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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2004년 사도행전 제 6 강(6:8-7:60) / 첫 순교자 스데반 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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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섬김이
댓글 0건 조회 3,175회 작성일 04-11-27 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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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사도행전 6 강 348,400
말씀 / 사도행전 6:8-7:60
요절 / 사도행전 7:59

첫 순교자 스데반 집사
“저희가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가로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우리는 지난 주 가서 성전에 서서 이 생명의 말씀을 다 백성에게 말하라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에 순종하여 가서 캠퍼스에 서서 이 생명의 말씀을 다 학생들에게 말하기를 힘써야 합니다. 사도들은 채찍에 맞아 등에서는 피가 흘렀지만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말씀 전하는 것과 기도하는 것에 전무했습니다. 사도들의 삶과 마찬가지로 집사들도 핍박을 받으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했습니다.

오늘은 집사 중에서 두각을 나타냈던 스데반이 율법과 성전에 대한 고소를 받았을 때 그에 대한 변증 메시지를 증거한 내용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명쾌하게 증거했습니다. 그는 초대 교회 최초의 순교자가 되었습니다. 스데반의 순교를 기점으로 엄청난 박해가 시작되었지만 복음은 더 힘있게 퍼져나갔습니다. 우리가 이 시간 스데반의 순교 신앙을 배우고 본받기를 기도합니다. 순교적인 자세로 복음을 증거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구속 역사에 한 알의 썩는 밀알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믿음과 성령으로 충만한 스데반(6:8-15). 스데반은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듣는 사람으로서 일곱 집사에 선출된 사람입니다. 그는 예수님이 자기의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을 믿었습니다. 그의 죄는 사함을 받았고 하나님의 나라와 영원한 생명을 받았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습니다. 성령은 하나님이십니다. 성령은 믿는 자들이 하나님을 위해서 위대한 일을 하도록 지혜와 능력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스데반은 초인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위해서 자신의 인생을 드렸고 성령의 인도하심에 철저히 순종했습니다. 성령께서는 그를 통해서 자유롭게 역사하실 수 있었습니다. 그는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큰 기사와 표적을 민간에 행하였습니다. 그런데 외국의 회당에서 온 어떤 자들이 일어나 스데반으로 더불어 변론하였지만 그가 지혜와 성령으로 말함을 저희가 능히 당치 못했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사람들을 가르쳐 거짓 고소를 하게 했습니다. 그 고소 내용은 스데반이 성전과 율법을 거스려 말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즉 그의 말에 “이 나사렛 예수가 이곳을 헐고 또 모세가 우리에게 전하여 준 규례를 고치겠다” 함을 들었노라고 했습니다. 스데반이 예수님을 증거하는데 그 예수님이 성전을 헐고 율법을 고치는 이단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이단으로 몰아버리면 스데반과 기독교인들은 다 이단으로 몰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공회 중에 앉은 사람들이 다 스데반을 주목하여 보니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았습니다.

성전과 율법은 유대인들이 가장 자랑스럽게 여기고 그들의 정체성이 결집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그들의 영적인 문제를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건물로서의 성전은 보았지만 성전의 하나님은 보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종교적인 의식은 행했지만 율법을 주신 하나님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실제적인 무신론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스데반을 인간적인 차원에서 고소했습니다. 그러나 스데반은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그는 사람들과 논쟁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증거했습니다. 우리는 그의 메시지에서 하나님을 믿는 그의 믿음을 배울 수 있습니다.

둘째,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아브라함의 믿음(7:1-8).
7장 2,3절을 보십시오. “스데반이 가로되 여러분 부형들이여 들으소서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하란에 있기 전 메소보다미아에 있을 때에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 가라사대 네 고향과 친척을 떠나 내가 네게 보일 땅으로 가라 하시니” 스데반은 이스라엘 민족의 뿌리인 아브라함으로부터 역사의 뿌리를 훑어가면서 말하기 시작합니다. 영광의 하나님께서는 메소보다미아에 있던 아브라함을 부르셔서 네 고향과 친척을 떠나 내게 네게 보일 땅으로 가라 하셨습니다. 메소보다미아는 우상 숭배를 하던 땅이었습니다. 그도 거기서 우상 만드는 일에 종사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75세가 되도록 자식 하나 없는 아브라함을 부르셨습니다. 그는 특별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평범하다 못해 소망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런 그를 부르셨다는 것은 그 자체가 은혜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모든 것을 떠나 새 삶을 살도록 절대적인 명령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만을 믿고 그의 인생과 장래를 하나님께 드리라는 요구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손에 아무 것도 쥐어주지 아니하셨습니다. 가나안 땅을 약속으로 주셨지만 발 붙일 만큼도 유업을 주지 아니하시고 다만 이 땅을 아직 자식도 없는 저와 저의 씨에게 소유로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또 그 후손들이 사백 년 동안을 다른 땅에서 나그네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오직 그에게 약속의 말씀만 주셨습니다. 그것은 위대한 약속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통해서 하나님을 경배하는 나라를 세우기를 원하셨습니다.

8a절을 보십시오. “할례의 언약을 아브라함에게 주셨더니” 할례는 의식만이 아닙니다. 그것은 깊은 영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그것은 거룩한 백성, 제사장 나라를 일으키는데 방해가 되는 인간적인 욕망들을 짤라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삭을 위해서 이스마엘을 보내라는 뜻입니다. 아브라함이 마음의 할례를 행했을 때 하나님의 위대한 목적을 성취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축복하사 복의 근원이 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아들 이삭을 주셨습니다. 이삭은 야곱을 낳고 그는 이스라엘 열 두 조상을 낳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조상 아브라함에 비해서 매우 교만했습니다. 그들은 아브라함의 겸손과 순종을 배워야합니다. 정말 겸손한 사람만이, 자신의 비천함을 아는 사람만이 은혜를 감당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설 때 어느 누구도 자기를 내세울 수 없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부족함이나 의가 아니라 나를 부르신 하나님의 목적을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대로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서 믿음으로 살아야만 합니다.

셋째, 하나님의 선하신 주권을 따라 산 요셉의 믿음(9-16).
스데반은 열 두 조상들이 요셉을 시기하여 애굽에 판 죄악을 고발하였습니다(9). 시기심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보지 않고 상대적으로 남과 비교하는 것입니다. 시기심은 남이 잘 되는 것을 보지 못하고 부러워하고 미워하고 증오하고 나중에는 살인으로 발전하게 됩니다. 상대방이 자기 밑에 있으면 시기를 하지 않지만 자기 위에 있을 때 시기합니다. 시기심의 중심에는 자기가 있습니다. 자기 영광. 자기 인정, 자기 주도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열 두 조상들의 죄악은 지금도 이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대제사장은 예수님을 시기하여 십자가에 못 박도록 빌라도에게 넘겨주었습니다. 또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이 열심히 복음을 전파하여 놀라운 부흥의 역사가 일어나자 사두개인들이 집전하는 예배는 파리를 날리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다시 사도들을 시기하였습니다(행5:17). 그래서 사도들을 잡아다가 옥에 가두고 핍박하였습니다. 지금 스데반을 심문하고자 모여 있는 사람들이 바로 그들이었습니다. 스데반은 과거의 문제를 통해서 현재를 조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셉은 애굽에 노예로 팔려갔습니다. 그는 아버지 집에서 왕자처럼 살다가 외국에서 노예로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는 형제들의 배신으로 인한 고통을 극복해야만 했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사랑을 받고자 하는 응석받이의 정신을 극복해야 했습니다. 그는 사회의 밑바닥에서 노예로 살면서 일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그는 이런 투쟁 가운데 거짓 고소를 당했습니다. 그러나 감옥에서 자기가 도와야만 하는 사람들을 열심히 섬기면서 마음의 고통을 잊어버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와 함께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환란 속에서 구원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요셉에게 지혜를 주셨고 바로의 마음을 얻어 총리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 때에 애굽과 가나안 온 땅에 흉년이 들어 큰 환난이 있을 새 이스라엘 조상들이 양식이 없었습니다. 야곱이 애굽에 곡식 있다는 말을 듣고 먼저 그 아들들을 보내고 나중에 요셉이 형제들에게 알게 되어 일흔 다섯 사람을 청했습니다. 요셉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사람들의 모든 악을 이기고 이루어졌습니다. 요셉의 믿음은 선으로 악을 이겼습니다.

넷째, 예수님과 같은 목자 모세의 믿음(17-38).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때가 차기 까지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번성하여 많아지게 하셨습니다.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임금이 애굽 왕위에 오르매 그가 궤계를 써서 유대 조상들을 괴롭게 하여 그 어린아이들을 내어 버려 살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 때에 모세가 태어났습니다. 모세는 당시 남자가 자랄 수 없는 환경에서 하나님의 특별한 뜻 가운데 태어났습니다. 모세는 그 부친의 집에서 석 달을 길리우고 버리움을 당했습니다. 그런데 바로의 딸이 가져다가 자기 아들로 기르매 모세가 애굽 사람의 학술을 다 배워 그 말과 행사가 능했습니다. 그는 궁중에서 지도자 훈련을 받았습니다. 최고의 지식과 능력을 겸비하게 되었습니다.

모세의 나이 사십이 되매 그 형제 이스라엘 자손을 돌아볼 생각을 했습니다. 그는 원통한 일 당하는 형제를 보고 보호하여 애굽 사람을 쳐 죽였습니다. 모세의 생각에는 그 형제들이 하나님께서 자기의 손을 빌어 구원하여 주시는 것을 깨달으리라고 생각하였으나 저희가 깨닫지 못했습니다. 이튿날 이스라엘 사람이 싸울 때에 모세가 와서 화목시키려 하였지만 동무를 해하려는 사람이 누가 너를 관원과 재판장으로 우리 위에 세웠느냐 네가 어제 애굽 사람을 죽임과 같이 또 나를 죽이려느냐고 하였습니다. 이 말을 듣고 모세는 도주하여 미디안 땅에서 나그네로 40년을 지내야 했습니다. 모세의 인간적인 열심이나 뜻이 하나님의 일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그는 자기 열심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려다가 실패하고 실패감과 배신감으로 고통해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십 년이 차매 시내 산 광야 가시나무떨기 불꽃 가운데서 그를 부르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사십 년 동안 광야에서 겸손훈련, 목자 훈련, 자기가 깨지는 훈련을 받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40년 동안 애굽의 종살이 하는 백성들과 동일시하기 위해서 훈련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는 대제사장으로서 우리의 모든 연약함과 시험을 당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로 하여금 40년 간 광야를 미리 답사를 시키시고 그 백성을 끌고 나와서 적응할 수 있도록 훈련하셨습니다. 하나님의 훈련은 하나도 헛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부르시고 나서 “네 발의 신을 벗으라 너 섰는 곳은 거룩한 땅이니라.”고 하셨습니다. 그가 운명적으로 생각하던 그 땅이 거룩한 땅이요 사명의 땅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은 땅이 거룩한 땅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백성들을 향한 목자의 심정을 불일듯이 일어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제 모세를 애굽에서 괴로움을 받고 탄식하는 백성들을 구원하는 일에 보내십니다. 저희 말이 “누가 너를 관원과 재판장으로 세웠느냐 하며 거절하던 그 모세를 하나님은 가시나무떨기 가운데서 보이던 천사의 손을 의탁하여 관원과 속량하는 자로 보내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유대인들이 왕이요 구원자로 거절하던 예수님을 하나님께서는 구원자요 왕으로 세우셨습니다.

모세는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사십 년간 기사와 표적을 행하였습니다. 그는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하나님이 너희 형제 가운데서 나와 같은 선지자를 세우리라고 예언했습니다. 그는 메시야를 가리킵니다. 모세가 가리킨 메시야를 이스라엘 백성들은 거부하였습니다. 이는 하나님을 거부한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조상들이 모세에게 복종치 아니하고자 하여 거절하자 그 마음은 다시 애굽으로 향하게 되었습니다. 애굽은 세상을 상징합니다. 그들은 거룩한 백성, 제사장 나라로 부르신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고 세상의 안락함과 쾌락과 부요를 추구하였습니다. 그 결과 몰록의 장막과 신 레판의 별을 받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그들을 바벨론 밖에 옮기셨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주님의 음성을 듣는 대신, 신문과 방송 등 세상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세상을 본받는 일에 열심을 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가 세상의 물량주의, 소비주의, 과시적 현상을 부러워하고 이에 기초해서 신앙생활을 추구하는 가운데 기독교의 참된 생명력인 영성은 메말라 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가는 가운데 예수님의 삶과 정신을 본받아야 합니다. 거룩한 백성, 제사장 나라로 부르신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살아야합니다. 스데반은 그들이 천사의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아니하였다고 지적하였습니다(53).우리가 성경에 대한 지식은 많지만 말씀대로 살고 있는지 돌아보고 매주 한 말씀이라도 순종하고자 힘쓰기를 기도합니다.

다섯째, 창조주 하나님은 성전 건물에 제한받지 아니하십니다(44-50).
여기서 스데반은 성전의 역사에 대해서 말합니다. 광야에 있었을 때 증거 장막이 있었습니다. 증거의 장막은 이동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증거의 장막이 어떠해야 하는지 식양을 모세에게 보여 주시고 그대로 만들게 했습니다. 다윗이 왕 위에 오르고 나서 야곱의 집을 위하여 하나님의 처소를 준비케 하여 달라고 간구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가 피를 많이 흘렸기 때문에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그의 아들 솔로몬을 통해서 성전을 짓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은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아니합니다. 49,50절을 보십시오. “주께서 가라사대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짓겠으며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뇨 이 모든 것이 다 내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냐 함과 같으니라.” 성전은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가두어 둘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성전보다 크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요2:19-21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유대인들이 가로되 이 성전은 사십육 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뇨 하더라.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실 때 성전의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로 찢어졌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믿는 자들이 하나님이 계신 지성소로 나아갈 수 있는 새롭고 산 길이 열렸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성전이 되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서 죄사함을 받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께 간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나서 성령을 보내주셨습니다. 성령은 신자들의 마음에 내주하십니다. 이제 신자들이 성전이요 신자들이 모인 곳에 하나님께서 임재하십니다.

여섯째, 스데반의 순교(51-60).
스데반은 성전에 대해서 말하고 그들의 죄가 무엇인지 지적했습니다. 51-53절을 보십시오.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가 항상 성령을 거스려 너희 조상과 같이 너희도 하는도다 너희 조상들은 선지자 중에 누구를 핍박지 아니하였느냐 의인이 오시리라 예고한 자들을 저희가 죽였고 이제 너희는 그 의인을 잡아 준 자요 살인한 자가 되나니 너희가 천사의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하니라.” 스데반은 그들이 교만하고 완악하여 항상 성령을 거스리고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그들의 귀에 할례를 받지 못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도 깨닫지 못합니다. 그들은 귀한 생명의 말씀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선지자들이 예언한 예수 그리스도를 잡아주고 살인한 자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스데반의 메시지를 듣고 마음이 찔렸습니다. 그들은 애통히 회개해야 마땅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태도는 전혀 달랐습니다.
54절을 보십시오.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저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마음에 찔렸지만 회개하기보다 이를 갈면서 반발했습니다. 그리고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고 하였습니다. 스데반은 위기의 순간에 하나님 우편에 서신 예수님을 바라보고 영광으로 충만했습니다. 그는 승리의 예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는 자기를 맞이하고자 하나님 보좌 우편에 서신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스데반이 하는 말을 듣고 그들은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심으로 달려들었습니다. 이는 마치 악귀들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들은 스데반을 성 밖에 내치고 돌로 쳐서 죽였습니다. 그러나 스데반은 죽어가면서 부르짖었습니다.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가로되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스데반은 그 백성들의 영적인 무지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는 죽음의 권세를 이겼습니다. 그는 미움을 이기고 복수심을 극복했습니다. 그에게는 용서의 은혜만이 충만했습니다. 그는 정말로 원수들이 용서받기를 원했습니다. 그들이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를 소원했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면서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신 것과 같은 내용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님과 같은 마음을 가졌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영으로 충만했습니다. 그의 이 기도는 사울이라는 청년의 딱딱한 마음에 금이 가게 역사했습니다.

이상에서 우리는 스데반의 믿음과 순교 정신을 배웠습니다. 스데반의 믿음은 예수님을 주요 그리스도로 믿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믿음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역사의 하나님 안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그의 믿음은 이론적이 아니라 살아있었습니다. 그는 미움과 죽음의 세력을 이긴 믿음의 승리자였습니다. 우리 나라는 세계에서 유례가 없을 정도로 순교자가 많이 나왔습니다. 일제 시대 때 주기철 목사님은 신사 참배를 거부하다가 옥고를 치뤘습니다. 일본 형사들은 가족들이 보는 가운데 고문을 자행해 주 목사의 항복을 받아내려 했습니다. 공중에 매달린 채 죽도록 매질을 당하는 모습은 어린 막내 아들 주광조에게는 공포 그 이상이었습니다. 소년이 스무번을 세기 전 주 목사는 공중에 매달린 채 기절했습니다. 그리고 옆에 있던 할머니는 정신을 잃고 쓰러졌습니다. 어머니는 두 손을 깍지 끼고 ‘오,주님’을 외쳤습니다. 일본경찰은 고춧가루를 푼 물을 코와 입에 붓는 잔혹한 고문을 자행했고 아버지가 보는 앞에서 어머니를 똑같이 고문했습니다. 이런 공포 속에 대부분 신앙을 저버렸지만 주기철 목사는 광복되기 1년4개월전 6년의 옥고 끝에 순교했습니다. 당시 나이 마흔 여섯이었습니다. 주 목사가 감옥에 있던 6년 동안 오정모 사모는 단 하루도 따뜻한 방에서 잠들지 않았습니다. 10여 차례 경찰에 끌려가 수모를 당했던 사모는 교인들이 주 목사의 시신을 붙들고 통곡할 때 “여러분 지금은 울 때가 아니오. 지금은 기도할 때입니다. 주 목사님은 나약해서, 힘이 모자라서, 무식해서 죽은 것이 아닙니다. 당연히 말해야 할 때 벙어리가 될 수 없어서, 당연히 가야 할 길을 도망치거나 피하고 싶지 않아서, 그리고 당연히 죽어야 할 이 시간에 살아남을 수 없어서 죽었을 뿐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를 지는 자만이 그리스도와 더불어 영광을 나눌 수 있습니다”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음란하고 완악한 이 시대에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증거하고 이 나라가 거룩한 나라요 제사장 나라가 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스데반의 믿음과 순교 정신을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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