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년특강 2004년 신년2강(요4:27-38)/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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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신년 말씀 제 2 강
말씀/요한복음 4:27-38
요절/요한복음 4:36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
“거두는 자가 이미 삯도 받고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 모으나니 이는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 함께 즐거워하게 하려 함이니라.”
우리가 일년 농사를 보면 뿌리는 사람이나 거두는 사람이 같습니다. 그러나 수확 시기가 오래 걸리는 작물의 경우 예를 들어 은행 나무는 어린 묘목을 심은 지 15년이 되야 첫 열매가 생기고, 25년은 되어야 성숙한 열매를 얻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심은 사람과 거두는 사람이 다를 확률이 아주 높습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예수님은 말씀 사역에 있어서도 “그런즉 한 사람이 심고 다른 사람이 거둔다 하는 말이 옳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 다 함께 즐거워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말씀의 씨는 자라고 결실하는 데 긴 시간이 걸립니다. 또한 그 긴 시간 동안 하나님의 말씀은 썩지 않고 자라나 꽃피울 만큼 생명력이 끈질깁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의 관계와 기쁨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첫째, 예수님은 거두고 힘이 생기셨습니다.
오늘 말씀의 배경이 되는 사람은 사마리아 여인입니다. 이 여인은 남편을 다섯이나 갈아치우고 다른 남자와 동거를 하고 있었습니다. 이 여인은 당시 시대 사람들이 볼 때는 도덕이 없고 이해하기 어렵고 괴팍한 신세대 여성이었습니다. 그 누구의 말도 듣지 않고 자신의 감정과 기분에 따라 사는 손가락질 받는 소문난 여인이었습니다. 어떤 사람이라도 그녀와 말붙이기가 겁나는 여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여인의 필요에서부터 출발하여 대화를 나누셨습니다. 여인을 깊이 이해하시며 생수를 화두로 깊이 있는 영적 대화를 나누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에 대해서 말씀하시고 막힌 심령을 뚫어 주셨습니다. 여인은 남편 문제로 힘들어 하다가 예수님을 만나 죄사함을 받고 참된 경배의 대상이신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되었습니다. 이 여인은 죄문제가 해결되자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에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나의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그러자 동네 사람들이 다 나아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믿게 되었습니다. 한 사람의 변화는 이렇게 수많은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끼칩니다. 그녀는 아직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살아 있는 성경이었습니다.
제자들은 동네에 들어가서 먹을 음식을 사 가지고 예수님께 돌아왔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 음식을 드리면서 “랍비여 잡수소서”라고 청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이 서로 눈이 뚱그레져서 “누가 잡수실 것을 갖다 드렸는가?”라며 이상히 여겼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사마리아 여자를 열매로 거둔 예수님은 맛있는 것을 많이 드신 것처럼 배가 불렀고 힘이 났습니다. 또 아주 만족스럽고 기뻤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이 많이 거둔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도 행전의 베드로처럼 한 번에 삼천 명이 회개하고 신자가 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마리아 여자 하나가 신자가 되었을 뿐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배가 불렀고 새로운 힘이 생겼으며 추수하는 즐거움으로 가득했습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체험이 있습니다. 한 사람과 일대일 성경 공부를 하고, 한 사람의 믿음이 새로워지고 힘을 얻거나 순종하는 것을 보고 힘과 기쁨이 생기는 체험을 했습니다. 그런 기쁨을 알기 때문에 일대일 공부를 하고 목자 생활을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힘을 얻으신 데에는 더 깊은 이유가 있었습니다. “내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나에게 두신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서 말씀을 듣고 기도를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번 방학에 나를 통해서 이루고자하는 뜻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으로서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한 사마리아 여자가 그리스도를 믿게 된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볼 때 하나님의 뜻이란 무슨 큰 것이라기보다는 한 자매님 가운데서 생겨난 믿음임을 알수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근본 뜻은 온 세상 사람이 다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근본 뜻도 시작은 한 사람으로부터입니다. 본문에서도 이 여자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수가 성 사람들이 다 예수님께로 나오게 되었고, 또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러 오셨습니다. 그는 이 마을뿐 아니라 다른 마을에도 복음을 전하러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섬기는 자로 오셨고 다른 사람을 위한 대속제물로 자신을 드리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데 대충 대충 하지 않으셨습니다. 자신의 생명을 쏟아 부으면서 사마리아 여인을 섬기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이 세상에 보내신 뜻을 이루는 가운데 참 만족과 기쁨을 누리셨습니다. 이것은 제자들이 알지 못하는 예수님의 영혼의 양식이었습니다.
둘째, 뿌리는 자의 수고가 헛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를 보는 관점이 제자들과 달랐습니다. 35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넉 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르겠다 하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 팔레스타인은 1년에 비가 두 차례 옵니다. 이른 비는 10월 정도에 오고 늦은 비는 그 다음해 5월에 옵니다. 10월에 씨를 뿌려서 다음 해 5월에 추수를 합니다. 추수 때가 되면 밀이 하얗게 됩니다. 현재는 1월 정도이기 때문에 밀이 파랗고 추수할 때가 아닙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여기서 영적 추수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제자들은 사마리아는 아직 때가 무르익지 않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에 대한 선입견과 편견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들에 대한 거부감이 있었습니다. 그들과 상종하기 싫었습니다. 빨리 밥이나 먹고 떠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의 변화를 통해서 사마리아 전체가 희어져 추수할 때라고 보셨습니다. 지금 때를 놓치면 곡식이 다 떨어져 버립니다. 예수님은 긴박감을 가지고 추수해야 된다고 보셨습니다. 그러면서 제자들에게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마리아가 이렇게 희어져 추수하게 된 것은 오래 전에 많은 선지자들이 씨를 뿌렸기 때문입니다. 엘리야, 호세아, 아모스 등 위대한 선지자들이 이곳에 눈물과 땀과 피를 흘리면서 말씀의 씨를 뿌렸습니다. 그 씨는 얼음에 싸여서도 죽지 않고 때가 되자 씨앗을 틔우고 열매를 맺게 되었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이 전도를 통해서 그 마을 전체가 예수님께 나아왔습니다. 그리고 빌립 집사의 전도로 사마리아에 놀라운 부흥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은 말씀의 끈질긴 생명력을 보셨습니다. 선지자들이 특별한 열심을 가지고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하나님께 돌아오라고 했지만 그들은 끝내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이에 하나님은 사마리아를 무자비한 앗수르 군대에게 넘겨주셨습니다. 앗수르 군대는 그 땅의 백성들을 무참히 죽였을 뿐만 아니라, 살아남은 사람들은 앗수르로 끌어다가 여러 지역에 흩어버렸습니다. 또 다른 나라에서 이방인들을 옮겨다가 사마리아 여러 성에 살게 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각기 자기 신들을 가져다가 섬겼습니다. 그러자 사마리아 사람들은 여호와도 섬기고 각자 자기 고향의 신들도 섬겼습니다. 사마리아에서 종교는 혼합되었고, 가치관, 세계관은 다원화되고 상대화되었습니다. 절대성이 없어졌습니다. 모든 것이 해체되었습니다. 도덕성, 윤리도 해체되었습니다. 그런 상태가 수백년 동안 지속되었습니다. 그런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 메시야 사상도 해체된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수백 년이 지난 후 사마리아 여자의 마음 깊은 곳에서는 그리스도를 향한 간절한 기다림이 있었습니다. 동네 사람들 마음 속에도 그런 기다림이 있었습니다. 혼합종교, 다원주의, 해체주의, 도덕 윤리의 붕괴와 같은 악 조건 속에서도 선지자들이 뿌려 놓은 말씀은 죽지 않고 자라서 꽃을 피웠습니다. 열매를 맺었습니다. 이는 말씀의 경이로운 생명력을 말해 줍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뿌리는 일을 그 자체로 기뻐하고 감당 해야 합니다. 내가 뿌린 것을 내가 거두지 못할 수 있지만 그 자체로 하나님께서 상급을 주십니다.
셋째,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의 동역이 중요합니다.
36, 37절을 보십시오. “거두는 자가 이미 삯도 받고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 모으나니 이는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 함께 즐거워하게 하려 함이니라 그런즉 한 사람이 심고 다른 사람이 거둔다 하는 말이 옳도다.” 역사를 보면 선지자들이 뿌렸고 예수님께서 거두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뿌리셨고 제자들이 거두었습니다. 제자들은 노력지 아니한 것을 거두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노력하였고 제자들은 그들이 노력한 것에 참여했습니다.
우리 나라에 놀라운 부흥이 일어나게 된 것은 수많은 순교자들이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많은 피를 흘렸기 때문입니다. 토마스 선교사는 한국에 와서 성경책 한 권을 던져주고 죽었습니다. 한 호주 선교사는 한국에 들어와서 서울에서 부산으로 옮기다가 폐결핵에 걸려 죽었습니다. 그의 삶은 헛되어 보입니다. 그러나 그의 죽음 소식을 듣고 호주에서 120명의 선교사들이 한국에 파송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복음적인 선교사들이 이 땅에 들어와서 많은 눈물과 땀을 흘리면서 복음의 씨를 뿌렸습니다. 그리고 한국에서 수많은 순교자들이 피를 흘렸습니다. 그 결과 한국은 세계 역사상 유래가 없는 영적부흥을 경험했습니다. 우리 UBF도 7,80년대에 수많은 열매를 거두었습니다. 이것은 한국 교회의 부흥과 궤를 같이 하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는 동사 분사 현재 능동태 형입니다. 이는 계속해서 역동적으로 뿌리고 거두는 것입니다. 우리는 뿌리면서 거두고 거두면서 뿌립니다. 뿌리지 않으면 거둘 수 없습니다. 거둔다는 동사의 원형은 끌어당긴다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은 끌어당기는 것입니다. 신사적으로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천국 잔치를 하시면서 그 종들에게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고 하셨습니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이렇게 끌어당기고 강권하면서 핍박을 당합니다. 이런 핍박을 두려워해서는 복음을 전하기가 어렵습니다.
저희들은 작년에 리더들이 100명씩 전도를 하기로 목표를 세우고 전도에 힘을 썼습니다. 봄학기와 가을 학기 두 번에 걸쳐서 100명에게 전도한 사람들에게 상을 주고 격려하였습니다. 50명 이상에게 복음을 전한 사람들에게도 상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리더들과 일대일을 하는 양들은 손에 꼽을 정도입니다. 우리가 수고한 것에 비해서 눈에 보이는 열매가 적은 것을 보고 낙담이 되고 힘든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힘들다고 해서 전도하는 것을 멈출 수 없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가 복음을 전하고 제자 삼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지난 성탄절 이브에도 홍대 주변에 몰려드는 청소년들에게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우리가 송년 감사제에서 보았듯이 JBF에 몇몇의 학생들이 와서 자라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들이 잘 성장하여 캠퍼스의 영적인 리더들로 자라기를 기도합니다. 우리 가운데 남아있는 양들을 보면 목자들의 동생이나 2세들이나 꾸준한 관계를 맺어온 사람들입니다. 이를 볼 때 관계 전도에 힘을 쏟아야 함을 보게 됩니다. 관계 전도를 위해서 한사람을 보고 또 보는 일이 필요합니다. 한 사람을 끈질기게 섬기는 것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캠퍼스에 올라가서 복음을 전해되 관계성을 맺기 위해서 힘을 써야 합니다.
전도는 생명을 건 싸움입니다. 전도는 영혼의 종착역을 결정하는 치열한 전쟁입니다. 전도는 하늘의 상급이 보장되는 최고의 투자입니다. 전도는 희생과 기도라는 자양분을 요구합니다. 중년의 한 신사가 예수님을 영접했습니다. 종가집 종손인 그는 예수의 ‘예’자만 들어도 손사래를 치던 사람이었습니다. 친구들 중 예수 믿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습니다. 그는 비정상인과 정상인의 기준을 예수를 믿느냐, 믿지 않느냐에 두었을 정도로 기독교 신앙에 배타적이었습니다.
2002년 2월3일. 이 사람이 교회에 첫 출석한 날입니다. 어머니 아내 자녀들은 이 완고한 가장을 위해 오랫동안 눈물의 기도를 드려왔습니다. 그는 이날 하루만큼은 비정상인의 대열에 합류하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빈 자리가 듬성듬성한 예배당을 보고 특유의 도전정신이 발동했습니다. 예배 참석 첫날, 그는 담임목사와 제직들을 음식점에 초대하고 일장 훈계를 했습니다. “교회를 이렇게 잘 지어놓고 빈 자리가 많으면 어떡합니까? 여러분이 새 신자 한 사람씩만 데려오세요. 나머지는 제가 책임집니다. 연말까지 예배당을 가득 채웁시다. 좀 열심을 내세요.” 목사도 장로도 모두 웃었습니다. 교회에 처음 나온 사람에게 한 대 얻어맞은 것 같기도 하고 그 순진무구한 당돌함에 어이가 없기도 하고…. 초신자가 사람 잡겠다고 수군대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아무튼 그는 첫날부터 호연지기를 한껏 뽐냈습니다. 그러나 집에 돌아와 정신을 차리자 깊은 고민에 잠겼습니다. 성경이 뭔지, 전도가 뭔지도 모르는 사람이 도대체 무슨 수로 예배당을 채운단 말인가. 나서기 좋아하는 성격 때문에 괜한 짓을 한 것이 후회막급이었습니다. 내가 참 미쳤지, 이 무슨 낭패란 말인가.
그날 밤, 이 중년의 남성은 무릎을 꿇고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가 말해온 것처럼 스스로 비정상인이 된 것입니다. 그날부터 기도를 하다가 넋을 놓고 눈물을 흘리는가 하면 전도를 위해 새벽에도 달려나갔습니다. 성경 수백권을 구입, 사무실에 쌓아놓고 선물할 사람들을 물색했습니다. 그에게 전도의 비법을 가르쳐준 것은 집에서 기르던 진돗개 ‘진돌이’였습니다. 1급 애견사인 그는 30년 동안 진돗개를 기르면서 그 습성을 파악했는데 진돗개는 한 번 물면 절대로 놓지 않습니다. 그는 이른바 ‘진돗개 전도법’을 전도에 적용, 폭발적인 결실을 거두었습니다. 2월10일. 예수 믿고 참석한 두 번째 주일예배. 그는 10여명의 새신자를 이끌고 보무도 당당하게 예배당에 들어섰습니다. 성도들의 눈이 휘둥그레졌습니다. 그는 1년동안 단 한 주도 혼자 예배당에 들어선 적이 없었다고 합니다. 어떤 주에는 62명의 새신자를 데려왔습니다. 그의 집요한 전도에 사람들은 혀를 내둘렀습니다. 영적 전투에서 결코 물러서는 법이 없었습니다. 그는 신앙생활을 시작한 첫해에 무려 750명의 새신자를 교회로 인도했습니다. 예배당이 가득 찬 것은 물론입니다. 이는 박병선(53·순천순동교회) 집사의 예수 믿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하려면 먼저 우리는 전도의 도구가 될 뿐 그 과정은 100% 하나님이 책임지신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가까운 데서부터 전도 대상을 찾아야 합니다. 아는 사람부터 전도해야 하는 이유는 “전도는 만나서 복음을 전하고 끝내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전도에 있어 자주 대면하는 것만한 지름길은 없습니다. ‘전도왕’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모두 끈질기다는 것입니다. 출근시간마다 집 앞에서 기다리다가 마주칠 때마다 “기도하고 있습니다”고 말했다는 ‘고구마 전도왕’ 김기동 집사, 다른 의사보다 회진을 몇 배 더 많이 돌면서까지 환자들을 자주 보고 복음을 전한 ‘의사 전도왕’ 이병욱 교수 등이 그 예입니다. 얼굴을 익힐수록 마음의 벽은 쉽게 허물어집니다. 그리고 칭찬으로 대화를 열어야 합니다. 칭찬은 젓가락이 쉽게 들어갈 수 있도록 마음 문을 말랑말랑하게 만듭니다. 물론 마음속으로는 흉을 보면서 겉으로만 칭찬하라는 뜻은 아닙니다. 칭찬거리를 찾다보면 결국 그 사람을 인간적으로 이해하게 되고 그럴 때 진심으로 전도하려는 열의도 생깁니다. 막무가내식 돌진이 예상 외의 결과를 내기도 하지만 상대를 알고 접근하는 것이 한결 효과적인 것만은 사실입니다. 수많은 전도 경험을 통해 “사람들이 일단 예수를 믿을 때는 자신의 성격이나 기질대로 믿는 경우가 많다”는 점을 파악한 한 여전도사는 ‘뜨겁게 믿을 사람’을 위해서는 통성으로 기도해주는 등 열정적인 모습을 보이고 꼼꼼하고 합리적인 사람에게는 사실적으로 접근하는 등 전략을 세웠다고 합니다. 이런 모든 것은 한 사람에 대한 뜨거운 사랑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또한 한 사람이 예수님을 믿는 과정에서 심는 사람, 물을 주는 사람, 거두는 사람이 있습니다. 고전3:6-8절을 보면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뿐이니라 심는 이와 물 주는 이가 일반이나 각각 자기의 일하는 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 ”고 했습니다. 한 사람을 제자로 세우는 과정에서 1단계로 피싱과 베이비씨팅 2단계로 리더 양육 3단계로 동역자 삼기가 있습니다. 이를 한 목자가 다 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제자 양성은 공동체의 동역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휘싱 목자, 일대일 목자, 요회 목자, 팀 목자의 동역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은사대로 동역하여 사람을 세우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음을 전하는 특권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구원하기를 기뻐하십니다. 실제로 전도하는 사람은 하지 않는 사람에 비해서 3배 이상 행복하다는 통계가 있습니다. 복음전도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길일뿐 아니라 우리의 영적인 행복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수단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은 성령의 충만함과 성령의 능력을 많이 체험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단을 거두리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시126:5,6). 저희가 새해에는 더욱 다양한 방법으로 생명의 말씀을 캠퍼스 지성인들에게 뿌리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우리가 10년 후 학생들이 학사의 네 배가 되는 역사를 이루기 위해서 학생들에게 매력적인 모임으로 가꾸어 가기를 기도합니다. 특히 학생들을 영적으로 사회적으로 준비된 리더로 키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장래에 거둘 것을 바라보고 열심히 씨를 뿌리기를 바랍니다.
말씀/요한복음 4:27-38
요절/요한복음 4:36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
“거두는 자가 이미 삯도 받고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 모으나니 이는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 함께 즐거워하게 하려 함이니라.”
우리가 일년 농사를 보면 뿌리는 사람이나 거두는 사람이 같습니다. 그러나 수확 시기가 오래 걸리는 작물의 경우 예를 들어 은행 나무는 어린 묘목을 심은 지 15년이 되야 첫 열매가 생기고, 25년은 되어야 성숙한 열매를 얻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심은 사람과 거두는 사람이 다를 확률이 아주 높습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예수님은 말씀 사역에 있어서도 “그런즉 한 사람이 심고 다른 사람이 거둔다 하는 말이 옳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 다 함께 즐거워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말씀의 씨는 자라고 결실하는 데 긴 시간이 걸립니다. 또한 그 긴 시간 동안 하나님의 말씀은 썩지 않고 자라나 꽃피울 만큼 생명력이 끈질깁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의 관계와 기쁨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첫째, 예수님은 거두고 힘이 생기셨습니다.
오늘 말씀의 배경이 되는 사람은 사마리아 여인입니다. 이 여인은 남편을 다섯이나 갈아치우고 다른 남자와 동거를 하고 있었습니다. 이 여인은 당시 시대 사람들이 볼 때는 도덕이 없고 이해하기 어렵고 괴팍한 신세대 여성이었습니다. 그 누구의 말도 듣지 않고 자신의 감정과 기분에 따라 사는 손가락질 받는 소문난 여인이었습니다. 어떤 사람이라도 그녀와 말붙이기가 겁나는 여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여인의 필요에서부터 출발하여 대화를 나누셨습니다. 여인을 깊이 이해하시며 생수를 화두로 깊이 있는 영적 대화를 나누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에 대해서 말씀하시고 막힌 심령을 뚫어 주셨습니다. 여인은 남편 문제로 힘들어 하다가 예수님을 만나 죄사함을 받고 참된 경배의 대상이신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되었습니다. 이 여인은 죄문제가 해결되자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에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나의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그러자 동네 사람들이 다 나아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믿게 되었습니다. 한 사람의 변화는 이렇게 수많은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끼칩니다. 그녀는 아직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살아 있는 성경이었습니다.
제자들은 동네에 들어가서 먹을 음식을 사 가지고 예수님께 돌아왔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 음식을 드리면서 “랍비여 잡수소서”라고 청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이 서로 눈이 뚱그레져서 “누가 잡수실 것을 갖다 드렸는가?”라며 이상히 여겼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사마리아 여자를 열매로 거둔 예수님은 맛있는 것을 많이 드신 것처럼 배가 불렀고 힘이 났습니다. 또 아주 만족스럽고 기뻤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이 많이 거둔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도 행전의 베드로처럼 한 번에 삼천 명이 회개하고 신자가 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마리아 여자 하나가 신자가 되었을 뿐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배가 불렀고 새로운 힘이 생겼으며 추수하는 즐거움으로 가득했습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체험이 있습니다. 한 사람과 일대일 성경 공부를 하고, 한 사람의 믿음이 새로워지고 힘을 얻거나 순종하는 것을 보고 힘과 기쁨이 생기는 체험을 했습니다. 그런 기쁨을 알기 때문에 일대일 공부를 하고 목자 생활을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힘을 얻으신 데에는 더 깊은 이유가 있었습니다. “내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나에게 두신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서 말씀을 듣고 기도를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번 방학에 나를 통해서 이루고자하는 뜻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으로서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한 사마리아 여자가 그리스도를 믿게 된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볼 때 하나님의 뜻이란 무슨 큰 것이라기보다는 한 자매님 가운데서 생겨난 믿음임을 알수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근본 뜻은 온 세상 사람이 다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근본 뜻도 시작은 한 사람으로부터입니다. 본문에서도 이 여자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수가 성 사람들이 다 예수님께로 나오게 되었고, 또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러 오셨습니다. 그는 이 마을뿐 아니라 다른 마을에도 복음을 전하러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섬기는 자로 오셨고 다른 사람을 위한 대속제물로 자신을 드리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데 대충 대충 하지 않으셨습니다. 자신의 생명을 쏟아 부으면서 사마리아 여인을 섬기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이 세상에 보내신 뜻을 이루는 가운데 참 만족과 기쁨을 누리셨습니다. 이것은 제자들이 알지 못하는 예수님의 영혼의 양식이었습니다.
둘째, 뿌리는 자의 수고가 헛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를 보는 관점이 제자들과 달랐습니다. 35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넉 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르겠다 하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 팔레스타인은 1년에 비가 두 차례 옵니다. 이른 비는 10월 정도에 오고 늦은 비는 그 다음해 5월에 옵니다. 10월에 씨를 뿌려서 다음 해 5월에 추수를 합니다. 추수 때가 되면 밀이 하얗게 됩니다. 현재는 1월 정도이기 때문에 밀이 파랗고 추수할 때가 아닙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여기서 영적 추수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제자들은 사마리아는 아직 때가 무르익지 않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에 대한 선입견과 편견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들에 대한 거부감이 있었습니다. 그들과 상종하기 싫었습니다. 빨리 밥이나 먹고 떠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의 변화를 통해서 사마리아 전체가 희어져 추수할 때라고 보셨습니다. 지금 때를 놓치면 곡식이 다 떨어져 버립니다. 예수님은 긴박감을 가지고 추수해야 된다고 보셨습니다. 그러면서 제자들에게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마리아가 이렇게 희어져 추수하게 된 것은 오래 전에 많은 선지자들이 씨를 뿌렸기 때문입니다. 엘리야, 호세아, 아모스 등 위대한 선지자들이 이곳에 눈물과 땀과 피를 흘리면서 말씀의 씨를 뿌렸습니다. 그 씨는 얼음에 싸여서도 죽지 않고 때가 되자 씨앗을 틔우고 열매를 맺게 되었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이 전도를 통해서 그 마을 전체가 예수님께 나아왔습니다. 그리고 빌립 집사의 전도로 사마리아에 놀라운 부흥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은 말씀의 끈질긴 생명력을 보셨습니다. 선지자들이 특별한 열심을 가지고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하나님께 돌아오라고 했지만 그들은 끝내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이에 하나님은 사마리아를 무자비한 앗수르 군대에게 넘겨주셨습니다. 앗수르 군대는 그 땅의 백성들을 무참히 죽였을 뿐만 아니라, 살아남은 사람들은 앗수르로 끌어다가 여러 지역에 흩어버렸습니다. 또 다른 나라에서 이방인들을 옮겨다가 사마리아 여러 성에 살게 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각기 자기 신들을 가져다가 섬겼습니다. 그러자 사마리아 사람들은 여호와도 섬기고 각자 자기 고향의 신들도 섬겼습니다. 사마리아에서 종교는 혼합되었고, 가치관, 세계관은 다원화되고 상대화되었습니다. 절대성이 없어졌습니다. 모든 것이 해체되었습니다. 도덕성, 윤리도 해체되었습니다. 그런 상태가 수백년 동안 지속되었습니다. 그런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 메시야 사상도 해체된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수백 년이 지난 후 사마리아 여자의 마음 깊은 곳에서는 그리스도를 향한 간절한 기다림이 있었습니다. 동네 사람들 마음 속에도 그런 기다림이 있었습니다. 혼합종교, 다원주의, 해체주의, 도덕 윤리의 붕괴와 같은 악 조건 속에서도 선지자들이 뿌려 놓은 말씀은 죽지 않고 자라서 꽃을 피웠습니다. 열매를 맺었습니다. 이는 말씀의 경이로운 생명력을 말해 줍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뿌리는 일을 그 자체로 기뻐하고 감당 해야 합니다. 내가 뿌린 것을 내가 거두지 못할 수 있지만 그 자체로 하나님께서 상급을 주십니다.
셋째,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의 동역이 중요합니다.
36, 37절을 보십시오. “거두는 자가 이미 삯도 받고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 모으나니 이는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 함께 즐거워하게 하려 함이니라 그런즉 한 사람이 심고 다른 사람이 거둔다 하는 말이 옳도다.” 역사를 보면 선지자들이 뿌렸고 예수님께서 거두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뿌리셨고 제자들이 거두었습니다. 제자들은 노력지 아니한 것을 거두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노력하였고 제자들은 그들이 노력한 것에 참여했습니다.
우리 나라에 놀라운 부흥이 일어나게 된 것은 수많은 순교자들이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많은 피를 흘렸기 때문입니다. 토마스 선교사는 한국에 와서 성경책 한 권을 던져주고 죽었습니다. 한 호주 선교사는 한국에 들어와서 서울에서 부산으로 옮기다가 폐결핵에 걸려 죽었습니다. 그의 삶은 헛되어 보입니다. 그러나 그의 죽음 소식을 듣고 호주에서 120명의 선교사들이 한국에 파송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복음적인 선교사들이 이 땅에 들어와서 많은 눈물과 땀을 흘리면서 복음의 씨를 뿌렸습니다. 그리고 한국에서 수많은 순교자들이 피를 흘렸습니다. 그 결과 한국은 세계 역사상 유래가 없는 영적부흥을 경험했습니다. 우리 UBF도 7,80년대에 수많은 열매를 거두었습니다. 이것은 한국 교회의 부흥과 궤를 같이 하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는 동사 분사 현재 능동태 형입니다. 이는 계속해서 역동적으로 뿌리고 거두는 것입니다. 우리는 뿌리면서 거두고 거두면서 뿌립니다. 뿌리지 않으면 거둘 수 없습니다. 거둔다는 동사의 원형은 끌어당긴다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은 끌어당기는 것입니다. 신사적으로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천국 잔치를 하시면서 그 종들에게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고 하셨습니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이렇게 끌어당기고 강권하면서 핍박을 당합니다. 이런 핍박을 두려워해서는 복음을 전하기가 어렵습니다.
저희들은 작년에 리더들이 100명씩 전도를 하기로 목표를 세우고 전도에 힘을 썼습니다. 봄학기와 가을 학기 두 번에 걸쳐서 100명에게 전도한 사람들에게 상을 주고 격려하였습니다. 50명 이상에게 복음을 전한 사람들에게도 상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리더들과 일대일을 하는 양들은 손에 꼽을 정도입니다. 우리가 수고한 것에 비해서 눈에 보이는 열매가 적은 것을 보고 낙담이 되고 힘든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힘들다고 해서 전도하는 것을 멈출 수 없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가 복음을 전하고 제자 삼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지난 성탄절 이브에도 홍대 주변에 몰려드는 청소년들에게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우리가 송년 감사제에서 보았듯이 JBF에 몇몇의 학생들이 와서 자라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들이 잘 성장하여 캠퍼스의 영적인 리더들로 자라기를 기도합니다. 우리 가운데 남아있는 양들을 보면 목자들의 동생이나 2세들이나 꾸준한 관계를 맺어온 사람들입니다. 이를 볼 때 관계 전도에 힘을 쏟아야 함을 보게 됩니다. 관계 전도를 위해서 한사람을 보고 또 보는 일이 필요합니다. 한 사람을 끈질기게 섬기는 것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캠퍼스에 올라가서 복음을 전해되 관계성을 맺기 위해서 힘을 써야 합니다.
전도는 생명을 건 싸움입니다. 전도는 영혼의 종착역을 결정하는 치열한 전쟁입니다. 전도는 하늘의 상급이 보장되는 최고의 투자입니다. 전도는 희생과 기도라는 자양분을 요구합니다. 중년의 한 신사가 예수님을 영접했습니다. 종가집 종손인 그는 예수의 ‘예’자만 들어도 손사래를 치던 사람이었습니다. 친구들 중 예수 믿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습니다. 그는 비정상인과 정상인의 기준을 예수를 믿느냐, 믿지 않느냐에 두었을 정도로 기독교 신앙에 배타적이었습니다.
2002년 2월3일. 이 사람이 교회에 첫 출석한 날입니다. 어머니 아내 자녀들은 이 완고한 가장을 위해 오랫동안 눈물의 기도를 드려왔습니다. 그는 이날 하루만큼은 비정상인의 대열에 합류하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빈 자리가 듬성듬성한 예배당을 보고 특유의 도전정신이 발동했습니다. 예배 참석 첫날, 그는 담임목사와 제직들을 음식점에 초대하고 일장 훈계를 했습니다. “교회를 이렇게 잘 지어놓고 빈 자리가 많으면 어떡합니까? 여러분이 새 신자 한 사람씩만 데려오세요. 나머지는 제가 책임집니다. 연말까지 예배당을 가득 채웁시다. 좀 열심을 내세요.” 목사도 장로도 모두 웃었습니다. 교회에 처음 나온 사람에게 한 대 얻어맞은 것 같기도 하고 그 순진무구한 당돌함에 어이가 없기도 하고…. 초신자가 사람 잡겠다고 수군대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아무튼 그는 첫날부터 호연지기를 한껏 뽐냈습니다. 그러나 집에 돌아와 정신을 차리자 깊은 고민에 잠겼습니다. 성경이 뭔지, 전도가 뭔지도 모르는 사람이 도대체 무슨 수로 예배당을 채운단 말인가. 나서기 좋아하는 성격 때문에 괜한 짓을 한 것이 후회막급이었습니다. 내가 참 미쳤지, 이 무슨 낭패란 말인가.
그날 밤, 이 중년의 남성은 무릎을 꿇고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가 말해온 것처럼 스스로 비정상인이 된 것입니다. 그날부터 기도를 하다가 넋을 놓고 눈물을 흘리는가 하면 전도를 위해 새벽에도 달려나갔습니다. 성경 수백권을 구입, 사무실에 쌓아놓고 선물할 사람들을 물색했습니다. 그에게 전도의 비법을 가르쳐준 것은 집에서 기르던 진돗개 ‘진돌이’였습니다. 1급 애견사인 그는 30년 동안 진돗개를 기르면서 그 습성을 파악했는데 진돗개는 한 번 물면 절대로 놓지 않습니다. 그는 이른바 ‘진돗개 전도법’을 전도에 적용, 폭발적인 결실을 거두었습니다. 2월10일. 예수 믿고 참석한 두 번째 주일예배. 그는 10여명의 새신자를 이끌고 보무도 당당하게 예배당에 들어섰습니다. 성도들의 눈이 휘둥그레졌습니다. 그는 1년동안 단 한 주도 혼자 예배당에 들어선 적이 없었다고 합니다. 어떤 주에는 62명의 새신자를 데려왔습니다. 그의 집요한 전도에 사람들은 혀를 내둘렀습니다. 영적 전투에서 결코 물러서는 법이 없었습니다. 그는 신앙생활을 시작한 첫해에 무려 750명의 새신자를 교회로 인도했습니다. 예배당이 가득 찬 것은 물론입니다. 이는 박병선(53·순천순동교회) 집사의 예수 믿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하려면 먼저 우리는 전도의 도구가 될 뿐 그 과정은 100% 하나님이 책임지신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가까운 데서부터 전도 대상을 찾아야 합니다. 아는 사람부터 전도해야 하는 이유는 “전도는 만나서 복음을 전하고 끝내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전도에 있어 자주 대면하는 것만한 지름길은 없습니다. ‘전도왕’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모두 끈질기다는 것입니다. 출근시간마다 집 앞에서 기다리다가 마주칠 때마다 “기도하고 있습니다”고 말했다는 ‘고구마 전도왕’ 김기동 집사, 다른 의사보다 회진을 몇 배 더 많이 돌면서까지 환자들을 자주 보고 복음을 전한 ‘의사 전도왕’ 이병욱 교수 등이 그 예입니다. 얼굴을 익힐수록 마음의 벽은 쉽게 허물어집니다. 그리고 칭찬으로 대화를 열어야 합니다. 칭찬은 젓가락이 쉽게 들어갈 수 있도록 마음 문을 말랑말랑하게 만듭니다. 물론 마음속으로는 흉을 보면서 겉으로만 칭찬하라는 뜻은 아닙니다. 칭찬거리를 찾다보면 결국 그 사람을 인간적으로 이해하게 되고 그럴 때 진심으로 전도하려는 열의도 생깁니다. 막무가내식 돌진이 예상 외의 결과를 내기도 하지만 상대를 알고 접근하는 것이 한결 효과적인 것만은 사실입니다. 수많은 전도 경험을 통해 “사람들이 일단 예수를 믿을 때는 자신의 성격이나 기질대로 믿는 경우가 많다”는 점을 파악한 한 여전도사는 ‘뜨겁게 믿을 사람’을 위해서는 통성으로 기도해주는 등 열정적인 모습을 보이고 꼼꼼하고 합리적인 사람에게는 사실적으로 접근하는 등 전략을 세웠다고 합니다. 이런 모든 것은 한 사람에 대한 뜨거운 사랑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또한 한 사람이 예수님을 믿는 과정에서 심는 사람, 물을 주는 사람, 거두는 사람이 있습니다. 고전3:6-8절을 보면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뿐이니라 심는 이와 물 주는 이가 일반이나 각각 자기의 일하는 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 ”고 했습니다. 한 사람을 제자로 세우는 과정에서 1단계로 피싱과 베이비씨팅 2단계로 리더 양육 3단계로 동역자 삼기가 있습니다. 이를 한 목자가 다 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제자 양성은 공동체의 동역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휘싱 목자, 일대일 목자, 요회 목자, 팀 목자의 동역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은사대로 동역하여 사람을 세우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음을 전하는 특권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구원하기를 기뻐하십니다. 실제로 전도하는 사람은 하지 않는 사람에 비해서 3배 이상 행복하다는 통계가 있습니다. 복음전도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길일뿐 아니라 우리의 영적인 행복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수단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은 성령의 충만함과 성령의 능력을 많이 체험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단을 거두리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시126:5,6). 저희가 새해에는 더욱 다양한 방법으로 생명의 말씀을 캠퍼스 지성인들에게 뿌리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우리가 10년 후 학생들이 학사의 네 배가 되는 역사를 이루기 위해서 학생들에게 매력적인 모임으로 가꾸어 가기를 기도합니다. 특히 학생들을 영적으로 사회적으로 준비된 리더로 키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장래에 거둘 것을 바라보고 열심히 씨를 뿌리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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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회 다운로드 | DATE : 2004-01-04 08:5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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