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마29b(22:23-46)/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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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마태복음 제 29b 강 511
말씀 : 마태복음 22:23-46
요절 : 마태복음 22:37,38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되는 게명이요.”
우리는 누구나 사랑한다는 말을 듣고 싶어 합니다. 사랑한다는 말은 아무리 많이 해 주어도 싫증을 내지 않습니다. 사랑을 받지 못하는 사람이나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이나 둘 다 병들고 비참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이고 사랑이 핵심이라는 것을 잘 압니다. 그리고 사랑에 대한 메시지는 수없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사랑하라는 말씀에는 자신이 없습니다. 언뜻 보면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말은 막연해 보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어떻게 사랑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일까요? 사랑은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십자가에서 자신의 독생자를 주는 것으로 보여졌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도 매우 구체적이어야 합니다. 이 시간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가운데 하나님을 사랑하는 데서 좀 더 자라고 또 사랑하고자 힘을 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I. 산 자의 하나님(23-33)
이스라엘에는 세 종파가 있었습니다. 바리새파, 사두개파, 엣세네파였습니다. 오늘 먼저 등장하는 파는 사두개파입니다. 그들은 머리가 넷인 괴물같이, 생각하는 것이 매우 엽기적이었습니다. 그들은 부활도 없고 천사도 없고 영도 없다 했습니다(행 23:8). 반면에 바리새인들은 다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세금을 내느냐 마느냐는 시험 문제로 예수님을 공격했다가 참패를 당하고 난 그날 부활이 없다고 하는 사두개인들이 예수님께 와서 물었습니다. “선생님이여 모세가 일렀으되 사람이 만일 자식이 없이 죽으면 그 동생이 그 아내에게 장가 들어 형을 위하여 후사를 세울지니라 하였나이다 우리 중에 칠 형제가 있었는데 맏이 장가들었다가 죽어 후사가 없으므로 그의 아내를 그 동생에게 끼쳐두고 그 둘째와 셋째로 일곱째까지 그렇게 하다가 최후에 그 여자도 죽었나이다 그런즉 저희가 다 그를 취하였으니 부활 때에 일곱 중에 뉘 아내가 되리이까?(24-28).” 그들의 질문은 추리 소설에나 나올 정도로 해괴하였습니다. 이 여자는 결혼을 했는데 남편이 자식이 없이 죽었습니다. 그래서 모세의 법대로 동생과 결혼을 하였지만 그도 죽었습니다. 이 여자가 결혼하는 남자마다 다 죽었습니다. 죽음을 불러오는 이 여인으로 인해 건장한 일곱 형제가 다 죽었습니다. 그들의 질문에 나타난 여인은 얼마나 운명적이 되었겠습니까? 이런 생각을 하는 그들은 또 얼마나 운명주의의 노예가 되어 있습니까? 죽음의 그림자에 붙잡혀서 살고 있는 사두개인의 생각은 매우 운명적이었습니다. 그들의 내면은 매우 어두웠습니다. 그들에게는 소망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것에 소망을 두었습니다. 그들은 세속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죽음의 권세에 사로잡혀 있는 그들은 절망을 극복하기 위해서 발광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부활이 없다는 것을 이런 식으로 설명을 했습니다. 그들은 종교 지도자들이었지만 실제로는 무신론자들과 같았습니다. 그들은 신앙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거듭나지 않고 세속적인 가치관으로 인해서 악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들의 문제가 무엇이라고 하십니까? 29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도다.” 예수님은 그들의 두 가지 문제를 지적하였습니다.
첫째, 그들의 마음 속에 하나님의 말씀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성경 선생이었지만 성경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모세 오경(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외에는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모세 오경에 부활이라는 말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성경을 마음으로 공부하지 않았습니다. 신앙 생활을 오래 하였지만 성경을 읽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책꽂이에 꽂혀 있는 성경책은 먼지가 쌓여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그들이 예배에 빠진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성전을 관리하고 예배를 섬겼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에 말씀이 없었습니다. 말씀이 없자 그들은 수많은 오해 가운데 살았습니다. 무지한 그들을 통해서 가르침을 받는 백성들은 수없이 구렁텅이에 빠질 뿐이었습니다. 사두개인들은 신앙 생활에 기쁨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종교지도자들이었지만 그 마음에 하나님이 없었습니다.
둘째, 그들은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없고 말씀을 믿지도 않을 때 그들이 하나님을 알 길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그들은 하나님의 능력도 체험하지 못했습니다. 모세 오경에 나오는 하나님이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신 것, 모세가 반석에서 샘물을 낸 것, 광야에서 40년 동안 만나와 메추라기로 먹인 것, 아론의 지팡이에서 싹이 난 것 등등 그 조상들이 체험했던 하나님의 능력은 그들에게는 옛날 얘기일 뿐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알지 못하는 그들에게 신앙 생활은 공허한 것이었습니다. 오해했다는 말은 헬라어로는 플라나스데(Plana'sqe)로서 방황하다, 헤메다는 뜻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과 그 능력을 알지 못할 때 방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말씀이 있는 사람은 닻을 가진 배와 같아서 떠내려가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진 사람은 분명한 비전과 방향을 가지고 영적인 투쟁을 할 수 있습니다. 말씀이 있을 때 우리 마음에 불이 붙습니다. 말씀으로 심령이 불타는 사람은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고 기적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성경 선생으로서 그들에게 성경의 진리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30).” 결혼을 하는 이유는 가장 기본적으로 종족 보존을 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부활하면 죽음이 없기 때문에 결혼할 이유가 없어집니다. 부활하게 되면 우리의 몸은 신령하고, 강하고, 영광스럽고, 썩지 아니합니다(고전15:42-44).
“죽은 자의 부활을 의논할진대 하나님이 너희에게 말씀하신 바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것을 읽어 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니라 하시니(31,32)”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하나님이 너희에게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이 말씀은 여호와 하나님은 선민의 하나님, 역사의 하나님을 뜻하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너무나 친숙한 말씀입니다. 모세가 1200년전에 이 말씀을 들었을 때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벌써 죽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현재형을 써서 그들이 살아있는 것처럼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은 이 세상에서 죽었으나 내세에서는 살아 있다는 뜻입니다. 이 세상에는 산 자와 죽은 자 둘 밖에 없습니다. 엡2:1절은 말씀합니다.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이 세상은 허물로 죽은 사람과 은혜로 구원을 받아 산 사람이 있을 뿐입니다. 지금 영원히 살아계신 하나님과 인격적인 교제를 가지는 사람도 역시 살아 있습니다. 죽은 자는 일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알지도 못합니다.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산 자의 하나님이십니다. 산 자는 믿음으로 의롭게 된 자요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자입니다. 산 자는 처음부터 끝까지 믿음으로 사는 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사람들을 통해서 부활의 능력을 나타내십니다.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게 살아계십니다. 우리가 믿는다고 하면서도 실제적인 문제 앞에서 믿음으로 살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으면서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은 마음에 큰 짐이 됩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운명을 섭리로, 절망을 희망으로 바꿉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었을 때 그는 100세가 되어 아들 이삭을 얻었고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이삭은 하나님을 믿을 때 흉년에 100배의 추수를 하였습니다. 야곱은 하나님을 믿을 때 당시 이집트의 바로를 축복하는 기도를 하였고 이스라엘의 조상이 된 열 두 아들을 키울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산 자의 하나님이십니다. 산 자는 계속해서 성장합니다. 한계를 극복하면서 역동적인 신앙 생활을 합니다.
II. 크고 첫째 되는 계명(34-46)
예수님께서 사두개인들로 대답할 수 없게 하셨다 함을 바리새인들이 듣고 모였습니다. 그들은 사두개인들과 경쟁 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이를 통쾌하게 여기고 자신들을 드러낼 기회를 만들고자 하였습니다. 그들이 묘안을 짜서 예수님께 나아왔습니다. 그 중에 한 율법사가 예수님을 시험하였습니다. “선생님이여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당시 율법은 613개였는데 365개의 소극적인 조항과 248개의 적극적인 조항으로 나눌 수 있었습니다. 365는 일년의 날수로, 248은 사람의 몸의 지체 수로 추정합니다. 그들은 일년 365일을 온 몸으로 말씀을 지키고자 한 것 같습니다. 그런 가운데 학자들 사이에서는 어느 것이 상위 계명이고 어느 것이 하위 계명인지 논란이 일고 있었습니다. 학파마다 견해가 달라서 가르치는 사람이나 배우는 사람이나 난항을 겪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고민하는 문제를 시원하게 해결해 주셨습니다.
37-40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예수님은 613개의 율법 조항을 단 두개로 압축하셨습니다. 그것은 새로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다 잘 알고 있는 계명입니다. 그 첫째 계명은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마음(heart)은 일반적인 의미에서 어떤 것의 한 가운데, 가장 깊숙한 곳, 혹은 숨겨진 부분을 의미합니다. 마음은 어떤 동기의 원천이나 근본이며 열정의 요체이고 사고 과정의 중심이며 의식의 원천입니다. 한마디로 마음은 인격의 중심입니다.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은 진심으로 순수하고 뜨겁게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마음을 다른 데 빼앗기고 입술로만 하나님을 사랑하기 쉽습니다. 마음은 세상에 빼앗기고 몸만 왔다갔다 한다면 하나님은 슬퍼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마음을 다하여 사랑하기를 요구하십니다.
아버지가 자식에게 각종 장난감을 사줘도 마음을 들여서 자식을 뜨겁게 한 번 안아주는 것만 못합니다. 하나님은 가인과 그가 드린 예물은 열납하지 않으셨지만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셨습니다. 마음으로 드리는 것은 마음으로 느끼고 알아차립니다.
목숨(soul)은 ‘육신의 생명’으로서 ‘살아 있는 힘’을 의미합니다. 힘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젊음, 정력, 에너지를 뜻합니다. 이 목숨은 생명의 중심체인 ‘피’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습니다. 사람의 육적인 생명은 비물질적인 것과 육체가 연합되어 있는 것입니다. 목숨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은 열심을 다해 정열적으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만일 우리의 젊음을 다른 곳에 소비해 버린다면 하나님을 사랑할 힘이 없게 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힘이 필요합니다. 활화산과 같은 젊음을 하나님을 사랑하는데 쏟아 붓는 사람은 참으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뜻(mind)은 사고의 능력을 말하거나 정신적인 지성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되 지성을 다하여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사랑에는 마음과 생명이 있어야 하지만 가치 판단도 중요합니다. 하루는 한 남학생이 고생하시는 어머니가 불쌍해서 설거지를 해 드렸습니다. 너무너무 좋아하시는 모습을 보고는 매일 신이 나서 매일 설거지를 합니다. 이젠 설거지 외에 방청소, 빨래를 매일 합니다. 학교도 안가고 매일 집에서 살림을 합니다. 어머니가 기뻐하겠습니까? 모든 것은 분별력을 가지고 해야 합니다. 해야 할 때가 있고 하지 말아야할 때가 있고, 해도 어느 정도 해야 하는지 분별해야 합니다.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호6:6).”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를 좇아서 사랑할 때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데 지성이 없다면 자칫 잘못하면 맹목적이 되고 신비적이 되어 이상한 방향으로 흐르기 쉽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되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사랑하라고 명령하십니다. 다하여사랑한다는 말에는 절대성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 다하지 않으면 마음이 나누이게 됩니다. 다하지 않을 때 사단이 미혹하여 자연스럽게 우상숭배자로 만들어 버립니다. 또한 다하라는 것은 세상 어떤 것보다도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하여 사랑할 대상은 하나님 한 분 뿐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이렇게 전폭적인 사랑을 요구하는 것입니까? 우리를 얽어매려고 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이는 전적으로 우리의 행복을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되 사랑하는 독생자를 우리 죄를 위한 화목제물로 내어주시기까지 전폭적으로 사랑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되었습니다(롬5:5). 하나님은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그 순간부터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 마음에 부어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렇게 사랑하시는데 우리가 하나님을 전폭적으로 사랑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이 얼마나 슬프시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마음을 다하여 사랑하시는데 우리가 전폭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사랑의 관계성이 맺어지지 않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전인격적으로, 전폭적으로 사랑하게 되면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성이 맺어지게 됩니다. 이때 우리의 마음에 사랑의 샘이 터지고 사랑하기 힘든 사람도 사랑 할 수 있게 됩니다. 또한 하나님의 사랑을 알지 못해 울고 있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나눠 줄 수 있게 됩니다. 그때 우리는 진정한 만족과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행복의 원천입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게 되면 세상을 사랑하게 되고, 세상을 사랑하게 되면 그때부터 불행이 시작됩니다.
우리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어떻게 사랑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또 예수님은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내 어린 양을 먹이라고 하셨습니다. 사랑은 감정적이기 보다는 의지적인 것입니다. 사랑은 보여 주고 표현해야 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은 아무에게서도 사랑을 받지 못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 누구도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일 것입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사랑한다면 난 행복하지 않아도 살 수 있다는 명언을 남겼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다면 누구나 진정으로 행복할 수 있습니다.
둘째 계명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입니다. 39절을 보십시오.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예수님은 “둘째는 그와 같으니”라고 말씀하심으로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동일하게 취급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이 둘은 분리된 것이 아니라 하나의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사랑에서 이웃 사랑이 나오고, 이웃 사랑은 하나님 사랑의 표현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웃에 대한 사랑은 자기 몸을 사랑하는 것보다 덜도 아니요 그 이상도 아닙니다. 이는 내가 내 몸을 사랑하는 것같이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자기 사랑과 이기주의는 다른 것입니다.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을 존중히 여기고 사랑하게 됩니다. 이기주의는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면서 자기의 만족을 채우고자 하는 것입니다. 진정한 자기애가 있어야 다른 사람도 용서하고 사랑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아를 발견할 때 건강한 자아를 형성하게 됩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아를 형성하지 못하는 사람은 경쟁의식과 비교의식에 빠지게 됩니다. 그 결과 경쟁심과 시기심으로 다른 사람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자아를 발견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은 사람은 다른 사람을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습니다. 사랑을 많이 받은 사람이 많이 사랑을 합니다. 예수님은 “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마7:12)” 고 했습니다. 우리는 자기 몸을 사랑합니다. 몸이 좋지 않으면 쉬고 병이 나면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습니다. 자기 몸에 좋다고 생각하는 것은 할 수만 있으면 다 하려고 합니다. 사람이 자기 몸을 사랑하는 것은 본능적입니다. 이렇게 자기 몸을 사랑하는 만큼 이웃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웃을 사랑하려면 극복해야할 요소가 있습니다. 그것은 무관심과 미움입니다. 이웃사촌이란 말은 이제 옛말이 되었습니다. 이웃이 차를 긁어 놓고 이웃이 도둑질을 합니다. 이웃에 대한 편견과 무심함의 벽이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의 이웃은 누구일까요? 이웃은 이웃입니다. 우리의 이웃은 하나님의 사랑이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이번에 수해를 당한 동족들도 이웃입니다. 이들을 위해서 우리가 수재헌금을 하고자 합니다. 서울 생활은 삭막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먼저 이웃들에게 사랑을 표현함으로 이런 삭막한 사회를 변화시켜 나아야겠습니다. 또 우리가 캠퍼스 양들을 사랑하려면 그들에게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가 센타에 나오는 양들의 이름을 알고 이들과 대화를 나누고 사랑의 교제를 힘써 나누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성마태팀을 잘 이루려면 이 모임에 대한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되도록이면 이 모임에 참석하여 이들을 격려하고 섬기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입니다. 이 두 계명은 성경의 요약이요 핵심입니다. 성경은 사랑이라는 말에 다 연결되어 있습니다. 신앙 생활이란 법조문을 지키듯이 기계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41-45절에서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그릇된 메시야 관을 바로잡아 주심으로 그리스도에 대해 바른 자세를 갖도록 하셨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가 다윗의 자손이란 것만 가르치므로 그리스도의 인성만 강조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성령에 감동되어 수 백년 후에 오실 그리스도를 ‘내 주(my Lord)’라고 고백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신성을 증거했습니다. 이를 통해 예수님이 본래 영원 속에 살아 계신 하나님이심을 나타냈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최대 원수인 죽음을 정복하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셔서 세상을 통치하시다가 세상 끝날에 심판주로 오실 것입니다. 그날부터 모두 예수님의 영적 권세에 압도되어 아무도 감히 묻는 자가 없었습니다(46).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전 인격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함으로써 생명력과 행복이 넘치는 복된 인생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말씀 : 마태복음 22:23-46
요절 : 마태복음 22:37,38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되는 게명이요.”
우리는 누구나 사랑한다는 말을 듣고 싶어 합니다. 사랑한다는 말은 아무리 많이 해 주어도 싫증을 내지 않습니다. 사랑을 받지 못하는 사람이나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이나 둘 다 병들고 비참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이고 사랑이 핵심이라는 것을 잘 압니다. 그리고 사랑에 대한 메시지는 수없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사랑하라는 말씀에는 자신이 없습니다. 언뜻 보면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말은 막연해 보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어떻게 사랑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일까요? 사랑은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십자가에서 자신의 독생자를 주는 것으로 보여졌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도 매우 구체적이어야 합니다. 이 시간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가운데 하나님을 사랑하는 데서 좀 더 자라고 또 사랑하고자 힘을 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I. 산 자의 하나님(23-33)
이스라엘에는 세 종파가 있었습니다. 바리새파, 사두개파, 엣세네파였습니다. 오늘 먼저 등장하는 파는 사두개파입니다. 그들은 머리가 넷인 괴물같이, 생각하는 것이 매우 엽기적이었습니다. 그들은 부활도 없고 천사도 없고 영도 없다 했습니다(행 23:8). 반면에 바리새인들은 다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세금을 내느냐 마느냐는 시험 문제로 예수님을 공격했다가 참패를 당하고 난 그날 부활이 없다고 하는 사두개인들이 예수님께 와서 물었습니다. “선생님이여 모세가 일렀으되 사람이 만일 자식이 없이 죽으면 그 동생이 그 아내에게 장가 들어 형을 위하여 후사를 세울지니라 하였나이다 우리 중에 칠 형제가 있었는데 맏이 장가들었다가 죽어 후사가 없으므로 그의 아내를 그 동생에게 끼쳐두고 그 둘째와 셋째로 일곱째까지 그렇게 하다가 최후에 그 여자도 죽었나이다 그런즉 저희가 다 그를 취하였으니 부활 때에 일곱 중에 뉘 아내가 되리이까?(24-28).” 그들의 질문은 추리 소설에나 나올 정도로 해괴하였습니다. 이 여자는 결혼을 했는데 남편이 자식이 없이 죽었습니다. 그래서 모세의 법대로 동생과 결혼을 하였지만 그도 죽었습니다. 이 여자가 결혼하는 남자마다 다 죽었습니다. 죽음을 불러오는 이 여인으로 인해 건장한 일곱 형제가 다 죽었습니다. 그들의 질문에 나타난 여인은 얼마나 운명적이 되었겠습니까? 이런 생각을 하는 그들은 또 얼마나 운명주의의 노예가 되어 있습니까? 죽음의 그림자에 붙잡혀서 살고 있는 사두개인의 생각은 매우 운명적이었습니다. 그들의 내면은 매우 어두웠습니다. 그들에게는 소망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것에 소망을 두었습니다. 그들은 세속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죽음의 권세에 사로잡혀 있는 그들은 절망을 극복하기 위해서 발광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부활이 없다는 것을 이런 식으로 설명을 했습니다. 그들은 종교 지도자들이었지만 실제로는 무신론자들과 같았습니다. 그들은 신앙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거듭나지 않고 세속적인 가치관으로 인해서 악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들의 문제가 무엇이라고 하십니까? 29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도다.” 예수님은 그들의 두 가지 문제를 지적하였습니다.
첫째, 그들의 마음 속에 하나님의 말씀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성경 선생이었지만 성경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모세 오경(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외에는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모세 오경에 부활이라는 말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성경을 마음으로 공부하지 않았습니다. 신앙 생활을 오래 하였지만 성경을 읽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책꽂이에 꽂혀 있는 성경책은 먼지가 쌓여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그들이 예배에 빠진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성전을 관리하고 예배를 섬겼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에 말씀이 없었습니다. 말씀이 없자 그들은 수많은 오해 가운데 살았습니다. 무지한 그들을 통해서 가르침을 받는 백성들은 수없이 구렁텅이에 빠질 뿐이었습니다. 사두개인들은 신앙 생활에 기쁨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종교지도자들이었지만 그 마음에 하나님이 없었습니다.
둘째, 그들은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없고 말씀을 믿지도 않을 때 그들이 하나님을 알 길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그들은 하나님의 능력도 체험하지 못했습니다. 모세 오경에 나오는 하나님이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신 것, 모세가 반석에서 샘물을 낸 것, 광야에서 40년 동안 만나와 메추라기로 먹인 것, 아론의 지팡이에서 싹이 난 것 등등 그 조상들이 체험했던 하나님의 능력은 그들에게는 옛날 얘기일 뿐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알지 못하는 그들에게 신앙 생활은 공허한 것이었습니다. 오해했다는 말은 헬라어로는 플라나스데(Plana'sqe)로서 방황하다, 헤메다는 뜻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과 그 능력을 알지 못할 때 방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말씀이 있는 사람은 닻을 가진 배와 같아서 떠내려가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진 사람은 분명한 비전과 방향을 가지고 영적인 투쟁을 할 수 있습니다. 말씀이 있을 때 우리 마음에 불이 붙습니다. 말씀으로 심령이 불타는 사람은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고 기적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성경 선생으로서 그들에게 성경의 진리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30).” 결혼을 하는 이유는 가장 기본적으로 종족 보존을 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부활하면 죽음이 없기 때문에 결혼할 이유가 없어집니다. 부활하게 되면 우리의 몸은 신령하고, 강하고, 영광스럽고, 썩지 아니합니다(고전15:42-44).
“죽은 자의 부활을 의논할진대 하나님이 너희에게 말씀하신 바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것을 읽어 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니라 하시니(31,32)”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하나님이 너희에게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이 말씀은 여호와 하나님은 선민의 하나님, 역사의 하나님을 뜻하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너무나 친숙한 말씀입니다. 모세가 1200년전에 이 말씀을 들었을 때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벌써 죽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현재형을 써서 그들이 살아있는 것처럼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은 이 세상에서 죽었으나 내세에서는 살아 있다는 뜻입니다. 이 세상에는 산 자와 죽은 자 둘 밖에 없습니다. 엡2:1절은 말씀합니다.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이 세상은 허물로 죽은 사람과 은혜로 구원을 받아 산 사람이 있을 뿐입니다. 지금 영원히 살아계신 하나님과 인격적인 교제를 가지는 사람도 역시 살아 있습니다. 죽은 자는 일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알지도 못합니다.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산 자의 하나님이십니다. 산 자는 믿음으로 의롭게 된 자요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자입니다. 산 자는 처음부터 끝까지 믿음으로 사는 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사람들을 통해서 부활의 능력을 나타내십니다.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게 살아계십니다. 우리가 믿는다고 하면서도 실제적인 문제 앞에서 믿음으로 살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으면서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은 마음에 큰 짐이 됩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운명을 섭리로, 절망을 희망으로 바꿉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었을 때 그는 100세가 되어 아들 이삭을 얻었고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이삭은 하나님을 믿을 때 흉년에 100배의 추수를 하였습니다. 야곱은 하나님을 믿을 때 당시 이집트의 바로를 축복하는 기도를 하였고 이스라엘의 조상이 된 열 두 아들을 키울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산 자의 하나님이십니다. 산 자는 계속해서 성장합니다. 한계를 극복하면서 역동적인 신앙 생활을 합니다.
II. 크고 첫째 되는 계명(34-46)
예수님께서 사두개인들로 대답할 수 없게 하셨다 함을 바리새인들이 듣고 모였습니다. 그들은 사두개인들과 경쟁 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이를 통쾌하게 여기고 자신들을 드러낼 기회를 만들고자 하였습니다. 그들이 묘안을 짜서 예수님께 나아왔습니다. 그 중에 한 율법사가 예수님을 시험하였습니다. “선생님이여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당시 율법은 613개였는데 365개의 소극적인 조항과 248개의 적극적인 조항으로 나눌 수 있었습니다. 365는 일년의 날수로, 248은 사람의 몸의 지체 수로 추정합니다. 그들은 일년 365일을 온 몸으로 말씀을 지키고자 한 것 같습니다. 그런 가운데 학자들 사이에서는 어느 것이 상위 계명이고 어느 것이 하위 계명인지 논란이 일고 있었습니다. 학파마다 견해가 달라서 가르치는 사람이나 배우는 사람이나 난항을 겪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고민하는 문제를 시원하게 해결해 주셨습니다.
37-40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예수님은 613개의 율법 조항을 단 두개로 압축하셨습니다. 그것은 새로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다 잘 알고 있는 계명입니다. 그 첫째 계명은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마음(heart)은 일반적인 의미에서 어떤 것의 한 가운데, 가장 깊숙한 곳, 혹은 숨겨진 부분을 의미합니다. 마음은 어떤 동기의 원천이나 근본이며 열정의 요체이고 사고 과정의 중심이며 의식의 원천입니다. 한마디로 마음은 인격의 중심입니다.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은 진심으로 순수하고 뜨겁게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마음을 다른 데 빼앗기고 입술로만 하나님을 사랑하기 쉽습니다. 마음은 세상에 빼앗기고 몸만 왔다갔다 한다면 하나님은 슬퍼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마음을 다하여 사랑하기를 요구하십니다.
아버지가 자식에게 각종 장난감을 사줘도 마음을 들여서 자식을 뜨겁게 한 번 안아주는 것만 못합니다. 하나님은 가인과 그가 드린 예물은 열납하지 않으셨지만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셨습니다. 마음으로 드리는 것은 마음으로 느끼고 알아차립니다.
목숨(soul)은 ‘육신의 생명’으로서 ‘살아 있는 힘’을 의미합니다. 힘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젊음, 정력, 에너지를 뜻합니다. 이 목숨은 생명의 중심체인 ‘피’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습니다. 사람의 육적인 생명은 비물질적인 것과 육체가 연합되어 있는 것입니다. 목숨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은 열심을 다해 정열적으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만일 우리의 젊음을 다른 곳에 소비해 버린다면 하나님을 사랑할 힘이 없게 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힘이 필요합니다. 활화산과 같은 젊음을 하나님을 사랑하는데 쏟아 붓는 사람은 참으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뜻(mind)은 사고의 능력을 말하거나 정신적인 지성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되 지성을 다하여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사랑에는 마음과 생명이 있어야 하지만 가치 판단도 중요합니다. 하루는 한 남학생이 고생하시는 어머니가 불쌍해서 설거지를 해 드렸습니다. 너무너무 좋아하시는 모습을 보고는 매일 신이 나서 매일 설거지를 합니다. 이젠 설거지 외에 방청소, 빨래를 매일 합니다. 학교도 안가고 매일 집에서 살림을 합니다. 어머니가 기뻐하겠습니까? 모든 것은 분별력을 가지고 해야 합니다. 해야 할 때가 있고 하지 말아야할 때가 있고, 해도 어느 정도 해야 하는지 분별해야 합니다.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호6:6).”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를 좇아서 사랑할 때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데 지성이 없다면 자칫 잘못하면 맹목적이 되고 신비적이 되어 이상한 방향으로 흐르기 쉽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되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사랑하라고 명령하십니다. 다하여사랑한다는 말에는 절대성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 다하지 않으면 마음이 나누이게 됩니다. 다하지 않을 때 사단이 미혹하여 자연스럽게 우상숭배자로 만들어 버립니다. 또한 다하라는 것은 세상 어떤 것보다도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하여 사랑할 대상은 하나님 한 분 뿐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이렇게 전폭적인 사랑을 요구하는 것입니까? 우리를 얽어매려고 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이는 전적으로 우리의 행복을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되 사랑하는 독생자를 우리 죄를 위한 화목제물로 내어주시기까지 전폭적으로 사랑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되었습니다(롬5:5). 하나님은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그 순간부터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 마음에 부어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렇게 사랑하시는데 우리가 하나님을 전폭적으로 사랑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이 얼마나 슬프시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마음을 다하여 사랑하시는데 우리가 전폭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사랑의 관계성이 맺어지지 않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전인격적으로, 전폭적으로 사랑하게 되면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성이 맺어지게 됩니다. 이때 우리의 마음에 사랑의 샘이 터지고 사랑하기 힘든 사람도 사랑 할 수 있게 됩니다. 또한 하나님의 사랑을 알지 못해 울고 있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나눠 줄 수 있게 됩니다. 그때 우리는 진정한 만족과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행복의 원천입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게 되면 세상을 사랑하게 되고, 세상을 사랑하게 되면 그때부터 불행이 시작됩니다.
우리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어떻게 사랑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또 예수님은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내 어린 양을 먹이라고 하셨습니다. 사랑은 감정적이기 보다는 의지적인 것입니다. 사랑은 보여 주고 표현해야 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은 아무에게서도 사랑을 받지 못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 누구도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일 것입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사랑한다면 난 행복하지 않아도 살 수 있다는 명언을 남겼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다면 누구나 진정으로 행복할 수 있습니다.
둘째 계명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입니다. 39절을 보십시오.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예수님은 “둘째는 그와 같으니”라고 말씀하심으로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동일하게 취급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이 둘은 분리된 것이 아니라 하나의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사랑에서 이웃 사랑이 나오고, 이웃 사랑은 하나님 사랑의 표현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웃에 대한 사랑은 자기 몸을 사랑하는 것보다 덜도 아니요 그 이상도 아닙니다. 이는 내가 내 몸을 사랑하는 것같이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자기 사랑과 이기주의는 다른 것입니다.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을 존중히 여기고 사랑하게 됩니다. 이기주의는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면서 자기의 만족을 채우고자 하는 것입니다. 진정한 자기애가 있어야 다른 사람도 용서하고 사랑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아를 발견할 때 건강한 자아를 형성하게 됩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아를 형성하지 못하는 사람은 경쟁의식과 비교의식에 빠지게 됩니다. 그 결과 경쟁심과 시기심으로 다른 사람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자아를 발견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은 사람은 다른 사람을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습니다. 사랑을 많이 받은 사람이 많이 사랑을 합니다. 예수님은 “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마7:12)” 고 했습니다. 우리는 자기 몸을 사랑합니다. 몸이 좋지 않으면 쉬고 병이 나면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습니다. 자기 몸에 좋다고 생각하는 것은 할 수만 있으면 다 하려고 합니다. 사람이 자기 몸을 사랑하는 것은 본능적입니다. 이렇게 자기 몸을 사랑하는 만큼 이웃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웃을 사랑하려면 극복해야할 요소가 있습니다. 그것은 무관심과 미움입니다. 이웃사촌이란 말은 이제 옛말이 되었습니다. 이웃이 차를 긁어 놓고 이웃이 도둑질을 합니다. 이웃에 대한 편견과 무심함의 벽이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의 이웃은 누구일까요? 이웃은 이웃입니다. 우리의 이웃은 하나님의 사랑이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이번에 수해를 당한 동족들도 이웃입니다. 이들을 위해서 우리가 수재헌금을 하고자 합니다. 서울 생활은 삭막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먼저 이웃들에게 사랑을 표현함으로 이런 삭막한 사회를 변화시켜 나아야겠습니다. 또 우리가 캠퍼스 양들을 사랑하려면 그들에게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가 센타에 나오는 양들의 이름을 알고 이들과 대화를 나누고 사랑의 교제를 힘써 나누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성마태팀을 잘 이루려면 이 모임에 대한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되도록이면 이 모임에 참석하여 이들을 격려하고 섬기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입니다. 이 두 계명은 성경의 요약이요 핵심입니다. 성경은 사랑이라는 말에 다 연결되어 있습니다. 신앙 생활이란 법조문을 지키듯이 기계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41-45절에서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그릇된 메시야 관을 바로잡아 주심으로 그리스도에 대해 바른 자세를 갖도록 하셨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가 다윗의 자손이란 것만 가르치므로 그리스도의 인성만 강조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성령에 감동되어 수 백년 후에 오실 그리스도를 ‘내 주(my Lord)’라고 고백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신성을 증거했습니다. 이를 통해 예수님이 본래 영원 속에 살아 계신 하나님이심을 나타냈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최대 원수인 죽음을 정복하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셔서 세상을 통치하시다가 세상 끝날에 심판주로 오실 것입니다. 그날부터 모두 예수님의 영적 권세에 압도되어 아무도 감히 묻는 자가 없었습니다(46).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전 인격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함으로써 생명력과 행복이 넘치는 복된 인생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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