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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2004년 누가복음 제 14 강(눅7:18-50)/많은 죄사함, 많은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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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섬김이
댓글 0건 조회 2,730회 작성일 04-12-14 2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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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누가복음 제 14 강                                               
말씀 / 누가복음 7:18-50
요절 / 누가복음 7:47

많은 죄사함, 많은 사랑
  “그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저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저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회의는 신앙을 갉아먹는 생쥐와 같다.” 사람은 누구나 회의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오늘은 감옥에 갇혔지만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 상황에서 세례 요한은 이런 회의에 빠졌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메시야에 대한 예언을 들려주심으로 믿음을 회복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의 후반부에서 죄 많은 한 여인이 예수님을 얼마나 감동적으로 섬겼는지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회의를 극복하고 믿음에 굳게 서서 주님을 힘써 사랑하기를 기도합니다.

I. 세례 요한을 도우신 예수님(18-35)

  예수님의 선구자 세례 요한은 의인으로서 회개의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그리고 백성들에게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소개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3:17)”고 소개했습니다. 이는 예수님을 심판자로 소개한 것입니다. 그런데 분봉 왕 헤롯은 그 동생의 아내 헤로디아의 일과 또한 그의 행한 모든 악한 일을 인하여 요한에게 책망을 받고 이 위에 한 가지 악을 더하여 요한을 옥에 가두었습니다. 요한은 예수님이 헤롯을 심판하고 자기를 옥에서 건져 내 주셔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감옥 속에서 믿음이 약해져서 예수님이 정말 약속하신 그리스도이신가 의심하게 되었습니다. 요한의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백부장의 죽어가는 종을 말씀만으로 치료하신 일, 나인 성 과부의 외아들을 살려내신 일 등 예수님께서 행하고 계신 모든 일들을 그에게 보고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한은 마음에 있는 의심이 풀리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좋은 일을 하고 계시지만 자신의 현실 문제를 해결해 주시지 않는 것이 답답했습니다.

  믿음 생활은 완전한 만족이 된다는 것을 강조하는 가르침이 성경에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우리는 기독교가 ‘필요 충족’의 종교가 아니라는 많은 증거를 발견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에게 ‘이 세상에서 너희는 괴로움을 당할 것’(요16:33;고후1:8; 딤후3:12; 히11:35-39)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동안 필요 충족을 이루려는 노력을 하지만 좌절할 뿐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현재와 하나님의 나라가 ‘아직 도래하지 않은’ 상태의 긴장에서 도피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인간의 행복보다는 우리의 성화에 더 관심이 있습니다. 구원의 목표는 우리가 용서받는 것일 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닮아 영적으로 자라가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이 그의 영을 사용하여 우리를 통해 일하심으로써 세상에서 그의 목적을 이루실 수 있도록 우리 자신을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신앙에 회의가 찾아왔을 때 혼자서 고민하다가 오해하지 않고 주님께 나아가서 말씀을 듣고자 했습니다. 요한이 자기 속에서 일어나는 의심을 해결하지 못하면 그 의심은 그를 따르는 제자들에게 치명적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의심은 말씀을 통해서 해결 받아야 합니다. 우리도 고난 가운데 있을 때 자기의 가는 길에 대해서 회의가 생길 수 있습니다. 이때 말씀을 부지런히 읽고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무엇보다 세례 요한이 자기의 제자들의 도움으로 예수님께 나아가 질문하고 해결을 받는 과정을 보면 그는 매우 정직하고 겸손한 사람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고난 가운데 있는 형제가 신앙적인 회의에 빠질 때 변함없는 사랑과 지지를 보내야합니다. 그리고 함께 고민하면서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태도가 중요합니다. 그렇게 될 때 공동체는 이런 회의를 통해서 더욱 성숙해 지고 분명한 믿음을 갖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에게 나아와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묻는 세례 요한을 어떻게 도와 주셨습니까? 21,22절을 보십시오. “마침 그 시에 예수께서 질병과 고통과 및 악귀 들린 자를 많이 고치시며 또 많은 소경을 보게 하신지라.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가서 보고 들은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예수님은 자신이 하는 일을 바로 보는 눈을 갖도록 도와주셨습니다. 지금 일어나고 있는 현상을 어떻게 해석하느냐가 중요합니다. 세례 요한은 종말론적인 메시야 관을 가지고 현상을 해석했습니다. 그렇게 보니 예수님은 아직 메시야가 아닌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사야서에 나타난 예언을 기초로 해서 이 사건을 해석해 주셨습니다. 이사야 35:5,6절은 이렇게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 때에 소경의 눈이 밝을 것이며 귀머거리의 귀가 열릴 것이며 그 때에 저는 자는 사슴같이 뛸 것이며 벙어리의 혀는 노래하리니 이는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 여기서 이 때는 메시야의 때를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성경에 약속된 바로 그 메시야이십니다. 예수님은 경고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23).” 예수님은 자신으로 인하여 실족하는 자가 없기를 바라셨습니다. 예수님을 의심하거나 부정하는 자는 구원의 복을 받지 못 합니다. 예수님으로 인하여 실족하는 자들이 있다는 것은 불행한 일입니다. 우리는 깊은 회의가 들어오면 자기 속으로 침잠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이때 우리는 예수님께 나아가 그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런 문제를 솔직하게 내 놓고 형제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더 나아가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마11:12)”는 말씀을 붙잡고 보다 적극적으로 믿음을 갖고자 투쟁해야 합니다. 불신은 우리를 무기력하게 합니다. 그러나 믿음은 우리에게 도전 정신을 줍니다. 천국은 침노하는 자들의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목자 생활을 하다가 어느 때 신앙의 회의에 빠집니까? 믿음으로 살면서 많은 희생을 했는데 눈에 보이는 열매가 없을 때 우리는 헛수고를 한 것 같습니다. 또 목자님의 방향에 순종했는데 기대했던 것보다 좋지 않은 결과가 나올 때 회의에 빠집니다. 인간 갈등이나 견해 차이로 인해서 회의가 생기기도 합니다. 사단은 아담과 하와에게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창3:1b)”라는 질문을 통해서 의심을 심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사단이 심어주는 의심을 붙잡고 대화를 계속했을 때 범죄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말씀을 붙잡고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셨습니다. 특히 사단은 예수님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이라는 정체성에 대한 질문을 세 번씩이나 반복하면서 그를 넘어뜨리려고 했습니다. 사탄은 우리의 소명의식을 더럽힐 뿐만 아니라 우리의 정체성을 공격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이를 극복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연약함을 체휼하셨기 때문에 시험당하는 자들을 때를 따라 도우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4:16).”

  요한의 제자들이 떠난 후에 예수님께서는 요한에 대하여 무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는 세상과 타협하는 사람도, 사치하는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선지자 중의 선지자로서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요한보다 큰 이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세례 요한을 통해 세례를 받은 사람들은 하나님을 의롭다고 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합니다. 그러나 바리새인과 율법사들은 그 세례를 받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하나님의 뜻을 저버렸습니다. 예수님은 그 시대 사람들의 불신을 어떻게 지적하셨습니까? 
 
  이 세대의 사람들은 비유컨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서로 불러 가로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애곡을 하여도 너희가 울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았습니다. 세례 요한이 와서 떡도 먹지 아니하며 포도주도 마시지 아니하자 그들의 말이 귀신이 들렸다 하더니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그들의 말이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였습니다. 이는 그 시대의 불신앙과 무관심을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 시대는 좀 더 안락하고 풍요로운 삶을 위해 부에 대한 관심이 가장 크게 쏠리고 있습니다. 또한 따로 나 홀로 노는 문화, 계획 즉시 실행하는 문화, 서투르지만 자기 것을 만들어가는 문화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가운데 변화를 예측할 수 없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교회가 세속화되어 신자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술과 담배를 거리낌 없이 즐기고 신자와 불신자의 구별이 없어졌습니다. 신자의 영성이 천박해지는 모습을 보면서 세상 사람들은 복음에 대한 관심이 확연히 줄어들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회개하고 복음 진리에 합당한 삶을 살아서 복음의 가치를 드러낼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불신의 시대에 “지혜는 자기의 모든 자녀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35).”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지혜는 잠언 8장에 예표된 하나님의 지혜로서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자기의 모든 자녀들’은 신약 교회의 진실한 신자들을 가리킵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올바른 지식과 믿음을 가질 것입니다. 예수님은 불신이 팽배한 상황에 관계없이 하나님 앞에서 그 뜻을 행하셨습니다. 그리고 믿음을 가지셨습니다. 자신의 가는 길에 대해서 후대에 옳다 함을 인정받을 것을 보셨습니다. 이를 볼 때 우리가 역사의식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을 섬겨야 함을 배우게 됩니다. 우리 모두 끝까지 믿음으로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II. 향유를 부은 여인(36-50)

  시몬이라는 한 바리새인이 예수님을 자기 집에 초대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인의 관습대로 옆으로 기대어 앉으셔서 식사를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때 그 동네에 죄인인 한 여자가 예수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 앉으셨음을 알고 향유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왔습니다. 우리가 정확히 어떤 죄인인지 알 수 없지만 어떤 사람은 이 여인을 길거리의 여자라고 합니다. 이 여자는 그 동네 사람이면 누구나 다 아는 죄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여자가 향유 담은 옥합을 가지고 예수님의 뒤로 와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셨습니다. 이는 찔끔 찔끔 흘리는 눈물이 아니라 북받쳐 오르는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이었습니다. 이는 성령의 감동을 받고 흘리는 회개의 눈물입니다. 이 여자가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렸던지 예수님의 발을 적시고도 남았습니다. 여인은 죄로 인한 상처가 쌓여 있었습니다. 그런데 자신을 깊이 영접해 주시고 용서해 주시는 예수님 앞에 섰을 때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이 여자는 예수님의 사죄와 사랑을 믿고 나왔습니다. 새 삶을 살겠다는 결단을 하고 예수님께 나아왔습니다. 그래서 자기의 긴 머리털을 풀어서 예수님의 발수건으로 사용했습니다. 여자에게 있어서 머리털은 왕관과 같습니다. 그런데 여인은 자기의 긴 머리결로 예수님의 먼지 묻고 냄새나는 발을 씻었습니다. 그리고 그 발에 입 맞추고 향유를 부었습니다. 입 맞추다는 미완료 시제로 계속해서 입을 맞추었다는 것입니다. 즐거운 마음으로 식사하기 위해서 옆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보기에도 민망했을 것입니다. 보통 사람 같으면 '너의 진심을 잘 알았다. 받은 것으로 칠테니 이제 그만해라.'하며 여인을 만류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여인의 행동 속에 담긴 진심과 회개, 감사, 그리고 사랑을 귀하게 여겨주시고 이 모든 것을 그대로 다 받아주셨습니다. 이 여인은 다른 사람들이 오해할 만큼 예수님을 사랑했습니다. 또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을 아끼지 않고 사랑을 위해 낭비해 버렸습니다. 여인은 이렇게 함으로 예수님께 최고의 존경을 표시했습니다. 여인은 예수님께 받은 바 은혜가 너무나 컸기 때문에 이렇게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여인의 삶은 변화되었습니다. 전에 남자들을 유혹하기 위해 윙크를 하던 눈에서는 감격과 감사의 눈물이 흘렀고, 전에 자기를 뽐내기 위해 멋을 부리던 머리털은 예수님의 발을 씻는 도구가 되었습니다. 또 전에는 자기 몸에 발라 냄새를 피우며 뭇 남자들을 타락시켰던 향유는 예수님의 발에 부어졌습니다. 여인은 자신이 가진 가장 귀하고 값진 모든 것을 예수님께 드렸습니다. 이 모든 것은 예수님의 사랑에 깊이 감동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 대한 여자의 헌신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바리새인 시몬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선지자라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누구며 어떠한 자 곧 죄인인 줄을 알았으리라고 하였습니다. 이 사람은 진짜 바리새인이었습니다. 그는 여인이 부정하기 때문에 예수님이 자신을 만지지 못하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를 보고 있는 그는 속에서 판단과 정죄하는 생각들이 들끓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시몬의 마음을 아시고 말씀하셨습니다. “시몬아 내가 네게 이를 말이 있다 하시니 저가 가로되 선생님 말씀하소서 가라사대 빚 주는 사람에게 빚진 자가 둘이 있어 하나는 오백 데나리온을 졌고 하나는 오십 데나리온을 졌는데 갚을 것이 없으므로 둘 다 탕감하여 주었으니 둘 중에 누가 저를 더 사랑하겠느냐?” 시몬은 대답했습니다. “제 생각에는 많이 탕감함을 받은 자니이다.” 그러자 예수님은 “네 판단이 옳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여자를 돌아보시며 시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여자를 보느냐 내가 네 집에 들어오매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아니하였으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그 머리털로 씻었으며 너는 내게 입맞추지 아니하였으되 저는 내가 들어올 때로부터 내 발에 입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으며 너는 내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아니하였으되 저는 향유를 내 발에 부었느니라(45,46).” 당시에 손님이 들어올 때 가장 싼 감람유를 뿌려서 호의를 표시했는데 그는 그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시몬은 오십 데나리온 탕감받은 사람이고 여인은 오백 데나리온 탕감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들의 행동은 전혀 달랐습니다.

  47절을 보십시오.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저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저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예수님은 이 여자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다고 선언하셨습니다. 그것은 저의 사랑함이 많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사랑은 믿음의 표현입니다. 믿음을 떠난 사랑이 용서의 근거일 수 없습니다. 사랑은 믿음의 대명사인 것입니다. 또한 죄사함은 예수님의 사랑을 확인하는 과정입니다. 우리의 죄는 가장 작은 것이라 할찌라도 깨끗이 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보배피를 희생하여 사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날마다 죄를 고백하는 것은 주님과 사랑의 교제를 갖는 것입니다. 우리는 죄에 대한 깊은 자각을 통해서 거룩함을 사모하게 됩니다. 우리가 인간적인 눈으로 보면 여인은 많은 죄를 지었기 때문에 정말 죄 사함 받은 양도 많다는 생각이 듭니다. 반대로 시몬은 도덕적인 죄를 별로 짓지 않는 바리새인이기 때문에 죄의 양도 적다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의 도덕기준으로 봐서는 그렇게 생각되지만 죄의 기준은 거룩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계명의 말씀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여인이나 바리새인이나 똑같은 죄인입니다. 도리어 자신이 죄인인지도 모르고 늘 교만하고 위선적이고 판단하기 잘하는 시몬이야말로 더 큰 죄인입니다. 시몬은 스스로 의인이라고 생각하는 죄인일 뿐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롬3:10)”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3:23)”

  그러면 47절 말씀의 참 뜻은 무엇입니까? 이는 죄인으로서의 자아 인식이 적은 사람은 적게 사랑하고 죄인으로서의 자아 인식이 많은 사람은 많이 사랑한다는 뜻입니다. 곧 죄인으로서의 자아 인식의 깊이만큼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여인이 시몬보다 주님을 더 뜨겁게 사랑한 것은 죄인으로서의 자아 인식을 깊이 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죄인으로서의 자아를 깊이 발견할 때 죄 사함의 은혜가 넘치게 되고 주님을 감격적으로 사랑하게 됩니다.

  한 형제는 소감발표 때마다 다른 형제의 드라마틱한 소감에 자기 소감이 늘 밋밋하고 초라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너무 일찍부터 UBF에 나온 것을 후회하며 자기도 세상에서 마음껏 굴러다니다가 왔으면 죄도 깊이 깨닫고 소감도 감동적일텐데 라고 생각을 하며 늘 소감 컴플렉스에 시달렸습니다. 그러나 이는 뭘 모르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중요한 것은 자기에게 죄가 없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죄를 깨닫지 못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죄 인식을 못하는 영적인 무지가 문제입니다.
 
  본문의 시몬은 자신이 빚졌다고, 죄인이라고 느낄 수 없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사랑할 수도 없었고 주님께 아무 것도 드릴 수 없었습니다. 그의 섬김은 자기가 먹던 식탁에 숟가락 하나 더 얹어 놓는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여인은 예수님으로부터 너무도 큰 빚을, 자신이 너무도 큰 죄 사함을 받았다고 생각했기에 주님을 그토록 뜨겁게 사랑할 수 있었고 자신의 가장 귀한 것을 드릴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 왜 여인은 자신의 죄인 됨을 깊이 깨달았으나 바리새인은 깨달을 수 없었을까요? 이는 바리새인은 사람 앞에서 생활을 했기 때문이요, 여인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사람 앞에서 살고 자기 잘난 맛에 살면 결코 죄인된 자아를 발견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진실되게 돌아볼 때 죄인된 자아를 깊이 발견하고 여인과 같이 감격적인 신앙 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죄는 사람들 앞에서 비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또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 앞에서 자신을 절대적으로 비추어 보는 것입니다. 자신의 죄를 잘 깨달을 수 없을 때 우리는 십계명과 로마서1,2장 그리고 예수님의 산상 수훈 말씀 앞에서 자기를 비추어 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예를 들어 사도 요한은 형제를 미워하는 것도 살인죄라고 했습니다(요일3:15). 예수님은 “마음으로 음욕을 품어도 이미 간음한 자(마5:28)” 라고 했습니다.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치 않는 것은 죄(약4:17)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진실되게 신앙생활을 함으로 죄인으로서의 자아를 깊이 발견 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48절을 보십시오. “이에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죄 사함을 얻었느니라 하시니” 주님은 이제 그 여인에게 인격적으로 죄 용서를 확신시켜 주셨습니다. 그러자 함께 앉은 자들이 속으로 말했습니다. “이가 누구이기에 죄도 사하는가” 그들은 예수님이 이 땅에 죄를 사하러 오신 하나님이심을 몰랐습니다. 예수님은 다시 한번 여인에게 구원을 공포하심으로 마음에 구원의 확신을 주시고 평안을 주셨습니다. 50절을 다함께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 죄 사함의 은혜가 클수록 주님도 뜨겁게 사랑한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우리가 날마다 말씀 앞에서 죄인으로서의 자아를 깊이 발견하고 죄 사함의 은혜 가운데 살기를 기도합니다. 또 그 감격으로 뜨겁게 양들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역사를 섬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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