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2004년 누가복음 제 18 강(눅9:1-17)/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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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 누가복음 제 18강 284
말씀/누가복음 9:1-17
요절/누가복음 9:13a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하시니”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실전 훈련과 리더십 훈련을 시키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어떤 상황에서도 선교 사명을 감당할 수 있도록 훈련하셨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어려운 환경에 굴복하지 아니하고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고 병든 자를 치료하며, 양들을 먹일 수 있을까요? 이 시간 주님께서 저희들로 하여금 목자로 살도록 도와주시기를 기도합니다.
1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열 두 제자를 불러 모으사 모든 귀신을 제어하며 병을 고치는 능력과 권세를 주시고” 어느 날 예수님께서는 열 두 제자를 불러 모으셨습니다. 그들은 사도라 칭함을 받고 사도의 내면성이 어떠해야 하는지 배웠습니다. 또한 예수님을 따르면서 그의 위대한 사랑과 말씀을 가르치고 치료하시는 등 모든 사역을 관찰하며 배웠습니다. 광풍 훈련 등을 통해서 믿음을 배우고 죽은 자를 살리시는 역사에 동참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제 그들을 자립적인 종들로 키우기 위해서 실전 훈련을 시키고자 하셨습니다. 이를 위해서 모든 귀신을 제어하며 병을 고치는 능력과 권세를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영적인 상태를 잘 알고 계셨기 때문에 그들을 보내실 때 준비없이 보내지 아니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능력과 권세를 주셨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에게 능력이 없다고 말합니다. 또한 자신은 너무나 연약해서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사실 하나님의 권세와 능력이 없이 단순히 인간의 힘으로 구원 역사를 이룰 수 없습니다. 만약 우리가 겸손하게 하나님의 권세와 능력을 의지한다면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 귀하게 쓰임 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홍대 캠퍼스와 세계 7000개 캠퍼스에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고 앓는 자를 고치게 하려고 보내셨습니다.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에 속한 것이 아니라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악한 영들과의 싸움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영적인 실체를 무시하기 때문에 죄의 소원을 이기지 못합니다. 사단은 영적인 존재이고 그의 능력은 기가 막히게 속이는데 있습니다. 사단은 항상 의심, 교만, 열등감, 두려움, 부정적인 생각, 호색, 탐욕, 반역, 자기 영광, 이기심, 죄의 욕망 등을 자극합니다. 사단의 유혹으로 많은 젊은이들이 자기가 원하는 것을 마음대로 하는 것을 자유라고 생각하고 죄의 소원을 즐깁니다. 사단은 항상 죄의 소원을 따라 살도록 유혹합니다. 사단은 너무나 강하고 속이기 때문에 인간의 힘만으로 쫓아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권세와 능력을 사용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영적인 배후를 잘 아시기 때문에 제자들에게 귀신을 제어하며 앓는 자를 고치며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도록 권세와 능력을 주셨습니다. 육신은 멀쩡한데 죄의 상처로 인해서 영적인 병을 앓는 자들이 많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의 피로 인해 구원을 받았지만 아직까지 그 마음에 죄로 인한 깊은 상처와 아픔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진리의 말씀과 예수님의 사랑으로 이러한 상처를 싸매어 주고 치료하는 일을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 그의 마음에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고 예수님의 형상에서 자라가야 합니다. 이렇게 건강한 목자들로 인해서 하나님 나라가 캠퍼스에 전파되고 치료의 역사를 이루는 것이야 말로 가장 아름답고 고귀한 일입니다.
이 일을 잘 감당하도록 하기 위해서 예수님은 열 두 제자에게 몇 가지 지침을 주셨습니다. 첫째, 하나님만 의지해야 합니다. 3,4절을 보십시오. “이르시되 여행을 위하여 아무것도 가지지 말라 지팡이나 주머니나 양식이나 돈이나 두 벌 옷을 가지지 말며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거기서 유하다가 거기서 떠나라.” 여기서 예수님은 사람에게 꼭 필요한 세 가지를 지적하셨습니다. 그것은 양식, 옷, 집입니다. 이 세 가지 필요 때문에 사람들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어디에서 잘까” 말하고 이러한 것들을 위해서 일하고 자신들의 삶을 소비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 아버지는 그 종들의 기본적인 필요를 잘 아십니다. 그래서 그는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이것은 제자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들을 채워주시겠다는 뜻입니다. 제자들이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거기서 유하다가 떠나라고 하셨습니다. 그들은 지하실에서 잠을 잘 수도 있고, 또는 거실의 소파에서 잘 수도 있습니다. 그 집은 매일 똑같은 밥과 된장국을 대접할 수도 있습니다. 제자들은 어떤 상황에서든지 감사해야만 합니다. 그들은 더 좋은 집이나 음식이나 옷을 찾아서 이 집에서 저 집으로 옮기지 말라고 하십니다.
많은 사람들이 지금 우리 나라의 영적인 문제를 여러 가지로 지적하고 있습니다. 즉 도덕적인 부패, 음란, 스피릿 없음, 세속주의 등등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서 볼 때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물질주의입니다. 그 결과 사람들이 하나님을 의지하기보다 돈을 더 신뢰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미가 선지자의 시대에 남은 자와 같이 돈보다 하나님을 더 의지하고, 사람보다 하나님을 더 기다리는 자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미5:7). 하나님께서 이 나라를 세계 만민의 구원을 위한 제사장 나라로 축복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둘째, 제자들은 하나님의 종으로서 분명한 정체성을 가져야 합니다. 5절을 보십시오. “누구든지 너희를 영접지 아니하거든 그 성에서 떠날 때에 너희 발에서 먼지를 떨어 버려 저희에게 증거를 삼으라 하시니” 하나님의 역사가 있는 곳에 반대와 오해가 있습니다.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조차도 배척을 받고 오해를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많은 사람들에 의해서 배척받게 될 것을 아셨습니다. 그는 제자들이 실망하고 상처받게 될 것에 주의를 기울이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종으로서 진정한 정체성을 갖도록 가르쳐 주셨습니다.
사람들이 복음을 배척하게 되면 제자들도 환영하지 않게 됩니다. 하나님의 종으로서 그들은 하나님 나라의 복음과 하나님의 진노를 끝까지 전해야 합니다. 그들이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발아래 먼지를 떨어버려야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 복음을 배척하는 그들로 하여금 뜨끔하게 하고 경고를 받게 해야 합니다. 비록 제자들이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지만 영적인 권위와 사도로서의 정체성을 분명하게 가질 때 당당하게 복음을 전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종을 배척하는 것은 작은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 나라의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가질 수 있는 기회를 상실하는 것입니다. 자기들을 위해서 보냄을 받은 하나님의 종을 배척한 자들은 심판 날에 소돔과 고모라보다 견디기 어려울 것입니다(눅10:12).
제자들이 나가서 복음을 전했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6절을 보십시오. “제자들이 나가 각 촌에 두루 행하여 처처에 복음을 전하며 병을 고치더라.”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에 절대 순종하여 나아가 복음을 전했을 때 복음을 영접하고 회개하는 사람, 앓던 병이 치료되는 사람, 귀신이 나가는 사람 등등 놀라운 능력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분봉왕 헤롯이 이 모든 일을 듣고 심히 당황하였습니다. 이는 혹은 요한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다고도 하며 혹은 엘리야가 나타났다고도 하며 혹은 옛 선지자 하나가 다시 살아났다고도 하였기 때문입니다. 헤롯은 이런 일을 듣고 이 사람이 누군고 하며 저를 보고자 하였습니다. 한마디로 제자들의 사역을 통해 갈릴리가 뒤집어졌습니다. 그리고 매우 악한 헤롯마저도 당황하게 만들었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자존심을 세우기 위해서 의인 세례 요한의 목을 베어버린 자를 누가 당황하게 만들 수 있겠습니까? 복음역사가 왕성하게 일어나자 헤롯과 같이 악을 행한 자는 죄의식에 사로잡혀 심히 두려워 떨었습니다.
사도들의 전도 여행은 대 성공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모든 사람들이 강도 8.0이상 되는 영적인 지진을 체험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그들 각자가 골리앗을 때려 눕히고 돌아온 다윗처럼 느꼈습니다. 그들은 터어키를 2:1로 이긴 한국 축구 대표선수들과 같았습니다. 동시에 선교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그들은 극히 피로했습니다. 그들은 쉼이 필요했습니다.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의 선교 보고를 받으신 후 그들을 데리시고 따로 벳새다라는 고을로 떠나가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으며 교제를 나누는 오붓한 시간을 갖기 원했습니다. 그런데 11절을 보십시오. “무리가 알고 따라왔거늘 예수께서 저희를 영접하사 하나님 나라의 일을 이야기하시며 병 고칠 자들은 고치시더라.” 무리들은 광고도하지 않았는데 벳새다까지 따라옴으로 제자들의 휴양회를 망쳐놓았습니다. 제자들은 약속도 하지 않고 온 그들을 다시 섬겨야 할 것을 생각하니 더욱 마음이 힘들었습니다. 그런데 양들에게 내가 오라고 할 때 오라. 내가 준비될 때 오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입니다. 양들은 자기 문제가 항상 크기 때문입니다. 양들이 오기를 기다려본 사람은 양들이 이렇게라도 오면 여한이 없을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영접하셨습니다. 영접했다는 것은 기쁘게 환영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여자와 어린 아이를 합쳐서 만오천명되는 무리가 나아오는 것을 보셨을 때 부담스러워하지 않고 오히려 “잘 왔다”고 생각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기에게 나아오는 양들에게 무엇을 하셨습니까?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일을 이야기해 주셨습니다. 양들은 예수님께 나아와 어떤 실제적인 도움을 받고자 했습니다. 예수님은 끊임없는 인간적인 필요들을 채워주기 보다는 그들에게 하나님 나라가 가장 필요함을 아셨습니다. 사람마다 나름대로 하나님 나라를 꿈꾸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땅에서 좋은 집에 살며, 좋은 공기를 마시고, 좋은 음식을 먹으면서 행복한 삶을 살면 패러다이즈를 건설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거라사 광인에게 패러다이즈는 무덤이었습니다. 그는 거기서 편안함을 느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땅에서 영원한 행복을 누릴 수 없습니다. 존재 의미가 없고 사명이 없이 어찌 행복한 삶을 살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죄사함을 받고 하나님과 함께 거하며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삶이야말로 가장 복된 삶입니다. 또한 장차 예수님의 재림으로 이루어질 하나님 나라가 우리의 진정한 산 소망입니다.
예수님은 자기에게 나아오는 양들을 여러 가지로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은 지혜로운 서기관과 같이 양떼들을 먹일 수 있는 풍성한 꼴을 준비해 놓고 계셨습니다(마13:52). 예수님의 가르침은 곧 끝날 것 같다가도 다시 시작했습니다. 결론적으로, 이상으로, 그러므로, 등등 혼자서 하루 종일 말씀을 전하시는 예수님은 지치지도 않는 것 같았습니다. 사실 각 사람은 사랑과 섬김과 관심이 필요합니다. 그들의 사랑의 그릇이 채워질 때까지 계속해서 사랑과 돌봄과 훈련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자기에게 나아온 무리들을 사랑스러운 하나님의 자녀들로 영접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돌보시는 가운데 자신의 피곤함을 잊으셨고 큰 기쁨으로 그들과 말씀을 나누셨습니다. 그는 모든 사람들을 섬기셨습니다.
제자들은 명색이 목자라 쉬는 것을 포기하고 인내심을 가지고 참았습니다. 그들은 피곤하고 배가 고파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배에서는 계속 꼬르륵 소리가 나고 나중에는 배가 고프다 못해 아파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래도 그들은 사도 훈련을 받은 자답게 꾹 참았습니다. 그러나 해가 지고 날이 저물기 시작하자 마침내 긴급회의를 열고 예수님께 나아와 제안을 했습니다. “무리를 보내어 두루 마을과 촌으로 가서 유하며 먹을 것을 얻게 하소서 우리 있는 여기가 빈 들이니이다(12).” 제자들은 무리들을 돕는 길이 무리를 보내어 마을과 촌으로 가서 유하며 먹을 것을 얻게 하는 것이라고 제안했습니다. 제자들의 제안은 매우 현실적인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이유가 어떠하든지 그것은 무책임한 말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현실성 있는 제안을 물리치시고 그들에게 즉시 감당하기 어려운 명령을 하셨습니다. 13a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하시니" 예수님의 명령에 제자들의 응답이 무엇입니까? 13b절을 보십시오. “여짜오되 우리에게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밖에 없으니 이 모든 사람을 위하여 먹을 것을 사지 아니하고는 할 수 없삽나이다 하였으니” 이것 밖에 없다는 말은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만으로는 이 모든 사람을 먹이기에는 기술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간단히 말해서 사람이 너무 많아서 먹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최소한 우리는 여기서 제자들이 예수님께 대항하지 않았다는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우리 등골을 빼먹을려고 작정하셨습니까?”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알기 때문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코너에 몰렸지만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정직하게 그들의 문제를 말씀드렸을 뿐입니다. 현실은 현실입니다.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거대한 무리들의 저녁 식사로 내놓는 것은 굶주린 호랑이에게 모기 다리 한 조각을 내 놓는 것과 같았을 것입니다. 정말 그들에게 주어진 제한된 자원으로 그 많은 사람들을 먹이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들의 불가능한 상황을 충분히 아셨습니다.
그러나 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고 말씀하셨을까요? 우리는 예수님의 명령에서 세 가지를 배울 수 있습니다.
첫째,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전능하심을 믿는 믿음을 갖도록 훈련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인간적인 충성심으로 양들을 섬기기보다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섬기도록 훈련하셨습니다. 인간적인 충성심은 한계가 있습니다. 제자의 삶은 섬김의 연속이고 이러한 섬김은 끝이 없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양떼를 섬길수록 하나님의 일은 제자들에게 더 많이 주어질 것입니다. 인간적인 충성심으로 어느 정도까지는 감당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충성심은 마침내 바닥이 나게 됩니다. 여태까지 제자들은 인간적인 충성심으로 버텨왔습니다. 훈련된 어부로서 시몬 베드로는 아침 일찍 일어나서 밤 늦게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그는 작업을 위해서 며칠 밤을 새우고 밤고기를 잡기 위해서 오랜 시간을 보낸 후에도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선생이여 우리들이 밤이 맞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확실히 제자도는 충성심을 요구합니다. 요한, 야고보, 마태와 같은 제자들은 인간적으로 뛰어난 충성심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적인 충성심으로 할 수 있는 것은 한계가 있습니다. 무엇보다 인간적인 충성심으로는 하나님의 일을 정말로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인간적인 충성심이 아니라 전능하신 예수님의 능력을 믿는 믿음으로 제자의 삶을 살아야 함을 가르쳐줍니다. 인간적인 충성심으로 성경 지식을 갖출 수 있고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덕목을 갖출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결코 제한이 없는 하나님의 양떼들의 요구를 채울 수 있는 능력을 덧입지는 못합니다. 만약 우리가 인간적인 충성심만으로 섬긴다면 곧 모든 힘을 소진하고 목자를 원망하고 도망을 가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4:13)”라고 고백하며 믿음을 체험하는 우리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둘째, 예수님은 제자들이 책임감을 갖도록 훈련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형편이 어렵다고 해서 무리들이 각자 알아서 하도록 하자고 하는 무책임한 말을 듣고 화가 나셨습니다. 제자들은 부족하지만 양무리들의 목자요, 지도자들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지도자로서 무리들에 대해서 책임감을 갖기를 원하셨습니다. 지도자는 책임감이 있어야 합니다. 지도자는 최선을 다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만일 어느 부모가 먹고 살기 힘들다고 해서 자녀들에게 각자 알아서 벌어먹으라고 할 수 있습니까? 부모는 아무리 힘들어도 자식들을 먹이고 교육시켜야 할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영적 지도자가 되고자 하는 자는 양들의 영혼에 대한 책임감, 캠퍼스에 대한 책임감, 세계에 대한 책임감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저 양을 책임지지 않으면 안된다. 내가 내 캠퍼스를 살리지 않으면 안된다. 이러한 책임감이 사람을 위대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책임감이 강한 자를 귀히 쓰십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책임감 있는 지도자가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셋째, 예수님은 그들이 상한 목자의 심정을 갖도록 훈련하셨습니다. 책임감만 있고 심정이 없으면 의무적으로 하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가 언제 상한 목자의 심정을 가질 수 있습니까? 상대편의 입장에 서 보면 됩니다. 다른 사람의 위치에 서 보면 다른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을 섬기는 법을 배우게 됩니다. 제자들은 자기 문제만 생각하기에 바빴습니다. 그들은 무리들의 고통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문제도 해결하지 못하면서 다른 사람의 문제에 관심을 갖는다는 것이 어리석어 보입니다. 그러나 인격적으로 예수님을 아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애를 쓰다보면 자기 문제는 하나님께서 해결해주심을 여러 번 체험하게 됩니다. 간단하게 말해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예수님을 믿는 믿음, 책임감, 목자의 심정을 가질 때 보통 사람에서 리더로 도약을 하게 되고 평범한 삶에서 슈퍼맨으로 쓰임 받을 수 있다고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의 목자 훈련은 제자들을 평범한 사람들에서 뛰어난 리더로 만들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떼를 지어 한 오십 명씩 앉히라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철저하게 순종하여 말씀대로 다 앉혔습니다. 이후에 예수님께서는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어 무리 앞에 놓게 하셨습니다(15,16). 예수님은 제자들이 드린 오병이어를 받으시고 하나님께 감사하셨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드리는 오병이어를 찾고 계십니다. 주님은 우리가 드린 그것을 사용하여 일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드리는 오병이어를 귀하게 여기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하늘을 우러러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믿고 간구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늘을 우러러 기도하심으로 우리가 고난 가운데 있을 때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해야 하고 하나님께는 어떤 일도 불가능이 없음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기도 가운데 하나님께 감사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오병이어로 인하여 감사하실뿐만 아니라 무리들을 위해 충분한 양식을 주실 것을 믿고 감사기도를 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내가 무엇을 가지고 있든지 간에 그것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해야 함을 배우게 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이미 받은 줄로 믿고 감사하는 법을 배우게 됩니다.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은 기적을 이루는 핵심요소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기적은 마술적인 믿음을 필요로 한다고 생각하지만 기적은 감사하는 마음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예수님께서 오병이어를 떼어 주시자 계속해서 빵과 물고기가 나왔습니다. 예수님은 요리사가 되셨습니다. 아이들을 위해서 부엌에서 일하는 어머니와 같이 예수님은 수많은 어머니의 이미지를 가지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빵과 고기를 나누어주자 제자들이 이것을 받아서 무리 앞에 놓았습니다. 제자들은 계속해서 섬기는 훈련을 받았습니다. 이 세상은 명령하는 사람들을 많이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양떼들을 섬기는 겸손한 종들을 수없이 많이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그 파티의 결과가 어떠했습니까? 17절을 보십시오. "먹고 다 배불렀더라 그 남은 조각 열두 바구니를 거두니라." 이 사건은 우리에게 하나님은 참으로 풍성하신 하나님이심을 보여 줍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제자가 되면 가난하게 살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제자로 헌신하기를 두려워합니다. 그리고 자기 왕국을 만들고자 합니다. 그들은 이기심으로 쓸데없는 일을 많이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은 풍성하신 하나님이심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로서 헌신할 때 우리의 이기심을 극복하고 우리의 오병이어를 주님께 드릴 수 있습니다. 주님은 이런 우리를 넘치도록 축복하시고 이 시대에 오천명을 먹이는 역사에 우리를 쓰십니다. 이제 여름 수양회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우리 모두가 자신의 오병이어를 믿음으로 드려서 준비한다면 백오십명을 먹이는 역사도 능히 이룰 줄 믿습니다.
말씀/누가복음 9:1-17
요절/누가복음 9:13a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하시니”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실전 훈련과 리더십 훈련을 시키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어떤 상황에서도 선교 사명을 감당할 수 있도록 훈련하셨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어려운 환경에 굴복하지 아니하고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고 병든 자를 치료하며, 양들을 먹일 수 있을까요? 이 시간 주님께서 저희들로 하여금 목자로 살도록 도와주시기를 기도합니다.
1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열 두 제자를 불러 모으사 모든 귀신을 제어하며 병을 고치는 능력과 권세를 주시고” 어느 날 예수님께서는 열 두 제자를 불러 모으셨습니다. 그들은 사도라 칭함을 받고 사도의 내면성이 어떠해야 하는지 배웠습니다. 또한 예수님을 따르면서 그의 위대한 사랑과 말씀을 가르치고 치료하시는 등 모든 사역을 관찰하며 배웠습니다. 광풍 훈련 등을 통해서 믿음을 배우고 죽은 자를 살리시는 역사에 동참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제 그들을 자립적인 종들로 키우기 위해서 실전 훈련을 시키고자 하셨습니다. 이를 위해서 모든 귀신을 제어하며 병을 고치는 능력과 권세를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영적인 상태를 잘 알고 계셨기 때문에 그들을 보내실 때 준비없이 보내지 아니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능력과 권세를 주셨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에게 능력이 없다고 말합니다. 또한 자신은 너무나 연약해서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사실 하나님의 권세와 능력이 없이 단순히 인간의 힘으로 구원 역사를 이룰 수 없습니다. 만약 우리가 겸손하게 하나님의 권세와 능력을 의지한다면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 귀하게 쓰임 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홍대 캠퍼스와 세계 7000개 캠퍼스에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고 앓는 자를 고치게 하려고 보내셨습니다.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에 속한 것이 아니라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악한 영들과의 싸움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영적인 실체를 무시하기 때문에 죄의 소원을 이기지 못합니다. 사단은 영적인 존재이고 그의 능력은 기가 막히게 속이는데 있습니다. 사단은 항상 의심, 교만, 열등감, 두려움, 부정적인 생각, 호색, 탐욕, 반역, 자기 영광, 이기심, 죄의 욕망 등을 자극합니다. 사단의 유혹으로 많은 젊은이들이 자기가 원하는 것을 마음대로 하는 것을 자유라고 생각하고 죄의 소원을 즐깁니다. 사단은 항상 죄의 소원을 따라 살도록 유혹합니다. 사단은 너무나 강하고 속이기 때문에 인간의 힘만으로 쫓아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권세와 능력을 사용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영적인 배후를 잘 아시기 때문에 제자들에게 귀신을 제어하며 앓는 자를 고치며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도록 권세와 능력을 주셨습니다. 육신은 멀쩡한데 죄의 상처로 인해서 영적인 병을 앓는 자들이 많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의 피로 인해 구원을 받았지만 아직까지 그 마음에 죄로 인한 깊은 상처와 아픔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진리의 말씀과 예수님의 사랑으로 이러한 상처를 싸매어 주고 치료하는 일을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 그의 마음에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고 예수님의 형상에서 자라가야 합니다. 이렇게 건강한 목자들로 인해서 하나님 나라가 캠퍼스에 전파되고 치료의 역사를 이루는 것이야 말로 가장 아름답고 고귀한 일입니다.
이 일을 잘 감당하도록 하기 위해서 예수님은 열 두 제자에게 몇 가지 지침을 주셨습니다. 첫째, 하나님만 의지해야 합니다. 3,4절을 보십시오. “이르시되 여행을 위하여 아무것도 가지지 말라 지팡이나 주머니나 양식이나 돈이나 두 벌 옷을 가지지 말며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거기서 유하다가 거기서 떠나라.” 여기서 예수님은 사람에게 꼭 필요한 세 가지를 지적하셨습니다. 그것은 양식, 옷, 집입니다. 이 세 가지 필요 때문에 사람들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어디에서 잘까” 말하고 이러한 것들을 위해서 일하고 자신들의 삶을 소비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 아버지는 그 종들의 기본적인 필요를 잘 아십니다. 그래서 그는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이것은 제자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들을 채워주시겠다는 뜻입니다. 제자들이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거기서 유하다가 떠나라고 하셨습니다. 그들은 지하실에서 잠을 잘 수도 있고, 또는 거실의 소파에서 잘 수도 있습니다. 그 집은 매일 똑같은 밥과 된장국을 대접할 수도 있습니다. 제자들은 어떤 상황에서든지 감사해야만 합니다. 그들은 더 좋은 집이나 음식이나 옷을 찾아서 이 집에서 저 집으로 옮기지 말라고 하십니다.
많은 사람들이 지금 우리 나라의 영적인 문제를 여러 가지로 지적하고 있습니다. 즉 도덕적인 부패, 음란, 스피릿 없음, 세속주의 등등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서 볼 때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물질주의입니다. 그 결과 사람들이 하나님을 의지하기보다 돈을 더 신뢰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미가 선지자의 시대에 남은 자와 같이 돈보다 하나님을 더 의지하고, 사람보다 하나님을 더 기다리는 자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미5:7). 하나님께서 이 나라를 세계 만민의 구원을 위한 제사장 나라로 축복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둘째, 제자들은 하나님의 종으로서 분명한 정체성을 가져야 합니다. 5절을 보십시오. “누구든지 너희를 영접지 아니하거든 그 성에서 떠날 때에 너희 발에서 먼지를 떨어 버려 저희에게 증거를 삼으라 하시니” 하나님의 역사가 있는 곳에 반대와 오해가 있습니다.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조차도 배척을 받고 오해를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많은 사람들에 의해서 배척받게 될 것을 아셨습니다. 그는 제자들이 실망하고 상처받게 될 것에 주의를 기울이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종으로서 진정한 정체성을 갖도록 가르쳐 주셨습니다.
사람들이 복음을 배척하게 되면 제자들도 환영하지 않게 됩니다. 하나님의 종으로서 그들은 하나님 나라의 복음과 하나님의 진노를 끝까지 전해야 합니다. 그들이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발아래 먼지를 떨어버려야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 복음을 배척하는 그들로 하여금 뜨끔하게 하고 경고를 받게 해야 합니다. 비록 제자들이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지만 영적인 권위와 사도로서의 정체성을 분명하게 가질 때 당당하게 복음을 전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종을 배척하는 것은 작은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 나라의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가질 수 있는 기회를 상실하는 것입니다. 자기들을 위해서 보냄을 받은 하나님의 종을 배척한 자들은 심판 날에 소돔과 고모라보다 견디기 어려울 것입니다(눅10:12).
제자들이 나가서 복음을 전했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6절을 보십시오. “제자들이 나가 각 촌에 두루 행하여 처처에 복음을 전하며 병을 고치더라.”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에 절대 순종하여 나아가 복음을 전했을 때 복음을 영접하고 회개하는 사람, 앓던 병이 치료되는 사람, 귀신이 나가는 사람 등등 놀라운 능력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분봉왕 헤롯이 이 모든 일을 듣고 심히 당황하였습니다. 이는 혹은 요한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다고도 하며 혹은 엘리야가 나타났다고도 하며 혹은 옛 선지자 하나가 다시 살아났다고도 하였기 때문입니다. 헤롯은 이런 일을 듣고 이 사람이 누군고 하며 저를 보고자 하였습니다. 한마디로 제자들의 사역을 통해 갈릴리가 뒤집어졌습니다. 그리고 매우 악한 헤롯마저도 당황하게 만들었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자존심을 세우기 위해서 의인 세례 요한의 목을 베어버린 자를 누가 당황하게 만들 수 있겠습니까? 복음역사가 왕성하게 일어나자 헤롯과 같이 악을 행한 자는 죄의식에 사로잡혀 심히 두려워 떨었습니다.
사도들의 전도 여행은 대 성공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모든 사람들이 강도 8.0이상 되는 영적인 지진을 체험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그들 각자가 골리앗을 때려 눕히고 돌아온 다윗처럼 느꼈습니다. 그들은 터어키를 2:1로 이긴 한국 축구 대표선수들과 같았습니다. 동시에 선교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그들은 극히 피로했습니다. 그들은 쉼이 필요했습니다.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의 선교 보고를 받으신 후 그들을 데리시고 따로 벳새다라는 고을로 떠나가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으며 교제를 나누는 오붓한 시간을 갖기 원했습니다. 그런데 11절을 보십시오. “무리가 알고 따라왔거늘 예수께서 저희를 영접하사 하나님 나라의 일을 이야기하시며 병 고칠 자들은 고치시더라.” 무리들은 광고도하지 않았는데 벳새다까지 따라옴으로 제자들의 휴양회를 망쳐놓았습니다. 제자들은 약속도 하지 않고 온 그들을 다시 섬겨야 할 것을 생각하니 더욱 마음이 힘들었습니다. 그런데 양들에게 내가 오라고 할 때 오라. 내가 준비될 때 오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입니다. 양들은 자기 문제가 항상 크기 때문입니다. 양들이 오기를 기다려본 사람은 양들이 이렇게라도 오면 여한이 없을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영접하셨습니다. 영접했다는 것은 기쁘게 환영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여자와 어린 아이를 합쳐서 만오천명되는 무리가 나아오는 것을 보셨을 때 부담스러워하지 않고 오히려 “잘 왔다”고 생각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기에게 나아오는 양들에게 무엇을 하셨습니까?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일을 이야기해 주셨습니다. 양들은 예수님께 나아와 어떤 실제적인 도움을 받고자 했습니다. 예수님은 끊임없는 인간적인 필요들을 채워주기 보다는 그들에게 하나님 나라가 가장 필요함을 아셨습니다. 사람마다 나름대로 하나님 나라를 꿈꾸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땅에서 좋은 집에 살며, 좋은 공기를 마시고, 좋은 음식을 먹으면서 행복한 삶을 살면 패러다이즈를 건설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거라사 광인에게 패러다이즈는 무덤이었습니다. 그는 거기서 편안함을 느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땅에서 영원한 행복을 누릴 수 없습니다. 존재 의미가 없고 사명이 없이 어찌 행복한 삶을 살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죄사함을 받고 하나님과 함께 거하며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삶이야말로 가장 복된 삶입니다. 또한 장차 예수님의 재림으로 이루어질 하나님 나라가 우리의 진정한 산 소망입니다.
예수님은 자기에게 나아오는 양들을 여러 가지로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은 지혜로운 서기관과 같이 양떼들을 먹일 수 있는 풍성한 꼴을 준비해 놓고 계셨습니다(마13:52). 예수님의 가르침은 곧 끝날 것 같다가도 다시 시작했습니다. 결론적으로, 이상으로, 그러므로, 등등 혼자서 하루 종일 말씀을 전하시는 예수님은 지치지도 않는 것 같았습니다. 사실 각 사람은 사랑과 섬김과 관심이 필요합니다. 그들의 사랑의 그릇이 채워질 때까지 계속해서 사랑과 돌봄과 훈련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자기에게 나아온 무리들을 사랑스러운 하나님의 자녀들로 영접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돌보시는 가운데 자신의 피곤함을 잊으셨고 큰 기쁨으로 그들과 말씀을 나누셨습니다. 그는 모든 사람들을 섬기셨습니다.
제자들은 명색이 목자라 쉬는 것을 포기하고 인내심을 가지고 참았습니다. 그들은 피곤하고 배가 고파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배에서는 계속 꼬르륵 소리가 나고 나중에는 배가 고프다 못해 아파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래도 그들은 사도 훈련을 받은 자답게 꾹 참았습니다. 그러나 해가 지고 날이 저물기 시작하자 마침내 긴급회의를 열고 예수님께 나아와 제안을 했습니다. “무리를 보내어 두루 마을과 촌으로 가서 유하며 먹을 것을 얻게 하소서 우리 있는 여기가 빈 들이니이다(12).” 제자들은 무리들을 돕는 길이 무리를 보내어 마을과 촌으로 가서 유하며 먹을 것을 얻게 하는 것이라고 제안했습니다. 제자들의 제안은 매우 현실적인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이유가 어떠하든지 그것은 무책임한 말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현실성 있는 제안을 물리치시고 그들에게 즉시 감당하기 어려운 명령을 하셨습니다. 13a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하시니" 예수님의 명령에 제자들의 응답이 무엇입니까? 13b절을 보십시오. “여짜오되 우리에게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밖에 없으니 이 모든 사람을 위하여 먹을 것을 사지 아니하고는 할 수 없삽나이다 하였으니” 이것 밖에 없다는 말은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만으로는 이 모든 사람을 먹이기에는 기술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간단히 말해서 사람이 너무 많아서 먹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최소한 우리는 여기서 제자들이 예수님께 대항하지 않았다는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우리 등골을 빼먹을려고 작정하셨습니까?”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알기 때문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코너에 몰렸지만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정직하게 그들의 문제를 말씀드렸을 뿐입니다. 현실은 현실입니다.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거대한 무리들의 저녁 식사로 내놓는 것은 굶주린 호랑이에게 모기 다리 한 조각을 내 놓는 것과 같았을 것입니다. 정말 그들에게 주어진 제한된 자원으로 그 많은 사람들을 먹이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들의 불가능한 상황을 충분히 아셨습니다.
그러나 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고 말씀하셨을까요? 우리는 예수님의 명령에서 세 가지를 배울 수 있습니다.
첫째,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전능하심을 믿는 믿음을 갖도록 훈련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인간적인 충성심으로 양들을 섬기기보다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섬기도록 훈련하셨습니다. 인간적인 충성심은 한계가 있습니다. 제자의 삶은 섬김의 연속이고 이러한 섬김은 끝이 없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양떼를 섬길수록 하나님의 일은 제자들에게 더 많이 주어질 것입니다. 인간적인 충성심으로 어느 정도까지는 감당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충성심은 마침내 바닥이 나게 됩니다. 여태까지 제자들은 인간적인 충성심으로 버텨왔습니다. 훈련된 어부로서 시몬 베드로는 아침 일찍 일어나서 밤 늦게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그는 작업을 위해서 며칠 밤을 새우고 밤고기를 잡기 위해서 오랜 시간을 보낸 후에도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선생이여 우리들이 밤이 맞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확실히 제자도는 충성심을 요구합니다. 요한, 야고보, 마태와 같은 제자들은 인간적으로 뛰어난 충성심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적인 충성심으로 할 수 있는 것은 한계가 있습니다. 무엇보다 인간적인 충성심으로는 하나님의 일을 정말로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인간적인 충성심이 아니라 전능하신 예수님의 능력을 믿는 믿음으로 제자의 삶을 살아야 함을 가르쳐줍니다. 인간적인 충성심으로 성경 지식을 갖출 수 있고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덕목을 갖출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결코 제한이 없는 하나님의 양떼들의 요구를 채울 수 있는 능력을 덧입지는 못합니다. 만약 우리가 인간적인 충성심만으로 섬긴다면 곧 모든 힘을 소진하고 목자를 원망하고 도망을 가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4:13)”라고 고백하며 믿음을 체험하는 우리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둘째, 예수님은 제자들이 책임감을 갖도록 훈련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형편이 어렵다고 해서 무리들이 각자 알아서 하도록 하자고 하는 무책임한 말을 듣고 화가 나셨습니다. 제자들은 부족하지만 양무리들의 목자요, 지도자들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지도자로서 무리들에 대해서 책임감을 갖기를 원하셨습니다. 지도자는 책임감이 있어야 합니다. 지도자는 최선을 다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만일 어느 부모가 먹고 살기 힘들다고 해서 자녀들에게 각자 알아서 벌어먹으라고 할 수 있습니까? 부모는 아무리 힘들어도 자식들을 먹이고 교육시켜야 할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영적 지도자가 되고자 하는 자는 양들의 영혼에 대한 책임감, 캠퍼스에 대한 책임감, 세계에 대한 책임감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저 양을 책임지지 않으면 안된다. 내가 내 캠퍼스를 살리지 않으면 안된다. 이러한 책임감이 사람을 위대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책임감이 강한 자를 귀히 쓰십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책임감 있는 지도자가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셋째, 예수님은 그들이 상한 목자의 심정을 갖도록 훈련하셨습니다. 책임감만 있고 심정이 없으면 의무적으로 하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가 언제 상한 목자의 심정을 가질 수 있습니까? 상대편의 입장에 서 보면 됩니다. 다른 사람의 위치에 서 보면 다른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을 섬기는 법을 배우게 됩니다. 제자들은 자기 문제만 생각하기에 바빴습니다. 그들은 무리들의 고통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문제도 해결하지 못하면서 다른 사람의 문제에 관심을 갖는다는 것이 어리석어 보입니다. 그러나 인격적으로 예수님을 아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애를 쓰다보면 자기 문제는 하나님께서 해결해주심을 여러 번 체험하게 됩니다. 간단하게 말해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예수님을 믿는 믿음, 책임감, 목자의 심정을 가질 때 보통 사람에서 리더로 도약을 하게 되고 평범한 삶에서 슈퍼맨으로 쓰임 받을 수 있다고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의 목자 훈련은 제자들을 평범한 사람들에서 뛰어난 리더로 만들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떼를 지어 한 오십 명씩 앉히라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철저하게 순종하여 말씀대로 다 앉혔습니다. 이후에 예수님께서는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어 무리 앞에 놓게 하셨습니다(15,16). 예수님은 제자들이 드린 오병이어를 받으시고 하나님께 감사하셨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드리는 오병이어를 찾고 계십니다. 주님은 우리가 드린 그것을 사용하여 일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드리는 오병이어를 귀하게 여기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하늘을 우러러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믿고 간구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늘을 우러러 기도하심으로 우리가 고난 가운데 있을 때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해야 하고 하나님께는 어떤 일도 불가능이 없음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기도 가운데 하나님께 감사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오병이어로 인하여 감사하실뿐만 아니라 무리들을 위해 충분한 양식을 주실 것을 믿고 감사기도를 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내가 무엇을 가지고 있든지 간에 그것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해야 함을 배우게 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이미 받은 줄로 믿고 감사하는 법을 배우게 됩니다.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은 기적을 이루는 핵심요소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기적은 마술적인 믿음을 필요로 한다고 생각하지만 기적은 감사하는 마음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예수님께서 오병이어를 떼어 주시자 계속해서 빵과 물고기가 나왔습니다. 예수님은 요리사가 되셨습니다. 아이들을 위해서 부엌에서 일하는 어머니와 같이 예수님은 수많은 어머니의 이미지를 가지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빵과 고기를 나누어주자 제자들이 이것을 받아서 무리 앞에 놓았습니다. 제자들은 계속해서 섬기는 훈련을 받았습니다. 이 세상은 명령하는 사람들을 많이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양떼들을 섬기는 겸손한 종들을 수없이 많이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그 파티의 결과가 어떠했습니까? 17절을 보십시오. "먹고 다 배불렀더라 그 남은 조각 열두 바구니를 거두니라." 이 사건은 우리에게 하나님은 참으로 풍성하신 하나님이심을 보여 줍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제자가 되면 가난하게 살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제자로 헌신하기를 두려워합니다. 그리고 자기 왕국을 만들고자 합니다. 그들은 이기심으로 쓸데없는 일을 많이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은 풍성하신 하나님이심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로서 헌신할 때 우리의 이기심을 극복하고 우리의 오병이어를 주님께 드릴 수 있습니다. 주님은 이런 우리를 넘치도록 축복하시고 이 시대에 오천명을 먹이는 역사에 우리를 쓰십니다. 이제 여름 수양회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우리 모두가 자신의 오병이어를 믿음으로 드려서 준비한다면 백오십명을 먹이는 역사도 능히 이룰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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