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2022년 눅20강(11:14-36) 더 강한 자 예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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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누가복음 제 20 강
말씀 | 누가복음 11:14-36
요절 | 누가복음 11:21,22
더 강한 자 예수님
“강한 자가 무장을 하고 자기 집을 지킬 때에는 그 소유가 안전하되 더 강한 자가 와서 그를 굴복시킬 때에는 그가 믿던 무장을 빼앗고 그의 재물을 나누느니라.”
지금도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전쟁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보이지 않지만 영적인 전쟁도 진행 중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탄의 지배하에 있는 자들을 구출하고 자유를 주십니다. 반대로 사탄은 자기의 지배하에 있는 자들을 빼앗기지 않고자 온갖 권모술수로 전쟁을 지휘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한 말 못하게 하는 귀신을 쫓아내시자 많은 사람들이 놀랐습니다. 그런 중에 예수님이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고 공격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권능이 나타난 표적을 보고도 분별력이 없고, 믿지 못하는 것은 마음이 어둡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논쟁이 그치지 않고 다툼이 생깁니다. 전쟁을 이기려면 힘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가장 강한 힘으로 이 전쟁을 승리로 이끄십니다. 우리도 예수님 편에서 영적인 전쟁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떻게 영적인 전쟁을 수행하시는지 배우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 한 말 못하게 하는 귀신을 말씀의 권세로 쫓아내셨습니다. 귀신은 한 사람에게 두려움을 심어서 말을 못하게 하였습니다. 두려움의 영에 사로잡히면 말을 하지 못하고 자기 세계 속으로 빠져 들어가기 쉽습니다. 해야 할 말을 하지 못하면 얼마나 속이 답답합니까? 그러나 예수님을 구주로 믿게 되면 두려움의 영이 떠나가고 담대한 마음을 주는 성령의 다스림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입니다(딤후 1:7). 예수님을 믿을 때 담대하게 할 말을 하게 됩니다. 기쁜 소식을 전하고, 사람을 살리는 말을 하고, 덕을 세우는 말을 하게 됩니다.
20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내가 만일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귀신이 떠나가고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사람의 마음에는 평안이 밀려오고 기쁨이 있고 자유함이 생깁니다. 그러니 눌린 사람이 펴지고, 죽었던 사람이 살아나고, 누워있던 사람이 일어나서 빛을 발하게 됩니다. 사도행전 10:38을 보면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 그가 두루 다니시며 선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사람을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고 전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도 하나님이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이 부어 주실 때 병든 사람을 치유하고, 마귀에게 눌린 자들을 고치고, 어려운 사람들 돕는 선한 일들이 왕성하게 일어납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령의 검 곧 말씀 공부와 메시지를 통해서 사탄이 심는 생각과 이론들을 파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실 때 회개의 역사가 일어나고, 죄사함을 받아 기쁨이 충만하고, 기도의 응답을 받는 간증들이 많아지고, 믿음의 역사들이 많이 나타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소원을 주시고 능력을 주시기 때문에 기적과 같은 일들이 일어납니다. 이번에 다섯 개 센터가 합심해서 성탄연합예배를 준비한다는 자체가 새로운 역사요, 성령의 역사입니다. 하나님께서 성탄연합예배를 통해서 영광을 받으시고 우리에게는 큰 기쁨과 평화를 선물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 말 못하게 하는 귀신을 쫓아내는 이적을 보이시자 무리들은 놀랍게 여겼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 어떤 사람들은 비난하였습니다. “그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 또 더러는 예수님을 시험하여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구하였습니다. 바알세불’은 ‘높은 곳의 바알’, ‘신전의 주인’이란 뜻으로 사탄의 이름입니다. ‘벨리알’이라고도 부릅니다. 무리 중 더러는 말하기를 예수님이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이 성령을 통해서 이루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성령의 역사를 보고 마귀의 역사라고 공격하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그들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뿐만 아니라 무리 중에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인정하기가 싫은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는 것은 무조건 싫은 것입니다. 그들의 마음이 어둡기 때문에 하나님의 역사인지, 사탄의 역사인지 분별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무지한 자들에 대해서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이 상황을 분별하게 진리를 가르쳐주십니다. 17,18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이르시되 스스로 분쟁하는 나라마다 황폐하여지며 스스로 분쟁하는 집은 무너지느니라. 너희 말이 내가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 하니 만일 사탄이 스스로 분쟁하면 그의 나라가 어떻게 서겠느냐?” 귀신들이 서로 쫓아내면 그 나라는 자멸하게 됩니다. 그러나 귀신들은 지금도 강한 나라를 이루어 돌아가고 있습니다. 정사와 어두움의 세상 권세자들을 잡고 일하고 있습니다. 사탄도 귀신들을 잘 조직하여 질서가 있고 체계적으로 활동하여 하나님의 백성들을 공격하고 사람들을 파멸로 이끄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강한 자가 무장을 하고 자기 집을 지킬 때에는 그 소유가 안전하되 더 강한 자가 와서 그를 굴복시킬 때에는 그가 믿던 무장을 빼앗고 그의 재물을 나누느니라(21,22).” 사탄은 강한 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더 강한 자이십니다. 사탄은 견고한 진을 치고 거기에 숨어 우리를 공격합니다. 고린도후서 10:4,5은 말씀합니다. “우리의 싸우는 무기는 육신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어떤 견고한 진도 무너뜨리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모든 이론을 무너뜨리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하니” 사탄은 어떻게 견고한 진을 구축할까요? 사탄은 우상과 점치는 것과 더러운 곳에서 활발하게 활동합니다. 사탄은 사람들 마음에 있는 쓴 뿌리를 통해서 역사합니다. 모든 쓴 뿌리는 작게 시작하지만 영향력은 매우 큽니다. 쓴 뿌리를 품게 되면 상대방이 아니라 바로 자신의 내부를 먼저 썩게 합니다. 이 쓴 뿌리의 결과로 육체적인 질병, 정서적인 피해 그리고 비논리적인 생각에 시달립니다. 격정과 분노도 마찬가지입니다. 격정은 뿌리 깊고 파괴적이며 치밀어 오르는 울화통을 말합니다. 분노는 상대방을 파괴하고 상처를 주려는 욕구입니다. 어떤 사람은 욕을 입에 달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사탄은 이런 욕설을 타고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줍니다. 사탄은 모든 악한 의도를 조장하여 다른 사람을 파멸시키는 일에 집착합니다. 이런 견고한 진들에 꽈리를 틀고 사탄은 역사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능력은 이런 모든 견고한 진을 파괴하며 하나님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합니다. 성령의 검인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님의 십자가의 보혈과 기도를 통해서 우리는 견고한 진을 무너뜨려야 합니다. 요한일서 4:4은 말씀합니다. “자녀들아 너희는 하나님께 속하였고 또 그들을 이기었나니 이는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자보다 크심이라.” 우리가 이를 위해서 기도하며 성령의 능력을 덧입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지혜와 모략의 신이시오, 진리의 왕이시오, 원더풀 카운슬러이십니다. 23절을 보십시오. “나와 함께 하지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 영적인 싸움에서 중간은 없습니다. 세상에는 하나님의 나라와 사탄의 나라 밖에 없습니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 나라에 속했든지 사탄의 나라에 속해 있습니다. 중립적인 위치에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전쟁을 할 때에 중립적인 위치에 있는 사람은 이쪽저쪽 편에서 공격을 받게 되고 보호를 받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싸울 때에는 노선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적극적으로 예수님과 함께 하지 않는 자는 예수님을 반대하는 자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모으지 않고 가만히 있는 것은 흩어지게 하는 일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멀찍이 따랐을 때 그는 결국 사탄의 시험에 들어 예수님은 세 번씩이나 부인하고 통곡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사탄에 사로잡힌 영혼들을 구원하셔서 하나님 나라로 모으고 계십니다. 이 예수님과 함께 하지 않는 자는 반대하는 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속했다면 예수님을 따르면서 그 분의 말씀을 듣고 순종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로서 사탄과 싸우며 하나님 나라를 확장해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사탄보다 더 강하시다는 것입니다. 이미 승리의 싸움을 하고 계십니다. 전쟁 종식과 승리했다는 소식이 곧 울려 퍼질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24-26절을 보십시오.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얻지 못하고 이에 이르되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 가리라 하고 가서 보니 그 집이 청소되고 수리되었거늘 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 심하게 되느니라.” 물 없는 곳은 은혜가 없는 마음, 말씀이 없는 심령으로서 영적인 공백 상태를 말합니다. 우리가 회개하고 마음을 비운 후에 반드시 해야 할 것은 마음을 은혜와 감사로 채우는 것입니다. 말씀과 성령으로 채우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 심하게 되느니라”고 했습니다. 히브리서 6장 4-6절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할 수 없나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놓고 욕되게 함이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초대 왕이었던 사울은 왕이 되기 전에 겸손하고 순종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왕이 된 후에 교만해져서 하나님의 뜻에 불순종합니다. 아말렉을 진멸하라고 했더니 아각 왕을 살려두고 살찐 소와 양들을 전리품으로 가져왔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자 성령이 떠나고 악령이 들었습니다. 그는 이전보다 더욱 비참하게 되어 시기심의 종노릇을 하고 다윗을 죽이고자 추격전을 벌입니다. 그리고 결국 블레셋 족속에게 패하고 비참한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예수님이 38년된 병자를 고쳐준 후에 말씀하셨습니다. “보라 네가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을 용서하신 후에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고 하셨습니다. 사도바울은 에베소서 4:27에서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고 했습니다. 우리도 회개하고 예수님을 영접했으면 그의 순종과 섬김을 배우며 영적으로 자라야 합니다. 그 분의 말씀을 마음에 채우고 순종하는 가운데 예수님의 성품을 닮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기도에 힘쓸 때 마귀에게 틈을 주지 않게 됩니다. 또 마귀의 역사를 분별하고 대비하게 됩니다. 우리는 적극적으로 주님과 함께 일을 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같이 거룩해져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어떤 사람들과 바알세불 논쟁을 하고 있을 때 무리 중에서 한 여자가 음성을 높였습니다. “당신을 밴 태와 당신을 먹인 젖이 복이 있나이다.” 예수님은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킬 때 귀신의 세력에서, 죄의 세력에서 자유롭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킬 때 귀신이 떠나가고 하나님 나라가 임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킬 때 우리 자매님들과 사모님들은 성모 마리아보다 더 복된 여인이 될 것입니다.
29,30절을 보십시오. “무리가 모였을 때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이 세대는 악한 세대라 표적을 구하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나니 요나가 니느웨 사람들에게 표적이 됨과 같이 인자도 이 세대에 그러하리라.” 예수님께서 많은 표적을 행하셨는데도 사람들은 여전히 그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고 전해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무리를 ‘악한 세대’라고 책망하십니다. 악한 세대의 특징은 자기만족적인 신앙생활을 추구합니다. 신비한 현상들만을 즐기고자 합니다. 신비한 체험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악한 세대에게 요나의 표적 밖에 보일 표적이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요나의 표적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을 가리킵니다(마 12:39-41). 저자 누가는 요나가 니느웨 사람들에게 전하는 회개의 메시지와 말씀을 전하는 그의 태도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요나는 니느웨 사람들이 회개하는 것을 싫어했습니다. 그래서 마음을 드려서 말씀을 전하지 않고 건성건성으로 전했습니다. 그런데 요나의 그런 메시지를 듣고 니느웨 사람들이 회개했는데 너희들은 어떠하냐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가 솔로몬의 지혜로운 말을 들으려고 땅 끝에서 왔음이거니와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으며 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들이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하였음이거니와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31,32). 스바 여왕은 솔로몬의 지혜로운 말씀을 듣고자 향료와 금은보석을 낙타에 가득 싣고 왔습니다(왕상 10:1-13).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하는 간절한 소원 때문에 일제 강점기에도 평양에서 사경회가 열리면 경상도와 전라도를 비롯한 전국 각지에서 많은 사람들이 쌀과 반찬을 메고 왔습니다. 숙소도 변변치 않아 쪽잠을 자면서 말씀을 들었습니다. 영적소원을 가진 사람은 말씀을 듣기 위해서 어떤 희생과 수고도 감수합니다. 우리도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데 따르는 수고를 기꺼이 감당해야겠습니다. 말씀을 공부할 때에 애를 쓴 만큼 은혜를 받습니다. 생각하는 것은 정신노동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공부할 때 가만히 듣기만 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생각하고 말을 하고 자기의 삶을 나누기를 바랍니다. 그리할 때 은혜가 풍성하고 서로 힘을 얻게 됩니다. 말씀의 검에 찔려서 귀신이 떠나가고 치료의 역사가 이루어집니다.
예수님은 몸의 등불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등불을 켜서 움 속에나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는 들어가는 자로 그 빛을 보게 하려 함입니다. 등불을 켜는 것은 장식이 아니라 빛을 보게 하려 함입니다. 몸의 등불은 눈입니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입니다. 만일 눈이 나쁘면 그 몸도 어두울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 속에 있는 빛이 어둡지 아니한가 살펴보아야 합니다. 온 몸이 밝아 조금도 어두운 데가 없으면 등불이 나를 비출 때와 같이 온전히 밝을 것입니다. 빛이 내 속에 들어와야 합니다. 빛은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우리를 밝게 해 줍니다. 마음을 밝게 해 주고 어두운 세상 속에서 갈 길을 환하게 비추어 주는 빛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들은 끊임없이 자신의 내면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대로 인도함을 받고 있는지 살펴봐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만이 내면의 어둠을 밝히는 참된 빛입니다. 예수님은 선포하셨습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요8:12).” 우리의 영적인 눈이 밝아져서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 밝히 알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눈을 여시사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보게 하시고, 우리의 귀를 여시사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하여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그리하여 주님과 함께 모으는 일에 참여함으로 진정으로 복된 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것을 인생의 기쁨으로 삼는 자는 복이 있습니다. 이 보배로운 진리의 말씀을 받고 지키는 우리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이번 성탄 연합 예배 가운데 초청 역사를 힘써 이루기를 기도합니다.
말씀 | 누가복음 11:14-36
요절 | 누가복음 11:21,22
더 강한 자 예수님
“강한 자가 무장을 하고 자기 집을 지킬 때에는 그 소유가 안전하되 더 강한 자가 와서 그를 굴복시킬 때에는 그가 믿던 무장을 빼앗고 그의 재물을 나누느니라.”
지금도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전쟁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보이지 않지만 영적인 전쟁도 진행 중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탄의 지배하에 있는 자들을 구출하고 자유를 주십니다. 반대로 사탄은 자기의 지배하에 있는 자들을 빼앗기지 않고자 온갖 권모술수로 전쟁을 지휘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한 말 못하게 하는 귀신을 쫓아내시자 많은 사람들이 놀랐습니다. 그런 중에 예수님이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고 공격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권능이 나타난 표적을 보고도 분별력이 없고, 믿지 못하는 것은 마음이 어둡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논쟁이 그치지 않고 다툼이 생깁니다. 전쟁을 이기려면 힘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가장 강한 힘으로 이 전쟁을 승리로 이끄십니다. 우리도 예수님 편에서 영적인 전쟁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떻게 영적인 전쟁을 수행하시는지 배우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 한 말 못하게 하는 귀신을 말씀의 권세로 쫓아내셨습니다. 귀신은 한 사람에게 두려움을 심어서 말을 못하게 하였습니다. 두려움의 영에 사로잡히면 말을 하지 못하고 자기 세계 속으로 빠져 들어가기 쉽습니다. 해야 할 말을 하지 못하면 얼마나 속이 답답합니까? 그러나 예수님을 구주로 믿게 되면 두려움의 영이 떠나가고 담대한 마음을 주는 성령의 다스림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입니다(딤후 1:7). 예수님을 믿을 때 담대하게 할 말을 하게 됩니다. 기쁜 소식을 전하고, 사람을 살리는 말을 하고, 덕을 세우는 말을 하게 됩니다.
20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내가 만일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귀신이 떠나가고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사람의 마음에는 평안이 밀려오고 기쁨이 있고 자유함이 생깁니다. 그러니 눌린 사람이 펴지고, 죽었던 사람이 살아나고, 누워있던 사람이 일어나서 빛을 발하게 됩니다. 사도행전 10:38을 보면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 그가 두루 다니시며 선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사람을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고 전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도 하나님이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이 부어 주실 때 병든 사람을 치유하고, 마귀에게 눌린 자들을 고치고, 어려운 사람들 돕는 선한 일들이 왕성하게 일어납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령의 검 곧 말씀 공부와 메시지를 통해서 사탄이 심는 생각과 이론들을 파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실 때 회개의 역사가 일어나고, 죄사함을 받아 기쁨이 충만하고, 기도의 응답을 받는 간증들이 많아지고, 믿음의 역사들이 많이 나타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소원을 주시고 능력을 주시기 때문에 기적과 같은 일들이 일어납니다. 이번에 다섯 개 센터가 합심해서 성탄연합예배를 준비한다는 자체가 새로운 역사요, 성령의 역사입니다. 하나님께서 성탄연합예배를 통해서 영광을 받으시고 우리에게는 큰 기쁨과 평화를 선물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 말 못하게 하는 귀신을 쫓아내는 이적을 보이시자 무리들은 놀랍게 여겼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 어떤 사람들은 비난하였습니다. “그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 또 더러는 예수님을 시험하여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구하였습니다. 바알세불’은 ‘높은 곳의 바알’, ‘신전의 주인’이란 뜻으로 사탄의 이름입니다. ‘벨리알’이라고도 부릅니다. 무리 중 더러는 말하기를 예수님이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이 성령을 통해서 이루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성령의 역사를 보고 마귀의 역사라고 공격하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그들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뿐만 아니라 무리 중에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인정하기가 싫은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는 것은 무조건 싫은 것입니다. 그들의 마음이 어둡기 때문에 하나님의 역사인지, 사탄의 역사인지 분별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무지한 자들에 대해서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이 상황을 분별하게 진리를 가르쳐주십니다. 17,18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이르시되 스스로 분쟁하는 나라마다 황폐하여지며 스스로 분쟁하는 집은 무너지느니라. 너희 말이 내가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 하니 만일 사탄이 스스로 분쟁하면 그의 나라가 어떻게 서겠느냐?” 귀신들이 서로 쫓아내면 그 나라는 자멸하게 됩니다. 그러나 귀신들은 지금도 강한 나라를 이루어 돌아가고 있습니다. 정사와 어두움의 세상 권세자들을 잡고 일하고 있습니다. 사탄도 귀신들을 잘 조직하여 질서가 있고 체계적으로 활동하여 하나님의 백성들을 공격하고 사람들을 파멸로 이끄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강한 자가 무장을 하고 자기 집을 지킬 때에는 그 소유가 안전하되 더 강한 자가 와서 그를 굴복시킬 때에는 그가 믿던 무장을 빼앗고 그의 재물을 나누느니라(21,22).” 사탄은 강한 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더 강한 자이십니다. 사탄은 견고한 진을 치고 거기에 숨어 우리를 공격합니다. 고린도후서 10:4,5은 말씀합니다. “우리의 싸우는 무기는 육신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어떤 견고한 진도 무너뜨리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모든 이론을 무너뜨리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하니” 사탄은 어떻게 견고한 진을 구축할까요? 사탄은 우상과 점치는 것과 더러운 곳에서 활발하게 활동합니다. 사탄은 사람들 마음에 있는 쓴 뿌리를 통해서 역사합니다. 모든 쓴 뿌리는 작게 시작하지만 영향력은 매우 큽니다. 쓴 뿌리를 품게 되면 상대방이 아니라 바로 자신의 내부를 먼저 썩게 합니다. 이 쓴 뿌리의 결과로 육체적인 질병, 정서적인 피해 그리고 비논리적인 생각에 시달립니다. 격정과 분노도 마찬가지입니다. 격정은 뿌리 깊고 파괴적이며 치밀어 오르는 울화통을 말합니다. 분노는 상대방을 파괴하고 상처를 주려는 욕구입니다. 어떤 사람은 욕을 입에 달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사탄은 이런 욕설을 타고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줍니다. 사탄은 모든 악한 의도를 조장하여 다른 사람을 파멸시키는 일에 집착합니다. 이런 견고한 진들에 꽈리를 틀고 사탄은 역사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능력은 이런 모든 견고한 진을 파괴하며 하나님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합니다. 성령의 검인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님의 십자가의 보혈과 기도를 통해서 우리는 견고한 진을 무너뜨려야 합니다. 요한일서 4:4은 말씀합니다. “자녀들아 너희는 하나님께 속하였고 또 그들을 이기었나니 이는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자보다 크심이라.” 우리가 이를 위해서 기도하며 성령의 능력을 덧입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지혜와 모략의 신이시오, 진리의 왕이시오, 원더풀 카운슬러이십니다. 23절을 보십시오. “나와 함께 하지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 영적인 싸움에서 중간은 없습니다. 세상에는 하나님의 나라와 사탄의 나라 밖에 없습니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 나라에 속했든지 사탄의 나라에 속해 있습니다. 중립적인 위치에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전쟁을 할 때에 중립적인 위치에 있는 사람은 이쪽저쪽 편에서 공격을 받게 되고 보호를 받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싸울 때에는 노선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적극적으로 예수님과 함께 하지 않는 자는 예수님을 반대하는 자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모으지 않고 가만히 있는 것은 흩어지게 하는 일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멀찍이 따랐을 때 그는 결국 사탄의 시험에 들어 예수님은 세 번씩이나 부인하고 통곡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사탄에 사로잡힌 영혼들을 구원하셔서 하나님 나라로 모으고 계십니다. 이 예수님과 함께 하지 않는 자는 반대하는 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속했다면 예수님을 따르면서 그 분의 말씀을 듣고 순종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로서 사탄과 싸우며 하나님 나라를 확장해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사탄보다 더 강하시다는 것입니다. 이미 승리의 싸움을 하고 계십니다. 전쟁 종식과 승리했다는 소식이 곧 울려 퍼질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24-26절을 보십시오.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얻지 못하고 이에 이르되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 가리라 하고 가서 보니 그 집이 청소되고 수리되었거늘 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 심하게 되느니라.” 물 없는 곳은 은혜가 없는 마음, 말씀이 없는 심령으로서 영적인 공백 상태를 말합니다. 우리가 회개하고 마음을 비운 후에 반드시 해야 할 것은 마음을 은혜와 감사로 채우는 것입니다. 말씀과 성령으로 채우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 심하게 되느니라”고 했습니다. 히브리서 6장 4-6절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할 수 없나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놓고 욕되게 함이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초대 왕이었던 사울은 왕이 되기 전에 겸손하고 순종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왕이 된 후에 교만해져서 하나님의 뜻에 불순종합니다. 아말렉을 진멸하라고 했더니 아각 왕을 살려두고 살찐 소와 양들을 전리품으로 가져왔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자 성령이 떠나고 악령이 들었습니다. 그는 이전보다 더욱 비참하게 되어 시기심의 종노릇을 하고 다윗을 죽이고자 추격전을 벌입니다. 그리고 결국 블레셋 족속에게 패하고 비참한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예수님이 38년된 병자를 고쳐준 후에 말씀하셨습니다. “보라 네가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을 용서하신 후에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고 하셨습니다. 사도바울은 에베소서 4:27에서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고 했습니다. 우리도 회개하고 예수님을 영접했으면 그의 순종과 섬김을 배우며 영적으로 자라야 합니다. 그 분의 말씀을 마음에 채우고 순종하는 가운데 예수님의 성품을 닮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기도에 힘쓸 때 마귀에게 틈을 주지 않게 됩니다. 또 마귀의 역사를 분별하고 대비하게 됩니다. 우리는 적극적으로 주님과 함께 일을 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같이 거룩해져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어떤 사람들과 바알세불 논쟁을 하고 있을 때 무리 중에서 한 여자가 음성을 높였습니다. “당신을 밴 태와 당신을 먹인 젖이 복이 있나이다.” 예수님은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킬 때 귀신의 세력에서, 죄의 세력에서 자유롭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킬 때 귀신이 떠나가고 하나님 나라가 임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킬 때 우리 자매님들과 사모님들은 성모 마리아보다 더 복된 여인이 될 것입니다.
29,30절을 보십시오. “무리가 모였을 때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이 세대는 악한 세대라 표적을 구하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나니 요나가 니느웨 사람들에게 표적이 됨과 같이 인자도 이 세대에 그러하리라.” 예수님께서 많은 표적을 행하셨는데도 사람들은 여전히 그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고 전해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무리를 ‘악한 세대’라고 책망하십니다. 악한 세대의 특징은 자기만족적인 신앙생활을 추구합니다. 신비한 현상들만을 즐기고자 합니다. 신비한 체험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악한 세대에게 요나의 표적 밖에 보일 표적이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요나의 표적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을 가리킵니다(마 12:39-41). 저자 누가는 요나가 니느웨 사람들에게 전하는 회개의 메시지와 말씀을 전하는 그의 태도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요나는 니느웨 사람들이 회개하는 것을 싫어했습니다. 그래서 마음을 드려서 말씀을 전하지 않고 건성건성으로 전했습니다. 그런데 요나의 그런 메시지를 듣고 니느웨 사람들이 회개했는데 너희들은 어떠하냐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가 솔로몬의 지혜로운 말을 들으려고 땅 끝에서 왔음이거니와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으며 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들이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하였음이거니와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31,32). 스바 여왕은 솔로몬의 지혜로운 말씀을 듣고자 향료와 금은보석을 낙타에 가득 싣고 왔습니다(왕상 10:1-13).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하는 간절한 소원 때문에 일제 강점기에도 평양에서 사경회가 열리면 경상도와 전라도를 비롯한 전국 각지에서 많은 사람들이 쌀과 반찬을 메고 왔습니다. 숙소도 변변치 않아 쪽잠을 자면서 말씀을 들었습니다. 영적소원을 가진 사람은 말씀을 듣기 위해서 어떤 희생과 수고도 감수합니다. 우리도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데 따르는 수고를 기꺼이 감당해야겠습니다. 말씀을 공부할 때에 애를 쓴 만큼 은혜를 받습니다. 생각하는 것은 정신노동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공부할 때 가만히 듣기만 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생각하고 말을 하고 자기의 삶을 나누기를 바랍니다. 그리할 때 은혜가 풍성하고 서로 힘을 얻게 됩니다. 말씀의 검에 찔려서 귀신이 떠나가고 치료의 역사가 이루어집니다.
예수님은 몸의 등불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등불을 켜서 움 속에나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는 들어가는 자로 그 빛을 보게 하려 함입니다. 등불을 켜는 것은 장식이 아니라 빛을 보게 하려 함입니다. 몸의 등불은 눈입니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입니다. 만일 눈이 나쁘면 그 몸도 어두울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 속에 있는 빛이 어둡지 아니한가 살펴보아야 합니다. 온 몸이 밝아 조금도 어두운 데가 없으면 등불이 나를 비출 때와 같이 온전히 밝을 것입니다. 빛이 내 속에 들어와야 합니다. 빛은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우리를 밝게 해 줍니다. 마음을 밝게 해 주고 어두운 세상 속에서 갈 길을 환하게 비추어 주는 빛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들은 끊임없이 자신의 내면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대로 인도함을 받고 있는지 살펴봐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만이 내면의 어둠을 밝히는 참된 빛입니다. 예수님은 선포하셨습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요8:12).” 우리의 영적인 눈이 밝아져서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 밝히 알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눈을 여시사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보게 하시고, 우리의 귀를 여시사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하여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그리하여 주님과 함께 모으는 일에 참여함으로 진정으로 복된 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것을 인생의 기쁨으로 삼는 자는 복이 있습니다. 이 보배로운 진리의 말씀을 받고 지키는 우리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이번 성탄 연합 예배 가운데 초청 역사를 힘써 이루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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