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03성탄 1강(눅1:5-25)/주의 백성을 예비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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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성탄 말씀 제 1 강
말씀 / 누가복음 1:5-25
요절 / 누가복음 1:17
주의 백성을 예비하리라
“저가 또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 앞서 가서 아비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리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고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예비하리라.”
이제 2003년도가 기울어 가고 있습니다. 성탄 시즌이 되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육신을 입고 오사 함께 거하신 은혜를 깊이 묵상해 야겠습니다. 오늘은 예수님의 오심을 예비한 세례 요한의 탄생 배경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세례 요한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의인 사가랴와 엘리사벳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들이 어떤 점에서 메시야의 선구자를 낳고 기를 수 있었는가를 생각해보아야겠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택하셨던 이유가 무엇인가? 또 세례 요한이 와서 할 일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고자합니다. 주님께서 저희에게 성탄을 잘 준비할 수 있도록 은혜를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때는 유대 왕 헤롯 때였습니다. 유대 왕 헤롯은 에돔 자손으로서 주전 37-4년간 유대의 분봉왕으로 다스린 지략과 용맹이 뛰어난 폭군이었습니다. 그는 열명의 아내와 열명의 아들을 가졌고 그중 첫 다섯 아내를 통한 그의 자녀들은 모두 권력과 불륜으로 유명했습니다. 헤롯 대왕이 처음에는 백성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 성전 재건도 하고 수많은 공공 건물을 건립하고 치안을 바로 잡았습니다. 그는 정치적 술수가 워낙 뛰어나, 로마의 비호 아래 대제사장의 임명과 폐위에까지 간여하여 그 타락함이 극에 달했습니다(마 2:1). 말년에는 의심과 두려움에 시달리고 병에도 시달렸습니다. 그는 정권 유지를 위해 정적을 제거하고 심지어 자기 자식과 아내 및 장모, 처남, 삼촌 등을 죽일 정도로 잔인했습니다. 실로 이 시기는 종교적으로 타락한 시기였고 정치, 사회적으로 비극적이며 희망이 없는 시대였습니다. 이제 이러한 비극
과 어두움을 배경으로, 누가는 새로운 희망의 빛을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5,6절을 보십시오. “아비야 반열에 제사장 하나가 있으니 이름은 사가랴요 그 아내는 아론의 자손이니 이름은 엘리사벳이라 이 두 사람이 하나님 앞에 의인이니 주의 모든 계명과 규례대로 흠이 없이 행하더라.” 사가랴와 엘리사벳은 그 시대의 등불과 같았습니다. 밤이 어두울수록 빛은 더욱 밝게 드러나듯이 그들의 삶이 그러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 의인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면전에서 의롭게 살았습니다. 두 사람 중에 한 사람도 믿음으로 살기가 어려운데 두 사람 다 믿음으로 살았습니다. 욥의 아내는 고난 당하는 남편을 보고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으라고 말하였습니다. 죤 웨슬레의 아내는 웨슬레가 메시지를 전하고 들어오면 후라이팬으로 머리를 때리고 머리를 뽑아 놓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사가랴와 엘리사벳은 가정과 회당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고 가르치며 제사장으로 살았습니다. 성경에 여인의 이름은 잘 나오지 않는데 특별히 엘리사벳에 대해서 기록한 것을 볼 때 아론의 자손답게 매우 훌륭하였던 것 같습니다. 어려운 시대일수록 하나님 앞에 의롭게 사는 가정이 매우 중요합니다. 가정에서 하나님을 경외하고 의롭게 살 때 그 자녀들이 거룩하게 성장합니다. 자녀들은 보고 배운 대로 행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 부부가 하나님 앞에 의롭게 살았기 때문에 세례요한도 헤롯 안디파스가 그 동생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를 취하자 회개하도록 촉구할 수 있었습니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아집니다. 대부분의 제사장들이 헤롯의 눈치를 보면서 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지도자가 저렇게 악한데 우리가 깨끗하게 살 필요가 있는가 회의하기 쉽습니다. 이런 시대에 정직하고 의롭게 사는 사람들이 회의와 허탈감에 빠지기 쉽습니다. 정치인들이 기업으로부터 수백억씩 받아 사욕을 채우는 시대에 돈 몇푼을 모으기 위해서 애쓰는 사람들은 깊은 상처를 받게 됩니다. 나라도 엉망이고 자식도 없고 기도를 해도 응답도 안된다 생각하고 막살기가 얼마나 쉽겠습니까? 그러나 사가랴와 엘리사벳은 주의 모든 계명과 규례대로 흠없이 행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경외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 앞에” 살았다는 이 말이 그들의 신앙의 원동력을 한 마디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모든 가치관의 기준이 하나님이었습니다. 의인의 특징은 정직하다는 것입니다. 우리 나라는 거짓된 사람들이 많습니다. 센타에서도 남의 노트북을 훔쳐가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복사비를 넣는 통의 돈을 꺼내가는 사람이 다 있습니다. 사람들은 보지 못했지만 하나님께서는 다 보고 계셨습니다. 죄를 짓고도 두려워할 줄 모르는 세대를 볼 때 마음이 아픕니다. 링컨은 매우 정직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우체국에서 일할 때 17달러라는 돈이 남았는데 원인을 찾을 수 없자 그것을 종이에 싸서 서랍에 보관을 했습니다. 그것을 몇 년 뒤에 인계한 직원이 조사하다가 숫자가 틀리자 링컨을 비난했습니다. 그러나 링컨은 바로 그우체국으로 가서 서랍을 열어 그 돈을 내주었다고 합니다. 우리는 단돈 10원이라도 정직하게 관리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셈할 때가 온다는 것을 알고 깨끗하고 정직하게 살아야합니다. 이런 나라가 복된 나라요 이런 나라가 강한 나라입니다. 아무리 돈을 많이 벌어도 부정한 돈으로 벌면 독수리가 날아감 같이 하루아침에 날아가 버립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은 당장 눈에 보이는 결과가 없기 때문에 말씀대로 산다는 것은 유익한 것 같지 않습니다. 제사장들이 헤롯의 종교 자문관 노릇을 하면서 아첨하고 있을 때 사가랴가 말씀대로 사는 모습을 보고 욕도 많이 했을 것입니다. 다 먹고 살기위한 것이라고 합리화하였을 것입니다. 그는 주변에서 견제도 받고 힘든 소리도 많이 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삶에는 영적인 기쁨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위로도 있었습니다. 시1편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시1:1-3).” 그들은 어두운 시대에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소망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메시야를 소망하면서 한 사람을 준비시키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어떤 아픔이 있었습니까? 7절을 보십시오. “엘리사벳이 수태를 못하므로 저희가 무자하고 두 사람의 나이 많더라.” 그들에게는 자식을 낳지 못하는 인간적인 아픔이 있었습니다. 왜 믿음으로 말씀대로 사는데 복이 주어지지 않는가? 당시 자녀는 복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들은 생명의 열매가 없는 문제로 많은 슬픔에 빠졌습니다. 기다리다 지쳐서 이제는 머리가 희어졌고 두 사람의 나이는 많아졌습니다. 누구에게서도 희망을 찾기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눈에 보이는 열매가 없었지만 하나님께 신실했고 충성스러웠습니다. 그들은 자식 문제로 인해서 믿음이 더욱 순수해졌습니다.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자기들에게 맡겨진 사명에 충성을 다 했습니다. 그들의 소망은 오직 주님께 있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아브라함과 같이 인간적인 방법으로 자식을 얻고자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의 기도에 응답해 주시지 않는다고 하나님을 원망하며 믿음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세속적인 삶을 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일편단심으로 하나님께 충성을 다 했습니다. 그들의 믿음은 하나님의 마음에 쏙 들었습니다.
마침 사가랴가 그 반열의 차례대로 제사장의 직무를 하나님 앞에 행할새 제사장의 전례를 따라 제비를 뽑아 주의 성소에 들어가 분향하고 모든 백성은 그 분향하는 시간에 밖에서 기도하였습니다. 당시에 제사장 가문에는 24반열이 있었고 각 반열은 순서에 따라 1주일씩 성전에서 봉사를 했습니다. 한 반열이 800명이고 전체는 2만명이었습니다. 마침 사가랴가 그 반열의 차례대로 제사장의 직무를 행하는데 제비를 뽑아서 주의 성소에 들어가 분향을 하였습니다. 제비를 뽑아서 분향을 하기 때문에 일생에 한 번도 분향을 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기회는 준비된 자에게 온다고 했습니다. 사가랴는 변함없이 하나님 앞에 충성을 다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때가 되자 그로 하여금 성소에 들어가 분향을 할 기회를 주셨습니다. 분향은 성도의 기도를 상징합니다. 사가랴는 성소에 들어가서 그 백성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맨 마지막에는 자신을 위해서 기도할 때 아들을 달라고 기도했을 것입니다.
그때 “주의 사자가 저에게 나타나 향단 우편에 선 것을 사가랴가 보고 놀라며 무서워”했습니다. 이때 천사가 말했습니다. “사가랴여 무서워 말라 너의 간구함이 들린지라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네게 아들을 낳아 주리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라.” 너의 간구함이 들렸다는 말씀은 원어로는 에이세쿠스데(eijshkouvsqh)로서 직설법 과거 수동태로 되어 있습니다. 이는 과거에 한번 동작이 발생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효력이 계속해서 현재에도 미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의 기도는 하나님께 이미 들려졌습니다. 하나님께서 들으셨다는 것은 그의 기도가 응답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는 그의 기도가 응답되었다는 확증입니다. 믿음을 심어 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기도를 하면서 정말 내 기도를 하나님께서 들으실까 의문을 가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기도를 다 듣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기도하기를 주저하지 마십시오. 담대히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 여러분의 필요를 간구하십시요.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기뻐하시고 그 이름을 위하여 응답해주십니다.
우리는 여기서 사가랴의 충성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고자합니다. 충성은 믿을 수 있는 신빙성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대한 순종과 신뢰의 태도 속에 견고하게 거함을 뜻합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외적인 상태나 표준에 의존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신실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그분을 따르는 자들 역시 신실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계2:10b).”고 약속하셨습니다. 충성을 했지만 눈에 보이는 열매가 없을 때, 목자 생활을 한 지 오년, 십년이 흘러도 열매가 생기지 않을 때 인생의 허무함을 느끼기기 쉽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하나님만을 경외하고 섬겼습니다. 잠언이 청년의 지혜라면 욥기는 중년의 지혜서이고 전도서는 노년의 지혜서라고 합니다. 전도서는 인생의 모든 것이 헛되다고 노래하면서 이렇게 결론을 맺고 있습니다. “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전 12:13).” 이 말씀은 우리에게 충성의 본질을 잘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 사가랴는 한마디로 상황에 관계없이 기도하는 의인이었습니다. 우리 삶에는 언제나 좋은 날만 있지는 않습니다. 인생 길에는 즐겁고 화려한 날만 계속되지는 않습니다. 언짢고 우울하고 답답한 날도 많습니다. 그러나 그 환경이 만족하든 불만족하든 간에 묵묵히 그 환경을 착실하게 극복해 나가야 합니다. 그 어떤 환경 속에서도 주님을 향한 신앙심을 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환경을 두려워한다면 그것은 주님을 불신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도 해 받을 것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충성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환경의 불만을 극복하는 일입니다. 부유할 때나 가난할 때나 성공했을 때나 실패했을 때를 막론하고 충성해야 합니다.
또한 충성을 한다는 것은 기간의 한정을 극복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긴 일의 기간은 그 한정을 알 수 없습니다. 언제 이 일이 끝날 것이냐에 대해서는 오직 하나님만이 아시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이 시간을 극복하며 나가야 합니다. 누구나 잠시 동안 잘하기는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1년, 10년, 20년을 꾸준히 잘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 일을 오랫동안 한결같이 계속하느냐에 따라서 성패는 좌우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재주있는 이가 한 주간이나 한 달을 멋지게 일하고 쉬는 것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걸음이 좀 느리더라도 하나님이 정지명령을 내릴 때까지 자기가 맡은 일에 꾸준히 그 자리를 지키는 이를 요구하십니다. 한 주일을 새벽기도하고 한 달을 쉬는 것보다는 하루에 10분씩 드리는 기도를 평생 계속할 방침을 세우고 실천해 나가는 편을 더욱 기뻐하십니다. 우리가 캠퍼스 목자로 충성하는 것도 십년하고 마칠 것이 아닙니다. 일생동안을 해야 합니다. 저는 어제 CBF 교사 수련회를 하는데 찬양 율동 강사로 오신 분이 60대인 것에 놀랐습니다. 그런데 그 분은 40대와 같았습니다. 사명에 충성을 다하기 때문에 그렇게 곱게 늙어간다고 생각이 되었습니다. 대전센타의 이여호수아 목자님은 64세가 되셨는데도 캠퍼스를 심방하며 전도하고 제자 양성을 합니다. 그는 매우 젊게 보입니다. 이런 분들의 삶은 아름답습니다.
그러면 요한의 탄생이 왜 많은 사람들에게 기쁨이 됩니까? 14-16절을 보십시오. “너도 기뻐하고 즐거워할 것이요 많은 사람도 그의 남을 기뻐하리니 이는 저가 주 앞에 큰 자가 되며 포도주나 소주를 마시지 아니하며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이스라엘 자손을 주 곧 저희 하나님께로 많이 돌아오게 하겠음이니라.” 한 생명의 탄생은 부모나 가족들이나 친지들에게 기쁨을 줍니다. 그런데 세례 요한의 삶은 많은 사람에게 기쁨이 될 것입니다. 왜 요한의 삶이 많은 사람들에게 기쁨이 될까요?
첫째, 저가 주 앞에서 큰 자가 되기 때문입니다. 주 앞에서 큰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예수님은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막10:43-44).”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를 볼 때 섬기는 자가 위대한 사람이요 겸손한 자가 위대한 사람입니다. 사람은 누구든지 섬김을 받고자 하고 높아지고자 하기 때문에 낮아지고 섬기는 자가 된다는 것이 어렵습니다. 요한은 예수님 앞에서 자기를 발견하고 낮아졌습니다. 그는 사실 여자가 낳은 자 중에 가장 큰 자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흥하여야 하고 자신은 쇠하여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의 생애는 매우 짧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끼친 영향력은 매우 컸습니다. 그의 회개 운동을 통해서 온 유대 지방과 예루살렘 사람이 다 그에게 나아와와 자기 죄를 자복하고 그에게 세례를 받았습니다(막1:5). 그는 세상적으로 볼 때 지위도 없었습니다. 돈이 많은 것도 아닙니다. 많이 배운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그는 주 앞에 큰 자였습니다.
둘째로, 그는 성결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포도주와 소주를 마시지 않고 모태로부터 성령이 충만했습니다. “술 취하지 말라.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엡5:18).” 성령으로 충만한 삶을 살려면 죄를 회개하고 죄의 소욕을 다스려야 합니다. 당시 포도주와 소주는 타락한 문화를 상징하였습니다. 포도주는 부드럽고 맛이 있습니다. 소주는 독한 술이었습니다. 포도주를 먹지 않았다는 것은 적당한 잔재미를 거절하였다는 것이요 소주를 마시지 않았다는 것은 독한 문화까지 다 거부했다는 것입니다. 우리 나라가 정치 경제적으로 부요해지자 정욕을 추구하고 쾌락을 추구합니다. 그런데 이런 타락한 문화는 영성을 잃고 사단과 가까워지는 것입니다. 요즈음 로또 모임, 계모임, 영화 모임, 스노우 보드 모임 게임 동호회 등이 큰 인기라고 합니다. 지금도 포르노를 보는 것, 동거 생활, 춤 문화가 한창입니다. 미국에서는 이런 것도 다 지나고 이제는 문화가 아주 잔인하고 마귀같이 변화되어가고 있습니다. 세례 요한이 오늘날 태어났다면 그는 인터넷에 시간을 많이 보내지 않고 기도하는데 시간을 많이 보냈을 것입니다. 우리 나라 사람은 꽁짜를 좋아합니다. 꽁짜라면 음란 영상물도 기꺼이 봅니다. 우리는 꽁짜를 이용한 상업 전략에 너무나 잘 속아 넘어갑니다. 로또 복권을 잘 사는 이유도 꽁짜로 부자가 되어 보고자 하는 심리가 깔려 있습니다. 게으름은 꽁짜로 결과를 얻고자 하는 생활 태도입니다. 우리 시대의 영적인 무기력의 원인이 이런 음란과 돈 사랑과 게으름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대가를 치루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사단은 밤 문화를 꽃 피우고 성령은 새벽 기도를 통해서 일하십니다. 요한은 태에서부터 성령이 충만했고 개인 경건 생활에서 모범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새벽부터 성령이 충만해야 하루를 승리할 수 있습니다. 챨스 피니는 성령 충만하기를 사모하지 않는 것은 도적질하는 죄나 간음하는 죄와 마찬가지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먼저 기도하고 성령의 충만을 받는 것이 죄의 소욕을 극복하고 성결하게 사는 지름길입니다.
셋째로, 그가 위대한 점은 많은 백성을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일을 했기 때문입니다. 16,17절을 보십시오. “이스라엘 자손을 주 곧 저희 하나님께로 많이 돌아오게 하겠음이니라 저가 또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 앞서 가서 아비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리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고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예비하리라.” 그는 개인 경건으로 끝나지 않고 사회와 국가와 타인에게 영향력을 주었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이 하나님께 돌아와서 하나님 앞에 살도록 돕는 일을 했습니다. 자기 한 사람도 거룩하게 사는 것이 어려운데 그것을 뛰어넘어 아비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리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했습니다. 아비의 마음이 자식에게서 떠났다는 것은 가정 교회가 파괴되고 많은 사람이 이혼을 하고 책임을 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로 인해서 자녀들이 방치가 되었습니다. 부모가 자식과 대화하는 시간이 일주일에 40분도 안된다고 합니다. 특히 아버지와 대화하는 시간이 매우 적습니다. 그래서 아버지 학교라는 것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그 만큼 아버지의 마음이 큰 문제입니다. 목자는 양들에 대해서 영적인 아버지입니다. 목자의 마음이 양에게서 떠났다면 돌이켜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어려움을 주신 것은 기도하라고 하심이요, 연단하시기 위함입니다. 반대로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얼마나 많은 복을 주셨습니까? 그 복을 양과 나누십시오. 우리는 하나님이 맡겨주신 양들의 형편을 열심히 살펴야 합니다. 양을 사랑하는 것이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자식들은 의인의 슬기를 거스렸습니다. 탈권위주의 시대가 된 것입니다. 사람들이 죄의식이 없어졌습니다. 수치심을 모르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양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돌이켜야 합니다. 이것이 풍성한 생명을 얻는 길입니다.
세례 요한은 어떻게 하나님을 떠난 백성들의 마음을 돌이킵니까? 그는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하나님을 떠난 백성들의 마음을 돌이킵니다.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 백성들을 돌이키고자 하는 목자의 심정과 능력이 불같았습니다. 심령을 가지면 양들을 주십니다. 목자는 지식으로 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하는 것입니다. 특히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충만하면 양들을 사랑하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을 덧입을 수 있을까요? 그것은 빈들로 나가야합니다. 요한은 빈들에 나가 하나님과 교제를 하는 가운데 심령을 덧입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사랑, 기도하는 생활, 세상의 타락한 문화로부터 자신을 순결하게 지킬 때 그는 심령과 능력을 덧입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심령에 불이 붙을 때까지 영적인 투쟁을 해야 하겠습니다. 의지는 있는데 가슴이 차가우면 일이 안됩니다. 죄는 가슴을 차갑게 만듭니다. 그러나 성결한 마음으로 기도하는 것은 우리의 심정을 뜨겁게 합니다.
천사로부터 이 좋은 소식을 들은 사가랴의 반응이 어떠했습니까? 18절을 보십시오. “사가랴가 천사에게 이르되 내가 이것을 어떻게 알리요 내가 늙고 아내도 나이 많으니이다.” 구약에서는 늙었을 때 아이를 갖게 된 사람들의 실례가 많이 있었지만 그는 그러한 약속된 아이를, 자신이 갖게 된다는 것을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내가 늙고 아내도 나이 많으니이다.” 그가 아들을 낳게 된다는 소식을 들었음에도, 또한 하나님은 전능하시며 하나님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다는 확고한 믿음으로 충분히 모든 의혹을 물리칠 수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몸과 아내의 몸이 너무 늙었다는 것만을 생각하며 아브라함의 자손답지 않게 그 약속에 아연실색하였습니다. 그러자 천사는 화가 나서 그를 침묵하게 했습니다. “보라 이 일의 되는 날까지 네가 벙어리가 되어 능히 말을 못하리니 이는 내 말을 네가 믿지 아니함이어니와 때가 이르면 내 말이 이루리라 하더라(20).” 그는 벙어리요, 귀머거리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로 하여금 의심하며 믿지 못해 하는 말들을 더 이상 못하게 하셨습니다. 사악한 말을 할 바에야 말을 하지 않는 것이 더 낫습니다. 그는 말할 수 없게 됨으로써 더 훌륭한 것을 생각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는 침묵의 영성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벙어리가 됨으로 인해 그는 자신이 본 것을 누설하지도 자랑하지도 않게 되었습니다. 더 나아가 그의 죄된 불신앙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알맞은 때에 실현된다는 것은 크나큰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훈련은 힘들지만 은혜롭습니다.
백성들이 사가랴를 기다리며 그의 성소 안에서 지체함을 기이히 여겼습니다. 그런데 그가 나와서는 말을 못하니 백성들은 그가 성소 안에서 이상을 본 줄 알았습니다. 그가 형용으로 뜻을 표시하며 벙어리대로 있더니 그 직무의 날이 다 되매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는 직무의 날들 동안 쭉 성전에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제비에 따른 그의 직무는 '분향하는 것'이었고 벙어리요 귀머거리가 되었다 할지라도 그는 그 일을 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자신이 원하는 만큼 하나님의 직무를 수행할 수 없을 때라도,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여 그것을 수행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받아 주실 것입니다. 이후에 그는 그의 가족에게 돌아갔으며 그 후 그의 아내가 수태하였습니다(23,24절). 엘리사벳은 다섯 달 동안 숨어서 수태한 일을 비밀로 하였습니다. 그것은 그녀가 나이가 많기 때문에 조심을 하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녀는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내리신 영광을 자랑하지 않으려 했던 것 같습니다.
25절을 보십시오. “주께서 나를 돌아보시는 날에 인간에 내 부끄러움을 없게 하시려고 이렇게 행하심이라 하더라.” 자식을 가지는 일은 유대인에게 아주 큰 축복으로 간주되었으므로 불임은 크나큰 비난거리였습니다. 그래서 아이를 낳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알려져 있지 않은 큰 죄가 있을 것이라고 단정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엘리사벳은 승리하였고 그러한 비난이 사라졌을 뿐만 아니라, 큰 영광이 그녀에게 임한 것입니다. 믿음으로 사는 것이 결코 손해가 아닙니다. 헛된 것도 아닙니다. 인생은 마라톤입니다. 그러므로 인생을 전반적으로 보아야 합니다.
1924년 노스캐롤라이나 주 샬럿에서 빌리 선데이의 부흥회 직후에 30명쯤의 남자들이 프랭크 그레이엄의 잔디밭에서 하루 종일 기도와 금식의 모임을 가졌습니다. 그 그룹의 지도자인 버넌 패터슨(Vernon Paterson)이 결코 일어날 성 싶지 않은 탄원을 쏘아 올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샬롯에서 세상 끝까지 복음을 전파하는 사람을 키워 줄 것>을 기도한 것입니다. 그곳 소나무 사이에 모여 있는 사람들은 옆에 있는 아이가 그 선택된 선지자가 될 줄은 몰랐습니다. 그가 바로 빌리그래함입니다. 빌리 그래함의 어머니 모로는 결혼했을 때 성경을 읽으면서 결혼한 날 밤에 함께 기도했고, 매일 밤 가정 예배를 지키면서 그들의 결합을 하나님께 온전히 드렸습니다. 모로는 목욕탕에서 빌리의 등을 밀어 주면서도 아들의 머릿속에 계속 성경 말씀을 집어 넣었습니다. 그녀가 처음으로 가르쳐 준 것은 요한복음 3장 16절이었습니다. 그녀는 또한 아침 식사하는 벽에 성경 말씀 달력을 달았습니다. 그리곤 아침마다 한 장씩 찢어서, 아이들이 학교 갈 때나 놀러 나가기 전에 외우게 했습니다. 그녀가 그렇게 엄하지는 않았지만 빌리 그래함의 머리는 성경으로 꽉 차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정의 가정 예배와 신앙 교육이 결국 수많은 사람들을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는 모태가 되었음을 배우게 됩니다. 신앙적인 가정 교육과 기도하는 종들을 통해서 하나님은 지금도 놀라운 구원 역사를 이루어 나가십니다. 우리가 가정 교회의 이상을 가지고 자녀들을 신앙으로 양육하며 포기치 않고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 가운데 위대한 주의 종들을 세워주실 줄 믿습니다. 이 시대를 하나님께 돌이킬 수 있는 일꾼들을 우리 가운데 세워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말씀 / 누가복음 1:5-25
요절 / 누가복음 1:17
주의 백성을 예비하리라
“저가 또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 앞서 가서 아비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리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고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예비하리라.”
이제 2003년도가 기울어 가고 있습니다. 성탄 시즌이 되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육신을 입고 오사 함께 거하신 은혜를 깊이 묵상해 야겠습니다. 오늘은 예수님의 오심을 예비한 세례 요한의 탄생 배경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세례 요한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의인 사가랴와 엘리사벳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들이 어떤 점에서 메시야의 선구자를 낳고 기를 수 있었는가를 생각해보아야겠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택하셨던 이유가 무엇인가? 또 세례 요한이 와서 할 일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고자합니다. 주님께서 저희에게 성탄을 잘 준비할 수 있도록 은혜를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때는 유대 왕 헤롯 때였습니다. 유대 왕 헤롯은 에돔 자손으로서 주전 37-4년간 유대의 분봉왕으로 다스린 지략과 용맹이 뛰어난 폭군이었습니다. 그는 열명의 아내와 열명의 아들을 가졌고 그중 첫 다섯 아내를 통한 그의 자녀들은 모두 권력과 불륜으로 유명했습니다. 헤롯 대왕이 처음에는 백성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 성전 재건도 하고 수많은 공공 건물을 건립하고 치안을 바로 잡았습니다. 그는 정치적 술수가 워낙 뛰어나, 로마의 비호 아래 대제사장의 임명과 폐위에까지 간여하여 그 타락함이 극에 달했습니다(마 2:1). 말년에는 의심과 두려움에 시달리고 병에도 시달렸습니다. 그는 정권 유지를 위해 정적을 제거하고 심지어 자기 자식과 아내 및 장모, 처남, 삼촌 등을 죽일 정도로 잔인했습니다. 실로 이 시기는 종교적으로 타락한 시기였고 정치, 사회적으로 비극적이며 희망이 없는 시대였습니다. 이제 이러한 비극
과 어두움을 배경으로, 누가는 새로운 희망의 빛을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5,6절을 보십시오. “아비야 반열에 제사장 하나가 있으니 이름은 사가랴요 그 아내는 아론의 자손이니 이름은 엘리사벳이라 이 두 사람이 하나님 앞에 의인이니 주의 모든 계명과 규례대로 흠이 없이 행하더라.” 사가랴와 엘리사벳은 그 시대의 등불과 같았습니다. 밤이 어두울수록 빛은 더욱 밝게 드러나듯이 그들의 삶이 그러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 의인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면전에서 의롭게 살았습니다. 두 사람 중에 한 사람도 믿음으로 살기가 어려운데 두 사람 다 믿음으로 살았습니다. 욥의 아내는 고난 당하는 남편을 보고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으라고 말하였습니다. 죤 웨슬레의 아내는 웨슬레가 메시지를 전하고 들어오면 후라이팬으로 머리를 때리고 머리를 뽑아 놓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사가랴와 엘리사벳은 가정과 회당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고 가르치며 제사장으로 살았습니다. 성경에 여인의 이름은 잘 나오지 않는데 특별히 엘리사벳에 대해서 기록한 것을 볼 때 아론의 자손답게 매우 훌륭하였던 것 같습니다. 어려운 시대일수록 하나님 앞에 의롭게 사는 가정이 매우 중요합니다. 가정에서 하나님을 경외하고 의롭게 살 때 그 자녀들이 거룩하게 성장합니다. 자녀들은 보고 배운 대로 행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 부부가 하나님 앞에 의롭게 살았기 때문에 세례요한도 헤롯 안디파스가 그 동생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를 취하자 회개하도록 촉구할 수 있었습니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아집니다. 대부분의 제사장들이 헤롯의 눈치를 보면서 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지도자가 저렇게 악한데 우리가 깨끗하게 살 필요가 있는가 회의하기 쉽습니다. 이런 시대에 정직하고 의롭게 사는 사람들이 회의와 허탈감에 빠지기 쉽습니다. 정치인들이 기업으로부터 수백억씩 받아 사욕을 채우는 시대에 돈 몇푼을 모으기 위해서 애쓰는 사람들은 깊은 상처를 받게 됩니다. 나라도 엉망이고 자식도 없고 기도를 해도 응답도 안된다 생각하고 막살기가 얼마나 쉽겠습니까? 그러나 사가랴와 엘리사벳은 주의 모든 계명과 규례대로 흠없이 행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경외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 앞에” 살았다는 이 말이 그들의 신앙의 원동력을 한 마디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모든 가치관의 기준이 하나님이었습니다. 의인의 특징은 정직하다는 것입니다. 우리 나라는 거짓된 사람들이 많습니다. 센타에서도 남의 노트북을 훔쳐가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복사비를 넣는 통의 돈을 꺼내가는 사람이 다 있습니다. 사람들은 보지 못했지만 하나님께서는 다 보고 계셨습니다. 죄를 짓고도 두려워할 줄 모르는 세대를 볼 때 마음이 아픕니다. 링컨은 매우 정직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우체국에서 일할 때 17달러라는 돈이 남았는데 원인을 찾을 수 없자 그것을 종이에 싸서 서랍에 보관을 했습니다. 그것을 몇 년 뒤에 인계한 직원이 조사하다가 숫자가 틀리자 링컨을 비난했습니다. 그러나 링컨은 바로 그우체국으로 가서 서랍을 열어 그 돈을 내주었다고 합니다. 우리는 단돈 10원이라도 정직하게 관리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셈할 때가 온다는 것을 알고 깨끗하고 정직하게 살아야합니다. 이런 나라가 복된 나라요 이런 나라가 강한 나라입니다. 아무리 돈을 많이 벌어도 부정한 돈으로 벌면 독수리가 날아감 같이 하루아침에 날아가 버립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은 당장 눈에 보이는 결과가 없기 때문에 말씀대로 산다는 것은 유익한 것 같지 않습니다. 제사장들이 헤롯의 종교 자문관 노릇을 하면서 아첨하고 있을 때 사가랴가 말씀대로 사는 모습을 보고 욕도 많이 했을 것입니다. 다 먹고 살기위한 것이라고 합리화하였을 것입니다. 그는 주변에서 견제도 받고 힘든 소리도 많이 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삶에는 영적인 기쁨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위로도 있었습니다. 시1편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시1:1-3).” 그들은 어두운 시대에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소망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메시야를 소망하면서 한 사람을 준비시키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어떤 아픔이 있었습니까? 7절을 보십시오. “엘리사벳이 수태를 못하므로 저희가 무자하고 두 사람의 나이 많더라.” 그들에게는 자식을 낳지 못하는 인간적인 아픔이 있었습니다. 왜 믿음으로 말씀대로 사는데 복이 주어지지 않는가? 당시 자녀는 복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들은 생명의 열매가 없는 문제로 많은 슬픔에 빠졌습니다. 기다리다 지쳐서 이제는 머리가 희어졌고 두 사람의 나이는 많아졌습니다. 누구에게서도 희망을 찾기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눈에 보이는 열매가 없었지만 하나님께 신실했고 충성스러웠습니다. 그들은 자식 문제로 인해서 믿음이 더욱 순수해졌습니다.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자기들에게 맡겨진 사명에 충성을 다 했습니다. 그들의 소망은 오직 주님께 있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아브라함과 같이 인간적인 방법으로 자식을 얻고자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의 기도에 응답해 주시지 않는다고 하나님을 원망하며 믿음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세속적인 삶을 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일편단심으로 하나님께 충성을 다 했습니다. 그들의 믿음은 하나님의 마음에 쏙 들었습니다.
마침 사가랴가 그 반열의 차례대로 제사장의 직무를 하나님 앞에 행할새 제사장의 전례를 따라 제비를 뽑아 주의 성소에 들어가 분향하고 모든 백성은 그 분향하는 시간에 밖에서 기도하였습니다. 당시에 제사장 가문에는 24반열이 있었고 각 반열은 순서에 따라 1주일씩 성전에서 봉사를 했습니다. 한 반열이 800명이고 전체는 2만명이었습니다. 마침 사가랴가 그 반열의 차례대로 제사장의 직무를 행하는데 제비를 뽑아서 주의 성소에 들어가 분향을 하였습니다. 제비를 뽑아서 분향을 하기 때문에 일생에 한 번도 분향을 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기회는 준비된 자에게 온다고 했습니다. 사가랴는 변함없이 하나님 앞에 충성을 다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때가 되자 그로 하여금 성소에 들어가 분향을 할 기회를 주셨습니다. 분향은 성도의 기도를 상징합니다. 사가랴는 성소에 들어가서 그 백성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맨 마지막에는 자신을 위해서 기도할 때 아들을 달라고 기도했을 것입니다.
그때 “주의 사자가 저에게 나타나 향단 우편에 선 것을 사가랴가 보고 놀라며 무서워”했습니다. 이때 천사가 말했습니다. “사가랴여 무서워 말라 너의 간구함이 들린지라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네게 아들을 낳아 주리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라.” 너의 간구함이 들렸다는 말씀은 원어로는 에이세쿠스데(eijshkouvsqh)로서 직설법 과거 수동태로 되어 있습니다. 이는 과거에 한번 동작이 발생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효력이 계속해서 현재에도 미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의 기도는 하나님께 이미 들려졌습니다. 하나님께서 들으셨다는 것은 그의 기도가 응답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는 그의 기도가 응답되었다는 확증입니다. 믿음을 심어 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기도를 하면서 정말 내 기도를 하나님께서 들으실까 의문을 가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기도를 다 듣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기도하기를 주저하지 마십시오. 담대히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 여러분의 필요를 간구하십시요.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기뻐하시고 그 이름을 위하여 응답해주십니다.
우리는 여기서 사가랴의 충성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고자합니다. 충성은 믿을 수 있는 신빙성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대한 순종과 신뢰의 태도 속에 견고하게 거함을 뜻합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외적인 상태나 표준에 의존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신실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그분을 따르는 자들 역시 신실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계2:10b).”고 약속하셨습니다. 충성을 했지만 눈에 보이는 열매가 없을 때, 목자 생활을 한 지 오년, 십년이 흘러도 열매가 생기지 않을 때 인생의 허무함을 느끼기기 쉽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하나님만을 경외하고 섬겼습니다. 잠언이 청년의 지혜라면 욥기는 중년의 지혜서이고 전도서는 노년의 지혜서라고 합니다. 전도서는 인생의 모든 것이 헛되다고 노래하면서 이렇게 결론을 맺고 있습니다. “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전 12:13).” 이 말씀은 우리에게 충성의 본질을 잘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 사가랴는 한마디로 상황에 관계없이 기도하는 의인이었습니다. 우리 삶에는 언제나 좋은 날만 있지는 않습니다. 인생 길에는 즐겁고 화려한 날만 계속되지는 않습니다. 언짢고 우울하고 답답한 날도 많습니다. 그러나 그 환경이 만족하든 불만족하든 간에 묵묵히 그 환경을 착실하게 극복해 나가야 합니다. 그 어떤 환경 속에서도 주님을 향한 신앙심을 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환경을 두려워한다면 그것은 주님을 불신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도 해 받을 것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충성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환경의 불만을 극복하는 일입니다. 부유할 때나 가난할 때나 성공했을 때나 실패했을 때를 막론하고 충성해야 합니다.
또한 충성을 한다는 것은 기간의 한정을 극복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긴 일의 기간은 그 한정을 알 수 없습니다. 언제 이 일이 끝날 것이냐에 대해서는 오직 하나님만이 아시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이 시간을 극복하며 나가야 합니다. 누구나 잠시 동안 잘하기는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1년, 10년, 20년을 꾸준히 잘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 일을 오랫동안 한결같이 계속하느냐에 따라서 성패는 좌우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재주있는 이가 한 주간이나 한 달을 멋지게 일하고 쉬는 것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걸음이 좀 느리더라도 하나님이 정지명령을 내릴 때까지 자기가 맡은 일에 꾸준히 그 자리를 지키는 이를 요구하십니다. 한 주일을 새벽기도하고 한 달을 쉬는 것보다는 하루에 10분씩 드리는 기도를 평생 계속할 방침을 세우고 실천해 나가는 편을 더욱 기뻐하십니다. 우리가 캠퍼스 목자로 충성하는 것도 십년하고 마칠 것이 아닙니다. 일생동안을 해야 합니다. 저는 어제 CBF 교사 수련회를 하는데 찬양 율동 강사로 오신 분이 60대인 것에 놀랐습니다. 그런데 그 분은 40대와 같았습니다. 사명에 충성을 다하기 때문에 그렇게 곱게 늙어간다고 생각이 되었습니다. 대전센타의 이여호수아 목자님은 64세가 되셨는데도 캠퍼스를 심방하며 전도하고 제자 양성을 합니다. 그는 매우 젊게 보입니다. 이런 분들의 삶은 아름답습니다.
그러면 요한의 탄생이 왜 많은 사람들에게 기쁨이 됩니까? 14-16절을 보십시오. “너도 기뻐하고 즐거워할 것이요 많은 사람도 그의 남을 기뻐하리니 이는 저가 주 앞에 큰 자가 되며 포도주나 소주를 마시지 아니하며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이스라엘 자손을 주 곧 저희 하나님께로 많이 돌아오게 하겠음이니라.” 한 생명의 탄생은 부모나 가족들이나 친지들에게 기쁨을 줍니다. 그런데 세례 요한의 삶은 많은 사람에게 기쁨이 될 것입니다. 왜 요한의 삶이 많은 사람들에게 기쁨이 될까요?
첫째, 저가 주 앞에서 큰 자가 되기 때문입니다. 주 앞에서 큰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예수님은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막10:43-44).”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를 볼 때 섬기는 자가 위대한 사람이요 겸손한 자가 위대한 사람입니다. 사람은 누구든지 섬김을 받고자 하고 높아지고자 하기 때문에 낮아지고 섬기는 자가 된다는 것이 어렵습니다. 요한은 예수님 앞에서 자기를 발견하고 낮아졌습니다. 그는 사실 여자가 낳은 자 중에 가장 큰 자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흥하여야 하고 자신은 쇠하여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의 생애는 매우 짧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끼친 영향력은 매우 컸습니다. 그의 회개 운동을 통해서 온 유대 지방과 예루살렘 사람이 다 그에게 나아와와 자기 죄를 자복하고 그에게 세례를 받았습니다(막1:5). 그는 세상적으로 볼 때 지위도 없었습니다. 돈이 많은 것도 아닙니다. 많이 배운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그는 주 앞에 큰 자였습니다.
둘째로, 그는 성결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포도주와 소주를 마시지 않고 모태로부터 성령이 충만했습니다. “술 취하지 말라.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엡5:18).” 성령으로 충만한 삶을 살려면 죄를 회개하고 죄의 소욕을 다스려야 합니다. 당시 포도주와 소주는 타락한 문화를 상징하였습니다. 포도주는 부드럽고 맛이 있습니다. 소주는 독한 술이었습니다. 포도주를 먹지 않았다는 것은 적당한 잔재미를 거절하였다는 것이요 소주를 마시지 않았다는 것은 독한 문화까지 다 거부했다는 것입니다. 우리 나라가 정치 경제적으로 부요해지자 정욕을 추구하고 쾌락을 추구합니다. 그런데 이런 타락한 문화는 영성을 잃고 사단과 가까워지는 것입니다. 요즈음 로또 모임, 계모임, 영화 모임, 스노우 보드 모임 게임 동호회 등이 큰 인기라고 합니다. 지금도 포르노를 보는 것, 동거 생활, 춤 문화가 한창입니다. 미국에서는 이런 것도 다 지나고 이제는 문화가 아주 잔인하고 마귀같이 변화되어가고 있습니다. 세례 요한이 오늘날 태어났다면 그는 인터넷에 시간을 많이 보내지 않고 기도하는데 시간을 많이 보냈을 것입니다. 우리 나라 사람은 꽁짜를 좋아합니다. 꽁짜라면 음란 영상물도 기꺼이 봅니다. 우리는 꽁짜를 이용한 상업 전략에 너무나 잘 속아 넘어갑니다. 로또 복권을 잘 사는 이유도 꽁짜로 부자가 되어 보고자 하는 심리가 깔려 있습니다. 게으름은 꽁짜로 결과를 얻고자 하는 생활 태도입니다. 우리 시대의 영적인 무기력의 원인이 이런 음란과 돈 사랑과 게으름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대가를 치루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사단은 밤 문화를 꽃 피우고 성령은 새벽 기도를 통해서 일하십니다. 요한은 태에서부터 성령이 충만했고 개인 경건 생활에서 모범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새벽부터 성령이 충만해야 하루를 승리할 수 있습니다. 챨스 피니는 성령 충만하기를 사모하지 않는 것은 도적질하는 죄나 간음하는 죄와 마찬가지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먼저 기도하고 성령의 충만을 받는 것이 죄의 소욕을 극복하고 성결하게 사는 지름길입니다.
셋째로, 그가 위대한 점은 많은 백성을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일을 했기 때문입니다. 16,17절을 보십시오. “이스라엘 자손을 주 곧 저희 하나님께로 많이 돌아오게 하겠음이니라 저가 또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 앞서 가서 아비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리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고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예비하리라.” 그는 개인 경건으로 끝나지 않고 사회와 국가와 타인에게 영향력을 주었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이 하나님께 돌아와서 하나님 앞에 살도록 돕는 일을 했습니다. 자기 한 사람도 거룩하게 사는 것이 어려운데 그것을 뛰어넘어 아비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리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했습니다. 아비의 마음이 자식에게서 떠났다는 것은 가정 교회가 파괴되고 많은 사람이 이혼을 하고 책임을 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로 인해서 자녀들이 방치가 되었습니다. 부모가 자식과 대화하는 시간이 일주일에 40분도 안된다고 합니다. 특히 아버지와 대화하는 시간이 매우 적습니다. 그래서 아버지 학교라는 것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그 만큼 아버지의 마음이 큰 문제입니다. 목자는 양들에 대해서 영적인 아버지입니다. 목자의 마음이 양에게서 떠났다면 돌이켜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어려움을 주신 것은 기도하라고 하심이요, 연단하시기 위함입니다. 반대로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얼마나 많은 복을 주셨습니까? 그 복을 양과 나누십시오. 우리는 하나님이 맡겨주신 양들의 형편을 열심히 살펴야 합니다. 양을 사랑하는 것이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자식들은 의인의 슬기를 거스렸습니다. 탈권위주의 시대가 된 것입니다. 사람들이 죄의식이 없어졌습니다. 수치심을 모르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양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돌이켜야 합니다. 이것이 풍성한 생명을 얻는 길입니다.
세례 요한은 어떻게 하나님을 떠난 백성들의 마음을 돌이킵니까? 그는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하나님을 떠난 백성들의 마음을 돌이킵니다.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 백성들을 돌이키고자 하는 목자의 심정과 능력이 불같았습니다. 심령을 가지면 양들을 주십니다. 목자는 지식으로 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하는 것입니다. 특히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충만하면 양들을 사랑하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을 덧입을 수 있을까요? 그것은 빈들로 나가야합니다. 요한은 빈들에 나가 하나님과 교제를 하는 가운데 심령을 덧입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사랑, 기도하는 생활, 세상의 타락한 문화로부터 자신을 순결하게 지킬 때 그는 심령과 능력을 덧입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심령에 불이 붙을 때까지 영적인 투쟁을 해야 하겠습니다. 의지는 있는데 가슴이 차가우면 일이 안됩니다. 죄는 가슴을 차갑게 만듭니다. 그러나 성결한 마음으로 기도하는 것은 우리의 심정을 뜨겁게 합니다.
천사로부터 이 좋은 소식을 들은 사가랴의 반응이 어떠했습니까? 18절을 보십시오. “사가랴가 천사에게 이르되 내가 이것을 어떻게 알리요 내가 늙고 아내도 나이 많으니이다.” 구약에서는 늙었을 때 아이를 갖게 된 사람들의 실례가 많이 있었지만 그는 그러한 약속된 아이를, 자신이 갖게 된다는 것을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내가 늙고 아내도 나이 많으니이다.” 그가 아들을 낳게 된다는 소식을 들었음에도, 또한 하나님은 전능하시며 하나님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다는 확고한 믿음으로 충분히 모든 의혹을 물리칠 수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몸과 아내의 몸이 너무 늙었다는 것만을 생각하며 아브라함의 자손답지 않게 그 약속에 아연실색하였습니다. 그러자 천사는 화가 나서 그를 침묵하게 했습니다. “보라 이 일의 되는 날까지 네가 벙어리가 되어 능히 말을 못하리니 이는 내 말을 네가 믿지 아니함이어니와 때가 이르면 내 말이 이루리라 하더라(20).” 그는 벙어리요, 귀머거리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로 하여금 의심하며 믿지 못해 하는 말들을 더 이상 못하게 하셨습니다. 사악한 말을 할 바에야 말을 하지 않는 것이 더 낫습니다. 그는 말할 수 없게 됨으로써 더 훌륭한 것을 생각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는 침묵의 영성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벙어리가 됨으로 인해 그는 자신이 본 것을 누설하지도 자랑하지도 않게 되었습니다. 더 나아가 그의 죄된 불신앙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알맞은 때에 실현된다는 것은 크나큰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훈련은 힘들지만 은혜롭습니다.
백성들이 사가랴를 기다리며 그의 성소 안에서 지체함을 기이히 여겼습니다. 그런데 그가 나와서는 말을 못하니 백성들은 그가 성소 안에서 이상을 본 줄 알았습니다. 그가 형용으로 뜻을 표시하며 벙어리대로 있더니 그 직무의 날이 다 되매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는 직무의 날들 동안 쭉 성전에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제비에 따른 그의 직무는 '분향하는 것'이었고 벙어리요 귀머거리가 되었다 할지라도 그는 그 일을 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자신이 원하는 만큼 하나님의 직무를 수행할 수 없을 때라도,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여 그것을 수행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받아 주실 것입니다. 이후에 그는 그의 가족에게 돌아갔으며 그 후 그의 아내가 수태하였습니다(23,24절). 엘리사벳은 다섯 달 동안 숨어서 수태한 일을 비밀로 하였습니다. 그것은 그녀가 나이가 많기 때문에 조심을 하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녀는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내리신 영광을 자랑하지 않으려 했던 것 같습니다.
25절을 보십시오. “주께서 나를 돌아보시는 날에 인간에 내 부끄러움을 없게 하시려고 이렇게 행하심이라 하더라.” 자식을 가지는 일은 유대인에게 아주 큰 축복으로 간주되었으므로 불임은 크나큰 비난거리였습니다. 그래서 아이를 낳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알려져 있지 않은 큰 죄가 있을 것이라고 단정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엘리사벳은 승리하였고 그러한 비난이 사라졌을 뿐만 아니라, 큰 영광이 그녀에게 임한 것입니다. 믿음으로 사는 것이 결코 손해가 아닙니다. 헛된 것도 아닙니다. 인생은 마라톤입니다. 그러므로 인생을 전반적으로 보아야 합니다.
1924년 노스캐롤라이나 주 샬럿에서 빌리 선데이의 부흥회 직후에 30명쯤의 남자들이 프랭크 그레이엄의 잔디밭에서 하루 종일 기도와 금식의 모임을 가졌습니다. 그 그룹의 지도자인 버넌 패터슨(Vernon Paterson)이 결코 일어날 성 싶지 않은 탄원을 쏘아 올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샬롯에서 세상 끝까지 복음을 전파하는 사람을 키워 줄 것>을 기도한 것입니다. 그곳 소나무 사이에 모여 있는 사람들은 옆에 있는 아이가 그 선택된 선지자가 될 줄은 몰랐습니다. 그가 바로 빌리그래함입니다. 빌리 그래함의 어머니 모로는 결혼했을 때 성경을 읽으면서 결혼한 날 밤에 함께 기도했고, 매일 밤 가정 예배를 지키면서 그들의 결합을 하나님께 온전히 드렸습니다. 모로는 목욕탕에서 빌리의 등을 밀어 주면서도 아들의 머릿속에 계속 성경 말씀을 집어 넣었습니다. 그녀가 처음으로 가르쳐 준 것은 요한복음 3장 16절이었습니다. 그녀는 또한 아침 식사하는 벽에 성경 말씀 달력을 달았습니다. 그리곤 아침마다 한 장씩 찢어서, 아이들이 학교 갈 때나 놀러 나가기 전에 외우게 했습니다. 그녀가 그렇게 엄하지는 않았지만 빌리 그래함의 머리는 성경으로 꽉 차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정의 가정 예배와 신앙 교육이 결국 수많은 사람들을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는 모태가 되었음을 배우게 됩니다. 신앙적인 가정 교육과 기도하는 종들을 통해서 하나님은 지금도 놀라운 구원 역사를 이루어 나가십니다. 우리가 가정 교회의 이상을 가지고 자녀들을 신앙으로 양육하며 포기치 않고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 가운데 위대한 주의 종들을 세워주실 줄 믿습니다. 이 시대를 하나님께 돌이킬 수 있는 일꾼들을 우리 가운데 세워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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