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마34강(26:31-27:10)/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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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마태복음 제 34 강 360
말씀 / 마태복음 26:31-27:10
요절 / 마태복음 26:39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3월에 시작하여 공부해오던 마태복음을 8개월이 지난 오늘에야 마치게 되었습니다. 이 공부를 통해서 예수님을 더 알게 하시고 믿음과 행위를 어떻게 조화시켜야 하는지 배웠습니다. 믿음은 열매로 안다고 합니다. 우리의 믿음이 행위로 증거 될 때 성숙해져 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과 베드로를 대조해 볼 수 있습니다. 고난을 예견하시고 기도하시는 예수님과 자기를 확신하고 기도하지 않는 베드로를 비교해 볼 수 있습니다. 그 결과 예수님은 심문 앞에서 당당하게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밝히셨지만 베드로는 예수님을 부인하고 도망을 쳤습니다. 우리는 겟세마네 기도를 깊이 배워 시험에서 승리해야하겠습니다.
최후의 만찬을 마치고 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구약의 말씀을 근거로 충격적인 말씀을 하셨습니다.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기록된 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의 떼가 흩어지리라 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31).” 하나님께서 목자되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게 내어 줌으로 양들은 다 흩어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목자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다시 일어서고 갈릴리에서 양떼를 모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부활의 소망을 심으셨습니다. 이때 베드로가 대답했습니다. “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32).” 베드로는 자신은 다른 제자들과 다르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자신을 특별한 존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위대함은 평범 속에 있는 것입니다. 그는 앞으로 불어 닥칠 시험이 어떤 것인지를 모르기 때문에 근거 없이 큰소리를 쳤습니다. 악의 폭풍이 몰아치면 든든한 바위라고 생각했던 그도 가루처럼 부서질 것입니다. 그는 자기 확신에 차 있지만 공허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말씀을 경외심을 갖고 들어도 힘든 판에 자기는 다른 사람과 다르다고 교만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 섭섭한 감정을 가지고 자기의 진심을 알아달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앞으로 일어날 일을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34).” 예수님은 새벽이 오기 전에 베드로가 세 번이나 주님을 부인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가 영적 실존을 자각하도록 슬픈 진실을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마음이 아프겠지만 분명하게 도우셨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더욱 큰 소리로 예수님의 말씀을 거부하며 맹세했습니다.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35).” 모든 제자들도 이와 같이 말했습니다. 이를 볼 때 사람은 자기의 연약함을 잘 모르는 것 같습니다. 그는 자기의 충심을 몰라주는 예수님이 야속했습니다. 그는 아직도 자기중심적이고 어렸습니다. 예수님은 더 이상 그를 말리지 않으시고 자신과 제자들을 위해서 기도하고자 작정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영적 싸움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우리에게 좋은 본을 보여 주셨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라 하는 곳에 이르렀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내가 저기 가서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하시고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가시면서 고민하고 슬퍼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세 제자들에게 자신의 속마음을 털어놓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세 제자들을 이제는 양이 아니라 동역자로 생각하고 친구로 삼으시고 고민을 나누셨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역사를 섬기면서 이런 영적인 동역자들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겸손하게 제자들에게 기도를 부탁하셨습니다.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예수님은 우리와 같은 성정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 때문에 그에게 밀려오는 압박감은 프레스에 눌리듯 하였을 것입니다. 아무 죄 없으신 예수님께서 슬프고 고민이 되셨지만 기도함으로 이를 감당하고자 하셨습니다. 사도 바울도 동역자들에게 기도를 부탁하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습니다(엡6:19, 골4:3, 살전5:25,살후3:1). 우리는 합심해서 중보기도하는 가운데 주님의 뜻을 성취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기도를 부탁하시고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셨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믿음의 행동입니까? 가장 무기력한 상황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우리는 무기력한 모습으로 시간만 보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기도하기 위해서 겟세마네 동산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숭고합니다.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예수님은 죽음의 잔, 고난의 잔을 마시는 것이 힘드셨습니다. 아니 생각조차 하기 싫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고난의 잔을 마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알았기 때문에 순종하기 위해서 기도하셨습니다. 지금 예수님은 33세이십니다. 한창 일할 나이입니다. 죽기에는 너무나 아까운 나이입니다. 예수님은 어머니와 동생들을 돌보아야 했습니다. 사람이 나이가 늙어 죽는다는 것은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죄인으로서 정죄되고 사형 판결을 받고 죽는다는 것은 매우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을 생각할 때 예수님은 마음의 갈피를 잡지 못하여 피하고 싶었습니다. 예수님께 있어서 죽는다는 것은 육체적 고통은 물론이고 그보다 더 심한 정신적 영적 고통이 뒤따랐습니다. 이는 인류의 죄를 지고 스스로 죄인이 되어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를 받아야 하기 때문이었습니다(갈3:13). 인간의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의 잔을 마시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입니까? 우리가 한 사람의 죄를 감당하는 것도 벅찬 일입니다. 사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죄를 감당하다가 많은 상처를 받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인류의 죄를 다 지고 죽으셔야 하기 때문에 마음의 고통이 더욱 컸습니다. 뿐만 아니라 잠시짐나 하나님께 버림을 당하셔야 했습니다(마27:46).
그래서 하나님께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해 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솔직하셨습니다. 마음을 무겁게 짓누리는 문제를 하나님께 내려 놓았습니다. 우리도 힘든 인생 문제들을 주님 앞에 쏟아 놓을 때 마음의 시원함을 느낍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기의 문제를 하나님 앞에 털어 놓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간구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기쁘게 하고자 하지 않으시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자 했습니다. 우리는 나도 기쁘고 하나님도 기쁜 것을 찾고자 합니다. 그러나 내가 죽어야 하나님이 기쁘시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확신하기 위해서 기도하셨습니다.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예수님은 자기의 뜻을 극복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자 결단하기 위해서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믿음의 결단을 하기 위해서 기도하셨습니다.
두 번째로 기도하시면서는 하나님의 뜻을 감당할 능력을 주시도록 기도하셨습니다. 42절을 보십시오. “내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예수님은 기도로 영적인 전쟁을 치루셨습니다. 우리는 첫 번째 기도보다 두 번째 기도에서 진전을 볼 수 있습니다. 우선 예수님은 자신의 뜻을 따를 것인지 하나님의 뜻을 따를 것인지 결정하기 위해서 기도하셨습니다(39). 그러나 예수님은 두 번째 기도에서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마음 속으로 체념하고 쓴 뿌리를 품고 드린 기도가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고난의 잔을 마실 준비를 하셨습니다. 그리고 기도를 통해서 고난의 잔을 마시고자 결단하셨습니다. 기도는 예수님에게 능력의 근원이었습니다. “갈 것이냐 말 것이냐 그것이 문제로다”라고 말하기는 쉽습니다. 그러나 결정을 내리는 것은 절대로 쉽지 않습니다. 결정을 내리기 위해서는 엄청난 노력과 에너지가 소비됩니다. 이것이 많은 사람들이 믿음으로 제자의 삶을 살고자 결정하기보다 피하는 이유입니다. 오늘날 이 시대의 특징은 사람들이 해야 할 일보다는 자신이 하고 싶은 일만을 추구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에게 필요하고 자신이 해야 할 일보다는 자신이 좋아하는 일만을 택하고 그런 일만을 추구합니다. 그 결과 사람들이 무책임하고 쾌락적이고 동물적인 차원으로 전락해 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본래 하나님의 고귀한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해야만 하는 일을 찾아서 감당할 때 성숙한 사람이 됩니다. 예수님은 기도하시고 나서 자기가 하고 싶은 것보다 고난의 잔을 마시고자 결단하는 힘을 덧입으셨습니다. 하나님은 기도하는 사람들에게 힘을 주십니다.
예수님은 마지막으로 승리를 확신하면서 기도를 마치셨습니다. 44-46절을 보십시오. “또 저희를 두시고 나아가 세 번째 동일한 말씀으로 기도하신 후 이에 제자들에게 오사 이르시되 이제는 자고 쉬라 보라 때가 가까웠느니라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우느니라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 지금은 사태가 긴박해졌습니다. 군졸들이 예수님을 체포하기 위해서 오고 있었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피하여 도망가자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도리어 “일어나라 함께 가자”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난을 향하여 담대히 나아가셨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하고자 할 때 기도함으로 확신과 능력을 덧입어야 합니다. 기도할 때 우리의 뜻과 하나님의 뜻이 더욱 분명해 집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섬기고자 기도하는 종들을 통해서 일하시고 그를 높이십니다. 우리가 범사에 감사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우리는 지금 전도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압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전도할 심정과 담대함을 덧입게 됩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깨어 있으려면 기도의 영을 주시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처럼 기도로 시험을 이기고 십자가를 잘 감당하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따라 기도할수록 요구는 점차 줄어들고 잠잠하게 됩니다. 순종하는데 말이 많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한편 제자들은 이 중요한 시기에 무엇을 하고 있었습니까? 40,41절을 보십시오. “ 제자들에게 오사 그 자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 동안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 ”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깨어 기도하라고 부탁하셨지만 한 시간도 깨어서 기도할 수 없었습니다. 제자들은 슬픔에 잠긴 나머지 깊은 잠에 빠졌습니다. 사람의 심령이 눌리면 기도하기 어렵습니다. 컴퓨터가 과부하가 걸리면 다운이 되는 것처럼 사람도 자기가 감당할 수 없는 일이 터지면 잠을 자는 것으로 피하게 됩니다. 이것은 자기 보호 본능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기도를 마치시고 제자들에게 와서 보시니 아직도 그들은 자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제는 자고 쉬라. 보라 때가 가까웠으니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우느니라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여전히 자고 있느냐고 책망하셨습니다. (Are you still sleeping and resting?) 그리고 지금은 기도할 때가 아니라 앞으로 나아가야 할 때라고 하셨습니다. 이를 볼 때 기도도 해야 할 때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마음은 원이지만 육신이 연약하여 새벽에 기도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도도 훈련이 되어야 합니다. 기도도 할수록 많아집니다. 특히 한 가지 기도 제목을 가지고 한 시간씩 기도할 수 있어야겠습니다. 우리가 너무 바빠서, 할 일이 많아서 기도하지 못한다면 루터의 본을 따라야 할 것입니다. 루터는 자기는 너무나 할 일이 많아서 하루 세 시간씩 기도하지 않고는 그 많은 일들을 감당해 낼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바쁠수록 더욱 기도하는데 시간을 낼 수 있는 지혜로운 자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기도할 때 우리는 자신의 연약함을 극복하고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기도를 통해서 십자가를 질 능력을 덧입으시고 담대히 앞으로 나아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실 때에 열둘 중에 하나인 가룟 유다가 왔는데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에게서 파송된 큰 무리가 검과 몽치를 가지고 그와 함께 하였습니다. 가룟 유다는 그들에게 군호를 짰습니다. 즉 자기가 입 맞추는 자가 그이니 그를 잡으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예수님께 나와서 랍비여 안녕하시옵시까 하고 독을 바른 입을 맞추었습니다. 예수님은 네가 무엇을 하려고 왔는지 행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저희가 나아와 예수님을 체포하였습니다. 이때 제자 중 하나가 손을 펴 검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목이 아니라 그 귀를 떨어뜨렸습니다. 이 제자는 베드로입니다(요18:10). 이에 예수님은 네 검을 도로 집에 꽂으라 검을 가지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 두 영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무장해제를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잡히시자 제자들이 다 도망했습니다. 예수님을 잡은 자들이 예수님을 끌고 대제사장 가야바에게로 가니 거기 서기관과 장로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멀찍이 예수님을 좇아 대제사장의 집 뜰에 까지 가서 그 결국을 보려고 안에 들어가 하속들과 함께 앉았습니다. 그는 수제자 체면이 있어서 아주 도망가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잡힐까 두려워서 적당한 거리를 두고 예수님을 따르고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공회에서 심문 당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온 공회가 예수님을 죽이려고 그를 칠 거짓 증거를 찾고 있었습니다. 거짓 증인이 많이 와서 거짓 고소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증거를 얻지 못했습니다. 후에 두 사람이 와서 이 사람의 말이 내가 하나님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지을 수 있다 하더라고 했습니다. 대제사장이 일어서서 예수님께 물었지만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변명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고자 하셨기 때문에 어린 양같이 잠잠히 자신을 내어 맡기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잠잠하시자 대제사장이 물었습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우리에게 말하라.” 이때 예수님은 닫힌 입술을 열어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말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예수님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질문에는 분명하게 대답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용기가 있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절망적인 상황에서 하나님 나라와 그가 심판하기 위해서 재림하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대제사장이 예수님을 심판대 앞에서 정죄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는 심판장이 되실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을 정죄했던 그 대제사장은 도망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오시는 것을 볼 것이고 정죄될 것입니다.
그러나 대제사장은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값비싼 자기 옷을 찢으며 외쳤습니다. “저가 참람한 말을 하였으니 어찌 더 증인을 요구하리요 보라 너희가 지금 이 참람한 말을 들었도다 생각이 어떠하뇨 대답하여 가로되 저는 사형에 해당하니라 하고 이에 예수의 얼굴에 침 뱉으며 주먹으로 치고 혹은 손바닥으로 때리며 가로되 그리스도야 우리에게 선지자 노릇을 하라 너를 친 자가 누구냐 하더라(65-68).” 예수님께서 자신의 정체성을 분명히 하심으로 인해 받은 것은 멸시와 모욕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마음은 하나님 나라와 그 소망으로 담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하심으로 시험을 이기고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이렇게 고난을 받으시는 것을 보고 있던 베드로의 마음은 더욱 위축되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왜 저렇게 힘없이 당하고만 계실까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우리의 죄악을 담당하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은 창조주이시지만 피조물에게 침뱉음을 당하시고 손바닥으로 뺨을 맞으셨습니다. 이런 모욕은 저 같은 죄인이라도 감당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이런 모욕을 당하면서 참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인간적으로 받아들이지 아니하시고 하나님께서 허용하신 것임을 알고 받아들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수치와 치욕을 담당하심으로 도덕적인 승리를 하신 것입니다.
베드로는 바깥뜰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 계집 종이 나아와 베드로에게 물었습니다. “너도 갈릴리 사람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이 말을 듣고 베드로가 맹세하고 또 부인하였습니다. “내가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베드로는 큰소리를 쳤지만 예수님을 부인하고 있습니다. 그는 계집종 앞에서도 두려워 떨고 있었습니다. 조금 후에 곁에 섰던 사람들이 나아와 베드로에게 말했습니다. “너도 진실로 그 당이라 네 말소리가 너를 표명한다.” 아마 베드로의 악센트가 갈릴리 방언을 말하였던 것 같습니다. “나는 아니여~” 베드로는 꼼짝없이 자신을 인정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모든 사람 앞에서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 “나는 네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겠노라”하면서 앞문까지 뒷걸음질을 치고 있는데 다른 계집종이 저를 보고 거기 있는 사람들에게 말했습니다. “이 사람은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그러자 베드로가 저주하며 맹세하였습니다. “내가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그러자 닭이 참다 참다 못하여 꼬끼요, 베드로야 회개하라 하며 꼬끼요 꼬끼요 그의 영혼을 흔들어 깨웠습니다. 닭울음 소리를 듣고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였습니다. 베드로가 제자로서 철저히 실패했지만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했을 때 예수님의 좋은 제자로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베드로는 자신의 교만이 철저히 부서짐을 느꼈습니다. 그가 이렇게 깨어졌을 때 하나님께 귀히 쓰임 받을 수 있었습니다. 27:1-10절은 유다의 배반을 다루고 있습니다. 유다는 예수님의 열 두 제자중 하나가 되는 특권을 가졌지만 예수님을 배우기보다 돈을 사랑했습니다. 그는 비참한 최후를 마쳤습니다.
우리가 어려울 때에 기도하는 것이 꼭 해야만 하는 일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은 기도하심으로 힘을 덧입으시고 고난의 잔을 마신 것을 배웠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예수님처럼 기도하도록 도와주시기를 기도합니다.
말씀 / 마태복음 26:31-27:10
요절 / 마태복음 26:39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3월에 시작하여 공부해오던 마태복음을 8개월이 지난 오늘에야 마치게 되었습니다. 이 공부를 통해서 예수님을 더 알게 하시고 믿음과 행위를 어떻게 조화시켜야 하는지 배웠습니다. 믿음은 열매로 안다고 합니다. 우리의 믿음이 행위로 증거 될 때 성숙해져 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과 베드로를 대조해 볼 수 있습니다. 고난을 예견하시고 기도하시는 예수님과 자기를 확신하고 기도하지 않는 베드로를 비교해 볼 수 있습니다. 그 결과 예수님은 심문 앞에서 당당하게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밝히셨지만 베드로는 예수님을 부인하고 도망을 쳤습니다. 우리는 겟세마네 기도를 깊이 배워 시험에서 승리해야하겠습니다.
최후의 만찬을 마치고 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구약의 말씀을 근거로 충격적인 말씀을 하셨습니다.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기록된 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의 떼가 흩어지리라 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31).” 하나님께서 목자되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게 내어 줌으로 양들은 다 흩어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목자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다시 일어서고 갈릴리에서 양떼를 모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부활의 소망을 심으셨습니다. 이때 베드로가 대답했습니다. “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32).” 베드로는 자신은 다른 제자들과 다르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자신을 특별한 존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위대함은 평범 속에 있는 것입니다. 그는 앞으로 불어 닥칠 시험이 어떤 것인지를 모르기 때문에 근거 없이 큰소리를 쳤습니다. 악의 폭풍이 몰아치면 든든한 바위라고 생각했던 그도 가루처럼 부서질 것입니다. 그는 자기 확신에 차 있지만 공허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말씀을 경외심을 갖고 들어도 힘든 판에 자기는 다른 사람과 다르다고 교만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 섭섭한 감정을 가지고 자기의 진심을 알아달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앞으로 일어날 일을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34).” 예수님은 새벽이 오기 전에 베드로가 세 번이나 주님을 부인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가 영적 실존을 자각하도록 슬픈 진실을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마음이 아프겠지만 분명하게 도우셨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더욱 큰 소리로 예수님의 말씀을 거부하며 맹세했습니다.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35).” 모든 제자들도 이와 같이 말했습니다. 이를 볼 때 사람은 자기의 연약함을 잘 모르는 것 같습니다. 그는 자기의 충심을 몰라주는 예수님이 야속했습니다. 그는 아직도 자기중심적이고 어렸습니다. 예수님은 더 이상 그를 말리지 않으시고 자신과 제자들을 위해서 기도하고자 작정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영적 싸움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우리에게 좋은 본을 보여 주셨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라 하는 곳에 이르렀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내가 저기 가서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하시고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가시면서 고민하고 슬퍼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세 제자들에게 자신의 속마음을 털어놓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세 제자들을 이제는 양이 아니라 동역자로 생각하고 친구로 삼으시고 고민을 나누셨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역사를 섬기면서 이런 영적인 동역자들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겸손하게 제자들에게 기도를 부탁하셨습니다.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예수님은 우리와 같은 성정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 때문에 그에게 밀려오는 압박감은 프레스에 눌리듯 하였을 것입니다. 아무 죄 없으신 예수님께서 슬프고 고민이 되셨지만 기도함으로 이를 감당하고자 하셨습니다. 사도 바울도 동역자들에게 기도를 부탁하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습니다(엡6:19, 골4:3, 살전5:25,살후3:1). 우리는 합심해서 중보기도하는 가운데 주님의 뜻을 성취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기도를 부탁하시고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셨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믿음의 행동입니까? 가장 무기력한 상황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우리는 무기력한 모습으로 시간만 보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기도하기 위해서 겟세마네 동산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숭고합니다.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예수님은 죽음의 잔, 고난의 잔을 마시는 것이 힘드셨습니다. 아니 생각조차 하기 싫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고난의 잔을 마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알았기 때문에 순종하기 위해서 기도하셨습니다. 지금 예수님은 33세이십니다. 한창 일할 나이입니다. 죽기에는 너무나 아까운 나이입니다. 예수님은 어머니와 동생들을 돌보아야 했습니다. 사람이 나이가 늙어 죽는다는 것은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죄인으로서 정죄되고 사형 판결을 받고 죽는다는 것은 매우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을 생각할 때 예수님은 마음의 갈피를 잡지 못하여 피하고 싶었습니다. 예수님께 있어서 죽는다는 것은 육체적 고통은 물론이고 그보다 더 심한 정신적 영적 고통이 뒤따랐습니다. 이는 인류의 죄를 지고 스스로 죄인이 되어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를 받아야 하기 때문이었습니다(갈3:13). 인간의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의 잔을 마시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입니까? 우리가 한 사람의 죄를 감당하는 것도 벅찬 일입니다. 사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죄를 감당하다가 많은 상처를 받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인류의 죄를 다 지고 죽으셔야 하기 때문에 마음의 고통이 더욱 컸습니다. 뿐만 아니라 잠시짐나 하나님께 버림을 당하셔야 했습니다(마27:46).
그래서 하나님께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해 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솔직하셨습니다. 마음을 무겁게 짓누리는 문제를 하나님께 내려 놓았습니다. 우리도 힘든 인생 문제들을 주님 앞에 쏟아 놓을 때 마음의 시원함을 느낍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기의 문제를 하나님 앞에 털어 놓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간구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기쁘게 하고자 하지 않으시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자 했습니다. 우리는 나도 기쁘고 하나님도 기쁜 것을 찾고자 합니다. 그러나 내가 죽어야 하나님이 기쁘시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확신하기 위해서 기도하셨습니다.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예수님은 자기의 뜻을 극복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자 결단하기 위해서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믿음의 결단을 하기 위해서 기도하셨습니다.
두 번째로 기도하시면서는 하나님의 뜻을 감당할 능력을 주시도록 기도하셨습니다. 42절을 보십시오. “내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예수님은 기도로 영적인 전쟁을 치루셨습니다. 우리는 첫 번째 기도보다 두 번째 기도에서 진전을 볼 수 있습니다. 우선 예수님은 자신의 뜻을 따를 것인지 하나님의 뜻을 따를 것인지 결정하기 위해서 기도하셨습니다(39). 그러나 예수님은 두 번째 기도에서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마음 속으로 체념하고 쓴 뿌리를 품고 드린 기도가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고난의 잔을 마실 준비를 하셨습니다. 그리고 기도를 통해서 고난의 잔을 마시고자 결단하셨습니다. 기도는 예수님에게 능력의 근원이었습니다. “갈 것이냐 말 것이냐 그것이 문제로다”라고 말하기는 쉽습니다. 그러나 결정을 내리는 것은 절대로 쉽지 않습니다. 결정을 내리기 위해서는 엄청난 노력과 에너지가 소비됩니다. 이것이 많은 사람들이 믿음으로 제자의 삶을 살고자 결정하기보다 피하는 이유입니다. 오늘날 이 시대의 특징은 사람들이 해야 할 일보다는 자신이 하고 싶은 일만을 추구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에게 필요하고 자신이 해야 할 일보다는 자신이 좋아하는 일만을 택하고 그런 일만을 추구합니다. 그 결과 사람들이 무책임하고 쾌락적이고 동물적인 차원으로 전락해 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본래 하나님의 고귀한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해야만 하는 일을 찾아서 감당할 때 성숙한 사람이 됩니다. 예수님은 기도하시고 나서 자기가 하고 싶은 것보다 고난의 잔을 마시고자 결단하는 힘을 덧입으셨습니다. 하나님은 기도하는 사람들에게 힘을 주십니다.
예수님은 마지막으로 승리를 확신하면서 기도를 마치셨습니다. 44-46절을 보십시오. “또 저희를 두시고 나아가 세 번째 동일한 말씀으로 기도하신 후 이에 제자들에게 오사 이르시되 이제는 자고 쉬라 보라 때가 가까웠느니라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우느니라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 지금은 사태가 긴박해졌습니다. 군졸들이 예수님을 체포하기 위해서 오고 있었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피하여 도망가자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도리어 “일어나라 함께 가자”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난을 향하여 담대히 나아가셨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하고자 할 때 기도함으로 확신과 능력을 덧입어야 합니다. 기도할 때 우리의 뜻과 하나님의 뜻이 더욱 분명해 집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섬기고자 기도하는 종들을 통해서 일하시고 그를 높이십니다. 우리가 범사에 감사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우리는 지금 전도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압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전도할 심정과 담대함을 덧입게 됩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깨어 있으려면 기도의 영을 주시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처럼 기도로 시험을 이기고 십자가를 잘 감당하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따라 기도할수록 요구는 점차 줄어들고 잠잠하게 됩니다. 순종하는데 말이 많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한편 제자들은 이 중요한 시기에 무엇을 하고 있었습니까? 40,41절을 보십시오. “ 제자들에게 오사 그 자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 동안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 ”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깨어 기도하라고 부탁하셨지만 한 시간도 깨어서 기도할 수 없었습니다. 제자들은 슬픔에 잠긴 나머지 깊은 잠에 빠졌습니다. 사람의 심령이 눌리면 기도하기 어렵습니다. 컴퓨터가 과부하가 걸리면 다운이 되는 것처럼 사람도 자기가 감당할 수 없는 일이 터지면 잠을 자는 것으로 피하게 됩니다. 이것은 자기 보호 본능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기도를 마치시고 제자들에게 와서 보시니 아직도 그들은 자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제는 자고 쉬라. 보라 때가 가까웠으니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우느니라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여전히 자고 있느냐고 책망하셨습니다. (Are you still sleeping and resting?) 그리고 지금은 기도할 때가 아니라 앞으로 나아가야 할 때라고 하셨습니다. 이를 볼 때 기도도 해야 할 때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마음은 원이지만 육신이 연약하여 새벽에 기도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도도 훈련이 되어야 합니다. 기도도 할수록 많아집니다. 특히 한 가지 기도 제목을 가지고 한 시간씩 기도할 수 있어야겠습니다. 우리가 너무 바빠서, 할 일이 많아서 기도하지 못한다면 루터의 본을 따라야 할 것입니다. 루터는 자기는 너무나 할 일이 많아서 하루 세 시간씩 기도하지 않고는 그 많은 일들을 감당해 낼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바쁠수록 더욱 기도하는데 시간을 낼 수 있는 지혜로운 자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기도할 때 우리는 자신의 연약함을 극복하고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기도를 통해서 십자가를 질 능력을 덧입으시고 담대히 앞으로 나아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실 때에 열둘 중에 하나인 가룟 유다가 왔는데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에게서 파송된 큰 무리가 검과 몽치를 가지고 그와 함께 하였습니다. 가룟 유다는 그들에게 군호를 짰습니다. 즉 자기가 입 맞추는 자가 그이니 그를 잡으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예수님께 나와서 랍비여 안녕하시옵시까 하고 독을 바른 입을 맞추었습니다. 예수님은 네가 무엇을 하려고 왔는지 행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저희가 나아와 예수님을 체포하였습니다. 이때 제자 중 하나가 손을 펴 검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목이 아니라 그 귀를 떨어뜨렸습니다. 이 제자는 베드로입니다(요18:10). 이에 예수님은 네 검을 도로 집에 꽂으라 검을 가지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 두 영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무장해제를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잡히시자 제자들이 다 도망했습니다. 예수님을 잡은 자들이 예수님을 끌고 대제사장 가야바에게로 가니 거기 서기관과 장로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멀찍이 예수님을 좇아 대제사장의 집 뜰에 까지 가서 그 결국을 보려고 안에 들어가 하속들과 함께 앉았습니다. 그는 수제자 체면이 있어서 아주 도망가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잡힐까 두려워서 적당한 거리를 두고 예수님을 따르고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공회에서 심문 당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온 공회가 예수님을 죽이려고 그를 칠 거짓 증거를 찾고 있었습니다. 거짓 증인이 많이 와서 거짓 고소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증거를 얻지 못했습니다. 후에 두 사람이 와서 이 사람의 말이 내가 하나님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지을 수 있다 하더라고 했습니다. 대제사장이 일어서서 예수님께 물었지만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변명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고자 하셨기 때문에 어린 양같이 잠잠히 자신을 내어 맡기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잠잠하시자 대제사장이 물었습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우리에게 말하라.” 이때 예수님은 닫힌 입술을 열어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말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예수님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질문에는 분명하게 대답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용기가 있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절망적인 상황에서 하나님 나라와 그가 심판하기 위해서 재림하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대제사장이 예수님을 심판대 앞에서 정죄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는 심판장이 되실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을 정죄했던 그 대제사장은 도망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오시는 것을 볼 것이고 정죄될 것입니다.
그러나 대제사장은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값비싼 자기 옷을 찢으며 외쳤습니다. “저가 참람한 말을 하였으니 어찌 더 증인을 요구하리요 보라 너희가 지금 이 참람한 말을 들었도다 생각이 어떠하뇨 대답하여 가로되 저는 사형에 해당하니라 하고 이에 예수의 얼굴에 침 뱉으며 주먹으로 치고 혹은 손바닥으로 때리며 가로되 그리스도야 우리에게 선지자 노릇을 하라 너를 친 자가 누구냐 하더라(65-68).” 예수님께서 자신의 정체성을 분명히 하심으로 인해 받은 것은 멸시와 모욕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마음은 하나님 나라와 그 소망으로 담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하심으로 시험을 이기고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이렇게 고난을 받으시는 것을 보고 있던 베드로의 마음은 더욱 위축되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왜 저렇게 힘없이 당하고만 계실까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우리의 죄악을 담당하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은 창조주이시지만 피조물에게 침뱉음을 당하시고 손바닥으로 뺨을 맞으셨습니다. 이런 모욕은 저 같은 죄인이라도 감당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이런 모욕을 당하면서 참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인간적으로 받아들이지 아니하시고 하나님께서 허용하신 것임을 알고 받아들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수치와 치욕을 담당하심으로 도덕적인 승리를 하신 것입니다.
베드로는 바깥뜰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 계집 종이 나아와 베드로에게 물었습니다. “너도 갈릴리 사람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이 말을 듣고 베드로가 맹세하고 또 부인하였습니다. “내가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베드로는 큰소리를 쳤지만 예수님을 부인하고 있습니다. 그는 계집종 앞에서도 두려워 떨고 있었습니다. 조금 후에 곁에 섰던 사람들이 나아와 베드로에게 말했습니다. “너도 진실로 그 당이라 네 말소리가 너를 표명한다.” 아마 베드로의 악센트가 갈릴리 방언을 말하였던 것 같습니다. “나는 아니여~” 베드로는 꼼짝없이 자신을 인정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모든 사람 앞에서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 “나는 네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겠노라”하면서 앞문까지 뒷걸음질을 치고 있는데 다른 계집종이 저를 보고 거기 있는 사람들에게 말했습니다. “이 사람은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그러자 베드로가 저주하며 맹세하였습니다. “내가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그러자 닭이 참다 참다 못하여 꼬끼요, 베드로야 회개하라 하며 꼬끼요 꼬끼요 그의 영혼을 흔들어 깨웠습니다. 닭울음 소리를 듣고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였습니다. 베드로가 제자로서 철저히 실패했지만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했을 때 예수님의 좋은 제자로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베드로는 자신의 교만이 철저히 부서짐을 느꼈습니다. 그가 이렇게 깨어졌을 때 하나님께 귀히 쓰임 받을 수 있었습니다. 27:1-10절은 유다의 배반을 다루고 있습니다. 유다는 예수님의 열 두 제자중 하나가 되는 특권을 가졌지만 예수님을 배우기보다 돈을 사랑했습니다. 그는 비참한 최후를 마쳤습니다.
우리가 어려울 때에 기도하는 것이 꼭 해야만 하는 일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은 기도하심으로 힘을 덧입으시고 고난의 잔을 마신 것을 배웠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예수님처럼 기도하도록 도와주시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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