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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2004년 누가복음 제 20 강(눅9:28-50)/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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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섬김이
댓글 0건 조회 3,304회 작성일 04-12-14 2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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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누가복음 제 20 강                                                          219
말씀/ 누가복음 9:28-50
요절/ 누가복음 9:35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이는 나의 아들 곧 택함을 받은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고”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십자가와 부활에 대한 말씀을 심기 위해서 얼마나 애를 쓰시는가 볼 수 있습니다. 십자가와 부활은 복음의 핵심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말씀을 심기 위해서 모세와 엘리야도 동원하시고 하나님께서도 직접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들어야 할 주의 말씀은 무엇입니까? 또 우리 속에서 제거되어야 할 어두운 요소는 무엇이며  우리가 어떻게 예수님과 같이 영광스러운 형상을 닮아갈 수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신앙 고백을 받으신 후 팔 일쯤 되어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기도하시러 산에 올라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신이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해야 한다는 것을 어렵게 말씀하셨는데 받아들이지 않자 고민이 되었습니다. 제자들이 영광의 그리스도만 생각하고 예수님이 고난을 통해서 이루셔야 하는 구속의 진리를 깨우치지 못하는 것을 보실 때 기도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신 것 같습니다. 기도는 예수님께서 택하신 문제 해결의 지름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충분히 기도하심으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시고 확신있게 하나님의 일을 해 나가셨습니다.

  29절을 보십시오. “기도하실 때에 용모가 변화되고 그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나더라.” 기도는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의 용모가 심히 아름답고 영광스럽게 변화되어 광채가 났습니다. 이 땅에서 하나님의 일을 하시는 동안 예수님은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어서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었습니다(사53:2). 이제까지 제자들에게 각인된 예수님의 모습은 머리 둘 곳 없이 사시는 초라하신 예수님, 종교 지도자들에게 배척 받으시고 연약한 육신을 가지신 나그네와 같은 예수님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예수님은 하나님의 영광의 형상으로 변화되셨습니다. 영광스러운 광채가 그 몸에서 나와 옷까지도 희어져 광채가 났습니다.
  사도 요한은 고난 중에 밧모 섬에서 본 영광의 예수님을 이렇게 증거했습니다.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그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으며 그의 눈은 불꽃 같고 그의 발은 풀무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그의 음성은 많은 물 소리와 같으며 그 오른 손에 일곱 별이 있고 그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그 얼굴은 해가 힘있게 비취는 것 같더라(계1:13-16).” 주님은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오 하나님의 영광과 형상을 가지신 태양과 같으신 분이십니다. 옛날 모세는 시내산 위에 올라가 하나님과 교통하고 내려올 때에 얼굴 꺼풀에 광채가 나서 사람들이 그를 가까이 하기를 두려워했습니다(출 34:29,30). 바울 사도는, 우리가 주의 영광을 봄으로써 저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되어 영광으로 영광에 이른다고 말씀했습니다(고후 3:18). 우리는 하나님과 친밀한 기도의 교통을 통해 조금씩 그의 거룩한 영광을 얻게 될 것입니다.

  왜 예수님은 이런 영광스러운 모습을 보여주셨을까요? 예수님께서 27절에 하신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일 수도 있습니다. 사실 영광스러운 모습은 예수님 본래의 모습입니다. 제자들이 고난을 영접하고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하려면 영광의 소망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복음 신앙을 심기를 원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영광스럽게 변화되셨을 때 문득 두 사람이 그와 함께 말하였는데 모세와 엘리야였습니다. 이 두 사람은 전설적인 인물들입니다. 그들은 율법과 선지자를 대표하는 인물들입니다. 또한 고난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 후에 영광도 받았습니다. 그들은 구원 역사를 섬긴 사람들입니다. 모세는 노예로 살던 이스라엘을 홍해를 건너 가나안으로 인도하였습니다. 그는 출애굽의 주역이었습니다. 그는 80년간 고난을 많이 겪었습니다. 엘리야도 아합 왕과 싸우고 바알에게 마음이 가 있는 백성들의 마음을 하나님께로 돌이켰습니다. 31절을 보십시오. “영광 중에 나타나서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씀할새” 별세란 헬라어로는 엑소더스- 즉 떠남, 탈출이란 뜻입니다. 그러므로 별세란 단순히 한 인간의 죽음이 아니라 엑소더스로서 예수님의 죽음은 세상 만민의 구원을 위한 제 2의 출애굽 역사임을 뜻합니다. 모세와 엘리야는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이루실 구속 역사의 완성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홀로 고난과 죽음의 십자가를 지셔야 할 예수님에게 모세와 엘리야가 만나 대화한 것은 십자가를 지실 힘과 위로가 되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엑소더스 시켜서 하나님 나라로 인도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모세와 엘리야로 더불어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에 대해서 말씀을 나누실 때 베드로와 및 함께 있는 자들이 곤하여 졸고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틈만 나면 졸았습니다. 그들에게 기도 시간은 조는 시간이었습니다. 다른 시간에는 눈이 말똥말똥하다가도 기도시간만 되면 졸음이 쏟아졌습니다. 우리도 심령이 막히면 기도할 때 졸음만 오게 됩니다. 아마 제자들은 자신들이 지금 무엇을 위해서 기도해야 하는지 기도 제목이 분명하지 않았습니다. 기도제목이 분명해야 기도할 힘이 생기고 응답이 옵니다. 제자들은 막연히 기도하다가 곤하여 졸다가 아주 깨어 예수님의 영광과 및 함께 선 두 사람을 보았습니다. 그들에게는 이 순간을 영원히 잊을 수 없었습니다. 이들에게는 최고의 영적 황홀경이었습니다. 후에 베드로 사도는 그의 두번째 서신에서 이 사건에 대해 이렇게 증거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강림하심을 너희에게 알게 한 것이 공교히 만든 이야기를 좇은 것이 아니요 우리는 그의 크신 위엄을 친히 본 자라. 지극히 큰 영광 중에서 이러한 소리가 그에게 나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실 때에 저가 하나님 아버지께 존귀와 영광을 받으셨느니라. 이 소리는 우리가 저와 함께 거룩한 산에 있을 때에 하늘로서 나옴을 들은 것이라”(벧후 1:16 -18). 그는 예수님께서 이렇게 영화롭고 아름다우시고 위엄에 가득 찬 분이란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신비롭고 영화로운 순간은 빨리 지나서 두 사람이 떠날 때에 베드로는 좀 더 이 영광을 간직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제안을 했습니다.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 하되 자기의 하는 말을 자기도 알지 못하더라(33).” 베드로는 영광에 취해서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몰랐습니다. 그러나 그의 속 마음이 다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그의 말은 매우 어리석었습니다. 그 엄청난 영광을 초막에 보관하여 두고 싶다고 한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사는 것은 잠시 잠깐입니다.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비하면 눈 깜짝 사이와 같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영광을 누리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아무리 좋은 것이라 할지라도 잠깐 피었다가 지는 꽃의 영광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소망을 하나님 나라에 두어야 합니다.

  34,35절을 보십시오. “이 말 할 즈음에 구름이 와서 저희를 덮는지라 구름 속으로 들어갈 때에 저희가 무서워하더니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이는 나의 아들 곧 택함을 받은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고” 여기서 구름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합니다(출19:16).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자 하나님께서 친히 임재하사 말씀하신 것입니다. 제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예수님의 구속 역사는 진행되기가 어렵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습니다. 또한 사람들은 자기가 듣고 싶은 것만 듣고자 합니다. (People hear what they want to hear.) 그래서 반복 교육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다양한 방법으로 제자들에게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시고 부활해야 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중요한 진리는 반복해서 들려주어야 합니다.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려주어야 합니다. 제자들은 영광에 관한 말씀이나 축복에 대한 말씀은 민감하게 들었습니다. 그러나 고난이나 십자가에 대한 말씀은 듣기를 싫어했습니다. 우리가 음식을 골라 먹으면 건강에 나쁜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도 달든지 쓰든지 다 받아 먹어야합니다. 그래야 건강한 영성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내가 생각하는 것, 바라는 것을 말하는 것보다 주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신앙생활은 듣는 것이 중요합니다. 잘 들을 때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36절을 보십시오. “소리가 그치매 오직 예수만 보이시더라. 제자들이 잠잠하여 그 본 것을 무엇이든지 그 때에는 아무에게도 이르지 아니하니라.” 모든 영광이 떠나가자 오직 예수님만 보였습니다. 우리에게도 결국 모든 것이 다 떠날지라도 예수님만 남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을 꼭 붙잡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제자들은 그 본 바 영광이 너무나 엄청났기 때문에 그 때에는 아무에게도 그 사실을 말하지 아니했습니다.

  이튿날 예수님과 세 제자가 변화산에서 놀라운 경험을 하고 산에서 내려왔을 때 산 밑에서 아홉 제자는 매우 난처한 입장에 처해 있었습니다. 큰 무리가 예수님을 맞이할 때에 무리 중에 한 사람이 소리를 질렀습니다. “선생님 청컨대 내 아들을 돌아보아 주옵소서 이는 내 외아들이니이다 귀신이 저를 잡아 졸지에 부르짖게 하고 경련을 일으켜 거품을 흘리게 하며 심히 상하게 하고야 겨우 떠나가나이다 당신의 제자들에게 내어 쫓아 주기를 구하였으나 저희가 능히 못하더이다(38-40).” 이 사람에게 외아들은 얼마나 귀했겠습니까? 사랑하는 아들이 귀신에 사로 잡혀 부르짖고 경련을 일으키고 거품을 흘리며 뒹굴 때에 그는 마음이 타들어가고 심히 두려웠을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귀신을 쫓아낸다는 소식을 듣고 제자들에게 찾아와서 귀신을 내어 쫓아 주기를 구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폼만 잡고 고치지 못했습니다. 제자들은 지난 번 전도 여행에서 발휘했던 실력을 마음껏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세 제자는 인삼 먹고 자라고 우리는 무시 먹고 자랐는가? 하면서 자신들의 능력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세 제자가 없어도 우리는 잘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제자들은 귀신들려 고통하고 있는 한 영혼에 대한 사랑보다 불순한 동기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간절히 믿음으로 기도하기보다 경험을 더 의지했습니다. 그들이 아무리 용을 써보아도 귀신은 꼼짝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큰 무리에게 둘러싸여 곤욕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사람은 누구든지 능력이 없다고 무시 받으면 마음이 힘이 듭니다. 어려운 양들을 고치고 살리려면 능력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능력이 없다고 꾸짖으신 것이 아니라 믿음이 없다고 책망하셨습니다. 우리 인간은 누구나 다 연약합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우리의 능력이 약할 때 곧 강하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자신의 연약함을 알 때 하나님을 의지하게 되고 그때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십니다. 우리가 그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서 일하십니다. 제자들은 이제 곧 예수님의 사역을 계승해야 할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과거의 영광에 취하여 능력을 발휘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제자들과 그 아비를 어떻게 책망하셨습니까? 41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너희를 참으리요 네 아들을 이리로 데리고 오라 하시니” 예수님은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라고 하면서 그들을 책망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충분히 함께 하셨고 믿음을 가르쳤고 훈련을 시켰는데 아직도 불신에 빠져 있는 그들을 보셨을 때 영적 분노가 생기셨습니다. 그래서 “아직까지 이 모양이냐?”하고 책망하셨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능력있게 하나님의 역사를 섬길 수 있습니까? 우리가 돕는 양들의 변화를 위해서 합심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할 때 믿음이 생깁니다. 기도하되 절대적인 자세로 기도해야 합니다. 생명을 건 기도를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동안 하나님의 역사를 섬기면서 많은 능력과 기적을 체험하고 믿음의 역사를 이루기를 기도합니다. 변화를 체험하기를 기도합니다. 믿음의 승리를 체험하기를 기도합니다. 사실 한 사람 한 사람을 돕는 것은 희생적인 사랑과 끈질긴 기도와 말씀을 심는 투쟁이 필요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면 능히 구원 역사를 이룰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 믿음의 용장들이 되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또한 이번 여름 수양회를 섬기면서 양들을 살리는 기쁨을 누리시기를 기도합니다. 우리 중에 가장 약해 보이는 분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강함이 드러나게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 중에 표가 안 나는 분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이 크게 드러날 줄 믿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아비에게 네 아들을 이리로 데리고 오라고 하시자 그 아이가 올 때에 귀신이 아이를 거꾸러뜨리고 심한 경련을 일으키게 하였습니다. 귀신은 더욱 강한 불신을 심고자 발악을 한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일하고자 할 때 이런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이란 눈에 보이는 것을 따라서 좌지우지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는 것같이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더러운 귀신을 꾸짖으시고 아이를 낫게 하사 그 아비에게 도로 주셨습니다. 사람들은 다 하나님의 위엄을 보고 놀랐습니다.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의 빛이 어두운 세상에 비쳐왔습니다. 예수님은 실제 사건을 통하여 영광의 그리스도이심을 드러내시고 제자들의 심령에 믿음을 심어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영광이 드러난 때에 다시 말씀하십니다. 44절을 보십시오. “이 말을 너희 귀에 담아 두라 인자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기우리라 하시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놀라고 기이히 여길 때에 다시 십자가와 고난을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이 영광에 눈이 가리워지기를 원치 아니하셨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이 말씀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지 못하였습니다. 이는 저희로 깨닫지 못하게 숨김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또 저희는 이 말씀을 묻기도 두려워했습니다.

  이상에서 볼 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심어야 할 말씀이 분명히 있었고 줄기차게 기회만 되면 반복해서 말씀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십자가와 부활의 길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십자가에 관한 말씀을 들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자신들의 인간적인 꿈을 부인하기가 싫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는 곧 죽음을 뜻했습니다. 누구든지 자기를 죽이는 것, 희생하는 것을 영접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9:23).”고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자 하고 그의 영광에 들어가고자 한다면 주님의 십자가의 길을 따라야 합니다. 십자가의 고난이 없는 부활의 영광은 없습니다. 십자가가 없으면 영광의 면류관도 없습니다. 우리는 은혜와 축복의 말씀에는 귀를 기울이고 잘 영접합니다. 그러나 자기 부인이나 희생, 헌신, 전도, 훈련 등의 말씀에는 귀를 막고 들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신앙 생활도 사명의 십자가 없이 축복만 누리고자 합니다. 그러나 십자가 없는 신앙 생활은 무기력하고 죽은 신앙 생활입니다. 십자가의 고통이 없이는 부활의 영광도 없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도리를 몸에  익힐 때 부활의 능력을 체험하게 되고 내면에 그리스도를 배워가는 기쁨이 충만하게 됩니다. 후에 제자들은 십자가와 부활의 비밀을 깨닫고 십자가의 고난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자랑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십자가 외에는 자신이 알기를 원치 않고 또 자랑할 것이 없다고 했습니다. 베드로가 십자가의 고난을  사랑했을 때 그는 1세기 하나님의 백성들의 목자요 위대한 인류의 스승이 될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십자가의 길이 생명의 길임을 깊이 영접하고 제자의 길을 힘차게 가기를 기도합니다.

  저자 누가는 제자들이 변화되어야 할 내면에 대해서 계속해서 다루고 있습니다. 46절을 보십시오. “제자 중에서 누가 크냐 하는 변론이 일어나니” 제자들은 평소에도 경쟁심과 시기심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실 때가 가깝고 영광을 받을 때가 다가온다고 생각되자 서열 문제가 심각해지게 되었습니다. 또한 얼마 전에 예수님께서 세 제자만 데리고 가시자 다른 아홉 제자들은 우리는 뭔가 하는 피해의식이 들었습니다. 그들은 무언가 밀리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자 누가 크냐 하는 문제로 변론을 하게 되었습니다. 열 두 제자 모두가 나름대로의 근거에 기초해서 자기가 가장 큰 자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마음에 변론하는 것을 아시고 어린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자기 곁에 세우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 어린아이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또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곧 나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라 너희 모든 사람 중에 가장 작은 그이가 큰 자니라(48).” 어린아이는 미성숙하고 언제나 도움이 필요하고 때로는 제멋대로입니다. 그러면서도 아주 고집쟁이입니다. 또 아직 훈련되지 못한 점이 많이 있습니다. 매사가 자기중심적입니다. 이런 어린아이들을 대하면 귀엽기도 하지만 때로는 화가 나기도 합니다. 영접하기가 어렵습니다. 어린 아이는 섬긴다고 해서 당장에 어떤 유익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런 어린 아이를 영접하는 것이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이요 제자 중에 가장 작은 그이가 큰 자라고 하십니다. 마음을 낮추고 다른 사람을 영접하고 함께 하는 사람이 큰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서로를 영접하고 위대한 삶을 사는 길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어린 아이들을 영접하려면 눈 높이를 맞추어야 합니다. 때로는 유치한 대화를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어른들 보기에 별것 아닌 것들이 어린아이들에게는 매우 중요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기 것을 비우고 어린 아이와 함께 나누는 삶을 사는 것이 큰 자가 되는 길입니다. 마음 중심으로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정말로 큰 자입니다.

  제자들이 버려야할 문제는 또 있었습니다. 49절을 보십시오. “요한이 여짜오되 주여 어떤 사람이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어쫓는 것을 우리가 보고 우리와 함께 따르지 아니하므로 금하였나이다.” 요한은 편협하고 배타적이었습니다. 내편이 아니면 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제자로서 독점적인 지위를 누리고자 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는 것은 우리만이 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자기를 절대화시키고 모든 사람들이 자기와 같아야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다른 것은 틀린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런 요한을 책망하셨습니다. 50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가라사대 금하지 말라 너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너희를 위하는 자니라 하시니라.” 영적 지도자로서 갖추어야 할 자세는 넓은 내면성입니다. 포용성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사도로서 강한 자부심을 갖는 것은 좋지만 그것이 독단적이고 배타적인 자세를 갖게 되면 위험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만을 위해서 오신 분이 아니라 세상 만민을 위해서 오셨습니다.

  결론적으로 우리가 불신, 세상 꿈, 자기를 높이는 마음, 편협한 마음을 죽이고 예수님의 형상을 닮아갈 때 그 영광이 영원히 빛나게 될 것입니다. 주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서 우리를 변화시키시는 주님을 찬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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