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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2004년 사도행전 제 3 강(3:1-26) / 앉은뱅이를 일으킨 베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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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섬김이
댓글 0건 조회 3,648회 작성일 04-11-27 11:02

본문

2004년 사도행전 제 3강
말씀 / 사도행전 3:1-26
요절 / 사도행전 3:6

앉은뱅이를 일으킨 베드로
“베드로가 가로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하고”

우리는 지난 주 오순절에 일어난 성령의 역사에 대해서 배웠습니다. 제자들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을 때 담대히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로 인해 교회가 탄생했습니다. 성령께서는 이들을 통하여 처음부터 세계 각 나라에서 온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하셨습니다. 초대 교회는 열심히 성경을 공부했고 집에서 식사를 하며 사랑의 교제를 나누었습니다. 교회가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 하셨습니다.

오늘은 베드로와 요한이 합심해서 앉은뱅이를 일으키고, 이 기적을 기초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하는 내용입니다. 베드로는 유대인들에게 각각 그 악함을 버리고 메시야로 오신 예수님을 영접하도록 촉구했습니다. 주님께서 이 시간 우리의 운명주의적인 요소들을 치료해 주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살게 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Ⅰ. 앉은뱅이를 일으킨 베드로(1-10)

제 구시 기도 시간 즉 현재 시간으로 오후 3시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갔습니다. 유대인들은 오전 9시, 12시, 오후 3시에 시간을 정해 놓고 기도했습니다. 과거에 기도시간이 되면 예수님만 기도하시고 제자들은 졸기를 잘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시몬아 자느냐 네가 한 시 동안도 깨어 있을 수 없더냐(막14:47)” 책망하시면 그들은 무엇으로 대답할 줄을 몰랐습니다. 또 베드로와 요한은 기도하기보다 몸으로 뛰기를 잘 했습니다. 이런 그들이 예수님이 하늘로 가시게 되자 이제는 자립적으로 기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기도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과 개인적인 교제를 나누면서 시간을 보내는 것을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기도에서 힘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일이 막힐 때마다 그들은 기도했고 위로부터 지혜를 덧입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이제 먹는 것보다 기도하는 일에 더욱 신실해졌습니다.

또한 베드로와 요한은 함께 성전에 올라갔습니다. 과거에 그들은 자기를 높이고자 했기 때문에 그들 사이에는 항상 긴장감이 감돌았습니다. 그들이 겸손하게 동역하는 것은 불가능하게 보였습니다. 그러나 복음이 그들을 변화시켰습니다. 성령이 오셔서 그들을 변화시켰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나라를 보게 되었고 세상적인 야심과 이기심과 교만으로부터 자유롭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죄사함을 받고 서로를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마음으로 동역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으로부터 훈련을 받은 것이 헛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닮은 선한 목자가 되었습니다. 무엇보다 자기의 부족함을 깨달았기 때문에 동역하기를 힘썼습니다. 그들이 감당해야 할 무거운 세계 선교 사명과 거세어지는 핍박이 그들을 하나로 만들었습니다.

그들은 과거에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있는 성전을 피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더 이상 두려움의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지금 그들은 담대히 성전에 들어갔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용기 있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들이 성전에 올라갈 때에 나면서 앉은뱅이 된 자를 사람들이 메고 오니 이는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하여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두는 자였습니다(3).성전 미문은 성전 동편에 있고 감람산과 접해 있다고 합니다. 또 이곳은 가장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문이었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앉은뱅이가 된 그의 삶이 어떠했을까요? 그는 다른 아이들이 축구를 하고 태권도를 할 때 외롭게 앉아 있어야했습니다. 처음에는 부모와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공평한 세상을 저주하며 살았을 것입니다. 걸어다니는 사람을 보면 괜히 밉고, 뛰어 다니는 사람은 더욱 미웠을 것입니다. 다른 아이들이 학교에 다니면서 키가 쭉쭉 크고 있을 때 그는 자신의 운명을 한탄하며 구걸해야 했습니다. 그는 직장도 얻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성전 미문이라는 좋은 장소에서 구걸을 할 수 있게 된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구제를 하면 하나님 나라에서 많은 상을 받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성전에 들어가고 나오면서 이 앉은뱅이의 깡통을 채워주었습니다. 그는 나이 40세가 다 되도록 거지 근성을 키우며 살아왔습니다(행4:22).

3절을 보십시오. “그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가려 함을 보고 구걸하거늘” 베드로와 요한은 평범했지만 그들은 무언가 특별한 사람들 같았습니다. 그들의 눈은 불타고 있었습니다. 그는 베드로와 요한에게 동전 몇 닢을 구했습니다. 그는 얻어먹는 것이 자연스럽게 되었습니다. 한마디로 거지 근성이 충만했습니다. 그는 자신에게 은혜를 베푼 사람들에게 감사하는 마음도 별로 없었습니다. 그는 영적으로 매우 병들어 있었습니다. 4절을 보십시오. "베드로가 요한으로 더불어 주목하여 가로되 우리를 보라 하니" 보통 우리는 거지와 눈이 마주치기를 원치 않습니다. 또 거지들도 사람들의 눈을 쳐다보지 않고 고개를 숙이고 구걸을 합니다. 그런데 베드로와 요한은 그를 주목하여 볼 뿐만 아니라 우리를 보라고 했습니다. 그가 저희에게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았습니다. 보통 몇 푼을 던져주고 가는 사람들과는 달리 유별나게 '우리를 보라'고 까지 말하니까 이제 이 걸인은 '평상시보다도 더 많은, 뭔가 대단한 것을 얻는가 보다'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말했습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하고(6)” 우리는 여기서 베드로가 사람을 어떻게 돕는가 배울 수 있습니다.

그는 사람을 돈으로 돕고자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기에게 없는 돈으로 사람을 돕고자 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믿음으로 사람의 근본 문제를 돕고자 했습니다. 베드로는 목자의 심정을 가지고 그를 돕고자 했습니다. 그를 돕는 길은 깊은 관심을 가지고 그의 진정한 필요가 무엇인가 알아보는 데서부터 출발했습니다.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목자가 지식이 많은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깊은 관심을 가지고 돌보아 주는 것입니다. 당장 이 거지에게 은과 금을 준다고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예수님의 마음으로 이 사람을 돕고자 했습니다. 그는 무엇보다 걷는 것이 필요했습니다. 그의 거지 근성을 치료하는 것이 필요했습니다. 베드로는 뿌리로부터 그 사람의 문제를 해결하기를 원했습니다. 예전에 베드로는 날 때부터 소경된 자를 보고 운명적이고 슬픈 마음을 가지고 이 사람이 날 때부터 소경으로 태어난 것이 누구의 죄입니까? 이 사람입니까? 그 부모의 죄입니까? 하고 이 사람을 돕는 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질문을 했습니다(요9:2,3). 또 예수님께서 오병이어로 오천명을 먹인 사건을 통해서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으로 사람을 돕는 법을 배웠습니다(막6:38). 베드로가 예수님께로부터 훈련을 받은 결과가 이제 나타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거지의 인생 문제를 돕고자 했습니다. 베드로는 자기에게 은과 금은 없지만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권세를 믿는 믿음은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능력과 은혜에 의지해서 그에게 “일어나 걸으라”고 믿음으로 명령했습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예수님께서 능력을 베푸사 날 때부터 앉은뱅이 된 그를 낫게 하신다고 선언했습니다. 거지는 이 말을 듣고 너무 놀라서 입을 다물지 못하고 깡통을 떨어뜨렸을 것입니다. 이때 베드로는 그의 오른손을 잡아 일으켰습니다. 그러자 그의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뛰어 서서 걸으며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미했습니다. 참으로 꿈도 꾸지 못할 일이 일어났습니다. 모든 백성이 그 걷는 것과 및 하나님을 찬미함을 보고 그 본래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사람인 줄 알고 그의 당한 일을 인하여 심히 기이히 여기며 놀랐습니다(7-10).

앉은뱅이의 인간조건을 살펴볼 때 그는 어쩔 수 없이 사람들로부터 도움을 받지 않으면 안 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앉은뱅이라고 해서 남을 의존하고 구걸을 하는 것은 옳지 않은 것입니다. 세상에는 불행한 인간 조건 가운데서도 믿음으로 역경을 딛고 인간승리를 한 사람이 많습니다. 오순이씨는 세 살 때 집 앞 철도에서 놀다가 기차에 치여 두 팔을 절단했습니다. 이후 2년 동안 집중 치료로 목숨을 건졌지만 혼자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처지가 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초등학교 4학년 때 미술을 전공한 담임선생님을 만나면서부터 새로운 삶의 의지를 갖게 되었습니다. 이때부터 두 발을 이용해 동양화를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두발을 이용한 붓의 사용이 자연스럽고 정확해질 때까지 수없이 화선지와 싸웠다”는 오씨는 “화선지에 먹물이 퍼지지 않도록 일정한 속도감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허리가 끊어지고 발이 퉁퉁 붓는 고통을 감수해야 했습니다. 그녀는 86년 단국대 동양학과에 입학하여 졸업을 하고 대만으로 건너가 어학연수를 마친 뒤 93년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중국 미술계의 최고 수준을 자랑하는 중국미술학원에 진학하여 박사학위를 받고 지난 9월 단국대학교 예술대학 동양화 전공 초빙교수로 임용되었습니다. 또한 혜화동의 한 앉은뱅이는 열쇠 깎는 일을 하여 돈을 벌어서 빌딩을 소유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앉은뱅이라는 인간적인 조건 때문에 남에게 폐를 끼치고 부담을 주는 존재가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인간은 본래 짐승과 달리 두 발로 걸을 수 있도록 창조되었습니다. 이는 인간이 자립적인 존재로 지음 받았음을 말해줍니다. 인간이란 두 발로 땅을 딛고 하나님만 의지하며 자립적으로 사는 존재입니다. 인간이 자립적으로 살 때 삶의 보람을 느끼고 행복한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형편이 좀 어렵다고 해서 호흡이 코에 붙은 사람을 의지하고 도움을 바랄 때 비참하게 됩니다. 자립적인 사람은 어떤 형편 가운데서도 하나님만 의지하고 믿음으로 역경을 극복하여 다른 사람을 도와주고자 합니다. 다른 사람을 이해해 주고 사랑해 주고 섬겨 주고자 애를 씁니다. 그러나 영적인 앉은뱅이는 매사에 남을 의존합니다. 또한 사랑 깡통을 차고 사랑을 구걸합니다. 또 제발 나를 이해해 달라고 하며 이해를 구걸합니다. 잘한 것은 없지만 인정해 달라고 하며 인정과 칭찬을 구걸합니다. 이런 자는 거지심정이 되어 항상 무엇인가 얻고자 합니다. 이 때문에 그 내면은 항상 시끄럽습니다. 이런 자의 심정은 비참합니다. 앉은뱅이의 또 다른 특징은 성장이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끊임없이 성장하도록 창조 되었습니다. 사람은 성장하는데 큰 기쁨이 있습니다. 어린 아이가 태어나서 성장하지 않는다면 부모에게 큰 염려와 슬픔이 됩니다. 사람은 키가 자랄 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 자라나야 됩니다. 어떤 사람은 육신의 나이는 많지만 정신연령이 어린 아이와 같은 자가 있습니다.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행동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습니다. 우리는 정신적으로 자라나야 됩니다. 또 영적으로도 자라나야 합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거듭나서 신앙이 자라지 않는다면 영적인 앉은뱅이인 것입니다(엡4:13,15). 우리의 신앙생활은 어제와 오늘이 다르고, 작년과 올해가 다르게 성장할 때 근본적으로 기쁨이 있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사람을 영적으로 성장하도록 도울 수 있습니까? 이는 그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믿음을 심는 것입니다. 우리는 양들을 도울 때 동정하여 앉은뱅이로 만들어 놓기 쉽습니다. 대개 앙들은 초기 단계에서는 목자와의 관계성을 통하여 성장하게 됩니다. 양들은 목자의 관심과 사랑을 먹고 자라게 됩니다. 그러나 어느 단계에 가서는 하나님 앞에서 개인 신앙을 갖고 영적으로 자립하도록 도와야 됩니다. 그렇지 않고 계속해서 목자의 품속에서만 있도록 싸고 돈다면 영적으로 앉은뱅이를 만들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냉정하게 손을 떼라는 것은 아닙니다. 베드로가 오른손을 잡아 일으켰듯이 양이 자립적인 믿음을 갖도록 도와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Ⅱ. 예수님을 증거하는 베드로(11-26)

11절을 보십시오. “나은 사람이 베드로와 요한을 붙잡으니 모든 백성이 크게 놀라며 달려 나아가 솔로몬의 행각이라 칭하는 행각에 모이거늘” 나은 사람은 기뻐 날뛰다가 정신을 차리고 보니 자기를 낫게 해준 베드로와 요한을 잊어먹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와 요한을 붙잡았습니다. 성전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놀라서 솔로몬 행각에 모였습니다. 이때 베드로는 백성들에게 말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기이히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곧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그 종 예수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12,13).” 그는 이 사건을 기초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영화롭게 하셨음을 증거 하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에 대한 베드로의 믿음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역사의 하나님 안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은 여러 차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언급하였습니다. 먼저 출애굽기 3:6절에 하나님께서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나타나실 때 자신을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으로 계시하셨습니다. 이 하나님은 전능하신 능력으로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이 하나님은 그의 권능의 손으로 이스라엘 민족을 세우셨습니다. 예수님도 하나님을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부르셨습니다(마22:32, 막12:26, 눅20:37). 베드로의 설명에 따르면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는 분으로서 ‘하나님의 종’을 살리셨습니다.

베드로는 하나님께서 그 종 예수님을 영화롭게 하셨다고 증거했습니다. 이사야서 52:13-15절은 주의 종이 고난을 받고 세상의 죄로 인해서 죽으시고 다시 사실 것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내 종이 형통하리니 받들어 높이 들려서 지극히 존귀하게 되리라 이왕에는 그 얼굴이 타인보다 상하였고 그 모양이 인생보다 상하였으므로 무리가 그를 보고 놀랐거니와 후에는 그가 열방을 놀랠 것이며 열왕은 그를 인하여 입을 봉하리니 이는 그들이 아직 전파되지 않은 것을 볼 것이요 아직 듣지 못한 것을 깨달을 것임이라 하시니라.” 이사야는 하나님의 종이 고난을 받고 영화롭게 되실 것을 예언했습니다. 종교 지도자들 중 아무도 이것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알았습니다. 베드로는 하나님께서 그 종 예수님을 영화롭게 하셨다고 선포했습니다.

베드로는 모여든 군중 앞에서 두려움이 없었습니다. 거기에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는데 동참했던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그들의 악한 행동을 분명하게 드러냈습니다. 그는 “너희가 저를 넘겨 주고 빌라도가 놓아 주기로 결안한 것을 너희가 그 앞에서 부인하였으니 너희가 거룩하고 의로운 자를 부인하고 도리어 살인한 사람을 놓아 주기를 구하여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로라(13b-15).” 베드로는 상한 목자의 심정으로 그들의 죄를 분명히 지적하였습니다. 그들은 인류 역사상 가장 큰 죄를 지은 범인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그들을 정죄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도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들을 깊이 이해했습니다. 그는 자신도 같은 종류의 죄인임을 알았습니다. 그는 자신과 같은 죄인에게 임한 예수님의 놀라운 은혜를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이 은혜를 믿고 있는 베드로는 종교지도자들에게 매우 유익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담대하게 말했습니다. “너희가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그를 살리셨도다.”

베드로가 강조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다는 것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죄와 죽음의 권세보다 더 강하십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악보다 더 크십니다. 하나님의 선한 목적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예수님을 통해서 드러나게 됐습니다. 죽은 자 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하심으로 하나님이 승리하셨습니다.

16절을 보십시오. “그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너희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 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 앉은뱅이가 완전히 낫게 된 것은 예수님이 살아계심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죽은 자 가운데서 예수님을 일으키신 하나님의 능력은 앉은뱅이 거지를 완전히 낫게 했습니다. 죽은 자 가운데서 예수님을 일으키신 하나님의 그 능력은 지금도 역사하사 절망 가운데 누워있는 목자들을 일으켜 살리실 수 있고 저희들을 통해서 영적으로 죽은 이 시대의 대학생들을 목자요 선교사로 세우실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유대인들의 죄를 지적하고 나서 그들이 알지 못하여서 그리하였으며 관원들도 그리한 줄 안다고 했습니다. 19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유쾌하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 베드로는 그들이 회개하고 돌이켜 죄없이 함을 받으라고 권면했습니다. 죄사함을 받으면 마음이 유쾌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예수님을 메시야로 보내셨습니다. 이제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메시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만유를 회복하실 때까지는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십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과 부활을 구약 성경의 예언이 성취된 것임을 증거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모세와 비교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말씀에 기초해서 구약 성경을 주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말씀에 기초해서 신약 성경을 가져오셨습니다. 유대인들은 선지자의 자손이요, 언약의 자손입니다. 이제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것같이 모든 민족에게 복의 근원이 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신 것은 그들로 각각 그 악함을 버리고 예수님을 믿음으로 죄사함을 받고 영원한 복을 받게 하기 위함입니다.

이상에서 우리는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권세가 어떠한가 배웠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믿는 베드로의 믿음을 통해서 나면서부터 앉은뱅이 된 자가 완전히 나음을 받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믿는 우리의 믿음을 통해서 영적으로 병든 이 나라의 젊은이들이 나음을 받고 하나님의 종이 될 것을 믿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믿는 우리의 믿음을 통해서 이 나라가 거룩한 백성이요 제사장 나라로 북한과 모슬렘권 개척 역사에도 귀히 쓰임 받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권세를 믿는 믿음을 우리에게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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