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양회 2003년 가을 바이블 아카데미 첫째 날 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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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가을 바이블 아카데미 첫째 날 강의
아버지의 크신 사랑
말씀 / 누가복음 15:11-21
요절 / 누가복음 15:20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상거가 먼데 아버지가 저를 복 ㅗ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오늘 말씀은 유명한 탕자의 비유입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에서 죄인들을 향한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감동적으로 가르쳐 주십니다. 비유 속에는 집나간 아들이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간절히 기다리시는 아버지가 나옵니다. 이 시간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들에게 나를 향한 하나님 아버지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새롭게 느끼게 해주시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하나님을 떠난 세상에서 고생하는 이 시대의 탕자와 탕녀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깨우치고 살리는 영적 아비와 어미들이 되게 해주시기를 기도합니다.
Ⅰ. 아버지를 떠나 먼 나라로 간 아들(11-16)
집나간 아들의 비유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죄인들을 영접하시고 함께 식사하시는 예수님을 이해하지 못하고 비난하는 데서 시작됩니다(2). 예수님은 회개하고 나아온 세리들과 각종 죄인들을 영접하시고 그들을 위해 큰 잔치를 벌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일일이 죄인들의 손에 과일도 쥐어주시고, 차도 따라 주시며, 끝이 없는 그들의 내면 이야기를 다 들어주셨습니다. 그들의 상처받은 마음의 눈물을 닦아주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특히 잃은 양들에 대한 간절한 사랑과 용서의 사랑을 열심히 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회개한 이들을 귀한 하늘나라의 황태자요 황공주로 삼아주셨습니다. 세리와 창기들의 회개하고 주안에서 웃고 즐거워하며 새 인생을 살게 된 것은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데로 에덴동산의 모습 그대로였습니다. 그런데 이 광경을 지켜본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이 사람이 죄인들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하면서 예수님을 비난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에게 죄인들이 돌아올 때 얼마나 하나님이 기뻐하시는가를 잃은 양 한 마리, 잃은 한 드라크마와 멀리 떠난 둘째 아들 비유로 가르치시고 이들의 하나님의 마음을 모르는 율법적인 자세를 회개토록 하셨습니다.
11절을 보십시오. “또 가라사대 어떤 사람이 두 아들이 있는데”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는 풍성한 소출을 내는 포도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또 잘 훈련된 품군을 가진 부자 아버지였습니다. 그는 성품이 온유하고 사랑이 풍성하여 많은 품군들을 인격적으로 보살펴 주었습니다. 품군들은 이런 주인의 은혜에 보답하고자 더 열심히 일을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이 사람의 집은 해가 갈수록 재산이 늘었습니다. 이런 아버지의 두 아들에 대한 사랑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큰아들은 원칙적이고 성실하고 빈틈이 없는 성격이었습니다. 아버지가 한번 명하시면 명이 떨어지기 무섭게 절대적으로 순종하는 칼같은 순종파였습니다. 반면에 생각이 곧아서 자기 기준에 어긋나는 사람은 판단하고 정죄하기를 잘 하였습니다. 그런데 같은 부모 밑에서 태어났지만 둘째는 큰아들과는 완전히 달랐습니다. 그는 자유분방하고 새로운 것을 좋아하여 유행에 민감하였습니다. 일주일이 멀다하고 머리 색깔을 빨주노초파남보로 바꾸었습니다. 밭에서 일하다가도 어디선가 음악만 들리면 춤을 추었습니다. 또한 인터넷에 나오는 것은 모두 따라하는 앞서 가는 청년이었습니다. 그는 개성이 뚜렷하고 모험심과 호기심이 많았습니다. 아버지는 이런 두 아들을 인격적으로 귀하게 인정해 주었습니다. 또한 지극 정성으로 섬겨주고 부족함이 없이 늘 풍성한 사랑으로 대해 주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들이 장차 시대를 감당할 목자들로 성장하도록 특별히 신앙교육에 힘썼습니다. 매주 한 번씩 꼭 일대일 성경 공부와 깊이 있는 소감을 쓰며 말씀 앞에서 자신을 돌아보게 하였습니다. 자립적인 복음의 일군이 되도록 새벽이 되면 깨워서 개인 기도를 하는 훈련을 하였습니다. 젊은날 고생은 돈주고도 못산다고 하며 아들들을 들에 내보내어 땀 흘려 일하게 하였습니다. 이런 아버지의 방향에 큰아들은 항상 잘 순종하였습니다. 그러나 둘째는 이런 모든 것들이 자기를 얽어매어 자유가 없다며 사사건건 반발하였습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항상 형만 사랑한다고 입을 내밀고 다녔습니다. 이런 아들을 돕고자 특별한 사랑을 해주면 이번에는 왜 간섭하느냐고 화를 내었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진심과 세심한 사랑을 몰라주고 내 인생은 나의 것이니 제발 간섭하지 말아 달라고 대들기도 하였습니다. 그는 아버지 집에 그대로 있다가는 일생동안 하고 싶은 것 하나도 해보지 못할 것만 같았습니다. 들에 나가 말않듣고 자기 마음대로 돌아다니는 양들을 쫓아다니다 하루를 다 보낼 때에는 ‘내 인생이 뭐가 될꼬’ 하며 한심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더 늦기 전에 아버지 집을 떠나서 젊은 시절 세상에 나가 많은 것을 자유롭게 경험해보고 싶었습니다. 그는 아버지 같이 인생을 힘들게 살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그는 아버지 집을 떠나 새로운 세계에서 자기 원하는 대로 인생을 즐기고 싶었습니다. 그가 인터넷을 통해 먼 나라에 대한 동영상을 보고 난 후로는 먼나라에 대한 동경이 날로 더해갔습니다. 마침내 둘째 아들은 아버지 집을 떠나기로 결심하고 아버지를 찾아가 얼굴에 철판을 깔고 말했습니다. 12절을 보십시오. “그 둘째가 아비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비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분깃은 아버지가 죽기 직전이나 죽고 난 다음 나누어주는 유산입니다. 아버지가 아직 멀쩡하게 살아있는데 유산을 달라고 하는 것은 참으로 버릇없고 무례한 요구였습니다. 아버지는 이런 아들을 심하게 책망하며 그 요구를 한마디로 묵살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어떻게 하였습니까? 아버지는 아들이 왜 그런 요구를 했는지 심사숙고하였습니다. 아버지는 비록 마음은 상하였지만 아들의 생각을 존중하고 깊이 이해하고자 노력하였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이 왜 재산을 나누어달라고 하는지 잘 알았습니다. 아들이 결국 자기를 떠나려고 한다는 사실 앞에 배반당하는 아픔과 분노가 컷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아버지는 달랐습니다. 아들을 감정적으로 대하지 않고 인격적인 사랑으로 대했습니다. 아들이 이미 집을 나가기로 결심을 굳힌 것을 알고도 과감히 재산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아버지는 둘째가 언젠가는 아버지의 사랑과 뜻을 깨닫고 회개하고 돌아오리라고 신뢰하였습니다.
13절을 보십시오. “그 후 며칠이 못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가지고 먼 나라에 가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다 허비하더니” 둘째 아들은 재산을 분배받자마다 즉시 이를 처분하여 먼나라 익스프레스 카드에 담아 넣었습니다. 그리고 먼나라 에어라인을 타고 먼나라로 갔습니다. ‘먼~나라’ 이곳은 더 이상 아버지의 간섭이나 형의 무언의 Push도 받지 않는 자유의 땅이었습니다. 누구 하나 아침부터 공부하라고 깨우는 사람도 없고 성경공부 하자고 따라다니는 목자도 없었습니다. 둘째 아들은 세상이 온통 자기 것인 양 자유롭게 느껴졌습니다. 그는 여러 가지 꿈꾸어왔던 새로운 일을 시도하였습니다. 모든 것이 희망차고 자신감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얼마 못가 둘째 아들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가 자유라고 생각했던 것은 곧 방종으로 변해갔습니다. 그는 음란한 도시 분위기와 세상 친구들의 세력에 편승하여 자신도 모르게 점점 육신적인 생활에 빠져 들어갔습니다. 세상은 그의 죄의 소원을 부채질하며 죄를 짓도록 부추겼습니다. 그는 술에 취하고 창기와 놀아나며 정욕의 죄를 마음껏 지었습니다. 그는 아버지에게서 받은 귀한 재산을 흥청망청 허비하였습니다. ‘먼 나라에 가 거기에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허비하더니’ 여기서 재산은 아버지께서 주신 생명, 재능, 젊음, 시간, 물질 등 인생 전체를 뜻합니다. 그는 물질과 함께 귀중한 재능과 진심과 열정과 젊음을 창조적인 삶에 쓰지 못하고 허비만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여기서 돌이킬 진리의 힘이나 죄를 다스릴 자제력도 없었습니다. 그가 육체와 마음이 원하는 대로 살았을 때 비참한 인생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로마서 1장 21절 말씀대로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할 때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져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길 때 인간은 멸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은 진리를 좇아 살 때만이 참 자유를 누릴 줄 알게 되고 하나님 안에서 영혼의 만족과 인생의 참된 열매를 맺게 됩니다. 그러나 육체와 마음이 원하는 대로만 살면 죄의 종이 되고 남는 것은 죄의 열매와 후회뿐입니다.
14,15절을 보십시오. “다 없이 한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저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하나에게 붙여 사니 그가 저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그가 허랑방탕하게 지내는 동안 그의 재산은 바닥이 나고 설상가상으로 그 나라에 큰 흉년이 들었습니다. 그는 비로소 궁핍하게 되었습니다. 그에게 재산이 떨어지자 그동안 그를 따라다니던 친구들도 다 떨어져 나갔습니다. 할 수 없이 그 나라 백성 중 하나에게 붙여 살며 돼지치기가 되었습니다. 그는 너무 배가 고파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였지만 그것도 주는 자가 없었습니다. 그는 이방 땅에서 굶어 죽게 되었습니다. 그는 돼지보다 못한 참으로 비참한 상태가 되었습니다. 그가 이렇게 비참하게 밑바닥까지 굴러 떨어지게 된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는 그가 아버지를 떠났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버지 집에 있을 때에는 아버지의 권면이 모두 잔소리처럼 들렸습니다. 아버지가 제시하는 방향은 자기의 인생길을 방해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아버지가 주시는 훈련은 자기를 잘 모르고 아버지 율법에 따라 야단치는 것으로만 여겼습니다. 그는 이런 아버지만 떠나면 모든 것에서 자유롭고 행복해질 것으로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를 떠나자 목자를 떠난 양과 같이 유리방황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자유라는 미명하에 분명한 인생방향이나 비젼도 없어졌습니다. 진리가 없을 때 자유를 누릴 수 있는 내적 힘이 없어 자유는 그를 방종케 만들었습니다. 진리가 없을 때 분별력도 상실하고 세상의 조류와 사람의 인정과 정욕을 좇아 살면서 궁핍하게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둘째 아들의 이런 모습은 하나님의 품을 떠난 인간 실존을 잘 보여줍니다. 인간은 본래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되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고귀한 존재였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인간을 위해 에덴동산을 창설하시고 그곳에서 부족함이 없이 살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치 아니하였고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여 하나님의 품을 떠났습니다. 그 결과 낙원을 상실하고 불안과 두려움과 죄의식에 사로잡혀 고통하게 되었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떠날 때 스스로 지혜있다 하나 우준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을 섬기는 우상숭배자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또한 몸과 마음은 정욕으로 더러워져 추한 존재가 되었고, 성적 타락은 극에 달해 마침내 동성연애자들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온갖 불의, 추악, 탐욕, 악독, 살인, 분쟁, 시기가 만연하여 세상은 독소로 가득 찬 황폐한 사회가 되어버렸습니다. 이렇게 될 수밖에 없는 것은 인간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고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이로 인해 인간은 모든 생명력과 행복과 진리와 은혜를 허비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영혼이 굶주려 궁핍하고 병든 인생을 살게 되고 원치 않게 파멸의 길을 달려가고 있습니다. 이런 삶에서 구원받는 길이 무엇입니까?
II. 일어나 아버지께로(17-21)
17-19절에는 둘째 아들이 사망의 길에서 돌이켜 아버지의 아들로 회복되는 과정이 단계적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17절을 보십시오. “이에 스스로 돌이켜 가로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군이 얼마나 많은고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그가 참을 수 없는 고통에 이르렀을 때 비로소 제 정신이 들었습니다.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군이 얼마나 많은고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이 얼마나 기막힌 탄식입니까? 그는 주려 죽게 되자 비로소 아버지 집이 생각났습니다. 또 아버지 집에는 품군들도 부족함이 없이 풍족하게 지내고 아버지 집에는 모든 것이 풍족하였음을 기억케 되었습니다. 먹을 것도, 사랑도, 은혜도 풍족하고, 무엇보다 생명의 말씀이 풍족하였습니다. 일용할 양식 말씀, 일대일 말씀, 주일 예배 말씀, 금요 소감모임 말씀, 바이블 아카데미 말씀, 세계선교 보고대회 말씀, 또 철따라 신년 말씀, 봄가을 수양회 말씀, 그리고 여름이 되면 온갖 정성을 다해 준비한 여름 수양회 말씀이 풍성하였습니다. 그는 아버지가 들려주신 말씀이 한마디 한마디 생생하게 기억났습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15:5),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8:32) 하나님의 말씀들은 어느 하나 틀린 것이 없었습니다. 그는 비로소 이 말씀들이 자기를 정욕과 사단의 세력으로부터 보호하고 영혼을 소생시켜주고 세상을 살아갈 힘과 지혜를 공급해 주는 진리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는 아버지가 왜 그토록 간절히 성경공부를 하고 소감을 쓰게 했던가 그 뜻을 알게 되었습니다. 또한 그는 아버지가 주신 말씀과 훈련은 얼마나 자기를 사랑하기 때문에 주셨는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가 아버지의 사랑을 깨닫게 되자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소원과 용기가 생겼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크신 사랑을 배반하고 아버지를 떠난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은 죄인이었는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18,19절을 보십시오.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군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인간은 하나님 앞에 설 때 비로소 자신의 죄인됨을 깨닫게 됩니다. 과거 그는 죄인이라는 개념이 별로 없었습니다. 아버지께서 죄인이라는 인식을 억지로 심어주는 것만 같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하나님을 떠나 자기 마음대로 살며 인생을 허비한 죄인인 것을 깊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또한 욕심과 정욕과 반발심과 교만과 불신과 영적무지의 조인이었음을 깊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자신이 얼마나 심판받아 마땅한 죄인인가, 자격 없는 죄인인가 발견케 된 것입니다. 그는 이제 두 손 들고 겸손한 마음으로 아버지 집에 돌아가기로 결심하였습니다. 아들로서가 아니라 품군의 하나로 여겨주시는 것도 큰 은혜로 알고 살고자 마음의 각오를 단단히 하였습니다.
그는 마음의 결심을 행동으로 옮겼습니다. 20a절을 보십시오.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그는 믿음으로 허랑방탕한 삶에서 일어났습니다. 더러운 돼지우리에서 일어났습니다. 하나님 없이 자기 나름대로 살던 삶에서 일어났습니다. 그는 일어나서 냄새나는 옷을 갈아입거나 더러운 몸을 씻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냄새나고 누더기 옷 입은 그대로 아버지 집으로 나아갔습니다. 이는 실로 위대한 믿음의 결단이었습니다. 그가 비참한 삶에서 다시 아버지의 아들로 지위를 회복하고 새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은 죄악된 자리에서 일어나 아버지 집으로 돌이킨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이 극적인 회개로 멸망의 길에서 구원의 길로, 궁핍한 삶에서 풍족한 삶으로, 영원한 심판의 길에서 영생으로 들어서게 되었습니다. ‘회개’란 바로 이런 삶의 방향을 완전히 전환하는 것을 말합니다. 방향 전환하는 데는 믿음의 용기가 필요합니다. 돌아가는 것이 부끄럽고 수치스럽다고 해서 아버지께로 돌아가지 않으면 우리는 결코 참 자유와 생명과 행복을 되찾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반드시 죄악된 자리에서 일어나 하나님 아버지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소시민적 안일의 자리, 세상 욕심과 정욕의 자리, 적당주의의 자리, 자포자기의 자리에서 일어나 하나님 아버지께로 돌아올 때 구원을 받고 소망과 생명력이 넘치는 새로운 삶을 살게 됩니다.
아버지는 이런 모습으로 돌아온 아들을 어떻게 맞이했습니까? 20b절을 보십시오. “아직도 상거가 먼데 아버지가 저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누더기 옷을 입고 상거지 모습으로 돌아오는 아들을 아버지가 먼 거리에서 알아보고 달려 나왔습니다. 이를 볼 때 아버지가 그동안 집나간 아들을 얼마나 애타게 기다렸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이 집을 나간 뒤 한번도 다리를 뻗고 잠을 자지 못했습니다. 이 철부지가 어디에 가서 무엇을 하는지 안타까움과 근심으로 하루하루 몰라보게 주름살이 늘어만 갔습니다. 아버지는 늘 기도하며 아들이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기다렸습니다. 둘째가 좋아하는 삼겹살과 탕수육을 볼 때면 눈물이 나서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억수같이 비가 쏟아지는 날에도 동구 밖 고목나무까지 우산을 들고 가서 아들이 나타나기를 기다렸습니다. 아버지는 하루도 빠짐없이 아침과 저녁 기도시간에 아들을 위해 중보기도를 했습니다. 아들이 창기와 놀아난다는 소식, 누구에게 속아 거액을 사기당하여 재산이 거덜 나 거지가 되었다는 소식만 들려올 때 아버지는 잠을 잘 수가 없었습니다. 아버지는 밤을 새며 날마다 눈물로 기도하였습니다. 세월이 흘러 아버지의 머리가 희끗희끗해졌지만 아들을 기다리는 아버지의 마음은 변함이 없었습니다. 아버지의 마음은 기다리는 마음입니다. 하나님의 마음도 바로 기다리는 마음입니다. 인생들은 하나님을 떠나 자행자지하지만 하나님은 하나님을 떠난 인생들을 결코 잊지 아니하십니다. 이사야서 49:5절은 죄인들로 향하신 하나님의 마음을 이렇게 말씀합니다.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우리는 하나님을 잊을지라도 하나님은 우리를 결코 잊지 않으십니다. 또한 하나님은 인생들이 속히 돌아오기를 늘 기다리십니다. 구약성경을 관통하는 하나님의 인생들에 대한 일관된 메시지는 하나님께로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그것도 속히 바로 지금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이 하나님의 마음으로 인생들을 초청하셨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눈이 쇠하도록 아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던 어느 날 아버지는 저 멀리서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힘없이 걸어오는 한 거지를 보았습니다. 한 눈에 그가 바로 그토록 기다리던 자기 아들인 줄 알아보았습니다. 아버지는 그를 보고 측은히 여기며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었습니다. 아버지는 많은 재산을 창기와 함께 다 말아먹고 돼지우리에서 뒹굴다 온 아들이건만 그를 측은히 여기고 달려가 그의 목을 안고 입을 맞추었습니다. 이것이 아버지의 사랑, 곧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아무리 냄새나고 추한 죄인일지라도 회개하고 돌아오기만 하면 뜨겁게 영접해 주십니다. 우리가 한 걸음 하나님께 나아가면 하나님은 우리를 향하여 천 걸음 다가오시고, 우리가 걸어가면 하나님은 달려오십니다. 아버지의 사랑은 이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아들은 지은 죄로 아버지를 뵐 면목이 없어 아버지께 죄를 고백하고 이제는 아버지의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어떻게 하였습니까? 아버지는 종들 시켜 아들에게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겼습니다. 아들은 자신을 품군의 하나로 여겨 달라고 하였지만 아버지는 그를 당당한 둘째 아들로 지위를 회복시켜 주었고 그를 위해 살진 송아지를 잡고 큰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아버지는 너무 기뻐 이렇게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의 지난날의 잘못을 조금도 문제 삼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이미 그를 용서하였을 뿐 아니라 본래의 아들로 대우하셨습니다. 아버지의 행동하는 사랑은 아들을 감동시켰습니다. 아버지의 사랑은 아들의 허다한 허물을 덮어버렸습니다. 아버지의 사랑은 죄로 인해 상하고 찢긴 영혼의 모든 상처를 말끔히 씻고도 남았습니다. 이것이 회개하고 돌아온 죄인들을 영접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뜨거운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죄인들을 용서하실 뿐 아니라 아들로 후대하시는 분이십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영접하면 죄사함을 주실 뿐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이 되는 자격을 주십니다. 아들은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입니다. 하나님은 아무 자격 없는 우리를 하나님의 아들이요 하늘나라의 상속자로 삼아 주셨습니다. 찬송가 저자는 이 하나님의 사랑을 “바다를 먹물로 삼고 하늘을 두루마리로 삼아도 다 기록할 수 없는 사랑”이라 찬송하였습니다. 죄인들을 뜨겁게 영접하시고 후대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크신 사랑을 찬양합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은 지금도 죄인들이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애타게 기다리고 계십니다. 회개하고 돌아오기만 하면 언제든지 달려와 뜨겁게 영접해 주시며 우리를 다시 하나님의 황태자요 황공주로 세워주십니다. 더 이상 지체하지 마십시오. 지금이 은혜의 때요 구원의 때입니다. 돌이키지 않으면 상처만 커집니다. 지금 돌아오십시오. 하나님 아버지의 죄인들을 기다리시는 사랑, 회개한 자를 뜨겁게 영접해 주시는 그 사랑을 찬양합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사랑을 새롭게 영접하고 구원의 은혜를 누리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할렐루야!
아버지의 크신 사랑
말씀 / 누가복음 15:11-21
요절 / 누가복음 15:20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상거가 먼데 아버지가 저를 복 ㅗ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오늘 말씀은 유명한 탕자의 비유입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에서 죄인들을 향한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감동적으로 가르쳐 주십니다. 비유 속에는 집나간 아들이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간절히 기다리시는 아버지가 나옵니다. 이 시간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들에게 나를 향한 하나님 아버지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새롭게 느끼게 해주시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하나님을 떠난 세상에서 고생하는 이 시대의 탕자와 탕녀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깨우치고 살리는 영적 아비와 어미들이 되게 해주시기를 기도합니다.
Ⅰ. 아버지를 떠나 먼 나라로 간 아들(11-16)
집나간 아들의 비유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죄인들을 영접하시고 함께 식사하시는 예수님을 이해하지 못하고 비난하는 데서 시작됩니다(2). 예수님은 회개하고 나아온 세리들과 각종 죄인들을 영접하시고 그들을 위해 큰 잔치를 벌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일일이 죄인들의 손에 과일도 쥐어주시고, 차도 따라 주시며, 끝이 없는 그들의 내면 이야기를 다 들어주셨습니다. 그들의 상처받은 마음의 눈물을 닦아주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특히 잃은 양들에 대한 간절한 사랑과 용서의 사랑을 열심히 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회개한 이들을 귀한 하늘나라의 황태자요 황공주로 삼아주셨습니다. 세리와 창기들의 회개하고 주안에서 웃고 즐거워하며 새 인생을 살게 된 것은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데로 에덴동산의 모습 그대로였습니다. 그런데 이 광경을 지켜본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이 사람이 죄인들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하면서 예수님을 비난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에게 죄인들이 돌아올 때 얼마나 하나님이 기뻐하시는가를 잃은 양 한 마리, 잃은 한 드라크마와 멀리 떠난 둘째 아들 비유로 가르치시고 이들의 하나님의 마음을 모르는 율법적인 자세를 회개토록 하셨습니다.
11절을 보십시오. “또 가라사대 어떤 사람이 두 아들이 있는데”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는 풍성한 소출을 내는 포도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또 잘 훈련된 품군을 가진 부자 아버지였습니다. 그는 성품이 온유하고 사랑이 풍성하여 많은 품군들을 인격적으로 보살펴 주었습니다. 품군들은 이런 주인의 은혜에 보답하고자 더 열심히 일을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이 사람의 집은 해가 갈수록 재산이 늘었습니다. 이런 아버지의 두 아들에 대한 사랑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큰아들은 원칙적이고 성실하고 빈틈이 없는 성격이었습니다. 아버지가 한번 명하시면 명이 떨어지기 무섭게 절대적으로 순종하는 칼같은 순종파였습니다. 반면에 생각이 곧아서 자기 기준에 어긋나는 사람은 판단하고 정죄하기를 잘 하였습니다. 그런데 같은 부모 밑에서 태어났지만 둘째는 큰아들과는 완전히 달랐습니다. 그는 자유분방하고 새로운 것을 좋아하여 유행에 민감하였습니다. 일주일이 멀다하고 머리 색깔을 빨주노초파남보로 바꾸었습니다. 밭에서 일하다가도 어디선가 음악만 들리면 춤을 추었습니다. 또한 인터넷에 나오는 것은 모두 따라하는 앞서 가는 청년이었습니다. 그는 개성이 뚜렷하고 모험심과 호기심이 많았습니다. 아버지는 이런 두 아들을 인격적으로 귀하게 인정해 주었습니다. 또한 지극 정성으로 섬겨주고 부족함이 없이 늘 풍성한 사랑으로 대해 주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들이 장차 시대를 감당할 목자들로 성장하도록 특별히 신앙교육에 힘썼습니다. 매주 한 번씩 꼭 일대일 성경 공부와 깊이 있는 소감을 쓰며 말씀 앞에서 자신을 돌아보게 하였습니다. 자립적인 복음의 일군이 되도록 새벽이 되면 깨워서 개인 기도를 하는 훈련을 하였습니다. 젊은날 고생은 돈주고도 못산다고 하며 아들들을 들에 내보내어 땀 흘려 일하게 하였습니다. 이런 아버지의 방향에 큰아들은 항상 잘 순종하였습니다. 그러나 둘째는 이런 모든 것들이 자기를 얽어매어 자유가 없다며 사사건건 반발하였습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항상 형만 사랑한다고 입을 내밀고 다녔습니다. 이런 아들을 돕고자 특별한 사랑을 해주면 이번에는 왜 간섭하느냐고 화를 내었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진심과 세심한 사랑을 몰라주고 내 인생은 나의 것이니 제발 간섭하지 말아 달라고 대들기도 하였습니다. 그는 아버지 집에 그대로 있다가는 일생동안 하고 싶은 것 하나도 해보지 못할 것만 같았습니다. 들에 나가 말않듣고 자기 마음대로 돌아다니는 양들을 쫓아다니다 하루를 다 보낼 때에는 ‘내 인생이 뭐가 될꼬’ 하며 한심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더 늦기 전에 아버지 집을 떠나서 젊은 시절 세상에 나가 많은 것을 자유롭게 경험해보고 싶었습니다. 그는 아버지 같이 인생을 힘들게 살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그는 아버지 집을 떠나 새로운 세계에서 자기 원하는 대로 인생을 즐기고 싶었습니다. 그가 인터넷을 통해 먼 나라에 대한 동영상을 보고 난 후로는 먼나라에 대한 동경이 날로 더해갔습니다. 마침내 둘째 아들은 아버지 집을 떠나기로 결심하고 아버지를 찾아가 얼굴에 철판을 깔고 말했습니다. 12절을 보십시오. “그 둘째가 아비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비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분깃은 아버지가 죽기 직전이나 죽고 난 다음 나누어주는 유산입니다. 아버지가 아직 멀쩡하게 살아있는데 유산을 달라고 하는 것은 참으로 버릇없고 무례한 요구였습니다. 아버지는 이런 아들을 심하게 책망하며 그 요구를 한마디로 묵살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어떻게 하였습니까? 아버지는 아들이 왜 그런 요구를 했는지 심사숙고하였습니다. 아버지는 비록 마음은 상하였지만 아들의 생각을 존중하고 깊이 이해하고자 노력하였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이 왜 재산을 나누어달라고 하는지 잘 알았습니다. 아들이 결국 자기를 떠나려고 한다는 사실 앞에 배반당하는 아픔과 분노가 컷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아버지는 달랐습니다. 아들을 감정적으로 대하지 않고 인격적인 사랑으로 대했습니다. 아들이 이미 집을 나가기로 결심을 굳힌 것을 알고도 과감히 재산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아버지는 둘째가 언젠가는 아버지의 사랑과 뜻을 깨닫고 회개하고 돌아오리라고 신뢰하였습니다.
13절을 보십시오. “그 후 며칠이 못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가지고 먼 나라에 가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다 허비하더니” 둘째 아들은 재산을 분배받자마다 즉시 이를 처분하여 먼나라 익스프레스 카드에 담아 넣었습니다. 그리고 먼나라 에어라인을 타고 먼나라로 갔습니다. ‘먼~나라’ 이곳은 더 이상 아버지의 간섭이나 형의 무언의 Push도 받지 않는 자유의 땅이었습니다. 누구 하나 아침부터 공부하라고 깨우는 사람도 없고 성경공부 하자고 따라다니는 목자도 없었습니다. 둘째 아들은 세상이 온통 자기 것인 양 자유롭게 느껴졌습니다. 그는 여러 가지 꿈꾸어왔던 새로운 일을 시도하였습니다. 모든 것이 희망차고 자신감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얼마 못가 둘째 아들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가 자유라고 생각했던 것은 곧 방종으로 변해갔습니다. 그는 음란한 도시 분위기와 세상 친구들의 세력에 편승하여 자신도 모르게 점점 육신적인 생활에 빠져 들어갔습니다. 세상은 그의 죄의 소원을 부채질하며 죄를 짓도록 부추겼습니다. 그는 술에 취하고 창기와 놀아나며 정욕의 죄를 마음껏 지었습니다. 그는 아버지에게서 받은 귀한 재산을 흥청망청 허비하였습니다. ‘먼 나라에 가 거기에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허비하더니’ 여기서 재산은 아버지께서 주신 생명, 재능, 젊음, 시간, 물질 등 인생 전체를 뜻합니다. 그는 물질과 함께 귀중한 재능과 진심과 열정과 젊음을 창조적인 삶에 쓰지 못하고 허비만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여기서 돌이킬 진리의 힘이나 죄를 다스릴 자제력도 없었습니다. 그가 육체와 마음이 원하는 대로 살았을 때 비참한 인생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로마서 1장 21절 말씀대로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할 때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져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길 때 인간은 멸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은 진리를 좇아 살 때만이 참 자유를 누릴 줄 알게 되고 하나님 안에서 영혼의 만족과 인생의 참된 열매를 맺게 됩니다. 그러나 육체와 마음이 원하는 대로만 살면 죄의 종이 되고 남는 것은 죄의 열매와 후회뿐입니다.
14,15절을 보십시오. “다 없이 한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저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하나에게 붙여 사니 그가 저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그가 허랑방탕하게 지내는 동안 그의 재산은 바닥이 나고 설상가상으로 그 나라에 큰 흉년이 들었습니다. 그는 비로소 궁핍하게 되었습니다. 그에게 재산이 떨어지자 그동안 그를 따라다니던 친구들도 다 떨어져 나갔습니다. 할 수 없이 그 나라 백성 중 하나에게 붙여 살며 돼지치기가 되었습니다. 그는 너무 배가 고파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였지만 그것도 주는 자가 없었습니다. 그는 이방 땅에서 굶어 죽게 되었습니다. 그는 돼지보다 못한 참으로 비참한 상태가 되었습니다. 그가 이렇게 비참하게 밑바닥까지 굴러 떨어지게 된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는 그가 아버지를 떠났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버지 집에 있을 때에는 아버지의 권면이 모두 잔소리처럼 들렸습니다. 아버지가 제시하는 방향은 자기의 인생길을 방해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아버지가 주시는 훈련은 자기를 잘 모르고 아버지 율법에 따라 야단치는 것으로만 여겼습니다. 그는 이런 아버지만 떠나면 모든 것에서 자유롭고 행복해질 것으로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를 떠나자 목자를 떠난 양과 같이 유리방황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자유라는 미명하에 분명한 인생방향이나 비젼도 없어졌습니다. 진리가 없을 때 자유를 누릴 수 있는 내적 힘이 없어 자유는 그를 방종케 만들었습니다. 진리가 없을 때 분별력도 상실하고 세상의 조류와 사람의 인정과 정욕을 좇아 살면서 궁핍하게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둘째 아들의 이런 모습은 하나님의 품을 떠난 인간 실존을 잘 보여줍니다. 인간은 본래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되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고귀한 존재였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인간을 위해 에덴동산을 창설하시고 그곳에서 부족함이 없이 살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치 아니하였고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여 하나님의 품을 떠났습니다. 그 결과 낙원을 상실하고 불안과 두려움과 죄의식에 사로잡혀 고통하게 되었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떠날 때 스스로 지혜있다 하나 우준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을 섬기는 우상숭배자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또한 몸과 마음은 정욕으로 더러워져 추한 존재가 되었고, 성적 타락은 극에 달해 마침내 동성연애자들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온갖 불의, 추악, 탐욕, 악독, 살인, 분쟁, 시기가 만연하여 세상은 독소로 가득 찬 황폐한 사회가 되어버렸습니다. 이렇게 될 수밖에 없는 것은 인간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고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이로 인해 인간은 모든 생명력과 행복과 진리와 은혜를 허비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영혼이 굶주려 궁핍하고 병든 인생을 살게 되고 원치 않게 파멸의 길을 달려가고 있습니다. 이런 삶에서 구원받는 길이 무엇입니까?
II. 일어나 아버지께로(17-21)
17-19절에는 둘째 아들이 사망의 길에서 돌이켜 아버지의 아들로 회복되는 과정이 단계적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17절을 보십시오. “이에 스스로 돌이켜 가로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군이 얼마나 많은고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그가 참을 수 없는 고통에 이르렀을 때 비로소 제 정신이 들었습니다.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군이 얼마나 많은고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이 얼마나 기막힌 탄식입니까? 그는 주려 죽게 되자 비로소 아버지 집이 생각났습니다. 또 아버지 집에는 품군들도 부족함이 없이 풍족하게 지내고 아버지 집에는 모든 것이 풍족하였음을 기억케 되었습니다. 먹을 것도, 사랑도, 은혜도 풍족하고, 무엇보다 생명의 말씀이 풍족하였습니다. 일용할 양식 말씀, 일대일 말씀, 주일 예배 말씀, 금요 소감모임 말씀, 바이블 아카데미 말씀, 세계선교 보고대회 말씀, 또 철따라 신년 말씀, 봄가을 수양회 말씀, 그리고 여름이 되면 온갖 정성을 다해 준비한 여름 수양회 말씀이 풍성하였습니다. 그는 아버지가 들려주신 말씀이 한마디 한마디 생생하게 기억났습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15:5),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8:32) 하나님의 말씀들은 어느 하나 틀린 것이 없었습니다. 그는 비로소 이 말씀들이 자기를 정욕과 사단의 세력으로부터 보호하고 영혼을 소생시켜주고 세상을 살아갈 힘과 지혜를 공급해 주는 진리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는 아버지가 왜 그토록 간절히 성경공부를 하고 소감을 쓰게 했던가 그 뜻을 알게 되었습니다. 또한 그는 아버지가 주신 말씀과 훈련은 얼마나 자기를 사랑하기 때문에 주셨는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가 아버지의 사랑을 깨닫게 되자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소원과 용기가 생겼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크신 사랑을 배반하고 아버지를 떠난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은 죄인이었는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18,19절을 보십시오.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군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인간은 하나님 앞에 설 때 비로소 자신의 죄인됨을 깨닫게 됩니다. 과거 그는 죄인이라는 개념이 별로 없었습니다. 아버지께서 죄인이라는 인식을 억지로 심어주는 것만 같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하나님을 떠나 자기 마음대로 살며 인생을 허비한 죄인인 것을 깊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또한 욕심과 정욕과 반발심과 교만과 불신과 영적무지의 조인이었음을 깊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자신이 얼마나 심판받아 마땅한 죄인인가, 자격 없는 죄인인가 발견케 된 것입니다. 그는 이제 두 손 들고 겸손한 마음으로 아버지 집에 돌아가기로 결심하였습니다. 아들로서가 아니라 품군의 하나로 여겨주시는 것도 큰 은혜로 알고 살고자 마음의 각오를 단단히 하였습니다.
그는 마음의 결심을 행동으로 옮겼습니다. 20a절을 보십시오.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그는 믿음으로 허랑방탕한 삶에서 일어났습니다. 더러운 돼지우리에서 일어났습니다. 하나님 없이 자기 나름대로 살던 삶에서 일어났습니다. 그는 일어나서 냄새나는 옷을 갈아입거나 더러운 몸을 씻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냄새나고 누더기 옷 입은 그대로 아버지 집으로 나아갔습니다. 이는 실로 위대한 믿음의 결단이었습니다. 그가 비참한 삶에서 다시 아버지의 아들로 지위를 회복하고 새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은 죄악된 자리에서 일어나 아버지 집으로 돌이킨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이 극적인 회개로 멸망의 길에서 구원의 길로, 궁핍한 삶에서 풍족한 삶으로, 영원한 심판의 길에서 영생으로 들어서게 되었습니다. ‘회개’란 바로 이런 삶의 방향을 완전히 전환하는 것을 말합니다. 방향 전환하는 데는 믿음의 용기가 필요합니다. 돌아가는 것이 부끄럽고 수치스럽다고 해서 아버지께로 돌아가지 않으면 우리는 결코 참 자유와 생명과 행복을 되찾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반드시 죄악된 자리에서 일어나 하나님 아버지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소시민적 안일의 자리, 세상 욕심과 정욕의 자리, 적당주의의 자리, 자포자기의 자리에서 일어나 하나님 아버지께로 돌아올 때 구원을 받고 소망과 생명력이 넘치는 새로운 삶을 살게 됩니다.
아버지는 이런 모습으로 돌아온 아들을 어떻게 맞이했습니까? 20b절을 보십시오. “아직도 상거가 먼데 아버지가 저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누더기 옷을 입고 상거지 모습으로 돌아오는 아들을 아버지가 먼 거리에서 알아보고 달려 나왔습니다. 이를 볼 때 아버지가 그동안 집나간 아들을 얼마나 애타게 기다렸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이 집을 나간 뒤 한번도 다리를 뻗고 잠을 자지 못했습니다. 이 철부지가 어디에 가서 무엇을 하는지 안타까움과 근심으로 하루하루 몰라보게 주름살이 늘어만 갔습니다. 아버지는 늘 기도하며 아들이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기다렸습니다. 둘째가 좋아하는 삼겹살과 탕수육을 볼 때면 눈물이 나서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억수같이 비가 쏟아지는 날에도 동구 밖 고목나무까지 우산을 들고 가서 아들이 나타나기를 기다렸습니다. 아버지는 하루도 빠짐없이 아침과 저녁 기도시간에 아들을 위해 중보기도를 했습니다. 아들이 창기와 놀아난다는 소식, 누구에게 속아 거액을 사기당하여 재산이 거덜 나 거지가 되었다는 소식만 들려올 때 아버지는 잠을 잘 수가 없었습니다. 아버지는 밤을 새며 날마다 눈물로 기도하였습니다. 세월이 흘러 아버지의 머리가 희끗희끗해졌지만 아들을 기다리는 아버지의 마음은 변함이 없었습니다. 아버지의 마음은 기다리는 마음입니다. 하나님의 마음도 바로 기다리는 마음입니다. 인생들은 하나님을 떠나 자행자지하지만 하나님은 하나님을 떠난 인생들을 결코 잊지 아니하십니다. 이사야서 49:5절은 죄인들로 향하신 하나님의 마음을 이렇게 말씀합니다.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우리는 하나님을 잊을지라도 하나님은 우리를 결코 잊지 않으십니다. 또한 하나님은 인생들이 속히 돌아오기를 늘 기다리십니다. 구약성경을 관통하는 하나님의 인생들에 대한 일관된 메시지는 하나님께로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그것도 속히 바로 지금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이 하나님의 마음으로 인생들을 초청하셨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눈이 쇠하도록 아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던 어느 날 아버지는 저 멀리서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힘없이 걸어오는 한 거지를 보았습니다. 한 눈에 그가 바로 그토록 기다리던 자기 아들인 줄 알아보았습니다. 아버지는 그를 보고 측은히 여기며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었습니다. 아버지는 많은 재산을 창기와 함께 다 말아먹고 돼지우리에서 뒹굴다 온 아들이건만 그를 측은히 여기고 달려가 그의 목을 안고 입을 맞추었습니다. 이것이 아버지의 사랑, 곧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아무리 냄새나고 추한 죄인일지라도 회개하고 돌아오기만 하면 뜨겁게 영접해 주십니다. 우리가 한 걸음 하나님께 나아가면 하나님은 우리를 향하여 천 걸음 다가오시고, 우리가 걸어가면 하나님은 달려오십니다. 아버지의 사랑은 이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아들은 지은 죄로 아버지를 뵐 면목이 없어 아버지께 죄를 고백하고 이제는 아버지의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어떻게 하였습니까? 아버지는 종들 시켜 아들에게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겼습니다. 아들은 자신을 품군의 하나로 여겨 달라고 하였지만 아버지는 그를 당당한 둘째 아들로 지위를 회복시켜 주었고 그를 위해 살진 송아지를 잡고 큰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아버지는 너무 기뻐 이렇게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의 지난날의 잘못을 조금도 문제 삼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이미 그를 용서하였을 뿐 아니라 본래의 아들로 대우하셨습니다. 아버지의 행동하는 사랑은 아들을 감동시켰습니다. 아버지의 사랑은 아들의 허다한 허물을 덮어버렸습니다. 아버지의 사랑은 죄로 인해 상하고 찢긴 영혼의 모든 상처를 말끔히 씻고도 남았습니다. 이것이 회개하고 돌아온 죄인들을 영접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뜨거운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죄인들을 용서하실 뿐 아니라 아들로 후대하시는 분이십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영접하면 죄사함을 주실 뿐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이 되는 자격을 주십니다. 아들은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입니다. 하나님은 아무 자격 없는 우리를 하나님의 아들이요 하늘나라의 상속자로 삼아 주셨습니다. 찬송가 저자는 이 하나님의 사랑을 “바다를 먹물로 삼고 하늘을 두루마리로 삼아도 다 기록할 수 없는 사랑”이라 찬송하였습니다. 죄인들을 뜨겁게 영접하시고 후대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크신 사랑을 찬양합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은 지금도 죄인들이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애타게 기다리고 계십니다. 회개하고 돌아오기만 하면 언제든지 달려와 뜨겁게 영접해 주시며 우리를 다시 하나님의 황태자요 황공주로 세워주십니다. 더 이상 지체하지 마십시오. 지금이 은혜의 때요 구원의 때입니다. 돌이키지 않으면 상처만 커집니다. 지금 돌아오십시오. 하나님 아버지의 죄인들을 기다리시는 사랑, 회개한 자를 뜨겁게 영접해 주시는 그 사랑을 찬양합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사랑을 새롭게 영접하고 구원의 은혜를 누리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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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회 다운로드 | DATE : 2003-10-08 22:4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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