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마28강(21:23-46)/모퉁이의 머릿돌 되신 예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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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마태복음 제 28 강 188
말씀 / 마태복음 21:23-46
요절 / 마태복음 21:42
모퉁이의 머릿돌 되신 예수님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하도다 함을 잃어 본 일이 없느냐?”
매미는 4년에서 길게는 17년 동안 땅 속에 있다가 올라와서 무더운 여름철을 잠시 동안 시원하게 울어 줍니다. 그런데 이번 추석 연휴 끝 날에 태풍 ‘매미’가 너무 크게 울어서 영남 지방이 많은 피해를 보게 되었습니다. 이번 태풍 매미의 이름은 북한에서 제출한 이름이라고 합니다. 이번 태풍으로 피해를 본 많은 분들에게 하나님의 위로가 함께 하기를 기도합니다.
우리는 지난 주에 만유의 주시오 왕이신 예수님을 영접하고 그의 다스림을 받으며 충성을 다하고자 다짐하게 되었습니다. 오늘은 사람의 권세와 하나님의 권세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예수님의 권세는 하나님의 권세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행하셨기 때문에 그의 말과 행동은 권세가 있었습니다. 이 권세에 순종하는 자를 하나님은 축복하십니다. 예수님은 건축자들이 쓸모없다고 버린 돌이 되셨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를 택하셔서 모퉁이의 머릿돌로 삼으셨습니다. 이 시간 본문 말씀을 묵상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신 예수님처럼 그 나라의 열매맺는 백성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I. 두 아들의 비유(23-32)
예수님께서 성전에 들어가 가르치실 때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나아와 따졌습니다. “네가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느뇨 또 누가 이 권세를 주었느뇨?” 그들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시자 매우 기분이 나빴습니다. 자기들이 말씀을 가르치는 자격을 부여하는데 공부도 하지 않은 예수님께서 말씀을 가르치시자 자기들의 기득권이 침해를 받는다고 생각했습니다. 전날에는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장사하던 자들을 쫓아내시고 환전상들의 책상을 둘러 엎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또한 아이들에게서 찬송을 받으셨습니다. 이것을 보고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이상히 여기며 못마땅해 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행동을 통해서 회개할 생각은 하지 않고 자신들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이들은 예수님께서 성경의 근본정신으로 돌아가고자 하는데 자신들의 기득권을 주장하며 하나님의 역사를 방해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의 내용보다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가 하며 눈에 보이는 자격증을 요구했습니다.
예수님은 그 권세가 하늘로서 온 것임을 세례 요한의 예를 들어 설명하셨습니다. “나도 한 말을 너희에게 물으리니 너희가 대답하면 나도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이르리라 요한의 세례가 어디로서 왔느냐 하늘로서냐 사람에게로서냐?” 그들은 서로 의논했습니다. 만일 하늘로서라 하면 어찌하여 저를 믿지 아니하였느냐 할 것이요 만일 사람에게로서라 하면 모든 사람이 요한을 선지자로 여기니 백성이 무서웠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대답하기를 우리가 알지 못하노라고 했습니다. 그들의 말은 정치적이었습니다. 그들은 언제든지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어 놓고 상황에 따라 자신들의 모습을 변형시켰습니다. 그들에게는 절대적인 진리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상황에 따라 행동하는 거짓된 인간, 마귀의 자식이 되었습니다(요8:44). 그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자 했다면 회개하고 마음을 돌이켰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회개하지 않고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서 예수님을 공격했습니다. 요 7:17절은 말씀합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서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이 말씀을 볼 때 그들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할 마음이 없었습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해서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행할 마음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고집과 회개치 아니하는 마음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을 비우고 순수해지면 하나님의 뜻이 선명하게 보이게 됩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눈치를 보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일하셨기 때문에 권세가 나타났습니다. 하나님의 권세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직분에 있고 그에 따르는 능력에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고 할 때 성령께서 그 권세를 인쳐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나님의 뜻을 섬기고자 했을 때 성령께서 비둘기 같이 그의 머리 위에 임하시고 하늘에서는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는 음성이 들렸습니다(마3:17).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자 할 때 권위가 생기고 무엇보다 본을 보이는 생활을 할 때 권세가 생깁니다. 목자가 양을 마음으로 사랑하고 섬길 때 목자의 권위가 생깁니다. 직분이 있어도 기도와 말씀이 없으면 권위가 없습니다. 우리가 왜 영적 권세를 덧입어야 합니까? 하나님의 일을 하려면 좋은 영향력을 끼쳐야 하고 또 양들로 하나님의 말씀을 믿어 순종하게 하려면 영적 권세가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예수님을 믿어 순종할 때에 은헤와 사도의 직분과 함께 권세를 주셨습니다. 우리가 믿고 기도할 때 영적 권세를 받아 하나님의 뜻을 행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한 가지 비유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한 사람이 두 아들이 있는데 맏아들에게 가서 “애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하니 아버지여 가겠소이다 하더니 가지 아니하였습니다. 그는 예스맨과 같이 시원스럽게 말을 잘 하였지만 실제로는 말대로 하지 않았습니다. “애야, 일대일 말씀 공부좀 해라” 하면 “예 하겠습니다.”라고 시원스럽게 대답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공부하는 법이 없었습니다. 그는 일대일 말씀 공부하라고 하면 갑자기 일이 생겼다고 하며 나가버렸습니다.
그러나 둘째 아들은 어떠했습니까? 그는 아버지가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고 하자 “싫어요 나 게임해야 되요”하며 거절했습니다. 그러나 잠시 후에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포도원에 가서 일했습니다. 이 비유에서 볼 때 진정한 회개와 순종은 말로 하는 것이 아니라 실생활 속에서 행동으로 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둘 중에 누가 아비의 뜻대로 하였습니까? 둘째 아들입니다. 한 사람은 매우 음란하고 정욕적이었습니다. 음란 사이트에 중독이 되어 생각하는 것마다 음란하였습니다. 그의 모습은 매우 느끼하였습니다. 또 한 사람은 매우 이기적이었습니다. 그는 자기 밖에 몰랐습니다. 음식을 먹을 때에도 다른 사람에 대한 배려가 없었습니다. 자기 혼자 먹으면 그것으로 끝이었습니다. 늦게 오는 친구를 위해서 남겨두는 법이 없었습니다. 그의 이기심으로 인해서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당하고 혀를 내둘렀습니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는 말씀을 듣고 회개하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의 열매를 맺었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이것을 보고도 종시 뉘우쳐 믿지 아니하였습니다(32). 그들은 자존심 때문에, 교만 때문에 회개할 줄을 몰랐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 7:21)”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천국 복음을 받아들였다고 자축하면서 큰 아들의 위치에 있어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과연 포도원에 나가서 일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섬기고 있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지 않으면서 주여 주여 하고 부르는 것을 주님은 경고하고 계십니다. 이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변화되지 않은 사람들과 변화된 사람들입니다. 바리새인들은 매우 종교적인 사람들이었지만 변화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세리와 창기들은 이 세상에서 죄인으로 알려졌지만 예수님을 믿고 회개하여 변화된 삶을 살았습니다. 세리 마태는 아주 이기적인 죄인이었지만 세상의 빛이 되었습니다. 창기였던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께 향유 한 옥합을 부은 헌신된 여인이 되었습니다. 이들의 변화된 삶은 복음의 능력이 무엇인가 우리에게 생생하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과거 어떤 죄악된 삶을 살았을지라도 진실되게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자에게 임하게 됩니다.
II. 포도원 소작농의 비유(33-46)
예수님께서는 회개하지 않는 바리새인들과 장로들을 위해서 다시 한 비유를 들려주셨습니다. 한 집주인이 포도원을 만들고 산울로 두르고 거기 즙 짜는 구유를 파고 망대를 짓고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갔습니다. 산에 다가 포도원을 만든다는 것은 매우 힘든 일입니다. 저희 집도 어렸을 때에 산을 파서 복숭아 과수원을 만들었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때 동산에 있는 나무를 자르고 뿌리를 걷어내고 크고 작은 돌부리를 캐내는 것들은 정말로 힘든 일이었습니다. 집 주인은 동산을 고른 다음에 그 위에 거름을 하고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습니다. 이 나무가 자라서 열매가 되려면 3-4년은 기다려야 합니다. 그 기간 동안 들짐승이나 도적인 들어오지 못하도록 산울로 두르고 망대를 세웠습니다. 그리고 추수할 때를 위해서 즙 짜는 구유를 팠습니다. 즙짜는 구유는 단단한 바위를 파서 역청을 발라 만들기 때문에 만들기가 힘듭니다. 한마디로 주인은 농부들이 와서 일하기만 하면 자연히 크고 아름다운 국상품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모든 환경을 갖추어 포도원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갔습니다. 보통 세를 줄 때는 7:3이나 6:4를 줍니다. 좀 후한 경우가 5:5입니다. 그런데 이 주인은 세를 9:1로 주고 갔습니다. ⅟10만 내면 되었기 때문에 농부들은 일방적인 은혜를 받은 것입니다. 또 주인이 일일이 간섭하지 않고 타국에 갔습니다. 주인이 농부들에게 세를 주고 타국으로 간 것은 그들을 믿고 맡겼다는 뜻입니다. 주인이 타국에 갔기 때문에 그들은 마음껏 자유롭게 일할 수 있었습니다. 자유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최대의 선물입니다. 이 자유가 있기 때문에 인간의 창의성이 최대한 발휘가 되고 발전에 발전을 거듭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비유에서 농부들은 바리새인들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포도원 주인은 하나님, 포도원은 이스라엘 족속을, 아들은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이 비유를 넓게 본다면 하나님께서 인생들에게 주신 이 세상을 포도원으로 볼 수 있습니다. 좁게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명의 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에덴 동산을 만드신 후에 생명 나무와 선악과를 만드사 동산 중앙에 두셨습니다. 그리고 동산의 모든 나무의 실과는 임의로 먹되 동산 중앙에 있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실과는 먹지 말라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이를 통해 인간에게 선택의 자유를 주셨습니다. 이를 영적 질서를 세우기를 원하셨습니다. 포도원 주인이 농부들에게 세를 주고 간 것도 주인과 소작인의 질서를 세우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캠퍼스 포도원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일생동안 한국과 세계의 캠퍼스 포도원에서 젊은 지성인들을 제자 삼는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학생들과 함께 할 때 나이 먹는 줄을 모릅니다. 또한 신선한 학생들의 생각을 접할 수 있습니다. 캠퍼스 지성인들은 젊고 순수하고 진리를 사랑하며 무한히 성장할 가능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칼 윌슨(Carl Wilson)은 ‘캠퍼스는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인력 저수지’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죄와 사망 권세로부터 구원해 줍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세상에서 지친 우리의 영혼을 소생시켜 주고 우리에게 참 만족과 기쁨과 안식을 줍니다. 또한 우리에게는 함께 역사를 섬길 수 있는 믿음의 동역자들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일생토록 일할 수 있는 세계 캠퍼스를 주셨습니다. 요즈음은 할 일이 없어 놀고 있는 사람들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쉽게 늙습니다.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기 때문에 의욕도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캠퍼스 포도원에서 일하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이는 실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큰 축복입니다.
실과 때가 가까워지자 주인은 그 실과를 받으려고 자기 종들을 농부들에게 보냈습니다. 농부들은 이들을 주인의 대사로 융숭히 대접하고 실과 중 가장 좋은 것을 보내야 마땅했습니다. 그러나 농부들은 종들을 잡아 하나는 심히 때리고 하나는 죽이고 하나는 돌로 쳤습니다. 종들은 눈을 돌로 맞아 시커멓게 멍이 들고 얼굴이 깨져서 돌아오기도 하고 병신이 되었습니다. 주인은 당장에 그들을 진멸해야 마땅했습니다. 그러나 주인은 참았습니다. 주인은 농부들을 여전히 신뢰하고 다른 종들을 전보다 더 많이 보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주인을 무시하고 전보다 더 종들을 핍박하고 죽였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은 포도원을 가꾸기 위해 죽도록 고생했는데 주인은 놀고 있다가 세만 받아가는 세리와 같이 생각했습니다.
종들은 구약의 선지자들을 가리킵니다.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뜻을 전하고 백성들이 하나님과 바른 관계성을 맺도록 회개의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귀를 막고 말씀을 듣지 않고 선지자들을 핍박하고 죽였습니다. 그들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첫째로,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잊고 감사치 않았습니다. 그들이 포도원을 처음 맞게 되었을 때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하여 감사의 눈물을 흘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 점점 은혜를 잊어버리고 자신들이 포도원에서 일하게 된 것을 너무나 당연한 것처럼 생각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자기들이 자격이 있어서 선택된 것처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배가 부르게 되자 과거 죄 가운데서 고통하며 사명이 없어 비참하게 살던 시절을 잊어버리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기본적인 구원의 은혜마저 잊어버렸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과의 관계성이 파괴되고 영적 눈이 멀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배은망덕하고 은혜를 악으로 갚게 된 것은 기본적인 구원의 은혜를 잊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과거 얼마나 비참한 상태에서 주님의 은혜로 구원받고 하나님의 포도원에서 일하게 되었는가 하는 기본적인 은혜를 잊어버리고 감사치 않을 때 하나님과의 관계성이 파괴되고 배은망덕한 몹쓸 자가 되어 버립니다. 신앙생활에서 기본적인 구원의 은혜를 늘 새롭게 기억하고 감사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하는 자는 주님의 축복을 잘 감당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은혜를 잊어버리고 감사치 않는 자는 은혜 받지 않을 때보다 더 비참하게 되어 버립니다.
둘째로, 그들은 교만했습니다. 농부들은 포도원 주인이 아니라 세를 내야 하는 소작농에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마땅히 주인을 주인으로 대접하고 공경해야 마땅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포도원을 열심히 가꾸다 보니 포도원에 대한 애착이 들고 결국에는 자신이 주인인양 착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주인의식이 너무 강했습니다. 그들은 열심히 일하다보니 자기 의가 생겼습니다. 자기 의는 필연적으로 교만을 낳게 됩니다. 그들은 마음이 높아지고 교만해졌습니다. 그러자 눈에 보이는 것이 없었습니다. 사람이 교만하게 되면 못쓰게 되어 버립니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입니다.
셋째로, 그들은 탐욕에 빠졌습니다. 37절을 보십시오. “후에 자기 아들을 보내며 가로되 저희가 내 아들은 공경하리라 하였더니” 자기 아들을 보내기로 결정하는 데는 주인의 고민과 슬픔이 담겨 있습니다. 농부들이 이제까지 악하게 종들을 죽였기 때문에 자기아들을 죽일 수도 있었습니다. 그래도 아들은 주인을 닮았기 때문에 공경하리라 기대했습니다. 그들이 아들을 영접하면 이제까지 있었던 모든 죄악을 용서하고 그들을 믿고 포도원을 맡길 것입니다. 주인은 세를 더 받아내려는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과 사랑과 신뢰의 관계를 회복하고자 함이었습니다. 농부들의 마음을 돌이키려고 한 것입니다. 그들이 악하다 할지라도 그래도 믿으려고 했습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오래 참으시는 사랑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롬2:4). 하나님은 우리가 죄를 짓는다고 해서 금방 벌하지 않습니다. 오래 참으시면서 회개할 기회를 주십니다. 목자는 양을 치면서 오래 참아야 합니다. 그의 죄를 감당해 주면서 욕도 먹고 비난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참고 사랑하면서 섬기고 말씀을 주고 양육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맛본 사람은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농부들은 그 아들을 보고 어떻게 대접했습니까? 38,39절을 보십시오. “농부들이 그 아들을 보고 서로 말하되 이는 상속자니 자 죽이고 그의 유업을 차지하자 하고 이에 잡아 포도원 밖에 내어 쫓아 죽였느니라.” 그들은 아들을 보았을 때 이는 상속자니 자 죽이고 그 유업을 차지하자고 했습니다. 그들의 욕심은 결국 살인으로 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바늘 도둑이 소도둑 된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그들이 세를 내지 않고 욕심을 부리자 이제는 주인의 아들을 죽이고 그 유업을 차지하려고 합니다. 아담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자 선악과를 보고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게 보였습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하나님과 같이 된다는 사단의 꾀임에 넘어가 선악과를 따먹고 하나님을 대적하였습니다. 아담의 죄가 지금 온 인류의 마음에 까지 파고 들어 탐욕의 종노릇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 나라의 문제는 물질에 대한 탐욕입니다. 물질 우상입니다. 탐욕 우상입니다(골3:5). 그것이 가정을 파탄시키고 수많은 자살의 원인이 되고 있습니다. 여든살 먹은 세 할아버지가 소매치기를 하다가 잡혔습니다. 카드 빚에 몰려 수없이 많은 가장들이 가족들과 함께 동반 자살을 하고 있습니다. 물질 우상, 탐욕의 죄가 이렇게 무섭습니다. 농부들은 주인의식을 가지고 일하다가 이것이 지나쳐서 이제는 주인을 죽이고 자기들이 모든 것을 차지하고자 계획하였습니다. 탐욕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모든 죄의 근원이 됩니다. 탐욕은 자라납니다. 탐욕은 독버섯과 같아서 다른 사람들에게 치명적인 악영향을 미칩니다. 또한 탐욕은 만족할 줄을 모릅니다. 탐욕은 무저갱의 심연과 같아서 아무리 채우고 채워도 끝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탐욕이 발견되면 자라기 전에 빨리 뽑아버려야 합니다.
그러면 포도원 주인이 올 때에 농부들을 어떻게 하겠습니까? 이 악한 자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은 제 때에 실과를 바칠 만한 다른 농부들에게 세로 줄 것입니다. 이와 같이 구원의 은혜가 유대인에게서 이방인에게로 넘어가게 됩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은 멸망하게 됩니다. 예루살렘은 A.D.70년에 멸망하게 되었습니다.
42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하도다 함을 읽어 본 일이 없느냐” 종교 지도자들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집보다 자기들이 원하는 집을 짓기를 원했습니다. 그들은 정치적인 메시야, 민족적인 메시야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고난의 메시야, 영적인 메시야로 오셨습니다. 이 때문에 종교지도자들인 건축자들에 의해서 쓸모없다고 버림을 당하셨습니다. 그들로 인해 하나님의 구속 역사는 실패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실패하지만 하나님은 결코 실패하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인간들의 악을 선으로 바꾸사 친히 구속 역사를 이루어나가셨습니다. 하나님은 종교지도자들이 버린 돌을 주어다가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게 하셨습니다. 옛날 유대에서는 모퉁이의 머릿돌을 기초로 기둥을 세우고 집을 지었으며 그 머릿돌에 건축자의 이름을 새겼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모퉁이의 머릿돌은 건물의 기초석으로 가장 중요한 돌입니다.
예수님은 구원 역사의 초석이 되십니다. 또한 예수님은 우리 개개인의 구원의 반석이 되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의지할 때 구원을 받게 되지만 그렇지 않고 예수님을 대적할 때 깨어집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사람을 구원코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좌절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자들은 크게 잘못된 것입니다. 장차 예수님께서 심판주로 오셔서 심판하시면 예수님을 대적하는 자들은 가루가 되어 박살이 나고 맙니다. 예수님은 구원의 돌인 동시에 심판의 돌이 되십니다. 이 말씀을 듣고 종교지도자들은 이 비유가 바로 자기들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알고 잡고자 하였으나 백성들이 무서워 할 수 없었습니다(45,46).
하나님은 복음을 믿은 우리가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열매는 의로움과 공평입니다. 무엇보다 믿음의 열매, 복음의 열매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아름다운 캠퍼스 포도원을 주시고 열매를 맺을 수 있는 모든 환경을 만들어주셨습니다.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열심히 일하여 열매를 많이 맺는 것입니다. 우리가 열매를 많이 맺어 하나님께 드림으로 하나님과 바른 관계성을 유지하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겸손하게 받은 바 축복을 잘 감당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일생 은혜와 축복을 누리는 복된 인생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말씀 / 마태복음 21:23-46
요절 / 마태복음 21:42
모퉁이의 머릿돌 되신 예수님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하도다 함을 잃어 본 일이 없느냐?”
매미는 4년에서 길게는 17년 동안 땅 속에 있다가 올라와서 무더운 여름철을 잠시 동안 시원하게 울어 줍니다. 그런데 이번 추석 연휴 끝 날에 태풍 ‘매미’가 너무 크게 울어서 영남 지방이 많은 피해를 보게 되었습니다. 이번 태풍 매미의 이름은 북한에서 제출한 이름이라고 합니다. 이번 태풍으로 피해를 본 많은 분들에게 하나님의 위로가 함께 하기를 기도합니다.
우리는 지난 주에 만유의 주시오 왕이신 예수님을 영접하고 그의 다스림을 받으며 충성을 다하고자 다짐하게 되었습니다. 오늘은 사람의 권세와 하나님의 권세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예수님의 권세는 하나님의 권세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행하셨기 때문에 그의 말과 행동은 권세가 있었습니다. 이 권세에 순종하는 자를 하나님은 축복하십니다. 예수님은 건축자들이 쓸모없다고 버린 돌이 되셨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를 택하셔서 모퉁이의 머릿돌로 삼으셨습니다. 이 시간 본문 말씀을 묵상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신 예수님처럼 그 나라의 열매맺는 백성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I. 두 아들의 비유(23-32)
예수님께서 성전에 들어가 가르치실 때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나아와 따졌습니다. “네가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느뇨 또 누가 이 권세를 주었느뇨?” 그들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시자 매우 기분이 나빴습니다. 자기들이 말씀을 가르치는 자격을 부여하는데 공부도 하지 않은 예수님께서 말씀을 가르치시자 자기들의 기득권이 침해를 받는다고 생각했습니다. 전날에는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장사하던 자들을 쫓아내시고 환전상들의 책상을 둘러 엎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또한 아이들에게서 찬송을 받으셨습니다. 이것을 보고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이상히 여기며 못마땅해 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행동을 통해서 회개할 생각은 하지 않고 자신들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이들은 예수님께서 성경의 근본정신으로 돌아가고자 하는데 자신들의 기득권을 주장하며 하나님의 역사를 방해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의 내용보다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가 하며 눈에 보이는 자격증을 요구했습니다.
예수님은 그 권세가 하늘로서 온 것임을 세례 요한의 예를 들어 설명하셨습니다. “나도 한 말을 너희에게 물으리니 너희가 대답하면 나도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이르리라 요한의 세례가 어디로서 왔느냐 하늘로서냐 사람에게로서냐?” 그들은 서로 의논했습니다. 만일 하늘로서라 하면 어찌하여 저를 믿지 아니하였느냐 할 것이요 만일 사람에게로서라 하면 모든 사람이 요한을 선지자로 여기니 백성이 무서웠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대답하기를 우리가 알지 못하노라고 했습니다. 그들의 말은 정치적이었습니다. 그들은 언제든지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어 놓고 상황에 따라 자신들의 모습을 변형시켰습니다. 그들에게는 절대적인 진리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상황에 따라 행동하는 거짓된 인간, 마귀의 자식이 되었습니다(요8:44). 그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자 했다면 회개하고 마음을 돌이켰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회개하지 않고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서 예수님을 공격했습니다. 요 7:17절은 말씀합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서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이 말씀을 볼 때 그들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할 마음이 없었습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해서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행할 마음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고집과 회개치 아니하는 마음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을 비우고 순수해지면 하나님의 뜻이 선명하게 보이게 됩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눈치를 보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일하셨기 때문에 권세가 나타났습니다. 하나님의 권세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직분에 있고 그에 따르는 능력에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고 할 때 성령께서 그 권세를 인쳐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나님의 뜻을 섬기고자 했을 때 성령께서 비둘기 같이 그의 머리 위에 임하시고 하늘에서는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는 음성이 들렸습니다(마3:17).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자 할 때 권위가 생기고 무엇보다 본을 보이는 생활을 할 때 권세가 생깁니다. 목자가 양을 마음으로 사랑하고 섬길 때 목자의 권위가 생깁니다. 직분이 있어도 기도와 말씀이 없으면 권위가 없습니다. 우리가 왜 영적 권세를 덧입어야 합니까? 하나님의 일을 하려면 좋은 영향력을 끼쳐야 하고 또 양들로 하나님의 말씀을 믿어 순종하게 하려면 영적 권세가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예수님을 믿어 순종할 때에 은헤와 사도의 직분과 함께 권세를 주셨습니다. 우리가 믿고 기도할 때 영적 권세를 받아 하나님의 뜻을 행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한 가지 비유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한 사람이 두 아들이 있는데 맏아들에게 가서 “애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하니 아버지여 가겠소이다 하더니 가지 아니하였습니다. 그는 예스맨과 같이 시원스럽게 말을 잘 하였지만 실제로는 말대로 하지 않았습니다. “애야, 일대일 말씀 공부좀 해라” 하면 “예 하겠습니다.”라고 시원스럽게 대답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공부하는 법이 없었습니다. 그는 일대일 말씀 공부하라고 하면 갑자기 일이 생겼다고 하며 나가버렸습니다.
그러나 둘째 아들은 어떠했습니까? 그는 아버지가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고 하자 “싫어요 나 게임해야 되요”하며 거절했습니다. 그러나 잠시 후에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포도원에 가서 일했습니다. 이 비유에서 볼 때 진정한 회개와 순종은 말로 하는 것이 아니라 실생활 속에서 행동으로 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둘 중에 누가 아비의 뜻대로 하였습니까? 둘째 아들입니다. 한 사람은 매우 음란하고 정욕적이었습니다. 음란 사이트에 중독이 되어 생각하는 것마다 음란하였습니다. 그의 모습은 매우 느끼하였습니다. 또 한 사람은 매우 이기적이었습니다. 그는 자기 밖에 몰랐습니다. 음식을 먹을 때에도 다른 사람에 대한 배려가 없었습니다. 자기 혼자 먹으면 그것으로 끝이었습니다. 늦게 오는 친구를 위해서 남겨두는 법이 없었습니다. 그의 이기심으로 인해서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당하고 혀를 내둘렀습니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는 말씀을 듣고 회개하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의 열매를 맺었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이것을 보고도 종시 뉘우쳐 믿지 아니하였습니다(32). 그들은 자존심 때문에, 교만 때문에 회개할 줄을 몰랐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 7:21)”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천국 복음을 받아들였다고 자축하면서 큰 아들의 위치에 있어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과연 포도원에 나가서 일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섬기고 있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지 않으면서 주여 주여 하고 부르는 것을 주님은 경고하고 계십니다. 이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변화되지 않은 사람들과 변화된 사람들입니다. 바리새인들은 매우 종교적인 사람들이었지만 변화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세리와 창기들은 이 세상에서 죄인으로 알려졌지만 예수님을 믿고 회개하여 변화된 삶을 살았습니다. 세리 마태는 아주 이기적인 죄인이었지만 세상의 빛이 되었습니다. 창기였던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께 향유 한 옥합을 부은 헌신된 여인이 되었습니다. 이들의 변화된 삶은 복음의 능력이 무엇인가 우리에게 생생하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과거 어떤 죄악된 삶을 살았을지라도 진실되게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자에게 임하게 됩니다.
II. 포도원 소작농의 비유(33-46)
예수님께서는 회개하지 않는 바리새인들과 장로들을 위해서 다시 한 비유를 들려주셨습니다. 한 집주인이 포도원을 만들고 산울로 두르고 거기 즙 짜는 구유를 파고 망대를 짓고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갔습니다. 산에 다가 포도원을 만든다는 것은 매우 힘든 일입니다. 저희 집도 어렸을 때에 산을 파서 복숭아 과수원을 만들었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때 동산에 있는 나무를 자르고 뿌리를 걷어내고 크고 작은 돌부리를 캐내는 것들은 정말로 힘든 일이었습니다. 집 주인은 동산을 고른 다음에 그 위에 거름을 하고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습니다. 이 나무가 자라서 열매가 되려면 3-4년은 기다려야 합니다. 그 기간 동안 들짐승이나 도적인 들어오지 못하도록 산울로 두르고 망대를 세웠습니다. 그리고 추수할 때를 위해서 즙 짜는 구유를 팠습니다. 즙짜는 구유는 단단한 바위를 파서 역청을 발라 만들기 때문에 만들기가 힘듭니다. 한마디로 주인은 농부들이 와서 일하기만 하면 자연히 크고 아름다운 국상품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모든 환경을 갖추어 포도원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갔습니다. 보통 세를 줄 때는 7:3이나 6:4를 줍니다. 좀 후한 경우가 5:5입니다. 그런데 이 주인은 세를 9:1로 주고 갔습니다. ⅟10만 내면 되었기 때문에 농부들은 일방적인 은혜를 받은 것입니다. 또 주인이 일일이 간섭하지 않고 타국에 갔습니다. 주인이 농부들에게 세를 주고 타국으로 간 것은 그들을 믿고 맡겼다는 뜻입니다. 주인이 타국에 갔기 때문에 그들은 마음껏 자유롭게 일할 수 있었습니다. 자유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최대의 선물입니다. 이 자유가 있기 때문에 인간의 창의성이 최대한 발휘가 되고 발전에 발전을 거듭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비유에서 농부들은 바리새인들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포도원 주인은 하나님, 포도원은 이스라엘 족속을, 아들은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이 비유를 넓게 본다면 하나님께서 인생들에게 주신 이 세상을 포도원으로 볼 수 있습니다. 좁게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명의 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에덴 동산을 만드신 후에 생명 나무와 선악과를 만드사 동산 중앙에 두셨습니다. 그리고 동산의 모든 나무의 실과는 임의로 먹되 동산 중앙에 있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실과는 먹지 말라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이를 통해 인간에게 선택의 자유를 주셨습니다. 이를 영적 질서를 세우기를 원하셨습니다. 포도원 주인이 농부들에게 세를 주고 간 것도 주인과 소작인의 질서를 세우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캠퍼스 포도원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일생동안 한국과 세계의 캠퍼스 포도원에서 젊은 지성인들을 제자 삼는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학생들과 함께 할 때 나이 먹는 줄을 모릅니다. 또한 신선한 학생들의 생각을 접할 수 있습니다. 캠퍼스 지성인들은 젊고 순수하고 진리를 사랑하며 무한히 성장할 가능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칼 윌슨(Carl Wilson)은 ‘캠퍼스는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인력 저수지’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죄와 사망 권세로부터 구원해 줍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세상에서 지친 우리의 영혼을 소생시켜 주고 우리에게 참 만족과 기쁨과 안식을 줍니다. 또한 우리에게는 함께 역사를 섬길 수 있는 믿음의 동역자들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일생토록 일할 수 있는 세계 캠퍼스를 주셨습니다. 요즈음은 할 일이 없어 놀고 있는 사람들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쉽게 늙습니다.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기 때문에 의욕도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캠퍼스 포도원에서 일하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이는 실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큰 축복입니다.
실과 때가 가까워지자 주인은 그 실과를 받으려고 자기 종들을 농부들에게 보냈습니다. 농부들은 이들을 주인의 대사로 융숭히 대접하고 실과 중 가장 좋은 것을 보내야 마땅했습니다. 그러나 농부들은 종들을 잡아 하나는 심히 때리고 하나는 죽이고 하나는 돌로 쳤습니다. 종들은 눈을 돌로 맞아 시커멓게 멍이 들고 얼굴이 깨져서 돌아오기도 하고 병신이 되었습니다. 주인은 당장에 그들을 진멸해야 마땅했습니다. 그러나 주인은 참았습니다. 주인은 농부들을 여전히 신뢰하고 다른 종들을 전보다 더 많이 보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주인을 무시하고 전보다 더 종들을 핍박하고 죽였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은 포도원을 가꾸기 위해 죽도록 고생했는데 주인은 놀고 있다가 세만 받아가는 세리와 같이 생각했습니다.
종들은 구약의 선지자들을 가리킵니다.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뜻을 전하고 백성들이 하나님과 바른 관계성을 맺도록 회개의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귀를 막고 말씀을 듣지 않고 선지자들을 핍박하고 죽였습니다. 그들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첫째로,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잊고 감사치 않았습니다. 그들이 포도원을 처음 맞게 되었을 때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하여 감사의 눈물을 흘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 점점 은혜를 잊어버리고 자신들이 포도원에서 일하게 된 것을 너무나 당연한 것처럼 생각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자기들이 자격이 있어서 선택된 것처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배가 부르게 되자 과거 죄 가운데서 고통하며 사명이 없어 비참하게 살던 시절을 잊어버리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기본적인 구원의 은혜마저 잊어버렸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과의 관계성이 파괴되고 영적 눈이 멀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배은망덕하고 은혜를 악으로 갚게 된 것은 기본적인 구원의 은혜를 잊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과거 얼마나 비참한 상태에서 주님의 은혜로 구원받고 하나님의 포도원에서 일하게 되었는가 하는 기본적인 은혜를 잊어버리고 감사치 않을 때 하나님과의 관계성이 파괴되고 배은망덕한 몹쓸 자가 되어 버립니다. 신앙생활에서 기본적인 구원의 은혜를 늘 새롭게 기억하고 감사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하는 자는 주님의 축복을 잘 감당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은혜를 잊어버리고 감사치 않는 자는 은혜 받지 않을 때보다 더 비참하게 되어 버립니다.
둘째로, 그들은 교만했습니다. 농부들은 포도원 주인이 아니라 세를 내야 하는 소작농에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마땅히 주인을 주인으로 대접하고 공경해야 마땅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포도원을 열심히 가꾸다 보니 포도원에 대한 애착이 들고 결국에는 자신이 주인인양 착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주인의식이 너무 강했습니다. 그들은 열심히 일하다보니 자기 의가 생겼습니다. 자기 의는 필연적으로 교만을 낳게 됩니다. 그들은 마음이 높아지고 교만해졌습니다. 그러자 눈에 보이는 것이 없었습니다. 사람이 교만하게 되면 못쓰게 되어 버립니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입니다.
셋째로, 그들은 탐욕에 빠졌습니다. 37절을 보십시오. “후에 자기 아들을 보내며 가로되 저희가 내 아들은 공경하리라 하였더니” 자기 아들을 보내기로 결정하는 데는 주인의 고민과 슬픔이 담겨 있습니다. 농부들이 이제까지 악하게 종들을 죽였기 때문에 자기아들을 죽일 수도 있었습니다. 그래도 아들은 주인을 닮았기 때문에 공경하리라 기대했습니다. 그들이 아들을 영접하면 이제까지 있었던 모든 죄악을 용서하고 그들을 믿고 포도원을 맡길 것입니다. 주인은 세를 더 받아내려는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과 사랑과 신뢰의 관계를 회복하고자 함이었습니다. 농부들의 마음을 돌이키려고 한 것입니다. 그들이 악하다 할지라도 그래도 믿으려고 했습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오래 참으시는 사랑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롬2:4). 하나님은 우리가 죄를 짓는다고 해서 금방 벌하지 않습니다. 오래 참으시면서 회개할 기회를 주십니다. 목자는 양을 치면서 오래 참아야 합니다. 그의 죄를 감당해 주면서 욕도 먹고 비난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참고 사랑하면서 섬기고 말씀을 주고 양육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맛본 사람은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농부들은 그 아들을 보고 어떻게 대접했습니까? 38,39절을 보십시오. “농부들이 그 아들을 보고 서로 말하되 이는 상속자니 자 죽이고 그의 유업을 차지하자 하고 이에 잡아 포도원 밖에 내어 쫓아 죽였느니라.” 그들은 아들을 보았을 때 이는 상속자니 자 죽이고 그 유업을 차지하자고 했습니다. 그들의 욕심은 결국 살인으로 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바늘 도둑이 소도둑 된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그들이 세를 내지 않고 욕심을 부리자 이제는 주인의 아들을 죽이고 그 유업을 차지하려고 합니다. 아담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자 선악과를 보고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게 보였습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하나님과 같이 된다는 사단의 꾀임에 넘어가 선악과를 따먹고 하나님을 대적하였습니다. 아담의 죄가 지금 온 인류의 마음에 까지 파고 들어 탐욕의 종노릇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 나라의 문제는 물질에 대한 탐욕입니다. 물질 우상입니다. 탐욕 우상입니다(골3:5). 그것이 가정을 파탄시키고 수많은 자살의 원인이 되고 있습니다. 여든살 먹은 세 할아버지가 소매치기를 하다가 잡혔습니다. 카드 빚에 몰려 수없이 많은 가장들이 가족들과 함께 동반 자살을 하고 있습니다. 물질 우상, 탐욕의 죄가 이렇게 무섭습니다. 농부들은 주인의식을 가지고 일하다가 이것이 지나쳐서 이제는 주인을 죽이고 자기들이 모든 것을 차지하고자 계획하였습니다. 탐욕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모든 죄의 근원이 됩니다. 탐욕은 자라납니다. 탐욕은 독버섯과 같아서 다른 사람들에게 치명적인 악영향을 미칩니다. 또한 탐욕은 만족할 줄을 모릅니다. 탐욕은 무저갱의 심연과 같아서 아무리 채우고 채워도 끝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탐욕이 발견되면 자라기 전에 빨리 뽑아버려야 합니다.
그러면 포도원 주인이 올 때에 농부들을 어떻게 하겠습니까? 이 악한 자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은 제 때에 실과를 바칠 만한 다른 농부들에게 세로 줄 것입니다. 이와 같이 구원의 은혜가 유대인에게서 이방인에게로 넘어가게 됩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은 멸망하게 됩니다. 예루살렘은 A.D.70년에 멸망하게 되었습니다.
42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하도다 함을 읽어 본 일이 없느냐” 종교 지도자들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집보다 자기들이 원하는 집을 짓기를 원했습니다. 그들은 정치적인 메시야, 민족적인 메시야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고난의 메시야, 영적인 메시야로 오셨습니다. 이 때문에 종교지도자들인 건축자들에 의해서 쓸모없다고 버림을 당하셨습니다. 그들로 인해 하나님의 구속 역사는 실패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실패하지만 하나님은 결코 실패하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인간들의 악을 선으로 바꾸사 친히 구속 역사를 이루어나가셨습니다. 하나님은 종교지도자들이 버린 돌을 주어다가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게 하셨습니다. 옛날 유대에서는 모퉁이의 머릿돌을 기초로 기둥을 세우고 집을 지었으며 그 머릿돌에 건축자의 이름을 새겼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모퉁이의 머릿돌은 건물의 기초석으로 가장 중요한 돌입니다.
예수님은 구원 역사의 초석이 되십니다. 또한 예수님은 우리 개개인의 구원의 반석이 되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의지할 때 구원을 받게 되지만 그렇지 않고 예수님을 대적할 때 깨어집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사람을 구원코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좌절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자들은 크게 잘못된 것입니다. 장차 예수님께서 심판주로 오셔서 심판하시면 예수님을 대적하는 자들은 가루가 되어 박살이 나고 맙니다. 예수님은 구원의 돌인 동시에 심판의 돌이 되십니다. 이 말씀을 듣고 종교지도자들은 이 비유가 바로 자기들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알고 잡고자 하였으나 백성들이 무서워 할 수 없었습니다(45,46).
하나님은 복음을 믿은 우리가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열매는 의로움과 공평입니다. 무엇보다 믿음의 열매, 복음의 열매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아름다운 캠퍼스 포도원을 주시고 열매를 맺을 수 있는 모든 환경을 만들어주셨습니다.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열심히 일하여 열매를 많이 맺는 것입니다. 우리가 열매를 많이 맺어 하나님께 드림으로 하나님과 바른 관계성을 유지하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겸손하게 받은 바 축복을 잘 감당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일생 은혜와 축복을 누리는 복된 인생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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