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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2004년 사도행전 제 5 강(5:1-6:7) / 이 생명의 말씀을 다 말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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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섬김이
댓글 0건 조회 3,263회 작성일 04-11-27 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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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사도행전 제 5 강                                                               
말씀 / 사도행전 5:1-6:7
요절 / 사도행전 5:20

이 생명의 말씀을 다 말하라
“가서 성전에 서서 이 생명의 말씀을 다 백성에게 말하라 하매”

  오늘 말씀은 교회에 불어닥친 내적인 문제와 외적인 핍박이 무엇인가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초대 교회가 이 내적인 문제와 핍박을 잘 극복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놀랍게 축복하셨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할 때 문제는 언제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사도들이 어떻게 문제에 대처했는지 배우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아나니아 부부를 잘라내신 하나님(5:1-16).

  초대 교회는 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제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 것이라 하는 이가 없었습니다. 또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저희가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주었습니다. 그 가운데 바나바는 레위인이었지만 밭을 팔아 그 값을 사도들의 발 앞에 두었습니다. 이로 인해 바나바가 성도들 가운데서 크게 인정을 받고 칭찬을 받았습니다. 그가 인정을 받게 된 것은 그의 인격과 삶이 뒷받침이 되어 희생적으로 헌신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그 아내 삽비라로 더불어 소유를 팔았습니다. 그들은 다 드리는 분위기 속에서 체면을 살리고 싶었습니다. 또한 바나바의 명성에 자극을 받았습니다. 그에 대한 경쟁심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떠오르는 교회 공동체에서 영적인 명성을 얻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자기들의 전 재산을 팔아 헌납하기로 결정하고 공포했습니다. 그런데 전 재산을 판 돈을 보니 어마어마했습니다. 이 돈을 하나님께 다 드리고 나면 자신들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장래 염려가 들어왔습니다. 아무래도 다 바치기에는 장래가 너무 불안했습니다. 그래서 두 사람은 모의를 하였습니다. 가정 교회에서 삽비라사모님은 하나님 편에서 남편을 동역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자신의 불신으로 인하여 남편을 제대로 돕지 못하고 전 재산을 바치는 체 하면서 일부를 떼어 정기적금을 들었습니다. 이 정도만 드려도 바나바의 재산에 몇 배가 되기 때문에 사람들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다음 날 시치미를 떼고 재산을 판 값의 얼마를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었습니다. 아나니아는 여호와의 은총이란 뜻이고 삽비라는 아름답다는 뜻입니다. 이들은 이름에 걸맞게 아름다운 신앙인이 되어야했습니다. 그런데 허영심과  경쟁심으로 자신의 양심을 속이고 하나님을 속이는 죄를 범했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의 눈을 속일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3,4절을 보십시오. “베드로가 가로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단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임의로 할 수가 없더냐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 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 그들이 사람들의 눈은 속일 수 있을지 모르지만 자기 자신과 하나님은 속일 수 없었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성령의 계시로 아나니아의 마음 속에 사단이 가득한 것을 보았습니다. 그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춘 것을 알았습니다. 얼마를 감추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것을 횡령했다는 말씀입니다. 감추었다는 단어는 여호수아 7:1절“ 아간이 바친 물건을 취하였음이라”와 같은 의미입니다. 이 말씀은 가나안 정복전쟁 당시 아간이 저지른 죄악과 아나니아 부부가 저지른 죄악이 동일한 것으로 물욕에 눈이 어두워 공동체에 악행을 저질렀다는 것입니다. 아간의 범죄로 이스라엘은 아이 성에서 대패했습니다. 이처럼 어린 싹과 같은 초대교회가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죄악으로 인해 위기에 처하게 되었음을 암시해 주고 있습니다. 사단은 이 두 사람의 허영심과 탐욕을 꼬투리로 교회 내부에 침투하여 서서히 망가뜨리고자 악한 궤계를 쓰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복음서에서 바리새인의 누룩 곧 외식을 주의하라고 하셨습니다. 베드로는 목자로서 이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가를 깨닫고 강하게 책망했습니다.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임의로 할 수가 없더냐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 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

  5,6절을 보십시오. “아나니아가 이 말을 듣고 엎드러져 혼이 떠나니 이일을 듣는 사람이 다 크게 두려워하더라. 젊은 사람들이 일어나 시신을 싸서 메고 나가 장사하니라.” 하나님께서는 왜 이렇게 엄하게 이 문제를 다루셨을까요? 돈이 문제가 아니라 위선이 문제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탐욕과 위선이 아나니아 개인의 문제라기보다는 교회에 치명적인 독이 될 수 있음을 아셨기 때문에 이를 제거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돈이 없어서 그에게 돈을 요구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가 부자가 되기까지 하나님께서 많은 은총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아나니아는 하나님께 자신의 재산을 바치고 나서 손해의식과 불신에 빠져서 하나님을 속이고 사람을 속이고자 하였습니다. 악인의 제사는 여호와께서 미워하십니다(잠15:8). 하나님께서는 그가 드리는 물질을 기쁘게 받으실 수 없었습니다.

  세 시간쯤 지나 그 아내가 그 생긴 일을 알지 못하고 들어왔습니다. 베드로가 물었습니다. “그 땅 판 값이 이것뿐이냐 내게 말하라.” 그러자 삽비라 사모님은 “예 이뿐이에요”라고 이뻐 보이게 대답했습니다. 9절을 보십시오.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어찌 함께 꾀하여 주의 영을 시험하려 하느냐 보라 네 남편을 장사하고 오는 사람들의 발이 문 앞에 이르렀으니 또 너를 메어 내가리라 한 대” 이 말씀이 끝나기가 무섭게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여 그 자리에서 즉사하고 말았습니다. 이 사건으로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을 더욱 두려워하게 되었습니다(11).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너무 하신다 할 정도로 성령을 속인 죄를 분명하게 다루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아니니아아 삽비라의 죄는 성령의 역사를 훼방하는 무서운 사단의 행위였습니다. 성령의 불길이 한창 타 오를 때 찬물을 끼얹는 행위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의 죄를 용납하지 않으시고 즉사하게 하사 하나님의 엄위하심을 드러내셨습니다. 하나님은 그가 거하시는 교회에 사단의 역사를 허용하지 않으셨습니다. 베드로는 교회의 감독자로서 내부에 파고든 무서운 사단의 역사를 성령의 도우심으로 분별하고 분명하게 책망했습니다. 그는 죄와 타협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역사를 지켰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단을 대적해야 합니다.

  다행스럽게도 이 사건은 기독교 역사에서 유일한 것이었습니다. 만약 성령께서 교회에 들어온 모든 죄인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으신다면 한 사람도 남아있지 못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사건을 통해서 교회가 어떠해야 하는가 분명히 보여주셨습니다. 교회 공동체는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장소입니다. 우리가 이중적인 생활을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고 올바른 신앙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교회는 또한 진리가 거하는 장소입니다. 사도 바울은 교회에 대해 묘사하기를 “이 집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이니라(딤전3:15b)." 그러므로 크리스챤들은 그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교회는 성경 공부에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소감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나의 삶 가운데 어떻게 역사하셨으며 내가 배운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를 나누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사람의 인정을 구하며 자기를 드러내는 일에 몰두한다면 회개해야 합니다. 회개할 때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기시고 우리의 인격을 변화시키십니다. 우리가 교회를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거룩한 곳으로 인식하도록 도우시기를 기도합니다.

  사도들이 내부의 문제를 깨끗이 청소하자 어떤 역사가 일어났습니까? 12-16절을 보십시오. 사도들을 통해서 놀라운 이적이 일어났습니다. 심지어 베드로의 그림자만 덮여도 병든 사람이 낫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교회는 백성들에게 칭송을 받고 세상과 구별되었습니다. 오늘날은 신자들이 세속화되어 신자와 불신자가 구별이 되지 않습니다. 그로인해서 교회의 영향력도 상실되었습니다. 도리어 세상의 욕을 먹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가 이런 시대에 더욱 진실되게 사랑하고 거룩하게 삶으로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사람들에게 칭송을 들어야 하겠습니다.

둘째, 이 생명의 말씀을 다 말하라(5:17-42).

  사도들을 통해서 허다한 사람들이 말씀을 듣고 병 고침을 받는 역사가 일어나자 대제사장과 사두개인의 당파가 다 마음에 시기가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일어나서 사도들을 잡아다가 옥에 가두었습니다. 성령의 역사가 강력하게 일어나자 이를 방해하는 사단의 역사도 강하였습니다. 이는 영적인 싸움이 어떠한가를 말해 줍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사람이 막을 수 없습니다. 주의 사자가 밤에 옥문을 열고 사도들을 끌어냈습니다. 분명히 옥문을 지키는 간수들이 있었지만 그들은 잠시 동안 눈이 멀고 귀가 막혀서 사도들이 나가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주의 사자는 사도들을 옥에서 끌어낸 다음에 무슨 방향을 주었습니까? 빨리 가서 숨으라고 했습니까? 다시는 성전에 얼씬거리지도 말라고 했습니까? 아닙니다.

  20절을 보십시오. “가서 성전에 서서 이 생명의 말씀을 다 백성에게 말하라 하매”  주의 사자는 그들을 잡아 죽이려고 하는 원수들의 소굴로 들어가서 말씀을 전하라고 하십니다. 핍박이 심한 성전에 가서 말씀을 전하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핍박을 통해서 제자들을 강하게 훈련시키고자 하십니다. 딤후4:1,2절은 말씀합니다. “하나님 앞과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의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하나님의 역사는 말씀 전파를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고전 1:21절에는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고 하였습니다. 또 로마서 10:17절에는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는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쉬임 없이 말씀을 가르치심으로 구원역사를 이루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생명의 말씀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수많은 지식의 홍수 속에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참 생명을 주는 지식은 거의 없습니다. 세상 지식은 오히려 우리를 복잡하게 하고 우리를 번뇌케 하고 근심케 하고 교만케 하고 두렵게 합니다. 또 어떤 지식은 우리의 영혼을 파멸시킵니다. 반면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참 생명을 줍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영혼을 살찌우고 참 만족과 기쁨을 줍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새 힘을 공급해 주어 어떤 역경 가운데서도 승리케 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없을 때 사람들은 노아시대와 같이 육신의 감정대로 살게 되고, 사사시대와 같이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동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없을 때 인간은 자연히 육체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있을 때 우리가 죄인임을 깨닫게 되고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얻을 수 있습니다. 인생의 의미와 목적과 사명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무엇이 옳고 그른가 하는 절대적인 가치관을 확립할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내면이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러므로 말씀 전파의 사명은 시급하고도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전파하지 않으면 사람들은 영적 무지 가운데서 그대로 죽어가게 됩니다. 하나님은 안타까운 심정으로 우리에게 명하십니다. “이 생명의 말씀을 다 백성에게 말하라” 사도들은 주의 사자의 방향에 순종하여 새벽에 성전에 들어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쳤습니다. 제자들은 목숨을 걸고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들은 성령의 인도하심에 절대적으로 순종했습니다. 죽으면 죽으리라는 자세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대제사장들은 날이 밝자 공회와 이스라엘 족속의 원로들을 다 모으고 재판을 하기 위해서 사도들을 옥에서 끌어내 오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관속들이 가서 사도들을 옥에서 끌어내고자 했지만 사도들이 없었습니다. 더욱 가관인 것은 그들이 보니 옥은 든든하게 잠기고 지킨 사람들이 문에 섰으되 문을 열고 본즉 그 안에는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22,23). 그들은 참으로 황당한 일을 당한 것입니다. 성전 맡은 자와 제사장들이 이 말을 듣고 의혹하여 이 일이 어찌 될까 하며 근심하였습니다. 그런데 성전에서 사람이 와서 보고를 했습니다. “보소서 옥에 가두었던 사람들이 성전에 서서 백성을 가르치더이다” 성전 맡은 자가 관속들과 같이 가서 저희를 잡아왔으나 강제로 못함은 백성들이 돌로 칠까 두려워함이었습니다.
 
  대제사장은 사도들을 공회 앞에 세우고 심문을 했습니다. “우리가 이 이름으로 사람을 가르치지 말라고 엄금하였으되 너희가 너희 교를 예루살렘에 가득하게 하니 이 사람의 피를 우리에게로 돌리고자 함이로다(28).” 그들은 사도들이 자기들의 명령을 지키지 않는다고 화를 냈습니다. 그리고 자기들이 예수님을 죽인 죄를 회개하기 보다는 이 사람의 피를 자기들에게 돌리고자 한다고 원망을 했습니다. 그들은 영적인 무지 가운데 있었습니다. 아직도 자신들이 저지른 죄악이 얼마나 큰가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도리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도들을 핍박하고 복음 진리를 전하지 못하도록 금하고자 혈안이 되었습니다. 그들의 위협에 대해서 베드로는 무엇이라고 대답했습니까?

  29절을 보십시오. “베드로와 사도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사람보다 하나님을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 베드로와 사도들은 대제사장들과 공회와 이스라엘 장로들이 권위로 위협하는 상황에서 믿음을 분명히 밝혔습니다.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들은 하나님의 임재를 깊이 누리고 있었습니다. 또한 그들이 진리 편에 서 있기 때문에 담대했습니다. 베드로는 그들을 양으로 생각하고 오히려 회개의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30-32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를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살리시고 이스라엘로 회개케 하사 죄 사함을 얻게 하시려고 그를 오른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를 삼으셨느니라 우리는 이 일에 증인이요 하나님이 자기를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성령도 그러하니라 하더라.” 베드로는 심문을 받으면서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겁 없이 그들에게 회개의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그들은 듣고 크게 노하여 사도들을 없이하고자 했습니다. 참으로 분위기는 갈수록 험악해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때 바리새인 가말리엘이 중재하여 사도들은 위기를 모면하게 되었습니다. 가말리엘은 모든 백성에게 존경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는 공회원들에게 “이 사람들을 상관 말고 버려 두라 이 사상과 소행이 사람에게로서 났으면 무너질 것이요 만일 하나님께로서 났으면 너희가 저희를 무너뜨릴 수 없겠고 도리어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까 하노라”고 하며 감정에 휘말리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객관적으로 사건을 보도록 도왔습니다. 이에 저희가 그 말을 옳게 여겨 사도들을 불러들여 채찍질하며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금하고 놓아 주었습니다. 채찍에 맞으며 애매히 고난을 받을 때 제자들의 태도가 어떠하였습니까? 41절을 보십시오.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 사도들은 핍박을 당연하게 생각할뿐 아니라 핍박이 그들의 사도됨을 증명하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마 5:11,12).” 사도 바울은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딤후 3:12).”고 했습니다. 박해에는 세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외적인 박해와 내적인 박해와 무박해입니다. 그런데 가장 무서운 박해는 무박해입니다. 이는 교회가 맛을 잃어 버려 박해를 받을 가치조차 없다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신앙이 세속화되는 것을 경계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셨을 때 열심을 품고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초대 교회 성도들은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쉬지 아니하니”했습니다. 이를 통해서 초대 교회가 얼마나 성령이 충만하고 생명력이 넘쳤는지 알 수 있습니다.

셋째, 말씀과 기도에 전무하는 사도들(6:1-7)

  제자들이 내적 문제를 깨끗하게 해결하고 외적인 핍박에 대해서 담대하게 대처했을 때 제자가 더 많아졌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구제하는 일이 더 많아지게 되었습니다. 제자들은 구제하는 일만으로도 일손이 모자랐습니다. 그러자 여기저기서 불평이 터져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그 불평이 무엇입니까? 헬라파 유대인들이 자기의 과부들이 그 매일 구제에 빠지므로 히브리파 사람을 원망했습니다. 구제도 자기가 아는 범위 내에서 하게 됩니다. 그런데 헬라파 유대인들은 외국에서 살다 온 사람들이기 때문에 제자들이 잘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구제에서 제외되자 헬라파 기독교인들과 히브리파 기독교인들 사이에 원망이 싹트게 되었습니다. 역사가 커질 때 이를 잘 감당하지 못하면 문제가 생기게 됩니다. 원망과 불평은 작지만 누룩과 같이 공동체 전체에 퍼지기 쉽습니다. 사도들은 그들의 불평을 권위로 누르기보다 주의 깊게 들었습니다. 그리고 더욱 열심히 구제를 하기보다 근본적인 방향 전환을 꾀하였습니다. 2-4절을 보십시오. "열두 사도가 모든 제자를 불러 이르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공궤를 일삼는 것이 마땅치 아니하니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듣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저희에게 맡기고 우리는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을 전무하리라 하니" 사도들은 역사의 규모가 커지자 집사 제도를 만들어 권한을 위임하고자 했습니다. 동역자를 얻어서 함께 일하고자 했습니다. 사도들의 제안을 듣고 온 무리가 기뻐하여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 스데반과 또 빌립과 브로고로와 니가노르와 디몬과 바메나와 유대교에 입교한 안디옥 사람 니골라를 택하여 사도들 앞에 세우니 사도들이 기도하고 그들에게 안수하였습니다(5,6). 사도 베드로는 고아원 원장이 되어 더욱 충성하지 아니하고 말씀과 기도에 전무하였습니다. 그랬을 때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였습니다.

  사도들은 자신들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잘 알았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이 감당할 수 없는 일은 집사를 세워 맡김으로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건강하게 세웠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성령을 충만히 허락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우리는 올 한해가 다가기 전에 매주 150팀 일대일로 생명의 말씀을 다 전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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