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2004년 누가복음 제 16 강(눅8:22-39)/네 이름이 무엇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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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누가복음 제 16 강
말씀 / 누가복음 8:22-39
요절 / 누가복음 8:30
네 이름이 무엇이냐
“예수께서 네 이름이 무엇이냐 물으신즉 가로되 군대라 하니 이는 많은 귀신이 들렸음이라.”
우리는 오늘날 정체성 상실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내가 누구인지, 나에게 주어진 사명이 무엇인지 알 때 비전을 가질 수 있습니다. 내가 누구인지 아는 것은 이제까지 살아온 삶을 돌아보면서 그 가운데 역사하신 하나님을 알고 그 앞에 설 때 가능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귀신 들려 고통하는 한 청년에게 “네 이름이 무엇이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리고 그의 정신을 온전케 하시며 사명을 주셨습니다.
오늘 앞 부분에서는 광풍을 잠잠케 하신 예수님이 나오고, 후반부는 광인을 온전케 하시는 예수님입니다. 광풍은 회오리 바람으로서 당시 갈릴리 바다를 항해하던 예수님 일행에게 불어닥쳤습니다. 우리 가운데에서도 어떤 사람들은 평온한 가운데 지내고 있지만 어떤 분들은 광풍 속을 지나가고 있습니다. 광풍은 언제든지 또 누구에게든지 예고 없이 불어닥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오늘 말씀을 통해서 광풍 속에서 어떤 믿음을 가져야 하는지 배우기를 원합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항해하는 목적지까지 다다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I.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22-25)
하루는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배에 오르사 “호수 저편으로 건너가자”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오랫 만에 배를 몰면서 가슴 깊이까지 상쾌한 바닷 내음을 맡았습니다. 그들의 마음은 시원했고 입에서는 콧노래가 절로 나왔습니다. 예수님께서도 피곤하셨는지 이내 잠이 드셨습니다. 목자없는 양무리들을 섬기느라 밤을 지새우며 카운슬링하고 말씀을 가르치시며 치료하시던 예수님의 얼굴에는 강같은 평화가 드리워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평화도 잠시 광풍이 호수로 내리치기 시작했습니다. 배에는 물이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제자들은 젖먹던 힘을 다해 물을 퍼내고 노를 저었습니다. 세리 레위는 돛을 단 기둥을 붙잡고 있었고 나다나엘은 갑판 위에 쓰러져 구르고 있었고 요한은 바람에 날려 갈 지경이었습니다. 어떤 제자는 구토를 하면서 괴로워하고 있었습니다. 노련한 어부였던 베드로도 얼굴이 파랗게 질려버렸습니다. 광풍 앞에서 인간의 경험이나 지식이나 신앙은 너무나 초라해보였습니다.
우리는 인생 항해 중에 예기치 않게 이런 광풍을 만나게 됩니다. 청소년기를 질풍노도의 시기(storm age)라고 부릅니다. 이들의 행동은 변화무쌍합니다. 튀어 보이기 위해서 이들은 상식을 과감히 깨뜨립니다. 그렇게 되면 때로 부모들이나 목자들은 당황하게 됩니다. 혈기를 부리기도 합니다. 그렇게 되면 두 광풍이 부딪쳐서 가정이 뒤집어 지기도 하고 모임이 뒤집어 지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호수 저편으로 건너가자고 방향을 주셨고 그 방향에 순종하여 나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도 함께 승선하고 계셨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광풍이 불어닥쳤습니다. 이와 같이 열심히 주님을 섬기고 헌신적으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을 때에도 예기지 않은 환난들이 터집니다. 내면에는 두려움의 광풍, 의심의 광풍, 불신의 광풍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기도할 때마다 나오는 소리는 “주여 제가 죽겠습니다. 미치겠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이런 광풍은 개인뿐만 아니라 국가와 사회에도 불어닥칩니다. 미국은 이라크 사태로 인하여 광풍을 겪고 있습니다. 우리 나라는 유가 상승으로 인해서 경제에 광풍이 불고 있습니다. 주한미군의 일부 철수로 인해서 힘들어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요 16:33). 우리들에게 고난과 위험의 어려운 일들이 있지만, 그것들은 우리에게 언제나 유익을 줍니다. 우리가 당하는 고난은 우리의 개인적인 죄를 깨닫게 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케 하는 유익을 줍니다. 뿐만 아니라(시 119:67, 71) 인간의 무력(無力)함을 깨닫게 하고 하나님과 사람 앞에 겸손케 하며, 항상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며, 또 신앙의 담력을 얻게 하는 유익을 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환란을 당할 때에 우리는 신앙 생활하는데 왜 이런 일이 있을까, 하나님은 왜 나만 갖고 이러시는가, 왜 하필 내가 당해야 하는가라며 손해의식과 피해의식에 사로잡히기 보다는 믿음을 갖고 적극적으로 대처해야 합니다.
제자들은 주님께 나아와 부르짖었습니다. “주여 주여 우리가 죽겠나이다.” 제자들은 주여 삼창을 한 것이 아니라 다급해서 이창만 하였습니다. 그들의 마음 속에는 이 난리판에 편히 잠을 주무시는 예수님을 보고 야속한 생각이 가득했습니다. 제자들은 자신들이 광풍으로 고통을 당하고 있는데 예수님은 무관심한 듯이 보였습니다. 그래서 원망과 간청하는 마음이 뒤섞여 부르짖었습니다. 이 부르짖음은 제자들의 기도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잠을 깨사 바람과 물결을 꾸짖으셨습니다. 보통 개가 짖으면 사람들은 도망을 치든지 발로 차든지 얼르든지 하여 잠잠케 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개 주인은 조용해하고 한마디 하면 개가 꼼짝을 못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예수님은 창조주로서 바람과 파도에 대해서도 지배력이 있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연 세계 조차도 지배하시는 창조주하나님이시니다. 예수님은 개인의 문제뿐만 아니라 자연과 세계의 문제를 다루실 수 있는 권세가 있습니다. 제자들은 광풍에 대해서 속수무책이었지만 예수님이 바람과 물결을 꾸짖으시자 이에 그쳐 잔잔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바람과 물결을 잔잔케 하신 후 제자들에게 물으셨습니다.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 믿음의 처소는 마음입니다. 마음은 지정의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의 믿음은 머리로 아는 것에 치중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행동주의에 빠지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믿음 생활이 감정적인 추구에 빠지기도 합니다. 믿음은 삶입니다. 지금 제자들의 믿음은 현실 문제와 상관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들의 믿음은 광풍과 함께 날라 가 버렸습니다.
믿음의 대상은 하나님이십니다. 지금 제자들의 형편에서 믿음의 대상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광풍 속에서 예수님을 믿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문제를 다루실 수 있다고 믿지 못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말씀을 전하시고 병자를 고치고 죽은 자를 살리시지만 자연 세계 만큼은 어찌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연 세계를 다스릴 수 있는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고 물으셨을 때 두려워하고 기이히 여겨 서로 말했습니다. “저가 뉘기에 바람과 물을 명하매 순종하는고?” 예수님이 누구신가? 뉘기에 바람과 물을 명하매 순종하는고?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광풍을 통해서 제자들은 예수님께 대한 인식이 새로워졌습니다. 바람과 파도를 향해 명령하여 복종케 할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그것은 사람의 능력의 한계 밖에 있는 일입니다. 하나님만이 바람과 파도를 주장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전능하시므로 모든 것을 하실 수 있습니다. 그는 우주 만물을 주관하고 통치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예수께서 그 일을 하셨다는 것은 그가 사람 이상이심, 곧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이 사건의 목적이 있었습니다. 이것이 이 사건이 성경에 기록된 첫번째 이유였습니다.
그러면 제자들은 광풍 속에서 어떤 믿음의 자세를 취해야 했을까요? 예수님은 광풍 속에서 제자들에게 “너희 능력이 어디 있느냐”고 책망하지 않으셨습니다. 단지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고”고 물으셨습니다. 제자들은 광풍과 물결의 격동 속에서 믿음으로 잠잠히 하나님을 바랐어야 했습니다. 옛날 모세는, 애굽에서 나오자마자 애굽 군대의 추적을 받았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 . .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라고 말했습니다(출 14:13,14). 또 시편 62편 저자는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나의 구원이 그에게서 나는도다”라고 고백했습니다(시 62:1). 이와 같이, 우리는 어려운 일을 만날 때 두려워하거나 당황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하나님의 하시는 구원을 보며 믿음으로 잠잠히 하나님을 바라며 기다려야 할 것입니다. 제자들의 믿음이 좋으면 같이 자야 합니다.
그것이 어려우면 원망하기보다 믿음으로 간구해야 합니다. 성경은 환난 날에 하나님께 간구해야 할 것을 말씀했습니다. 시편 50:15,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예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하여 응답을 얻어야 할 것을 강조하여 가르치셨습니다. 마태복음 7:7-11,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면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면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또 바울 사도는 빌립보 서신에서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고 가르쳤습니다(빌 4:6,7).
예수님은 제자들을 광풍을 통해서 믿음의 사람이 되도록 훈련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으시고 마음을 강하게 먹고 훈련하셨습니다. 쓸모없이 버려졌던 제자들을 택하시고 훈련하사 믿음의 용장들이 되도록 하셨던 하나님께서 저희와도 함께 하사 지금 내가 당하고 있는 광풍을 통해서 위대한 믿음의 사람들로 키우실 것을 믿습니다. 광풍은 우리의 믿음이 이론적인 믿음이 아니라 실제적인 믿음이 되게 하십니다. 광풍은 바다를 뒤집어 깨끗케 한다고 합니다. 광풍을 통해서 우리의 속을 뒤집어 깨끗케 하시는 주님을 찬양합니다. 저는 목자 생활을 하면서 당하는 여러 모양의 광풍을 통해서 한 영혼에 대한 사랑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너무나 귀하고 나의 몸과 같이 사랑해야 할 존재임을 깨닫게 하십니다. 제가 문제들을 통해서 기도하는 믿음, 한 영혼을 사랑하는 믿음, 주권자 되시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배우고 믿음을 가르치는 자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II. 네 이름이 무엇이냐(26-39)
예수님과 제자들이 갈릴리 맞은 편 거라사인의 땅에 이르렀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육지에 내리시매 그 도시 사람으로서 귀신들린 자 하나가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귀신들렸다는 것은 귀신에 사로잡혀 귀신의 조종을 받는다는 뜻입니다. 그는 귀신에 사로잡혀 오래 옷을 입지 아니하며 집에 거하지도 아니하고 무덤 사이에 거했습니다. 귀신은 아무나 사로잡는 것이 아닙니다. 환경이 더러우면 병균이 서식하듯이 영적으로 더러운 마음에 더러운 귀신이 역사하기가 쉽습니다. Washington 의 Rusty Smoroldo 목자는 범죄가 가득 찬 미국 사회와 타락한 십대들의 영향을 그대로 받고 자라났습니다. 그는 파괴된 가정에서 자라나 어릴 때부터 주유소를 터는 등 강도 짓을 하고 마약을 복용하였습니다. 또 여자 친구와 동거하여 20세의 나이에 두 아이의 아버지가 되었습니다. 그는 사회에 대한 반발심과 복수심으로 절도와 강도, 폭행사건으로 감옥에까지 갔습니다. 그의 영혼은 칠흙같이 어둡고 그의 마음은 돌같이 굳어 있었습니다. 그는 자유를 찾기 위해 자신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하였지만 오히려 그것은 그를 속박하고 파멸에 이르게 하였습니다. 법이나 제도나 사상이 그를 구원할 수 없었습니다. 그가 감옥에 있을 때 악마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내가 너의 마음에 인을 치려고 하는데 허락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매우 놀라서 이를 거부하였습니다. 그리고 다행히 옥중에서 그는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성난 거라사인과 같은 그를 은혜스러운 목자로 변화시킬 수 있었습니다. 귀신들린 사람은 죄인의 영적인 상태를 형상화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은 오래 옷을 입지 아니하며 집에 거하지도 아니하고 무덤 사이에 거하였습니다. 그가 오래 옷을 입지 않은 것은 옷이 자기를 억압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기를 맘껏 드러내고 싶었습니다. 요즈음은 패션쇼를 하는데 옷을 입은 것인지 벗은 것인지 구별이 되지 않을 정도입니다. 갈수록 노출이 심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사람은 아예 문화에 대한 반발로 오래 동안 옷을 입지 않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미친 사람들 중에는 반대로 옷을 껴입는 사람도 있습니다. 좋은 옷을 한번에 하나만 보여 주어야 한다는 반발 때문에 한번에 여러 벌을 껴입는 것입니다. 이를 볼 때 귀신의 종류도 여러 가지 임을 알 수 있습니다. 또 그는 집에 거하지 않고 무덤 사이에 살았습니다. 집은 쉼이 있고 사랑이 있고, 가르침을 받는 곳인데 그에게는 견디기 힘든 곳이 되어 버렸습니다. 알콜 중독 자인 아버지가 술만 먹고 들어오면 어머니를 두드려 패는 것을 견디다 못한 그는 집에 들어가기가 싫었습니다. 또 집에만 들어가면 어머니의 잔소리가 듣기 싫었습니다. 어머니의 충고가 그에게는 간섭으로 여겨졌습니다. 가끔가다 자기 문을 열면 자기를 감시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집에 있는 것을 답답하게 여겨 어느 날 가출을 했습니다. 가출하여 주유소 아르바이트를 하고 술집에도 들락거리고 창녀들과도 놀아났습니다. 그가 빚을 져서 유흥비로 쓰다가 이제는 빚독촉으로 인해서 미쳐버리게 되었습니다. 그의 하는 행동이 너무나 변태적이라 사회에서도 그를 용납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는 무덤에 가서 살았습니다. 무덤은 죽은 자들이 가는 곳입니다. 그는 자살을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마음대로 죽을 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밤낮 무덤 사이에서나 산에서나 늘 소리지르며 돌로 제 몸을 상하고 있었습니다(막5:5).
거라사 광인은 예수님을 보았을 때 부르짖으며 그 앞에 엎드렸습니다. 그리고 큰 소리로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나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당신께 구하노니 나를 괴롭게 마옵소서”라고 하였습니다. 이를 볼 때 귀신들도 하나님과 예수님께 대한 상당한 지식을 가지고 있지만 그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고 구원도 받지 못합니다. 그들은 회개하지 않습니다. 거라사 광인이 이렇게 부르짖은 것은 이미 예수님께서 더러운 귀신을 명하여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29). 귀신이 가끔 이 사람을 붙잡으므로 저가 쇠사슬과 고랑에 매이어 지키웠으되 그 맨 것을 끊고 귀신에게 몰려 광야로 나갔습니다. 그러나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는 귀신도 예수님은 제어할 수 있는 권세가 있으셨습니다.
30a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네 이름이 무엇이냐 물으신즉" 예수님은 그의 정체를 드러내기 위해서 이름을 물으셨습니다. 정체성이란 그의 특징, 다른 사람과 구별되는 점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드러나는 현상을 보시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 있는 문제를 보셨습니다. 감추어져 있는 본질, 본심을 보셨습니다. 귀신은 간교하여 자신을 위장하는데 천재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귀신은 사람들로 하여금 귀신들렸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도록 자신을 위장하여 뒤에서 숨어서 인간을 조종하고 파멸로 이끌어갑니다. 그러나 귀신은 자신의 정체가 드러날 때 더 이상 힘을 쓰지 못합니다. 말씀의 빛 앞에 귀신의 정체가 드러나게 해야 귀신을 쫓아낼 수 있습니다.
그는 귀신에 사로잡혀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알지 못하고 자아를 상실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판단과 의지에 의해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귀신의 세력에 의해서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그는 존재의미를 상실하고 울부짖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에게 이름을 물음으로써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본래 자아를 발견하도록 도우셨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배반한 결과 중 가장 비참한 것은 존재의미를 상실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범죄한 아담을 찾아오셔서 가정 먼저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름을 물으시자 귀신이 대답했습니다. 30b절을 보십시오. “가로되 군대라 하니 이는 많은 귀신이 들렸음이라.” ‘군대’라는 원어(레게온)는 로마 군대 조직의 군단을 가리켰습니다. 그것은 수백명의 기병과 5, 6천명의 보병으로 구성되었다고 합니다. 그 사람의 이름이 그러한 것은 많은 귀신들이 그 속에 들어가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보통 귀신들린 사람과 달랐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무덤에 살며 사람들이 통제할 수 없이 사나웠고 크게 소리를 질렀던 것입니다. 그는 탐욕귀신, 교만귀신, 정욕귀신, 강포귀신, 혈기 귀신, 미움귀신, 반발귀신, 욕귀신 등등 수없이 많은 귀신의 세력에 끌려다녔습니다.
31-33절을 보십시오. “무저갱으로 들어가라 하지 마시기를 간구하더니 마침 거기 많은 돼지 떼가 산에서 먹고 있는지라 귀신들이 그 돼지에게로 들어가게 허하심을 간구하니 이에 허하신대 귀신들이 그 사람에게서 나와 돼지에게로 들어가니 그 떼가 비탈로 내리달아 호수에 들어가 몰사하거늘” 귀신들은 자신들이 무저갱 곧 지옥에 갈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지옥은 ‘마귀와 그 사자들[귀신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입니다(마 25:41). 귀신들이 무저갱에 던지울 것을 두려워하는 것을 보면, 그들은 자신들이 장차 거기에 던지울 운명에 처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직은 때가 되지 아니하여 예수님은 돼지떼에게로 귀신이 들어가는 것을 허락하셨습니다. 이를 통해서 물질주의가 팽배한 사람들에게 생명의 귀중함을 알도록 경고하셨습니다. 인간이 상품화되어 있는 시대에 한 생명이 천하보다 귀하다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마 16:25, 26).
귀신이 나가자 그 사람은 정신이 온전케 되었습니다. 그는 옷을 입고 예수님의 발 아래 앉아있었습니다. 그는 변화되어 하나님 나라의 황태자로 새롭게 태어났습니다. 그는 이 은혜에 감격하여 예수님과 영원토록 함께 하고자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시는 곳이면 어디든지 따라가고 싶었습니다. 그 지방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떠나주시기를 간구하였으나 그는 예수님과 함께 교제하기를 원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는 그와 함께 있기를 원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의 요청을 거절하셨습니다. 그 대신 “집으로 돌아가 하나님이 네게 어떻게 큰 일 행하신 것을 일일이 고하라”고 사명을 주셨습니다. 그는 주님의 말씀대로 돌아가 예수님이 자기에게 하신 큰 일을 온 성 사람들에게 증거하였습니다.
우리가 참으로 하나님을 알았고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우리의 구주 되심을 안다면, 우리는 주와 함께 거하기를 소원할 것입니다. 그 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읽기를 좋아하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예배하기를 좋아하고 다른 이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귀신이 다시 그 안에서 역사하지 않도록 하려면 성령의 충만함을 덧입고 하나님의 은혜와 그 말씀을 증거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결론적으로 예수님은 인생 항해를 하는 우리의 삶 가운데 닥치는 여러 광풍을 잠잠케 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광풍 속에서 주님을 신뢰하고 그의 구원을 잠잠히 바라야하겠습니다. 사람들은 모두가 자유를 갈망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떠난 인생은 자유로울 것 같지만 근본적으로 참 자유가 없습니다. 이는 죄로 말미암아 사단의 포로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 사단의 권세를 멸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로 우리 죄를 도말하시고 부활로 사단의 권세를 파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죄사함과 참 자유를 주셨습니다. 지금도 예수님은 귀신들려 자아를 상실하고 울부짖는 자들에게 질문하십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우리가 주님 앞에서 내가 누구인가를 돌아보고 의미있고 생명을 살리는 일을 감당해야 하겠습니다.
말씀 / 누가복음 8:22-39
요절 / 누가복음 8:30
네 이름이 무엇이냐
“예수께서 네 이름이 무엇이냐 물으신즉 가로되 군대라 하니 이는 많은 귀신이 들렸음이라.”
우리는 오늘날 정체성 상실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내가 누구인지, 나에게 주어진 사명이 무엇인지 알 때 비전을 가질 수 있습니다. 내가 누구인지 아는 것은 이제까지 살아온 삶을 돌아보면서 그 가운데 역사하신 하나님을 알고 그 앞에 설 때 가능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귀신 들려 고통하는 한 청년에게 “네 이름이 무엇이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리고 그의 정신을 온전케 하시며 사명을 주셨습니다.
오늘 앞 부분에서는 광풍을 잠잠케 하신 예수님이 나오고, 후반부는 광인을 온전케 하시는 예수님입니다. 광풍은 회오리 바람으로서 당시 갈릴리 바다를 항해하던 예수님 일행에게 불어닥쳤습니다. 우리 가운데에서도 어떤 사람들은 평온한 가운데 지내고 있지만 어떤 분들은 광풍 속을 지나가고 있습니다. 광풍은 언제든지 또 누구에게든지 예고 없이 불어닥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오늘 말씀을 통해서 광풍 속에서 어떤 믿음을 가져야 하는지 배우기를 원합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항해하는 목적지까지 다다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I.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22-25)
하루는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배에 오르사 “호수 저편으로 건너가자”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오랫 만에 배를 몰면서 가슴 깊이까지 상쾌한 바닷 내음을 맡았습니다. 그들의 마음은 시원했고 입에서는 콧노래가 절로 나왔습니다. 예수님께서도 피곤하셨는지 이내 잠이 드셨습니다. 목자없는 양무리들을 섬기느라 밤을 지새우며 카운슬링하고 말씀을 가르치시며 치료하시던 예수님의 얼굴에는 강같은 평화가 드리워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평화도 잠시 광풍이 호수로 내리치기 시작했습니다. 배에는 물이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제자들은 젖먹던 힘을 다해 물을 퍼내고 노를 저었습니다. 세리 레위는 돛을 단 기둥을 붙잡고 있었고 나다나엘은 갑판 위에 쓰러져 구르고 있었고 요한은 바람에 날려 갈 지경이었습니다. 어떤 제자는 구토를 하면서 괴로워하고 있었습니다. 노련한 어부였던 베드로도 얼굴이 파랗게 질려버렸습니다. 광풍 앞에서 인간의 경험이나 지식이나 신앙은 너무나 초라해보였습니다.
우리는 인생 항해 중에 예기치 않게 이런 광풍을 만나게 됩니다. 청소년기를 질풍노도의 시기(storm age)라고 부릅니다. 이들의 행동은 변화무쌍합니다. 튀어 보이기 위해서 이들은 상식을 과감히 깨뜨립니다. 그렇게 되면 때로 부모들이나 목자들은 당황하게 됩니다. 혈기를 부리기도 합니다. 그렇게 되면 두 광풍이 부딪쳐서 가정이 뒤집어 지기도 하고 모임이 뒤집어 지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호수 저편으로 건너가자고 방향을 주셨고 그 방향에 순종하여 나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도 함께 승선하고 계셨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광풍이 불어닥쳤습니다. 이와 같이 열심히 주님을 섬기고 헌신적으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을 때에도 예기지 않은 환난들이 터집니다. 내면에는 두려움의 광풍, 의심의 광풍, 불신의 광풍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기도할 때마다 나오는 소리는 “주여 제가 죽겠습니다. 미치겠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이런 광풍은 개인뿐만 아니라 국가와 사회에도 불어닥칩니다. 미국은 이라크 사태로 인하여 광풍을 겪고 있습니다. 우리 나라는 유가 상승으로 인해서 경제에 광풍이 불고 있습니다. 주한미군의 일부 철수로 인해서 힘들어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요 16:33). 우리들에게 고난과 위험의 어려운 일들이 있지만, 그것들은 우리에게 언제나 유익을 줍니다. 우리가 당하는 고난은 우리의 개인적인 죄를 깨닫게 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케 하는 유익을 줍니다. 뿐만 아니라(시 119:67, 71) 인간의 무력(無力)함을 깨닫게 하고 하나님과 사람 앞에 겸손케 하며, 항상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며, 또 신앙의 담력을 얻게 하는 유익을 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환란을 당할 때에 우리는 신앙 생활하는데 왜 이런 일이 있을까, 하나님은 왜 나만 갖고 이러시는가, 왜 하필 내가 당해야 하는가라며 손해의식과 피해의식에 사로잡히기 보다는 믿음을 갖고 적극적으로 대처해야 합니다.
제자들은 주님께 나아와 부르짖었습니다. “주여 주여 우리가 죽겠나이다.” 제자들은 주여 삼창을 한 것이 아니라 다급해서 이창만 하였습니다. 그들의 마음 속에는 이 난리판에 편히 잠을 주무시는 예수님을 보고 야속한 생각이 가득했습니다. 제자들은 자신들이 광풍으로 고통을 당하고 있는데 예수님은 무관심한 듯이 보였습니다. 그래서 원망과 간청하는 마음이 뒤섞여 부르짖었습니다. 이 부르짖음은 제자들의 기도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잠을 깨사 바람과 물결을 꾸짖으셨습니다. 보통 개가 짖으면 사람들은 도망을 치든지 발로 차든지 얼르든지 하여 잠잠케 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개 주인은 조용해하고 한마디 하면 개가 꼼짝을 못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예수님은 창조주로서 바람과 파도에 대해서도 지배력이 있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연 세계 조차도 지배하시는 창조주하나님이시니다. 예수님은 개인의 문제뿐만 아니라 자연과 세계의 문제를 다루실 수 있는 권세가 있습니다. 제자들은 광풍에 대해서 속수무책이었지만 예수님이 바람과 물결을 꾸짖으시자 이에 그쳐 잔잔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바람과 물결을 잔잔케 하신 후 제자들에게 물으셨습니다.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 믿음의 처소는 마음입니다. 마음은 지정의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의 믿음은 머리로 아는 것에 치중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행동주의에 빠지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믿음 생활이 감정적인 추구에 빠지기도 합니다. 믿음은 삶입니다. 지금 제자들의 믿음은 현실 문제와 상관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들의 믿음은 광풍과 함께 날라 가 버렸습니다.
믿음의 대상은 하나님이십니다. 지금 제자들의 형편에서 믿음의 대상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광풍 속에서 예수님을 믿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문제를 다루실 수 있다고 믿지 못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말씀을 전하시고 병자를 고치고 죽은 자를 살리시지만 자연 세계 만큼은 어찌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연 세계를 다스릴 수 있는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고 물으셨을 때 두려워하고 기이히 여겨 서로 말했습니다. “저가 뉘기에 바람과 물을 명하매 순종하는고?” 예수님이 누구신가? 뉘기에 바람과 물을 명하매 순종하는고?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광풍을 통해서 제자들은 예수님께 대한 인식이 새로워졌습니다. 바람과 파도를 향해 명령하여 복종케 할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그것은 사람의 능력의 한계 밖에 있는 일입니다. 하나님만이 바람과 파도를 주장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전능하시므로 모든 것을 하실 수 있습니다. 그는 우주 만물을 주관하고 통치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예수께서 그 일을 하셨다는 것은 그가 사람 이상이심, 곧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이 사건의 목적이 있었습니다. 이것이 이 사건이 성경에 기록된 첫번째 이유였습니다.
그러면 제자들은 광풍 속에서 어떤 믿음의 자세를 취해야 했을까요? 예수님은 광풍 속에서 제자들에게 “너희 능력이 어디 있느냐”고 책망하지 않으셨습니다. 단지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고”고 물으셨습니다. 제자들은 광풍과 물결의 격동 속에서 믿음으로 잠잠히 하나님을 바랐어야 했습니다. 옛날 모세는, 애굽에서 나오자마자 애굽 군대의 추적을 받았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 . .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라고 말했습니다(출 14:13,14). 또 시편 62편 저자는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나의 구원이 그에게서 나는도다”라고 고백했습니다(시 62:1). 이와 같이, 우리는 어려운 일을 만날 때 두려워하거나 당황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하나님의 하시는 구원을 보며 믿음으로 잠잠히 하나님을 바라며 기다려야 할 것입니다. 제자들의 믿음이 좋으면 같이 자야 합니다.
그것이 어려우면 원망하기보다 믿음으로 간구해야 합니다. 성경은 환난 날에 하나님께 간구해야 할 것을 말씀했습니다. 시편 50:15,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예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하여 응답을 얻어야 할 것을 강조하여 가르치셨습니다. 마태복음 7:7-11,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면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면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또 바울 사도는 빌립보 서신에서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고 가르쳤습니다(빌 4:6,7).
예수님은 제자들을 광풍을 통해서 믿음의 사람이 되도록 훈련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으시고 마음을 강하게 먹고 훈련하셨습니다. 쓸모없이 버려졌던 제자들을 택하시고 훈련하사 믿음의 용장들이 되도록 하셨던 하나님께서 저희와도 함께 하사 지금 내가 당하고 있는 광풍을 통해서 위대한 믿음의 사람들로 키우실 것을 믿습니다. 광풍은 우리의 믿음이 이론적인 믿음이 아니라 실제적인 믿음이 되게 하십니다. 광풍은 바다를 뒤집어 깨끗케 한다고 합니다. 광풍을 통해서 우리의 속을 뒤집어 깨끗케 하시는 주님을 찬양합니다. 저는 목자 생활을 하면서 당하는 여러 모양의 광풍을 통해서 한 영혼에 대한 사랑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너무나 귀하고 나의 몸과 같이 사랑해야 할 존재임을 깨닫게 하십니다. 제가 문제들을 통해서 기도하는 믿음, 한 영혼을 사랑하는 믿음, 주권자 되시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배우고 믿음을 가르치는 자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II. 네 이름이 무엇이냐(26-39)
예수님과 제자들이 갈릴리 맞은 편 거라사인의 땅에 이르렀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육지에 내리시매 그 도시 사람으로서 귀신들린 자 하나가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귀신들렸다는 것은 귀신에 사로잡혀 귀신의 조종을 받는다는 뜻입니다. 그는 귀신에 사로잡혀 오래 옷을 입지 아니하며 집에 거하지도 아니하고 무덤 사이에 거했습니다. 귀신은 아무나 사로잡는 것이 아닙니다. 환경이 더러우면 병균이 서식하듯이 영적으로 더러운 마음에 더러운 귀신이 역사하기가 쉽습니다. Washington 의 Rusty Smoroldo 목자는 범죄가 가득 찬 미국 사회와 타락한 십대들의 영향을 그대로 받고 자라났습니다. 그는 파괴된 가정에서 자라나 어릴 때부터 주유소를 터는 등 강도 짓을 하고 마약을 복용하였습니다. 또 여자 친구와 동거하여 20세의 나이에 두 아이의 아버지가 되었습니다. 그는 사회에 대한 반발심과 복수심으로 절도와 강도, 폭행사건으로 감옥에까지 갔습니다. 그의 영혼은 칠흙같이 어둡고 그의 마음은 돌같이 굳어 있었습니다. 그는 자유를 찾기 위해 자신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하였지만 오히려 그것은 그를 속박하고 파멸에 이르게 하였습니다. 법이나 제도나 사상이 그를 구원할 수 없었습니다. 그가 감옥에 있을 때 악마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내가 너의 마음에 인을 치려고 하는데 허락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매우 놀라서 이를 거부하였습니다. 그리고 다행히 옥중에서 그는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성난 거라사인과 같은 그를 은혜스러운 목자로 변화시킬 수 있었습니다. 귀신들린 사람은 죄인의 영적인 상태를 형상화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은 오래 옷을 입지 아니하며 집에 거하지도 아니하고 무덤 사이에 거하였습니다. 그가 오래 옷을 입지 않은 것은 옷이 자기를 억압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기를 맘껏 드러내고 싶었습니다. 요즈음은 패션쇼를 하는데 옷을 입은 것인지 벗은 것인지 구별이 되지 않을 정도입니다. 갈수록 노출이 심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사람은 아예 문화에 대한 반발로 오래 동안 옷을 입지 않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미친 사람들 중에는 반대로 옷을 껴입는 사람도 있습니다. 좋은 옷을 한번에 하나만 보여 주어야 한다는 반발 때문에 한번에 여러 벌을 껴입는 것입니다. 이를 볼 때 귀신의 종류도 여러 가지 임을 알 수 있습니다. 또 그는 집에 거하지 않고 무덤 사이에 살았습니다. 집은 쉼이 있고 사랑이 있고, 가르침을 받는 곳인데 그에게는 견디기 힘든 곳이 되어 버렸습니다. 알콜 중독 자인 아버지가 술만 먹고 들어오면 어머니를 두드려 패는 것을 견디다 못한 그는 집에 들어가기가 싫었습니다. 또 집에만 들어가면 어머니의 잔소리가 듣기 싫었습니다. 어머니의 충고가 그에게는 간섭으로 여겨졌습니다. 가끔가다 자기 문을 열면 자기를 감시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집에 있는 것을 답답하게 여겨 어느 날 가출을 했습니다. 가출하여 주유소 아르바이트를 하고 술집에도 들락거리고 창녀들과도 놀아났습니다. 그가 빚을 져서 유흥비로 쓰다가 이제는 빚독촉으로 인해서 미쳐버리게 되었습니다. 그의 하는 행동이 너무나 변태적이라 사회에서도 그를 용납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는 무덤에 가서 살았습니다. 무덤은 죽은 자들이 가는 곳입니다. 그는 자살을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마음대로 죽을 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밤낮 무덤 사이에서나 산에서나 늘 소리지르며 돌로 제 몸을 상하고 있었습니다(막5:5).
거라사 광인은 예수님을 보았을 때 부르짖으며 그 앞에 엎드렸습니다. 그리고 큰 소리로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나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당신께 구하노니 나를 괴롭게 마옵소서”라고 하였습니다. 이를 볼 때 귀신들도 하나님과 예수님께 대한 상당한 지식을 가지고 있지만 그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고 구원도 받지 못합니다. 그들은 회개하지 않습니다. 거라사 광인이 이렇게 부르짖은 것은 이미 예수님께서 더러운 귀신을 명하여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29). 귀신이 가끔 이 사람을 붙잡으므로 저가 쇠사슬과 고랑에 매이어 지키웠으되 그 맨 것을 끊고 귀신에게 몰려 광야로 나갔습니다. 그러나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는 귀신도 예수님은 제어할 수 있는 권세가 있으셨습니다.
30a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네 이름이 무엇이냐 물으신즉" 예수님은 그의 정체를 드러내기 위해서 이름을 물으셨습니다. 정체성이란 그의 특징, 다른 사람과 구별되는 점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드러나는 현상을 보시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 있는 문제를 보셨습니다. 감추어져 있는 본질, 본심을 보셨습니다. 귀신은 간교하여 자신을 위장하는데 천재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귀신은 사람들로 하여금 귀신들렸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도록 자신을 위장하여 뒤에서 숨어서 인간을 조종하고 파멸로 이끌어갑니다. 그러나 귀신은 자신의 정체가 드러날 때 더 이상 힘을 쓰지 못합니다. 말씀의 빛 앞에 귀신의 정체가 드러나게 해야 귀신을 쫓아낼 수 있습니다.
그는 귀신에 사로잡혀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알지 못하고 자아를 상실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판단과 의지에 의해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귀신의 세력에 의해서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그는 존재의미를 상실하고 울부짖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에게 이름을 물음으로써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본래 자아를 발견하도록 도우셨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배반한 결과 중 가장 비참한 것은 존재의미를 상실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범죄한 아담을 찾아오셔서 가정 먼저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름을 물으시자 귀신이 대답했습니다. 30b절을 보십시오. “가로되 군대라 하니 이는 많은 귀신이 들렸음이라.” ‘군대’라는 원어(레게온)는 로마 군대 조직의 군단을 가리켰습니다. 그것은 수백명의 기병과 5, 6천명의 보병으로 구성되었다고 합니다. 그 사람의 이름이 그러한 것은 많은 귀신들이 그 속에 들어가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보통 귀신들린 사람과 달랐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무덤에 살며 사람들이 통제할 수 없이 사나웠고 크게 소리를 질렀던 것입니다. 그는 탐욕귀신, 교만귀신, 정욕귀신, 강포귀신, 혈기 귀신, 미움귀신, 반발귀신, 욕귀신 등등 수없이 많은 귀신의 세력에 끌려다녔습니다.
31-33절을 보십시오. “무저갱으로 들어가라 하지 마시기를 간구하더니 마침 거기 많은 돼지 떼가 산에서 먹고 있는지라 귀신들이 그 돼지에게로 들어가게 허하심을 간구하니 이에 허하신대 귀신들이 그 사람에게서 나와 돼지에게로 들어가니 그 떼가 비탈로 내리달아 호수에 들어가 몰사하거늘” 귀신들은 자신들이 무저갱 곧 지옥에 갈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지옥은 ‘마귀와 그 사자들[귀신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입니다(마 25:41). 귀신들이 무저갱에 던지울 것을 두려워하는 것을 보면, 그들은 자신들이 장차 거기에 던지울 운명에 처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직은 때가 되지 아니하여 예수님은 돼지떼에게로 귀신이 들어가는 것을 허락하셨습니다. 이를 통해서 물질주의가 팽배한 사람들에게 생명의 귀중함을 알도록 경고하셨습니다. 인간이 상품화되어 있는 시대에 한 생명이 천하보다 귀하다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마 16:25, 26).
귀신이 나가자 그 사람은 정신이 온전케 되었습니다. 그는 옷을 입고 예수님의 발 아래 앉아있었습니다. 그는 변화되어 하나님 나라의 황태자로 새롭게 태어났습니다. 그는 이 은혜에 감격하여 예수님과 영원토록 함께 하고자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시는 곳이면 어디든지 따라가고 싶었습니다. 그 지방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떠나주시기를 간구하였으나 그는 예수님과 함께 교제하기를 원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는 그와 함께 있기를 원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의 요청을 거절하셨습니다. 그 대신 “집으로 돌아가 하나님이 네게 어떻게 큰 일 행하신 것을 일일이 고하라”고 사명을 주셨습니다. 그는 주님의 말씀대로 돌아가 예수님이 자기에게 하신 큰 일을 온 성 사람들에게 증거하였습니다.
우리가 참으로 하나님을 알았고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우리의 구주 되심을 안다면, 우리는 주와 함께 거하기를 소원할 것입니다. 그 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읽기를 좋아하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예배하기를 좋아하고 다른 이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귀신이 다시 그 안에서 역사하지 않도록 하려면 성령의 충만함을 덧입고 하나님의 은혜와 그 말씀을 증거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결론적으로 예수님은 인생 항해를 하는 우리의 삶 가운데 닥치는 여러 광풍을 잠잠케 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광풍 속에서 주님을 신뢰하고 그의 구원을 잠잠히 바라야하겠습니다. 사람들은 모두가 자유를 갈망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떠난 인생은 자유로울 것 같지만 근본적으로 참 자유가 없습니다. 이는 죄로 말미암아 사단의 포로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 사단의 권세를 멸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로 우리 죄를 도말하시고 부활로 사단의 권세를 파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죄사함과 참 자유를 주셨습니다. 지금도 예수님은 귀신들려 자아를 상실하고 울부짖는 자들에게 질문하십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우리가 주님 앞에서 내가 누구인가를 돌아보고 의미있고 생명을 살리는 일을 감당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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