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2004년 누가복음 제 17 강(눅8:40-56)/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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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 누가복음 공부 제 17 강
말씀 / 누가복음 8:40 - 56
요절 / 누가복음 8:50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예수께서 들으시고 가라사대 두려워말고 믿기만 하라 그리하면 딸이 구원을 얻으리라 하시고”
우리 나라 말에 두려움 자동사는 191개 어휘가 있습니다. 겁나다. 겁먹다. 속떨리다. 등골서늘하다. 두근거리다. 진땀나다. 죽어지내다. 설설기다. 꼼짝못하다. 움츠러들다. 흠칫하다. 휘둥그러지다. 벌벌떨다. 등등. 두려움의 원인은 거의 모두가 외부의 자극입니다. 성경에서 두려움의 원인은 죄로 인한 형벌 때문에 옵니다. 무엇보다 죽음이 그 기저에 깔려 있습니다. 그런데 두려움을 극복하는 방법은 믿음을 갖는 것입니다. 죄사함을 주시고 우리를 사랑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을 때 두려움을 이길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오늘 딸의 죽음으로 인해 두려워하는 야이로를 도우시는 주님의 음성을 깊이 들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우리의 운명적인 요소들을 극복하는 믿음을 덧입기를 기도합니다.
I.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40-48)
예수님께서 갈릴리 바다에서 광풍을 잠잠케 하시고 거라사 지방에서 광인을 온전케 하신 소식이 가버나움 전 지역에 삽시간에 퍼져나갔습니다. 그 소식을 듣고 무리들은 돌아오시는 예수님을 기다렸습니다. 40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돌아오시매 무리가 환영하니 이는 다 기다렸음이러라.” 예수님은 수많은 양무리들에게서 사랑받는 목자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땅에 발을 내딛자마자 달려 나가 그 발아래 엎드린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다름 아닌 회당장 야이로였습니다. 그가 회당장의 지위에 오르기까지 그의 삶과 인격이 증명되어야 했습니다. 그는 도덕성이나 부나 정치적인 영향력 등에서 탁월한 사람이었습니다. 아마도 그는 토라의 모든 장을 암송해야 했고 사회적으로도 성공해서 인정을 받는 위치에 있어야 했습니다. 그는 여태까지 어려운 사람들을 돕기 위해서 많은 것을 드렸을 것입니다. 자연스럽게 그는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았습니다. 야이로씨가 길을 지나간다면 사람들은 90도로 인사를 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그가 예수님께 나아왔습니까? 42a절을 보십시오. “이는 자기에게 열두 살 먹은 외딸이 있어 죽어감이러라.” 야이로는 무남독녀를 키웠고 그 딸은 열 두 살이었습니다. 열 두 살 난 딸은 한 송이의 장미꽃과 같이 아름다웠고 갈색의 두 눈은 꿈꾸듯 하였을 것입니다. 그녀는 매우 사랑스럽고 세상의 모든 진주보다 더 귀했습니다. 아니 자신의 생명보다 더 귀했을 것입니다. 회장장으로서 그는 많은 일이 주어졌을 것이고 힘겹게 일을 하고 돌아오면 딸이 그를 향해 달려와서 “아빠”하고 안겼을 것입니다. 그때 그는 아이를 번쩍 들어올려 안아주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하루의 모든 피로가 눈녹듯이 사라졌습니다. 야이로에게 있어 외딸은 그의 모든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갑자기 딸이 병이 들었습니다. 의사들이 진단을 했지만 가망이 없었습니다. 그에게 있어 이 세상에 남겨진 유일한 생명의 씨가 사라져가고 있었습니다. 그의 마음은 뿌리부터 흔들렸습니다. 자기 눈 앞에서 어린 딸의 생명이 꺼져가는 것을 보는 것은 너무나 고통스러운 일이었습니다. 하늘은 어둡고 그의 인생 항해는 암초를 만나 파선할 지경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운명적인 순간에 야이로는 무엇을 했습니까?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보았지만 별 효험이 없을 때 무력감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여러 종류의 병을 고치셨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그는 마지막으로 예수님께 나아가고자 결심을 했습니다. 그는 믿음으로 일어섰습니다. 달렸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왔습니다. 이것은 영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첫 단계였습니다. 그는 회당장의 체면과 자존심도 버리고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간구했습니다. 자존심으로 인해서 나아만 장군은 그의 문둥병으로부터 나음을 받을 수 있는 영적 축복을 잃어버릴 뻔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자존심을 꺾고 대머리가 까진 하나님의 종에게 도움을 구했을 때 운명적인 문둥병으로부터 나음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는 새 인생을 시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아는대로 자존심을 버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자존심으로 인해서 많은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서 주시는 축복을 받지 못했습니다. 자존심으로 인해서 그들의 눈 앞에 열려 있는 하나님 나라로 들어가는 문을 닫아버렸습니다. 그들은 사단의 자식들로 남아있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의 교만한 바리새인들처럼 능력이 많고 재능이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과 자신의 자녀들을 위해 예비된 하나님의 축복을 차버립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신의 자녀들을 위해서 결코 좋은 지도자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자라나는 세대들을 위한 좋은 영적 리더가 되기 위해서 야이로와 같은 겸손한 자세를 배워야만 합니다.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죽어가는 젊은이들을 도와달라고 간청해야 합니다.
‘주여, 사랑스런 내 딸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우리 집에 꼭 함께 가 주세요!’ 야이로는 구체적인 기도제목을 가지고 예수님께 나아갔습니다. 그는 눈앞에 있는 문제를 먼저 해결받지 못하면 예수님께서 한발짝도 나가실 수 없다는 자세로 나아갔습니다. 사실 야이로의 태도는 다른 사람들에게 무례하게 보입니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들도 예수님의 도움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의 독단적인 태도는 매우 이기적으로 보입니다. 각 사람은 자기 문제가 가장 시급하게 보이는 법입니다. 그러나 야이로는 예수님의 발을 가슴으로 끌어안고 “주여, 내 사랑스런 딸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우리 집에 꼭 함께 가 주십시오.”라며 간구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독점한 사람처럼 행동했습니다.
사실 우리의 기도에 있어서 야이로처럼 행동한다는 것을 어렵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예수님은 이런 종류의 절대적인 기도를 축복하신다는 사실입니다. 42b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가실 때에 무리가 옹위하더라.” 예수님께서 움직이기 시작하셨습니다. 태산을 옮기는 믿음으로 야이로는 거대한 무리의 장벽을 극복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발걸음을 자기 집으로 향하도록 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그의 얼굴을 우리에게 향하시게 될 때까지 간절히 구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그의 발걸음을 떼실 때에 야이로의 마음에 있 는 짙은 운명의 구름은 걷히고 밝은 희망이 비추이기 시작했습니다.
무리들로 인해서 예수님의 움직임은 매우 느렸습니다. 설상 가상으로 야이로의 집으로 가시는 예수님의 발걸음을 지연시키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한 병든 여인이 야이로의 허락도 없이 끼어든 것입니다. 그녀가 누구였습니까? 그녀는 12년 동안 혈루증을 앓고 있던 여인이 있었습니다. 혈루증이란 만성 자궁 출혈증입니다. 이로 인해 이 여인은 빈혈을 앓고 어지럼증으로 고통을 했습니다. 일을 조금만 해도 피곤해서 하루 종일 누워 있어야 했습니다. 섬겨야 할 일들은 많은데 온 몸에 힘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해야 할 일들은 많은데 하지 못하는 부담감으로 인해서 울기를 잘 했습니다. 또 혈루증은 부정한 병이었기 때문에 사람들과 접촉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녀가 앉았던 의자는 부정해지고 그의 몸에 닿으면 무엇이든지 부정해졌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회당에 가서 예배를 볼 수도 없었습니다. 무엇보다 피는 생명을 상징합니다. 혈루증을 앓는 이 여인은 생명력을 상실해갔습니다. 그녀의 몸도 쇠꼬챙이같이 말라갔고 화장발도 들지 않았습니다. 이런 자신을 쓸모없는 존재로 여기며 자학하기도 많이 했습니다. 이 여인은 하루 이틀이 아니고 십이 년 동안이나 병마와 싸웠습니다. 그리고 치료받기 위해서 있던 재산도 다 허비했습니다. 그녀는 이제 남은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건강도, 재산도, 청춘도 다 허비하고 남은 것은 허약해질대로 허약해진 육신과 정신이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녀는 수많은 의사들의 말을 믿고 자신을 맡겨보았지만 번번이 실패하자 의사에 대한 불신도 깊어갔습니다. 그래서 의사였던 저자 누가는 마가와 달리(막5:26) ‘의원’이라는 말을 빼버림으로 의사의 명예를 지키고자 하였습니다. 현대 의술로도 고칠 수 있는 질병은 전체 병의 30%도 되지 않습니다.
여인은 체념하기 쉬운 때에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자신은 예수님께 떳떳하게 나아갈 수 없었습니다. 어려움을 생각할수록 예수님께 나아가 그 옷자락이라도 만지면 나음을 받을 수 있다는 믿음이 생겼습니다. 그녀는 예수님께서 야이로의 집으로 무리들에게 둘러싸여 가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녀는 무리들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중심부에 왔을 때는 사람들이 너무 겹겹이 예수님을 둘러싸고 있기 때문에 접근하기가 어려웠습니다. 무엇보다 열 두 제자들이 그 중심에 그리고 부리부리한 베드로가 예수님 뒤를 호위하고 있었습니다. 여인은 서서히 현기증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죽을 힘을 다해서 예수님의 뒤로 와서 그 옷 가에 손을 대었습니다. 여기서 대었다는 단어는 원어로 비끌어 매다는 뜻입니다. 겉으로 볼 때는 옷 가에 댄 것이지만 그 마음은 예수님을 놓칠 수 없다는 절박한 마음으로 붙잡았던 것입니다. 여인의 손이 예수님의 옷술을 만지는 순간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냉랭하던 여인의 몸은 순식간에 뜨거워지더니 혈루 근원이 말라버렸습니다. 여인은 자신의 병이 나은 것을 깨달았습니다. 예수님의 능력은 즉시 나타났습니다. 예수님이 능력의 저수지라면 여인의 믿음은 능력을 흐르게 하는 파이프였습니다. 예수님이 생명의 근원이시라면 여인의 믿음의 파이프를 통해서 그 생명이 흘러 들어왔습니다. 때로 우리는 예수님께서 우리의 기도에 너무 늦게 또는 둔하게 반응하시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얼마나 희미하게 하든지 또는 얼마나 연약하든지 간에 예수님은 믿음으로 만지는 기도의 행동에 대해서 매우 강력하게 반응하십니다. 만약 예수님의 응답이 늦다면 그것은 예수님께서 보실 때 적절한 때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여인의 믿음은 운명을 극복하게 했습니다. 이 여인의 믿음은 창조적으로 표현되었습니다. 그녀의 믿음은 보이지 않았지만 힘있게 역사했습니다. 그녀의 믿음은 작게 표현되었지만 크게 역사했습니다.
우리 가운데 믿음으로 반복된 실패를 극복하고 승리한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믿음으로 죄의 소욕을 극복한 분이 있습니다. 믿음으로 중풍병에서 나음을 받기도 했습니다. 믿음으로 인간 관계에서 받은 상처를 극복하고 좋은 영향력을 끼치는 분도 있습니다. 속두려움을 극복하고 빼어난 제자 양성가가 된 분도 있습니다. 믿음으로 반복된 학업의 실패를 극복하고 좋은 직장에 취직한 분도 있습니다. 우리들이 실제 삶 속에서 체험한 작은 믿음의 승리를 인하여 주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예수님은 능력이 자기에게서 나간 것을 보시고 놀라셨습니다. 그래서 “내게 손을 댄 자가 누구냐?”고 손 댄 사람을 찾으셨습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주여 무리가 옹위하여 미나이다”라고 말하며 예수님께서 너무 민감해 지셨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내게 손을 댄 자가 있도다 이는 내게서 능력이 나간 줄 앎이로다.”라고 하시며 계속 찾으셨습니다. 예수님이 계속 찾으시자 여자는 스스로 숨기지 못할 줄을 알고 떨며 나아와 엎드렸습니다. 그리고 그 손 댄 연고와 곧 나은 것을 모든 사람 앞에서 고백하였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여인으로 하여금 이렇게 고백하도록 하신 의도가 무엇입니까? 먼저는 여인의 믿음을 온전케 하고자 하셨습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의 옷 가에 손을 대어 병이 나았지만 예수님을 부정케 하고 예수님의 능력을 훔쳤다는 양심의 가책이 있었습니다. 만약 이대로 가버린다면 양심의 가책을 받으며 살았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여인의 믿음을 드러내심으로 그 믿음을 온전케 하고자 하셨습니다. 또한 여인이 신비주의에 빠지지 않고 믿음으로 나음 받은 것을 드러내어 그 믿음을 바로 세워주고자 하셨습니다. 즉 옷자락을 만졌기 때문에 나은 것이 아니라 그 믿음 때문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여인이 모든 사실을 고백하자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고 하시며 축복해주셨습니다. 예수님은 12년 동안 앓던 병이 치료되었는데 인사도 없이 가고자 한다고 책망하지 않으시고 여인을 딸로 영접해 주시고 그 믿음을 인정해 주시고 축복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너를 고쳐주었다’고 강조하지 않으시고 여인의 믿음을 칭찬하셨습니다. 그녀는 떨며 나와서 ‘고백하면 나 죽는다’고 생각했지만 도리어 하나님의 평안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거리낌없이 사람들과 교제를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과 인격적인 사귐이 깊어지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둘째, 야이로와 제자들과 무리들의 믿음을 견고케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숨겨진 믿음의 역사를 드러내심으로 제자들이나 야이로에게 믿음을 심고자 하셨습니다. 감추어진 역사를 드러내어 역사화함으로 이 천년 뒤에 살고 있는 우리들도 그 역사를 통해서 믿음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소감 모임을 통해서 서로 받은 바 은혜와 믿음을 나누면 서로 큰 격려를 받게 됩니다. 믿음도 풍성해지고 사랑의 관계성도 생기게 되고 서로에게 유익이 됩니다. 또한 이러한 고백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우리 하나님은 죽으신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의 삶 가운데서 힘있게 역사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소감 모임을 통한 고백을 통해서 우리의 믿음은 자라게 됩니다. 우리 가운데 감동적인 소감을 나누는 가운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우리의 믿음이 더욱 강건해지기를 기도합니다.
II.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49-56)
예수님께서 여인의 고백을 들으시고 축복하시는 은혜로운 분위기가 계속되고 있는데 여기에 찬 물을 끼얹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회당장 야이로의 집에서 사람이 와서 말했습니다.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선생을 더 괴롭게 마소서” 이 말은 평범한 말 같지만 야이로의 가슴에 대못을 박는 것과 같았습니다. 그는 혈루증에서 나음받은 여인의 고백을 듣고 딸이 나으리라는 희망에 부풀어 있는데 사단은 바늘로 풍선을 터뜨린 격입니다. 그의 말은 선생을 더 괴롭게 말라는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을 위해서 하는 말 같지만 사실은 불신의 말입니다. 더 이상 예수님을 믿지 말라는 뜻입니다.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라는 말은 야이로에게는 가장 절망적인 말이었습니다. 이 일만은 일어나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는데 가장 두려워하는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두려움이 그 마음을 덮쳐 버리게 됩니다. 그리고 원망과 불평을 하기 쉽습니다. 예수님께서 왜 그렇게 소감 발표를 길게 시키시는가? 이 여인은 무슨 할 말이 그렇게 많은가? 하면서 온갖 불평과 원망의 말을 쏟아내며 통곡하기 쉽습니다. 그리고 믿음의 길을 포기하고 이제는 장례 준비나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사람이 절망에 빠지면 방향 감각을 잃고 파괴적인 행동을 하게 됩니다. 예를 들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땅을 정탐하고 돌아온 열 두령들의 부정적인 듣고 밤새도록 울며 통곡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거역하며 한 장관을 세워 애굽으로 돌아가고자 하였습니다.
믿음으로 살고 있는 우리에게는 어떤 두려움이 있습니까?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는 것을 두려워하는 분이 있습니다. 자기의 약점이나 과거가 드러날 것이 두려운 것입니다. 또한 상대방으로 인해 상처 받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대개 우리는 내 힘으로 제어할 수 없는 대상이나 환경에 처하게 되면 두려워합니다. 불확실한 장래가 우리에게 두려움을 줄 때도 있습니다. 무지는 우리를 두렵게 합니다. 어두움 가운데 있으면 귀신 생각도 나고 공포감이 생기기도 합니다. 특히 죽음으로 인한 두려움은 우리의 존재가 소멸된다는 생각 때문에 두렵습니다. 그 허무함으로 인해서 두려운 것입니다. 이상을 볼 때 우리들이 두려워하는 근본 뿌리는 죽음이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무지요, 진리를 알 경우에는 하나님께 대한 불신입니다.
예수님은 두려움의 세력에 잡혀서 어두움 속으로 끌려 들어가는 야이로를 어떻게 건져내셨습니까? 50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들으시고 가라사대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그리하면 딸이 구원을 얻으리라 하시고” 예수님은 야이로를 시기 적절하게 도우셨습니다. 영적인 환경 변화에 아주 민감하게 대처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회당장의 집에서 온 사람이 하는 말을 다 들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말이 야이로에게 어떤 불신을 심게 될 지도 잘 아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두려움을 심는 사단의 소리를 다 듣고 계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불신에 빠지지 않도록 말씀하십니다.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그리하면 네 딸이 구원을 얻으리라.”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이는 처음 믿음을 끝까지 가지라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이 주신 말씀을 붙잡으라는 뜻입니다. 그는 장례를 치루어야 할 분위기 속에서 예수님께 희망을 두게 되었습니다. 그가 처음 예수님께 나아올 때보다 상황이 더 어려워졌기 때문에 더 큰 믿음이 필요했습니다. 병고치는 믿음보다 죽음을 이기는 부활 신앙이 그에게 필요했습니다. 우리 인생에는 수없이 두려움을 심는 상황이 밀려옵니다. 절망이 되는 상황이 다가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입니다(딤후 1:7). 여기서 마음은 영입니다. 성령으로 충만할 때 우리는 두려움 대신에 담력을 갖게 됩니다. 사랑은 두려움을 내어 쫓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이 모든 일에 우리가 넉넉히 이깁니다(롬8:37). 믿음은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때까지 인내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불가능 속에서 가능을 보는 것이요 죽음에서 부활을 보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으로 쓰러지는 야이로를 일으켜 세웠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그에게 딸의 부활에 대한 확신을 주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그의 불신을 치료하고 믿음을 더욱 확실하게 해 주는 치료약이 되었습니다.
두려움은 해로운 것이지만, 복된 두려움 꼭 가져야 할 두려움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광풍을 잠잠케 하셨을 때 제자들이 두려워하고 기이히 여긴 두려움입니다(8:25). 또한 예수님께서 거라사 귀신 들린 자에게서 귀신을 쫓아내어 그를 온전케 했을 때 사람들이 보고 두려워했던 그 두려움입니다(8:35).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은 참으로 유익하고 복된 것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잠1:7)이라고 했읍니다. 하나님 한 분을 두려워하면 그에 대한 믿음에 이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할 때 사람에 대한 속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상을 얻고 하나님이 사랑하십니다(잠13:13, 사66:2).
예수님은 야이로의 집에 이르러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와 및 아이의 부모 외에는 함께 들어가기를 허락지 아니하셨습니다. 그리고 슬프게 곡하는 사람들을 다 내 보내셨습니다. 예수님은 통곡하는 사람들에게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비웃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이의 손을 잡고 자는 아이를 깨우듯이 부르셨습니다. “아이야 일어나라.” 그러자 그 영이 돌아와 아이가 곧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은 아이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놀라는 부모에게 이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경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두려움의 실체인 죽음을 이기시고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믿는 자들 속에서 두려움을 제하시고 승리의 인생을 살게 하십니다.
여러분을 두렵게 하는 것이 있습니까? 잘 풀리리라 예상했던 일들이 뒤집어 졌습니까? 믿었던 사람에 대한 기대가 무너졌습니까? 우리 모두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는 말씀을 붙잡음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은 우리의 믿음을 강화시켜 줍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함으로 사람에 대한 두려움을 이기고, 환난이 주는 두려움을 이기고 승리하는 삶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말씀 / 누가복음 8:40 - 56
요절 / 누가복음 8:50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예수께서 들으시고 가라사대 두려워말고 믿기만 하라 그리하면 딸이 구원을 얻으리라 하시고”
우리 나라 말에 두려움 자동사는 191개 어휘가 있습니다. 겁나다. 겁먹다. 속떨리다. 등골서늘하다. 두근거리다. 진땀나다. 죽어지내다. 설설기다. 꼼짝못하다. 움츠러들다. 흠칫하다. 휘둥그러지다. 벌벌떨다. 등등. 두려움의 원인은 거의 모두가 외부의 자극입니다. 성경에서 두려움의 원인은 죄로 인한 형벌 때문에 옵니다. 무엇보다 죽음이 그 기저에 깔려 있습니다. 그런데 두려움을 극복하는 방법은 믿음을 갖는 것입니다. 죄사함을 주시고 우리를 사랑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을 때 두려움을 이길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오늘 딸의 죽음으로 인해 두려워하는 야이로를 도우시는 주님의 음성을 깊이 들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우리의 운명적인 요소들을 극복하는 믿음을 덧입기를 기도합니다.
I.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40-48)
예수님께서 갈릴리 바다에서 광풍을 잠잠케 하시고 거라사 지방에서 광인을 온전케 하신 소식이 가버나움 전 지역에 삽시간에 퍼져나갔습니다. 그 소식을 듣고 무리들은 돌아오시는 예수님을 기다렸습니다. 40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돌아오시매 무리가 환영하니 이는 다 기다렸음이러라.” 예수님은 수많은 양무리들에게서 사랑받는 목자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땅에 발을 내딛자마자 달려 나가 그 발아래 엎드린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다름 아닌 회당장 야이로였습니다. 그가 회당장의 지위에 오르기까지 그의 삶과 인격이 증명되어야 했습니다. 그는 도덕성이나 부나 정치적인 영향력 등에서 탁월한 사람이었습니다. 아마도 그는 토라의 모든 장을 암송해야 했고 사회적으로도 성공해서 인정을 받는 위치에 있어야 했습니다. 그는 여태까지 어려운 사람들을 돕기 위해서 많은 것을 드렸을 것입니다. 자연스럽게 그는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았습니다. 야이로씨가 길을 지나간다면 사람들은 90도로 인사를 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그가 예수님께 나아왔습니까? 42a절을 보십시오. “이는 자기에게 열두 살 먹은 외딸이 있어 죽어감이러라.” 야이로는 무남독녀를 키웠고 그 딸은 열 두 살이었습니다. 열 두 살 난 딸은 한 송이의 장미꽃과 같이 아름다웠고 갈색의 두 눈은 꿈꾸듯 하였을 것입니다. 그녀는 매우 사랑스럽고 세상의 모든 진주보다 더 귀했습니다. 아니 자신의 생명보다 더 귀했을 것입니다. 회장장으로서 그는 많은 일이 주어졌을 것이고 힘겹게 일을 하고 돌아오면 딸이 그를 향해 달려와서 “아빠”하고 안겼을 것입니다. 그때 그는 아이를 번쩍 들어올려 안아주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하루의 모든 피로가 눈녹듯이 사라졌습니다. 야이로에게 있어 외딸은 그의 모든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갑자기 딸이 병이 들었습니다. 의사들이 진단을 했지만 가망이 없었습니다. 그에게 있어 이 세상에 남겨진 유일한 생명의 씨가 사라져가고 있었습니다. 그의 마음은 뿌리부터 흔들렸습니다. 자기 눈 앞에서 어린 딸의 생명이 꺼져가는 것을 보는 것은 너무나 고통스러운 일이었습니다. 하늘은 어둡고 그의 인생 항해는 암초를 만나 파선할 지경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운명적인 순간에 야이로는 무엇을 했습니까?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보았지만 별 효험이 없을 때 무력감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여러 종류의 병을 고치셨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그는 마지막으로 예수님께 나아가고자 결심을 했습니다. 그는 믿음으로 일어섰습니다. 달렸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왔습니다. 이것은 영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첫 단계였습니다. 그는 회당장의 체면과 자존심도 버리고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간구했습니다. 자존심으로 인해서 나아만 장군은 그의 문둥병으로부터 나음을 받을 수 있는 영적 축복을 잃어버릴 뻔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자존심을 꺾고 대머리가 까진 하나님의 종에게 도움을 구했을 때 운명적인 문둥병으로부터 나음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는 새 인생을 시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아는대로 자존심을 버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자존심으로 인해서 많은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서 주시는 축복을 받지 못했습니다. 자존심으로 인해서 그들의 눈 앞에 열려 있는 하나님 나라로 들어가는 문을 닫아버렸습니다. 그들은 사단의 자식들로 남아있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의 교만한 바리새인들처럼 능력이 많고 재능이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과 자신의 자녀들을 위해 예비된 하나님의 축복을 차버립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신의 자녀들을 위해서 결코 좋은 지도자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자라나는 세대들을 위한 좋은 영적 리더가 되기 위해서 야이로와 같은 겸손한 자세를 배워야만 합니다.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죽어가는 젊은이들을 도와달라고 간청해야 합니다.
‘주여, 사랑스런 내 딸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우리 집에 꼭 함께 가 주세요!’ 야이로는 구체적인 기도제목을 가지고 예수님께 나아갔습니다. 그는 눈앞에 있는 문제를 먼저 해결받지 못하면 예수님께서 한발짝도 나가실 수 없다는 자세로 나아갔습니다. 사실 야이로의 태도는 다른 사람들에게 무례하게 보입니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들도 예수님의 도움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의 독단적인 태도는 매우 이기적으로 보입니다. 각 사람은 자기 문제가 가장 시급하게 보이는 법입니다. 그러나 야이로는 예수님의 발을 가슴으로 끌어안고 “주여, 내 사랑스런 딸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우리 집에 꼭 함께 가 주십시오.”라며 간구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독점한 사람처럼 행동했습니다.
사실 우리의 기도에 있어서 야이로처럼 행동한다는 것을 어렵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예수님은 이런 종류의 절대적인 기도를 축복하신다는 사실입니다. 42b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가실 때에 무리가 옹위하더라.” 예수님께서 움직이기 시작하셨습니다. 태산을 옮기는 믿음으로 야이로는 거대한 무리의 장벽을 극복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발걸음을 자기 집으로 향하도록 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그의 얼굴을 우리에게 향하시게 될 때까지 간절히 구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그의 발걸음을 떼실 때에 야이로의 마음에 있 는 짙은 운명의 구름은 걷히고 밝은 희망이 비추이기 시작했습니다.
무리들로 인해서 예수님의 움직임은 매우 느렸습니다. 설상 가상으로 야이로의 집으로 가시는 예수님의 발걸음을 지연시키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한 병든 여인이 야이로의 허락도 없이 끼어든 것입니다. 그녀가 누구였습니까? 그녀는 12년 동안 혈루증을 앓고 있던 여인이 있었습니다. 혈루증이란 만성 자궁 출혈증입니다. 이로 인해 이 여인은 빈혈을 앓고 어지럼증으로 고통을 했습니다. 일을 조금만 해도 피곤해서 하루 종일 누워 있어야 했습니다. 섬겨야 할 일들은 많은데 온 몸에 힘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해야 할 일들은 많은데 하지 못하는 부담감으로 인해서 울기를 잘 했습니다. 또 혈루증은 부정한 병이었기 때문에 사람들과 접촉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녀가 앉았던 의자는 부정해지고 그의 몸에 닿으면 무엇이든지 부정해졌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회당에 가서 예배를 볼 수도 없었습니다. 무엇보다 피는 생명을 상징합니다. 혈루증을 앓는 이 여인은 생명력을 상실해갔습니다. 그녀의 몸도 쇠꼬챙이같이 말라갔고 화장발도 들지 않았습니다. 이런 자신을 쓸모없는 존재로 여기며 자학하기도 많이 했습니다. 이 여인은 하루 이틀이 아니고 십이 년 동안이나 병마와 싸웠습니다. 그리고 치료받기 위해서 있던 재산도 다 허비했습니다. 그녀는 이제 남은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건강도, 재산도, 청춘도 다 허비하고 남은 것은 허약해질대로 허약해진 육신과 정신이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녀는 수많은 의사들의 말을 믿고 자신을 맡겨보았지만 번번이 실패하자 의사에 대한 불신도 깊어갔습니다. 그래서 의사였던 저자 누가는 마가와 달리(막5:26) ‘의원’이라는 말을 빼버림으로 의사의 명예를 지키고자 하였습니다. 현대 의술로도 고칠 수 있는 질병은 전체 병의 30%도 되지 않습니다.
여인은 체념하기 쉬운 때에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자신은 예수님께 떳떳하게 나아갈 수 없었습니다. 어려움을 생각할수록 예수님께 나아가 그 옷자락이라도 만지면 나음을 받을 수 있다는 믿음이 생겼습니다. 그녀는 예수님께서 야이로의 집으로 무리들에게 둘러싸여 가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녀는 무리들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중심부에 왔을 때는 사람들이 너무 겹겹이 예수님을 둘러싸고 있기 때문에 접근하기가 어려웠습니다. 무엇보다 열 두 제자들이 그 중심에 그리고 부리부리한 베드로가 예수님 뒤를 호위하고 있었습니다. 여인은 서서히 현기증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죽을 힘을 다해서 예수님의 뒤로 와서 그 옷 가에 손을 대었습니다. 여기서 대었다는 단어는 원어로 비끌어 매다는 뜻입니다. 겉으로 볼 때는 옷 가에 댄 것이지만 그 마음은 예수님을 놓칠 수 없다는 절박한 마음으로 붙잡았던 것입니다. 여인의 손이 예수님의 옷술을 만지는 순간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냉랭하던 여인의 몸은 순식간에 뜨거워지더니 혈루 근원이 말라버렸습니다. 여인은 자신의 병이 나은 것을 깨달았습니다. 예수님의 능력은 즉시 나타났습니다. 예수님이 능력의 저수지라면 여인의 믿음은 능력을 흐르게 하는 파이프였습니다. 예수님이 생명의 근원이시라면 여인의 믿음의 파이프를 통해서 그 생명이 흘러 들어왔습니다. 때로 우리는 예수님께서 우리의 기도에 너무 늦게 또는 둔하게 반응하시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얼마나 희미하게 하든지 또는 얼마나 연약하든지 간에 예수님은 믿음으로 만지는 기도의 행동에 대해서 매우 강력하게 반응하십니다. 만약 예수님의 응답이 늦다면 그것은 예수님께서 보실 때 적절한 때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여인의 믿음은 운명을 극복하게 했습니다. 이 여인의 믿음은 창조적으로 표현되었습니다. 그녀의 믿음은 보이지 않았지만 힘있게 역사했습니다. 그녀의 믿음은 작게 표현되었지만 크게 역사했습니다.
우리 가운데 믿음으로 반복된 실패를 극복하고 승리한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믿음으로 죄의 소욕을 극복한 분이 있습니다. 믿음으로 중풍병에서 나음을 받기도 했습니다. 믿음으로 인간 관계에서 받은 상처를 극복하고 좋은 영향력을 끼치는 분도 있습니다. 속두려움을 극복하고 빼어난 제자 양성가가 된 분도 있습니다. 믿음으로 반복된 학업의 실패를 극복하고 좋은 직장에 취직한 분도 있습니다. 우리들이 실제 삶 속에서 체험한 작은 믿음의 승리를 인하여 주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예수님은 능력이 자기에게서 나간 것을 보시고 놀라셨습니다. 그래서 “내게 손을 댄 자가 누구냐?”고 손 댄 사람을 찾으셨습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주여 무리가 옹위하여 미나이다”라고 말하며 예수님께서 너무 민감해 지셨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내게 손을 댄 자가 있도다 이는 내게서 능력이 나간 줄 앎이로다.”라고 하시며 계속 찾으셨습니다. 예수님이 계속 찾으시자 여자는 스스로 숨기지 못할 줄을 알고 떨며 나아와 엎드렸습니다. 그리고 그 손 댄 연고와 곧 나은 것을 모든 사람 앞에서 고백하였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여인으로 하여금 이렇게 고백하도록 하신 의도가 무엇입니까? 먼저는 여인의 믿음을 온전케 하고자 하셨습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의 옷 가에 손을 대어 병이 나았지만 예수님을 부정케 하고 예수님의 능력을 훔쳤다는 양심의 가책이 있었습니다. 만약 이대로 가버린다면 양심의 가책을 받으며 살았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여인의 믿음을 드러내심으로 그 믿음을 온전케 하고자 하셨습니다. 또한 여인이 신비주의에 빠지지 않고 믿음으로 나음 받은 것을 드러내어 그 믿음을 바로 세워주고자 하셨습니다. 즉 옷자락을 만졌기 때문에 나은 것이 아니라 그 믿음 때문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여인이 모든 사실을 고백하자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고 하시며 축복해주셨습니다. 예수님은 12년 동안 앓던 병이 치료되었는데 인사도 없이 가고자 한다고 책망하지 않으시고 여인을 딸로 영접해 주시고 그 믿음을 인정해 주시고 축복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너를 고쳐주었다’고 강조하지 않으시고 여인의 믿음을 칭찬하셨습니다. 그녀는 떨며 나와서 ‘고백하면 나 죽는다’고 생각했지만 도리어 하나님의 평안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거리낌없이 사람들과 교제를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과 인격적인 사귐이 깊어지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둘째, 야이로와 제자들과 무리들의 믿음을 견고케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숨겨진 믿음의 역사를 드러내심으로 제자들이나 야이로에게 믿음을 심고자 하셨습니다. 감추어진 역사를 드러내어 역사화함으로 이 천년 뒤에 살고 있는 우리들도 그 역사를 통해서 믿음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소감 모임을 통해서 서로 받은 바 은혜와 믿음을 나누면 서로 큰 격려를 받게 됩니다. 믿음도 풍성해지고 사랑의 관계성도 생기게 되고 서로에게 유익이 됩니다. 또한 이러한 고백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우리 하나님은 죽으신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의 삶 가운데서 힘있게 역사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소감 모임을 통한 고백을 통해서 우리의 믿음은 자라게 됩니다. 우리 가운데 감동적인 소감을 나누는 가운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우리의 믿음이 더욱 강건해지기를 기도합니다.
II.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49-56)
예수님께서 여인의 고백을 들으시고 축복하시는 은혜로운 분위기가 계속되고 있는데 여기에 찬 물을 끼얹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회당장 야이로의 집에서 사람이 와서 말했습니다.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선생을 더 괴롭게 마소서” 이 말은 평범한 말 같지만 야이로의 가슴에 대못을 박는 것과 같았습니다. 그는 혈루증에서 나음받은 여인의 고백을 듣고 딸이 나으리라는 희망에 부풀어 있는데 사단은 바늘로 풍선을 터뜨린 격입니다. 그의 말은 선생을 더 괴롭게 말라는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을 위해서 하는 말 같지만 사실은 불신의 말입니다. 더 이상 예수님을 믿지 말라는 뜻입니다.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라는 말은 야이로에게는 가장 절망적인 말이었습니다. 이 일만은 일어나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는데 가장 두려워하는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두려움이 그 마음을 덮쳐 버리게 됩니다. 그리고 원망과 불평을 하기 쉽습니다. 예수님께서 왜 그렇게 소감 발표를 길게 시키시는가? 이 여인은 무슨 할 말이 그렇게 많은가? 하면서 온갖 불평과 원망의 말을 쏟아내며 통곡하기 쉽습니다. 그리고 믿음의 길을 포기하고 이제는 장례 준비나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사람이 절망에 빠지면 방향 감각을 잃고 파괴적인 행동을 하게 됩니다. 예를 들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땅을 정탐하고 돌아온 열 두령들의 부정적인 듣고 밤새도록 울며 통곡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거역하며 한 장관을 세워 애굽으로 돌아가고자 하였습니다.
믿음으로 살고 있는 우리에게는 어떤 두려움이 있습니까?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는 것을 두려워하는 분이 있습니다. 자기의 약점이나 과거가 드러날 것이 두려운 것입니다. 또한 상대방으로 인해 상처 받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대개 우리는 내 힘으로 제어할 수 없는 대상이나 환경에 처하게 되면 두려워합니다. 불확실한 장래가 우리에게 두려움을 줄 때도 있습니다. 무지는 우리를 두렵게 합니다. 어두움 가운데 있으면 귀신 생각도 나고 공포감이 생기기도 합니다. 특히 죽음으로 인한 두려움은 우리의 존재가 소멸된다는 생각 때문에 두렵습니다. 그 허무함으로 인해서 두려운 것입니다. 이상을 볼 때 우리들이 두려워하는 근본 뿌리는 죽음이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무지요, 진리를 알 경우에는 하나님께 대한 불신입니다.
예수님은 두려움의 세력에 잡혀서 어두움 속으로 끌려 들어가는 야이로를 어떻게 건져내셨습니까? 50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들으시고 가라사대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그리하면 딸이 구원을 얻으리라 하시고” 예수님은 야이로를 시기 적절하게 도우셨습니다. 영적인 환경 변화에 아주 민감하게 대처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회당장의 집에서 온 사람이 하는 말을 다 들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말이 야이로에게 어떤 불신을 심게 될 지도 잘 아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두려움을 심는 사단의 소리를 다 듣고 계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불신에 빠지지 않도록 말씀하십니다.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그리하면 네 딸이 구원을 얻으리라.”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이는 처음 믿음을 끝까지 가지라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이 주신 말씀을 붙잡으라는 뜻입니다. 그는 장례를 치루어야 할 분위기 속에서 예수님께 희망을 두게 되었습니다. 그가 처음 예수님께 나아올 때보다 상황이 더 어려워졌기 때문에 더 큰 믿음이 필요했습니다. 병고치는 믿음보다 죽음을 이기는 부활 신앙이 그에게 필요했습니다. 우리 인생에는 수없이 두려움을 심는 상황이 밀려옵니다. 절망이 되는 상황이 다가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입니다(딤후 1:7). 여기서 마음은 영입니다. 성령으로 충만할 때 우리는 두려움 대신에 담력을 갖게 됩니다. 사랑은 두려움을 내어 쫓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이 모든 일에 우리가 넉넉히 이깁니다(롬8:37). 믿음은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때까지 인내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불가능 속에서 가능을 보는 것이요 죽음에서 부활을 보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으로 쓰러지는 야이로를 일으켜 세웠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그에게 딸의 부활에 대한 확신을 주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그의 불신을 치료하고 믿음을 더욱 확실하게 해 주는 치료약이 되었습니다.
두려움은 해로운 것이지만, 복된 두려움 꼭 가져야 할 두려움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광풍을 잠잠케 하셨을 때 제자들이 두려워하고 기이히 여긴 두려움입니다(8:25). 또한 예수님께서 거라사 귀신 들린 자에게서 귀신을 쫓아내어 그를 온전케 했을 때 사람들이 보고 두려워했던 그 두려움입니다(8:35).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은 참으로 유익하고 복된 것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잠1:7)이라고 했읍니다. 하나님 한 분을 두려워하면 그에 대한 믿음에 이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할 때 사람에 대한 속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상을 얻고 하나님이 사랑하십니다(잠13:13, 사66:2).
예수님은 야이로의 집에 이르러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와 및 아이의 부모 외에는 함께 들어가기를 허락지 아니하셨습니다. 그리고 슬프게 곡하는 사람들을 다 내 보내셨습니다. 예수님은 통곡하는 사람들에게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비웃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이의 손을 잡고 자는 아이를 깨우듯이 부르셨습니다. “아이야 일어나라.” 그러자 그 영이 돌아와 아이가 곧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은 아이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놀라는 부모에게 이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경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두려움의 실체인 죽음을 이기시고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믿는 자들 속에서 두려움을 제하시고 승리의 인생을 살게 하십니다.
여러분을 두렵게 하는 것이 있습니까? 잘 풀리리라 예상했던 일들이 뒤집어 졌습니까? 믿었던 사람에 대한 기대가 무너졌습니까? 우리 모두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는 말씀을 붙잡음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은 우리의 믿음을 강화시켜 줍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함으로 사람에 대한 두려움을 이기고, 환난이 주는 두려움을 이기고 승리하는 삶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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