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강 추수감사특강(시50편)/감사로 제사를 드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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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추수감사절 특강 375,311
말씀 / 시 50:1-23
요절 / 시 50:14
감사로 제사를 드리라
“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지극히 높으신 자에게 네 서원을 갚으며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오늘은 추수감사 예배로 드리게 되었습니다. 말세의 특징은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않는 것이라고 했습니다(딤후2:2). 우리가 오늘 말씀을 통해서 감사하기를 배워야겠습니다. 또한 감사하는 법을 가르쳐야 합니다. 그것이 계속해서 하나님의 복을 받는 비결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길입니다. 이 시간 이 예배를 통해서 주님의 주시는 힘으로 감사를 드리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를 바랍니다.
본 시편은 아삽의 시입니다. 그는 음악 지휘자로서 선견자였습니다. 일설에 의하면 아삽의 시란 아삽계통에서 보관한 시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다윗 이후 시대의 작품 일 것입니다. 레델보스라는 학자는 이 시가 포로 전 시대 혹은 후 시대에 지어진 것으로 생각합니다.
시편 기자는 입을 열어 시를 읊었습니다. “전능하신 자 하나님 여호와께서 말씀하사 해 돋는 데서부터 지는 데까지 세상을 부르셨도다(1).” 그가 노래하는 하나님은 온 우주를 심판하시는 참 하나님이십니다. 온 세상을 그의 심판대 앞에 모으시고 집행하실 능력을 지니신 분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 한 분 뿐이십니다. 그는 온전히 아름다운 시온에서 빛을 발하셨습니다(2). 시온이 온전히 아름다운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요? 시온은 예루살렘을 말하는데 실제로 민둥산으로서 볼 것이 없다고 합니다. 우리가 아름다운 산을 보려면 설악산이나 금강산을 가든지 알프스를 가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도 수많은 사람들이 많은 돈을 들여 예루살렘을 여행합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죄사함의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한 곳이기 때문입니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께서 시온에서 빛을 발하시기 때문에 아름답다고 노래합니다. 하나님은 빛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시온을 택하시고 자기 거처를 삼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곳의 식료품에 풍족히 복을 주시고 양식으로 그 빈민을 만족케 하셨습니다. 하나님으로 인하여 그들이 복을 받고 넘치는 복을 세계 만민에게 나누어주게 하셨습니다. 그 복은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빛은 말씀을 통해서 나타납니다. 주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의 빛이라고 시인 다윗은 노래했습니다(시119:105). 하나님의 말씀이 시온에서 선포되기 때문에 그곳이 아름다운 것입니다. 우리 목자님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성경 선생으로 헌신하는 삶이 아름다운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세상적인 관점에서 보면 내세울 것이 별로 없습니다. 겉으로 특별히 자랑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을 주시고 이 세상에서 거룩한 백성이요 제사장 나라로 살라고 하십니다. 우리의 외모가 아름답지 않아도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있고 하나님께 택함을 받았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거하시기 때문에 여러분의 삶은 아름답습니다.
그런데 3절을 보십시오. “우리 하나님이 임하사 잠잠치 아니하시니 그 앞에는 불이 삼키고 그 사방에는 광풍이 불리로다.” 하나님께서 임하사 잠잠치 아니하시고 그 앞에는 불이 삼키고 그 사방에는 광풍이 분다는 것은 심판주의 모습입니다. 이는 시내산에 임하셨던 엄위하신 모습입니다. 하나님께서 빛을 비추도록 하셨는데 그 백성들이 어두운 모습을 보일 때 하나님은 심판자로 임하십니다. 하나님은 바로 심판의 불을 발하지 않고 오래 동안 참고 계시다가 더 이상 참지 못하시고 심판의 불을 뿜으십니다. 하나님은 심판하시되 성도들부터 시작하십니다. “나의 성도를 네 앞에 모으라 곧 제사로 나와 언약한 자니라 하시도다(5).” 하나님은 그의 택함을 받은 자들을 그 앞에 모으시고 그와 언약한 것을 상기시킵니다. 제사는 희생제사로서 하나님께 자신을 번제로 드리고 그와 연합된 삶을 산다는 언약의 표시입니다. 7절을 보십시오. “내 백성아 들을지어다 내가 말하리라 이스라엘아 내가 네게 증거하리라 나는 하나님 곧 네 하나님이로다.” 하나님께서 내 백성, 나의 성도라고 하심으로 그들을 얼마나 사랑하셨는가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는 엄마가 자식을 보고 “어이구 내 새끼”라고 하는 말과 같습니다. 이스라엘은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피로 언약을 맺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애굽에서 구원하실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주셨습니다. 그는 참된 구원자가 되십니다. 또한 사랑과 신뢰로 맺어진 그들의 목자시오 아버지이십니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의 택함을 입고 많은 은혜를 받은 백성이라도 그에 합당한 삶을 살지 않는다면 심판에서 예외일 수 없습니다.
8절을 보십시오. “내가 너의 제물을 인하여는 너를 책망치 아니하리니 네 번제가 항상 내 앞에 있음이로다.” 말라기서에서는 그들이 하나님께 돌아오려면 십일조와 헌물을 드려야 한다고 했습니다(말3:8). 그러나 여기서는 절기에 따라 그들이 제물을 잘 드렸기 때문에 그것에 대해서는 문제삼지 않고 있습니다. 그들은 해야 하는 외적인 일들은 잘 했습니다. 그러나 마음이 문제였습니다. 마음을 하나님께 드리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외모를 보지 않고 마음의 중심을 보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제물을 심판의 기준으로 삼지 아니하십니다. 지금 그들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예배가 형식화된 것입니다. 마음을 드리지 못하고 몸만 왔다 갔다 하는 것이었습니다. 신앙 초기에는 구속의 은혜를 받아서 감격이 있었습니다. 그에 기초해서 헌신도 많이 하고 충성도 많이 하지만 점차 매너리즘에 빠지고 형식화된 것이 그들뿐만 아니라 우리에게도 문제가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백성이 오기는 오는데 마음이 없는 것을 보시고 돌이키도록 하십니다.
9-13절을 보십시오. “내가 네 집에서 수소나 네 우리에서 숫염소를 취치 아니하리니 이는 삼림의 짐승들과 천산의 생축이 다 내 것이며 산의 새들도 나의 아는 것이며 들의 짐승도 내 것임이로다. 내가 가령 주려도 네게 이르지 않을 것은 세계와 거기 충만한 것이 내 것임이로다. 내가 수소의 고기를 먹으며 염소의 피를 마시겠느냐?” 수소나 숫염소나 천산의 생축이 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토끼나 비둘기나 꿩이나 말이나 소나 염소나 코끼리나 사자나 모든 짐승이 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은 피나 기름에 주리신 분이 아니십니다. 그는 고기를 즐기시는 분도 아니십니다. 그는 제사를 기뻐하지 아니하십니다. 하나님은 제사보다 순종을 원하시는 분이십니다(삼상15:22). 하나님은 가장 부요한 분이십니다. 세계와 우주의 주인이 그이십니다. 그가 천지 만물을 만드시고 관리하시고 계십니다. 그런 분이 무엇이 부족해서 그런 것들을 요구하시겠습니까? 그러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제사는 무엇입니까?
첫째,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합니다(14,23). 14a절을 보십시오. “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하나님은 그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담아서 제사를 드리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우리가 감사해야 할 제목은 무엇입니까? 시편 136편에 보면 다윗의 감사 제목이 줄줄이 나옵니다. 그것을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첫째로, 하나님을 알게 된 것을 감사해야 합니다.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모든 신에 뛰어나신 하나님께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모든 주에 뛰어나신 주께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이 세상은 주인 없는 쓸쓸한 우연과 운명의 무서운 세계가 아니라 영원토록 선하시고 인자하신 하나님의 주관 아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신과 모든 주보다 뛰어나지 않다면 우리는 무수히 많은 헛된 신들의 종이 될 뻔했습니다. 어떤 나라에서는 사람들이 8백만의 신을 섬기고 있습니다. 인도에서는 1억의 신들을 섬깁니다. 무슬림 가운데 어떤 극단적인 일파는 끊임없이 자살 폭탄 테러를 하는 길이 천국 가는 지름길이라고 생각합니다. 참된 신을 찾지 못해서 허망한 신의 노예가 된 사람들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참된 신이신 여호와 하나님을 찾은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저도 조상신을 섬기던 데서 여호와 하나님을 알게 하신 은혜가 너무나 감사합니다.
둘째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고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환경을 주신 것을 감사해야 합니다. 창조주 하나님은 지혜로 하늘을 지으시며 땅을 물 위에 펴시며 큰 빛을 지으셨습니다. 이 하나님께 감사하라고 합니다. 이렇게 추운 날 따뜻한 햇빛을 지으신 하나님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 사랑이 놀랍습니다. 시베리아에 사는 선교사님들은 6개월 동안 추운 날씨와 눈과 얼음 속에서 삽니다. 그들에게 태양빛을 보는 것은 그 자체로 기쁨이요 활력입니다. 우리 나라는 금수강산입니다. 중국 교포나 북한의 동포들은 어렵게 어렵게 탈출을 해서 한국으로 들어오려고 합니다. 대한민국을 약속의 땅으로 생각하고 자유와 풍요를 찾아서 들어옵니다. 하나님께서 기업으로 주신 이 땅에서 우리는 마음껏 일하고 자기 꿈을 펼치고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좋은 환경과 나라를 주신 은혜를 감사합니다. 또한 생명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살아있다는 것 자체로 우리는 감사해야합니다. 우리가 서울에서 공기를 마시며 살게 된 것도 감사해야 합니다. 인도나 나이지리아의 공기가 매우 나쁘다고 하는데 서울의 공기는 그보다는 훨씬 깨끗합니다. 경제가 어려운 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먹을 것을 때마다 주셨습니다. 아침도 먹고 점심도 먹고 졸기도 합니다. 세계에서 6억 명이 하루 1달러를 가지고 산다고 합니다. 밤에 배고픈 배를 움켜쥐고 잠자리에 들어야 하는 사람들이 20억에 이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때마다 먹을 음식을 주시고 계절을 따라서 사과, 배, 귤, 감, 바나나 등 과일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올해 우리 나라는 태풍이 불고 저온이라서 식량 생산이 많이 감소했습니다. 그러나 먹기에 충분한 양을 주셨습니다. 우리의 의식주를 해결해 주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셋째로, 우리에게 구원을 주신 하나님을 인하여 감사해야 합니다. “애굽의 장자를 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이스라엘을 저희 중에서 인도하여 내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시 136:10,11).” 우리를 사단의 종노릇하던 데서 구원하신 것을 감사합니다. 또한 우리를 구원의 여정 속에서 훈련하시고 연단하시는 것을 감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 백성을 인도하여 광야로 통과하게 하신 것을 감사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광야 생활을 통해서 그들을 순종의 사람들이요 여호와의 군대로 훈련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사는 동안 여러 모양의 질병과 갑작스런 사고를 당합니다. 그래도 우리가 감사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생명을 지켜 주셨기 때문입니다. 고난을 당하는데 아프지 않고 힘들지 않을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우리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실 줄 믿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도록 하심에 감사를 드립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고난을 바라만 보시는 것이 아니라 함께 동참하십니다. 우리가 고난의 의미를 당장은 알 수 없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음으로 감사해야합니다. 우리가 가장 낮은 상태에 있지만 기억하고 계신 이에게 감사하라고 합니다(시136:23). 다른 사람들은 나를 잊을 지라도 하나님은 나를 잊지 아니하십니다.
받은 열 가지로 인해 감사하기보다는 서운한 것 한 가지를 기억하고 원망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면 감사가 안나옵니다. 아담과 하와가 타락한 것은 가장 복된 에덴 동산에서 감사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축복에 빠져 지내면서도 축복을 축복인 줄 모르기 때문에 감사하지 못합니다. 가인과 아벨의 제사의 차이는 바로 감사가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였습니다. 롬1:21절은 말씀합니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감사하지 않는 것은 죄의 뿌리입니다. 감사하지 않는 마음은 미련해지고 어두움이 가득하게 됩니다. 우리는 마음이 하나님 자체로 가 있지 않은 것에서 돌이켜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께로 향해 있으면 하나님 자체로 감사할 수 있습니다. 범사에 감사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살전5:18).
둘째, 서원한 것을 갚음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습니다. 14b을 보십시오. “지극히 높으신 자에게 네 서원을 갚으며” 우리는 급할 때 서원을 합니다. 주님께서 대학에만 합격시켜 주시면 일생 캠퍼스 목자로 살겠습니다. 등록금만 해결해 주시면 일생 하나님을 섬기며 살겠다고 서원합니다. 가정 교회를 이루면서 일생 양들을 사랑하며 열매맺는 목자의 삶을 살겠습니다. 취직만 시켜 주시면 선교사로 나가겠습니다 등등 어려움을 당할 때 서원을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서원을 하고 일이 잘 풀리면 서원을 잊기 쉽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서원을 지켜야 합니다. 서원을 지키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의 표현입니다. 서원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합니다.
셋째,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방법은 환난 날에 하나님을 부르는 것입니다. 15절을 보십시오.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사람은 자기에게 무엇을 요구하는 자를 환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과 다르십니다. 하나님은 그 자녀들이 밤낮 찾아와서 기도하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특히 환난 날에 하나님을 부르라고 하십니다. 인생이라는 차를 타고 가다가 우리는 때로 사고를 당하기도 합니다. 사고를 당해 헤매기도 하고 몸이 아프고 상처투성이가 되면 홀로 남은 고독한 신세가 되어 버립니다. 많은 사람이 있지만 한 사람의 친구도 없는 것 같이 됩니다. 가난과 비극과 죽음만이 기다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 경제가 난파를 당하여 백군데 이상 취직 원서를 내도 오라는 곳이 없습니다. 아무 죄없는 자녀가 병으로 고생합니다. 마음에 생기는 근심으로 죽을 것만 같습니다. 장래가 어두워 보입니다. 습관적인 죄로 인해서 끊임없이 환난을 당합니다. 이런 사람에게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하나님께서 그를 그 환난에서 건지실 것이고 그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그 자녀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어떤 모양으로든지 돌보아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에게 약속하셨습니다.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라.” 다니엘은 하나님께 기도하지 말라는 메대 바사의 무서운 금령을 받았을 때에도 두려워 하지 않고 담대히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그의 기도는 사자보다도 굳세었습니다. 그가 기도했지만 사자 굴에 던져졌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사자굴에서 그를 보호하심으로 더 큰 영광을 드러내셨습니다(단6:10-23). 히스기야 왕은 죽을 병이 들었을 때에 간절히 부르짖어 15년 동안 생명이 연장되는 은혜를 누렸습니다(왕하20:1-7). 선지자 요나는 물고기 배 속에서라도 간절히 부르짖었을 때에 여호와께서 그 물고기를 명하여 요나를 육지에 토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환난 날에 부르짖는 자를 기뻐하십니다. 그리고 반드시 거기서 건져 내십니다.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라.” 우리 중에 환난 당하는 분이 있습니까?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하십시오. 새벽에 부르짖으십시오. 하나님께서 건지십니다. 다른 사람은 다 건질지라도 나는 아니라고 생각하는 분이 있습니까? 하나님은 “내가 너를 건지리니”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건지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당하는 역경이 변하여 유익이 되게 하십니다. 우리가 역경 가운데서 기쁨을 찾아낸다는 것은 매우 지혜로운 일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어떤 방법으로 건지실지 알 수 없습니다. 다니엘이 사자 굴에 던져짐을 당할 때에 하나님께서 어떻게 자신을 건지실지 묻지 않았습니다. 그는 오직 하나님께 자신을 맡기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야이로는 주님께 아이의 머리에 안수하여 고쳐달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말씀으로 그를 살려주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우리를 환난에서 건지실지 알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방법으로 건지실 것을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내가 … 하리니”라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약속을 하고 부도수표를 내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그대로 됩니다. 하나님께서 어느 때에 건지실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가장 좋은 때에 결코 늦지 않게 나를 건지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환난 날에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부르짖어 기도해야 합니다. 사람은 풍족하고 여유가 있을 때보다 환난을 당할 때 하나님을 더욱 찾게 됩니다. 환난이 닥치고 어려움이 부딪칠 때 부르짖고 통곡하는 자세가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환난을 당하게 되면 의식이나 형식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진실한 마음으로 탄식하며 하나님의 도움을 부르짖는 것뿐입니다. 그때 하나님은 그 기도를 들어주시고 말씀하십니다. 환난 날에 부르짖는 사람은 겸손한 사람입니다. 우리가 환난에서 건지심을 받고 나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영광을 받으실 분이십니다.
16-20절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외식하는 자의 악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외식하는 악인은 성경도 가르치고 말씀도 그 입에 있었지만 하나님의 교훈을 미워하고 그 말씀을 뒤로 던져버렸습니다. 그는 믿는다고 하면서 도적질하고, 믿는다고 하면서 간음을 행하고, 믿는다고 하면서 거짓을 말하고 형제를 비방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죄에 대하여 잠잠하였더니 하나님이 자기와 같은 줄로 생각했습니다(21). 하나님은 이런 죄인이 회개하도록 오래 참으십니다. 그러나 회개하지 않을 때 그를 책망하여 그 죄를 그 목전에 차례로 베푸십니다. 악인의 근본 문제가 무엇입니까? 22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을 잊어버린 너희여 이제 이를 생각하라 그렇지 않으면 내가 너희를 찢으리니 건질 자 없으리라.” 하나님을 잊어버린 것이 근본 문제입니다. 악인이 하나님을 잊어버려도 하나님은 그 죄를 기억하고 계십니다.
23절을 다시 읽겠습니다.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하나님께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는 그 행위를 옳게 하는 자입니다. 우리의 마음에 하나님께 대한 감사함이 충만할 때 하나님과 바른 관계성이 맺혀지게 됩니다.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는 사람은 바르게 행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할 제목들을 찾아 구체적으로 감사를 드림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야겠습니다. 감사는 천국 방언입니다. 감사하라는 것은 명령형입니다. 감사는 훈련해야 합니다. 감사하는 사람은 성숙한 사람이요, 그를 통해 하나님을 아는 빛이 어두운 세상을 환하게 비추입니다.
말씀 / 시 50:1-23
요절 / 시 50:14
감사로 제사를 드리라
“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지극히 높으신 자에게 네 서원을 갚으며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오늘은 추수감사 예배로 드리게 되었습니다. 말세의 특징은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않는 것이라고 했습니다(딤후2:2). 우리가 오늘 말씀을 통해서 감사하기를 배워야겠습니다. 또한 감사하는 법을 가르쳐야 합니다. 그것이 계속해서 하나님의 복을 받는 비결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길입니다. 이 시간 이 예배를 통해서 주님의 주시는 힘으로 감사를 드리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를 바랍니다.
본 시편은 아삽의 시입니다. 그는 음악 지휘자로서 선견자였습니다. 일설에 의하면 아삽의 시란 아삽계통에서 보관한 시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다윗 이후 시대의 작품 일 것입니다. 레델보스라는 학자는 이 시가 포로 전 시대 혹은 후 시대에 지어진 것으로 생각합니다.
시편 기자는 입을 열어 시를 읊었습니다. “전능하신 자 하나님 여호와께서 말씀하사 해 돋는 데서부터 지는 데까지 세상을 부르셨도다(1).” 그가 노래하는 하나님은 온 우주를 심판하시는 참 하나님이십니다. 온 세상을 그의 심판대 앞에 모으시고 집행하실 능력을 지니신 분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 한 분 뿐이십니다. 그는 온전히 아름다운 시온에서 빛을 발하셨습니다(2). 시온이 온전히 아름다운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요? 시온은 예루살렘을 말하는데 실제로 민둥산으로서 볼 것이 없다고 합니다. 우리가 아름다운 산을 보려면 설악산이나 금강산을 가든지 알프스를 가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도 수많은 사람들이 많은 돈을 들여 예루살렘을 여행합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죄사함의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한 곳이기 때문입니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께서 시온에서 빛을 발하시기 때문에 아름답다고 노래합니다. 하나님은 빛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시온을 택하시고 자기 거처를 삼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곳의 식료품에 풍족히 복을 주시고 양식으로 그 빈민을 만족케 하셨습니다. 하나님으로 인하여 그들이 복을 받고 넘치는 복을 세계 만민에게 나누어주게 하셨습니다. 그 복은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빛은 말씀을 통해서 나타납니다. 주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의 빛이라고 시인 다윗은 노래했습니다(시119:105). 하나님의 말씀이 시온에서 선포되기 때문에 그곳이 아름다운 것입니다. 우리 목자님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성경 선생으로 헌신하는 삶이 아름다운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세상적인 관점에서 보면 내세울 것이 별로 없습니다. 겉으로 특별히 자랑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을 주시고 이 세상에서 거룩한 백성이요 제사장 나라로 살라고 하십니다. 우리의 외모가 아름답지 않아도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있고 하나님께 택함을 받았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거하시기 때문에 여러분의 삶은 아름답습니다.
그런데 3절을 보십시오. “우리 하나님이 임하사 잠잠치 아니하시니 그 앞에는 불이 삼키고 그 사방에는 광풍이 불리로다.” 하나님께서 임하사 잠잠치 아니하시고 그 앞에는 불이 삼키고 그 사방에는 광풍이 분다는 것은 심판주의 모습입니다. 이는 시내산에 임하셨던 엄위하신 모습입니다. 하나님께서 빛을 비추도록 하셨는데 그 백성들이 어두운 모습을 보일 때 하나님은 심판자로 임하십니다. 하나님은 바로 심판의 불을 발하지 않고 오래 동안 참고 계시다가 더 이상 참지 못하시고 심판의 불을 뿜으십니다. 하나님은 심판하시되 성도들부터 시작하십니다. “나의 성도를 네 앞에 모으라 곧 제사로 나와 언약한 자니라 하시도다(5).” 하나님은 그의 택함을 받은 자들을 그 앞에 모으시고 그와 언약한 것을 상기시킵니다. 제사는 희생제사로서 하나님께 자신을 번제로 드리고 그와 연합된 삶을 산다는 언약의 표시입니다. 7절을 보십시오. “내 백성아 들을지어다 내가 말하리라 이스라엘아 내가 네게 증거하리라 나는 하나님 곧 네 하나님이로다.” 하나님께서 내 백성, 나의 성도라고 하심으로 그들을 얼마나 사랑하셨는가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는 엄마가 자식을 보고 “어이구 내 새끼”라고 하는 말과 같습니다. 이스라엘은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피로 언약을 맺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애굽에서 구원하실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주셨습니다. 그는 참된 구원자가 되십니다. 또한 사랑과 신뢰로 맺어진 그들의 목자시오 아버지이십니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의 택함을 입고 많은 은혜를 받은 백성이라도 그에 합당한 삶을 살지 않는다면 심판에서 예외일 수 없습니다.
8절을 보십시오. “내가 너의 제물을 인하여는 너를 책망치 아니하리니 네 번제가 항상 내 앞에 있음이로다.” 말라기서에서는 그들이 하나님께 돌아오려면 십일조와 헌물을 드려야 한다고 했습니다(말3:8). 그러나 여기서는 절기에 따라 그들이 제물을 잘 드렸기 때문에 그것에 대해서는 문제삼지 않고 있습니다. 그들은 해야 하는 외적인 일들은 잘 했습니다. 그러나 마음이 문제였습니다. 마음을 하나님께 드리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외모를 보지 않고 마음의 중심을 보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제물을 심판의 기준으로 삼지 아니하십니다. 지금 그들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예배가 형식화된 것입니다. 마음을 드리지 못하고 몸만 왔다 갔다 하는 것이었습니다. 신앙 초기에는 구속의 은혜를 받아서 감격이 있었습니다. 그에 기초해서 헌신도 많이 하고 충성도 많이 하지만 점차 매너리즘에 빠지고 형식화된 것이 그들뿐만 아니라 우리에게도 문제가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백성이 오기는 오는데 마음이 없는 것을 보시고 돌이키도록 하십니다.
9-13절을 보십시오. “내가 네 집에서 수소나 네 우리에서 숫염소를 취치 아니하리니 이는 삼림의 짐승들과 천산의 생축이 다 내 것이며 산의 새들도 나의 아는 것이며 들의 짐승도 내 것임이로다. 내가 가령 주려도 네게 이르지 않을 것은 세계와 거기 충만한 것이 내 것임이로다. 내가 수소의 고기를 먹으며 염소의 피를 마시겠느냐?” 수소나 숫염소나 천산의 생축이 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토끼나 비둘기나 꿩이나 말이나 소나 염소나 코끼리나 사자나 모든 짐승이 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은 피나 기름에 주리신 분이 아니십니다. 그는 고기를 즐기시는 분도 아니십니다. 그는 제사를 기뻐하지 아니하십니다. 하나님은 제사보다 순종을 원하시는 분이십니다(삼상15:22). 하나님은 가장 부요한 분이십니다. 세계와 우주의 주인이 그이십니다. 그가 천지 만물을 만드시고 관리하시고 계십니다. 그런 분이 무엇이 부족해서 그런 것들을 요구하시겠습니까? 그러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제사는 무엇입니까?
첫째,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합니다(14,23). 14a절을 보십시오. “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하나님은 그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담아서 제사를 드리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우리가 감사해야 할 제목은 무엇입니까? 시편 136편에 보면 다윗의 감사 제목이 줄줄이 나옵니다. 그것을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첫째로, 하나님을 알게 된 것을 감사해야 합니다.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모든 신에 뛰어나신 하나님께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모든 주에 뛰어나신 주께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이 세상은 주인 없는 쓸쓸한 우연과 운명의 무서운 세계가 아니라 영원토록 선하시고 인자하신 하나님의 주관 아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신과 모든 주보다 뛰어나지 않다면 우리는 무수히 많은 헛된 신들의 종이 될 뻔했습니다. 어떤 나라에서는 사람들이 8백만의 신을 섬기고 있습니다. 인도에서는 1억의 신들을 섬깁니다. 무슬림 가운데 어떤 극단적인 일파는 끊임없이 자살 폭탄 테러를 하는 길이 천국 가는 지름길이라고 생각합니다. 참된 신을 찾지 못해서 허망한 신의 노예가 된 사람들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참된 신이신 여호와 하나님을 찾은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저도 조상신을 섬기던 데서 여호와 하나님을 알게 하신 은혜가 너무나 감사합니다.
둘째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고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환경을 주신 것을 감사해야 합니다. 창조주 하나님은 지혜로 하늘을 지으시며 땅을 물 위에 펴시며 큰 빛을 지으셨습니다. 이 하나님께 감사하라고 합니다. 이렇게 추운 날 따뜻한 햇빛을 지으신 하나님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 사랑이 놀랍습니다. 시베리아에 사는 선교사님들은 6개월 동안 추운 날씨와 눈과 얼음 속에서 삽니다. 그들에게 태양빛을 보는 것은 그 자체로 기쁨이요 활력입니다. 우리 나라는 금수강산입니다. 중국 교포나 북한의 동포들은 어렵게 어렵게 탈출을 해서 한국으로 들어오려고 합니다. 대한민국을 약속의 땅으로 생각하고 자유와 풍요를 찾아서 들어옵니다. 하나님께서 기업으로 주신 이 땅에서 우리는 마음껏 일하고 자기 꿈을 펼치고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좋은 환경과 나라를 주신 은혜를 감사합니다. 또한 생명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살아있다는 것 자체로 우리는 감사해야합니다. 우리가 서울에서 공기를 마시며 살게 된 것도 감사해야 합니다. 인도나 나이지리아의 공기가 매우 나쁘다고 하는데 서울의 공기는 그보다는 훨씬 깨끗합니다. 경제가 어려운 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먹을 것을 때마다 주셨습니다. 아침도 먹고 점심도 먹고 졸기도 합니다. 세계에서 6억 명이 하루 1달러를 가지고 산다고 합니다. 밤에 배고픈 배를 움켜쥐고 잠자리에 들어야 하는 사람들이 20억에 이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때마다 먹을 음식을 주시고 계절을 따라서 사과, 배, 귤, 감, 바나나 등 과일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올해 우리 나라는 태풍이 불고 저온이라서 식량 생산이 많이 감소했습니다. 그러나 먹기에 충분한 양을 주셨습니다. 우리의 의식주를 해결해 주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셋째로, 우리에게 구원을 주신 하나님을 인하여 감사해야 합니다. “애굽의 장자를 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이스라엘을 저희 중에서 인도하여 내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시 136:10,11).” 우리를 사단의 종노릇하던 데서 구원하신 것을 감사합니다. 또한 우리를 구원의 여정 속에서 훈련하시고 연단하시는 것을 감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 백성을 인도하여 광야로 통과하게 하신 것을 감사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광야 생활을 통해서 그들을 순종의 사람들이요 여호와의 군대로 훈련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사는 동안 여러 모양의 질병과 갑작스런 사고를 당합니다. 그래도 우리가 감사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생명을 지켜 주셨기 때문입니다. 고난을 당하는데 아프지 않고 힘들지 않을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우리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실 줄 믿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도록 하심에 감사를 드립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고난을 바라만 보시는 것이 아니라 함께 동참하십니다. 우리가 고난의 의미를 당장은 알 수 없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음으로 감사해야합니다. 우리가 가장 낮은 상태에 있지만 기억하고 계신 이에게 감사하라고 합니다(시136:23). 다른 사람들은 나를 잊을 지라도 하나님은 나를 잊지 아니하십니다.
받은 열 가지로 인해 감사하기보다는 서운한 것 한 가지를 기억하고 원망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면 감사가 안나옵니다. 아담과 하와가 타락한 것은 가장 복된 에덴 동산에서 감사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축복에 빠져 지내면서도 축복을 축복인 줄 모르기 때문에 감사하지 못합니다. 가인과 아벨의 제사의 차이는 바로 감사가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였습니다. 롬1:21절은 말씀합니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감사하지 않는 것은 죄의 뿌리입니다. 감사하지 않는 마음은 미련해지고 어두움이 가득하게 됩니다. 우리는 마음이 하나님 자체로 가 있지 않은 것에서 돌이켜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께로 향해 있으면 하나님 자체로 감사할 수 있습니다. 범사에 감사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살전5:18).
둘째, 서원한 것을 갚음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습니다. 14b을 보십시오. “지극히 높으신 자에게 네 서원을 갚으며” 우리는 급할 때 서원을 합니다. 주님께서 대학에만 합격시켜 주시면 일생 캠퍼스 목자로 살겠습니다. 등록금만 해결해 주시면 일생 하나님을 섬기며 살겠다고 서원합니다. 가정 교회를 이루면서 일생 양들을 사랑하며 열매맺는 목자의 삶을 살겠습니다. 취직만 시켜 주시면 선교사로 나가겠습니다 등등 어려움을 당할 때 서원을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서원을 하고 일이 잘 풀리면 서원을 잊기 쉽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서원을 지켜야 합니다. 서원을 지키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의 표현입니다. 서원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합니다.
셋째,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방법은 환난 날에 하나님을 부르는 것입니다. 15절을 보십시오.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사람은 자기에게 무엇을 요구하는 자를 환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과 다르십니다. 하나님은 그 자녀들이 밤낮 찾아와서 기도하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특히 환난 날에 하나님을 부르라고 하십니다. 인생이라는 차를 타고 가다가 우리는 때로 사고를 당하기도 합니다. 사고를 당해 헤매기도 하고 몸이 아프고 상처투성이가 되면 홀로 남은 고독한 신세가 되어 버립니다. 많은 사람이 있지만 한 사람의 친구도 없는 것 같이 됩니다. 가난과 비극과 죽음만이 기다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 경제가 난파를 당하여 백군데 이상 취직 원서를 내도 오라는 곳이 없습니다. 아무 죄없는 자녀가 병으로 고생합니다. 마음에 생기는 근심으로 죽을 것만 같습니다. 장래가 어두워 보입니다. 습관적인 죄로 인해서 끊임없이 환난을 당합니다. 이런 사람에게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하나님께서 그를 그 환난에서 건지실 것이고 그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그 자녀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어떤 모양으로든지 돌보아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에게 약속하셨습니다.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라.” 다니엘은 하나님께 기도하지 말라는 메대 바사의 무서운 금령을 받았을 때에도 두려워 하지 않고 담대히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그의 기도는 사자보다도 굳세었습니다. 그가 기도했지만 사자 굴에 던져졌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사자굴에서 그를 보호하심으로 더 큰 영광을 드러내셨습니다(단6:10-23). 히스기야 왕은 죽을 병이 들었을 때에 간절히 부르짖어 15년 동안 생명이 연장되는 은혜를 누렸습니다(왕하20:1-7). 선지자 요나는 물고기 배 속에서라도 간절히 부르짖었을 때에 여호와께서 그 물고기를 명하여 요나를 육지에 토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환난 날에 부르짖는 자를 기뻐하십니다. 그리고 반드시 거기서 건져 내십니다.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라.” 우리 중에 환난 당하는 분이 있습니까?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하십시오. 새벽에 부르짖으십시오. 하나님께서 건지십니다. 다른 사람은 다 건질지라도 나는 아니라고 생각하는 분이 있습니까? 하나님은 “내가 너를 건지리니”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건지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당하는 역경이 변하여 유익이 되게 하십니다. 우리가 역경 가운데서 기쁨을 찾아낸다는 것은 매우 지혜로운 일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어떤 방법으로 건지실지 알 수 없습니다. 다니엘이 사자 굴에 던져짐을 당할 때에 하나님께서 어떻게 자신을 건지실지 묻지 않았습니다. 그는 오직 하나님께 자신을 맡기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야이로는 주님께 아이의 머리에 안수하여 고쳐달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말씀으로 그를 살려주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우리를 환난에서 건지실지 알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방법으로 건지실 것을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내가 … 하리니”라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약속을 하고 부도수표를 내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그대로 됩니다. 하나님께서 어느 때에 건지실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가장 좋은 때에 결코 늦지 않게 나를 건지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환난 날에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부르짖어 기도해야 합니다. 사람은 풍족하고 여유가 있을 때보다 환난을 당할 때 하나님을 더욱 찾게 됩니다. 환난이 닥치고 어려움이 부딪칠 때 부르짖고 통곡하는 자세가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환난을 당하게 되면 의식이나 형식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진실한 마음으로 탄식하며 하나님의 도움을 부르짖는 것뿐입니다. 그때 하나님은 그 기도를 들어주시고 말씀하십니다. 환난 날에 부르짖는 사람은 겸손한 사람입니다. 우리가 환난에서 건지심을 받고 나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영광을 받으실 분이십니다.
16-20절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외식하는 자의 악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외식하는 악인은 성경도 가르치고 말씀도 그 입에 있었지만 하나님의 교훈을 미워하고 그 말씀을 뒤로 던져버렸습니다. 그는 믿는다고 하면서 도적질하고, 믿는다고 하면서 간음을 행하고, 믿는다고 하면서 거짓을 말하고 형제를 비방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죄에 대하여 잠잠하였더니 하나님이 자기와 같은 줄로 생각했습니다(21). 하나님은 이런 죄인이 회개하도록 오래 참으십니다. 그러나 회개하지 않을 때 그를 책망하여 그 죄를 그 목전에 차례로 베푸십니다. 악인의 근본 문제가 무엇입니까? 22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을 잊어버린 너희여 이제 이를 생각하라 그렇지 않으면 내가 너희를 찢으리니 건질 자 없으리라.” 하나님을 잊어버린 것이 근본 문제입니다. 악인이 하나님을 잊어버려도 하나님은 그 죄를 기억하고 계십니다.
23절을 다시 읽겠습니다.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하나님께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는 그 행위를 옳게 하는 자입니다. 우리의 마음에 하나님께 대한 감사함이 충만할 때 하나님과 바른 관계성이 맺혀지게 됩니다.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는 사람은 바르게 행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할 제목들을 찾아 구체적으로 감사를 드림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야겠습니다. 감사는 천국 방언입니다. 감사하라는 것은 명령형입니다. 감사는 훈련해야 합니다. 감사하는 사람은 성숙한 사람이요, 그를 통해 하나님을 아는 빛이 어두운 세상을 환하게 비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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