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2004년 사도행전 제 2 강(2:1-47) / 오순절에 일어난 성령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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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사도행전 2강
말씀 / 사도행전 2:1-47
요절 / 사도행전 2:38
오순절에 일어난 성령의 역사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우리는 지난 주 초대 성도들이 성령의 강림을 어떻게 준비했는지 배웠습니다. 그들은 마음을 같이하여 전혀 기도에 힘썼습니다. 초대 성도들은 예수님 안에서 하나가 되었습니다. 비록 그들의 개성이 모두 다르지만 마음에 예수님이 계실 때 하나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이 마음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되었을 때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선교 명령을 기초로 한가지 기도 제목을 가졌을 때 하나가 될 수 있었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세계 선교 사명을 성취하기 위해 함께 기도함으로 하나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오늘 말씀은 오순절에 일어난 성령의 역사에 대한 것입니다. 성령은 성도들이 기도로 하나가 된 가운데 오셨습니다. 성령은 그들이 자기 세대에 세계 선교 사명을 감당할 수 있도록 권능을 주셨습니다. 우리가 우리 시대에 세계 선교 사명을 성취하도록 성령께서 능력으로 함께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Ⅰ. 성령 충만함을 받은 제자들(1-13)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 제자들은 어찌할 바를 모르는 가운데 합심해서 기도했습니다. 그들의 기도는 열흘 동안 계속 되었습니다. 1절을 보십시오.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 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120명의 제자들은 예루살렘에서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리며 기도에 힘썼습니다. 그때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2,3절을 보십시오.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그들이 기다리던 성령께서 강림하셨습니다. 그는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로 임하셨습니다. 우리는 태풍이나 토네이도와 같은 바람을 텔레비전에서 종종 봅니다. 그러한 바람들은 집을 들어서 다른 장소로 옮겨버리거나 큰 나무들을 쓰러뜨립니다. 바람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한 번에 모든 장소에 존재하며 변화시키는 힘이 있습니다. 성령님은 제 삼위의 하나님으로서 무소부재하십니다. 또 바람은 임의로 부는 것처럼 성령님은 주권적으로 역사하십니다. 예수님은 성령님을 생명을 주는 바람에 비유하셨습니다. 즉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오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요3:8).” 바람은 히브리어로 루아흐이고 헬라어로는 푸뉴마입니다. 둘 다 바람, 영, 숨으로 번역됩니다. 하나님께서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었습니다(창2:7). 같은 방식으로 성령 하나님은 예수님을 믿는 자들에게 새 생명을 주십니다(요3:5,6).성령은 그 주권으로 어떤 사람에게든지 새 생명을 주실 수 있습니다. 성령님은 우리의 죽을 몸도 살리실 수 있습니다(롬8:11).
3절을 보십시오.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성령님은 삼위일체의 하나님이시지만 각 사람 위에 임하셨습니다. 그는 불의 혀 같이 그들에게 오셨습니다. 불의 혀로서 자기를 나타내신 것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혀는 말하는 기관입니다. 불은 하나님의 거룩함을 상징합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고 예언하셨습니다(행1:5). 성령은 거룩한 불로서 우리의 속사람을 죄와 연약함으로부터 깨끗하게 하는 세례를 주십니다. 그는 특히 마음과 혀들을 깨끗케 하십니다. 성령 하나님은 성도들이 거룩하신 하나님의 진리를 말하도록 도우십니다. 우리는 이사야 선지자를 기억할 수 있습니다. 이사야가 거룩하신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났을 때 불신의 말을 지껄이는 자기의 입술이 부정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사6:5)”라고 고백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단에서 취한 바 핀 숯을 손에 가지고 내려와서 그것을 이사야의 입에 대며 말했습니다.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그 이후로 이사야는 거룩하신 하나님과 그의 구속 계획을 기록하고 증거한 가장 위대한 선지자가 되었습니다. 사도들은 세속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비록 그들이 예수님에 의해서 가르침을 받고 훈련을 받았지만 인간적인 생각이 떠나지 않았고 악한 시대에 세속적인 말을 종종 했습니다. 그러나 성령이 불의 혀같이 그들에게 임했을 때 그들의 부정이 태워지고 거룩하신 하나님을 증거하며 신약을 기록하여 우리에게 전해주게 되었습니다.
4절을 보십시오.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게 되었습니다. 성령은 그들 안에 내주하게 되었습니다. 구약에서는 성령께서 선지자나 왕이나 제사장과 같이 택함을 받은 지도자들에게 임하여 지혜와 능력을 주셨습니다. 성령께서 거하시는 장소는 성전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성전 사역은 제사장들에 의해서 복잡하고 값비싼 희생 제사 제도를 시행하는 곳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성전의 역할을 완성하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하여 죄문제가 해결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상에서 마지막 숨을 거두실 때 성전의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졌습니다. 그것은 성전 제도의 종말을 상징합니다. 이제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사람의 마음에 하나님께서 내주하시게 되는 새로운 시대가 열리게 되었습니다. 성령께서 오순절에 강림하셨을 때 신자들 각자의 마음에 하나님의 임재를 충만히 느끼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성령을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부르셨습니다(행1:4). 정말로 성령은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주신 최고의 축복입니다. 성령께서 우리 마음 속에 들어오실 때 그는 죄와 죽음의 권세를 몰아내시고 악령을 몰아 내십니다. 성령은 불과 같아서 하나님의 사랑으로 우리 마음을 따뜻하게 합니다. 사도 바울은 롬5:5b에서 말씀합니다.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음 바 됨이니” 많은 사람들의 마음이 딱딱하고 냉랭합니다. 그것은 악령과 죄의 세력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최선을 다해서 사랑한다고 할지라도 그 마음에 사랑을 느끼지 못합니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 마음에 부어 주사 그 마음의 굳은 것을 녹이시고 냉랭한 마음을 뜨겁게 하십니다. 그는 참된 기쁨과 평강을 주십니다. 그는 확신과 용기와 승리자로 이 세상을 살도록 강하게 하십니다.
성령이 충만했을 때 그들은 무엇을 했습니까? 그들은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담대히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사도 바울에 의하면 방언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방언 두 가지가 있습니다(고전12-14). 오순절에 성령은 그들에게 사람의 방언을 말하게 했습니다. 그들이 말한 언어는 외국어로서 그들이 전에 결코 만나본 적이 없는 이방인들의 말이었습니다. 성령의 주된 목적은 그들이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하기 위함이었습니다.
5절을 보십시오. “그 때에 경건한 유대인이 천하 각국으로부터 와서 예루살렘에 우거하더니” 이 사람들은 오순절 축제를 위해서 예루살렘에 왔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원했습니다. 성령이 제자들에게 임했을 때에 이 소리가 나자 큰 무리가 모여 각각 자기의 방언으로 제자들의 말하는 것을 듣고 소동했습니다. 그들은 다 놀라 기이히 여기며 말했습니다. “보라 이 말하는 사람이 다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의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찜이뇨(7,8).” 갈릴리 사람이란 일반적으로 뛰어난 언어 구사력이 없는 무식한 자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봉쥬르, 니하오마, 브에노스 노체스” 등등 자기 나라 말로 복음을 전하는 것을 듣고 놀랐습니다.
9-11절을 보십시오. “우리는 바대인과 메대인과 엘람인과 또 메소보다미아, 유대와 가바도기아, 본도와 아시아, 브루기아와 밤빌리아, 애굽과 및 구레네에 가까운 리비야 여러 지방에 사는 사람들과 로마로부터 온 나그네 곧 유대인과 유대교에 들어온 사람들과 그레데인과 아라비아인들이라 우리가 다 우리의 각 방언으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도다 하고” 바대인과 메대인과 엘람인은 동쪽에 있습니다. 메소보다미아, 갑바도기아, 본도는 북쪽에 있습니다. 아시아, 브루기아, 밤빌리아, 로마, 그레데인은 서쪽에 있습니다. 애굽과 아라비아는 남쪽에 있습니다. 이 지역들은 예루살렘을 둘러싸고 있습니다. 그들은 그 당시의 세계를 대표하고 있습니다.
주변의 모든 나라 사람들이 와서 각자의 언어로 하나님의 큰 일을 듣는 것은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그것은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깊은 사랑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때까지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선민으로 쓰셨습니다. 그는 세상 만민을 위해서 그들이 성경 선생의 나라가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들은 대부분 아람어와 헬라어를 썼습니다. 구약은 히브리어로 쓰여졌지만 헬라어로 번역이 되었습니다. 외국인이 성경을 배우기 원한다면 헬라어를 배워야 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언어로 복음을 듣게 하셨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각 방언으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고 놀랐습니다. 하나님의 큰 일이란 예수님의 복음을 의미합니다. 요3:16절은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오순절에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 대한 사랑을 나타내셨습니다. 바벨탑 사건은 언어의 혼란으로 인해서 하나 되는 것을 막아왔습니다. 나뉨으로부터 오는 반목은 하나님의 마음과 사람에게 큰 고통을 주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더욱이 하나님께서는 구속 사역을 위해 유대인들에게 집중하심으로 오해를 받아왔습니다. 마침내 하나님께서는 그가 정말로 모든 나라 모든 민족을 사랑하신다는 것을 그들의 언어로 말씀하시게 되었습니다.
오순절에 성령께서 오심으로 제자들은 모든 나라의 사람들과 다른 언어로 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사실 외국어를 배운다는 것은 뼈를 깎는 듯한 고통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공부도하지 않고 다른 나라의 말을 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성령의 지혜와 능력을 우리에게 주셨음을 의미합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다른 나라 사람들과 직접 의사 소통을 하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가르쳐줍니다. 이것은 제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주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사도행전 1:8절에서 그들이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에 증인이 되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이해가 됩니다. 그러나 땅 끝까지 나아가서 증인이 되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매우 환상적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것은 장차 손자들의 대에 가서나 이루어질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오셨을 때 그들은 직접 모든 나라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또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자기 시대에 전세계에 복음을 전하기 원하신다는 것을 깨우쳐 줍니다. 정말로 우리는 이러한 일들이 일어난 것을 보고 있습니다. 사도행전의 끝에 가면 기독교회가 로마를 포함하여 알려진 모든 세계에 세워지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땅끝이라고 하는 스페인까지 나아가고자 하는 비전을 가졌습니다. 복음은 사도들의 시대에 전세계에 퍼져나갔습니다.
성령의 역사가 강력하게 일어나자 두 가지 반응이 보였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은 그 사건의 영적인 의미를 알기 원했습니다. 그러나 어떤 자들은 제자들을 조롱하기 시작했습니다. “저희가 새 술에 취하였다” 오순절 성령의 역사에서조차 하나님의 원수들은 성령의 생명을 주는 역사를 믿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오늘날에 일어나는 이런 것들로 인해서 놀라지 말아야 합니다.
Ⅱ. 베드로의 오순절 부활 메시지(14-47)
어떤 이들이 조롱하자 베드로가 열한 사도와 같이 서서 소리를 높였습니다. 베드로는 때가 제 삼시, 즉 아침 9시 기도 시간이므로 술을 마실 때가 아님을 상기시켰습니다. 그들은 술에 취한 것이 아니라 선지자 요엘의 예언대로 하나님께서 성령을 부어 주신 것입니다. 17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가라사대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말세란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신 때부터 재림하실 때까지를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재림이 가까워올수록 말세가 가까워 오므로 이 시대는 말세지말이라고 일컸습니다. 말세 기간은 우리가 이 땅에서 왕노릇하는 기간이므로 다스리고 정복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성령께서 여러 모양으로 역사하시게 됩니다. 특히 예수님의 재림이 가까워 올수록 성령께서 만민 구속 역사를 위해 더욱 강력히 역사하십니다. 성령이 역사하게 될 때 자녀들은 예언하게 되고,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게 되고, 늙은이들은 활발하게 움직일 수 없으므로 꿈을 꾸게 됩니다. 예언이나 환상이나 꿈은 모두 성령의 역사 방법입니다.
여기서 볼 때 성령이 임하게 되면 젊은이들은 환상에 불타게 됨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보통 환상이라고 하면 현실을 초월하여 붕붕 떠다니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환상이란 비전입니다. 비전이란 장차 이루어질 하나님의 희망을 말합니다. 비전과 인간적인 야심은 비슷한 것 같지만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비전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지만, 인간적인 야심은 자기에게서 출발합니다. 비전은 하나님 중심적이지만, 인간적인 야심은 자기중심적입니다. 비전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지만 인간적인 야심은 자기 영광을 드러냅니다. 비전이 충만한 사람은 다른 사람들에게 은혜가 되지만, 인간적인 야심이 충만한 사람은 다른 사람들에게 부담을 주고 피해를 끼치게 됩니다. 비전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므로 반드시 성취되지만, 인간적인 야심은 욕심에 기초한 것이므로 그 결과를 알 수 없습니다.
베드로는 성령의 역사를 증거한 후 곧 이어서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으로 하여금 생전에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그들 가운데 행하게 하심으로 그가 바로 약속된 메시아임을 증거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이 예수님을 로마인의 손을 빌어 못 박아 죽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이 사망권세에 매여 있을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능력으로 사망권세를 파하시고 예수님을 사망의 고통에서 풀어 살리셨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발적인 사건이 아니라 성경에 이미 예언된 것입니다. 시편 16편에서 다윗이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치 않게 하실 것이라는 말씀은 다윗 자신을 가리켜 말한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다윗은 이미 죽어 장사되어 그 시체는 썩었고 그 묘가 그들 가운데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의 거룩한 자는 장차 오실 메시아를 가리킵니다. 다윗은 선지자로서 장차 그의 자손 중에서 오실 그리스도의 부활을 예언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다윗의 예언대로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시키신 것입니다. 12사도들은 바로 이 일의 증인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예수님은 부활 승천하셔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시고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로부터 받아서 그들이 보고 들은대로 부어 주신 것입니다(33). 다윗은 하늘에 올라가지 못했지만 예수님이 그의 주로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실 것을 예언했습니다(34,35). 36절을 보십시오.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찌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사도 베드로는 메시지의 결론으로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사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고 하였습니다. '주'란 신성의 대명사로서 하나님을 가리키고 그리스도란 약속된 메시야란 뜻입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심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시고 세상 만민의 구주가 되셨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아름다운 메시지만 전한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는 그들이 하나님 앞에서 죄를 회개하도록 도왔습니다.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어 못박아 죽였다.(23)” “너희가 십자가에 못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36)” 베드로는 바로 너희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다고 하였습니다. 사실 그들 가운데 대부분이 외국에서 온 사람들입니다. 그런데도 너희가 죽였다고 하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이는 바로 그들의 죄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나의 죄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것입니다. 나의 교만의 죄, 불순종의 죄, 정욕의 죄, 배은망덕의 죄, 감사치 않고 불평한 죄, 안일의 죄, 이러한 나의 죄가 아무 죄 없으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것입니다.
베드로의 메시지를 들은 그들의 반응이 어떠했습니까? 내가 언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았느냐? 생사람 잡지 말라고 펄쩍 뛰었습니까? 아닙니다. 37절을 보십시오. 그들은 양심의 가책을 받고 마음에 찔려 그들의 죄로 인해 상하고 통회하는 심정이 되었습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우리가 어찌할꼬?” 이것이 진실된 회개의 자세입니다. 죄를 깨닫게 하는 이것이 성령의 역사입니다.
베드로는 이런 그들에게 구원의 길을 분명히 제시해 주었습니다. 38절을 보십시요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우리가 믿음의 길에 들어가려면 가장 먼저 회개해야 합니다. 회개는 구원에 이르는 관문입니다. 회개란 자신의 죄를 진실되게 뉘우치고 방향을 바꾸는 것입니다. 그 후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아야 합니다. 이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신앙고백하고 이제는 예수님께 속한 사람이 되었다는 증표로 받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보배 피로 죄사함을 받고 마음이 정결케 되면 깨끗한 마음에 성령이 임하여 내주하시게 됩니다. 성령은 회개하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 자에게는 누구든지 하나님께서 값없이 주시는 선물입니다. 베드로는 여러 말로 확증하며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도록 권면했습니다.(40)
베드로의 부활 메시지를 들은 사람들은 그날로 세례를 받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게 되었습니다. 120명의 제자들이 성령의 충만을 받고 복음을 전했을 때 25배의 폭발적인 성장을 이루어 3120명이 되었습니다. 초대 교회의 모습이 어떠했습니까? 42절을 보십시오.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 그들의 모임은 말씀 중심이었습니다. 그들은 가장 먼저 성경 공부하기에 힘썼습니다. 말씀을 서로 사랑하고 말씀을 경외하고 말씀에 순종하는 모임만이 생명력이 넘치고 하나님이 쓰실 수 있습니다. 말씀 중심이 되지 아니할 때 자연히 영적 생명력을 상실해 버려 복이나 구하고 자기 만족이나 구하는 샤마니즘으로 흐르게 됩니다.
그들은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었습니다. 사랑이란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아주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것입니다. 사랑은 음식을 함께 먹는데서 오고 가는 것입니다. 그들은 된장찌게를 끓여 놓고 서로 초대했을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혼자 할 수 없고 반드시 공동체를 통해서만이 가능합니다. 그들은 모여서 간절히 기도하기에 힘썼습니다. 그들은 개인기도, 새벽기도, 둘씩 기도, 합심기도, 만나면 기도, 헤어지기 전에 기도, 무시로 기도를 했습니다. 기도하는 곳에 자연히 성령의 역사가 있습니다. 기도하는 곳에 사단이 놀라 도망가 버립니다. 하나님은 기도하는 자와 기도하는 모임을 귀히 쓰십니다. 사도들로 인해 능력의 역사가 나타나 믿는 사람들의 마음에 욕심과 이기주의가 사라졌습니다. 이로 인해 그들은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재산을 팔아 필요에 따라 나누어 썼습니다. 또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했습니다. 아름다운 신자의 공동체가 이루어 졌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모임을 통해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서로 사랑하는 아름다운 공동체를 이루고 양들을 섬기기를 기도합니다. 이번 가을 수양회에 길 잃은 양들을 적극 초청하여 홍익대로부터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해야겠습니다.
말씀 / 사도행전 2:1-47
요절 / 사도행전 2:38
오순절에 일어난 성령의 역사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우리는 지난 주 초대 성도들이 성령의 강림을 어떻게 준비했는지 배웠습니다. 그들은 마음을 같이하여 전혀 기도에 힘썼습니다. 초대 성도들은 예수님 안에서 하나가 되었습니다. 비록 그들의 개성이 모두 다르지만 마음에 예수님이 계실 때 하나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이 마음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되었을 때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선교 명령을 기초로 한가지 기도 제목을 가졌을 때 하나가 될 수 있었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세계 선교 사명을 성취하기 위해 함께 기도함으로 하나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오늘 말씀은 오순절에 일어난 성령의 역사에 대한 것입니다. 성령은 성도들이 기도로 하나가 된 가운데 오셨습니다. 성령은 그들이 자기 세대에 세계 선교 사명을 감당할 수 있도록 권능을 주셨습니다. 우리가 우리 시대에 세계 선교 사명을 성취하도록 성령께서 능력으로 함께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Ⅰ. 성령 충만함을 받은 제자들(1-13)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 제자들은 어찌할 바를 모르는 가운데 합심해서 기도했습니다. 그들의 기도는 열흘 동안 계속 되었습니다. 1절을 보십시오.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 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120명의 제자들은 예루살렘에서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리며 기도에 힘썼습니다. 그때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2,3절을 보십시오.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그들이 기다리던 성령께서 강림하셨습니다. 그는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로 임하셨습니다. 우리는 태풍이나 토네이도와 같은 바람을 텔레비전에서 종종 봅니다. 그러한 바람들은 집을 들어서 다른 장소로 옮겨버리거나 큰 나무들을 쓰러뜨립니다. 바람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한 번에 모든 장소에 존재하며 변화시키는 힘이 있습니다. 성령님은 제 삼위의 하나님으로서 무소부재하십니다. 또 바람은 임의로 부는 것처럼 성령님은 주권적으로 역사하십니다. 예수님은 성령님을 생명을 주는 바람에 비유하셨습니다. 즉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오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요3:8).” 바람은 히브리어로 루아흐이고 헬라어로는 푸뉴마입니다. 둘 다 바람, 영, 숨으로 번역됩니다. 하나님께서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었습니다(창2:7). 같은 방식으로 성령 하나님은 예수님을 믿는 자들에게 새 생명을 주십니다(요3:5,6).성령은 그 주권으로 어떤 사람에게든지 새 생명을 주실 수 있습니다. 성령님은 우리의 죽을 몸도 살리실 수 있습니다(롬8:11).
3절을 보십시오.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성령님은 삼위일체의 하나님이시지만 각 사람 위에 임하셨습니다. 그는 불의 혀 같이 그들에게 오셨습니다. 불의 혀로서 자기를 나타내신 것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혀는 말하는 기관입니다. 불은 하나님의 거룩함을 상징합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고 예언하셨습니다(행1:5). 성령은 거룩한 불로서 우리의 속사람을 죄와 연약함으로부터 깨끗하게 하는 세례를 주십니다. 그는 특히 마음과 혀들을 깨끗케 하십니다. 성령 하나님은 성도들이 거룩하신 하나님의 진리를 말하도록 도우십니다. 우리는 이사야 선지자를 기억할 수 있습니다. 이사야가 거룩하신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났을 때 불신의 말을 지껄이는 자기의 입술이 부정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사6:5)”라고 고백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단에서 취한 바 핀 숯을 손에 가지고 내려와서 그것을 이사야의 입에 대며 말했습니다.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그 이후로 이사야는 거룩하신 하나님과 그의 구속 계획을 기록하고 증거한 가장 위대한 선지자가 되었습니다. 사도들은 세속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비록 그들이 예수님에 의해서 가르침을 받고 훈련을 받았지만 인간적인 생각이 떠나지 않았고 악한 시대에 세속적인 말을 종종 했습니다. 그러나 성령이 불의 혀같이 그들에게 임했을 때 그들의 부정이 태워지고 거룩하신 하나님을 증거하며 신약을 기록하여 우리에게 전해주게 되었습니다.
4절을 보십시오.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게 되었습니다. 성령은 그들 안에 내주하게 되었습니다. 구약에서는 성령께서 선지자나 왕이나 제사장과 같이 택함을 받은 지도자들에게 임하여 지혜와 능력을 주셨습니다. 성령께서 거하시는 장소는 성전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성전 사역은 제사장들에 의해서 복잡하고 값비싼 희생 제사 제도를 시행하는 곳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성전의 역할을 완성하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하여 죄문제가 해결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상에서 마지막 숨을 거두실 때 성전의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졌습니다. 그것은 성전 제도의 종말을 상징합니다. 이제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사람의 마음에 하나님께서 내주하시게 되는 새로운 시대가 열리게 되었습니다. 성령께서 오순절에 강림하셨을 때 신자들 각자의 마음에 하나님의 임재를 충만히 느끼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성령을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부르셨습니다(행1:4). 정말로 성령은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주신 최고의 축복입니다. 성령께서 우리 마음 속에 들어오실 때 그는 죄와 죽음의 권세를 몰아내시고 악령을 몰아 내십니다. 성령은 불과 같아서 하나님의 사랑으로 우리 마음을 따뜻하게 합니다. 사도 바울은 롬5:5b에서 말씀합니다.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음 바 됨이니” 많은 사람들의 마음이 딱딱하고 냉랭합니다. 그것은 악령과 죄의 세력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최선을 다해서 사랑한다고 할지라도 그 마음에 사랑을 느끼지 못합니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 마음에 부어 주사 그 마음의 굳은 것을 녹이시고 냉랭한 마음을 뜨겁게 하십니다. 그는 참된 기쁨과 평강을 주십니다. 그는 확신과 용기와 승리자로 이 세상을 살도록 강하게 하십니다.
성령이 충만했을 때 그들은 무엇을 했습니까? 그들은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담대히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사도 바울에 의하면 방언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방언 두 가지가 있습니다(고전12-14). 오순절에 성령은 그들에게 사람의 방언을 말하게 했습니다. 그들이 말한 언어는 외국어로서 그들이 전에 결코 만나본 적이 없는 이방인들의 말이었습니다. 성령의 주된 목적은 그들이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하기 위함이었습니다.
5절을 보십시오. “그 때에 경건한 유대인이 천하 각국으로부터 와서 예루살렘에 우거하더니” 이 사람들은 오순절 축제를 위해서 예루살렘에 왔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원했습니다. 성령이 제자들에게 임했을 때에 이 소리가 나자 큰 무리가 모여 각각 자기의 방언으로 제자들의 말하는 것을 듣고 소동했습니다. 그들은 다 놀라 기이히 여기며 말했습니다. “보라 이 말하는 사람이 다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의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찜이뇨(7,8).” 갈릴리 사람이란 일반적으로 뛰어난 언어 구사력이 없는 무식한 자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봉쥬르, 니하오마, 브에노스 노체스” 등등 자기 나라 말로 복음을 전하는 것을 듣고 놀랐습니다.
9-11절을 보십시오. “우리는 바대인과 메대인과 엘람인과 또 메소보다미아, 유대와 가바도기아, 본도와 아시아, 브루기아와 밤빌리아, 애굽과 및 구레네에 가까운 리비야 여러 지방에 사는 사람들과 로마로부터 온 나그네 곧 유대인과 유대교에 들어온 사람들과 그레데인과 아라비아인들이라 우리가 다 우리의 각 방언으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도다 하고” 바대인과 메대인과 엘람인은 동쪽에 있습니다. 메소보다미아, 갑바도기아, 본도는 북쪽에 있습니다. 아시아, 브루기아, 밤빌리아, 로마, 그레데인은 서쪽에 있습니다. 애굽과 아라비아는 남쪽에 있습니다. 이 지역들은 예루살렘을 둘러싸고 있습니다. 그들은 그 당시의 세계를 대표하고 있습니다.
주변의 모든 나라 사람들이 와서 각자의 언어로 하나님의 큰 일을 듣는 것은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그것은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깊은 사랑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때까지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선민으로 쓰셨습니다. 그는 세상 만민을 위해서 그들이 성경 선생의 나라가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들은 대부분 아람어와 헬라어를 썼습니다. 구약은 히브리어로 쓰여졌지만 헬라어로 번역이 되었습니다. 외국인이 성경을 배우기 원한다면 헬라어를 배워야 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언어로 복음을 듣게 하셨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각 방언으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고 놀랐습니다. 하나님의 큰 일이란 예수님의 복음을 의미합니다. 요3:16절은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오순절에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 대한 사랑을 나타내셨습니다. 바벨탑 사건은 언어의 혼란으로 인해서 하나 되는 것을 막아왔습니다. 나뉨으로부터 오는 반목은 하나님의 마음과 사람에게 큰 고통을 주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더욱이 하나님께서는 구속 사역을 위해 유대인들에게 집중하심으로 오해를 받아왔습니다. 마침내 하나님께서는 그가 정말로 모든 나라 모든 민족을 사랑하신다는 것을 그들의 언어로 말씀하시게 되었습니다.
오순절에 성령께서 오심으로 제자들은 모든 나라의 사람들과 다른 언어로 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사실 외국어를 배운다는 것은 뼈를 깎는 듯한 고통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공부도하지 않고 다른 나라의 말을 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성령의 지혜와 능력을 우리에게 주셨음을 의미합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다른 나라 사람들과 직접 의사 소통을 하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가르쳐줍니다. 이것은 제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주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사도행전 1:8절에서 그들이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에 증인이 되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이해가 됩니다. 그러나 땅 끝까지 나아가서 증인이 되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매우 환상적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것은 장차 손자들의 대에 가서나 이루어질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오셨을 때 그들은 직접 모든 나라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또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자기 시대에 전세계에 복음을 전하기 원하신다는 것을 깨우쳐 줍니다. 정말로 우리는 이러한 일들이 일어난 것을 보고 있습니다. 사도행전의 끝에 가면 기독교회가 로마를 포함하여 알려진 모든 세계에 세워지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땅끝이라고 하는 스페인까지 나아가고자 하는 비전을 가졌습니다. 복음은 사도들의 시대에 전세계에 퍼져나갔습니다.
성령의 역사가 강력하게 일어나자 두 가지 반응이 보였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은 그 사건의 영적인 의미를 알기 원했습니다. 그러나 어떤 자들은 제자들을 조롱하기 시작했습니다. “저희가 새 술에 취하였다” 오순절 성령의 역사에서조차 하나님의 원수들은 성령의 생명을 주는 역사를 믿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오늘날에 일어나는 이런 것들로 인해서 놀라지 말아야 합니다.
Ⅱ. 베드로의 오순절 부활 메시지(14-47)
어떤 이들이 조롱하자 베드로가 열한 사도와 같이 서서 소리를 높였습니다. 베드로는 때가 제 삼시, 즉 아침 9시 기도 시간이므로 술을 마실 때가 아님을 상기시켰습니다. 그들은 술에 취한 것이 아니라 선지자 요엘의 예언대로 하나님께서 성령을 부어 주신 것입니다. 17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가라사대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말세란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신 때부터 재림하실 때까지를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재림이 가까워올수록 말세가 가까워 오므로 이 시대는 말세지말이라고 일컸습니다. 말세 기간은 우리가 이 땅에서 왕노릇하는 기간이므로 다스리고 정복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성령께서 여러 모양으로 역사하시게 됩니다. 특히 예수님의 재림이 가까워 올수록 성령께서 만민 구속 역사를 위해 더욱 강력히 역사하십니다. 성령이 역사하게 될 때 자녀들은 예언하게 되고,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게 되고, 늙은이들은 활발하게 움직일 수 없으므로 꿈을 꾸게 됩니다. 예언이나 환상이나 꿈은 모두 성령의 역사 방법입니다.
여기서 볼 때 성령이 임하게 되면 젊은이들은 환상에 불타게 됨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보통 환상이라고 하면 현실을 초월하여 붕붕 떠다니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환상이란 비전입니다. 비전이란 장차 이루어질 하나님의 희망을 말합니다. 비전과 인간적인 야심은 비슷한 것 같지만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비전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지만, 인간적인 야심은 자기에게서 출발합니다. 비전은 하나님 중심적이지만, 인간적인 야심은 자기중심적입니다. 비전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지만 인간적인 야심은 자기 영광을 드러냅니다. 비전이 충만한 사람은 다른 사람들에게 은혜가 되지만, 인간적인 야심이 충만한 사람은 다른 사람들에게 부담을 주고 피해를 끼치게 됩니다. 비전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므로 반드시 성취되지만, 인간적인 야심은 욕심에 기초한 것이므로 그 결과를 알 수 없습니다.
베드로는 성령의 역사를 증거한 후 곧 이어서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으로 하여금 생전에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그들 가운데 행하게 하심으로 그가 바로 약속된 메시아임을 증거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이 예수님을 로마인의 손을 빌어 못 박아 죽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이 사망권세에 매여 있을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능력으로 사망권세를 파하시고 예수님을 사망의 고통에서 풀어 살리셨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발적인 사건이 아니라 성경에 이미 예언된 것입니다. 시편 16편에서 다윗이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치 않게 하실 것이라는 말씀은 다윗 자신을 가리켜 말한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다윗은 이미 죽어 장사되어 그 시체는 썩었고 그 묘가 그들 가운데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의 거룩한 자는 장차 오실 메시아를 가리킵니다. 다윗은 선지자로서 장차 그의 자손 중에서 오실 그리스도의 부활을 예언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다윗의 예언대로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시키신 것입니다. 12사도들은 바로 이 일의 증인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예수님은 부활 승천하셔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시고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로부터 받아서 그들이 보고 들은대로 부어 주신 것입니다(33). 다윗은 하늘에 올라가지 못했지만 예수님이 그의 주로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실 것을 예언했습니다(34,35). 36절을 보십시오.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찌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사도 베드로는 메시지의 결론으로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사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고 하였습니다. '주'란 신성의 대명사로서 하나님을 가리키고 그리스도란 약속된 메시야란 뜻입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심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시고 세상 만민의 구주가 되셨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아름다운 메시지만 전한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는 그들이 하나님 앞에서 죄를 회개하도록 도왔습니다.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어 못박아 죽였다.(23)” “너희가 십자가에 못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36)” 베드로는 바로 너희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다고 하였습니다. 사실 그들 가운데 대부분이 외국에서 온 사람들입니다. 그런데도 너희가 죽였다고 하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이는 바로 그들의 죄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나의 죄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것입니다. 나의 교만의 죄, 불순종의 죄, 정욕의 죄, 배은망덕의 죄, 감사치 않고 불평한 죄, 안일의 죄, 이러한 나의 죄가 아무 죄 없으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것입니다.
베드로의 메시지를 들은 그들의 반응이 어떠했습니까? 내가 언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았느냐? 생사람 잡지 말라고 펄쩍 뛰었습니까? 아닙니다. 37절을 보십시오. 그들은 양심의 가책을 받고 마음에 찔려 그들의 죄로 인해 상하고 통회하는 심정이 되었습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우리가 어찌할꼬?” 이것이 진실된 회개의 자세입니다. 죄를 깨닫게 하는 이것이 성령의 역사입니다.
베드로는 이런 그들에게 구원의 길을 분명히 제시해 주었습니다. 38절을 보십시요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우리가 믿음의 길에 들어가려면 가장 먼저 회개해야 합니다. 회개는 구원에 이르는 관문입니다. 회개란 자신의 죄를 진실되게 뉘우치고 방향을 바꾸는 것입니다. 그 후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아야 합니다. 이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신앙고백하고 이제는 예수님께 속한 사람이 되었다는 증표로 받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보배 피로 죄사함을 받고 마음이 정결케 되면 깨끗한 마음에 성령이 임하여 내주하시게 됩니다. 성령은 회개하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 자에게는 누구든지 하나님께서 값없이 주시는 선물입니다. 베드로는 여러 말로 확증하며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도록 권면했습니다.(40)
베드로의 부활 메시지를 들은 사람들은 그날로 세례를 받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게 되었습니다. 120명의 제자들이 성령의 충만을 받고 복음을 전했을 때 25배의 폭발적인 성장을 이루어 3120명이 되었습니다. 초대 교회의 모습이 어떠했습니까? 42절을 보십시오.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 그들의 모임은 말씀 중심이었습니다. 그들은 가장 먼저 성경 공부하기에 힘썼습니다. 말씀을 서로 사랑하고 말씀을 경외하고 말씀에 순종하는 모임만이 생명력이 넘치고 하나님이 쓰실 수 있습니다. 말씀 중심이 되지 아니할 때 자연히 영적 생명력을 상실해 버려 복이나 구하고 자기 만족이나 구하는 샤마니즘으로 흐르게 됩니다.
그들은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었습니다. 사랑이란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아주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것입니다. 사랑은 음식을 함께 먹는데서 오고 가는 것입니다. 그들은 된장찌게를 끓여 놓고 서로 초대했을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혼자 할 수 없고 반드시 공동체를 통해서만이 가능합니다. 그들은 모여서 간절히 기도하기에 힘썼습니다. 그들은 개인기도, 새벽기도, 둘씩 기도, 합심기도, 만나면 기도, 헤어지기 전에 기도, 무시로 기도를 했습니다. 기도하는 곳에 자연히 성령의 역사가 있습니다. 기도하는 곳에 사단이 놀라 도망가 버립니다. 하나님은 기도하는 자와 기도하는 모임을 귀히 쓰십니다. 사도들로 인해 능력의 역사가 나타나 믿는 사람들의 마음에 욕심과 이기주의가 사라졌습니다. 이로 인해 그들은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재산을 팔아 필요에 따라 나누어 썼습니다. 또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했습니다. 아름다운 신자의 공동체가 이루어 졌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모임을 통해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서로 사랑하는 아름다운 공동체를 이루고 양들을 섬기기를 기도합니다. 이번 가을 수양회에 길 잃은 양들을 적극 초청하여 홍익대로부터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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