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2004년 누가복음 제 12 강(눅6:20-49)/듣고 행하는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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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누가복음 제 12 강
말씀 / 누가복음 6:20-49
요절 / 누가복음 6:47,48
듣고 행하는 자
“내게 나아와 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마다 누구와 같은 것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집을 짓되 깊이 파고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사람과 같으니 큰 물이 나서 탁류가 그 집에 부딪히되 잘 지은 연고로 능히 요동케 못하였거니와”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부르시고 나서 사명인으로서 제자들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 평지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은 산상 수훈으로서 무리들에게 이 말씀을 하셨는데 누가복음은 평지에서 제자들에게 하셨습니다. 학자들은 비슷한 말씀을 평지와 산에서 반복해서 하신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 시간 제자의 정체성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 제자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 배우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세상과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하는지 가르쳐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복 있는 자 (20-26)
예수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사람들의 마음에 하나님 나라를 심기 위해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세리 마태는 연봉 일억원 이상 되는 직업을 버리고 예수님을 좇았습니다. 제자들은 안식일에 길을 가다가 밀밭에 들어가서 밀이삭을 훌터 먹어야 했습니다. 물질적으로 볼 때 그들의 장래는 불확실했습니다. 그들은 선택을 잘못한 것일까요? 아닙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가장 복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세상의 보화를 팔아 하나님 나라를 샀기 때문입니다(마13:45,46).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저희 것임이요(20).” 여기서 가난한 자는 헬라어로 ‘푸토코이(ptwcoi)v’로서 찢어지게 가난한 자, 구걸할 수밖에 없는 절대 빈곤의 상태를 말합니다. 가난한 자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절히 구하게 됩니다. 물질적 가난이 심령의 가난으로 발전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부자라 할지라도 세리 마태 같은 사람은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부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인해서 도리어 불행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통해서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해석했습니다. 예수님은 역설적인 진리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역설은 인간의 논리를 뛰어넘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부를 얻게 될 때 하나님의 복을 받은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가난한 자가 복이 있는데 하나님 나라가 저희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복은 마카리오이(Makavrioi)로서 최고의 축복을 말합니다. 그들이 받게 될 하나님 나라는 인간에게 주어질 수 있는 가장 큰 복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고 했습니다(롬14:17). 하나님 나라는 영원합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오심으로 들어가게 될 하나님 나라에는 여러분들을 위한 대 저택이 있습니다. 생명나무 실과가 있고 기쁨이 충만할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에서도 잘 먹고 잘 살면서 하나님 나라에 가서도 최고의 복을 누리고 싶습니다. 그런데 누가복음 16장은 청지기 비유 다음에 가난한 나사로와 부자 아브라함의 비유를 통해서 이 세상에서 위로를 받던지 하나님 나라에서 위로를 받던지 둘 중의 하나에 속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제자들 중에는 물질적으로 가난한 사람도 있고 부요한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부를 위임받은 청지기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뜻을 따라서 써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공동체 의식을 갖게 될 때 하나님께서 주신 물질적인 복을 올바르게 사용할 수 있습니다. 자신을 통해서 하나님의 복이 흘러 나가는 통로가 될 수 있습니다. 죤 웨슬레는 책을 많이 써서 수입이 좋았지만 자신은 정해놓은 최소한의 생활비로 생활을 하고 나머지로 복음 사업을 위해서 썼습니다. 윌리암 캐리도 그 좋은 예입니다. 그는 출판사를 운영하여 남은 물질로 선교 사업에 썼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돈을 쓰기 때문에 가난해 졌다고 해서 슬퍼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여러분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물질주의에 대해서 경고하셨습니다.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없느니라(눅16:13).” 물질주의적인 태도는 하나님 나라에 가장 큰 걸림돌이 됩니다. 제자들은 이 걸림돌을 마음으로부터 깨끗이 정리했기 때문에 행복한 사람들이었습니다.
21절을 보십시오. “이제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배부름을 얻을 것임이요.” 예수님은 가장 주린 분이셨습니다. 그는 아침 식사를 해결하기 위해서 길가에 있는 무화과나무에서 열매를 찾으셨으나 얻지 못했습니다. 그는 외로운 사마리아 여인을 돕는 일에 열중하다 보니 극히 주리셨습니다. 제자들이 그에게 먹을 것을 가져 왔지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요4:34).” 예수님은 사명을 위해서 기꺼이 배고픈 고통을 감수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섬기기 위해서 주린 자는 복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굶주린 자는 복이 있습니다(마5:7, 암8:11,12). 여기서 주린 자는 과거에 주린 자가 아니라 이제 주린 자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과거에 주렸습니다. 그런데 지금 주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또 주린 자는 능동태로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자발적으로 주리는 자, 또 영적인 투쟁을 통해서 자신의 굶주린 상태를 적극 발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주린 자는 꼴을 얻게 될 것입니다.
“이제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22b)." 우는 자는 자기와 양들의 죄로 인하여 우는 자입니다. 양을 돕다가 상처를 받아서 눈물을 흘리는 목자는 복이 있습니다. 양을 돕고자 하지만 그들의 불신으로 인해서 한계를 느끼고 우는 목자는 복이 있습니다. 그는 웃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예루살렘의 불신을 보면서 눈물을 흘리셨습니다(눅19:40-44). 사도 바울은 눈물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일깨어 내가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행20:31).” 믿지 않는 형제나 친척이나 친구가 지옥에 가게 될 것을 생각하면 눈물이 납니다. 믿고 싶으나 믿을 수 없는 사람들의 영적인 형편을 볼 때 눈물이 납니다.
22-23절을 보십시오. “인자를 인하여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며 멀리하고 욕하고 너희 이름을 악하다 하여 버릴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도다 그 날에 기뻐하고 뛰놀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 저희 조상들이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 우리는 종교의 자유가 있는 나라에 살기 때문에 크리스챤으로 살아도 핍박이 없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진실되게 하나님을 섬기고자 할 때 핍박이 시작됩니다. 타협을 하면 핍박이 없습니다. 이러한 핍박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받을 뿐 아니라 소위 ‘믿는 사람’들에게도 받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믿는 백성이라는 ‘이스라엘’ 나라에서 사셨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예수님은 종교 지도자들에게 핍박을 받았습니다. 마침내 그는 수없이 많은 모욕을 당하시면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습니다. 이와 같은 일이 예수님의 제자들에게도 일어났습니다.
복음을 전하다가 미움을 받고 욕을 먹고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습니다. 그들에게 하늘에서 상이 크기 때문입니다. 그 날에 기뻐하고 뛰놀라고 하십니다. 기독교는 핍박을 받으면서 강해지고 건강해졌습니다. 문제가 없으면 좋은 것으로 생각하는데 사실은 핍박을 받고 공격을 받을 때 기독교는 건강해졌습니다. 세상의 악한 사람들은 정당한 이유가 없이 하나님과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미워하고 대적하며 그의 진실한 종들과 제자들을 미워하고 배척하고 비난하고 핍박합니다. 그러나 제자들이 하나님 때문에, 예수님 때문에, 성경의 바른 진리 때문에 받는 어려움은 그들에게 복입니다. 또한 제자들이 당하는 고난과 핍박은 그들이 하나님의 참된 종들이라는 증거가 됩니다. 사람들에게 미움과 배척과 비난과 핍박을 당하는 것은 힘들고 고통스런 일이지만, 그것이 주님 가신 길이며 주의 진실한 선지자들과 종들이 간 길이기 때문에 참된 제자들은 그런 고난을 오히려 기뻐해야 합니다.
24-26절은 어떤 자에게 화가 있는 지 말씀하고 있습니다. 24-26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화 있을진저 너희 부요한 자여 너희는 너희의 위로를 이미 받았도다 화 있을진저 너희 이제 배부른 자여 너희는 주리리로다 화 있을진저 너희 이제 웃는 자여 너희가 애통하며 울리로다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화가 있도다 저희 조상들이 거짓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 “화 있을진저” 라는 말씀은 “아아, 슬프도다!”라는 뜻입니다. 부요한 자, 이제 배부른 자, 이제 웃는 자, 모든 사람에게 칭찬을 받는 자는 화가 있습니다. 부요한 자는 이미 위로를 받았기 때문에 더 이상 위로가 없습니다. 배부른 자는 주리게 되고, 웃는 자는 애통하며 울게 됩니다. 모든 사람에게 칭찬받는 자는 거짓 선지자가 되기 쉽습니다. 사람의 귀를 즐겁게 하려고 하다가 바른 말을 못하게 됩니다. 진리의 사람은 모든 사람에게 칭찬을 듣지 않습니다. 물론 진리의 사람은 진실한 성도들에게 칭찬을 들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칭찬하는 제자는 진리의 사람이라는 표를 잃어버린 자입니다.
물질적으로 부요하고 육신적으로 배부르고 웃는 자는 영적으로도 마음이 높고 스스로 만족하여 하나님을 두려워하거나 자신의 죄와 부족을 깨닫지 못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인간의 연약성은 대체로 그러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께서 주시는 경고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고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계3:17,18).” 우리는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라고 말하기 보다는 하나님 나라가 이 나라에 임하도록 지상의 모든 자원을 적극적으로 투자해야하겠습니다.
둘째, 너희 원수를 사랑하라(27-38)
하나님께서는 율법 전체를 통해서 마음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사람들의 일반적 생각과 마음가짐은 원수를 대적하고 자기를 미워하는 자를 미워하고 자기를 저주하는 자를 저주하고 자기를 모욕하는 자를 모욕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구약의 율법 중 레위기 19:18절에서 “원수를 갚지 말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이웃 사랑에 대한 지평을 더 넓히셨습니다. 27,28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너희 듣는 자에게 내가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너희 원수’란 인격적으로 예수님을 알지 못해서 하나님의 원수처럼 행동하는 사람입니다. 예를 들면 사도 바울은 회심하기 전에 유대교 공동체에서 가장 ‘의로운’사람 중 하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지독한 원수가 되어 예수 믿는 자들을 핍박했습니다. 그는 스데반을 죽일 때에 하나님의 원수로 자처했습니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라” 실상 모든 불신자들은 하나님의 원수입니다. 동시에 그들은 하나님의 귀한 자녀가 될 후보생들이기도 합니다. 사실 복음을 지독히 배척하던 사람 중에 위대한 하나님의 종이 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창세기 26장에 기록된 이삭의 행위는 하나님의 백성의 한 좋은 예입니다. 이삭은 가나안 땅에 흉년이 들어 블레셋 사람들이 사는 그랄 땅에 내려가서 얼마 동안 살았는데, 블레셋 사람들이 그를 시기하여 그의 모든 우물들을 흙으로 메웠습니다. 그러나 이삭은 그들과 다투지 않고 그들을 떠나 다른 곳으로 옮겨 다시 우물들을 팠고 이렇게 세 차례나 옮기며 우물을 팠습니다. 여기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삭의 온유함과 양보와 오래 참음의 모습이 나타나 있습니다. 그가 우물 파기를 포기하지 않는 한 그는 선으로 악을 이기는 영적 투쟁을 계속할 수 있습니다. 영적 투쟁이 끝나는 시점은 바로 우물 파기를 그만두는 때입니다. 우리는 악한 자를 사랑으로 이겨야 합니다. 바울 사도는 이 원리를 로마서 12장에서 잘 교훈하였습니다. “아무에게도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17-21절).
그러면 우리가 원수를 사랑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로마서 5:6-8,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로마서 5:10,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 되었을 때, 우리가 그를 미워하고 때로는 저주하고 모욕하고 있었을 때, 우리를 사랑하셨고 우리를 위해 이미 독생자를 십자가에 희생시키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복음이며 죄인을 위한 구원의 소식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우리도 마땅히 원수를 사랑해야 합니다. 더욱이,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이며 곧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우리는 그 명령을 거절할 자격이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을 통해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의 명령 앞에 자기를 부인하고 순종하는 것이 있을 뿐입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다른 사람에 대해 가져야 할 황금율이 무엇입니까? 31절을 보십시오.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 말씀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또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다 적용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만복의 근원 되신 분으로 인정한다면, 우리는 그를 최선을 다해 섬겨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행복을 구하여 분주하게 일하기 때문에, 오히려 하나님을 바로 섬기지 못하고 성경을 공부하고 기도할 마음과 시간이 없지 않습니까? 그러나 주님께서는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6:33). 우리가 만복의 근원 되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을 주시기를 소원하고 기대한다면, 우리는 먼저 그를 정성껏 섬기며 그의 명령에 순종해야 합니다. 대인관계에서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남에게서 이해와 칭찬과 사랑과 선대를 받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먼저 남을 이해하고 남의 장점을 인정하고 남을 사랑하고 남을 선대해야 할 것입니다.
32-37절에서는 죄인들과 하나님의 자녀들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 대조를 시키고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세상 사람들과 다를 바가 없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의 자격이 없습니다. 도대체 우리의 구원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구원이 정말 죄로부터의 구원이라면, 구원이 정말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이라면, 우리는 세상 사람들과 다른 무엇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기를 원하십니다(마 5:13-16). 우리는 우리의 변화된 삶을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의 참됨과 가치 있음을 증거해야 합니다.
38절을 보십시오.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 제자는 주는 자입니다. 내가 다른 사람의 것에 충성하면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풍성히 주십니다. 내가 먼저 사랑하고 내가 먼저 용서하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먼저 용서해 주고 먼저 남을 구제하고 후대해야 합니다. 남에게 무엇을 주는 자가 이 세상에서 풍성한 보상을 받게 될 것입니다.
셋째, 듣고 행하라(39-49)
참된 제자는 무엇으로 알 수 있습니까? 43,44절을 보십시오. “못된 열매 맺는 좋은 나무가 없고 또 좋은 열매 맺는 못된 나무가 없느니라 나무는 각각 그 열매로 아나니 가시나무에서 무화과를, 또는 찔레에서 포도를 따지 못하느니라.” 열매로 참된 제자인지 알게 됩니다. 제자는 좋은 열매를 맺기 위해서 먼저 좋은 나무가 되어야 합니다. 참 포도나무 되신 예수님께 접붙인 바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로부터 영양분을 공급받아야 합니다. 나무와 열매의 비유는 사람의 인품과 행위에 대해 말씀합니다. 좋은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고 나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듯이, 좋은 사람은 좋은 말과 행위를 하고 나쁜 사람은 나쁜 말과 행위를 합니다. “선한 사람은 마음의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내나니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니라(45).”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하고 말을 통해서 열매를 맺습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잘 가꾸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말로는 주여 주여 하면서도 주님의 말씀을 행치 않는 자를 책망하셨습니다. 46절을 보십시오. “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나의 말하는 것을 행치 아니하느냐?” 왜 사람이 말씀을 알면서도 행하지 않을까요? 사람이 순종하지 않는 것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 생활을 잘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을 때 주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가 잘 맺어지지 않는다는 것은 믿음이 없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은 말씀대로 살면 손해가 날 것 같아서 순종하지 못합니다. 어떤 사람은 힘이 없어서 순종하지 못하겠다고 말합니다. 사실 연약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있는 성숙한 목자들이 연약한 형제들을 받아야 합니다. 획일성이 위험한 것은 연약한 자들이 상처를 입고 믿음에서 떠나기 쉽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것이 참된 믿음입니다. 우리가 말씀에 항상 순종하지 못함으로 좌절을 경험합니다. 이것이 오래 되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 수 없다고 자포자기 하게 됩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우리 마음을 다스려주시도록 기도하고 성령의 충만함을 지속할 때 순종에서 자라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은 하루 아침에 되는 것이 아니라 훈련되어져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고난을 통해서 순종을 배우셨다고 했습니다(히5:8). 순종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얼마나 참된가를 체험하게 되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축복을 체험하게 됩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은 환난의 때에 견고히 서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사람은 집을 짓되 깊이 파고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사람과 같습니다. 홍수가 나서 탁류가 그 집에 부딪쳐도 요동치 않습니다. 그러나 듣고 행치 않는 자는 흙 위에 집을 지은 사람과 같아서 탁류가 부딪치면 집이 무너져 파괴됨이 심하게 됩니다(47-49). 홍수는 이 땅에서의 시련이나 마지막 날에 임할 심판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켜 행하는 것이 산 믿음입니다. 참된 믿음은 반드시 선한 행위를 동반합니다. 선한 행위란 진실하고 의로운 행위, 곧 회개에 합당한 행위를 가리킵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들이 되어야겠습니다. 이 세상에서 세상 사람과 구별된 신자의 비범한 삶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말씀 / 누가복음 6:20-49
요절 / 누가복음 6:47,48
듣고 행하는 자
“내게 나아와 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마다 누구와 같은 것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집을 짓되 깊이 파고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사람과 같으니 큰 물이 나서 탁류가 그 집에 부딪히되 잘 지은 연고로 능히 요동케 못하였거니와”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부르시고 나서 사명인으로서 제자들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 평지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은 산상 수훈으로서 무리들에게 이 말씀을 하셨는데 누가복음은 평지에서 제자들에게 하셨습니다. 학자들은 비슷한 말씀을 평지와 산에서 반복해서 하신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 시간 제자의 정체성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 제자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 배우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세상과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하는지 가르쳐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복 있는 자 (20-26)
예수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사람들의 마음에 하나님 나라를 심기 위해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세리 마태는 연봉 일억원 이상 되는 직업을 버리고 예수님을 좇았습니다. 제자들은 안식일에 길을 가다가 밀밭에 들어가서 밀이삭을 훌터 먹어야 했습니다. 물질적으로 볼 때 그들의 장래는 불확실했습니다. 그들은 선택을 잘못한 것일까요? 아닙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가장 복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세상의 보화를 팔아 하나님 나라를 샀기 때문입니다(마13:45,46).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저희 것임이요(20).” 여기서 가난한 자는 헬라어로 ‘푸토코이(ptwcoi)v’로서 찢어지게 가난한 자, 구걸할 수밖에 없는 절대 빈곤의 상태를 말합니다. 가난한 자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절히 구하게 됩니다. 물질적 가난이 심령의 가난으로 발전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부자라 할지라도 세리 마태 같은 사람은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부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인해서 도리어 불행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통해서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해석했습니다. 예수님은 역설적인 진리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역설은 인간의 논리를 뛰어넘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부를 얻게 될 때 하나님의 복을 받은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가난한 자가 복이 있는데 하나님 나라가 저희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복은 마카리오이(Makavrioi)로서 최고의 축복을 말합니다. 그들이 받게 될 하나님 나라는 인간에게 주어질 수 있는 가장 큰 복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고 했습니다(롬14:17). 하나님 나라는 영원합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오심으로 들어가게 될 하나님 나라에는 여러분들을 위한 대 저택이 있습니다. 생명나무 실과가 있고 기쁨이 충만할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에서도 잘 먹고 잘 살면서 하나님 나라에 가서도 최고의 복을 누리고 싶습니다. 그런데 누가복음 16장은 청지기 비유 다음에 가난한 나사로와 부자 아브라함의 비유를 통해서 이 세상에서 위로를 받던지 하나님 나라에서 위로를 받던지 둘 중의 하나에 속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제자들 중에는 물질적으로 가난한 사람도 있고 부요한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부를 위임받은 청지기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뜻을 따라서 써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공동체 의식을 갖게 될 때 하나님께서 주신 물질적인 복을 올바르게 사용할 수 있습니다. 자신을 통해서 하나님의 복이 흘러 나가는 통로가 될 수 있습니다. 죤 웨슬레는 책을 많이 써서 수입이 좋았지만 자신은 정해놓은 최소한의 생활비로 생활을 하고 나머지로 복음 사업을 위해서 썼습니다. 윌리암 캐리도 그 좋은 예입니다. 그는 출판사를 운영하여 남은 물질로 선교 사업에 썼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돈을 쓰기 때문에 가난해 졌다고 해서 슬퍼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여러분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물질주의에 대해서 경고하셨습니다.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없느니라(눅16:13).” 물질주의적인 태도는 하나님 나라에 가장 큰 걸림돌이 됩니다. 제자들은 이 걸림돌을 마음으로부터 깨끗이 정리했기 때문에 행복한 사람들이었습니다.
21절을 보십시오. “이제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배부름을 얻을 것임이요.” 예수님은 가장 주린 분이셨습니다. 그는 아침 식사를 해결하기 위해서 길가에 있는 무화과나무에서 열매를 찾으셨으나 얻지 못했습니다. 그는 외로운 사마리아 여인을 돕는 일에 열중하다 보니 극히 주리셨습니다. 제자들이 그에게 먹을 것을 가져 왔지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요4:34).” 예수님은 사명을 위해서 기꺼이 배고픈 고통을 감수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섬기기 위해서 주린 자는 복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굶주린 자는 복이 있습니다(마5:7, 암8:11,12). 여기서 주린 자는 과거에 주린 자가 아니라 이제 주린 자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과거에 주렸습니다. 그런데 지금 주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또 주린 자는 능동태로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자발적으로 주리는 자, 또 영적인 투쟁을 통해서 자신의 굶주린 상태를 적극 발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주린 자는 꼴을 얻게 될 것입니다.
“이제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22b)." 우는 자는 자기와 양들의 죄로 인하여 우는 자입니다. 양을 돕다가 상처를 받아서 눈물을 흘리는 목자는 복이 있습니다. 양을 돕고자 하지만 그들의 불신으로 인해서 한계를 느끼고 우는 목자는 복이 있습니다. 그는 웃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예루살렘의 불신을 보면서 눈물을 흘리셨습니다(눅19:40-44). 사도 바울은 눈물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일깨어 내가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행20:31).” 믿지 않는 형제나 친척이나 친구가 지옥에 가게 될 것을 생각하면 눈물이 납니다. 믿고 싶으나 믿을 수 없는 사람들의 영적인 형편을 볼 때 눈물이 납니다.
22-23절을 보십시오. “인자를 인하여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며 멀리하고 욕하고 너희 이름을 악하다 하여 버릴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도다 그 날에 기뻐하고 뛰놀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 저희 조상들이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 우리는 종교의 자유가 있는 나라에 살기 때문에 크리스챤으로 살아도 핍박이 없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진실되게 하나님을 섬기고자 할 때 핍박이 시작됩니다. 타협을 하면 핍박이 없습니다. 이러한 핍박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받을 뿐 아니라 소위 ‘믿는 사람’들에게도 받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믿는 백성이라는 ‘이스라엘’ 나라에서 사셨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예수님은 종교 지도자들에게 핍박을 받았습니다. 마침내 그는 수없이 많은 모욕을 당하시면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습니다. 이와 같은 일이 예수님의 제자들에게도 일어났습니다.
복음을 전하다가 미움을 받고 욕을 먹고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습니다. 그들에게 하늘에서 상이 크기 때문입니다. 그 날에 기뻐하고 뛰놀라고 하십니다. 기독교는 핍박을 받으면서 강해지고 건강해졌습니다. 문제가 없으면 좋은 것으로 생각하는데 사실은 핍박을 받고 공격을 받을 때 기독교는 건강해졌습니다. 세상의 악한 사람들은 정당한 이유가 없이 하나님과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미워하고 대적하며 그의 진실한 종들과 제자들을 미워하고 배척하고 비난하고 핍박합니다. 그러나 제자들이 하나님 때문에, 예수님 때문에, 성경의 바른 진리 때문에 받는 어려움은 그들에게 복입니다. 또한 제자들이 당하는 고난과 핍박은 그들이 하나님의 참된 종들이라는 증거가 됩니다. 사람들에게 미움과 배척과 비난과 핍박을 당하는 것은 힘들고 고통스런 일이지만, 그것이 주님 가신 길이며 주의 진실한 선지자들과 종들이 간 길이기 때문에 참된 제자들은 그런 고난을 오히려 기뻐해야 합니다.
24-26절은 어떤 자에게 화가 있는 지 말씀하고 있습니다. 24-26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화 있을진저 너희 부요한 자여 너희는 너희의 위로를 이미 받았도다 화 있을진저 너희 이제 배부른 자여 너희는 주리리로다 화 있을진저 너희 이제 웃는 자여 너희가 애통하며 울리로다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화가 있도다 저희 조상들이 거짓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 “화 있을진저” 라는 말씀은 “아아, 슬프도다!”라는 뜻입니다. 부요한 자, 이제 배부른 자, 이제 웃는 자, 모든 사람에게 칭찬을 받는 자는 화가 있습니다. 부요한 자는 이미 위로를 받았기 때문에 더 이상 위로가 없습니다. 배부른 자는 주리게 되고, 웃는 자는 애통하며 울게 됩니다. 모든 사람에게 칭찬받는 자는 거짓 선지자가 되기 쉽습니다. 사람의 귀를 즐겁게 하려고 하다가 바른 말을 못하게 됩니다. 진리의 사람은 모든 사람에게 칭찬을 듣지 않습니다. 물론 진리의 사람은 진실한 성도들에게 칭찬을 들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칭찬하는 제자는 진리의 사람이라는 표를 잃어버린 자입니다.
물질적으로 부요하고 육신적으로 배부르고 웃는 자는 영적으로도 마음이 높고 스스로 만족하여 하나님을 두려워하거나 자신의 죄와 부족을 깨닫지 못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인간의 연약성은 대체로 그러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께서 주시는 경고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고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계3:17,18).” 우리는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라고 말하기 보다는 하나님 나라가 이 나라에 임하도록 지상의 모든 자원을 적극적으로 투자해야하겠습니다.
둘째, 너희 원수를 사랑하라(27-38)
하나님께서는 율법 전체를 통해서 마음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사람들의 일반적 생각과 마음가짐은 원수를 대적하고 자기를 미워하는 자를 미워하고 자기를 저주하는 자를 저주하고 자기를 모욕하는 자를 모욕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구약의 율법 중 레위기 19:18절에서 “원수를 갚지 말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이웃 사랑에 대한 지평을 더 넓히셨습니다. 27,28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너희 듣는 자에게 내가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너희 원수’란 인격적으로 예수님을 알지 못해서 하나님의 원수처럼 행동하는 사람입니다. 예를 들면 사도 바울은 회심하기 전에 유대교 공동체에서 가장 ‘의로운’사람 중 하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지독한 원수가 되어 예수 믿는 자들을 핍박했습니다. 그는 스데반을 죽일 때에 하나님의 원수로 자처했습니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라” 실상 모든 불신자들은 하나님의 원수입니다. 동시에 그들은 하나님의 귀한 자녀가 될 후보생들이기도 합니다. 사실 복음을 지독히 배척하던 사람 중에 위대한 하나님의 종이 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창세기 26장에 기록된 이삭의 행위는 하나님의 백성의 한 좋은 예입니다. 이삭은 가나안 땅에 흉년이 들어 블레셋 사람들이 사는 그랄 땅에 내려가서 얼마 동안 살았는데, 블레셋 사람들이 그를 시기하여 그의 모든 우물들을 흙으로 메웠습니다. 그러나 이삭은 그들과 다투지 않고 그들을 떠나 다른 곳으로 옮겨 다시 우물들을 팠고 이렇게 세 차례나 옮기며 우물을 팠습니다. 여기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삭의 온유함과 양보와 오래 참음의 모습이 나타나 있습니다. 그가 우물 파기를 포기하지 않는 한 그는 선으로 악을 이기는 영적 투쟁을 계속할 수 있습니다. 영적 투쟁이 끝나는 시점은 바로 우물 파기를 그만두는 때입니다. 우리는 악한 자를 사랑으로 이겨야 합니다. 바울 사도는 이 원리를 로마서 12장에서 잘 교훈하였습니다. “아무에게도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17-21절).
그러면 우리가 원수를 사랑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로마서 5:6-8,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로마서 5:10,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 되었을 때, 우리가 그를 미워하고 때로는 저주하고 모욕하고 있었을 때, 우리를 사랑하셨고 우리를 위해 이미 독생자를 십자가에 희생시키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복음이며 죄인을 위한 구원의 소식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우리도 마땅히 원수를 사랑해야 합니다. 더욱이,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이며 곧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우리는 그 명령을 거절할 자격이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을 통해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의 명령 앞에 자기를 부인하고 순종하는 것이 있을 뿐입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다른 사람에 대해 가져야 할 황금율이 무엇입니까? 31절을 보십시오.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 말씀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또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다 적용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만복의 근원 되신 분으로 인정한다면, 우리는 그를 최선을 다해 섬겨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행복을 구하여 분주하게 일하기 때문에, 오히려 하나님을 바로 섬기지 못하고 성경을 공부하고 기도할 마음과 시간이 없지 않습니까? 그러나 주님께서는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6:33). 우리가 만복의 근원 되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을 주시기를 소원하고 기대한다면, 우리는 먼저 그를 정성껏 섬기며 그의 명령에 순종해야 합니다. 대인관계에서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남에게서 이해와 칭찬과 사랑과 선대를 받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먼저 남을 이해하고 남의 장점을 인정하고 남을 사랑하고 남을 선대해야 할 것입니다.
32-37절에서는 죄인들과 하나님의 자녀들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 대조를 시키고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세상 사람들과 다를 바가 없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의 자격이 없습니다. 도대체 우리의 구원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구원이 정말 죄로부터의 구원이라면, 구원이 정말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이라면, 우리는 세상 사람들과 다른 무엇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기를 원하십니다(마 5:13-16). 우리는 우리의 변화된 삶을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의 참됨과 가치 있음을 증거해야 합니다.
38절을 보십시오.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 제자는 주는 자입니다. 내가 다른 사람의 것에 충성하면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풍성히 주십니다. 내가 먼저 사랑하고 내가 먼저 용서하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먼저 용서해 주고 먼저 남을 구제하고 후대해야 합니다. 남에게 무엇을 주는 자가 이 세상에서 풍성한 보상을 받게 될 것입니다.
셋째, 듣고 행하라(39-49)
참된 제자는 무엇으로 알 수 있습니까? 43,44절을 보십시오. “못된 열매 맺는 좋은 나무가 없고 또 좋은 열매 맺는 못된 나무가 없느니라 나무는 각각 그 열매로 아나니 가시나무에서 무화과를, 또는 찔레에서 포도를 따지 못하느니라.” 열매로 참된 제자인지 알게 됩니다. 제자는 좋은 열매를 맺기 위해서 먼저 좋은 나무가 되어야 합니다. 참 포도나무 되신 예수님께 접붙인 바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로부터 영양분을 공급받아야 합니다. 나무와 열매의 비유는 사람의 인품과 행위에 대해 말씀합니다. 좋은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고 나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듯이, 좋은 사람은 좋은 말과 행위를 하고 나쁜 사람은 나쁜 말과 행위를 합니다. “선한 사람은 마음의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내나니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니라(45).”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하고 말을 통해서 열매를 맺습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잘 가꾸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말로는 주여 주여 하면서도 주님의 말씀을 행치 않는 자를 책망하셨습니다. 46절을 보십시오. “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나의 말하는 것을 행치 아니하느냐?” 왜 사람이 말씀을 알면서도 행하지 않을까요? 사람이 순종하지 않는 것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 생활을 잘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을 때 주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가 잘 맺어지지 않는다는 것은 믿음이 없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은 말씀대로 살면 손해가 날 것 같아서 순종하지 못합니다. 어떤 사람은 힘이 없어서 순종하지 못하겠다고 말합니다. 사실 연약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있는 성숙한 목자들이 연약한 형제들을 받아야 합니다. 획일성이 위험한 것은 연약한 자들이 상처를 입고 믿음에서 떠나기 쉽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것이 참된 믿음입니다. 우리가 말씀에 항상 순종하지 못함으로 좌절을 경험합니다. 이것이 오래 되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 수 없다고 자포자기 하게 됩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우리 마음을 다스려주시도록 기도하고 성령의 충만함을 지속할 때 순종에서 자라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은 하루 아침에 되는 것이 아니라 훈련되어져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고난을 통해서 순종을 배우셨다고 했습니다(히5:8). 순종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얼마나 참된가를 체험하게 되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축복을 체험하게 됩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은 환난의 때에 견고히 서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사람은 집을 짓되 깊이 파고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사람과 같습니다. 홍수가 나서 탁류가 그 집에 부딪쳐도 요동치 않습니다. 그러나 듣고 행치 않는 자는 흙 위에 집을 지은 사람과 같아서 탁류가 부딪치면 집이 무너져 파괴됨이 심하게 됩니다(47-49). 홍수는 이 땅에서의 시련이나 마지막 날에 임할 심판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켜 행하는 것이 산 믿음입니다. 참된 믿음은 반드시 선한 행위를 동반합니다. 선한 행위란 진실하고 의로운 행위, 곧 회개에 합당한 행위를 가리킵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들이 되어야겠습니다. 이 세상에서 세상 사람과 구별된 신자의 비범한 삶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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