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2004년 사도행전 제 4 강(4:1-37) / 유일한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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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사도행전 제 4강 383
말씀 / 사도행전 4:1-37
요절 / 사도행전 4:12
유일한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우리는 지난 주 가을 수양회를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이방의 빛으로 땅 끝까지 이르고자 하는 방향을 잡게 되었습니다. 오늘 말씀은 예루살렘 교회에 일어난 핍박에 대한 내용입니다. 종교 지도자들은 사도들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부활의 도 전함을 싫어하여 이를 금지시키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할 수 없었습니다. 대신에 사도들은 믿음이 더 강해지고 메시지는 더욱 분명하고 절대적이 되었습니다. 핍박이 일어날 때 성령님은 더욱 강력하게 역사하셨습니다. 그래서 핍박의 결과 복음은 들판에 불이 번지듯이 급격하게 전파되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초대 교회 성도들의 복음 신앙과 절대적인 자세를 배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남자의 수가 약 오천이나 되더라(1-4).
베드로와 요한이 병든 자를 고치고 예수님의 이름 권세로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한참 가르치고 있을 때였습니다. 제사장과 성전 맡은 자와 사두개인들이 적의에 찬 마음을 가지고 급작하게 들이닥쳤습니다. 그들은 사도들이 백성을 가르침과 예수를 들어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는 도 전함을 싫어했습니다. 제자들은 그들이 부여한 자격증도 없었고, 돈도 없었고, 교육도 받지 못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예루살렘 사람들이 아니라 갈릴리 촌놈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성전에서 백성들을 가르쳤습니다. 그들의 말은 영적인 능력과 권세가 있었습니다. 베드로의 메시지는 성경 전체를 요약하며 그리스도가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서 고난을 받고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셨다는 내용입니다. 그는 백성들에게 회개하도록 도전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믿고 성령을 받도록 촉구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목마른 사슴이 광야에서 샘물을 발견한 것처럼 말씀을 사모했습니다. 그들의 영혼은 죽었던 데서 다시 살아났고 기쁨으로 충만했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은 제자들이 성전에서 말씀을 가르치는 것을 보고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성전에서 모든 예배 의식을 집행하는 성직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산헤드린에 속한 권력자들이기도 했습니다. 성전 맡은 자는 수비대장으로서 대제사장 다음가는 지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제자들로 인해서 자신들의 권한이 침해를 당하였다고 생각했습니다. 또한 사두개인들은 레위 지파 출신의 제사장들을 포함하여 부유하고 지위가 높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초자연적인 것을 부인하는 합리주의자들이었으며, 세속적이고 현세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부활이나 천사나 영을 부인했습니다(23:8). 제자들이 전하는 말씀은 그들의 사상과 충돌했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은 평신도들이 성경을 가르칠 때 마음이 어지러웠습니다. 사두개인들은 자신들만이 성경을 가르칠 특권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베드로와 요한과 같은 평범한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권세 있고 효과적으로 가르치는 것을 보고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신비한 매력이 산산조각 나고 말았다고 생각했습니다. 백성들은 불신으로 가득 찬 종교 전문가들보다 그리스도를 아는 사도들이 훨씬 더 성경을 잘 알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요즈음 신문을 보면 동성애자를 성공회 주교로 임명하고, 종교 지도자들이 성경에 나타난 동정녀 탄생과 기적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부인하는 기사를 자주 볼 수 있습니다. 그들로 인해서 사회의 도덕적 타락은 심화되고 있습니다. 한편 우리는 대학생 선교와 평신도 운동을 하면서 학생들이 성경을 가르치고 평신도들이 선교사로 나아가서 열매를 거두고 있습니다. 우리는 신학 지식이 아니라 마음으로부터 체험한 그리스도를 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말씀 운동을 넘치게 축복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사두개인들은 심기가 불편했습니다. 그래서 사도들을 체포하여 날이 이미 저문 고로 이튿날까지 가두었습니다. 율법은 해 진 후에는 공회 소집을 금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사도들을 옥에 가두고 그들은 집에 들어가서 좋아하는 텔레비전 쇼를 보았습니다. 그들은 사도들을 가두었기 때문에 이제 모든 것이 잠잠해 지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크게 실수를 한 것입니다. 4절을 보십시오. “말씀을 들은 사람 중에 믿는 자가 많으니 남자의 수가 약 오천이나 되었더라.” 베드로와 요한이 수갑이 채워져 감옥에 가는 것을 본 수많은 사람들이 마음으로 복음을 믿었습니다. 갑자기 믿는 자의 수가 갑절이나 불어났습니다. 복음이 역사하는 곳에 반대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박해가 복음을 멈추게 할 수 없습니다. 복음은 박해 가운데서도 왕성하게 퍼져나갔습니다.
둘째, 구원은 오직 예수님 안에서만 발견됩니다(5-12).
사도 베드로와 요한은 전에 주차 위반으로라도 벌금을 받은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들은 “정치적인 죄수”로 감옥에서 하루 밤을 보내야 했습니다. 이튿날에 관원과 장로와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에 모였습니다. 대제사장 안나스와 가야바와 요한과 알렉산더와 및 대제사장의 문중이 다 참예하여 사도들을 가운데 세우고 심문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사두개인과 바리새인들은 정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정치적인 사람들에게 오늘의 적이 내일의 친구가 되듯이 그들은 연합해서 사도들을 공격하기 시작했습니다. 본래 대제사장은 종신직인데 당시에는 대제사장이 네 명이나 되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부르심이 아니라 돈과 권력자에 의해서 대제사장이 되었습니다. 그런 그들이 사도들에게 물었습니다. “너희가 무슨 권세와 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7)” 그것은 사도들에게 매우 위협적인 질문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공격할 때도 사용했던 질문을 사도들에게 했습니다. 그들은 분명한 기적을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부인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사도들에게 부여된 권세의 근원을 불신했습니다. 그들은 아마도 사도들을 귀신이 들린 사람들로 매도하고자 했던 것 같습니다. 그 위험은 실제적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도들은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8-10절을 보십시오. “이에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가로되 백성의 관원과 장로들아 만일 병인에게 행한 착한 일에 대하여 이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얻었느냐고 오늘 우리에게 질문하면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누가는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했다고 말했습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영이고 능력과 지혜의 영이십니다. 성령은 우리 마음에 있는 모든 두려움을 몰아내시고 하나님의 사랑과 평강으로 채우십니다. 롬8:15절은 말씀합니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했을 때 매우 용기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그 상황을 극복하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했습니다. 성령은 그에게 심각한 상황을 부드럽게 다룰 수 있는 유우머 감각을 주셨습니다. 종교 지도자들은 사도들을 고소할 조건을 찾고자 했기 때문에 매우 심각한 표정으로 사무적으로 바라보았습니다. 그들의 고소에도 불구하고 사도들에게 할 말이 없었습니다. “만일 병인에게 행한 착한 일에 대하여 이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얻었느냐고 오늘 우리에게 질문하면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베드로는 친절하게 다시 앉은뱅이에게 일어난 일이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능력임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사도들은 예수님을 영화롭게 하기를 원했습니다. 10절을 다시 보십시오. 베드로는 그들이 십자가에 못박고 죽인 나사렛 예수가 이 앉은뱅이를 살렸다고 증거했습니다. 베드로가 행한 것은 인간의 용기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성령의 권능에 의해서 된 것입니다. 재판을 받는 동안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의 종에게 한량없이 부어졌습니다. 그래서 시험을 당할 때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막13;11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이 너희를 끌어다가 넘겨 줄 때에 무슨 말을 할까 미리 염려치 말고 무엇이든지 그 시에 너희에게 주시는 그 말을 하라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요 성령이시니라.”
사도 베드로는 그들의 고소에 응답하는 이상이었습니다. 그는 이 재판을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기회로 삼았습니다. 그는 시편118:22절을 인용했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공관복음에서 포도원 농부의 비유를 통해 이미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11절을 보십시오.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종교 지도자들은 정치 권력과 돈으로 지상에 자신들의 왕국을 건설하기를 원했습니다. 예수님의 순수하고 거룩한 삶이 그들의 부패한 삶을 드러낼 때, 그들은 자기 의를 주장하며 교만하게도 예수님을 사형에 처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버렸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구속 역사에서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무엘로부터 미가 선지자까지 예언의 말씀을 성취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다윗의 자손으로서 영원히 다윗의 집에 왕노릇하십니다. 예수님은 율법과 선지자와 예언을 성취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키셨을 때 그는 왕의 왕이요 주의 주가 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전하신 말씀과 하신 일로 인해서 영광의 면류관을 쓰셨습니다.
베드로는 12절에서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베드로는 앞에서 예수님이 구원자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그는 오직 예수님만이 구원자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한 말은 정확한 것입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구원자이십니다. 베드로는 예수님만이 구원자라는 절대적인 믿음의 확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의심할 것도 없이 이것은 베드로가 성경을 영적으로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전체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에게 초점이 맞추어져있습니다. 그는 인간의 구원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길입니다. 다른 길은 없습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4:6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베드로가 예수님만이 구원자라고 했을 때 그는 종교 지도자들과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도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그들은 죄로 인해서 멸망하고 영원한 정죄에 이르게 됩니다.
베드로가 예수님만이 구원자라고 증거했을 때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선물인 영생과 하나님 나라를 가지고 있다는 개인적인 확신을 나누고 있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사람을 죄에서 구원하고 영생을 주실 수 있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만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만이 사단의 권세와 싸워 이기셨습니다. 예수님만이 죄인들을 위해서 십자가에서 피를 흘려 죽으셨고, 유월절 어린 양이 되신 예수님의 피 만이 세상의 모든 죄를 속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만이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만이 구원하십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진리입니다. 다 같이 12절을 읽겠습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셋째,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께 순종해야 합니다(13-22).
사도들을 심문하던 공회원들은 더 이상 힐난할 말을 잃게 되었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13,14절을 보십시오. “저희가 베드로와 요한이 기탄없이 말함을 보고 그 본래 학문 없는 범인으로 알았다가 이상히 여기며 또 그 전에 예수와 함께 있던 줄도 알고 또 병 나은 사람이 그들과 함께 섰는 것을 보고 힐난할 말이 없는지라.” 베드로와 요한은 랍비들의 학교에서 전문적 교육을 받지 못한 학문 없는 평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의 내용을 남김없이 자유롭고 대담하게 말하였습니다. 사두개인들은 성경의 전문가라고 하는 자기들보다 사도들이 더 내용이 있고 권세있게 말씀을 전하는 것을 보고 감동을 받고 회개하기 보다는 이상히 여겼습니다. 그들은 사도들을 명하여 공회에서 나가라 하고 서로 의논하였습니다.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할꼬 저희로 인하여 유명한 표적 나타난 것이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알려졌으니 우리도 부인할 수 없는지라(16).” 그리고 이것이 민간에 더 퍼지지 못하게 저희를 위협하여 이후에는 이 이름으로 아무 사람에게도 말하지 말게 하자고 결의하였습니다. 그들은 사도들을 불러 엄히 경계했습니다.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 사실 이 말은 상당히 위협적인 표현으로서 최후 통첩을 보낸 것입니다. 그들은 사도들을 죽이고자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이는 앞으로 교회에 불어닥칠 박해의 위협이 어떠할 것인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19, 20절을 보십시오.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가로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그들은 위협적인 종교지도자들을 보지 않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주님께서 승천하시면서 주신 사명을 기억했습니다. 그들은 예루살렘으로부터 땅 끝까지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이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서 생명을 바치고자 결단했습니다. 그들 속에는 자신들이 보고 체험한 바를 말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뜨거움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생명을 바쳐서 하나님께 순종하고자 결심했습니다. 그들이 살아계신 하나님을 보았을 때 종교지도자들의 위협 앞에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관원들도 백성을 인하여 저희를 어떻게 벌할 도리를 찾지 못하고 다시 위협하여 놓아 주었습니다. 우리는 캠퍼스에서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외적인 위협보다는 스스로 믿음이 약하여져서 세속적인 흐름에 쓸려 갈 수 있는 위험이 있습니다. 이러한 때에 우리는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시는 하나님을 믿고 계속해서 전도와 제자 양성을 섬겨야 합니다.
넷째, 기도와 사랑이 충만한 교회(23-37).
관원들은 제자들을 돌려 보내는 길 외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사도들은 석방되자 성도들에게 가서 제사장들과 장로들의 말을 다 보고하며 석방감사기도회를 했습니다. 성도들은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두려움으로 떨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함께 기도하자고 했습니다. 24-26절을 보십시오. “저희가 듣고 일심으로 하나님께 소리를 높여 가로되 대주재여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유를 지은 이시요 또 주의 종 우리 조상 다윗의 입을 의탁하사 성령으로 말씀하시기를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족속들이 허사를 경영하였는고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함께 모여 주와 그 그리스도를 대적하도다 하신 이로소이다.” 그들은 시편 2편을 기억하고 하나님께서 세상과 역사의 주관자가 되심을 확신했습니다. 반역자들의 수고는 헛됩니다. 세상 만민을 구원코자 하는 하나님의 뜻은 성취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왔습니다. 성도들의 복음 신앙은 하나님의 주권에 뿌리를 박고 있습니다.
그들은 이제도 저희의 위협함을 하감하옵시고 또 종들로 하여금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또한 손을 내밀어 병을 낫게 하옵시고 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종 예수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들이 빌기를 다하자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신자들의 기도를 기뻐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모여 있는 곳을 진동시키심으로 기도에 응답하시고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게 했습니다. 우리도 그들처럼 기도해야 합니다.
초대 교회는 말씀 안에서 천국과 같았습니다. 예수님은 주요 그리스도로서 모든 사람의 마음을 다스리고 계셨습니다. 32절을 보십시오. “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제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그들의 영적인 연합은 오직 성령의 역사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성령이 충만했을 때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었습니다. 성령은 하나이지만 그가 각 사람의 마음에 거하셨습니다. 그는 각 사람을 하나님의 사랑과 참된 기쁨과 평화로 충만케 했습니다. 성령의 이 사랑으로 초대 교회는 하나로 연합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아름다운 가정과 같았습니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소유를 함께 나누었습니다. 그들은 공산주의자들이나, 히피들이나, 노숙자들이나, 무책임한 예술가들과 달랐습니다. 그들은 사유 재산을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과 가족들의 필요를 공급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소유를 자기 것으로 주장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저것은 내 것이야”라고 말하는 대신에 “모든 것은 하나님께 속했습니다. 만약 주님께서 필요하시다면 그것을 형제가 취하게 해 주십시오.”라고 말했습니다.
그들의 영적인 연합은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인정하고 또 성령의 역사로 인한 것입니다. 33절을 보십시오.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거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얻어” 사도들은 예수님의 부활과 살아계심과 교회와 세계를 통치하심을 증거했습니다. 그들은 산헤드린 공회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전혀 말하지 말라는 경고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최고 지위에 있는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믿음의 눈으로 살아계신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비록 종교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죽였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셨습니다. 그들은 핍박을 받을수록 믿음이 더욱 강해졌고 자라났습니다. 그들은 위협을 받을수록 더 대담해지고 더 능력있게 변화되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하기 위해서 자신들의 생명을 드릴 준비가 되었습니다. 부활의 메시지는 그들의 생명을 주는 정신과 함께 초대 교회가 증인의 삶을 사는데 대단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33b절을 보십시오. “무리가 큰 은혜를 얻어” 이 은혜는 여러 면이 있지만 예수님의 부활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이 은혜는 죄사함의 은혜를 뜻합니다. 이 은혜는 성령의 내주하심을 뜻합니다. 성령은 그리스도의 영입니다(롬8:11). 성령은 우리 안에 거하시며 살아계신 하나님이십니다. 구약에서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장소는 예루살렘 성전이었습니다. 이제 예수님이 성전이 되십니다. 예수님은 그의 권위를 증명하기 위해서 한 가지 기적을 행하겠다고 하셨습니다.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요2:19).” 그 성전은 예수님의 육체를 가리키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육신을 입으신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시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예수님은 승천하시고 그의 백성들에게 성령을 부어주셨습니다. 이렇게 해서 그는 우리 마음에 살기 위해 오셨습니다. 믿는 각 사람은 성전입니다. 우리가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일 때 그 공동체를 교회라고 부릅니다. 교회는 우리 주 예수님께서 거하시는 장소입니다. 교회는 건물이나 조직이 아닙니다. 교회는 한 마음과 한 뜻으로 주 예수님을 영화롭게 하는 믿는 자들의 공동체입니다.
예수님이 다스리시는 곳에 참된 자유가 있습니다. 그들은 죄로부터 자유케 됨을 발견했습니다. 그들은 죽음의 권세로부터 자유함을 발견했습니다. 성령은 그들을 영적인 사람들로 변화시켰습니다. 전에 세리였던 사람이 희생적인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전에 창기가 거룩한 기도의 어미가 되었습니다. 전에 귀신들렸던 사람이 순종적인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전에 종교 지도자가 하나님의 사랑을 맛보고 양들의 참된 목자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너무나 행복해서 예수님을 위해서 무엇이든지 할 준비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표현할 수 없는 기쁨으로 충만했습니다. 그들이 핍절한 사람을 볼 때 주저 없이 다른 사람을 도울 준비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밭과 집을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저희가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었습니다. 그들은 주는 기쁨을 충만히 누렸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참된 기쁨과 평화가 믿는 사람들 가운데 흘러 넘쳤습니다.
36,37절을 보십시오. 그 중에 구브로에서 난 레위족 인이 있으니 이름은 요셉이라고 하였습니다. 사도들은 그를 일컬어 위로의 아들이라는 뜻으로 바나바라고 불렀습니다. 그는 밭을 팔아 사도들의 발 앞에 두었습니다. 그의 주는 정신은 교회의 리더요 열매맺는 선교사가 되기까지 자라났습니다. 우리는 사도행전에서 바나바의 이름을 여러 번 볼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처음 회심했을 때 제자들 중 아무도 그를 선뜻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바나바는 바울 안에서 역사하는 예수님을 보았고 그를 영접하고 믿음으로 예루살렘 교회에 데려왔습니다(9:26,27). 후에 바나바는 바울을 안디옥 교회의 능력있는 성경 선생으로 세웠습니다(11:26). 우리는 바나바 없이 바울도 없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바나바는 또한 마가의 선한 목자였습니다. 마가는 도시 소년이었고 마미보이였습니다. 그는 첫 번 선교 여행팀에서 도망을 쳤습니다(13:13). 그것은 대단한 실패였습니다. 아무도 마가를 받아들이기를 원치 않았고 특히 바울은 그를 쳐다보기도 싫어했습니다. 그러나 바나바는 비싼 대가를 치루고 마가를 영접했습니다(15:39). 바나바의 영적인 격려를 통해서 마가는 예수님의 위대한 종이요 마가복음의 저자로 성장했습니다. 정말로 바나바는 예수님의 은혜를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은혜로 다른 사람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역사를 위해서 자신을 희생했습니다. 바나나는 그리스도께 대한 헌신과 믿는 동료들을 사랑하기 위해서 자기를 온전히 버렸습니다. 그는 정말로 은혜를 아는 사람이었고 세계 선교를 위해서 헌신한 위대한 하나님의 종이었습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사도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하고, 핍박을 받지만 타협하지 않고 증인의 삶을 산 것을 보았습니다. 우리가 초대 교회의 성도들과 같은 은혜와 열심을 회복하여 주님을 섬기기를 기도합니다.
말씀 / 사도행전 4:1-37
요절 / 사도행전 4:12
유일한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우리는 지난 주 가을 수양회를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이방의 빛으로 땅 끝까지 이르고자 하는 방향을 잡게 되었습니다. 오늘 말씀은 예루살렘 교회에 일어난 핍박에 대한 내용입니다. 종교 지도자들은 사도들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부활의 도 전함을 싫어하여 이를 금지시키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할 수 없었습니다. 대신에 사도들은 믿음이 더 강해지고 메시지는 더욱 분명하고 절대적이 되었습니다. 핍박이 일어날 때 성령님은 더욱 강력하게 역사하셨습니다. 그래서 핍박의 결과 복음은 들판에 불이 번지듯이 급격하게 전파되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초대 교회 성도들의 복음 신앙과 절대적인 자세를 배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남자의 수가 약 오천이나 되더라(1-4).
베드로와 요한이 병든 자를 고치고 예수님의 이름 권세로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한참 가르치고 있을 때였습니다. 제사장과 성전 맡은 자와 사두개인들이 적의에 찬 마음을 가지고 급작하게 들이닥쳤습니다. 그들은 사도들이 백성을 가르침과 예수를 들어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는 도 전함을 싫어했습니다. 제자들은 그들이 부여한 자격증도 없었고, 돈도 없었고, 교육도 받지 못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예루살렘 사람들이 아니라 갈릴리 촌놈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성전에서 백성들을 가르쳤습니다. 그들의 말은 영적인 능력과 권세가 있었습니다. 베드로의 메시지는 성경 전체를 요약하며 그리스도가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서 고난을 받고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셨다는 내용입니다. 그는 백성들에게 회개하도록 도전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믿고 성령을 받도록 촉구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목마른 사슴이 광야에서 샘물을 발견한 것처럼 말씀을 사모했습니다. 그들의 영혼은 죽었던 데서 다시 살아났고 기쁨으로 충만했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은 제자들이 성전에서 말씀을 가르치는 것을 보고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성전에서 모든 예배 의식을 집행하는 성직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산헤드린에 속한 권력자들이기도 했습니다. 성전 맡은 자는 수비대장으로서 대제사장 다음가는 지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제자들로 인해서 자신들의 권한이 침해를 당하였다고 생각했습니다. 또한 사두개인들은 레위 지파 출신의 제사장들을 포함하여 부유하고 지위가 높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초자연적인 것을 부인하는 합리주의자들이었으며, 세속적이고 현세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부활이나 천사나 영을 부인했습니다(23:8). 제자들이 전하는 말씀은 그들의 사상과 충돌했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은 평신도들이 성경을 가르칠 때 마음이 어지러웠습니다. 사두개인들은 자신들만이 성경을 가르칠 특권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베드로와 요한과 같은 평범한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권세 있고 효과적으로 가르치는 것을 보고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신비한 매력이 산산조각 나고 말았다고 생각했습니다. 백성들은 불신으로 가득 찬 종교 전문가들보다 그리스도를 아는 사도들이 훨씬 더 성경을 잘 알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요즈음 신문을 보면 동성애자를 성공회 주교로 임명하고, 종교 지도자들이 성경에 나타난 동정녀 탄생과 기적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부인하는 기사를 자주 볼 수 있습니다. 그들로 인해서 사회의 도덕적 타락은 심화되고 있습니다. 한편 우리는 대학생 선교와 평신도 운동을 하면서 학생들이 성경을 가르치고 평신도들이 선교사로 나아가서 열매를 거두고 있습니다. 우리는 신학 지식이 아니라 마음으로부터 체험한 그리스도를 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말씀 운동을 넘치게 축복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사두개인들은 심기가 불편했습니다. 그래서 사도들을 체포하여 날이 이미 저문 고로 이튿날까지 가두었습니다. 율법은 해 진 후에는 공회 소집을 금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사도들을 옥에 가두고 그들은 집에 들어가서 좋아하는 텔레비전 쇼를 보았습니다. 그들은 사도들을 가두었기 때문에 이제 모든 것이 잠잠해 지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크게 실수를 한 것입니다. 4절을 보십시오. “말씀을 들은 사람 중에 믿는 자가 많으니 남자의 수가 약 오천이나 되었더라.” 베드로와 요한이 수갑이 채워져 감옥에 가는 것을 본 수많은 사람들이 마음으로 복음을 믿었습니다. 갑자기 믿는 자의 수가 갑절이나 불어났습니다. 복음이 역사하는 곳에 반대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박해가 복음을 멈추게 할 수 없습니다. 복음은 박해 가운데서도 왕성하게 퍼져나갔습니다.
둘째, 구원은 오직 예수님 안에서만 발견됩니다(5-12).
사도 베드로와 요한은 전에 주차 위반으로라도 벌금을 받은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들은 “정치적인 죄수”로 감옥에서 하루 밤을 보내야 했습니다. 이튿날에 관원과 장로와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에 모였습니다. 대제사장 안나스와 가야바와 요한과 알렉산더와 및 대제사장의 문중이 다 참예하여 사도들을 가운데 세우고 심문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사두개인과 바리새인들은 정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정치적인 사람들에게 오늘의 적이 내일의 친구가 되듯이 그들은 연합해서 사도들을 공격하기 시작했습니다. 본래 대제사장은 종신직인데 당시에는 대제사장이 네 명이나 되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부르심이 아니라 돈과 권력자에 의해서 대제사장이 되었습니다. 그런 그들이 사도들에게 물었습니다. “너희가 무슨 권세와 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7)” 그것은 사도들에게 매우 위협적인 질문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공격할 때도 사용했던 질문을 사도들에게 했습니다. 그들은 분명한 기적을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부인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사도들에게 부여된 권세의 근원을 불신했습니다. 그들은 아마도 사도들을 귀신이 들린 사람들로 매도하고자 했던 것 같습니다. 그 위험은 실제적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도들은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8-10절을 보십시오. “이에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가로되 백성의 관원과 장로들아 만일 병인에게 행한 착한 일에 대하여 이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얻었느냐고 오늘 우리에게 질문하면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누가는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했다고 말했습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영이고 능력과 지혜의 영이십니다. 성령은 우리 마음에 있는 모든 두려움을 몰아내시고 하나님의 사랑과 평강으로 채우십니다. 롬8:15절은 말씀합니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했을 때 매우 용기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그 상황을 극복하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했습니다. 성령은 그에게 심각한 상황을 부드럽게 다룰 수 있는 유우머 감각을 주셨습니다. 종교 지도자들은 사도들을 고소할 조건을 찾고자 했기 때문에 매우 심각한 표정으로 사무적으로 바라보았습니다. 그들의 고소에도 불구하고 사도들에게 할 말이 없었습니다. “만일 병인에게 행한 착한 일에 대하여 이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얻었느냐고 오늘 우리에게 질문하면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베드로는 친절하게 다시 앉은뱅이에게 일어난 일이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능력임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사도들은 예수님을 영화롭게 하기를 원했습니다. 10절을 다시 보십시오. 베드로는 그들이 십자가에 못박고 죽인 나사렛 예수가 이 앉은뱅이를 살렸다고 증거했습니다. 베드로가 행한 것은 인간의 용기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성령의 권능에 의해서 된 것입니다. 재판을 받는 동안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의 종에게 한량없이 부어졌습니다. 그래서 시험을 당할 때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막13;11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이 너희를 끌어다가 넘겨 줄 때에 무슨 말을 할까 미리 염려치 말고 무엇이든지 그 시에 너희에게 주시는 그 말을 하라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요 성령이시니라.”
사도 베드로는 그들의 고소에 응답하는 이상이었습니다. 그는 이 재판을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기회로 삼았습니다. 그는 시편118:22절을 인용했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공관복음에서 포도원 농부의 비유를 통해 이미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11절을 보십시오.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종교 지도자들은 정치 권력과 돈으로 지상에 자신들의 왕국을 건설하기를 원했습니다. 예수님의 순수하고 거룩한 삶이 그들의 부패한 삶을 드러낼 때, 그들은 자기 의를 주장하며 교만하게도 예수님을 사형에 처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버렸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구속 역사에서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무엘로부터 미가 선지자까지 예언의 말씀을 성취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다윗의 자손으로서 영원히 다윗의 집에 왕노릇하십니다. 예수님은 율법과 선지자와 예언을 성취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키셨을 때 그는 왕의 왕이요 주의 주가 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전하신 말씀과 하신 일로 인해서 영광의 면류관을 쓰셨습니다.
베드로는 12절에서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베드로는 앞에서 예수님이 구원자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그는 오직 예수님만이 구원자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한 말은 정확한 것입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구원자이십니다. 베드로는 예수님만이 구원자라는 절대적인 믿음의 확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의심할 것도 없이 이것은 베드로가 성경을 영적으로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전체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에게 초점이 맞추어져있습니다. 그는 인간의 구원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길입니다. 다른 길은 없습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4:6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베드로가 예수님만이 구원자라고 했을 때 그는 종교 지도자들과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도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그들은 죄로 인해서 멸망하고 영원한 정죄에 이르게 됩니다.
베드로가 예수님만이 구원자라고 증거했을 때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선물인 영생과 하나님 나라를 가지고 있다는 개인적인 확신을 나누고 있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사람을 죄에서 구원하고 영생을 주실 수 있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만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만이 사단의 권세와 싸워 이기셨습니다. 예수님만이 죄인들을 위해서 십자가에서 피를 흘려 죽으셨고, 유월절 어린 양이 되신 예수님의 피 만이 세상의 모든 죄를 속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만이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만이 구원하십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진리입니다. 다 같이 12절을 읽겠습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셋째,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께 순종해야 합니다(13-22).
사도들을 심문하던 공회원들은 더 이상 힐난할 말을 잃게 되었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13,14절을 보십시오. “저희가 베드로와 요한이 기탄없이 말함을 보고 그 본래 학문 없는 범인으로 알았다가 이상히 여기며 또 그 전에 예수와 함께 있던 줄도 알고 또 병 나은 사람이 그들과 함께 섰는 것을 보고 힐난할 말이 없는지라.” 베드로와 요한은 랍비들의 학교에서 전문적 교육을 받지 못한 학문 없는 평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의 내용을 남김없이 자유롭고 대담하게 말하였습니다. 사두개인들은 성경의 전문가라고 하는 자기들보다 사도들이 더 내용이 있고 권세있게 말씀을 전하는 것을 보고 감동을 받고 회개하기 보다는 이상히 여겼습니다. 그들은 사도들을 명하여 공회에서 나가라 하고 서로 의논하였습니다.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할꼬 저희로 인하여 유명한 표적 나타난 것이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알려졌으니 우리도 부인할 수 없는지라(16).” 그리고 이것이 민간에 더 퍼지지 못하게 저희를 위협하여 이후에는 이 이름으로 아무 사람에게도 말하지 말게 하자고 결의하였습니다. 그들은 사도들을 불러 엄히 경계했습니다.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 사실 이 말은 상당히 위협적인 표현으로서 최후 통첩을 보낸 것입니다. 그들은 사도들을 죽이고자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이는 앞으로 교회에 불어닥칠 박해의 위협이 어떠할 것인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19, 20절을 보십시오.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가로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그들은 위협적인 종교지도자들을 보지 않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주님께서 승천하시면서 주신 사명을 기억했습니다. 그들은 예루살렘으로부터 땅 끝까지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이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서 생명을 바치고자 결단했습니다. 그들 속에는 자신들이 보고 체험한 바를 말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뜨거움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생명을 바쳐서 하나님께 순종하고자 결심했습니다. 그들이 살아계신 하나님을 보았을 때 종교지도자들의 위협 앞에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관원들도 백성을 인하여 저희를 어떻게 벌할 도리를 찾지 못하고 다시 위협하여 놓아 주었습니다. 우리는 캠퍼스에서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외적인 위협보다는 스스로 믿음이 약하여져서 세속적인 흐름에 쓸려 갈 수 있는 위험이 있습니다. 이러한 때에 우리는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시는 하나님을 믿고 계속해서 전도와 제자 양성을 섬겨야 합니다.
넷째, 기도와 사랑이 충만한 교회(23-37).
관원들은 제자들을 돌려 보내는 길 외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사도들은 석방되자 성도들에게 가서 제사장들과 장로들의 말을 다 보고하며 석방감사기도회를 했습니다. 성도들은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두려움으로 떨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함께 기도하자고 했습니다. 24-26절을 보십시오. “저희가 듣고 일심으로 하나님께 소리를 높여 가로되 대주재여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유를 지은 이시요 또 주의 종 우리 조상 다윗의 입을 의탁하사 성령으로 말씀하시기를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족속들이 허사를 경영하였는고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함께 모여 주와 그 그리스도를 대적하도다 하신 이로소이다.” 그들은 시편 2편을 기억하고 하나님께서 세상과 역사의 주관자가 되심을 확신했습니다. 반역자들의 수고는 헛됩니다. 세상 만민을 구원코자 하는 하나님의 뜻은 성취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왔습니다. 성도들의 복음 신앙은 하나님의 주권에 뿌리를 박고 있습니다.
그들은 이제도 저희의 위협함을 하감하옵시고 또 종들로 하여금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또한 손을 내밀어 병을 낫게 하옵시고 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종 예수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들이 빌기를 다하자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신자들의 기도를 기뻐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모여 있는 곳을 진동시키심으로 기도에 응답하시고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게 했습니다. 우리도 그들처럼 기도해야 합니다.
초대 교회는 말씀 안에서 천국과 같았습니다. 예수님은 주요 그리스도로서 모든 사람의 마음을 다스리고 계셨습니다. 32절을 보십시오. “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제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그들의 영적인 연합은 오직 성령의 역사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성령이 충만했을 때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었습니다. 성령은 하나이지만 그가 각 사람의 마음에 거하셨습니다. 그는 각 사람을 하나님의 사랑과 참된 기쁨과 평화로 충만케 했습니다. 성령의 이 사랑으로 초대 교회는 하나로 연합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아름다운 가정과 같았습니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소유를 함께 나누었습니다. 그들은 공산주의자들이나, 히피들이나, 노숙자들이나, 무책임한 예술가들과 달랐습니다. 그들은 사유 재산을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과 가족들의 필요를 공급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소유를 자기 것으로 주장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저것은 내 것이야”라고 말하는 대신에 “모든 것은 하나님께 속했습니다. 만약 주님께서 필요하시다면 그것을 형제가 취하게 해 주십시오.”라고 말했습니다.
그들의 영적인 연합은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인정하고 또 성령의 역사로 인한 것입니다. 33절을 보십시오.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거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얻어” 사도들은 예수님의 부활과 살아계심과 교회와 세계를 통치하심을 증거했습니다. 그들은 산헤드린 공회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전혀 말하지 말라는 경고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최고 지위에 있는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믿음의 눈으로 살아계신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비록 종교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죽였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셨습니다. 그들은 핍박을 받을수록 믿음이 더욱 강해졌고 자라났습니다. 그들은 위협을 받을수록 더 대담해지고 더 능력있게 변화되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하기 위해서 자신들의 생명을 드릴 준비가 되었습니다. 부활의 메시지는 그들의 생명을 주는 정신과 함께 초대 교회가 증인의 삶을 사는데 대단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33b절을 보십시오. “무리가 큰 은혜를 얻어” 이 은혜는 여러 면이 있지만 예수님의 부활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이 은혜는 죄사함의 은혜를 뜻합니다. 이 은혜는 성령의 내주하심을 뜻합니다. 성령은 그리스도의 영입니다(롬8:11). 성령은 우리 안에 거하시며 살아계신 하나님이십니다. 구약에서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장소는 예루살렘 성전이었습니다. 이제 예수님이 성전이 되십니다. 예수님은 그의 권위를 증명하기 위해서 한 가지 기적을 행하겠다고 하셨습니다.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요2:19).” 그 성전은 예수님의 육체를 가리키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육신을 입으신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시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예수님은 승천하시고 그의 백성들에게 성령을 부어주셨습니다. 이렇게 해서 그는 우리 마음에 살기 위해 오셨습니다. 믿는 각 사람은 성전입니다. 우리가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일 때 그 공동체를 교회라고 부릅니다. 교회는 우리 주 예수님께서 거하시는 장소입니다. 교회는 건물이나 조직이 아닙니다. 교회는 한 마음과 한 뜻으로 주 예수님을 영화롭게 하는 믿는 자들의 공동체입니다.
예수님이 다스리시는 곳에 참된 자유가 있습니다. 그들은 죄로부터 자유케 됨을 발견했습니다. 그들은 죽음의 권세로부터 자유함을 발견했습니다. 성령은 그들을 영적인 사람들로 변화시켰습니다. 전에 세리였던 사람이 희생적인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전에 창기가 거룩한 기도의 어미가 되었습니다. 전에 귀신들렸던 사람이 순종적인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전에 종교 지도자가 하나님의 사랑을 맛보고 양들의 참된 목자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너무나 행복해서 예수님을 위해서 무엇이든지 할 준비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표현할 수 없는 기쁨으로 충만했습니다. 그들이 핍절한 사람을 볼 때 주저 없이 다른 사람을 도울 준비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밭과 집을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저희가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었습니다. 그들은 주는 기쁨을 충만히 누렸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참된 기쁨과 평화가 믿는 사람들 가운데 흘러 넘쳤습니다.
36,37절을 보십시오. 그 중에 구브로에서 난 레위족 인이 있으니 이름은 요셉이라고 하였습니다. 사도들은 그를 일컬어 위로의 아들이라는 뜻으로 바나바라고 불렀습니다. 그는 밭을 팔아 사도들의 발 앞에 두었습니다. 그의 주는 정신은 교회의 리더요 열매맺는 선교사가 되기까지 자라났습니다. 우리는 사도행전에서 바나바의 이름을 여러 번 볼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처음 회심했을 때 제자들 중 아무도 그를 선뜻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바나바는 바울 안에서 역사하는 예수님을 보았고 그를 영접하고 믿음으로 예루살렘 교회에 데려왔습니다(9:26,27). 후에 바나바는 바울을 안디옥 교회의 능력있는 성경 선생으로 세웠습니다(11:26). 우리는 바나바 없이 바울도 없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바나바는 또한 마가의 선한 목자였습니다. 마가는 도시 소년이었고 마미보이였습니다. 그는 첫 번 선교 여행팀에서 도망을 쳤습니다(13:13). 그것은 대단한 실패였습니다. 아무도 마가를 받아들이기를 원치 않았고 특히 바울은 그를 쳐다보기도 싫어했습니다. 그러나 바나바는 비싼 대가를 치루고 마가를 영접했습니다(15:39). 바나바의 영적인 격려를 통해서 마가는 예수님의 위대한 종이요 마가복음의 저자로 성장했습니다. 정말로 바나바는 예수님의 은혜를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은혜로 다른 사람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역사를 위해서 자신을 희생했습니다. 바나나는 그리스도께 대한 헌신과 믿는 동료들을 사랑하기 위해서 자기를 온전히 버렸습니다. 그는 정말로 은혜를 아는 사람이었고 세계 선교를 위해서 헌신한 위대한 하나님의 종이었습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사도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하고, 핍박을 받지만 타협하지 않고 증인의 삶을 산 것을 보았습니다. 우리가 초대 교회의 성도들과 같은 은혜와 열심을 회복하여 주님을 섬기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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