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2004년 누가복음 제 9 강(눅5:1-11)/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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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누가복음 제 9 강
말씀 / 누가복음 5:1-11
요절 / 누가복음 5:10b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시몬에게 일러 가라사대 무서워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하시니”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오셔서 복음을 전파하시며 제자 양성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 공동체를 세우심으로 이들을 통해서 세상 사람들을 섬기셨습니다. 또한 제자들로 하여금 다시 복음을 전파하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첫 제자들을 어떻게 부르셨는가 살펴보는 가운데 우리의 부르심에 대한 확신을 새롭게 하기를 바랍니다. 더 나아가 모든 실패의식을 벗고 이제 후로는 사람을 취하는 삶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하루는 예수님께서 게네사렛 호수가에 나가셨는데 무리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 몰려들었습니다. 무리들은 예수님을 둘러 에워싸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계속해서 사람들이 몰려들자 예수님은 물에 빠질 지경이 되셨습니다. 왜 사람들이 아침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 몰려들었을까요? 말씀에 굶주렸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밥과 함께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말씀으로 사는 존재입니다. 그들은 양식에도 주려 있었지만 무엇보다 하나님의 말씀에 주려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권세와 능력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시대 절망한 사람들에게 소망을 주었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 나라의 소망을 심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깊은 평안을 느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가운데 마음의 상처들이 치유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입소문을 통해 예수님께 나오면 풍성한 은혜를 받는다는 말을 듣고 하나 둘 몰려 나왔습니다. 이제 회당에서는 그들을 감당할 공간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부득불 넓은 공터가 있는 해변가로 나가셔야 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에게 밀어닥치는 사람들을 보면서 한편으로는 호숫가에 두 배가 있는 것을 보셨습니다. 어부들은 배에서 나와서 그물을 씻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어부들에게도 주의를 기울이셨습니다. 그들은 밤새도록 일하고 이제는 집에 돌아가 쉬기 위해서 그물을 정리 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지금 피곤하였습니다. 그들은 실패감에 젖어 있었고 풀이 다 죽어 있었습니다. 시몬은 가장으로서 처자식들이 집에서 기다리고 있지만 아무 것도 가져다 줄 것이 없었습니다. 그는 현실 문제로 마음이 막혀서 예수님과 그 말씀을 듣기 위해서 모인 사람들에게 조금의 관심도 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런 그에게 관심을 가지셨습니다.
3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한 배에 오르시니 그 배는 시몬의 배라 육지에서 조금 띄기를 청하시고 앉으사 배에서 무리를 가르치시더니” 예수님은 주도권을 가지고 시몬의 배에 오르셔서 배를 육지에서 조금 띄워 달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앉으사 배에서 무리를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상큼한 바닷 바람을 타고 무리들의 마음 속으로 파고 들기 시작했습니다. 시몬은 옆에 앉아서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을 들어야만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밤새도록 일하고 돌아온 어부 시몬의 배를 사용하신 것은 그를 귀찮게 하기 위함이 아니요 그와 그 호숫가에 앉아 있는 무리들의 유익을 위함이었습니다. 특히 시몬을 제자로 부르시려는 그의 크신 관심과 배려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시몬을 무조건 도우신 것이 아니라 겸손하게 먼저 그에게 도움을 요청하셨습니다. 자신을 쓸모없다고 생각하는 시몬에게 예수님은 정중하게 부탁을 하심으로 그의 자긍심을 높여 주었습니다. 이는 마치 사마리아 여인을 도울 때에도 먼저 “물 좀 달라”고 하심으로 도움을 요청하신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은 참으로 겸손하셔서 도움을 청하심으로 접촉점을 찾으시고 관계를 맺으셨습니다. 그런데 한번에 끝장을 본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시몬과 사랑과 신뢰의 관계를 맺기 위해 계속해서 노력하셨습니다. 그의 집에 심방하여 장모가 열병으로 누운 것을 보시고 치료해 주셨습니다. 그렇지만 아직 때가 되지 않아서 그를 기다리셨습니다. 우리가 처음 만난 양에게 너무 많은 기대를 하면 부담을 주게 됩니다. 그러므로 관계성을 맺기 위해서는 자주 만나고 인내해야 합니다. 또 양의 필요를 민감하게 알고 지속적으로 채워주면서 관계를 맺어가야 합니다. 우리도 양들이 예수님을 깊이 만나기까지 기다려 주어야 합니다. 우리는 무리하지 않은 범위 내에서 양들에게 도움을 요청할 수도 있습니다. 이번 수양회에 초청하여 작은 것 하나라도 동참하도록 돕는 것도 좋습니다. 음악 프로그램으로 섬겨달라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목자가 양에게 일방적으로 주는 것이 아니라 함께 함으로 관계성을 맺는 것이 좋습니다. 시몬은 피곤했지만 갈릴리 해변 수양회에 참석하여 은혜를 받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피곤한 영혼을 말씀 잔치에 초청하는데 매우 적극적이셨습니다. 우리는 시몬 같은 사람을 볼 때 “아 저 사람은 너무 피곤해 보이는구나 나중에 초청해야 되겠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나중에 그를 초청하고자 하면 이미 때는 늦게 될 것입니다. 아마 그 양은 다른 약속을 하거나 다른 일에 매달릴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다르셨습니다. 그는 시몬이 극히 피곤함을 아셨고 그가 깊은 패배의식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도 아셨습니다. 그가 지쳐서 70대 할아버지와 같이 보이고 영적 소원이 없어 보였지만 상한 심령으로 그가 말씀을 듣도록 도우셨습니다. 지금이 바로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늦었다고 생각하는 때가 가장 빠른 때입니다.
무리들에게 말씀을 마치신 예수님은 시몬에게 어떤 명령을 하셨습니까? 4절을 보십시오.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시몬이 밤새도록 그물을 내렸지만 얻은 것이 없었습니다(5). 그는 자기가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 했습니다. 그러나 아무 것도 잡지 못했기 때문에 매우 허탈했습니다. 시몬은 죽고 싶었을 것입니다. 존재의 가벼움을 느꼈습니다. 그가 빈그물이 된 것은 게으름을 피워서가 아니었습니다. 그가 최선을 다해 수고했으나 그의 능력의 한계를 넘어서는 상황이 온 것입니다. 자기도 어찌할 수 없는 한계 상황 앞에 절망이 되었을 것입니다. 우리도 때로 이런 경험을 하게 됩니다. 수능을 잘 보기 위해서 수없이 많은 노력을 합니다. 아침밥도 먹지 않고 학교에 가서 수업을 하고 밤잠을 설치면서 공부를 했는데 성적이 형편없이 나왔습니다. 어떤 분은 새벽 기도도 하지 못하고 직장에 출근해서 밤 11시가 되어야 돌아옵니다. 그러나 생활비는 항상 마이너스입니다. 월급을 타자마자 카드 빚을 갚고 나면 첫날부터 빚을 져야 살아 갈 수 있습니다. 이런 살림에도 양을 치기 위해서 베이비 씨터 비를 마련해서 수고를 합니다. 그런데도 양은 없고 빈털터리가 되기를 수년을 거듭했습니다. 우리는 이런 절망의 상태에서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또 하나님을 의지하게 됩니다. 시몬 베드로는 베테랑 어부로서 매번 그물에 고기가 가득 잡힐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그물을 던졌습니다. 그러나 밤새도록 빈그물을 들어 올릴 때 그의 팔뚝에는 힘이 빠졌습니다. 쓸데없는 짓을 하고 있다는 생각으로 지쳐버렸습니다. 시몬은 피곤하고 졸립고 배도 고팠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고 명령하십니다.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는 말씀은 목수가 어부에게 방향을 주는 것으로 자존심이 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존심을 내세우지 않았습니다. 그는 고집을 부리지 않았습니다. 교만한 사람은 이런 상황에서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목수인 주제에, 당신이 뭘 안다고 이래라 저래라 합니까’라고 말하면서 화를 내기 쉽습니다. 실패로 인해서 깊은 회의에 빠지게 되면 ‘예수님은 말씀이나 잘 전하세요.’라고 말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고기는 보통 얕은데서 잡는데 깊은 데로 가라고 하시니 영접하기 어려웠습니다. 깊은 데로 가서 고기를 잡으라는 것은 상식 밖의 일이었습니다. 깊은 데로 가라는 말씀은 그에게는 체험해보지 못한 미지의 세계였습니다. 믿음으로 가야 하는 세계였습니다.
또한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는 말씀은 절망하지 말고 다시 시도해 보라는 것입니다. 그가 그물을 씻어 놓고 파장한 상태에서 다시 시작한다는 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그러나 시몬은 결과는 하나님께 맡기고 다시 도전하는 순종의 사람이었습니다. 우리가 캠퍼스 양들을 얻어서 제자 삼는 것이 어렵지만 다시 시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무엇보다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영적 권위를 가지고 명령하신 명령입니다. 그는 창조주이십니다. 그는 고기에 대해서 어부들보다 더 잘 아십니다. 예수님은 말씀도 잘 가르치시고 병도 잘 고치시고, 고기도 잘 잡게 하십니다. 예수님은 한계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부 시몬에게 고기까지도 잡게 하실 수 있는 분이시라면 우리의 모든 삶의 영역에서 도움을 주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자기 생각으로 예수님을 한계 짓지 말아야합니다.
사실 예수님은 친히 고기를 잡아서 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고기에게만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시몬이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하도록 하십니다. 그에게 믿음을 배우는 기회를 준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의 실패를 만회시켜 주고자 하십니다. 주님은 그를 축복하기를 원하십니다. 그가 고기 잡는 데서도 승리하고 기쁨을 누리기를 원하십니다. 수고의 열매를 얻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은 이를 통해서 그가 자기 세계를 뛰어 넘어 믿음의 세계를 체험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자신의 능력과 영광을 드러내기를 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알도록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런 가운데 시몬이 자신감을 덧입고 주님의 제자가 되기를 원하셨기 때문에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시몬은 어떻게 순종했습니까? 5b절을 보십시오.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시몬은 자기의 능력이나 경험, 자기의 지식, 상식을 의지하지 않고 말씀에 의지해서 그물을 내리겠다고 했습니다. 그는 겸손하게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그는 배우는 마음이 있습니다. 이런 그는 끊임없이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비록 자기가 베테랑 어부지만 어획고가 없을 때 이를 인정하고 겸손하게 배웠습니다. 그는 주님의 말씀을 깊이 듣고 순종했습니다.
그 결과가 어떠했습니까? 6,7절을 보십시오. “그리한즉 고기를 에운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 이에 다른 배에 있는 동무를 손짓하여 와서 도와 달라 하니 저희가 와서 두 배에 채우매 잠기게 되었더라.” 그가 말씀대로 순종했을 때 자기 배뿐만 아니라 친구의 배까지 고기가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팔뚝만한 고기들이 그물 속에서 파닥거리를 것을 볼 때 생명력이 솟구쳐 났습니다. 그물을 올리는 그의 입이 찢어졌습니다. 기분이 째졌습니다. 그는 예수님 안에서 승리하는 인생을 맛보게 되었습니다. 잡힌 고기들이 그 두 배에 가득하였기 때문에 그 두 배가 거의 잠기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예상을 초월한 일이었습니다. 이것은 기적이었습니다. 이것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의 영광을 나타내신 것이었습니다. 베드로는 하나님의 축복을 넘치게 받음으로 자기 친구들, 이웃들을 축복하는 복의 근원이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한 사람의 순종으로 다른 사람도 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참으로 풍성한 분이십니다. 베드로는 자신감을 회복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삶의 희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처자식들에게 기를 펴고 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인도네시아 피터리 선교사도 7,8년 동안 아무 열매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여름 수양회에 와서 말씀을 받고 나서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자신에게 말씀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말씀 연구에 힘을 쏟는 가운데 말씀을 전하자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120명이 넘는 역사를 섬기고 있습니다. 인도의 지미리 선교사님은 한국에서 수없이 휘싱하였지만 양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지금은 인도에 가서 수많은 양들을 얻어 섬기고 있습니다. 서제임스목자님도 양이 없기로 유명한 분이었는데 말씀에 순종하여 그물을 내릴 때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수많은 의대 목자들을 세우고 선교사를 파송하였습니다. 이를 볼 때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하나님의 축복을 체험하게 됨을 봅니다. 신28장에서도 하나님은 그 말씀에 순종하는 자를 축복한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말씀에 대한 순종을 통해서 베드로는 영적인 세계, 믿음의 세계, 하나님의 세계, 풍성한 세계를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노력, 인간의 한계를 뛰어 넘는 세계를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순종은 믿음이 자라는 길이고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체험하는 통로입니다.
그런데 많은 물고기를 잡았을 때 시몬의 반응이 어떠했습니까? 8절을 보십시오.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 엎드려 가로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 그는 고기 잡힌 것을 인해서 놀랐습니다. 그리고 이런 일을 가능하게 하신 예수님에게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영광을 본 자마다 시몬 베드로처럼 그 앞에서 두려워 떨며 피하려고 합니다. 이사야 6장에 보면,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의 영광의 모습을 보았던 구약의 선지자 이사야도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라고 고백했습니다.
하나님의 축복 속에서 그 축복을 가능하게 하신 예수님께 시선을 돌린 것은 베드로의 뛰어난 영성을 보여 줍니다. 그는 영적 분별력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다른 제자들도 고기 잡힌 것을 인하여 놀랐지만 오직 베드로만 무릎을 꿇었고 이런 고백을 드렸습니다. 예수님이 자신과 본질적으로 다른 분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을 때 그의 마음 가운데 불안이 생기고 경외심이 생겼습니다. 한마디로 베드로의 영적 눈이 뜨여지게 된 것입니다. 이로 인해 그는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제까지 고기를 얻기 위해서 목숨을 걸고 살았는데 얻고 보니 허무했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이렇게 얻고 보니 자신의 삶이 무가치하게 보였습니다.
그는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아마 그가 죄인으로서 자기를 발견하지 않았다면 그 삶을 고집스럽게 계속 반복했을 것입니다. 죄인은 범죄에 몰두하는 자라는 뜻입니다. 그는 이제까지 고기를 많이 잡는 것이 베드로의 자존심이고 존재의미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고기를 많이 잡음으로써 ‘내가 요한보다 낫다. 더 능력있는 어부다’라는 비교, 경쟁의식들이 있었는데 이런 것들이 다 헛됨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악된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제 참으로 인간다운 삶, 의미있는 삶을 살고 싶었습니다.
이런 시몬에게 예수님은 죄사함의 은혜와 함께 사명을 주셨습니다. “무서워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10b)." 무서워 말라는 것은 죄사함을 선포하고 평안을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까지 어떤 삶을 살았든지 이제 후로는 사람을 취하는 삶을 살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그 인생의 전환점이 되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는 이제까지 어부로 살아왔습니다. 어부로서 고기를 연구하고 어로를 찾아다니고 고기 잡는 방법과 도구와 물에 대해서 많이 공부했습니다. 그는 고기에 소망을 두고 살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인생의 바다에서 물질과 명예의 월척을 낚고자 합니다. 그리고 나름대로의 비법으로 성공하여 성공 시대에 나오면 그 나름대로 매력이 있습니다. 고기 잡는 것이 얼마나 재미가 있으면 케이블 텔레비전에 낚시 채널이 다 있겠습니까? 베드로가 이제까지 고기 잡는 삶을 살아왔다면 고기는 여러 가지로 대치될 수 있습니다. 즉 권력과 명예, 학위와 돈, 사랑 등등을 얻기 위해서 사람들은 발버둥을 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부터 베드로는 사람을 취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를 위해 그는 사람을 알아야 합니다. 사랑을 사랑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결국 사람에게 있습니다. 성경은 창세기 1장 이후에 하나님의 관심이 사람에게 가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람을 취한다는 것은 죄와 죽음의 바다에서 죄사함과 생명을 얻게 하는 사명인의 삶을 살게 된다는 뜻입니다. 고기의 종류가 다양하듯이 사람도 다양합니다. 노랑색, 하얀색, 검은 색, 황색, 붉은 색을 띤 수많은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사람을 취하는 것은 가장 지혜로운 삶입니다. 사람의 생명을 얻는 것은 영원한 열매입니다. 그 한 사람으로 인해서 끼치게 될 영향력은 매우 놀랍습니다. 또 살아 있는 고기를 잡을 때 생명력을 느끼는 것과 마찬가지로 한 영혼을 구원할 때 하늘 나라의 기쁨을 맛보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양은 그의 기쁨이요, 영광의 면류관이요 자랑이 된다고 고백했습니다.
예수님의 소망의 부르심을 받은 시몬은 어떻게 했습니까? 11절을 보십시오. “저희가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를 좇으니라.” 베드로는 예수님을 바로 좇았습니다. 그는 배와 그물, 잡힌 고기와 세속적인 가치관을 버리고 예수님을 좇았습니다. 그는 결단이 분명한 사람이었습니다.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뿐만 아니라 안드레, 요한과 야고보도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좇았습니다. 첫 제자들은 참으로 믿음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월급을 주실 수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시골 전도사와 같이 가난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이 가지고 계신 꿈과 비전, 소망을 함께 공유했습니다. 그는 사람 낚는 어부가 되리라는 비전을 보고 따른 것입니다. 그들은 현실적인 유익을 보고 따른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연봉을 보고 따른 것이 아닙니다. 그는 오직 예수님을 배우고 그의 제자가 되고자 믿음의 결단을 했습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은 물론 복음 사역자로서의 특별한 헌신을 뜻하긴 하지만 일반적으로 적용해 볼 때 모든 사회적 책임까지도 버린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새로운 삶의 질서를 갖자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을 우리들의 삶의 가장 첫자리에 놓자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고 사명인이 된다는 것은 정말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역사에서 정말로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주신 말씀과 은사와 능력, 기회를 사용하여 사람을 취하는 사명인의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말씀 / 누가복음 5:1-11
요절 / 누가복음 5:10b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시몬에게 일러 가라사대 무서워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하시니”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오셔서 복음을 전파하시며 제자 양성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 공동체를 세우심으로 이들을 통해서 세상 사람들을 섬기셨습니다. 또한 제자들로 하여금 다시 복음을 전파하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첫 제자들을 어떻게 부르셨는가 살펴보는 가운데 우리의 부르심에 대한 확신을 새롭게 하기를 바랍니다. 더 나아가 모든 실패의식을 벗고 이제 후로는 사람을 취하는 삶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하루는 예수님께서 게네사렛 호수가에 나가셨는데 무리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 몰려들었습니다. 무리들은 예수님을 둘러 에워싸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계속해서 사람들이 몰려들자 예수님은 물에 빠질 지경이 되셨습니다. 왜 사람들이 아침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 몰려들었을까요? 말씀에 굶주렸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밥과 함께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말씀으로 사는 존재입니다. 그들은 양식에도 주려 있었지만 무엇보다 하나님의 말씀에 주려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권세와 능력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시대 절망한 사람들에게 소망을 주었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 나라의 소망을 심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깊은 평안을 느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가운데 마음의 상처들이 치유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입소문을 통해 예수님께 나오면 풍성한 은혜를 받는다는 말을 듣고 하나 둘 몰려 나왔습니다. 이제 회당에서는 그들을 감당할 공간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부득불 넓은 공터가 있는 해변가로 나가셔야 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에게 밀어닥치는 사람들을 보면서 한편으로는 호숫가에 두 배가 있는 것을 보셨습니다. 어부들은 배에서 나와서 그물을 씻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어부들에게도 주의를 기울이셨습니다. 그들은 밤새도록 일하고 이제는 집에 돌아가 쉬기 위해서 그물을 정리 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지금 피곤하였습니다. 그들은 실패감에 젖어 있었고 풀이 다 죽어 있었습니다. 시몬은 가장으로서 처자식들이 집에서 기다리고 있지만 아무 것도 가져다 줄 것이 없었습니다. 그는 현실 문제로 마음이 막혀서 예수님과 그 말씀을 듣기 위해서 모인 사람들에게 조금의 관심도 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런 그에게 관심을 가지셨습니다.
3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한 배에 오르시니 그 배는 시몬의 배라 육지에서 조금 띄기를 청하시고 앉으사 배에서 무리를 가르치시더니” 예수님은 주도권을 가지고 시몬의 배에 오르셔서 배를 육지에서 조금 띄워 달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앉으사 배에서 무리를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상큼한 바닷 바람을 타고 무리들의 마음 속으로 파고 들기 시작했습니다. 시몬은 옆에 앉아서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을 들어야만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밤새도록 일하고 돌아온 어부 시몬의 배를 사용하신 것은 그를 귀찮게 하기 위함이 아니요 그와 그 호숫가에 앉아 있는 무리들의 유익을 위함이었습니다. 특히 시몬을 제자로 부르시려는 그의 크신 관심과 배려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시몬을 무조건 도우신 것이 아니라 겸손하게 먼저 그에게 도움을 요청하셨습니다. 자신을 쓸모없다고 생각하는 시몬에게 예수님은 정중하게 부탁을 하심으로 그의 자긍심을 높여 주었습니다. 이는 마치 사마리아 여인을 도울 때에도 먼저 “물 좀 달라”고 하심으로 도움을 요청하신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은 참으로 겸손하셔서 도움을 청하심으로 접촉점을 찾으시고 관계를 맺으셨습니다. 그런데 한번에 끝장을 본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시몬과 사랑과 신뢰의 관계를 맺기 위해 계속해서 노력하셨습니다. 그의 집에 심방하여 장모가 열병으로 누운 것을 보시고 치료해 주셨습니다. 그렇지만 아직 때가 되지 않아서 그를 기다리셨습니다. 우리가 처음 만난 양에게 너무 많은 기대를 하면 부담을 주게 됩니다. 그러므로 관계성을 맺기 위해서는 자주 만나고 인내해야 합니다. 또 양의 필요를 민감하게 알고 지속적으로 채워주면서 관계를 맺어가야 합니다. 우리도 양들이 예수님을 깊이 만나기까지 기다려 주어야 합니다. 우리는 무리하지 않은 범위 내에서 양들에게 도움을 요청할 수도 있습니다. 이번 수양회에 초청하여 작은 것 하나라도 동참하도록 돕는 것도 좋습니다. 음악 프로그램으로 섬겨달라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목자가 양에게 일방적으로 주는 것이 아니라 함께 함으로 관계성을 맺는 것이 좋습니다. 시몬은 피곤했지만 갈릴리 해변 수양회에 참석하여 은혜를 받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피곤한 영혼을 말씀 잔치에 초청하는데 매우 적극적이셨습니다. 우리는 시몬 같은 사람을 볼 때 “아 저 사람은 너무 피곤해 보이는구나 나중에 초청해야 되겠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나중에 그를 초청하고자 하면 이미 때는 늦게 될 것입니다. 아마 그 양은 다른 약속을 하거나 다른 일에 매달릴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다르셨습니다. 그는 시몬이 극히 피곤함을 아셨고 그가 깊은 패배의식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도 아셨습니다. 그가 지쳐서 70대 할아버지와 같이 보이고 영적 소원이 없어 보였지만 상한 심령으로 그가 말씀을 듣도록 도우셨습니다. 지금이 바로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늦었다고 생각하는 때가 가장 빠른 때입니다.
무리들에게 말씀을 마치신 예수님은 시몬에게 어떤 명령을 하셨습니까? 4절을 보십시오.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시몬이 밤새도록 그물을 내렸지만 얻은 것이 없었습니다(5). 그는 자기가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 했습니다. 그러나 아무 것도 잡지 못했기 때문에 매우 허탈했습니다. 시몬은 죽고 싶었을 것입니다. 존재의 가벼움을 느꼈습니다. 그가 빈그물이 된 것은 게으름을 피워서가 아니었습니다. 그가 최선을 다해 수고했으나 그의 능력의 한계를 넘어서는 상황이 온 것입니다. 자기도 어찌할 수 없는 한계 상황 앞에 절망이 되었을 것입니다. 우리도 때로 이런 경험을 하게 됩니다. 수능을 잘 보기 위해서 수없이 많은 노력을 합니다. 아침밥도 먹지 않고 학교에 가서 수업을 하고 밤잠을 설치면서 공부를 했는데 성적이 형편없이 나왔습니다. 어떤 분은 새벽 기도도 하지 못하고 직장에 출근해서 밤 11시가 되어야 돌아옵니다. 그러나 생활비는 항상 마이너스입니다. 월급을 타자마자 카드 빚을 갚고 나면 첫날부터 빚을 져야 살아 갈 수 있습니다. 이런 살림에도 양을 치기 위해서 베이비 씨터 비를 마련해서 수고를 합니다. 그런데도 양은 없고 빈털터리가 되기를 수년을 거듭했습니다. 우리는 이런 절망의 상태에서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또 하나님을 의지하게 됩니다. 시몬 베드로는 베테랑 어부로서 매번 그물에 고기가 가득 잡힐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그물을 던졌습니다. 그러나 밤새도록 빈그물을 들어 올릴 때 그의 팔뚝에는 힘이 빠졌습니다. 쓸데없는 짓을 하고 있다는 생각으로 지쳐버렸습니다. 시몬은 피곤하고 졸립고 배도 고팠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고 명령하십니다.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는 말씀은 목수가 어부에게 방향을 주는 것으로 자존심이 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존심을 내세우지 않았습니다. 그는 고집을 부리지 않았습니다. 교만한 사람은 이런 상황에서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목수인 주제에, 당신이 뭘 안다고 이래라 저래라 합니까’라고 말하면서 화를 내기 쉽습니다. 실패로 인해서 깊은 회의에 빠지게 되면 ‘예수님은 말씀이나 잘 전하세요.’라고 말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고기는 보통 얕은데서 잡는데 깊은 데로 가라고 하시니 영접하기 어려웠습니다. 깊은 데로 가서 고기를 잡으라는 것은 상식 밖의 일이었습니다. 깊은 데로 가라는 말씀은 그에게는 체험해보지 못한 미지의 세계였습니다. 믿음으로 가야 하는 세계였습니다.
또한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는 말씀은 절망하지 말고 다시 시도해 보라는 것입니다. 그가 그물을 씻어 놓고 파장한 상태에서 다시 시작한다는 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그러나 시몬은 결과는 하나님께 맡기고 다시 도전하는 순종의 사람이었습니다. 우리가 캠퍼스 양들을 얻어서 제자 삼는 것이 어렵지만 다시 시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무엇보다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영적 권위를 가지고 명령하신 명령입니다. 그는 창조주이십니다. 그는 고기에 대해서 어부들보다 더 잘 아십니다. 예수님은 말씀도 잘 가르치시고 병도 잘 고치시고, 고기도 잘 잡게 하십니다. 예수님은 한계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부 시몬에게 고기까지도 잡게 하실 수 있는 분이시라면 우리의 모든 삶의 영역에서 도움을 주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자기 생각으로 예수님을 한계 짓지 말아야합니다.
사실 예수님은 친히 고기를 잡아서 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고기에게만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시몬이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하도록 하십니다. 그에게 믿음을 배우는 기회를 준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의 실패를 만회시켜 주고자 하십니다. 주님은 그를 축복하기를 원하십니다. 그가 고기 잡는 데서도 승리하고 기쁨을 누리기를 원하십니다. 수고의 열매를 얻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은 이를 통해서 그가 자기 세계를 뛰어 넘어 믿음의 세계를 체험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자신의 능력과 영광을 드러내기를 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알도록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런 가운데 시몬이 자신감을 덧입고 주님의 제자가 되기를 원하셨기 때문에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시몬은 어떻게 순종했습니까? 5b절을 보십시오.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시몬은 자기의 능력이나 경험, 자기의 지식, 상식을 의지하지 않고 말씀에 의지해서 그물을 내리겠다고 했습니다. 그는 겸손하게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그는 배우는 마음이 있습니다. 이런 그는 끊임없이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비록 자기가 베테랑 어부지만 어획고가 없을 때 이를 인정하고 겸손하게 배웠습니다. 그는 주님의 말씀을 깊이 듣고 순종했습니다.
그 결과가 어떠했습니까? 6,7절을 보십시오. “그리한즉 고기를 에운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 이에 다른 배에 있는 동무를 손짓하여 와서 도와 달라 하니 저희가 와서 두 배에 채우매 잠기게 되었더라.” 그가 말씀대로 순종했을 때 자기 배뿐만 아니라 친구의 배까지 고기가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팔뚝만한 고기들이 그물 속에서 파닥거리를 것을 볼 때 생명력이 솟구쳐 났습니다. 그물을 올리는 그의 입이 찢어졌습니다. 기분이 째졌습니다. 그는 예수님 안에서 승리하는 인생을 맛보게 되었습니다. 잡힌 고기들이 그 두 배에 가득하였기 때문에 그 두 배가 거의 잠기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예상을 초월한 일이었습니다. 이것은 기적이었습니다. 이것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의 영광을 나타내신 것이었습니다. 베드로는 하나님의 축복을 넘치게 받음으로 자기 친구들, 이웃들을 축복하는 복의 근원이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한 사람의 순종으로 다른 사람도 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참으로 풍성한 분이십니다. 베드로는 자신감을 회복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삶의 희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처자식들에게 기를 펴고 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인도네시아 피터리 선교사도 7,8년 동안 아무 열매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여름 수양회에 와서 말씀을 받고 나서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자신에게 말씀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말씀 연구에 힘을 쏟는 가운데 말씀을 전하자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120명이 넘는 역사를 섬기고 있습니다. 인도의 지미리 선교사님은 한국에서 수없이 휘싱하였지만 양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지금은 인도에 가서 수많은 양들을 얻어 섬기고 있습니다. 서제임스목자님도 양이 없기로 유명한 분이었는데 말씀에 순종하여 그물을 내릴 때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수많은 의대 목자들을 세우고 선교사를 파송하였습니다. 이를 볼 때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하나님의 축복을 체험하게 됨을 봅니다. 신28장에서도 하나님은 그 말씀에 순종하는 자를 축복한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말씀에 대한 순종을 통해서 베드로는 영적인 세계, 믿음의 세계, 하나님의 세계, 풍성한 세계를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노력, 인간의 한계를 뛰어 넘는 세계를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순종은 믿음이 자라는 길이고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체험하는 통로입니다.
그런데 많은 물고기를 잡았을 때 시몬의 반응이 어떠했습니까? 8절을 보십시오.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 엎드려 가로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 그는 고기 잡힌 것을 인해서 놀랐습니다. 그리고 이런 일을 가능하게 하신 예수님에게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영광을 본 자마다 시몬 베드로처럼 그 앞에서 두려워 떨며 피하려고 합니다. 이사야 6장에 보면,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의 영광의 모습을 보았던 구약의 선지자 이사야도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라고 고백했습니다.
하나님의 축복 속에서 그 축복을 가능하게 하신 예수님께 시선을 돌린 것은 베드로의 뛰어난 영성을 보여 줍니다. 그는 영적 분별력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다른 제자들도 고기 잡힌 것을 인하여 놀랐지만 오직 베드로만 무릎을 꿇었고 이런 고백을 드렸습니다. 예수님이 자신과 본질적으로 다른 분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을 때 그의 마음 가운데 불안이 생기고 경외심이 생겼습니다. 한마디로 베드로의 영적 눈이 뜨여지게 된 것입니다. 이로 인해 그는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제까지 고기를 얻기 위해서 목숨을 걸고 살았는데 얻고 보니 허무했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이렇게 얻고 보니 자신의 삶이 무가치하게 보였습니다.
그는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아마 그가 죄인으로서 자기를 발견하지 않았다면 그 삶을 고집스럽게 계속 반복했을 것입니다. 죄인은 범죄에 몰두하는 자라는 뜻입니다. 그는 이제까지 고기를 많이 잡는 것이 베드로의 자존심이고 존재의미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고기를 많이 잡음으로써 ‘내가 요한보다 낫다. 더 능력있는 어부다’라는 비교, 경쟁의식들이 있었는데 이런 것들이 다 헛됨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악된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제 참으로 인간다운 삶, 의미있는 삶을 살고 싶었습니다.
이런 시몬에게 예수님은 죄사함의 은혜와 함께 사명을 주셨습니다. “무서워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10b)." 무서워 말라는 것은 죄사함을 선포하고 평안을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까지 어떤 삶을 살았든지 이제 후로는 사람을 취하는 삶을 살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그 인생의 전환점이 되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는 이제까지 어부로 살아왔습니다. 어부로서 고기를 연구하고 어로를 찾아다니고 고기 잡는 방법과 도구와 물에 대해서 많이 공부했습니다. 그는 고기에 소망을 두고 살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인생의 바다에서 물질과 명예의 월척을 낚고자 합니다. 그리고 나름대로의 비법으로 성공하여 성공 시대에 나오면 그 나름대로 매력이 있습니다. 고기 잡는 것이 얼마나 재미가 있으면 케이블 텔레비전에 낚시 채널이 다 있겠습니까? 베드로가 이제까지 고기 잡는 삶을 살아왔다면 고기는 여러 가지로 대치될 수 있습니다. 즉 권력과 명예, 학위와 돈, 사랑 등등을 얻기 위해서 사람들은 발버둥을 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부터 베드로는 사람을 취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를 위해 그는 사람을 알아야 합니다. 사랑을 사랑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결국 사람에게 있습니다. 성경은 창세기 1장 이후에 하나님의 관심이 사람에게 가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람을 취한다는 것은 죄와 죽음의 바다에서 죄사함과 생명을 얻게 하는 사명인의 삶을 살게 된다는 뜻입니다. 고기의 종류가 다양하듯이 사람도 다양합니다. 노랑색, 하얀색, 검은 색, 황색, 붉은 색을 띤 수많은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사람을 취하는 것은 가장 지혜로운 삶입니다. 사람의 생명을 얻는 것은 영원한 열매입니다. 그 한 사람으로 인해서 끼치게 될 영향력은 매우 놀랍습니다. 또 살아 있는 고기를 잡을 때 생명력을 느끼는 것과 마찬가지로 한 영혼을 구원할 때 하늘 나라의 기쁨을 맛보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양은 그의 기쁨이요, 영광의 면류관이요 자랑이 된다고 고백했습니다.
예수님의 소망의 부르심을 받은 시몬은 어떻게 했습니까? 11절을 보십시오. “저희가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를 좇으니라.” 베드로는 예수님을 바로 좇았습니다. 그는 배와 그물, 잡힌 고기와 세속적인 가치관을 버리고 예수님을 좇았습니다. 그는 결단이 분명한 사람이었습니다.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뿐만 아니라 안드레, 요한과 야고보도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좇았습니다. 첫 제자들은 참으로 믿음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월급을 주실 수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시골 전도사와 같이 가난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이 가지고 계신 꿈과 비전, 소망을 함께 공유했습니다. 그는 사람 낚는 어부가 되리라는 비전을 보고 따른 것입니다. 그들은 현실적인 유익을 보고 따른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연봉을 보고 따른 것이 아닙니다. 그는 오직 예수님을 배우고 그의 제자가 되고자 믿음의 결단을 했습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은 물론 복음 사역자로서의 특별한 헌신을 뜻하긴 하지만 일반적으로 적용해 볼 때 모든 사회적 책임까지도 버린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새로운 삶의 질서를 갖자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을 우리들의 삶의 가장 첫자리에 놓자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고 사명인이 된다는 것은 정말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역사에서 정말로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주신 말씀과 은사와 능력, 기회를 사용하여 사람을 취하는 사명인의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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