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2004년 사도행전 제 1 강(1:1-26) /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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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사도행전 제 1 강 176,179
말씀 / 사도행전 1:1-26
요절 / 사도행전 1:8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사도행전은 누가 복음의 후속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은 예수님의 지상 사역과 십자가에 서 죽으시고 부활, 승천하신 사건을 기록하였습니다. 이에 비해서 사도행전은 그 이후 제자들이 어떻게 예수님의 사역을 계승하고 교회가 확장되어 가는지 기록하고 있습니다. 1-7장은 예루살렘에서의 증거, 8-12장은 유대와 사마리아에서의 증거, 13-28장은 땅 끝까지 복음이 확장되는 과정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은 성령께서 친히 사도들을 통해 일하시고 세계선교를 이루어 나가심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또 사도행전의 특징 중의 하나는 결론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는 성령의 역사가 오늘날까지도 계속되고 있음을 말해 줍니다. 또 사도행전은 사도들과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는 ‘말씀의 역사’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6:7) 이러한 말씀 전파를 통해서 교회가 탄생하고 성장했습니다. 우리가 사도행전 공부를 통해서 선교 신앙을 새롭게 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Ⅰ.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1-11)
1,2절을 보십시오. “데오빌로여 내가 먼저 쓴 글에는 무릇 예수의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심부터 그의 택하신 사도들에게 성령으로 명하시고 승천하신 날까지의 일을 기록하였노라.” 데오빌로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라는 뜻으로서 모든 성도들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사심을 나타내셨습니다. 그는 며칠만 계셨던 것이 아니라 사십 일 동안 제자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또 그가 부활하신 것을 몇 사람만 본 것이 아니라 오백 명 이상이 함께 보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못 박힌 손과 옆구리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고기와 떡을 먹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몸으로 부활하신 것을 확실히 믿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사십 일 동안 저희에게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성경의 대주제입니다. 예수님은 사역을 시작하실 때부터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고 선포하셨습니다. 또한 최후의 만찬 석상에서도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유월절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이루기까지 다시 먹지 아니하리라(눅22:16)”고 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예수님이 오셔서 귀신을 쫓아내고 소경의 눈을 뜨게 하고 문둥이를 깨끗케 하고 복음을 전하심으로 우리 마음에 임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완성될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까지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는 사명이 주어져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이 일을 할 수 있도록 어떻게 준비를 시키셨습니까? 4,5절을 보십시오. “사도와 같이 모이사 저희에게 분부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 제자들은 예루살렘을 떠나기를 원했습니다. 그곳은 두렵고 체포의 위험이 있는 곳입니다. 제자들은 고향 갈릴리로 돌아가서 편히 살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으로부터 죄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가 시작되어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을 상기시키셨습니다(눅24:47). 제자들은 예루살렘에서 성령으로 세례를 받고 능력을 받게 될 것입니다. 성령 세례란 예수님을 믿고 거듭나 새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물론 제자들은 이미 중생하였지만 역사적인 상황으로 인해서 반복될 것입니다. 그들은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사도들은 간절히 소원하던 바를 아뢰었습니다.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은 그들에게 한 맺힌 문제였습니다. 그들은 다윗 왕국의 영광을 회복하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황제 우상 숭배의 위협으로부터 자유롭고 싶었습니다. 또한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고생한 것을 끝내고 영광을 누리고 싶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도 각자 회복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인생 문제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에 대해서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 바 아니요”라고 하십니다. 그들에게 이스라엘 회복은 하나님의 주권에 달린 문제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통일 한국 제사장 나라를 꿈꾸지만 그 때는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일입니다. 우리는 변화무쌍한 세계사를 하나님께서 주관하신다는 사실을 믿고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에 충성을 다해야 합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8절을 보십시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성령이 임하시면 그들이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해서 땅 끝까지 선교를 하라고 하십니다. 성령은 우리가 예수님을 증거 할 수 있도록 권능을 주십니다. 성령의 능력이 없이는 아무도 예수님을 증거 할 수 없습니다. 성령의 능력을 덧입지 못하면 상처받기 쉬운 마음과 죄의 소원을 따라서 세상 것들에 대해서 많은 말을 하게 됩니다. 또는 열정을 가지고 자기 자신에 대해서 말합니다. 그러나 성령이 임하실 때 우리는 예수님에 대해서 담대하게 증거 할 수 있습니다. 요15:26,27절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아버지께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 증거하느니라.”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역사하실 때 우리는 불타는 심정으로 예수님을 증거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예수님의 증인이 될 사람들은 예수님과의 인격적인 체험이 있고 십자가로 인한 죄사함을 체험한 사람, 부활 신앙이 있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사랑에 감동이 된 사람은 순교적인 자세로 복음을 전할 수 있습니다. 그때 회심자를 얻을 수 있습니다. 증인은 순교자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하는 것도 순교적인 자세가 필요합니다. 복음을 전하고 선교하기 위해서 기도만 해서는 안 됩니다. 행동이 따라야 합니다. 예수님의 증인이 되는 것은 말씀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나가서 전하는 행동이 뒤따라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위기에 때에 믿음으로부터 오는 비범한 용기를 보여 줌으로써 예수님의 증인이 될 수 있습니다(행4:13). 이기적인 세상에서 희생적으로 다른 사람을 사랑함으로써 예수님의 증인이 될 수 있습니다(행4:32). 고난의 때에 하나님의 주권을 믿음으로 감사와 기쁨을 나타냄으로서 예수님의 증인이 될 수 있습니다. 성령은 우리가 말씀과 행동으로 예수님의 증인이 되게 하십니다.
8절을 다시 보십시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여기서 세계 복음화의 계획을 드러내셨습니다. 사도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죽으신 예루살렘에서부터 증인이 되기 시작해야 합니다. 예루살렘에는 그들에게 적대적인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또한 그곳에는 복음을 믿을 준비가 된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곳은 하나님께서 성령의 역사를 시작하고자 택하신 장소입니다. 우리는 내가 지금 있는 곳에서부터 증인이 되기 시작해야 합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해 이곳이 선교를 시작하기에 적당한 장소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진정한 문제는 그들이 예수님의 증인이 되기 위해서 성령의 권능을 받지 못한데 있습니다. 우리 안에 성령이 역사하실 때 어떤 장소건 간에 열매가 풍성한 선교지가 될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유대뿐만 아니라 적대적인 사마리아 사람들에게도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유대인과 사마리아 인은 문화와 인종적인 편견으로 인해서 수세기 동안 서로 상종치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복음은 보편적입니다. 그것은 모든 사람들에게 전해져야 합니다. 모든 사람은 죄인이고 모든 사람이 그들의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을 때 구원을 받습니다. 유대와 사마리아에 복음이 전파됨으로서 모든 인간적인 장벽들이 무너져 내리고 세상에 진정한 평화가 오게 될 것입니다.
그들을 압제하는 로마에도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그들은 땅 끝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선교는 모든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의 보편적인 사랑을 나타냅니다. 하나님은 전 세계의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십니다. 그는 한 사람도 멸망치 않고 모든 사람이 다 구원받기를 원하십니다. 이 때문에 그는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서 십자가에 못 박혀 세상의 모든 죄를 담당하셨습니다. 이 때문에 예수님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고 그를 믿는 모든 사람에게 구원의 근원이 되셨습니다. 이 때문에 그는 사도들을 그의 증인으로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현재 기독교 인구는 세계 인구의 30% 정도이고 아직 70%가 비 기독교인입니다. 그 중에 복음을 들었지만 영접하지 않은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아예 들어보지 못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우리는 홍익대에서부터 시작해서 세계 7000개 캠퍼스에 복음을 전하기를 원합니다. 또한 모슬렘과 북한에도 복음을 전해서 구원 역사를 이루어야 합니다.
9-11절을 보십시오. “이 말씀을 마치시고 저희 보는 데서 올리워 가시니 구름이 저를 가리워 보이지 않게 하더라. 올라가실 때에 제자들이 자세히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데 흰 옷 입은 두 사람이 저희 곁에 서서 가로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 예수님의 승천은 우리에게 하나님 나라를 계시해 줍니다. 그것은 또한 예수님께서 큰 권능과 영광으로 재림하실 것을 보여 줍니다. 그 백성들의 선한 목자이셨던 예수님께서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세우기 위해서 왕이요 심판장으로 다시 오실 것입니다. 때때로 우리는 하늘을 멍하니 쳐다보면서 제자들처럼 그가 다시 돌아오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천사는 우리에게 촉구합니다.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예수님의 증인이 되어 세계 선교 사명에 동참하라!”
Ⅱ. 성령의 그릇을 만든 제자들(12-26)
제자들은 감람원이라 하는 산으로부터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그들은 마가의 다락방에 올라갔습니다. 베드로, 요한, 야고보, 안드레와 빌립, 도마와 바돌로매, 마태와 및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셀롯인 시몬, 야고보의 아들 유다가 다 거기 있었습니다. 사실 이들은 서로가 매우 다르기 때문에 함께 하기 힘든 사람들이었습니다. 셀롯인 시몬이 볼 때 마태는 반역자요 물질주의자요 이기적인 자였습니다. 마태가 볼 때 셀롯인 시몬은 이상주의자였습니다. 베드로와 요한, 야고보도 함께 하기 어려운 사람들이었습니다. 베드로가 생각할 때 요한과 야고보는 항상 자기의 자리를 넘보고 있었습니다. 또 요한과 야고보가 생각할 때 베드로는 내용도 없으면서 나서기를 좋아하고 큰 소리만 잘 쳤습니다. 그들은 서로를 영접하기가 어렵고 함께 일하기 힘든 사람들이었습니다. 무엇보다 그들의 소망이 세상에 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이루실 왕국을 인간적이고 지상 왕국차원에서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인간적인 야심과 경쟁심의 종노릇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하나님의 왕국이 실제적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들의 소망이 변화되었습니다. 그들은 세상의 것들은 풀의 꽃과 같이 일시적이지만 하나님 나라는 영원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세상의 것들은 불완전하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완전하고 거룩하고 아름다움을 발견했습니다. 그들은 이기적인 야심과 세상 영광을 추구하는데서 자유롭게 되었습니다.
이때 사도들은 무엇을 했습니까? 14절을 보십시오. “여자들과 예수의 모친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로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전혀 기도에 힘쓰니라.” 여기서 우리는 몇 가지를 배울 수 있습니다.
첫째, 사도들은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전에는 예수님만이 기도하셨습니다. 제자들은 기도해야만 해야 할 때 주로 잠을 잤습니다(눅22:46). 그러나 이제 그들은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기도는 영적인 사람들의 주된 행동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믿음의 표현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에 사도들은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무엇을 위해서 기도했습니까? 그들은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예수님의 증인이 되기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그들은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라고 기도했음에 틀림없습니다(눅11:2). 세계 선교 사명이 그들에게 너무 무거운 것이라고 못들은 척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믿음으로 그것을 영접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위해서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때때로 우리는 한국을 복음화시키고 모슬렘과 북한을 복음화시킨다는 것이 불가능하게 여겨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초대 교회 성도들로부터 세계 선교 사명을 영접하고 힘써 기도한 것을 배우게 됩니다. 또한 그들은 성령의 선물을 주시도록 기도했습니다. 예수님은 눅11:13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그들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성령을 주실 것을 기다리면서 가만히 앉아 있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간절히 성령의 권능을 주시도록 기도했습니다.
둘째, 그들은 합심해서 기도했습니다. 합심하는 것은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들은 아주 특이한 개성을 가지고 있었고 주도권을 잡기 위해서 투쟁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합심해서 기도했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서로를 하나님의 관점에서 바라보고,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명의 빛 속에서 볼 때 가능했습니다. 세계 선교 사명은 그들이 함께 일해야만 감당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들 모두에게 전적인 헌신을 요구했습니다. 그들이 세계 선교 명령의 빛 속에서 서로를 보았을 때 그들은 같은 팀이지 경쟁자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서로를 인정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공동의 목적 안에서 하나가 될 수 있었습니다.
열 한 명의 사도들은 유대의 권력에 비해서 아주 작게 보이고 로마 제국에 비해서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기도 속에서 지속적으로 하나가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강력하게 사용하실 수 있는 그릇이 만들어졌습니다. 예수님의 사람들이 세계 선교 명령에 순종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나가 될 때 불가능할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가장 깊은 기도 제목은 제자들이 하나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요17:20,21절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저희 말을 인하여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셋째, 그들은 전혀 기도에 힘썼습니다. "전혀“라는 말은 그들이 기도에 온전히 헌신했음을 말해줍니다. 그들의 주된 행동은 함께 기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둘씩 모여 기도하고 요회별로 기도하고 전체적으로 기도했습니다. 그들이 한번 기도를 다 끝내고 나서 또 전체 합심 기도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의 기도 모임은 열흘 동안 계속되었습니다. 의심할 것도 없이 그들 중에는 기도하다가 조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기도는 계속되었습니다. 이러한 종류의 헌신에는 희생이 따릅니다. 그들에게 기도는 여러 활동 중의 하나가 아니라 주된 활동이었습니다. 지금 우리는 가을 수양회를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 모임을 축복하사 우리 가운데 강력한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기를 기도합니다.
그때 모인 무리의 수가 한 일백 이십명이나 되었습니다. 그 때에 베드로가 그 형제 가운데 일어서서 해결되지 않은 문제를 끄집어냈습니다. 그것은 가룟 유다 문제였습니다. 가룟 유다의 문제는 제자들의 합심 동역을 깨뜨릴 수 있는 아킬레스건이었습니다. 갸룟 유다는 그들이 3년 반 동안 동고동락하면서 인간적으로 친했던 사람입니다. 유다는 예수님을 배반하고 팔았을 뿐만 아니라 비참한 최후를 마쳤습니다. 그들은 가룟 유다에 대해서 동정심을 갖고 인간적인 생각을 하기 쉬웠습니다. 예수님께서 유다를 잘못 택하신 것이 아닌가? 예수님께서 유다를 택하셨으면 어떻게 그가 배반자가 될 수 있는가? 예수님께서 실수하신 것이 아닌가? 만약 그렇다면 자신들의 부르심도 의심스러웠습니다. 그들은 정말로 서로를 신뢰할 수 없게 될 수 있습니다. 더욱이 유다의 비극적인 죽음은 예루살렘에 널리 퍼진 스캔들이었습니다. 그것은 사단이 역사할 수 있는 꼬투리가 되었습니다. 만약 그들이 정말로 한 마음이 되고 한 방향으로 가기를 원한다면 이 문제는 반드시 해결되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고통스러운 것이었습니다. 아무도 그것을 다루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그때 믿음으로 베드로가 일어섰습니다 .
베드로가 말했습니다. “형제들아 성령이 다윗의 입을 의탁하사 예수 잡는 자들을 지로한 유다를 가리켜 미리 말씀하신 성경이 응하였으니 마땅하도다.” 베드로는 유다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발견했습니다. 그것은 유다를 가리켜 미리 말씀하신 성경이 응한 것이었습니다. 베드로가 “말씀하신 성경이 응하였으니”라는 말을 사용한 것은 매우 놀랍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자신의 고난과 죽음과 부활을 설명할 때 반복해서 사용하셨던 말씀입니다(눅18:31, 22:37, 24:44). 베드로는 예수님에게서, 현실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들을 이해하고 보는 법을 배웠습니다. 그가 고통스러운 문제를 하나님의 말씀 앞으로 가지고 왔을 때 하나님께서 위로부터 해결책을 그에게 주셨습니다. 20절을 보십시오. “시편에 기록하였으되 그의 거처로 황폐하게 하시며 거기 거하는 자가 없게 하소서 하였고 또 일렀으되 그 직분을 타인이 취하게 하소서 하였도다.” 개인적인 성경 공부를 통해서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던 유다의 배반이 성경을 응하게 하는 것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눅22:22). 그것은 쓴 한약을 먹는 것처럼 어렵지만, 유다의 배반은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는 것이었습니다. 유다는 실패했지만 하나님은 실패하지 않으셨습니다. 사실 예수님은 유다의 배반에 대해서 특히 요한복음에서 여러 번 경고하셨습니다. 그들은 그 이유를 이해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 편에서 받아들이고 하나님께 대한 신뢰를 새롭게 했습니다. 이러한 기초 위에 그들은 서로를 신뢰하게 되었고 기독교 공동체를 이루며 헌신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교제는 인간적인 교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다스림을 받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존재했습니다. 유다의 배반과 같은 고통스런 문제조차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가룟 유다의 직분을 대신할 사람을 제비뽑아서 맛디아로 대신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 그들은 성령의 그릇을 견고하게 이루었습니다.
선교는 기독교의 본질입니다. 선교하지 않는 교회는 존재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가 세계 선교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간절히 합심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주의 깊게 듣고 성령의 그릇을 이루어야 합니다. 우리가 그렇게 할 때 하나님께서 이 나라를 계속해서 거룩한 백성이요 제사장 나라로 쓰시며, 모슬렘과 북한 개척도 이루어 주실 줄 믿습니다.
말씀 / 사도행전 1:1-26
요절 / 사도행전 1:8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사도행전은 누가 복음의 후속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은 예수님의 지상 사역과 십자가에 서 죽으시고 부활, 승천하신 사건을 기록하였습니다. 이에 비해서 사도행전은 그 이후 제자들이 어떻게 예수님의 사역을 계승하고 교회가 확장되어 가는지 기록하고 있습니다. 1-7장은 예루살렘에서의 증거, 8-12장은 유대와 사마리아에서의 증거, 13-28장은 땅 끝까지 복음이 확장되는 과정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은 성령께서 친히 사도들을 통해 일하시고 세계선교를 이루어 나가심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또 사도행전의 특징 중의 하나는 결론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는 성령의 역사가 오늘날까지도 계속되고 있음을 말해 줍니다. 또 사도행전은 사도들과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는 ‘말씀의 역사’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6:7) 이러한 말씀 전파를 통해서 교회가 탄생하고 성장했습니다. 우리가 사도행전 공부를 통해서 선교 신앙을 새롭게 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Ⅰ.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1-11)
1,2절을 보십시오. “데오빌로여 내가 먼저 쓴 글에는 무릇 예수의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심부터 그의 택하신 사도들에게 성령으로 명하시고 승천하신 날까지의 일을 기록하였노라.” 데오빌로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라는 뜻으로서 모든 성도들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사심을 나타내셨습니다. 그는 며칠만 계셨던 것이 아니라 사십 일 동안 제자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또 그가 부활하신 것을 몇 사람만 본 것이 아니라 오백 명 이상이 함께 보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못 박힌 손과 옆구리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고기와 떡을 먹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몸으로 부활하신 것을 확실히 믿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사십 일 동안 저희에게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성경의 대주제입니다. 예수님은 사역을 시작하실 때부터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고 선포하셨습니다. 또한 최후의 만찬 석상에서도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유월절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이루기까지 다시 먹지 아니하리라(눅22:16)”고 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예수님이 오셔서 귀신을 쫓아내고 소경의 눈을 뜨게 하고 문둥이를 깨끗케 하고 복음을 전하심으로 우리 마음에 임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완성될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까지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는 사명이 주어져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이 일을 할 수 있도록 어떻게 준비를 시키셨습니까? 4,5절을 보십시오. “사도와 같이 모이사 저희에게 분부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 제자들은 예루살렘을 떠나기를 원했습니다. 그곳은 두렵고 체포의 위험이 있는 곳입니다. 제자들은 고향 갈릴리로 돌아가서 편히 살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으로부터 죄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가 시작되어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을 상기시키셨습니다(눅24:47). 제자들은 예루살렘에서 성령으로 세례를 받고 능력을 받게 될 것입니다. 성령 세례란 예수님을 믿고 거듭나 새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물론 제자들은 이미 중생하였지만 역사적인 상황으로 인해서 반복될 것입니다. 그들은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사도들은 간절히 소원하던 바를 아뢰었습니다.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은 그들에게 한 맺힌 문제였습니다. 그들은 다윗 왕국의 영광을 회복하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황제 우상 숭배의 위협으로부터 자유롭고 싶었습니다. 또한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고생한 것을 끝내고 영광을 누리고 싶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도 각자 회복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인생 문제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에 대해서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 바 아니요”라고 하십니다. 그들에게 이스라엘 회복은 하나님의 주권에 달린 문제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통일 한국 제사장 나라를 꿈꾸지만 그 때는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일입니다. 우리는 변화무쌍한 세계사를 하나님께서 주관하신다는 사실을 믿고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에 충성을 다해야 합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8절을 보십시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성령이 임하시면 그들이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해서 땅 끝까지 선교를 하라고 하십니다. 성령은 우리가 예수님을 증거 할 수 있도록 권능을 주십니다. 성령의 능력이 없이는 아무도 예수님을 증거 할 수 없습니다. 성령의 능력을 덧입지 못하면 상처받기 쉬운 마음과 죄의 소원을 따라서 세상 것들에 대해서 많은 말을 하게 됩니다. 또는 열정을 가지고 자기 자신에 대해서 말합니다. 그러나 성령이 임하실 때 우리는 예수님에 대해서 담대하게 증거 할 수 있습니다. 요15:26,27절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아버지께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 증거하느니라.”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역사하실 때 우리는 불타는 심정으로 예수님을 증거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예수님의 증인이 될 사람들은 예수님과의 인격적인 체험이 있고 십자가로 인한 죄사함을 체험한 사람, 부활 신앙이 있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사랑에 감동이 된 사람은 순교적인 자세로 복음을 전할 수 있습니다. 그때 회심자를 얻을 수 있습니다. 증인은 순교자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하는 것도 순교적인 자세가 필요합니다. 복음을 전하고 선교하기 위해서 기도만 해서는 안 됩니다. 행동이 따라야 합니다. 예수님의 증인이 되는 것은 말씀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나가서 전하는 행동이 뒤따라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위기에 때에 믿음으로부터 오는 비범한 용기를 보여 줌으로써 예수님의 증인이 될 수 있습니다(행4:13). 이기적인 세상에서 희생적으로 다른 사람을 사랑함으로써 예수님의 증인이 될 수 있습니다(행4:32). 고난의 때에 하나님의 주권을 믿음으로 감사와 기쁨을 나타냄으로서 예수님의 증인이 될 수 있습니다. 성령은 우리가 말씀과 행동으로 예수님의 증인이 되게 하십니다.
8절을 다시 보십시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여기서 세계 복음화의 계획을 드러내셨습니다. 사도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죽으신 예루살렘에서부터 증인이 되기 시작해야 합니다. 예루살렘에는 그들에게 적대적인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또한 그곳에는 복음을 믿을 준비가 된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곳은 하나님께서 성령의 역사를 시작하고자 택하신 장소입니다. 우리는 내가 지금 있는 곳에서부터 증인이 되기 시작해야 합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해 이곳이 선교를 시작하기에 적당한 장소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진정한 문제는 그들이 예수님의 증인이 되기 위해서 성령의 권능을 받지 못한데 있습니다. 우리 안에 성령이 역사하실 때 어떤 장소건 간에 열매가 풍성한 선교지가 될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유대뿐만 아니라 적대적인 사마리아 사람들에게도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유대인과 사마리아 인은 문화와 인종적인 편견으로 인해서 수세기 동안 서로 상종치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복음은 보편적입니다. 그것은 모든 사람들에게 전해져야 합니다. 모든 사람은 죄인이고 모든 사람이 그들의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을 때 구원을 받습니다. 유대와 사마리아에 복음이 전파됨으로서 모든 인간적인 장벽들이 무너져 내리고 세상에 진정한 평화가 오게 될 것입니다.
그들을 압제하는 로마에도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그들은 땅 끝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선교는 모든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의 보편적인 사랑을 나타냅니다. 하나님은 전 세계의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십니다. 그는 한 사람도 멸망치 않고 모든 사람이 다 구원받기를 원하십니다. 이 때문에 그는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서 십자가에 못 박혀 세상의 모든 죄를 담당하셨습니다. 이 때문에 예수님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고 그를 믿는 모든 사람에게 구원의 근원이 되셨습니다. 이 때문에 그는 사도들을 그의 증인으로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현재 기독교 인구는 세계 인구의 30% 정도이고 아직 70%가 비 기독교인입니다. 그 중에 복음을 들었지만 영접하지 않은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아예 들어보지 못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우리는 홍익대에서부터 시작해서 세계 7000개 캠퍼스에 복음을 전하기를 원합니다. 또한 모슬렘과 북한에도 복음을 전해서 구원 역사를 이루어야 합니다.
9-11절을 보십시오. “이 말씀을 마치시고 저희 보는 데서 올리워 가시니 구름이 저를 가리워 보이지 않게 하더라. 올라가실 때에 제자들이 자세히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데 흰 옷 입은 두 사람이 저희 곁에 서서 가로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 예수님의 승천은 우리에게 하나님 나라를 계시해 줍니다. 그것은 또한 예수님께서 큰 권능과 영광으로 재림하실 것을 보여 줍니다. 그 백성들의 선한 목자이셨던 예수님께서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세우기 위해서 왕이요 심판장으로 다시 오실 것입니다. 때때로 우리는 하늘을 멍하니 쳐다보면서 제자들처럼 그가 다시 돌아오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천사는 우리에게 촉구합니다.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예수님의 증인이 되어 세계 선교 사명에 동참하라!”
Ⅱ. 성령의 그릇을 만든 제자들(12-26)
제자들은 감람원이라 하는 산으로부터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그들은 마가의 다락방에 올라갔습니다. 베드로, 요한, 야고보, 안드레와 빌립, 도마와 바돌로매, 마태와 및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셀롯인 시몬, 야고보의 아들 유다가 다 거기 있었습니다. 사실 이들은 서로가 매우 다르기 때문에 함께 하기 힘든 사람들이었습니다. 셀롯인 시몬이 볼 때 마태는 반역자요 물질주의자요 이기적인 자였습니다. 마태가 볼 때 셀롯인 시몬은 이상주의자였습니다. 베드로와 요한, 야고보도 함께 하기 어려운 사람들이었습니다. 베드로가 생각할 때 요한과 야고보는 항상 자기의 자리를 넘보고 있었습니다. 또 요한과 야고보가 생각할 때 베드로는 내용도 없으면서 나서기를 좋아하고 큰 소리만 잘 쳤습니다. 그들은 서로를 영접하기가 어렵고 함께 일하기 힘든 사람들이었습니다. 무엇보다 그들의 소망이 세상에 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이루실 왕국을 인간적이고 지상 왕국차원에서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인간적인 야심과 경쟁심의 종노릇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하나님의 왕국이 실제적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들의 소망이 변화되었습니다. 그들은 세상의 것들은 풀의 꽃과 같이 일시적이지만 하나님 나라는 영원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세상의 것들은 불완전하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완전하고 거룩하고 아름다움을 발견했습니다. 그들은 이기적인 야심과 세상 영광을 추구하는데서 자유롭게 되었습니다.
이때 사도들은 무엇을 했습니까? 14절을 보십시오. “여자들과 예수의 모친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로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전혀 기도에 힘쓰니라.” 여기서 우리는 몇 가지를 배울 수 있습니다.
첫째, 사도들은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전에는 예수님만이 기도하셨습니다. 제자들은 기도해야만 해야 할 때 주로 잠을 잤습니다(눅22:46). 그러나 이제 그들은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기도는 영적인 사람들의 주된 행동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믿음의 표현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에 사도들은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무엇을 위해서 기도했습니까? 그들은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예수님의 증인이 되기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그들은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라고 기도했음에 틀림없습니다(눅11:2). 세계 선교 사명이 그들에게 너무 무거운 것이라고 못들은 척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믿음으로 그것을 영접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위해서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때때로 우리는 한국을 복음화시키고 모슬렘과 북한을 복음화시킨다는 것이 불가능하게 여겨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초대 교회 성도들로부터 세계 선교 사명을 영접하고 힘써 기도한 것을 배우게 됩니다. 또한 그들은 성령의 선물을 주시도록 기도했습니다. 예수님은 눅11:13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그들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성령을 주실 것을 기다리면서 가만히 앉아 있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간절히 성령의 권능을 주시도록 기도했습니다.
둘째, 그들은 합심해서 기도했습니다. 합심하는 것은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들은 아주 특이한 개성을 가지고 있었고 주도권을 잡기 위해서 투쟁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합심해서 기도했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서로를 하나님의 관점에서 바라보고,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명의 빛 속에서 볼 때 가능했습니다. 세계 선교 사명은 그들이 함께 일해야만 감당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들 모두에게 전적인 헌신을 요구했습니다. 그들이 세계 선교 명령의 빛 속에서 서로를 보았을 때 그들은 같은 팀이지 경쟁자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서로를 인정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공동의 목적 안에서 하나가 될 수 있었습니다.
열 한 명의 사도들은 유대의 권력에 비해서 아주 작게 보이고 로마 제국에 비해서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기도 속에서 지속적으로 하나가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강력하게 사용하실 수 있는 그릇이 만들어졌습니다. 예수님의 사람들이 세계 선교 명령에 순종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나가 될 때 불가능할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가장 깊은 기도 제목은 제자들이 하나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요17:20,21절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저희 말을 인하여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셋째, 그들은 전혀 기도에 힘썼습니다. "전혀“라는 말은 그들이 기도에 온전히 헌신했음을 말해줍니다. 그들의 주된 행동은 함께 기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둘씩 모여 기도하고 요회별로 기도하고 전체적으로 기도했습니다. 그들이 한번 기도를 다 끝내고 나서 또 전체 합심 기도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의 기도 모임은 열흘 동안 계속되었습니다. 의심할 것도 없이 그들 중에는 기도하다가 조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기도는 계속되었습니다. 이러한 종류의 헌신에는 희생이 따릅니다. 그들에게 기도는 여러 활동 중의 하나가 아니라 주된 활동이었습니다. 지금 우리는 가을 수양회를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 모임을 축복하사 우리 가운데 강력한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기를 기도합니다.
그때 모인 무리의 수가 한 일백 이십명이나 되었습니다. 그 때에 베드로가 그 형제 가운데 일어서서 해결되지 않은 문제를 끄집어냈습니다. 그것은 가룟 유다 문제였습니다. 가룟 유다의 문제는 제자들의 합심 동역을 깨뜨릴 수 있는 아킬레스건이었습니다. 갸룟 유다는 그들이 3년 반 동안 동고동락하면서 인간적으로 친했던 사람입니다. 유다는 예수님을 배반하고 팔았을 뿐만 아니라 비참한 최후를 마쳤습니다. 그들은 가룟 유다에 대해서 동정심을 갖고 인간적인 생각을 하기 쉬웠습니다. 예수님께서 유다를 잘못 택하신 것이 아닌가? 예수님께서 유다를 택하셨으면 어떻게 그가 배반자가 될 수 있는가? 예수님께서 실수하신 것이 아닌가? 만약 그렇다면 자신들의 부르심도 의심스러웠습니다. 그들은 정말로 서로를 신뢰할 수 없게 될 수 있습니다. 더욱이 유다의 비극적인 죽음은 예루살렘에 널리 퍼진 스캔들이었습니다. 그것은 사단이 역사할 수 있는 꼬투리가 되었습니다. 만약 그들이 정말로 한 마음이 되고 한 방향으로 가기를 원한다면 이 문제는 반드시 해결되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고통스러운 것이었습니다. 아무도 그것을 다루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그때 믿음으로 베드로가 일어섰습니다 .
베드로가 말했습니다. “형제들아 성령이 다윗의 입을 의탁하사 예수 잡는 자들을 지로한 유다를 가리켜 미리 말씀하신 성경이 응하였으니 마땅하도다.” 베드로는 유다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발견했습니다. 그것은 유다를 가리켜 미리 말씀하신 성경이 응한 것이었습니다. 베드로가 “말씀하신 성경이 응하였으니”라는 말을 사용한 것은 매우 놀랍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자신의 고난과 죽음과 부활을 설명할 때 반복해서 사용하셨던 말씀입니다(눅18:31, 22:37, 24:44). 베드로는 예수님에게서, 현실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들을 이해하고 보는 법을 배웠습니다. 그가 고통스러운 문제를 하나님의 말씀 앞으로 가지고 왔을 때 하나님께서 위로부터 해결책을 그에게 주셨습니다. 20절을 보십시오. “시편에 기록하였으되 그의 거처로 황폐하게 하시며 거기 거하는 자가 없게 하소서 하였고 또 일렀으되 그 직분을 타인이 취하게 하소서 하였도다.” 개인적인 성경 공부를 통해서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던 유다의 배반이 성경을 응하게 하는 것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눅22:22). 그것은 쓴 한약을 먹는 것처럼 어렵지만, 유다의 배반은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는 것이었습니다. 유다는 실패했지만 하나님은 실패하지 않으셨습니다. 사실 예수님은 유다의 배반에 대해서 특히 요한복음에서 여러 번 경고하셨습니다. 그들은 그 이유를 이해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 편에서 받아들이고 하나님께 대한 신뢰를 새롭게 했습니다. 이러한 기초 위에 그들은 서로를 신뢰하게 되었고 기독교 공동체를 이루며 헌신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교제는 인간적인 교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다스림을 받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존재했습니다. 유다의 배반과 같은 고통스런 문제조차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가룟 유다의 직분을 대신할 사람을 제비뽑아서 맛디아로 대신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 그들은 성령의 그릇을 견고하게 이루었습니다.
선교는 기독교의 본질입니다. 선교하지 않는 교회는 존재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가 세계 선교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간절히 합심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주의 깊게 듣고 성령의 그릇을 이루어야 합니다. 우리가 그렇게 할 때 하나님께서 이 나라를 계속해서 거룩한 백성이요 제사장 나라로 쓰시며, 모슬렘과 북한 개척도 이루어 주실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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