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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마29a강(22:1-22)/황태자의 혼인잔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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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엘리야
댓글 0건 조회 3,373회 작성일 03-09-21 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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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마태복음 제 29a 강                                                           
말씀 / 마태복음 22:1-22
요절 / 마태복음 22:2

황태자의 혼인 잔치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으니”

  오늘은 천국의 성격을 가장 잘 나타내주는 혼인 잔치 비유의 말씀입니다. 천국은 기쁨이 충만한 혼인 잔치와 같습니다. 이 비유는 하나님께서 모든 자녀들이 천국으로 돌아와서  하늘의 연회를 즐기며 행복한 삶을 살기를 얼마나 원하시는가 보여주고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의 백성들을 황태자의 혼인 잔치에 초청하시는가 말해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양들을 천국 잔치에 초대하기를 기도합니다. 그리고 후반부에서 시민으로서의 자세에 대해서도 생각해 봅시다.

    I. 사거리에 가서 만나는 대로 청하여 오라(1-14)

첫째, 하나님의 초청(1,2). 1,2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다시 비유로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으니”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에게 두 아들의 비유와 포도원 농부의 비유를 말씀하셨으나 그들은 회개하지 않기로 작정한 사람들 같았습니다. 그래서 다시 황태자의 혼인 잔치 비유를 하셨습니다. 이 비유에서 왕은 하나님을 가리키고 아들은 그리스도, 처음에 청첩장을 받은 사람들은 바리새인들을 가리킵니다. 악한 자나 선한 자를 모으는 것은 교회의 선교 활동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역사상 임금님에게 그의 아들을 결혼시키는 것처럼 중요하고도 경사스러운 일은 없습니다.  임금은 황태자를 훌륭한 리더로 키우기 위해서 많은 교육과 훈련을 했습니다. 세계적으로 훌륭한 교수들을 초청하여 정치, 경제, 군사, 법률, 외교, 철학, 문학 등의 교육을 시키고 사절들을 접견하는 법, 사열하는 법, 태권도 등 통치자로서 필요한 훈련들을 시켰습니다. 임금은 황태자를 위해서 전국 각지에서 처녀들을 추천하여 황태자비를 간택하였습니다. 매우 아름답고 내면성이 훌륭하고 무엇보다 믿음이 좋은 기도하는 여인을 택하였습니다. 이제 혼인 날짜를 정하고 결혼 준비를 시켰습니다. 음식뿐만 아니라 환상적인 무대와 함께 세계적인 필하모니 오케스트라와 파파로티 등 삼대 성악가와 아름다운 축시를 낭송할 수 있도록 준비시키고 축포와 축하 공연 등을 준비하였습니다. 그리고 결혼식날은 휴일로 정하고 일주일간 결혼 잔치를 하고자 했습니다. 하나님은 백성들과 함께 왕국의 연회에서 기쁨을 나누기 원하십니다. 혼인 잔치에는 기쁨과 희락과 평강과 풍성함이 있습니다. 결혼식은 언제나 즐겁고 기쁩니다. 결혼을 하는 당사자들은 말할 것도 없고 결혼을 하지 않은 사람들은 자기도 행복한 결혼을 소망하면서 즐거워하고 이미 결혼한 사람들은 나에게도 저런 때가 있었지 회상을 하면서 즐거워합니다. 천국은 혼인 잔치와 같습니다. 천국이 복된 것은 평화와 공평과 사랑의 왕되신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진정한 행복은 하나님 아버지와 함께 할 때 옵니다.

그런데 왕되신 하나님은 왜 사람들을 천국잔치에 초대하기를 그렇게 간절히 원하실까요?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죄와 생존 경쟁 속에서 고생하는 우리의 처지를 잘 아시기 때문입니다. 부자는 부자대로, 가난한 자는 가난한 자대로 천국이 필요합니다. 죄와 죽음의 권세를 잡고 있는 사단은 연약한 사람들을 고통스럽게 하기 위해서 계속적으로 공격을 해 댑니다. 사단은 불화살을 끊임없이 날려서 상처를 주고 무기력하게 하고자 합니다. 사단은 헤비급 권투 선수가 핀급 권투선수에게 12라운드 동안 계속적으로 잽을 넣는 것처럼 고통을 줍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운명주의의 노예가 되어 패배적인 삶을 살아갑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사고를 당하고 환란을 당할 때 하나님의 부르시는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합니다. 사람들은 광야 같은 이 세상에서 생수의 근원되신 하나님을 버리고 영혼의 갈증을 느끼면서 살아갑니다.

이사야는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간절히 초대하는 심정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사55:1).” 하나님께서는 우리 영혼의 갈증을 풀어주기 위해서 초청하십니다. 목마른 자들은 죄와 죽음의 권세 아래서 지쳐있고 신음하며, 괴롭힘을 받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또한 목마른 사람들은 죄의 독소로 상처받고 찢긴 영혼들입니다. 하나님은 천국의 참 안식을 주기 위해서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마태복음 11:28절에서 예수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하리라.”고 초청하십니다. 하나님은 의와 사랑에 굶주린 자들을 하나님 나라에서 먹고 마시며 교제하도록 초대하십니다. “볼찌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계3:20).”  하나님의 초청은 노총각이 처녀에게 결혼하기 위해서 구애하는 것과 같습니다.

둘째, 초청을 거절한 사람들(3-6). 그러면 초대받은 손님들의 반응이 어떠했습니까? 3절을 보십시오. “그 종들을 보내어 그 청한 사람들을 혼인 잔치에 오라하였더니 오기를 싫어하거늘”  옛날에 왕에게 초청장을 받는 것은 대단히 영광스러운 일이었습니다. 어떤 사람도 왕의 초청을 감히 거절할 수는 없었습니다. 왕의 초청을 거절한다는 것은 왕을 왕으로 대접하지 않겠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임금님의 초청을 거절한데에는 많은 이유가 있었을 것입니다.

  임금님은 초대를 거절한 자들을 어떻게 처벌했습니까? 임금님은 당장 그들을 벌하지 않았습니다. 임금님은 자존심을 꺾고 좀 더 격이 높은 종들을 보내어 그들이 올 수 있도록 설득했습니다. 왕은 겸손하게 종들을 다시 보내서 정중하게 초청했습니다. 4절을 보십시오. “다시 다른 종들을 보내며 가로되 청한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오찬을 준비하되 나의 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것을 갖추었으니 혼인 잔치에 오소서 하라 하였더니” 대개 황태자의 혼인 예식과 같은 중대한 일에서 초청은 6개월 전에 보냅니다. 임금님은 최소한 세 번 이상 그들을 초청했습니다. 다시 다른 종들을 보낸다는 것은 임금님이 얼마나 오래 참으시는 분이신가 보여주고 있습니다. 임금님은 백성들을 초청하고자 최선을 다 했습니다. “모든 것을 갖추었으니 혼인 잔치에 오소서” 하며 초청하였습니다. 이는 혼인 잔치를 위해서 얼마나 풍성하게 음식을 준비했는가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 당시 세계적인 요리사들을 초청하여 음식을 만들었습니다. 전국을 수소문하여 가장 영양가 있고 맛있는 음식들을 진상하였습니다. 팔보채, 궁중 요리, 상어 지느러미, 곰발바닥요리, 테리야끼, 타조요리, 사슴 바비큐 등등 궁중에서 풍성한 가운데서 완벽하게 준비했다고 하니 얼마나 준비를 잘했겠습니까?

  임금님은 이번에는 황태자의 혼인 잔치에 초대받은 사람들이 다 올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기다리다 전망대에 올라가본 임금님의 눈에는 개미새끼 한 마리 보이지 않았습니다. 한참 뒤에 종들만 절룩거리며 들어오고 있었습니다. 종들이 열심히 손님들을 초청했으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관심이 없었습니다. 5절을 보십시오. “저희가 돌아보지도 않고 하나는 자기 밭으로 하나는 자기 상업차로 가고”  이들은 휴식도 잊은 채 죽도록 일만 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생존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1초가 아깝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들은 진리나 내세에 대해서 무관심하고 자기 밭과 사업을 가꾸는데 몰두했습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초청받은 대학생들이 취직준비에 몰두하고 있는 것과 같았습니다. 여성들은 커리어 우먼이 되기 위해서 자기 일에 빠져 있었습니다. 오늘날 양들을 예배에 초청하면 대부분 바빠서 올 수 없다고 합니다. 사람 만나는 것이 부담스러워서 갈 수 없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등산을 가야하기 때문에 ,  MT를 가야 하기 때문에, 아르바이트를 해야 하기 때문에, 또 어떤 사람들은 토익, 토플 시험을 보아야 하기 때문에 못 온다고 합니다.

  두 번째 사람들의 반응은 어떠했습니까? 6절을 보십시오. “그 남은 자들은 종들을 잡아 능욕하고 죽이니.” 호의적인 초청에 이렇게 핍박하는 것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인간들의 반항적이고 죄악된 심리에는 이런 요소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끈질기게 초청을 하면 “ 안 간다면 안 가는 줄 알지 왜 이렇게 사생활 침해야” 하며 욕을 했습니다. 초청 역사를 섬기러 갔던 종들은 얼굴에 붕대를 감고 다리에 기부스를 하고 돌아왔습니다. 어떤 종들은  들것에 실려서 시체로 돌아왔습니다. 어떤 종들은 아예 돌아오지도 않았습니다. 오기를 거절한 손님들은 불순종하는 유대인과 바리새인들을 나타냅니다. 그들은 선택된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종인 선지자들을 통해서 하나님께 초청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세례 요한과 예수님에 의해서 초청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초청을 거절했습니다. 이것은 모든 죄악된 인간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왜 그들이 왕의 초청을 거절했는가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어려운 시대를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상황은 항상 절박했습니다. 한 사람이 말했습니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이야.” 그러자 다른 사람은 “내 처지는 세상에서 최악이야. 미치겠어.” 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렇지가 않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다른 사람이 고통당하는 것만큼 고통하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있어서 각자의 인생 문제는 그가 생각하는 대로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인생 문제에 매달린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고 말씀을 통해 주시는 지혜를 덧입어야 합니다. 문제는 기적을 체험할 수 있는 기회입니다. 우리는 인생 문제가 시급할수록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지름길인 줄 믿습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초청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또 다른 이유는 영적으로 심한 병에 걸려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지 못합니다. 영적으로 병든 인간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단순하게 영접하지 못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합니다. 영적으로 병든 사람들은 하나님의 보호와 은혜 속에 살면서도 자신은 사랑을 받지 못했다고 느낍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영접하더라도 곧 잊어버립니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서 하나님은 너무나 상한 심정으로 그들을 초청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시는 음성을 들어 보십시오.

셋째, 왕의 초청을 거절한 자들은 대신 왕의 심판을 자초했습니다. 하나님은 초청을 거절하고 종들을 능욕하고 죽인 자들을 어떻게 처리하셨습니까? 7절을 보십시오. “임금이 노하여 군대를 보내어 그 살인한 자들을 진멸하고 그 동네를 불사르고” 하나님은 주권자로서 그들을 심판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오래 참으시지만 무한정 참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그의 초청을 계속해서 거절하는 자들과 함께 하실 수 없습니다.

  모처럼 황태자의 혼인 잔치를 성대하게 치르고자 했던 왕은 심히 화가 났습니다. 그러나 준비한 음식들을 엎어버리고 혼인 잔치를 취소하지 않았습니다. 왕은 끝까지 인내하며 어찌하든지 성대한 혼인 잔치를 치르고자 하였습니다. 혼인 잔치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뜻이기 때문에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첫 손님들이 거절을 했지만 왕은 어찌하든지 홀에 손님이 가득한 가운데 혼인 잔치를 갖고자 했습니다. 그리하여 새로운 사람들을 초청했습니다.

  왕은 어떤 사람들을 어떻게 초청했습니까? 9절을 보십시오. “이에 종들에게 이르되 혼인 잔치는 예비되었으나 청한 사람들은 합당치 아니하니 사거리 길에 가서 사람을 만나는 대로 혼인 잔치에 청하여 오너라 한대.”  일반적으로 사거리 길은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습니다. 홍대 사거리는 대학생들과 청소년들로 북적거립니다. 지금 학교 도서관이나, 학생회관, 식당이나 벤취, 강의실에는 많은 양들이 몰려다닙니다. 우리가 이곳에 찾아가서 만나는 대로 양들을 말씀 공부에 초청해야겠습니다. 바이블 아카데미와 그룹 바이블 스터디, 주일 예배에 양들을 초청하여 홀이 가득한 가운데 말씀 역사를 이루어야겠습니다.

  종들이 사거리 길에 나가서 초청한 결과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10절을 보십시오. “종들이 길에 나가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오니 혼인 자리에 손이 가득한지라.” 여기서 악한 자나 선한 자는 인간 편에서 본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선한 자나 악한 자가 있을 수 없습니다. 누구든지 주의 초청에 응하여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을 얻습니다. 또한 사거리 길에서 온 사람들은 이방인들을 가리킵니다. 그들은 왕에게 전혀 요구할 수 없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이 황태자의 혼인 잔치에 초청을 받는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것은 다른 무엇보다도 왕의 긍휼히 여기는 마음으로부터 나온 것입니다. 우리들에게 왕의 초청이 임한 것은 전적으로 은혜입니다.

  임금님의 혼인 잔치는 성대하게 거행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임금님의 마음에 거슬리는 한 가지 문제가 있었습니다. 임금님이 연회장에 들어 왔을 때 천국 혼인잔치 자리인지 세상인지, 구별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임금님은 그들에게 물었습니다.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니 저가 유구무언이어늘.”  이 사람은 예복을 입고 들어와야 함을 알고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아마 그는 지금까지 입어왔던 자기 옷이 더 좋다고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복장은 마음의 표현입니다. 예배는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이므로 주일 예배를 드리러 올 때는 단정한 차림으로 와야되겠습니다. 여기서 옷은 무엇을 상징할까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입게 되는 의의 옷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자기의 성실성과 열심있는 행위로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비록 신앙생활은 하더라도 예수님의 피 공로를 의지하기보다 자기 열심과 선행과 능력으로 구원을 얻고자 합니다. 지금의 형편이 좋은데 왜 꼭 예수님을 믿어야 되느냐고 반발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계3:17,18)” “대저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사64:6).” 인간의 아무리 깨끗하고 화려한 옷도 하나님의 눈에는 누더기와 같습니다.

  그 사람이 의의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에 온 두번째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경외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에는 황태자의 혼인 잔치에 참석하려면 반드시 예복을 주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주인에 대한 경외심이 없어서 예복을 버리고 작업복을 입고 왔습니다. 로마에 있는 바티칸 베드로 성당에 구경을 가려고 하면 아무리 더운 여름이라도 짧은 바지를 입고 가면 쫓겨난다고 합니다. 좋은 음악회를 가려면 옷도 그 분위기에 맞게 입고 가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천국 잔치에 가기 위해서 어떤 준비를 해야 합니까? 우리도 예복을 준비해야 합니다. 여기서 예복은 예수님을 믿는 의의 예복입니다(갈2:10, 사61:10, 계19:8). 예수님의 피를 믿음으로 얻게 되는 의의 예복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전적으로 부패하고 타락한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피를 흘리셨습니다. 예수님의 피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더러운 모든 죄는 씻겨지고 영생을 얻어 새 피조물이 됩니다. 예수님을 믿은 사람들은 성령의 능력과 인도하심에 순종함으로 거룩한 생활을 하게 됩니다. 주님의 은혜에 기초해서 자기의 몸을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릴 때 죄를 이기고 성령의 열매를 됩니다. 계19:8절은 노래합니다. “그에게 허락하사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하셨은즉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어거스틴은 본래 황태자의 혼인잔치에 들어갈 가격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천국 잔치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는 로마서 13:14절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는 말씀을 통하여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마태복음 저자 마태도 본래 세리였습니다. 너무 이기적이어서 천국 잔치에 초대받을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천국 잔치에 참여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천국 잔치에서 죄사함과 용서와 사랑과 영원한 생명과 참된 자유와 하나님 나라의 축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계19:9절은 말씀합니다. “천사가 내게 말하기를 기록하라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입은 자들이 복이 있도다 하고 또 내게 말하되 이것은 하나님의 참되신 말씀이라.”

  예복을 입지 않고 혼인 잔치에 들어온 사람의 결국이 어떠했습니까? 13,14절을 보십시오.  “임금이 사환들에게 말하되 그 수족을 결박하여 바깥 어두움에 내어 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하니라.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  이 비유의 결론은 예수님의 주권을 심고자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은혜로운 초청장을 내미실 때 거절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회개와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초청을 영접합시다. 또 그의 종된 우리는 사거리 길에 나아가서 사람들을 만나는 대로 초청하여 예배의 빈자리를 채워야겠습니다.

II. 하나님의 것, 가이사의 것(15-22)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돌이켜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가서 어떻게 하여 예수님을 말로 올무에 걸리게 할까 의논하였습니다. 그리고 자기 제자들을 헤롯 당원들과 함께 예수님께 보냈습니다. 본래 헤롯 당원들은 로마 정부와 협력하여 권력을 유지하는 자들로서 바리새인들과는 사이가 좋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잡을 목적으로 그들은 협력하였습니다. 그들은 먼저 예수님을 칭찬했습니다.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참되시고 참으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시며 아무라도 꺼리는 일이 없으시니 이는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심이니이다(16).” 이렇게 과한 칭찬을 하면 의심을 해 보아야 합니다. 그들은 사탕에 독을 바른 것처럼 질문을 했습니다. “그러면 당신의 생각에는 어떠한지 우리에게 이르소서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가하니이까 불가하니이까?(17)” 만약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지 말라고 하면 즉시 헤롯 당원들에 의해서 체포될 것이요 바치라고 하면 어쩔 수 없이 세금을 바치고 있는 백성들이 예수님을 신뢰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악함을 아시고 “외식하는 자들아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고 물으시고 셋돈을 내게 보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들이 데나리온 하나를 가지고 오자 이 형상과 이글이 뉘것이냐고 물으셨습니다. 거기에는 티베리우스 황제(A.D.14-37재위)의 화상과 “티베리우스 시저, 아우구스투스, 아구스투스 신의 아들이며 대제사장”이란 글귀가 새겨져 있었습니다. 다른 쪽에는 황제의 어머니 리비아의 초상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가이사의 것이니이다”라고 대답하는 그들에게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고 하셨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가이사의 체제 아래서 살아갈 수밖에 없지만 결코 가이사의 소유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국가에 대한 의무는 다하고 동시에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돌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우리의 영혼과 우리의 몸입니다. 우리는 예배와 전도, 제자 양성, 십일조와 같은 것 등 하나님께 감사함으로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신자로서 하나님께 충성하고 시민으로서 의무를 다해야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복음 진리를 잘 전할 수 있습니다. 국민의 의무는 여섯가지입니다. 국방, 납세, 교육, 근로, 환경 보전의 의무, 재산권 행사의 공공 복리의 의무 등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면서 동시에 대한민국 국민으로서의 공동체 의식을 가지고 의무를 다 해야 합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은 인생살이에 시달린 우리들을 하나님 나라에 초청하여 즐거움을 함께 나누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들어갑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천국 혼인 잔치에 양들을 초청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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