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03성탄2강(1:26-56)/그 나라가 무궁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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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성탄 제 2 강 122
말씀 / 누가복음 1:26-56
요절 / 누가복음 1:32,33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
“저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을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위를 저에게 주시리니 영원히 야곱의 집에 왕 노릇 하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
오늘 말씀은 마리아에게 임한 수태고지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마리아에게 임한 은혜가 무엇인가 생각해 보고 그가 잉태할 예수님은 어떤 분이시며 그의 나라의 성격에 대해서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I. 은혜를 입은 마리아(26-30)
엘리사벳이 잉태한 지 여섯째 달에 천사 가브리엘이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 사는 처녀 마리아에게 찾아갔습니다. 갈릴리 나사렛은 아주 시골이었습니다. 오염되지 않은 맑은 시냇물이 흐르고 밤이면 보석같은 별들이 반짝이고 달빛이 은은하게 비취는 곳이었습니다. 한편 나다나엘은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요 1:46)”고 했습니다. 한마디로 나사렛은 이방의 갈릴리라고 말할 정도로 멸시를 받던 동네였습니다(사9:1). 이 마을은 예루살렘 북동쪽으로 약 70마일 떨어진 이스르엘 또는 에스드라엘론(Esdraelon) 평야 북편의 깊은 산 계곡에 위치해 있습니다. 나사렛 뒷편에는 레바논과 언제나 눈이 덮여있는 헬몬산이 있고, 다른 쪽에는 푸르고 높은 갈멜산이 위치했는데 이 산은 지중해와 맞닿아 있습니다. 현재는 이 지역을 '엔 나시라'(EN Nasirah)로 부른다고 합니다. 나사렛은 예수님께서 출생 후 잠시 애굽으로 피난했던 때를 제외하고는 태아에서부터 유년기를 거쳐 성년이 되기까지 일생을 보낸 고향입니다. 예수님이 복음을 전파하실 때는 나사렛을 떠났지만 예수님의 이름 앞에는 항상 나사렛이라는 말이 붙어 다녔습니다.(마21:11,26:71,막16:6,눅18:37) 크리스챤이라는 말도 히브리어로는 '노쯔리', 아랍어로는 '낫스라이'라고 불리웠는데, 이는 '나사렛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가브리엘은 다윗의 자손 요셉이라 하는 사람과 정혼한 처녀에게 이르렀는데 그 처녀의 이름은 마리아였습니다. 정혼한 마리아는 요셉에 대한 사랑이 점점 깊어가고 있었고 친구들에게 요셉 자랑을 하면서 하루 하루를 보냈을 것입니다. 그리고 요셉과 함께 살면서 아기를 낳고 행복한 가정을 꾸릴 것을 생각하면 자기도 모르게 얼굴이 붉어졌습니다. 요셉은 성실한 목수요 의롭고 진실되고 믿음직한 청년이었습니다. 마리아는 이런 요셉을 위해서 요리를 하면서 하루 종일이라도 함께 있고 싶었습니다.
이런 그에게 어느날 가브리엘 천사가 느닷없이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마리아에게 의미심장한 인사를 했습니다. 28절을 보십시오. “그에게 들어가 가로되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지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 하니” 일반적으로 은혜란 값없이 주어지는 선물을 뜻합니다. 우리는 공짜로 무엇을 얻었을 때 또는 선물을 받았을 때 은혜를 받았다고 합니다. 시험을 칠 때 공부를 한데서 나오면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다고 좋아합니다. 사람들은 은혜란 이름이 좋아서 이은혜, 은혜가 오래 가도록 장은혜, 진짜 은혜라고 진은혜, 은혜가 강하다고 강은혜라고 이름을 짓습니다.
성경에서 은혜라는 말을 사용할 때 기본적으로 구원의 은혜를 말합니다. 이는 죄인에게 임한 하나님의 죄사함의 은총을 말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죄로 말미암아 파멸에 이를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우리 인생이 정욕과 음란, 이기심과 탐욕, 시기심과 질투, 교만과 열등감, 게르음과 무기력, 불신과 거짓과 원한 등 갖가지 죄로 인해 병들고 고통하며 시름시름 죽어갈 때 하나님께서 이 무거운 죄짐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우리는 죄를 쉽게 짓지만 죄에는 무서운 독소가 있어서 우리를 파멸에 이르게 합니다. 이 죄는 자신의 삶뿐만 아니라 가정을 파괴시키고, 다른 사람의 삶도 파괴시킵니다. 우리는 죄로 인해 망가진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죄로 인해 망가진 인생은 어느 누구도 그 무엇으로도 회복할 수 없습니다. 돈으로도, 현대 의학으로도, 인간적인 사랑으로도 고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의 망가진 인생을 회복시켜 주십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우리의 슬픔과 운명과 연약함과 모든 죄짐을 다 담당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내 대신 고난을 당하시고 죽으심으로 우리는 죄사함과 영생을 얻게 되었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은혜의 두 번째 의미는 사명과 관련된 은혜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우리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았다”고 함으로써 은혜와 사명을 동일시 했습니다. 이를 통해 사명이 곧 은혜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명을 받았다는 것은 곧 은혜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구원의 은혜를 누리고 축복받기를 원하지만 사명을 감당하기는 부담스럽게 여기고 힘들어 합니다. 왜 그럴까요? 이는 은혜의 개념을 자기 중심적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은혜의 개념을 거저 받고 누리고 즐기는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사명을 감당하려면 세상에서 손해보는 아픔, 자기 꿈을 희생해야 하는 아픔, 사람들도부터 오해 받는 아픔, 십자가를 지는 아픔 등 여러 모양의 아픔이 있습니다. 은혜가 큰 만큼 아픔도 큽니다. 그러나 아픔이 있기 때문에 그 사명은 더욱 고귀한 것입니다. 아픔이 그 은혜를 더욱 값지게 합니다. 마리아도 하나님이 주신 은혜가 없었다면 한 평범한 여자의 일생을 살 수 밖에 없었습니다. 매일 밥하고 빨래하고 아이들 뒤치다꺼리하고, 남편을 섬기다가 머리에 인생의 서리가 내리며 그녀의 인생을 마감하는 종치는 소리를 듣게 될 것입니다. 그녀는 그냥 그렇게 평범하게 살다가 갈릴리 바다에서 물거품과 같이 사라질 수밖에 없는 의미없는 인생이었습니다. 아무도 마리아를 기억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하나님의 은혜로 부르심을 받아 모든 인류가 흠모하는 성모가 되었습니다. 그녀가 성모가 되기 위해서는 많은 아픔을 감당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요셉으로부터 오해받는 아픔, 사람들의 비난하는 눈짓을 받아야 하고 자기의 꿈이 깨질 수 있습니다. 아들 예수님이 십자가에 처참하게 처형되는 모습을 보며 칼이 그 마음을 찌르듯하는 아픔을 겪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이런 희생과 아픔을 이기고 인류의 어머니로 쓰임받는 은혜를 기꺼이 감당했습니다.
이처럼 사명과 관련된 은혜는 부담스럽기는 하지만 실상은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을만큼 가치있고 영광스러운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 직분을 은혜라 생각하고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숱한 고생을 기쁨으로 감당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15:10).”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후4:7-10).” 우리가 구원의 은혜에 기초해서 사명의 은혜를 일생 감당하는 가운데 더 깊은 은혜의 바다로 나아가기를 기도합니다.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찌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
II.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31-56)
그러면 마리아의 몸을 빌어 나실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첫째, 예수님은 구원자이십니다. 31절을 보십시오. “보라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예수란 여호와는 구원자시라는 뜻입니다. 인간은 죄로 인해서 고통과 절망 가운데 있었습니다. 죄로 인해서 인간은 먹고 살기 위한 일상에 얽매이게 되었는데 그런 삶이 고달픕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 주신 가정과 우정과 축복을 누리면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결국 인간은 고독과 두려움, 시기와 질투, 염려, 상실감, 병들고, 늙고, 쇠하다가 결국은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이런 인생의 비참함으로 인해서 울부짖고 있는 영혼들이 많이 있습니다. 사단은 끊임없이 인간을 공격하여 넘어뜨리고 있습니다. 자기의 노예가 된 자들을 마음껏 휘두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과 낙원을 잃어버리고 자아를 상실한 인간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구원자를 보내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는 왕으로 오시되 정복하고 다스리기 위해서 오십니다. 특히 죄와 죽음의 권세를 정복하고 그 백성을 사랑과 평화로 다스리기 위해서 오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마리아를 택하시고 그를 통해서 메시야를 이 세상에 보내고자 작정하셨습니다.
둘째, 예수님은 위대한 분이십니다. 32,33절을 보십시오. “저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을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위를 저에게 주시리니 영원히 야곱의 집에 왕 노릇 하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 큰 자는 다른 사람을 섬기는 종이요 겸손하게 낮아지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그 특권과 영광을 버리고 이 땅에 오십니다. 그는 죄인들을 섬기시되 왕같이 섬기셨습니다. 예수님의 섬김을 받은 사람들은 그 사랑에 감격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다섯 남편이나 갈아 치운 사마리아 여인을 황공주 같이 섬기셨습니다. 그의 섬김을 통해서 사마리아 여인은 속에서 솟아나는 생수를 맛보고 관계성을 맺기 어려워하던 동네 사람들에게 “와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라고 증거했습니다. 예수님은 38년 동안 중풍병으로 누워있던 병자를 네가 낫고자 하느냐는 말씀으로 낫고자 하는 소원을 심어 주시고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하심으로 그를 치료하셨습니다. 그를 의존심이 많던 사람에서 자립적이고 개척하는 사람으로 변화시키셨습니다. 예수님은 서로 잘난 체 하고 크고자 하는 제자들을 종과 같이 낮아져서 발을 씻겨 주시고 수건으로 닦아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왕자요 공주와 같이 섬겨주셨습니다. 그의 희생과 용서, 사랑과 포용력, 정직과 신실함, 그의 삶이 끼친 영향 등은 그가 정말로 위대한 분이셨음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세례 요한이 여자가 낳은 자 중에서 큰 자라면 예수님은 본래 큰 분이십니다. 한마디로 격이 다른 큰 자이십니다.
셋째,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기 위해서 세례를 받으시고 물에서 올라오실 때에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눅3:22)”고 선포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광풍이 몰아치는 갈릴리 바다를 잠잠하라, 고요하라 말씀하심으로 잔잔한 호수로 만드셨습니다. 그는 이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음을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님을 직접 목격한 제자들이 그를 보고 “주는 그리시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그의 죽음을 지켜보던 백부장이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라고 고백했습니다. 롬1:4절은 말씀합니다.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예수 그리스도시니라.”그는 죽음 권세를 파하시고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습니다.
넷째, 그는 왕 중의 왕이십니다.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위를 저에게 주시리니 영원히 야곱의 집에 왕 노릇 하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 예수님은 육신으로는 다윗의 후손으로서 왕손이십니다. 그는 성경에 약속된 메시야이십니다. 그는 왕으로서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을 다스리십니다. 왕이 하는 일은 백성들을 사랑과 공의, 평화로 통치하는 일입니다. 그의 통치를 통해서 질서가 서고 풍성한 삶을 살고 그 나라를 확장하고 유지 발전시킵니다. 예수님은 왕으로서 우리로 하여금 생명을 얻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고 오셨습니다. 그는 사단의 권세를 파하시고 우리를 그 공격으로부터 보호해 주십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은사를 주셔서 그의 몸된 교회를 섬기고 문화를 창달하게 하십니다. 장차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우리는 해되는 것이나 악한 것이나 질병이나 죽음이 없는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됩니다. 예수님의 다스림을 받을 때 우리는 의와 평강과 희락으로 충만하게 됩니다(롬14:17). 하나님께서는 그 나라를 예수님께 넘겨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그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습니다(골1:13).
예수님은 영원히 왕 노릇하실 것입니다. 이는 그가 영원하시고 죄가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다스리는 나라는 무궁합니다. 이는 그가 그 나라를 공의와 평화로 다스리기 때문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영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세상 왕들은 육신을 입고 있기 때문에 때가 되면 죽습니다. 진시황도 불로초를 먹고 영원히 다스리고 싶었지만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세상 나라는 아무리 길어도 천년을 넘지 못했습니다. 이는 그 나라가 부패하고 무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나라는 영원합니다. 그 나라에는 창조력과 생명력이 충만합니다. 그래서 그 나라는 갈수록 왕성해 집니다.
세례 요한은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면서 하나님 나라가 곧 임할 것이라고 증거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새로운 시대와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다고 선포하셨을 뿐만 아니라 어떤 면에서 그 나라와 통치가 이미 임했다고도 선포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사역 속에서 이미 하나님 나라는 싹이 텄던 것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통치가 미치는 곳이라는 점에서 하나님 나라의 모형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할 뿐만 아니라 왕으로도 고백합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통치를 받는 성도들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인 것입니다. 인간의 그 어떤 노력으로도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그곳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은 단 한 가지뿐입니다.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에 의지하는 길이 바로 그것입니다. 교회는 구속함 받은 자들의 모임입니다. 물론 아직은 완전한 영화의 단계에 이르지는 못했지만,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들은 이미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새 생명으로 거듭난 존재들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난 성도는 이제 더 이상 죄의 노예가 아니라 의로운 존재입니다. 교회에 베푸시는 주님의 평강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이 아니한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평강입니다. 또한 그리스도를 통해 누리는 희락은 일시적이고 육신적인 것이 아니라 영원하며 영적인 기쁨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사랑이 충만한 곳입니다.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 역시 사랑으로 하나된 공동체입니다.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 이웃을 자신의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는 계명은, 시대와 공간을 넘어 영원토록 적용되어야 할 진리입니다. 또한 신자들은 엄청난 죄악을 사함받은 자들답게 자신에게 악을 행하는 자들을 진심으로 용서할 줄 알아야 합니다. 주님은 '무자비한 종의 비유'를 통해 이 점을 강조하셨습니다. 이를 역으로 말하자면, 형제를 용서할 줄 모르는 자는 주 예수님의 사죄의 은총을 제대로 깨닫지 못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모형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구성원들인 각 성도들에게는 하나님 나라의 시민다운 특권과 의무가 주어져 있습니다. 우리가 그 특권을 제대로 누리며 또한 그 의무를 충실하게 이행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통치에 절대적으로 복종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시민답게 이 세상과 구별되게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이 죄악된 도성으로부터 불러 내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시 이 세상에 보냄을 받았습니다. 이 세상에 살면서 죄악에 물들지 않고 거룩하게 살면서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라고 보내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확장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이 세상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최종적인 완성, 즉 새 하늘과 새 땅, 영생 등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는데 그리스도의 재림 때 비로소 성취될 것입니다. 그 때는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계 21:4).” 마리아는 이렇게 위대하신 만왕의 왕, 구원자, 하나님의 아들을 낳고 기르며 섬기는 은혜를 누리게 된 것입니다.
천사의 말을 들은 마리아는 한 가지 의문이 생겼습니다. “나는 사내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 순결한 마리아에게 이것은 정말 신비한 일이었습니다. 그에 대한 천사의 대답이 무엇입니까? 35절을 보십시오. “천사가 대답하여 가로되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으리라.” 성령의 능력이 그를 덮으신다는 말씀은 하나님의 영광이 성막을 덮듯이, 창조 시에 성령이 수면 위를 덮듯이 마리아에게 임하여 생명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천사는 ‘한다면 하는 것이지 무슨 말이 많냐’고 타박하지 않았습니다. 마리아의 의문에 대해서 공감하고 어떤 믿음을 심었습니까? 36,37절을 보십시오. “보라 네 친족 엘리사벳도 늙어서 아들을 배었느니라 본래 수태하지 못한다 하던 이가 이미 여섯 달이 되었나니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느니라.” 엘리사벳은 육개월 전에 천사 가브리엘의 고지대로 아들을 배었습니다. 천사 가브리엘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다고 믿음을 심었습니다. 그러자 마리아는 믿음으로 결단했습니다. 38절을 보십시오. “마리아가 가로되 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하매 천사가 떠나가니라.” 주의 계집종이란 말은 노예를 뜻합니다. 노예는 자유의지도 없고 인간적인 권리도 주장할 수 없고 자기 소유도 없습니다. 마리아는 자신의 임신 사실이 밝혀질 경우 자신에게 미치게 될 온갖 비난과 돌팔매질을 감수하고서라도 오직 하나님의 처분에다 모든 것을 맡기려는 심정을 이 말로써 표현한 것입니다. 또한 이는 하나님 앞에 선 인생의 겸손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성령은 인격이기 때문에 기쁨으로 영접하는 자를 통해서 일하십니다. 마리아의 이 고백은 결코 가볍게 여겨질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처녀 수태로 인해 파급될 문제는 엄청난 것입니다. 파혼과 함께 부정한 여인으로 몰려 세인의 멸시와 지탄을 받아야 하고 자칫하면 돌에 맞아 죽어야할지 모르는 상황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천사의 마지막 말씀,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느니라(37절)”이 마리아의 가슴 속에 살아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이 일을 시작하신 분이 하나님이시니 모든 일을 다 하나님이 처리하시리라는 굳센 믿음이 마리아의 심령을 사로잡았습니다. 마리아는 결혼 안한 폭 잡고 천사 가브리엘의 체면을 보아서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마지못해서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마리아는 하나님을 믿고 자기에게 주신 말씀을 기초로 순종했습니다. 마리아가 말씀에 순종함으로써 하나님의 만민 구속 역사에 인류가 흠모하는 성모 마리아로 쓰임 받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었습니다.
천사가 떠나가자 마리아는 얼른 일어나 유대 산 동네에 있는 엘리사벳의 집으로 찾아갔습니다. 마리아에게 어떤 이야기도 듣지 않았는데 엘리사벳은 성령이 충만하여 큰 소리로 마리아를 축복했습니다. “여자 중에 네가 복이 있으며 네 태중의 아이도 복이 있도다 내 주의 모친이 내게 나아오니 이 어찌 된 일인고 보라 네 문안하는 소리가 내 귀에 들릴 때에 아이가 내 복중에서 기쁨으로 뛰놀았도다 믿은 여자에게 복이 있도다 주께서 그에게 하신 말씀이 반드시 이루리라(46-48).” 엘리사벳을 통해 하나님의 역사를 확인한 마리아의 마음에서는 감사와 찬양이 터져나오게 되었습니다.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 그 계집종의 비천함을 돌아보셨음이라. 보라 이제 후로는 만세에 나를 복이 있다 일컬으리로다.” 그리고 메시야로 인해서 이루어질 공의의 역사에 대해서 노래합니다. 마리아의 찬양은 매우 위엄있고 절제되어 있습니다. 마리아는 모든 것을 초월하는 하나님의 완전성, 곧 그의 거룩한 능력(49, 51절), 그의 성결(49절), 그의 자비(50절), 그의 신실성(54, 55절)을 소프라노의 목소리로 노래하고 있습니다.
이상에서 우리는 비천한 시골 처녀 마리아를 택하여 성모로 쓰신 하나님의 은혜를 살펴보았습니다. 마리아에게 임한 은혜를 아픔이 있기에 더욱 값비싼 것입니다. 또한 마리아를 통해서 나실 예수님은 진정으로 위대한 자시오, 하나님의 아들이요 우리의 왕이심을 배웠습니다. 예수님은 평화의 왕이요 공평과 정의의 왕이요 영원한 우리의 왕이십니다. 예수님이 다스리는 나라는 영원무궁합니다. 우리가 그 나라의 백성답게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우리 마음에 충만하게 역사하사 마리아와 같은 찬송시를 부르기를 기도합니다.
말씀 / 누가복음 1:26-56
요절 / 누가복음 1:32,33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
“저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을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위를 저에게 주시리니 영원히 야곱의 집에 왕 노릇 하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
오늘 말씀은 마리아에게 임한 수태고지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마리아에게 임한 은혜가 무엇인가 생각해 보고 그가 잉태할 예수님은 어떤 분이시며 그의 나라의 성격에 대해서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I. 은혜를 입은 마리아(26-30)
엘리사벳이 잉태한 지 여섯째 달에 천사 가브리엘이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 사는 처녀 마리아에게 찾아갔습니다. 갈릴리 나사렛은 아주 시골이었습니다. 오염되지 않은 맑은 시냇물이 흐르고 밤이면 보석같은 별들이 반짝이고 달빛이 은은하게 비취는 곳이었습니다. 한편 나다나엘은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요 1:46)”고 했습니다. 한마디로 나사렛은 이방의 갈릴리라고 말할 정도로 멸시를 받던 동네였습니다(사9:1). 이 마을은 예루살렘 북동쪽으로 약 70마일 떨어진 이스르엘 또는 에스드라엘론(Esdraelon) 평야 북편의 깊은 산 계곡에 위치해 있습니다. 나사렛 뒷편에는 레바논과 언제나 눈이 덮여있는 헬몬산이 있고, 다른 쪽에는 푸르고 높은 갈멜산이 위치했는데 이 산은 지중해와 맞닿아 있습니다. 현재는 이 지역을 '엔 나시라'(EN Nasirah)로 부른다고 합니다. 나사렛은 예수님께서 출생 후 잠시 애굽으로 피난했던 때를 제외하고는 태아에서부터 유년기를 거쳐 성년이 되기까지 일생을 보낸 고향입니다. 예수님이 복음을 전파하실 때는 나사렛을 떠났지만 예수님의 이름 앞에는 항상 나사렛이라는 말이 붙어 다녔습니다.(마21:11,26:71,막16:6,눅18:37) 크리스챤이라는 말도 히브리어로는 '노쯔리', 아랍어로는 '낫스라이'라고 불리웠는데, 이는 '나사렛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가브리엘은 다윗의 자손 요셉이라 하는 사람과 정혼한 처녀에게 이르렀는데 그 처녀의 이름은 마리아였습니다. 정혼한 마리아는 요셉에 대한 사랑이 점점 깊어가고 있었고 친구들에게 요셉 자랑을 하면서 하루 하루를 보냈을 것입니다. 그리고 요셉과 함께 살면서 아기를 낳고 행복한 가정을 꾸릴 것을 생각하면 자기도 모르게 얼굴이 붉어졌습니다. 요셉은 성실한 목수요 의롭고 진실되고 믿음직한 청년이었습니다. 마리아는 이런 요셉을 위해서 요리를 하면서 하루 종일이라도 함께 있고 싶었습니다.
이런 그에게 어느날 가브리엘 천사가 느닷없이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마리아에게 의미심장한 인사를 했습니다. 28절을 보십시오. “그에게 들어가 가로되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지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 하니” 일반적으로 은혜란 값없이 주어지는 선물을 뜻합니다. 우리는 공짜로 무엇을 얻었을 때 또는 선물을 받았을 때 은혜를 받았다고 합니다. 시험을 칠 때 공부를 한데서 나오면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다고 좋아합니다. 사람들은 은혜란 이름이 좋아서 이은혜, 은혜가 오래 가도록 장은혜, 진짜 은혜라고 진은혜, 은혜가 강하다고 강은혜라고 이름을 짓습니다.
성경에서 은혜라는 말을 사용할 때 기본적으로 구원의 은혜를 말합니다. 이는 죄인에게 임한 하나님의 죄사함의 은총을 말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죄로 말미암아 파멸에 이를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우리 인생이 정욕과 음란, 이기심과 탐욕, 시기심과 질투, 교만과 열등감, 게르음과 무기력, 불신과 거짓과 원한 등 갖가지 죄로 인해 병들고 고통하며 시름시름 죽어갈 때 하나님께서 이 무거운 죄짐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우리는 죄를 쉽게 짓지만 죄에는 무서운 독소가 있어서 우리를 파멸에 이르게 합니다. 이 죄는 자신의 삶뿐만 아니라 가정을 파괴시키고, 다른 사람의 삶도 파괴시킵니다. 우리는 죄로 인해 망가진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죄로 인해 망가진 인생은 어느 누구도 그 무엇으로도 회복할 수 없습니다. 돈으로도, 현대 의학으로도, 인간적인 사랑으로도 고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의 망가진 인생을 회복시켜 주십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우리의 슬픔과 운명과 연약함과 모든 죄짐을 다 담당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내 대신 고난을 당하시고 죽으심으로 우리는 죄사함과 영생을 얻게 되었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은혜의 두 번째 의미는 사명과 관련된 은혜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우리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았다”고 함으로써 은혜와 사명을 동일시 했습니다. 이를 통해 사명이 곧 은혜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명을 받았다는 것은 곧 은혜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구원의 은혜를 누리고 축복받기를 원하지만 사명을 감당하기는 부담스럽게 여기고 힘들어 합니다. 왜 그럴까요? 이는 은혜의 개념을 자기 중심적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은혜의 개념을 거저 받고 누리고 즐기는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사명을 감당하려면 세상에서 손해보는 아픔, 자기 꿈을 희생해야 하는 아픔, 사람들도부터 오해 받는 아픔, 십자가를 지는 아픔 등 여러 모양의 아픔이 있습니다. 은혜가 큰 만큼 아픔도 큽니다. 그러나 아픔이 있기 때문에 그 사명은 더욱 고귀한 것입니다. 아픔이 그 은혜를 더욱 값지게 합니다. 마리아도 하나님이 주신 은혜가 없었다면 한 평범한 여자의 일생을 살 수 밖에 없었습니다. 매일 밥하고 빨래하고 아이들 뒤치다꺼리하고, 남편을 섬기다가 머리에 인생의 서리가 내리며 그녀의 인생을 마감하는 종치는 소리를 듣게 될 것입니다. 그녀는 그냥 그렇게 평범하게 살다가 갈릴리 바다에서 물거품과 같이 사라질 수밖에 없는 의미없는 인생이었습니다. 아무도 마리아를 기억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하나님의 은혜로 부르심을 받아 모든 인류가 흠모하는 성모가 되었습니다. 그녀가 성모가 되기 위해서는 많은 아픔을 감당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요셉으로부터 오해받는 아픔, 사람들의 비난하는 눈짓을 받아야 하고 자기의 꿈이 깨질 수 있습니다. 아들 예수님이 십자가에 처참하게 처형되는 모습을 보며 칼이 그 마음을 찌르듯하는 아픔을 겪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이런 희생과 아픔을 이기고 인류의 어머니로 쓰임받는 은혜를 기꺼이 감당했습니다.
이처럼 사명과 관련된 은혜는 부담스럽기는 하지만 실상은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을만큼 가치있고 영광스러운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 직분을 은혜라 생각하고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숱한 고생을 기쁨으로 감당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15:10).”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후4:7-10).” 우리가 구원의 은혜에 기초해서 사명의 은혜를 일생 감당하는 가운데 더 깊은 은혜의 바다로 나아가기를 기도합니다.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찌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
II.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31-56)
그러면 마리아의 몸을 빌어 나실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첫째, 예수님은 구원자이십니다. 31절을 보십시오. “보라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예수란 여호와는 구원자시라는 뜻입니다. 인간은 죄로 인해서 고통과 절망 가운데 있었습니다. 죄로 인해서 인간은 먹고 살기 위한 일상에 얽매이게 되었는데 그런 삶이 고달픕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 주신 가정과 우정과 축복을 누리면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결국 인간은 고독과 두려움, 시기와 질투, 염려, 상실감, 병들고, 늙고, 쇠하다가 결국은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이런 인생의 비참함으로 인해서 울부짖고 있는 영혼들이 많이 있습니다. 사단은 끊임없이 인간을 공격하여 넘어뜨리고 있습니다. 자기의 노예가 된 자들을 마음껏 휘두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과 낙원을 잃어버리고 자아를 상실한 인간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구원자를 보내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는 왕으로 오시되 정복하고 다스리기 위해서 오십니다. 특히 죄와 죽음의 권세를 정복하고 그 백성을 사랑과 평화로 다스리기 위해서 오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마리아를 택하시고 그를 통해서 메시야를 이 세상에 보내고자 작정하셨습니다.
둘째, 예수님은 위대한 분이십니다. 32,33절을 보십시오. “저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을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위를 저에게 주시리니 영원히 야곱의 집에 왕 노릇 하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 큰 자는 다른 사람을 섬기는 종이요 겸손하게 낮아지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그 특권과 영광을 버리고 이 땅에 오십니다. 그는 죄인들을 섬기시되 왕같이 섬기셨습니다. 예수님의 섬김을 받은 사람들은 그 사랑에 감격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다섯 남편이나 갈아 치운 사마리아 여인을 황공주 같이 섬기셨습니다. 그의 섬김을 통해서 사마리아 여인은 속에서 솟아나는 생수를 맛보고 관계성을 맺기 어려워하던 동네 사람들에게 “와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라고 증거했습니다. 예수님은 38년 동안 중풍병으로 누워있던 병자를 네가 낫고자 하느냐는 말씀으로 낫고자 하는 소원을 심어 주시고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하심으로 그를 치료하셨습니다. 그를 의존심이 많던 사람에서 자립적이고 개척하는 사람으로 변화시키셨습니다. 예수님은 서로 잘난 체 하고 크고자 하는 제자들을 종과 같이 낮아져서 발을 씻겨 주시고 수건으로 닦아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왕자요 공주와 같이 섬겨주셨습니다. 그의 희생과 용서, 사랑과 포용력, 정직과 신실함, 그의 삶이 끼친 영향 등은 그가 정말로 위대한 분이셨음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세례 요한이 여자가 낳은 자 중에서 큰 자라면 예수님은 본래 큰 분이십니다. 한마디로 격이 다른 큰 자이십니다.
셋째,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기 위해서 세례를 받으시고 물에서 올라오실 때에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눅3:22)”고 선포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광풍이 몰아치는 갈릴리 바다를 잠잠하라, 고요하라 말씀하심으로 잔잔한 호수로 만드셨습니다. 그는 이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음을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님을 직접 목격한 제자들이 그를 보고 “주는 그리시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그의 죽음을 지켜보던 백부장이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라고 고백했습니다. 롬1:4절은 말씀합니다.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예수 그리스도시니라.”그는 죽음 권세를 파하시고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습니다.
넷째, 그는 왕 중의 왕이십니다.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위를 저에게 주시리니 영원히 야곱의 집에 왕 노릇 하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 예수님은 육신으로는 다윗의 후손으로서 왕손이십니다. 그는 성경에 약속된 메시야이십니다. 그는 왕으로서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을 다스리십니다. 왕이 하는 일은 백성들을 사랑과 공의, 평화로 통치하는 일입니다. 그의 통치를 통해서 질서가 서고 풍성한 삶을 살고 그 나라를 확장하고 유지 발전시킵니다. 예수님은 왕으로서 우리로 하여금 생명을 얻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고 오셨습니다. 그는 사단의 권세를 파하시고 우리를 그 공격으로부터 보호해 주십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은사를 주셔서 그의 몸된 교회를 섬기고 문화를 창달하게 하십니다. 장차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우리는 해되는 것이나 악한 것이나 질병이나 죽음이 없는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됩니다. 예수님의 다스림을 받을 때 우리는 의와 평강과 희락으로 충만하게 됩니다(롬14:17). 하나님께서는 그 나라를 예수님께 넘겨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그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습니다(골1:13).
예수님은 영원히 왕 노릇하실 것입니다. 이는 그가 영원하시고 죄가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다스리는 나라는 무궁합니다. 이는 그가 그 나라를 공의와 평화로 다스리기 때문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영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세상 왕들은 육신을 입고 있기 때문에 때가 되면 죽습니다. 진시황도 불로초를 먹고 영원히 다스리고 싶었지만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세상 나라는 아무리 길어도 천년을 넘지 못했습니다. 이는 그 나라가 부패하고 무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나라는 영원합니다. 그 나라에는 창조력과 생명력이 충만합니다. 그래서 그 나라는 갈수록 왕성해 집니다.
세례 요한은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면서 하나님 나라가 곧 임할 것이라고 증거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새로운 시대와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다고 선포하셨을 뿐만 아니라 어떤 면에서 그 나라와 통치가 이미 임했다고도 선포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사역 속에서 이미 하나님 나라는 싹이 텄던 것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통치가 미치는 곳이라는 점에서 하나님 나라의 모형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할 뿐만 아니라 왕으로도 고백합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통치를 받는 성도들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인 것입니다. 인간의 그 어떤 노력으로도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그곳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은 단 한 가지뿐입니다.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에 의지하는 길이 바로 그것입니다. 교회는 구속함 받은 자들의 모임입니다. 물론 아직은 완전한 영화의 단계에 이르지는 못했지만,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들은 이미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새 생명으로 거듭난 존재들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난 성도는 이제 더 이상 죄의 노예가 아니라 의로운 존재입니다. 교회에 베푸시는 주님의 평강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이 아니한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평강입니다. 또한 그리스도를 통해 누리는 희락은 일시적이고 육신적인 것이 아니라 영원하며 영적인 기쁨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사랑이 충만한 곳입니다.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 역시 사랑으로 하나된 공동체입니다.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 이웃을 자신의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는 계명은, 시대와 공간을 넘어 영원토록 적용되어야 할 진리입니다. 또한 신자들은 엄청난 죄악을 사함받은 자들답게 자신에게 악을 행하는 자들을 진심으로 용서할 줄 알아야 합니다. 주님은 '무자비한 종의 비유'를 통해 이 점을 강조하셨습니다. 이를 역으로 말하자면, 형제를 용서할 줄 모르는 자는 주 예수님의 사죄의 은총을 제대로 깨닫지 못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모형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구성원들인 각 성도들에게는 하나님 나라의 시민다운 특권과 의무가 주어져 있습니다. 우리가 그 특권을 제대로 누리며 또한 그 의무를 충실하게 이행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통치에 절대적으로 복종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시민답게 이 세상과 구별되게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이 죄악된 도성으로부터 불러 내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시 이 세상에 보냄을 받았습니다. 이 세상에 살면서 죄악에 물들지 않고 거룩하게 살면서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라고 보내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확장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이 세상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최종적인 완성, 즉 새 하늘과 새 땅, 영생 등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는데 그리스도의 재림 때 비로소 성취될 것입니다. 그 때는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계 21:4).” 마리아는 이렇게 위대하신 만왕의 왕, 구원자, 하나님의 아들을 낳고 기르며 섬기는 은혜를 누리게 된 것입니다.
천사의 말을 들은 마리아는 한 가지 의문이 생겼습니다. “나는 사내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 순결한 마리아에게 이것은 정말 신비한 일이었습니다. 그에 대한 천사의 대답이 무엇입니까? 35절을 보십시오. “천사가 대답하여 가로되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으리라.” 성령의 능력이 그를 덮으신다는 말씀은 하나님의 영광이 성막을 덮듯이, 창조 시에 성령이 수면 위를 덮듯이 마리아에게 임하여 생명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천사는 ‘한다면 하는 것이지 무슨 말이 많냐’고 타박하지 않았습니다. 마리아의 의문에 대해서 공감하고 어떤 믿음을 심었습니까? 36,37절을 보십시오. “보라 네 친족 엘리사벳도 늙어서 아들을 배었느니라 본래 수태하지 못한다 하던 이가 이미 여섯 달이 되었나니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느니라.” 엘리사벳은 육개월 전에 천사 가브리엘의 고지대로 아들을 배었습니다. 천사 가브리엘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다고 믿음을 심었습니다. 그러자 마리아는 믿음으로 결단했습니다. 38절을 보십시오. “마리아가 가로되 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하매 천사가 떠나가니라.” 주의 계집종이란 말은 노예를 뜻합니다. 노예는 자유의지도 없고 인간적인 권리도 주장할 수 없고 자기 소유도 없습니다. 마리아는 자신의 임신 사실이 밝혀질 경우 자신에게 미치게 될 온갖 비난과 돌팔매질을 감수하고서라도 오직 하나님의 처분에다 모든 것을 맡기려는 심정을 이 말로써 표현한 것입니다. 또한 이는 하나님 앞에 선 인생의 겸손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성령은 인격이기 때문에 기쁨으로 영접하는 자를 통해서 일하십니다. 마리아의 이 고백은 결코 가볍게 여겨질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처녀 수태로 인해 파급될 문제는 엄청난 것입니다. 파혼과 함께 부정한 여인으로 몰려 세인의 멸시와 지탄을 받아야 하고 자칫하면 돌에 맞아 죽어야할지 모르는 상황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천사의 마지막 말씀,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느니라(37절)”이 마리아의 가슴 속에 살아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이 일을 시작하신 분이 하나님이시니 모든 일을 다 하나님이 처리하시리라는 굳센 믿음이 마리아의 심령을 사로잡았습니다. 마리아는 결혼 안한 폭 잡고 천사 가브리엘의 체면을 보아서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마지못해서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마리아는 하나님을 믿고 자기에게 주신 말씀을 기초로 순종했습니다. 마리아가 말씀에 순종함으로써 하나님의 만민 구속 역사에 인류가 흠모하는 성모 마리아로 쓰임 받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었습니다.
천사가 떠나가자 마리아는 얼른 일어나 유대 산 동네에 있는 엘리사벳의 집으로 찾아갔습니다. 마리아에게 어떤 이야기도 듣지 않았는데 엘리사벳은 성령이 충만하여 큰 소리로 마리아를 축복했습니다. “여자 중에 네가 복이 있으며 네 태중의 아이도 복이 있도다 내 주의 모친이 내게 나아오니 이 어찌 된 일인고 보라 네 문안하는 소리가 내 귀에 들릴 때에 아이가 내 복중에서 기쁨으로 뛰놀았도다 믿은 여자에게 복이 있도다 주께서 그에게 하신 말씀이 반드시 이루리라(46-48).” 엘리사벳을 통해 하나님의 역사를 확인한 마리아의 마음에서는 감사와 찬양이 터져나오게 되었습니다.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 그 계집종의 비천함을 돌아보셨음이라. 보라 이제 후로는 만세에 나를 복이 있다 일컬으리로다.” 그리고 메시야로 인해서 이루어질 공의의 역사에 대해서 노래합니다. 마리아의 찬양은 매우 위엄있고 절제되어 있습니다. 마리아는 모든 것을 초월하는 하나님의 완전성, 곧 그의 거룩한 능력(49, 51절), 그의 성결(49절), 그의 자비(50절), 그의 신실성(54, 55절)을 소프라노의 목소리로 노래하고 있습니다.
이상에서 우리는 비천한 시골 처녀 마리아를 택하여 성모로 쓰신 하나님의 은혜를 살펴보았습니다. 마리아에게 임한 은혜를 아픔이 있기에 더욱 값비싼 것입니다. 또한 마리아를 통해서 나실 예수님은 진정으로 위대한 자시오, 하나님의 아들이요 우리의 왕이심을 배웠습니다. 예수님은 평화의 왕이요 공평과 정의의 왕이요 영원한 우리의 왕이십니다. 예수님이 다스리는 나라는 영원무궁합니다. 우리가 그 나라의 백성답게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우리 마음에 충만하게 역사하사 마리아와 같은 찬송시를 부르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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