으로, 상처 받은 모습으로 우리 곁에 계십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무지와 무관심 속에서 탄생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인류의 구원자가 탄생하셨지만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 자리에 오신 분들은 예수님을 마음에 영접하고 경배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여러분의 마음에 기쁨과 평화를 넘치게 부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은 비천한 사람들, 가난하고 배척당하는 사람들과 함께 하기 위해서, 그들의 친구가 되시기 위해서 이런 모습으로 찾아오셨습니다. 고린도후서 8장 9절은 말씀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님의 탄생 소식은 가장 먼저 누구에게 전해졌을까요? 목자들입니다. 목자들이 밤에 밖에서 자기 양떼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당시 목자들은 사회에서 인정도 받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법정에서 증인으로서도 자격이 없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메시아 탄생 소식을 목자들에게 가장 먼저 전해주었을까요? 헤롯 대왕이나 대제사장들에게 전했으면 그들이 찾아갔을까요? 아기를 찾아 죽이던지, 그 말을 무시하고 찾아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목자들은 구유에 가장 익숙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양치는 목자들로서 냄새가 많이 났습니다. 목자들에게 잘 어울리는 곳이 짐승들의 거처요, 구유입니다. 또한 이 목자들은 충성스러웠습니다. 밤이지만 밖에서 양떼들을 지키며 자기 일에 충실하였습니다. 유대에서 목자들은 양을 제물로 바치기 위해서 돌보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오신 예수님을 영접하기에 목자들만큼 좋은 사람들은 없었습니다. 수렁에 빠져 있고 도움이 절실하게 필요한 사람들에게 구원자가 필요합니다. 그들은 목자로서 살고 있지만 마음은 깨어지고 상해 있었습니다. 그들은 당시 사회로부터 “짓밟히고 업신여김을 당하는 사람들”을 대표합니다. 고린도전서 1장 26-29절은 말씀합니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오늘날 젊은이들은 구원자가 절실히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목회데이터 연구소의 통계입니다. 대학생들의 감정상태를 살펴보면 거의 매일 피곤하거나 에너지가 생기지 않는다는 사람이 47%, 앞으로 내 생활이 더 나아질 것이라는 희망이 없다는 사람이 28%나 되었습니다. 거의 75%에 해당하는 청년들이 비관적인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4명 중 한 명은 자살을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한 청년이 허무주의에 시달리며 살았습니다. 그는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라는 생각을 가지고 인생을 즐기다가 일찍 죽고자 생각을 했습니다. 죄의 밑바닥까지 가보고자 하는 미친 생각까지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전도를 받아 성경을 공부하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자 기쁨이 생기고, 삶의 목적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도 목자로 헌신하고 있습니다.
셋째, 나를 위해 오신 예수님. 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그들을 두루 비추자 그들이 크게 무서워하였습니다. 천사가 말했습니다.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누구를 위하여 구주가 오셨습니까? 바로 “나를 위하여”입니다. 왜 나에게 구주가 필요합니까? 죄와 이 어두운 세상의 주관자 아래 고통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가이사의 호적 명령은 사람들에게 삶의 무거운 짐과 고통을 가져다주었습니다. 이 세상 사람들이 돈의 노예로 살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바라는 최고의 가치가 돈입니다. 돈으로 인해서 많은 사람들이 고통하며 울고 있습니다. 그러나 돈이 우리를 구원하지 못합니다. 돈이 참된 행복을 주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이렇게 살다가 죽어야 합니다. 인류에게 공통된 가장 슬프고 나쁜 소식은 죄로 인해서 모두 죽는다는 것입니다. 각종 사고나 질병으로 사람이 죽을 때마다 우리는 슬퍼하고 통곡합니다. 죽음은 인류의 공동의 적이며 예외가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한 번 죽는 것은 정해진 것이요 그 이후에는 영원한 심판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누가 이런 죄로 인한 죽음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요? 누가 나의 죄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요?
천사들이 가져온 소식은 온 백성에게 미치는 큰 기쁨의 좋은 소식입니다. 좋은 소식은 복음입니다. 복음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구주 곧 그리스도 주는 하나님에 의해서 기름부음을 받은 왕 중의 왕을 뜻합니다. 예수님은 사랑의 왕, 평화의 왕이십니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사9:6).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구원의 복음을 전파하시며 병든 사람들을 고쳐주시고 죄인들을 정죄하지 않으시고 죄 사함을 선포하십니다. 마침내는 인류의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셔서 왕 중의 왕, 생명의 주가 되셨습니다.
모든 사람이 자립적이고 멋있어 보입니다. 그러나 예외없이 모두가 사랑 받기를 원합니다. 평화를 누리기를 원합니다. 그리스도의 통치를 받는 곳에 두려움이나 정죄가 없습니다. 거기에는 오직 사랑과 평화와 용서가 있습니다.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은 “우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이 구원은 우리의 혈통이나, 행위나 율법을 잘 지켜서 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고 영접함으로 받습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공짜로 받는 것입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긍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누구를 위하여 오셨습니까? 선교사님들을 위해서 오셨습니까? 목자님들을 위해서 오셨습니까? 옆에 있는 분을 위해서 오셨습니까? 네, 맞습니다. 무엇보다 예수님은 바로 나를 위해서 오셨습니다. 내가 당하는 마음의 고통은 내가 알고, 마음의 즐거움은 타인이 참여하지 못합니다(잠 14:10). 그러나 예수님은 바로 이런 나를 위해서 오셨습니다. 나의 슬픔, 나의 고통, 운명, 나의 외로움에 함께 하고 위로하기 위해서, 죄와 영원한 심판으로부터 구원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누구를 위해서 오셨습니까? 네, 바로 당신을 위해서 오셨습니다.
구주의 표적이 무엇입니까? 12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가 구주되신 표적입니다. 이 표적은 예수님이 어떤 구원자인지를 잘 말해줍니다. 구유 속에 십자가가 있습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빌 2:6-9)” 예수님은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오 동등이시지만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제를 가지셨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심으로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런 자기 비움, 자기 비하, 자기 부인을 통해서 그리스도가 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십자가에 죽으신 그를 부활하게 하셔서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습니다. 그는 주의 주, 만왕의 왕이 되셨습니다. 이제 누구든지 그를 통해서 죄와 사망 권세에서 구원을 받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 5:24).”
구주가 왜 이런 방법으로 탄생하셨을까요? 가장 높으신 분이 왜 가장 낮은 곳에 태어나셨을까요? 가장 영광스러우신 분이 왜 가장 비천한 분이 되셨을까요? 가장 강하신 분이 왜 가장 약한 분이 되셨을까요? 우리와 함께 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의 고난에 동참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런 방식이 아니면 우리가 그를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가장 연약하고 비천한 자가 되셨지만 그 분은 메시아이십니다. 그가 이렇게 태어나심으로 앞으로 그가 어떤 생애를 사시고 어떤 사역을 하실지 나타내줍니다. 마구간에서 태어나셔서 구유에 누이신 예수님은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가 되셨습니다. 무기력한 중풍병자를 일으켜 세우고, 간음 중에 잡힌 여인을 만나 죄 사함을 주시고,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영생수를 주십니다. 그는 세리 삭개오를 부르시고 그의 집에 유하시며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이 겪는 인생의 슬픔과 고통을 깊이 체휼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 인생들의 고달픔을 깊이 이해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이런 모습으로 찾아오셨기 때문에 누구나 부담없이 다가갈 수 있습니다. 사람을 살리는 생명의 역사는 가이사의 보좌가 아니라 자기를 낮추고 비우고 종이 되는 가운데서 일어납니다.
구주가 탄생하심으로 하나님과 우리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13,14절을 보십시오. “홀연히 수많은 천군이 그 천사와 함께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냄새나는 구유에 누이신 예수님을 세상 사람들은 외면하고 배척했지만 하늘의 수많은 군대와 천사들이 그의 탄생을 축하하며 장엄한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들의 찬송은 우리 중창단의 찬송처럼 그야말로 영혼을 울리는 감동 자체였습니다. 천사들의 찬송은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입니다. 구주 성탄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고 사람들에게 평화가 임하였습니다. 사람들의 내면이 치료될 때 그 마음에 평화가 임합니다. 그들의 인생에 두신 하나님의 목적이 분명해 지면 그 마음에 평화가 임합니다. 예수님의 피를 믿음으로 하나님과 화해할 때 그 사람의 마음에 평화가 임합니다. 이 시간 바로 나를 위해 오신 예수님을 영접하고 구원의 기쁨과 평화를 누리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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