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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마30강(23:1-39)/외식하는 자들을 책망하신 예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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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엘리야
댓글 0건 조회 2,986회 작성일 03-10-05 09:56

본문

2003년 마태복음 제 30 강                                           
말씀/ 마태복음 23:1-39
요절/ 마태복음 23:25

외식하는 자들을 책망하신 예수님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

  각 나라는 다른 나라에 대한 우월감과 자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다른 나라들이 가지고 있지 않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자부심이 강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정치적으로 세계적인 강국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앗수르, 바벨론, 헬라, 페르시아, 로마에 의해서 정복당했고 예루살렘은 여러 번 포위된 채로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있다는 것 때문에 결코 다른 나라에 대한 우월감을 상실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단순히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율법의 정신이 살아 있고 말씀이 가르치는 대로 행할 때 자부심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율법의 정신, 스피릿을 잃어버렸을 때 그들은 짠 맛을 잃어버린 소금과 같이 되었습니다(마5:13). 바리새인들은 한때 선택된 사람들이었고 한 때 위대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율법의 정신 즉 스피릿을 상실했을 때 그들은 한 떼의 위선자들이 되었습니다. 23장에서 예수님은 그들을 책망하시고 그들의 외식으로 인해서 슬퍼하셨습니다. 여기에는 바리새인들에 대한 주님의 상한 목자의 심정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본문 말씀을 통해 내 속에 있는 바리새인적인 요소를 회개하고 좋은 영향력을 소유한 영적 지도자로 성장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I. 저희의 행위는 본받지 말라(1-12)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이 아니라 무리와 제자들에게 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는 제자들로 하여금 바리새인들의 악한 영향력에 물들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제까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악한 질문에 대답을 하시면서 예수님은 지도자가 피해야 할 죄가 무엇인가 절감하시고 제자들에게 경계하셨습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았습니다(2).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을 받아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 의미와 정신을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글로 기록하여 모세오경을 남겼습니다. 서기관들은 성경을 일일이 손으로 기록하여 필사본을 만들고 그 의미를 가르치는 일을 하였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해석하고 가르치며 재판하는 일을 하였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모세의 직분과 위치를 계승한 자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도 그들이 율법의 권위자라는 사실을 부인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첫째, 그들은 자신들이 가르치는 대로 행하지 않았습니다(3). 사실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는 일이 쉽지 않습니다. 한 말씀이 마음에 와 닿기까지 말씀을 연구하고 묵상하고 전하는 것은 많은 투쟁이 필요합니다. 말씀을 심령으로 받으면 말씀에 순종하여 체험하고 싶은 소원이 생깁니다. 말씀에 순종할 때 그 깊은 뜻을 체험하게 되고 하나님의 지혜와 실존에 놀라게 됩니다. 그들의 근본문제는 하나님의 말씀이 마음에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해서 새롭게 받기보다 전통과 형식에 매이게 되고, 안일한 자세로 말씀을 공부했을 때 그들은 말씀에 순종할 힘을 상실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파려면 처음에는 엄청 졸립고 어느 정도 말씀이 들어오면 진액이 빠져나가는 것 같고 기력이 쇠해집니다. 그러나 이런 수고를 통해서 말씀을 전할 때는 달라집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서 좌우에 날선 검 같으며 영과 혼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는 힘이 있습니다. 말씀 공부와 소감쓰기, 묵상을 통해서 그 스피릿을 체험하게 될 때 변화되지 않을 사람이 없습니다. 살아나지 않을 사람이 없고 치료되지 않을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말씀에 대해서 닳고 닳아서 마음이 뺀질뺀질했습니다. 그들은 낡은 가죽부대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의 심령은 축 늘어진 노인의 뱃가죽과 같았습니다. 예수님은 무리와 제자들에게 바리새인들이 가르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그 행위는 본받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들의 행위가 어떠했습니까? “저희는 말만 하고 행치 아니하며 또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했습니다(3b,4). 바리새인들은 자기들도 하지 못하는 수많은 규례를 만들어 양들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않았습니다. 예를 들어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고 일하지 말라”는 말씀은 아주 단순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이 말씀을 엄격하게 해석하여 모든 형태의 운반, 심지어 열쇠나 손수건 같이 사소한 것일지라도 거리에서는 운반하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또 모든 형태의 불 피우기, 불끄기가 금지되어 자동차를 운전하는 것은 점화 장치를 켜고 엑셀을 밟는 것은 불을 때는 일이기 때문에 정통 유대인들은 오늘날에도 운전을 할 수 없다고 합니다. 바리새인들은 수많은 예외 규정을 만들어서 자신들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았습니다.

  바리새인들이 무거운 짐을 양들의 어깨에 지웠던 것과 대조적으로 우리 주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11:28-30).” 예수님은 양들의 짐을 대신 져 주시며 상한 마음을 싸매어 주시고 꺼져가는 마음에 희망의 불을 붙여 주십니다.

  토마스 아켐피스는 “그리스도를 본받아”라는 유명한 책을 썼습니다. 신앙생활이란 한마디로 예수님을 본받는 생활입니다. 바울은 바리새인으로서 이중생활하던 자였습니다(롬7:14,15). 그러나 그가 예수님을 본받는 생활을 하게 되었을 때 그는 가장 진실되고 영향력있는 영적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고린도 성도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고전11:1).” 제가 가르치는 입장에 있는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사랑이나 제자 양성에서나 본이 되기 위해서 더욱 힘써야 함을 깨닫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본받아 어디에 가든지 본이 되는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둘째, 그들은 자기 영광을 구했습니다(5-12). 5-7절을 보십시오. “저희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여 하나니 곧 그 차는 경문을 넓게 하며 옷술을 크게 하고 잔치의 상석과 회당의 상좌와 시장에서 문안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하느니라.” 그들은 러시아 정교회 사제들처럼 자신들을 너무나 아름답게 장식했습니다. 경문은 성냥갑만한 성구갑입니다. 신명기6:8절을 보면 하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를 삼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이 말씀을 사랑하는 것을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이 경문을 대문짝만하게 만들어 이마와 손목에 매고 다녔습니다. 얼마나 크게 만들었는지 얼굴의 반쪽이 경문으로 뒤덮일 정도였습니다. 처음에는 기도할 때만 찼는데 나중에는 잠잘 때도 하나님의 말씀 속에 거한다는 것을 과시하기 위해서 차고 잤다고 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성경을 믿는 신실한 리더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했습니다. 옷술은 겉옷자락 네 곳에 흰실과 푸른 실을 꼬아서 만든 술인데 바리새인들은 그것을 달고 다녔습니다. 이것은 율법을 기억하게 하기 위함입니다(민15:38,39).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이 방탕하지 않고 거룩하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 이 옷술을 크고 길게 만들어 달고 다녔습니다. 그들은 십계명을 기억하기 위해서 하기 보다는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서 여봐란 듯이 하고 다녔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랍비”라 불려지고 사람들의 인사 받는 것을 요구함으로서 자기 영광을 구했습니다. 그들은 “목자”라 불려지기 보다 “가장 영예로운 선생님”이라는 말을 듣기 원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고 하십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죄사함의 은혜가 필요한 어쩔 수 없는 죄인이라는 점에서 평등합니다. 참된 선생은 오직 한 분, 예수 그리스도뿐이시오 그의 제자들은 다 예수님을 배우는 자들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배우고 본받아야할 참된 인생의 스승이십니다. 엡4:13절은 말씀합니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데까지 이르리니” 우리는 아직 온전한 사람이 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소망이 있는 것은 비록 우리가 매우 더딜지라도 성장해 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의 하나님을 향한 간곡한 기도와 눈물, 예수님의 불타는 목자의 심정, 묵묵히 자기를 죽이고 십자가를 감당하는 삶을 배울 때 예수님을 내 인생의 스승으로 모시고 배울 때 우리는 거룩한 성도로 성장하게 됩니다.

  9,10절을 보십시오. “땅에 있는 자를 아비라 하지 말라 너희 아버지는 하나이시니 곧 하늘에 계신 자시니라 또한 지도자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지도자는 하나이니 곧 그리스도니라.” 우리에게 육신의 아버지가 있고 영적으로 나를 인도해 주는 목자님이 있습니다. 또한 모임의 책임자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교회의 질서와 유지를 위한 직분의 차이를 가리키는 것이지 신분이나 계급을 구분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에게 계급이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 위에 높은 분이 계시다면 그 분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한 분뿐이십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6:9)” 또한 우리의 참된 지도자는 한 분 뿐이시니 곧 그리스도 예수님이십니다. 11,12절을 보십시오. “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예수님은 제자들이 하나님 안에서 서로 섬겨야 한다고 하십니다. 그들이 사람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서 높임을 받기 위해서는 자기를 낮추어야한다고 하십니다. 선택된 사람들로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진정으로 위대한 자가 되고자 하는 소원이 있습니다. 그렇게 하려면 날마다 자신을 더 희생하고 헌신하여 양들을 위해 섬기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II. 화 있을찐저(13-39)

  본문에는 일곱가지 화가 나와 있습니다. 우리는 이를 통해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배울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에게 왜 화가 있습니까?

첫째, 그들은 천국 문을 닫았습니다. 13절을 보십시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말씀을 가르치는 성경선생들로서 백성들을 천국으로 인도해야 할 책임이 있는 자들이었습니다. 성경의 핵심은 그리스도이십니다(요5:39). 그리스도는 우리 인생들을 하나님 나라로 인도하시는 유일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되십니다(요14:6). 그러므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마땅히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백성들에게 그리스도를 증거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의 메시야됨을 거절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백성들이 예수님을 믿지 못하도록 온갖 불신과 독이 있는 말을 심었습니다. 한번은 예수님께서 귀신들려 눈멀고 벙어리 된 자를 성령을 힘입어 쫓아내셨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예수님이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었다고 말함으로써 사람들의 마음에 예수님께 대한 불신을 심어 성령의 역사를 훼방했습니다(마12:22-24).

둘째, 그들은 사람을 배나 더 지옥 자식으로 만들었습니다. 15절을 보십시오. 그들은 이교도들을 유대교로 개종시키기 위해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며 피싱을 했습니다. 그들의 선교 열정은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열심은 한 영혼을 구원하고자 하는 진실된 하나님의 사랑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세력을 늘리고자 하는 분파주의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대개 이단들은 극성스러울 정도로 그 열심이 대단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열심은 결국 사람들을 적극적으로 찾아서 지옥으로 보내기 위한 것입니다.

셋째, 그들은 전도된 가치관을 가르침으로 백성들을 그릇된 길로 인도했습니다. 16절과 18절을 보십시오. 그들은 성전이나 제단으로 맹세하면 아무 효력이 없고 성전에 바쳐진 금이나 제단에 바쳐진 예물로 맹세해야 효력이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들은 성전이나 제단보다 성전에 바쳐진 금이나 제단에 바쳐진 예물을 더 중히 여겼습니다. 그러나 금을 거룩하게 하는 성전과 예물을 거룩하게 하는 제단이 더 크고 중요한 것이지, 성전에 바쳐진 금이나 예물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이는 그들의 가치관이 전도되어 하나님보다도 물질을 더 사랑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들은 우맹이요 소경된 인도자로서 양들을 그릇된 길로 인도했습니다.

넷째, 그들은 율법의 정신을 버렸습니다. 23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모든 것이 다 하나님께로서 왔다는 것을 깨닫고 감사하도록 하기 위해서 무엇이든지 소득의 십분의 일을 바치도록 명하셨습니다. 박하와 회향과 근채는 약재에도 쓰이나 대개 음식의 양념으로 쓰기 위해 집안에서 몇포기씩 심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이러한 식물들의 줄기나 그 잎사귀까지 십분의 일을 드렸습니다. 그들이 십일조를 드릴 때는 모든 사람이 보라는 듯이 야단법석을 떨며 바쳤습니다. 그러나 율법의 가장 핵심인 율법의 정신은 버렸습니다. 곧 공의와 사랑과 믿음은 저버렸습니다. 그들은 마치 가장 작은 벌레로 포도주에 섞여 있는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성지에서 가장 큰 동물로서 부정한 동물인 약대는 삼키는 자와 같이 작은 계명들은 까다롭게 굴면서 큰 죄는 예사로 범했습니다. 예수님은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조금 잘하면 자기 의에 빠지고 교만하여 다른 사람을 판단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보이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의 생활에서 의로움과 하나님의 사랑과 믿음이 열매로 나타나도록 투쟁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의와 사랑과 믿음을 소유한 사람이 될 때 하나님께 인정받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다섯째, 그들의 내면은 탐욕과 방탕이 가득했습니다. 25절을 보십시오. 그들은 잔과 대접의 겉은 수세미로 문지르고 퐁퐁으로 열심히 씻었습니다. 그들은 매일 머리를 감고 옷에는 향수를 뿌렸습니다. 겉은 이렇게 청결했지만 그 안은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했습니다. 탐욕은 물질에 대한 욕심을 말하고 방탕은 도덕적인 죄를 말합니다. 그들은 겉은 경건한 모양을 하고 말도 거룩하고 경건하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내면은 물질과 권세와 명예에 대한 욕심과 음란하고 추한 생각으로 가득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소경된 바리새인아 너는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 그리하면 겉도 깨끗하리라(26)” 마가복음 7:21-23절을 보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무엇인가 열거되어 나옵니다.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적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흘기는 눈과 훼방과 교만과 광패니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우리 인간의 본성은 타락하여 마음이 원하는 대로 놔두게 되면 자연스럽게 음란한 생각, 욕심, 시기심, 교만 등 온갖 죄악된 생각에 시달리게 됩니다. 그래서 예레미야 선지자는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사람의 마음이라고 하였습니다(렘17:9).

  우리가 어떻게 부패한 내면을 깨끗케 할 수 있습니까? 매일 열심히 샤워를 하면 깨끗케 됩니까? 선행을 열심히 하면 깨끗케 됩니까? 산속에 들어가 모든 것을 잊고 좌선을 하면 깨끗케 됩니까? 우리의 부패한 내면은 우리의 힘과 의지와 비상한 노력으로 깨끗케 할 수 없습니다. 이는 예수님의 십자가 밑에 나아가 마음의 숨은 죄를 고백하고 그리스도의 보배피로 씻음을 받을 때만이 깨끗케 됩니다. 죄는 강한 접착제와 같아서 우리의 내면에 무서운 힘으로 달라 붙습니다. 그것은 아무리 강한 세척제로도 깨끗케 할 수 없습니다. 이를 깨끗케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예수님의 보배피 밖에 없습니다. 요한1서 1:9절은 말씀합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또한 히브리서 9:14절은 말씀합니다.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 예수님의 보배로운 피만이 우리의 더러운 양심을 깨끗케 하실 수 있습니다. 양심이 깨끗할 때 참 평화와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양심이 깨끗해지면 우리의 마음에는 놀라운 힘이 생깁니다. 남을 사랑하고 섬길 수 있는 힘, 절제할 수 있는 힘, 십자가를 질 수 있는 힘, 세상을 이길 수 있는 힘이 생깁니다. 머리도 좋아지고 집중력도 생겨서 공부도 잘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정으로 행복한 인생을 살고 승리의 인생을 살려면 예수님의 보배 피로 우리의 양심이 깨끗이 씻음 받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보혈의 은혜를 찬송합니다.

여섯째, 그들의 내면에 외식과 불법이 가득했습니다. 27,28절을 보십시오. 회칠한 무덤은 겉은 아름답게 보이지만 그 안에는 죽음의 요소로 가득합니다. 이와같이 그들은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지만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했습니다. 우리는 육신의 몸을 입고 있기 때문에 원치 않게 실수하고 범죄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를 문제삼지 않으십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흘리신 보배피는 우리의 과거의 죄, 현재의 죄, 앞으로 지을 미래의 죄까지도 사하여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범죄했을 때 주님 앞에 있는 모습 그대로 나아가서 진실되게 회개하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여 주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문제삼으시는 것은 우리가 죄를 짓고도 그렇지 않은 척 하는 외식입니다. 우리가 외식하게 되면 주님께서 무섭게 진노하십니다. 외식하는 것은 진실되지 못하고 거짓된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진실입니다.

일곱째, 그들은 하나님의 종들을 대적하고 핍박했습니다. 29,30절을 보십시오. 그들은 선지자들의 무덤을 확장하여 단장하고 의인들의 비석을 꾸몄습니다. 그리고 자기들이 조상 때에 있었더면 선지자의 피를 흘리지 않았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실상 선지자들을 죽인 자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대적하고 핍박하다가 결국에는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들을 심하게 책망하셨습니다.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33) 그들은 최초의 순교자인 아벨의 피로 부터 구약 성경에서 최후의 순교자인 사갸랴의 피까지 담당하게될 것입니다(35,36). 그렇습니다. 우리에게도 믿음의 선배나 주위 사람들의 허물과 죄를 보고 비웃으며 나는 그렇지 않다고 자만심에 빠지기 쉽습니다. 다른 사람의 죄가 드러났을 때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내 속에도 그와 같은 죄가 있음을 인정하고 회개의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동일한 죄에 빠질 수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일곱가지 화를 선포하신 후 예루살렘을 향하여 탄식하셨습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 하였도다.” 예수님은 암탉이 독수리로부터 새끼들을 보호하기 위해 날개 아래 모음 같이 그 백성을 사랑의 품 안에 모으려 수없이 노력했습니다. 예루살렘은 선택된 백성이요 이스라엘 백성을 말합니다. 출4:22절에 보면 “여호와의 말씀에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무척 사랑하시고 엄청나게 축복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축복을 감당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바벨론에 포로로 보내사 훈련하셨습니다.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거룩한 도성입니다. 하나님은 예루살렘을 전 세계를 위한 바이블 센타요 거룩한 도성으로 세우고자 소망하셨습니다. 이사야는 이에 대해 예언했습니다. 이사야 2:1-3절은 말씀합니다.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가 받은 바 유다와 예루살렘에 관한 말씀이라 말일에 여호와의 전의 산이 모든 산꼭대기에 굳게 설 것이요 모든 작은 산 위에 뛰어나리니 만방이 그리로 모여들 것이라 많은 백성이 가며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오르며 야곱의 하나님의 전에 이르자 그가 그 도로 우리에게 가르치실 것이라 우리가 그 길로 행하리라 하리니 이는 율법이 시온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임이니라.” 우리가 이 말씀을 깊이 묵상할 때 모든 나라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상한 심정을 배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성경 선생이요 목자요 선교사들로 세워서 전세계에 파송하시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그의 선택된 백성들은 하나님의 거룩한 사명을 버렸습니다. 그들은 예루살렘을 전세계를 위한 바이블 센타로 만든 것이 아니라 강도의 굴혈로 만들었습니다(21:13). 그들은 예루살렘을 사단의 요새로 만들어 선지자들을 핍박하고 죽였습니다. 그 결과 예루살렘은 무서운 심판을 받고 황폐하여 버린바 되었습니다(38,39).
 
  예수님은 우리의 진실된 회개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있는 모습 그대로 주님 앞에 나아가 진실되게 죄를 회개함으로 십자가의 보혈로 죄 씻음을 받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리하여 순수하고 진실된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 이 시대에 영향력있는 영적 지도자로 성장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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