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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마33강(마26:1-30)/언약의 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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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엘리야
댓글 0건 조회 3,255회 작성일 03-10-26 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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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마태복음 제 33 강                                                199, 346
말씀/마태복음 26:1-30
요절/마태복음 26:28
                                언약의 피
  “이것은 죄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예수님은 하나님의 유월절 어린 양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아브라함이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리고자 했을 때 하나님께서 준비하셨던 양이요, 이스라엘이 출애굽 할 때 장자를 대신하여 죽게 한 유월절 어린 양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때를 위하여 오랜 시간 준비를 해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때를 위하여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을 하시면서 자신의 죽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성만찬의 효시가 되었습니다. 이 시간 주님께서 흘리신 언약의 피의 의미를 깊이 새기기를 기도합니다.

I. 향유를 부은 여인(1-13)

  예수님께서 재림의 때에 일어날 일들을 말씀하시고 나서 제자들에게 심각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희의 아는 바와 같이 이틀을 지나면 유월절이라 인자가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하여 팔리우리라.”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 세 번씩이나 반복해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날이 이제 이틀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예수님은 유월절 어린 양이 되사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하여 팔리게 됩니다. 유월절은 유대인이 애굽에서 해방된 해방 기념일입니다. 노예의 속박에서 자유를 얻은 날입니다. 인간은 모두 죄의 종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대속제물이 되사 인류를 죄의 속박에서 해방시키고자 하십니다. 링컨 대통령이 남북 전쟁 기간 동안 노예 해방을 선언하였습니다. 노예들에게 그 날은 영원히 잊지 못할 날입니다. 마찬가지로 죄의 종이 되어 고생하다가 죽음에 이르게 된 인간들이 이 날을 학수고대하였습니다. 그 기대와 하나님께서 하신 약속이 성취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유월절 양이 되셔야 할 당사자인 예수님에게는 심히 두렵고 슬프고 고통스러운 날이 다가오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절박한 때에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가야바라 하는 대제사장의 아문에 모여 예수님을 궤계로 잡아 죽이려고 의논했습니다. 그들은 유월절 명절에 예수님을 죽이면 그를 따르는 무리들에 의해서 민요가 날까 하여 그 날만은 피하고자 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은밀히 죽여 없애려고 했습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구속 역사는 성취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악인들에 의해서 개죽음을 당할 수도 있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서로 다른 죽음의 시간표를 보게 됩니다. 우리가 현실 세계에서 부닥치는 문제들은 때로 우연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깊으신 경륜 가운데 그 뜻을 이루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찾아야 하고 그 뜻이 이루어지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타임 센스를 가지려면 깨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분별력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때를 따라서 일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때를 따라서 주님께 헌신한 여인을 다음에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문둥이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였습니다. 한 여자가 매우 귀한 향유 한 옥합을 가지고 나아와서 식사하시는 예수님의 머리에 부었습니다. 이 여인은 누구입니까? 나사로의 누이 마리아라고 생각합니다. 마리아는 죽어 냄새나던 오빠 나사로를 살려주신 주님의 은혜가 매우 컸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통해서 부활 신앙을 갖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주의 깊게 듣던 그녀는 예수님께서 죽으셔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장래를 위해서 모아 놓았던 귀한 향유 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 예수님의 머리에 부었습니다.  그녀는 예수님께 감사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또 예수님께 대한 사랑으로 충만했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에 가시기 위해 베다니에 들르신 예수님께 나아가 헌신할 기회를 잡았습니다. 여인은 타임 센스가 있었습니다. 드려야할 때 드리고 죽어야 할 때 죽어야 합니다. 이 여인은 헌신을 하는데 계산하지 않았습니다. 단순하게 자신의 진심을 드렸습니다. 누가 어떻게 생각할까, 뭐라고 할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예수님만 생각하고 헌신하였습니다. 여자는 사랑에 목숨을 건다고 합니다. 여자는 이해받기 위해서 태어난 것이 아니라 사랑받기 위해서 태어난다고 합니다.  사랑을 많이 받은 사람이 많이 사랑하고 적게 사랑을 받은 사람이 적게 사랑합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께 많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여인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 오신 하나님의 어린 양임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가 하나님이심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마음과 성품과 뜻과 힘을 다해서 사랑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 여자가 아낌없이 예수님께 향유를 붓는 것을 보고  제자들은 분해하며 말했습니다. “무슨 의사로 이것을 허비하느뇨 이것을 많은 값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요한복음에 의하면 화를 낸 자는  가룟 유다였습니다. 아마 세리 마태나 열혈 당원 알패오도 포함되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여인의 사랑을 돈으로 계산하고자 하는 어리석은 자였습니다. 그들은 여인의 마음에 있는 감사와 기쁨을 알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에 대해서도 잘 몰랐습니다. 그들은 여인의 헌신을 낭비라고 생각했습니다. 제자들은 돈독이 올라 있었습니다. 이 세상에는 돈, 돈, 돈하다가 돈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요즈음은 모든 것을 돈으로 평가하는 시대입니다. 돈은 우리 생활에 중요합니다.  또 돈으로 인해서 유용한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돈으로 할 수 없는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돈으로 생명을 살 수는 없습니다. 돈으로 죄사함을 받을 수 없습니다. 여인은 자기의 장래를 위해 준비한 것들을 아낌없이 드렸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여인을 칭찬하기보다 화를 냈습니다. 그것도 예수님의 제자들이 화를 냈습니다. 여인은 자신의 진심이 이해받지 못함으로 인해서 마음이 아팠을 것입니다. 우리가 주와 복음을 위해서 헌신하면 사람들은 어리석다 혹은 미쳤다고 말합니다. 일시적으로 이런 사람의 삶이 가난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인생은 모든 것이 해피 앤딩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 안에서도 비극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고난들을 통해서 새로운 세계를 체험하게 됩니다. 고난은 우리의 영적 감각을 회복해 줍니다. 고난은 우리를 성숙하게 합니다. 고난은 우리에게 집중하게 합니다. 우리는 이 여인이 현실 감각이 없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이 여인이야말로 가장 예민한 현실 감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핍박받는 여인을 변호하셨습니다. 10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아시고 저희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이 여자를 괴롭게 하느냐 저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예수님은 마음을 바쳐 헌신하는 여인을 괴롭게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여자가 예수님께 좋은 일을 하였다고 칭찬하셨습니다. 좋은 일은 아름다운 일입니다. 본받을 만한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여인으로 인하여 위로를 받으셨습니다.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이 여자가 내 몸에 이 향유를 부은 것은 내 장사를 위하여 함이니라(11,12).” 예수님은 여인의 헌신을 자신의 죽음에 동참하는 것으로 받아들이셨습니다. 하나님의 구속 역사를 섬긴 것으로 높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라고 하셨습니다(13). 예수님은 여인의 헌신을 하나도 헛되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는 주와 복음을 위해서 헌신을 다 했는데 남는 것이 없다고 생각될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내가 헛짓을 한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들고 손해 의식에 빠지게 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고전 15:58).” 헛되지 않다는 말은 텅비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상급을 다 받으면 하나님 나라에 가서 받을 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현재 받는 고난은 장차 나타날 영광에 비교하면 새 발의 피입니다. 우리가 이제까지 받은 복을 한 번 세어 보십시오. 그리고 감사하십시오. 지금 내게 나타난 어려움을 인하여 감사하십시오. 이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이루고자 하시는 뜻을 찾으십시오. 그리하여 우리의 헌신이 영원히 기억되도록 합시다.

II. 최후의 만찬(14-30)

  가룟 유다는 향유를 허비한다는 그의 의견이 거부되고 그 여자의 향유 부음이 예수님의 장례를 위한 것이라고 하자 반발심을 일으켰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따르는데 인간적인 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메시야가 되어 로마 군을 이스라엘에서 몰아내고 독립 이스라엘을 이루기를 기대했습니다. 그때 자신도 한 자리를 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죽으신다고 하자 자신의 꿈이 깨어져 나가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는 인간적인 방법으로 예수님의 생각을 바꾸고자 했습니다. 그는 대제사장들에게 가서 말했습니다. “내가 예수를 너희에게 넘겨 주리니 얼마나 주려느냐” 하니 그들이 은 삼십을 달아 주었습니다. 은 삼십은 노예의 몸값으로서 약 300만원 가량 되었습니다. 그는 이 때부터 예수님을 넘겨줄 기회를 찾았습니다. 그는 나중에 죄없는 예수님이 사형 판결을 받는 것을 보고는 양심의 가책을 받아 나가서 목매어 자살하였습니다. 배반자의 말로는 이와 같이 비참합니다. 우리가 인간으로서 가장 하지 못할 것은 사랑을 배반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로 하여금 유월절 만찬을 예비하도록 하셨습니다. 18,19절을 보십시오.  “성 안 아무에게 가서 이르되 선생님 말씀이 내 때가 가까왔으니 내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을 네 집에서 지키겠다 하시더라 하라 하신대 제자들이 예수의 시키신대로 하여 유월절을 예비하였더라.” 예수님은 가룟 유다를 생각하여 정확한 위치를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저물매 예수님과 열두 제자들이 함께 만찬 석상에 앉으셨습니다. 그런데 식사 하시는 도중 예수님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한 사람이 나를 팔리라 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저희가 심히 근심하여 각각 여짜오되 주여 내니이까?” 하며 물었습니다. 예수님이 죽으셔야 한다는 것과 그들 자신이 반역자가 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 그들로 하여금 심히 근심하게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가운데 가룟 유다의 회개를 촉구하기 위해 말씀하셨습니다.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그가 나를 팔리라(23).” 그리고 말씀하셨습니다. “인자는 자기에게 대하여 기록된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24).”  예수님은 마음을 바쳐 섬기던 제자에게 배반당하는 고통을 맛보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이 유다의 배반으로 죽는 것이 아니라 인류 구속 역사를 이루기 위하여 하나님의 뜻대로 죽는 것임을 아셨습니다. 이때 가룟 유다가 뻔뻔스럽게 질문했습니다. “랍비여 내니이까?” 예수님은 이런 그에게  회개를 촉구하시면서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말하였도다.” 이 짧은 한마디는 유다를 도우신 주님의 최후의 음성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유월절을 잡수시면서 주의 몸과 피를 기념하는 성례전을 제정하셨습니다. 26-28절을 보십시오. “저희가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을 주시며 가라사대 받아 먹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 하시고 또 잔을 가지사 사례하시고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여기서 떡은 무교병이었고 떡을 떼신 것은 그가 십자가에 달려 그 살을 찢으실 것에 대한 예표였습니다. 또 잔은 그리스도의 흘리신 피를 기념하는 것입니다. 성찬식은 주님께서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고귀한 몸을 찢기시고 보배피를 흘리신 은혜를 마음에 새기는 의식입니다. 그러면 성만찬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첫째, 예수님은 떡과 잔을 가지사 축복하신 후에 제자들에게 주시며 “받아 먹으라,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한 상에서 떡을 먹고 잔을 마시는 것은 주님의 고난에 동참함으로써 그리스도와 영적 교통을 나누는 것을 의미합니다. 최초의 인간 아담은 죄를 범함으로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숨었습니다. 그의 영혼은 죄로 인해 수치심을 느끼고 하나님과의 교제가 단절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살을 찢으시고 피를 흘리심으로 죄의 댓가를 치루셨습니다. 우리가 가까이 갈 수 없던 하나님께 이제는 담대히 나아가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교제를 나눔으로 참된 만족과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요6:53-58).” 우리는 죄로 죽어있었기 때문에 하나님과 교제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예수님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심으로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또한 영적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 예수님의 살을 먹고 예수님의 피를 마셔야 합니다. 예수님의 살과 피는 우리의 영혼에 생명과 능력과 기쁨을 제공해 줍니다. 그래서 우리는 생명력이 넘치고 기쁨이 충만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성만찬은 말씀과 함께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의 방편입니다.

둘째, 성만찬은 언약의 의미가 있습니다. 언약은 쌍방간의 계약이기 때문에 이를 받아들이는 자에게만 효력이 발생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인류의 죄를 위해 몸을 찢기시고 피를 흘리신 것은 객관적인 사실입니다. 이 객관적인 사실이 나에게 효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이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하신 일이 바로 나를 위해 하셨다는 것을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아니할 때 나는 영원히 하나님께 버림받은 존재요 진노의 심판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가 믿을 때 성령께서 역사하사 하나님과 나 사이에 언약 관계가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은 이 언약 관계를 기초로 나를 그의 백성으로 삼으시고 아무 값없이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28절을 다시 보십시오.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예수님은 언약의 피라고 말씀하심으로써 피가 매우 중요함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러면 피가 무슨 역활을 합니까? 구약에서 피가 사용되는 곳을 보면 그 역할이 다른 것을 알 수 있는데 대개 다음 세 가지로 나타납니다.

첫째로, 피는 죄의 사슬을 끊고 자유케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의 노예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자신들의 의지나 능력으로는 불가능하였습니다(출12:13). 왜냐하면 바로의 권세가 너무 강하였기 때문입니다. 바로는 열 재앙을 겪은 후에도 여전히 마음이 완악하여 이스라엘을 내어 주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마지막 재앙으로 바로의 장자로부터 생축의 장자까지 모든 장자를 치셨습니다. 죽음의 사자가 모든 장자를 칠 때 어린 양의 피를 좌우 문설주에 바른 집만이 죽음의 재앙을 면할 수 있었습니다. 그때는 부나 권세나 사회적인 지위나 학력이 아무 소용이 없고 어린 양의 피만이 필요했습니다. 이와 같이 인간들이 죄와 사망 권세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피 흘리심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의 피는 우리를 죄와 사단의 권세로부터 해방시켜 새 사람이 되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둘째로, 피는 언약을 인치는 보증의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출애굽 시키신 후 그들 마음 속 깊이 박혀 있는 노예 근성을 빼시고 그들을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으로 삼으시기 위해서 율법을 주시고 이를 준행하도록 했습니다(출24:6-8). 그들은 말씀대로 순종하겠다고 응답했습니다. 이때 모세가 피를 취하여 백성에게 뿌리며 말했습니다. “ 이는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에 대하여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피니라.”  이때의 피는 언약을 견고케 하기 위해 인친 것입니다. 그러나 이 언약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순종함으로써 파기되었습니다. 이 구언약이 실패하게 되자 하나님은 새 언약을 마련하셨습니다. 구 언약은 율법을 행함으로 사는 길이었습니다. 이는 인간의 행위로 말미암은 행위 언약이기 때문에 인간의 연약함으로 말미암아 지켜질 수 없었습니다. 만약 우리가 행위로 구원을 받는다면 이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 중에 누가 구원에 이를 수 있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새 언약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공로없이 구원받는 은혜의 언약입니다. 또 구 언약은 짐승의 피로 인친 것이기  때문에 영원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새 언약은 아무 죄없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의 피로 인쳤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변개할 수 없는 영원한 보증이 됩니다. 또 새 언약은 돌에 새기지 아니하고 우리의 마음 판에 새겨진 것입니다(렘31:31-34).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의 능력으로 말씀에 순종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게 됩니다.

셋째로, 피는 성결케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레위기17:11절에 보면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고 피는 죄를 속하는 능력이 있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범죄한 인간은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없었습니다. 인간이 하나님께 나아가려면 반드시 짐승의 피를 흘려 죄를 속해야 했습니다. 피로써 모든 것이 정결케 되었는데 이는 피흘림이 없이는 사함이 없기 때문입니다(히9:22). 짐승의 피가 인간의 죄를 대속하는 것이 대속의 원리입니다. 그러나 짐승의 피는 그 효과가 일시적이고 온전하지 못하여 죄를 범할 때마다 번거롭게 짐승의 피를 흘려 제사를 지내야 했습니다. 이는 장차 올 것의 그림자에 불과했습니다.

 우리는 육신의 몸을 입고 있기 때문에 연약하여 원치 않게 죄를 짓고 죄의식으로 고통하며 신음할 때가 많습니다. 한두 번 죄를 짓는 것이 아니라 반복해서 죄를 범하고 넘어질 때는 자신에 대해 깊이 절망하고 주님께서 이런 나를 과연 받아주시고 용서해 주실까 하는 회의에 시달리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피는 어떤 형편 가운데서도 항상 우리에게 놀라운 은혜를 줍니다. 죄를 속하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는 다만 예수님의 피의 은혜를 의지하기만 하면 됩니다. 예수님의 보혈의 능력을 찬양합니다. 설교가 귀로 듣는 설교라면 성만찬은 눈으로 보는 설교입니다. 우리는 떡과 포도주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봅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몸에 속한 모든 지체들이 함께 성만찬을 지킴으로 교회의 일치를 이루며 나아가 교회의 표지를 나타냅니다.
 
  29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죽음이 끝이 아니라 그 후에 승리와 영광이 있을 것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 그 곳에서 새로운 유월절 잔치를 하실 것을 말씀하심으로 제자들의 마음에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을 심어 주셨습니다. 그 후 그들은 찬미하고 감람산으로 나아갔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몸을 찢기시고 피를 흘리심으로 유월절 어린 양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의 피는 우리를 죄와 죽음의 권세로부터 자유케 해 줍니다.  예수님의 피는 우리를 하나님 나라로 인도하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는 영원한 언약의 보증이 되십니다. 우리가 날마다 예수님의 피의 은혜를 덧입고 생명력이 차고 넘치는 승리의 인생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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