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03성탄4강(2:1-2:14)/큰 기쁨의 좋은 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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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성탄 제 4 강
큰 기쁨의 좋은 소식
말씀 / 누가복음 2:1-2:14
요절 / 누가복음2:10,11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요절인 10절에서 천사는 말합니다. “무서워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도대체 이 세상 어디에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 있단 말입니까? 우리나라는 요즘 나쁜 소식들이 넘쳐흐르고 있습니다. 북한 핵문제소식, 정치인들의 수백억대 부정대선자금 소식, 이락에서 한국 전기기술자 두 명이 총에 맞아 죽고 두 명이 중상을 입었다는 소식, 대학을 졸업해도 취직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라는 소식 등등. 그러나 천사는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전한다고 말합니다. 이 시간 우리는 구유에 오신 아기 예수님이 왜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 되는가 생각해 보고 성탄의 은혜를 충만히 받기를 기도합니다.
PART 1.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1-7)
예수님이 탄생하실 당시는 로마제국이 유일한 초강대국으로써 세계를 통치하고 있었습니다. 1절을 보십시오. “이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 하였으니” 로마황제 가이사 아구스도는 로마의 평화(Pax Romana)라는 슬로건을 내 걸고 그 당시 세계를 통치했습니다. 그 슬로건의 의미는 로마제국이 온 세계를 다스릴 때만이 세계는 전쟁이 없고 온전한 평화를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정치적인 슬로건에 불과했습니다. 그 당시 식민지 백성들은 로마의 무자비한 정치적인 압제와 경제적인 착취 가운데 도탄에 빠져 강제노동과 굶주림 가운데서 견딜 수 없는 고통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로마황제의 호적 명령은 절대적이었고 무시무시했습니다. 그리하여 유대 모든 사람들이 이 호적명령에 겁을 먹고 무조건 자기 고향으로 가서 호적을 해야만 했습니다(2,3).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날인 결혼식을 앞둔 예비 신랑 신부도 결혼식을 연기하고 호적을 하기 위해 고향으로 가야만 했습니다. 심지어 중환자나 해산이 임박한 임신부도 호적을 하러 자기 고향으로 가야만 했습니다. 호적을 하러 고향으로 돌아가는 행렬에는 나사렛의 목수 요셉과 만삭이 된 마리아도 끼어 있었습니다.
4-7절을 보면, “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인고로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를 향하여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 그 정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하러 올라가니 마리아가 이미 잉태되었더라. 거기 있을 그 때에 해산할 날이 차서 맏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베들레헴이란 ‘떡집’이란 뜻으로 본래 인심이 후한 시골마을이었습니다. 그러나 가이사의 통치아래 사는 사람들은 너무나 살기가 힘들고 각박하여 응급한 산모에게 방 한 칸 내어줄 마음의 여유조차 없었습니다. 마리아가 산통이 시작되어 ‘아이고 배야 아이고 배야’ 하며 울부짖을 때 베들레헴사람들은 다 귀를 틀어막고 못 들은 체 하였습니다. 그 때 요셉의 심적 고통은 얼마나 컸겠습니까? 요셉과 마리아는 어쩔 수 없이 짐승들이 거하는 마구간으로 들어가 해산할 준비를 했습니다. 마리아는 마구간에서 맏아들을 낳아 아이를 포대기에 싸서 구유에 눕혔습니다. 세상에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입니까?
예수님은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시며(빌2:6a), 천지를 창조하신 전능하시고 거룩하신 분이십니다(요1:3,5). 그러나 죄로 인해 심판 받을 우리 인간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육신을 입고 한 어린아이로 비천한 구유에 탄생하셨습니다. 요즘에는 가난한 사람들도 아이를 병원 산부인과에서 낳습니다. 그 당시에도 아무리 가난한 사람도 아이를 마구간에 해산하여 말구유에 뉘인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아기 예수님은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이셨습니다. 비천한 구유에 누이신 아기 예수님은 매우 슬프고 운명적으로 보였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말구유에 오셔서 온 세상을 복음으로 정복하신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의 역사방법을 배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역사는 겸손과 자기희생과 섬김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캠퍼스의 영혼들을 구원하기 위해 더욱 낮아지고 희생하고 섬기는 삶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은 태어나실 때부터 사람들로부터 환영을 받지 못하고 냉대와 무관심 가운데 태어나셨습니다. 예수님은 가이사의 호적명령에 밀려 나사렛에서 300리가 넘는 베들레헴까지 이동하여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힘없는 약소민족의 운명이요 비극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사건에는 놀라운 하나님의 섭리가 있었습니다. 약 700년전 하나님은 미가 선지자를 통하여 인류의 메시아가 다윗의 동네인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실 것을 예언했습니다(미5:2). 하나님은 이 약속의 말씀을 성취하시기 위해 가이사 아구스도의 마음을 움직이시고 그의 막강한 권력을 쓰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개인의 인생을 주관하실 뿐만 아니라 인류역사의 수레바퀴를 돌리시는 역사의 주관자이십니다. 우리가 나의 인생과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믿음으로 세상의 격랑 속에서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고 확신 가운데 믿음의 경주를 경주해야 하겠습니다. 세상과 인류 역사를 주관하시는 역사의 주관자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PART 2. 구세주 예수님(8-14)
8-12에서는 천사가 전한 성탄 메시지입니다. 아기 예수님께서 탄생하신 그 밤에 목자들이 베들레헴 들녘에서 자기 양떼를 지키고 있었습니다(8). 그 때에 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저희를 두루 비치니 저희가 크게 무서워했습니다(9). 천사는 10,11절에서 목자들에게 말했습니다. “무서워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천사는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전한다고 말했습니다. 그 소식은 바로 예수님의 탄생소식이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탄생이 왜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 됩니까?
첫째, 아기 예수님은 약속된 메시아이시기 때문입니다(11a). 11a절을 보면,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아기 예수님이 구약 성경에 예언된 대로 탄생하신 약속된 메시아임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3:15절에 보면 하나님은 일찍이 에덴 동산에서 범죄 하여 영벌을 받게 된 인간들을 위하여 여자의 후손에서 구원자를 보내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그 후 아브라함과 다윗과 여러 선지자들을 통하여 이 약속을 더욱 굳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42대에 걸친 긴긴 세월이 지난 후 드디어 하나님은 우리 인생들을 구원하시고자 구주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 주셨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약속을 많이 하지만 약속을 밥먹듯이 어깁니다. 카네기 보고서에 의하면 보통 사람들은 하루에 20번 이상 거짓말을 한다고 합니다. 하루에 5번 정도의 거짓말은 양호한 편에 속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한 번 약속하신 그 약속을 꼭 지키시는 분이십니다. 구유에 누워있는 연약한 아기가 어떻게 만백성의 구주가 된단 말입니까? 그는 비록 갓난아기일지라도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서 오신 약속된 메시아이시기 때문입니다. 약속대로 인류의 메시아를 이 땅에 보내주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둘째, 아기 예수님은 그리스도 주이시기 때문입니다(11b). 11b를 보면,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 주란 하나님께로부터 기름부음을 받은 구주라는 뜻입니다. 이 세상에는 얼마나 문제가 많습니까? 그러나 가장 근본적이고 가장 큰 문제는 인간의 죄와 죽음의 문제입니다. 죄는 사람을 병들게 만듭니다. 그리하여 사람을 못 쓰게 만듭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21세기의 세상은 눈부신 과학문명의 발달과 특히 정보기술의 발달로 인하여 겉모습은 에덴동산과 같이 살기가 매우 편리해졌습니다. 1930년 미국의 대공황 기에 경제학자 존 케인스는 100년이 지나 GNP가 만불이 되고 인류의 경제문제가 해결되면 지상낙원이 올 것이라고 예언을 했습니다. 그러나 대공황이후 70년이 지나 서구의 GNP가 만불이 훨씬 넘었지만 아직 지상천국은 도래할 조짐조차 없고 더욱 악화되어가고 있습니다. 영국의 이코노미스트 경제주간지는 최근 개인이 소득이 많아져도 행복해지지 않고, 사회전체는 부유해 질수록 왜 만족도가 커지지 않는가에 대한 분석 기사를 실었습니다. 세상이 급속한 산업화로 인하여 인간이 소외되고 인간성을 상실한 결과 사람들은 더욱 공허하고 불안하고 행복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두려움과 염려로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사탄은 문화라는 이름으로 포장하여 소설, 영화, 비디오, 음악, 만화, 인터넷 등 영상매체를 타고 교묘하게 청년 대학생들을 죄에 빠트리게 합니다. 그리하여 이 지구촌은 소돔과 고모라 와 같이 죄악의 왕국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죄는 결코 가볍게 생각할 것이 못됩니다. 죄는 반드시 흔적을 남기고 그 댓가를 치르게 합니다. 죄는 사람들에게 죄의 열매 곧 죽음의 고통을 당하게 합니다. 로마서 6:23절은 말합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그러나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나지 않습니다. 히 9:27절을 보면,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습니다. 죄를 범한 인간은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을 받고 영원히 꺼지지 않는 지옥 불에 던져져 영원한 고통을 받아야 합니다. 이 것이 둘째 사망입니다. 그러나 아기 예수님은 우리를 죄와 죽음으로부터 구원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구세주이십니다.
그러면 구주 예수님은 우리를 어떤 죄에서 구원하십니까? 첫째로, 아기 예수님은 우리를 정욕의 죄에서 구원하십니다. 오늘날 정욕은 여러 가지 영상매체를 타고 젊은이들을 죄의 수렁에 빠트리고 있습니다. 제가 아는 한 형제는 좋은 환경에서 성장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어렸을 때부터 음란 비디오에 빠졌고, 중 고등학교 때는 인터넷 음란사이트에 중독이 되었습니다. 그는 정욕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한 자매님과 사귀어 깊은 관계를 맺는 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그 자매님은 산부인과까지 가게 되었습니다. 그 후 그는 이로 인한 목을 죄이는 죄책감으로 인해 잠을 잘 수 가 없었습니다. 그 자매님과도 헤어졌습니다. 얼굴이 말라 피골이 상접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한 선배를 통해 1:1성경공부에 초대를 받아 말씀공부를 통해 구주이신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는 자기 죄를 철저히 회개하고 사죄의 은혜를 덧입고 정욕 죄에서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 후 자기와 같은 정욕의 노예가 된 지성인들의 목자가 되었습니다.
타임스 잡지에 의하면 한국은 인터넷을 사용하는 비율이 세계 1위라고 합니다. 약 3천8백만 명 이상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한국의 청소년들과 대학생들이 인터넷을 사용하다가 음란 사이트에 빠져 정욕의 노예가 된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한국은 지금부터 20년전만해도 동방예의지국이요 성범죄가 매우 낮은 나라에 속했습니다. 그러나 인터넷의 발달로 인해 한국의 성범죄는 세계 랭킹 2위를 달린다고 합니다. 한국에는 Swapping족속(부부교환족속)이 만 명이 넘었다고 합니다. 하나님 말씀에 의하면 인간은 하나님 앞에 도덕적일 때 인간으로써 가치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아무리 위대한 명성과 부가 있다 해도 그의 생활이 부도덕하고 음란하면 그 사람은 정상적인 사람이 아닙니다. 이 원칙은 국가에도 적용이 됩니다. 로마제국은 막강했으며 전 세계를 정복했습니다. 그러나 로마가 부도덕했을 때 그 나라는 곧 망했습니다. 오늘날 이 세상은 마치 소돔과 고모라 같이 도덕의 둑이 무너져서 음란하고 해괴한 세상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예수님만이 우리를 정욕의 죄에서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둘째로, 예수님은 우리를 운명주의와 절망에서 구원하십니다. 제가 아는 한 일류 대학에 다니는 형제가 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명문대 법대 교수였는데 이단에 빠져 교수직을 사임하고 전 재산을 이단에 바쳐버렸습니다. 그리고 어머니와 이혼을 했습니다. 이후로 그 형제는 극심한 가난과 Broken family의 운명주의 가운데 고통을 받아왔습니다. 그는 암울한 현실의 탈출구로 항상 컴퓨터 게임에 빠졌습니다. 격투 게임을 할 때는 상대를 철저하게 묵사발을 만들거나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았습니다. 그는 일류대학교 컴퓨터 공학과에 들어와서 일학년 때부터 컴퓨터 게임제작 회사에 취직이 되었습니다. 그는 회사 사장에게 최고 인정을 받았으나 운명주의와 절망과 허무감 가운데서 고통을 받았습니다. 그는 이 공허함을 채우기 위해 한 자매님께 구애를 했으나 결국 채이고 말았습니다. 그는 슬픔과 운명주의로 울면서 생의 의욕을 상실하고 자살하고자 했습니다. 그 때 한 선배를 통해 성경공부에 초대를 받아 구주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 절망과 운명주의 가운데서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제는 자기와 같은 운명주의와 절망 가운데 있는 지성인들의 목자가 되었습니다.
요즘 한국은 실업자가 150만이 넘고 특히 청년실업률이 최고에 달하고 있습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토익 900점에 컴퓨터를 잘해도 취직하기가 하늘의 별따기라고 합니다. 어떤 형제는 취직을 위해 직장에 101번째 프로포즈를 했는데 딱지를 맞았다고 합니다. 취직을 하더라도 대부분의 직장이 연봉제이기 때문에 연말이 되면 직장에서 쫓겨나지 않을까 하는 불안과 초조한 마음으로 고민할 수밖에 없습니다. 더구나 요즘에는 “사오정, 오륙도, 삼팔선”이라는 말이 유행하고 있습니다. 또한 요즘에 한국에서는 사교육비가 수십억조가 된다고 합니다. 이런 암담한 현실 때문에 일부 부유층 임신부들이 해산을 하러 베들레헴으로 가지 않고 미국 LA로 몰려가고 있습니다. 한국의 전문직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63%가 이민을 가고 싶다는 통계가 나와 있습니다. 이런 우리들의 현실을 바라볼 때 우리는 절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구주 예수님은 우리를 운명적인 상황과 절망으로부터 구원하십니다. 누가복음 1:78,79절은 말합니다. “이는 우리 하나님의 긍휼을 인함이라 이로써 돋는 해가 위로부터 우리에게 임하여 어두움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에게 비취고 우리 발을 평강의 길로 인도하시리로다 하니라.” 예수님은 돋는 해가 되십니다. 예수님은 살아 계시며 우리 각자의 인생을 선하신 뜻과 절대적인 사랑으로 섭리하십니다. 우리가 이 예수님을 영접하고 믿을 때, 예수님은 흑암과 사망의 그늘을 일순간에 몰아내고 찬란한 빛을 비추십니다. 돋는 해 예수님은 절망 중에 희망을 주며 낙망 중에 비전을 줍니다. 오늘날은 지구촌시대입니다. 우리가 우물안 개구리처럼 좁은 한국 땅의 현실만 보지말고, 전 세계로 눈을 돌려야 하겠습니다. 전 세계 캠퍼스로 나아가 평신도 선교사로서 하나님의 세계 구속사에 주역들로 쓰임 받는 위대한 인물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우리를 절망과 운명주의로부터 구원하시는 돋는 해 예수님을 찬양합니다.
셋째로, 구주 예수님은 우리를 죽음과 사망권세로부터 구원하십니다. 구주 예수님은 하늘의 영광과 권세와 특권을 버리고 이 세상에 비천한 말구유에 오셨습니다. 일생동안 병든 자들을 고치시고 복음을 전파하느라 중노동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온 세상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세상 죄를 위한 대속물로써 물과 피를 다 쏟으셨습니다(벧전2:24). 이사야 선지자는 세상 죄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실 예수님을 다음과 같이 예언했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며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53:5,6) 주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혔을 때 한 로마 군병이 예수님의 왼쪽 옆구리를 창으로 찔렀습니다. 거기에서는 많은 피가 쏟아졌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에게 견딜 수 없는 고통을 주면서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고 있는 자들과 모든 죄인들을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23:34)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님은 삼일만에 부활하사 왕의 왕이 되시고 주의 주가 되셨습니다. 죽음은 아담의 범죄로 인하여 세상에 들어왔습니다. 요한복음 11장에 보면 나사로의 죽음은 마리아의 가정을 두려움과 절망과 슬픔이 가득한 집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요11:19,31,33). 인간은 죽음 앞에서 얼마나 무력한 존재입니까? 반면에 죽음이 주는 사망권세는 얼마나 무시무시합니까? 인간이 이 세상에서 불행한 것은 사망권세로 인해 견딜 수 없는 고통을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을 불행하게 하는 사망 권세는 불안과 두려움과 절망과 체념, 슬픔, 눈물, 원망, 허무함, 무의미입니다. 이 세상의 문학은 이런 사망권세를 아름답게 미화시키고 포장을 합니다. 그러나 이 사망권세는 인간을 무력하게 하고 불행한 미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그러나 구주이신 예수님은 우리를 죽음과 사망권세로부터 구원하십니다. 사망권세에 시달리고 있던 마리아도 오라비 나사로의 부활을 보고 사망권세로부터 구원을 받고 다시 새 생명을 덧입게 되었습니다. 구주 예수님은 사망과 사망권세에 시달려 불행한 일생을 살 우리들을 사망과 사망권세로부터 해방시키고 참 행복한 인생을 살게 하십니다. 우리를 죽음과 사망권세로부터 구원하신 우리 구주 예수님을 찬양합니다.
천사는 계속해서 말했습니다.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12) 강보여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가 구주의 표적입니다. 천사가 구주 탄생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것을 마치자 허다한 천군이 그 천사와 함께 찬양을 했습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13,14)”.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심은 하나님께 영광이요 그를 영접하고 기뻐하는 성도들에게는 평화가 임합니다.
결론적으로, 구유에 오신 예수님은 약속된 메시아이십니다. 구유에 오신 아기 예수님은 우리를 죄와 죽음의 권세로부터 구원하신 구주이십니다. 이 시간 구유에 오신 아기 예수님을 새롭게 심령에 영접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의 심령에 성탄의 은혜와 평화가 충만하기를 기도합니다.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큰 기쁨의 좋은 소식
말씀 / 누가복음 2:1-2:14
요절 / 누가복음2:10,11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요절인 10절에서 천사는 말합니다. “무서워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도대체 이 세상 어디에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 있단 말입니까? 우리나라는 요즘 나쁜 소식들이 넘쳐흐르고 있습니다. 북한 핵문제소식, 정치인들의 수백억대 부정대선자금 소식, 이락에서 한국 전기기술자 두 명이 총에 맞아 죽고 두 명이 중상을 입었다는 소식, 대학을 졸업해도 취직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라는 소식 등등. 그러나 천사는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전한다고 말합니다. 이 시간 우리는 구유에 오신 아기 예수님이 왜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 되는가 생각해 보고 성탄의 은혜를 충만히 받기를 기도합니다.
PART 1.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1-7)
예수님이 탄생하실 당시는 로마제국이 유일한 초강대국으로써 세계를 통치하고 있었습니다. 1절을 보십시오. “이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 하였으니” 로마황제 가이사 아구스도는 로마의 평화(Pax Romana)라는 슬로건을 내 걸고 그 당시 세계를 통치했습니다. 그 슬로건의 의미는 로마제국이 온 세계를 다스릴 때만이 세계는 전쟁이 없고 온전한 평화를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정치적인 슬로건에 불과했습니다. 그 당시 식민지 백성들은 로마의 무자비한 정치적인 압제와 경제적인 착취 가운데 도탄에 빠져 강제노동과 굶주림 가운데서 견딜 수 없는 고통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로마황제의 호적 명령은 절대적이었고 무시무시했습니다. 그리하여 유대 모든 사람들이 이 호적명령에 겁을 먹고 무조건 자기 고향으로 가서 호적을 해야만 했습니다(2,3).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날인 결혼식을 앞둔 예비 신랑 신부도 결혼식을 연기하고 호적을 하기 위해 고향으로 가야만 했습니다. 심지어 중환자나 해산이 임박한 임신부도 호적을 하러 자기 고향으로 가야만 했습니다. 호적을 하러 고향으로 돌아가는 행렬에는 나사렛의 목수 요셉과 만삭이 된 마리아도 끼어 있었습니다.
4-7절을 보면, “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인고로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를 향하여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 그 정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하러 올라가니 마리아가 이미 잉태되었더라. 거기 있을 그 때에 해산할 날이 차서 맏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베들레헴이란 ‘떡집’이란 뜻으로 본래 인심이 후한 시골마을이었습니다. 그러나 가이사의 통치아래 사는 사람들은 너무나 살기가 힘들고 각박하여 응급한 산모에게 방 한 칸 내어줄 마음의 여유조차 없었습니다. 마리아가 산통이 시작되어 ‘아이고 배야 아이고 배야’ 하며 울부짖을 때 베들레헴사람들은 다 귀를 틀어막고 못 들은 체 하였습니다. 그 때 요셉의 심적 고통은 얼마나 컸겠습니까? 요셉과 마리아는 어쩔 수 없이 짐승들이 거하는 마구간으로 들어가 해산할 준비를 했습니다. 마리아는 마구간에서 맏아들을 낳아 아이를 포대기에 싸서 구유에 눕혔습니다. 세상에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입니까?
예수님은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시며(빌2:6a), 천지를 창조하신 전능하시고 거룩하신 분이십니다(요1:3,5). 그러나 죄로 인해 심판 받을 우리 인간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육신을 입고 한 어린아이로 비천한 구유에 탄생하셨습니다. 요즘에는 가난한 사람들도 아이를 병원 산부인과에서 낳습니다. 그 당시에도 아무리 가난한 사람도 아이를 마구간에 해산하여 말구유에 뉘인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아기 예수님은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이셨습니다. 비천한 구유에 누이신 아기 예수님은 매우 슬프고 운명적으로 보였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말구유에 오셔서 온 세상을 복음으로 정복하신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의 역사방법을 배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역사는 겸손과 자기희생과 섬김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캠퍼스의 영혼들을 구원하기 위해 더욱 낮아지고 희생하고 섬기는 삶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은 태어나실 때부터 사람들로부터 환영을 받지 못하고 냉대와 무관심 가운데 태어나셨습니다. 예수님은 가이사의 호적명령에 밀려 나사렛에서 300리가 넘는 베들레헴까지 이동하여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힘없는 약소민족의 운명이요 비극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사건에는 놀라운 하나님의 섭리가 있었습니다. 약 700년전 하나님은 미가 선지자를 통하여 인류의 메시아가 다윗의 동네인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실 것을 예언했습니다(미5:2). 하나님은 이 약속의 말씀을 성취하시기 위해 가이사 아구스도의 마음을 움직이시고 그의 막강한 권력을 쓰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개인의 인생을 주관하실 뿐만 아니라 인류역사의 수레바퀴를 돌리시는 역사의 주관자이십니다. 우리가 나의 인생과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믿음으로 세상의 격랑 속에서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고 확신 가운데 믿음의 경주를 경주해야 하겠습니다. 세상과 인류 역사를 주관하시는 역사의 주관자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PART 2. 구세주 예수님(8-14)
8-12에서는 천사가 전한 성탄 메시지입니다. 아기 예수님께서 탄생하신 그 밤에 목자들이 베들레헴 들녘에서 자기 양떼를 지키고 있었습니다(8). 그 때에 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저희를 두루 비치니 저희가 크게 무서워했습니다(9). 천사는 10,11절에서 목자들에게 말했습니다. “무서워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천사는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전한다고 말했습니다. 그 소식은 바로 예수님의 탄생소식이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탄생이 왜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 됩니까?
첫째, 아기 예수님은 약속된 메시아이시기 때문입니다(11a). 11a절을 보면,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아기 예수님이 구약 성경에 예언된 대로 탄생하신 약속된 메시아임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3:15절에 보면 하나님은 일찍이 에덴 동산에서 범죄 하여 영벌을 받게 된 인간들을 위하여 여자의 후손에서 구원자를 보내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그 후 아브라함과 다윗과 여러 선지자들을 통하여 이 약속을 더욱 굳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42대에 걸친 긴긴 세월이 지난 후 드디어 하나님은 우리 인생들을 구원하시고자 구주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 주셨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약속을 많이 하지만 약속을 밥먹듯이 어깁니다. 카네기 보고서에 의하면 보통 사람들은 하루에 20번 이상 거짓말을 한다고 합니다. 하루에 5번 정도의 거짓말은 양호한 편에 속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한 번 약속하신 그 약속을 꼭 지키시는 분이십니다. 구유에 누워있는 연약한 아기가 어떻게 만백성의 구주가 된단 말입니까? 그는 비록 갓난아기일지라도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서 오신 약속된 메시아이시기 때문입니다. 약속대로 인류의 메시아를 이 땅에 보내주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둘째, 아기 예수님은 그리스도 주이시기 때문입니다(11b). 11b를 보면,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 주란 하나님께로부터 기름부음을 받은 구주라는 뜻입니다. 이 세상에는 얼마나 문제가 많습니까? 그러나 가장 근본적이고 가장 큰 문제는 인간의 죄와 죽음의 문제입니다. 죄는 사람을 병들게 만듭니다. 그리하여 사람을 못 쓰게 만듭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21세기의 세상은 눈부신 과학문명의 발달과 특히 정보기술의 발달로 인하여 겉모습은 에덴동산과 같이 살기가 매우 편리해졌습니다. 1930년 미국의 대공황 기에 경제학자 존 케인스는 100년이 지나 GNP가 만불이 되고 인류의 경제문제가 해결되면 지상낙원이 올 것이라고 예언을 했습니다. 그러나 대공황이후 70년이 지나 서구의 GNP가 만불이 훨씬 넘었지만 아직 지상천국은 도래할 조짐조차 없고 더욱 악화되어가고 있습니다. 영국의 이코노미스트 경제주간지는 최근 개인이 소득이 많아져도 행복해지지 않고, 사회전체는 부유해 질수록 왜 만족도가 커지지 않는가에 대한 분석 기사를 실었습니다. 세상이 급속한 산업화로 인하여 인간이 소외되고 인간성을 상실한 결과 사람들은 더욱 공허하고 불안하고 행복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두려움과 염려로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사탄은 문화라는 이름으로 포장하여 소설, 영화, 비디오, 음악, 만화, 인터넷 등 영상매체를 타고 교묘하게 청년 대학생들을 죄에 빠트리게 합니다. 그리하여 이 지구촌은 소돔과 고모라 와 같이 죄악의 왕국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죄는 결코 가볍게 생각할 것이 못됩니다. 죄는 반드시 흔적을 남기고 그 댓가를 치르게 합니다. 죄는 사람들에게 죄의 열매 곧 죽음의 고통을 당하게 합니다. 로마서 6:23절은 말합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그러나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나지 않습니다. 히 9:27절을 보면,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습니다. 죄를 범한 인간은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을 받고 영원히 꺼지지 않는 지옥 불에 던져져 영원한 고통을 받아야 합니다. 이 것이 둘째 사망입니다. 그러나 아기 예수님은 우리를 죄와 죽음으로부터 구원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구세주이십니다.
그러면 구주 예수님은 우리를 어떤 죄에서 구원하십니까? 첫째로, 아기 예수님은 우리를 정욕의 죄에서 구원하십니다. 오늘날 정욕은 여러 가지 영상매체를 타고 젊은이들을 죄의 수렁에 빠트리고 있습니다. 제가 아는 한 형제는 좋은 환경에서 성장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어렸을 때부터 음란 비디오에 빠졌고, 중 고등학교 때는 인터넷 음란사이트에 중독이 되었습니다. 그는 정욕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한 자매님과 사귀어 깊은 관계를 맺는 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그 자매님은 산부인과까지 가게 되었습니다. 그 후 그는 이로 인한 목을 죄이는 죄책감으로 인해 잠을 잘 수 가 없었습니다. 그 자매님과도 헤어졌습니다. 얼굴이 말라 피골이 상접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한 선배를 통해 1:1성경공부에 초대를 받아 말씀공부를 통해 구주이신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는 자기 죄를 철저히 회개하고 사죄의 은혜를 덧입고 정욕 죄에서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 후 자기와 같은 정욕의 노예가 된 지성인들의 목자가 되었습니다.
타임스 잡지에 의하면 한국은 인터넷을 사용하는 비율이 세계 1위라고 합니다. 약 3천8백만 명 이상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한국의 청소년들과 대학생들이 인터넷을 사용하다가 음란 사이트에 빠져 정욕의 노예가 된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한국은 지금부터 20년전만해도 동방예의지국이요 성범죄가 매우 낮은 나라에 속했습니다. 그러나 인터넷의 발달로 인해 한국의 성범죄는 세계 랭킹 2위를 달린다고 합니다. 한국에는 Swapping족속(부부교환족속)이 만 명이 넘었다고 합니다. 하나님 말씀에 의하면 인간은 하나님 앞에 도덕적일 때 인간으로써 가치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아무리 위대한 명성과 부가 있다 해도 그의 생활이 부도덕하고 음란하면 그 사람은 정상적인 사람이 아닙니다. 이 원칙은 국가에도 적용이 됩니다. 로마제국은 막강했으며 전 세계를 정복했습니다. 그러나 로마가 부도덕했을 때 그 나라는 곧 망했습니다. 오늘날 이 세상은 마치 소돔과 고모라 같이 도덕의 둑이 무너져서 음란하고 해괴한 세상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예수님만이 우리를 정욕의 죄에서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둘째로, 예수님은 우리를 운명주의와 절망에서 구원하십니다. 제가 아는 한 일류 대학에 다니는 형제가 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명문대 법대 교수였는데 이단에 빠져 교수직을 사임하고 전 재산을 이단에 바쳐버렸습니다. 그리고 어머니와 이혼을 했습니다. 이후로 그 형제는 극심한 가난과 Broken family의 운명주의 가운데 고통을 받아왔습니다. 그는 암울한 현실의 탈출구로 항상 컴퓨터 게임에 빠졌습니다. 격투 게임을 할 때는 상대를 철저하게 묵사발을 만들거나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았습니다. 그는 일류대학교 컴퓨터 공학과에 들어와서 일학년 때부터 컴퓨터 게임제작 회사에 취직이 되었습니다. 그는 회사 사장에게 최고 인정을 받았으나 운명주의와 절망과 허무감 가운데서 고통을 받았습니다. 그는 이 공허함을 채우기 위해 한 자매님께 구애를 했으나 결국 채이고 말았습니다. 그는 슬픔과 운명주의로 울면서 생의 의욕을 상실하고 자살하고자 했습니다. 그 때 한 선배를 통해 성경공부에 초대를 받아 구주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 절망과 운명주의 가운데서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제는 자기와 같은 운명주의와 절망 가운데 있는 지성인들의 목자가 되었습니다.
요즘 한국은 실업자가 150만이 넘고 특히 청년실업률이 최고에 달하고 있습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토익 900점에 컴퓨터를 잘해도 취직하기가 하늘의 별따기라고 합니다. 어떤 형제는 취직을 위해 직장에 101번째 프로포즈를 했는데 딱지를 맞았다고 합니다. 취직을 하더라도 대부분의 직장이 연봉제이기 때문에 연말이 되면 직장에서 쫓겨나지 않을까 하는 불안과 초조한 마음으로 고민할 수밖에 없습니다. 더구나 요즘에는 “사오정, 오륙도, 삼팔선”이라는 말이 유행하고 있습니다. 또한 요즘에 한국에서는 사교육비가 수십억조가 된다고 합니다. 이런 암담한 현실 때문에 일부 부유층 임신부들이 해산을 하러 베들레헴으로 가지 않고 미국 LA로 몰려가고 있습니다. 한국의 전문직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63%가 이민을 가고 싶다는 통계가 나와 있습니다. 이런 우리들의 현실을 바라볼 때 우리는 절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구주 예수님은 우리를 운명적인 상황과 절망으로부터 구원하십니다. 누가복음 1:78,79절은 말합니다. “이는 우리 하나님의 긍휼을 인함이라 이로써 돋는 해가 위로부터 우리에게 임하여 어두움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에게 비취고 우리 발을 평강의 길로 인도하시리로다 하니라.” 예수님은 돋는 해가 되십니다. 예수님은 살아 계시며 우리 각자의 인생을 선하신 뜻과 절대적인 사랑으로 섭리하십니다. 우리가 이 예수님을 영접하고 믿을 때, 예수님은 흑암과 사망의 그늘을 일순간에 몰아내고 찬란한 빛을 비추십니다. 돋는 해 예수님은 절망 중에 희망을 주며 낙망 중에 비전을 줍니다. 오늘날은 지구촌시대입니다. 우리가 우물안 개구리처럼 좁은 한국 땅의 현실만 보지말고, 전 세계로 눈을 돌려야 하겠습니다. 전 세계 캠퍼스로 나아가 평신도 선교사로서 하나님의 세계 구속사에 주역들로 쓰임 받는 위대한 인물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우리를 절망과 운명주의로부터 구원하시는 돋는 해 예수님을 찬양합니다.
셋째로, 구주 예수님은 우리를 죽음과 사망권세로부터 구원하십니다. 구주 예수님은 하늘의 영광과 권세와 특권을 버리고 이 세상에 비천한 말구유에 오셨습니다. 일생동안 병든 자들을 고치시고 복음을 전파하느라 중노동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온 세상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세상 죄를 위한 대속물로써 물과 피를 다 쏟으셨습니다(벧전2:24). 이사야 선지자는 세상 죄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실 예수님을 다음과 같이 예언했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며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53:5,6) 주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혔을 때 한 로마 군병이 예수님의 왼쪽 옆구리를 창으로 찔렀습니다. 거기에서는 많은 피가 쏟아졌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에게 견딜 수 없는 고통을 주면서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고 있는 자들과 모든 죄인들을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23:34)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님은 삼일만에 부활하사 왕의 왕이 되시고 주의 주가 되셨습니다. 죽음은 아담의 범죄로 인하여 세상에 들어왔습니다. 요한복음 11장에 보면 나사로의 죽음은 마리아의 가정을 두려움과 절망과 슬픔이 가득한 집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요11:19,31,33). 인간은 죽음 앞에서 얼마나 무력한 존재입니까? 반면에 죽음이 주는 사망권세는 얼마나 무시무시합니까? 인간이 이 세상에서 불행한 것은 사망권세로 인해 견딜 수 없는 고통을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을 불행하게 하는 사망 권세는 불안과 두려움과 절망과 체념, 슬픔, 눈물, 원망, 허무함, 무의미입니다. 이 세상의 문학은 이런 사망권세를 아름답게 미화시키고 포장을 합니다. 그러나 이 사망권세는 인간을 무력하게 하고 불행한 미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그러나 구주이신 예수님은 우리를 죽음과 사망권세로부터 구원하십니다. 사망권세에 시달리고 있던 마리아도 오라비 나사로의 부활을 보고 사망권세로부터 구원을 받고 다시 새 생명을 덧입게 되었습니다. 구주 예수님은 사망과 사망권세에 시달려 불행한 일생을 살 우리들을 사망과 사망권세로부터 해방시키고 참 행복한 인생을 살게 하십니다. 우리를 죽음과 사망권세로부터 구원하신 우리 구주 예수님을 찬양합니다.
천사는 계속해서 말했습니다.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12) 강보여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가 구주의 표적입니다. 천사가 구주 탄생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것을 마치자 허다한 천군이 그 천사와 함께 찬양을 했습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13,14)”.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심은 하나님께 영광이요 그를 영접하고 기뻐하는 성도들에게는 평화가 임합니다.
결론적으로, 구유에 오신 예수님은 약속된 메시아이십니다. 구유에 오신 아기 예수님은 우리를 죄와 죽음의 권세로부터 구원하신 구주이십니다. 이 시간 구유에 오신 아기 예수님을 새롭게 심령에 영접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의 심령에 성탄의 은혜와 평화가 충만하기를 기도합니다.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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