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ntitled Document
주일말씀 성경별메시지 심포지엄 성경 검색
문제지 성경별문제지

누가복음 2004년 누가복음 제 8 강(눅4:16-44)/나는 이 일로 보내심을 입었노라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섬김이
댓글 0건 조회 2,815회 작성일 04-12-12 22:40

본문

2004년 누가복음 제 8 강                                               
말씀 / 누가복음 4:16-44
요절 / 누가복음 4:43

나는 이 일로 보내심을 입었노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다른 동네에서도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하여야 하리니 나는 이 일로 보내심을 입었노라 하시고”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은 자신이 누구인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말씀하십니다. 자신이 누구인가 아는 것은 정체성에 관한 것입니다. 정체성이 분명해 지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가 분명해 집니다. 예수님은 제한된 시간과 자원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사명을 완수해야 했습니다. 예수님은 복음 전하는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서 다른 일은 옆으로 제껴 두시고 그 일에 집중하셨습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서 나는 누구인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그래서 우리도 방향성이 분명한 사명인의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I. 갈릴리 전도의 시작(16-30)

  예수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러 안식일에 자기 규례대로 회당에 들어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셨습니다. 그러자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 책을 펴서 이렇게 기록한 데를 찾으셨습니다. 곧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예수님이 책을 덮어 그 맡은 자에게 주시고 앉으시자 회당에 있는 자들이 다 주목하여 보았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저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글이 오늘날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우리는 여기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실 일이 무엇인가 볼 수 있습니다.

첫째, 예수님은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으시고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십니다. 가난한 자들은 돈이 없어 배고픈 자들입니다. 영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굶주린 자들입니다. 가난한 자는 자기를 구원하기 위해서 아무것도 자기에게 의지할 것이 없어서 도움을 받지 않을 수 없는 사람입니다. 이런 가난한 자는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도저히 구원 받을 길이 없음을 압니다. 이런 자들에게 예수님은 복음, 즉 기쁜 소식을 전하십니다.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음을 믿는 자에게 주어지는 죄 사함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공로에 의해서가 아니라, 다만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로 주어진 것입니다. 복음은 이것을 믿는 자를 의롭다 하시고,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둘째, 예수님은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주십니다. 포로는  패전국의 군인이나 주민이, 전승국 또는 그 영지로 잡혀가거나, 가서 복역하는 자를 말합니다. 고대의 전쟁에서 적은 몰살시키는 것이었는데, 후에는 피정복민을 포로로 잡아가서 부역시키는 방법을 취하게 되었습니다. 인간은 마귀와 죄의 포로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원하지 않아도 죄에 끌려 다닙니다. 요즈음은 정욕에 포로된 자, 게임에 포로된 자들이 많습니다. 게임에 포로가 되어 게임을 하다가 숨을 헐떡이다가 죽는 사람도 있습니다. 또 일본 만화에 포로된 사람, 일본의 드라마에 포로된 학생들도 많습니다. 두려움에 포로된 자, 미움에 포로된 자, 탐욕의 포로가 된 자, 교만의 포로가 된 자, 죄책감에 포로된 자도 있습니다. 이렇게 죄와 사단의 세력에 사로잡힌 자에게 예수님은 오셔서 자유를 선포하십니다. 예수님은 링컨 대통령이 노예 해방을 선언했던 것같이 죄와 사단의 권세에서 사람들을 자유하게 했습니다. 2차 세계 대전 때 태평양의 한 섬에서 전투가 있었습니다. 일본군은 패전했고 한 병사가 어두운 굴 속에 자신을 숨겼습니다. 그 이후로 그는 외부 세계와 단절된 채 동굴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시간이 흘러 전쟁도 끝났습니다. 그는 밖으로 나와서 자유롭게 살 수가 있었지만 아직까지 전쟁이 끝난 줄을 모르고 동굴 속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전쟁이 끝나지 않았다는 잘못된 신념 때문에 그는 두려움에 잡혀서 외딴 섬의 동굴 속에서 포로 아닌 포로로 살았습니다. 사람이 복음이라는 좋은 소식을 알지 못하면 동굴 속의 이 사람과 같이 살 수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시고 죄사함을 선언하셨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인간 해방이 이루어지게 된 것입니다. 이로 인해서 사람들은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게 되었습니다. 이웃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경외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자유를 누리는 가운데 자신의 달란트를 마음껏 발휘하고 꿈을 펼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셋째, 눈먼 자를 다시 보게 하십니다. 소경은 아름다운 세계를 볼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어머니의 얼굴도 볼 수 없습니다. 특히 영적인 소경은 메시야를 알아보지 못합니다. 하나님과 그의 말씀을 보지 못합니다. 어두운 세계 속에 갇혀 있어야 하는 소경의 답답함이 어떠하겠습니까? 소경을 진리를 보지 못합니다. 또 자기를 바로 보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영적인 세계를 보지 못하는 사람, 마음의 눈이 먼 자를 다시 보게 하는 것이 예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사람이 바로 보게 될 때 바로 생각하고 확신있게 행동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육신을 입고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데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그 분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 영적인 눈이 떠져서 하나님과 그 아름다운 세계를 볼 수 있습니다.

넷째, 예수님은 눌린 자를 자유케 하십니다. 눌린 자는 심령이 눌린 자, 산산이 부서진 자, 깨뜨려진 자, 박살난 자를 말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외모로 인해서 눌리고 가정 파탄으로 인해서 마음이 깨져 있습니다. 직장인들은 실적에 눌리고 사모님들은 가사 일에 눌립니다. 학생들은 학업 성적에 눌리기도 합니다. 목자들은 열매 문제, 예배 참석 인원으로 인해서 눌리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11:28).” 예수님이 죄의 짐으로부터 우리를 자유케 할 때 우리는 잘 자고, 잘 먹고, 공부도 잘하고, 하나님을 위해서 거룩한 싸움을 싸울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주일을 허락하시고 쉼을 주실 뿐만 아니라 무거운 죄의 짐을 내려놓게 하시는 주님을 찬양합니다. 우리의 눌리고 깨어진 심령을 치료하시는 주님을 찬양합니다.

  19절을 보십시오.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주의 은혜의 해란 희년을 말합니다. 희년이란, '나팔을 분다'는 뜻으로, 이 해의 처음에 제사장들이 나팔을 불며 널리 국내를 순회한 데서, 이렇게 불리었습니다. 50년 주기로 돌아오는 그 해에는, 빚을 져서 몸을 노예로 판 자는 무상으로 해방되고, 부채는 면제되며, 남의 손에 빼앗겼던 기업의 땅은 회복되었습니다(레25:10-).  이 희년은, 유대인에게 있어서 큰 기쁨의 해였는데, 이것은 메시야에 의한 은혜의 시대의 예표였습니다. 메시야 예수님께서 오셔서 참된 인간 해방과 자유를 선포하신 것입니다.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후6:2-). 믿는 자는, 누구라도 죄사함을 받고, 자유를 누릴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책을 덮어 그 맡은 자에게 주시고 앉으시니 회당에 있는 자들이 다 그를 주목하여 보았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이 글이 오늘날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메시야로서 예언된 말씀이 성취되었다는 뜻입니다.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에 대해서 좋게 이야기했습니다. 또 예수님의 입으로 나오는 바 은혜로운 말씀을 기이히 여겼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하고 인간적인 생각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인간적인 생각은 이성적이고 자연스럽게 보이지만 사실은 매우 위험한 것입니다. 그것은 사람의 영적인 성장을 방해합니다. 그것은 사람의 마음 밭을 딱딱한 길가와 같이 만들어 버립니다. 인간적인 생각은 사람을 교만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그들이 인간적이 생각을 하기 시작하자 앞에서 은혜롭게 들었던 말씀들이 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막 4:4절에 “뿌릴새 더러는 길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고”라는 말씀과 같이 사단이 주어 먹어버렸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메시야이심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인간적으로 무시하고 배척했습니다. 우리는 오만과 편견의 죄악을 버려야 합니다. 양이 성장하여 목자가 되었을 때 어린 시절 양에 대한 편견을 버려야 합니다. 그들의 성장에 대해서 감사하고 존경하고 그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역사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주의 종으로부터 전해지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인간적인 생각에 빠지지 않도록 우리는 주의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선지자가 고향에서 환영을 받는 자가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왜 선지자가 고향에서 환영을 받지 못할까요? 이는 사람들이 영적인 일들을 겉으로 드러난 것만으로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53:2절은 말씀합니다.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이 때문에 사도 야고보는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지 말라고 했습니다(약2:1). 예수님은 그들의 불신으로 인해서 그곳에서 능력을 행하지 아니하셨습니다. 은혜를 받으려면 은혜 받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편견을 가지고 그를 배척하는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지 않습니다. 일례로 엘리야 시대에 3년 6개월 동안 극심한 가뭄이 있었습니다. 이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왕부터 짐승에 이르기까지 엄청난 고통을 겪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엘리야가 그들 중 한 사람에게도 보내심을 받지 않고 오직 시돈 땅에 있는 사렙다의 한 과부에게 보내졌습니다. 그때 엘리야는 과부를 보고 “청컨대 네 손에 떡 한 조각을 내게로 가져오라”고 했습니다. 그때 이 여인은 “나는 떡이 없고 다만 통에 가루 한 움큼과 병에 기름 조금 뿐이라 내가 나뭇가지 두엇을 주워다가 나와 내 아들을 위하여 음식을 만들어 먹고 그 후에는 죽으리라(왕하17:12)”고 말했습니다. 엘리야는 그녀에게 “두려워 말고 가서 네 말대로 하려니와 먼저 그것으로 나를 위하여 작은 떡 하나를 만들어 내게로 가져오고 그 후에 너와 네 아들을 위하여 만들라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나 여호와가 비를 지면에 내리는 날까지 그 통의 가루는 다하지 아니하고 그 병의 기름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왕하17:13-16)”고 말했습니다. 이때 여인은 엘리야가 거지같이 떡을 얻어먹으려고 나를 속이려는구나 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어떤 인간적인 생각에 말려들지 않았습니다. 믿음으로 그 여인이 순종했을 때 하나님은 그녀의 믿음을 축복하시고 기근이 끝날 때까지 그녀와 아들과 엘리야를 위해서 매일 음식을 장만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죽은 아들이 생명을 회복하는 은혜까지 받았습니다.

  또한 선지자 엘리사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문둥이가 있었지만 그 중에 한 사람도 깨끗함을 얻지 못하고 오직 수리아 사람 나아만 장군 뿐이었습니다. 그는 장군으로서의 자존심을 꺾고 대머리 엘리사의 말에 순종하여 요단 강 물에 일곱 번 잠기고 나음을 얻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혈육이나 끈이 있는 사람에게 은혜를 입히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있는 사람, 순종하는 사람에게 풍성한 은혜를 주십니다.

  여기까지 말씀을 듣고 있던 고향 사람들은 다 분이 가득하여 벌떡 일어나 강단에 올라가서 예수님을 끌어 내렸습니다. 그리고 그를 동네 밖으로 쫓아내어 그 동네가 건설된 산 낭떠러지까지 끌고 가서 밀어 내리쳐 죽이고자 했습니다. 그들은 무지하고 교만하고 완악했습니다. 이로 인해 예수님의 진실과 하나님의 아들의 영광을 도무지 보지 못했고 느끼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저희 가운데로 지나서 가셨습니다. 아직 하나님의 때가 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때가 되면 예수님은 스스로 십자가의 죽음의 길을 택하실 것입니다. 사람이 이런 위협을 받게 되면 움츠러들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부정적으로 생각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더욱 힘을 내서 가버나움에 가서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II.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러 왔노라(31-44)

  예수님은 갈릴리 가버나움 동네에 내려오사 안식일에 가르치시매 저희가 그 가르치심에 놀랐습니다. 이는 그 말씀에 권세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힘이 있었습니다. 그 말씀은 실제적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사람들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한 순간도 놓칠 수 없었습니다. 그 말씀은 너무나 감동적이었고 사람의 마음을 변화시켰습니다. 예수님은 뛰어난 성경 선생이셨습니다.

  예수님이 가르치시는 것은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저희 서기관과 같지 아니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권세있게 말씀을 가르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첫째, 예수님은 죄의 소원보다 성령의 다스림을 받으셨습니다. 그는 죄가 없으셨습니다. 그는 성령으로 충만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을 섬기는데 특별한 능력을 갖게 되었습니다. 둘째, 예수님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게 하고자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인정만을 받고자 투쟁하셨습니다(갈1:10). 그는 하나님의 말씀에 절대적으로 순종하셨습니다. 셋째,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이 있으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흙 도가니에서 일곱 번 단련한 은과 같이 순결했습니다(시12:6). 하나님의 말씀은 죽은 영혼에 생명을 주는 힘이 있습니다. 예수님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이 있을 때 우리는 말씀을 권세있게 전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번 봄 수양회를 갖게 될 것입니다. 말씀 강사님들이 권세 있게 말씀을 전할 수 있도록 기도해야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권면했습니다. “네가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변하여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네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딤후 2:15).”

  그러면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듣는 사람들 가운데 어떤 역사가 일어났습니까? 33,34절을 보십시오. “회당에 더러운 귀신들린 사람이 있어 크게 소리질러 가로되 아,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예수님의 말씀이 권세 있게 증거되자 귀신이 그 정체를 드러내게 되었습니다. 귀신은 놀래서 소리를 질렀습니다. 더러운 귀신은 더러운 생각과 행동을 조장합니다. 이 세상의 음란한 풍조는 더러운 영들의 활동으로 더욱 확산되고 왕성하여집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은 좌우에 날선 검과 같아서 그 사람의 마음을 쪼개고 속에 있는 더러운 것들을 다 드러냈습니다(히4:12). 귀신은 그 먹이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 크게 소리를 질렀습니다. “아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34).” 사실상 이 말은 ‘우리를 괴롭히지 마세요. 우리를 내버려 두세요. 당신은 자기 일이나 하시고 우리는 우리 일을 할 것입니다.’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종종 양들로부터 이런 말을 듣습니다. “나를 내버려두세요. 내 일에 상관하지 마세요. 목자님은 목자님 일이나 하세요.” 이때 우리는 양을 미워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이 말은 하나님의 말씀을 원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오직 더러운 영은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그들을 위해서 계속해서 기도해야 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도전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귀신은 멸망당할 운명에 처해있고, 하나님의 말씀은 귀신을 쫓아내는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꾸짖어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러자 귀신이 그 사람을 무리 중에 넘어뜨리고 나오되 그 사람은 상하지 아니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부지런히 가르치고 간절히 기도할 때 더러운 영이 나가게 되고 하나님의 나라가 그 영혼에 임하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이 광경을 보고 다 놀라 서로 말했습니다. “이 어떠한 말씀인고 권세와 능력으로 더러운 귀신을 명하매 나가는도다(36).” 그리고 예수님의 소문이 그 근처 사방으로 퍼져나갔습니다. 

  예수님께서 회당에서 예배를 드리고 나서 시몬의 집에 심방을 가셨습니다. 시몬의 장모는 중한 열병에 붙들려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까이 서서 열병을 꾸짖으시자 병이 떠나갔습니다.  아마 이 장모는 몸이 약해서 바이러스가 면역체계를 공격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열병이 났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창조주이시고 바이러스에게 떠나라고 명령하자 즉시 열병이 떠나가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병이 낫자 개운함을 느끼고 곧 일어나 감사함으로 예수님을 수종들었습니다. 예수님과 손님들은 즐겁고 기쁜 이팅 휄로우십(eating fellowship)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40절을 보십시오. “해질 적에 각색 병으로 앓는 자 있는 사람들이 다 병인을 데리고 나아오매 예수께서 일일이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고치시니” 예수님은 하루 종일 일하셨지만 다시 모든 사람들을 섬기셔야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을 짐으로 생각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환영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일일이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고쳐주셨습니다. ‘일일이 손을 얹으신’ 것은 개개인에 대한 그의 사랑과 관심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선한 목자이셨습니다(요10:3). 예수님은 사람을 도매금으로 취급하지 않으셨습니다. 아무리 사람이 많을지라도 예수님은 일일이 우리를 아시고 도와주십니다. 이것이 우리가 예수님을 어떤 갈등도 없이 서로 “나의” 목자라고 부르는 이유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알고 그를 배울 때 우리도 많은 사람에게 일일이 좋은 목자가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어제 하루 종일 녹초가 될 때까지 일하셨습니다. 그러나 42a절을 보십시오. “날이 밝으매 예수께서 나오사 한적한 곳에 가시니” 왜 예수님이 새벽 미명에 나가서 한적한 곳에 가셨습니까? 막1:35절은 말씀합니다. “새벽 오히려 미명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 새벽 시간에 그는 하나님과 교제하셨습니다. 그는 아버지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셨습니다. 그는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새로운 방향을 받으셨습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하고자 한다면 예수님께 나아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의 지시를 받아야 합니다. 우리가 새벽 시간에 기도하고 말씀을 묵상할 때 많은 축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고통 가운데 위로를 받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합니다. 하루 하루 새로운 소망으로 충만해 집니다. 무엇보다 우리는 하루의 방향을 찾을 수 있고 삶의 우선순위를 재조정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아버지와 교제를 나누며 감미로운 시간을 갖고 계실 때 무리가 몰려와서 방해하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을 찾다 찾다 만나자 반갑다면서 자기들에게서 떠나시지 못하게 만류하려 했습니다. 그들은 자기중심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43,44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다른 동네에서도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하여야 하리니 나는 이 일로 보내심을 입었노라 하시고 갈릴리 여러 회당에서 전도하시더라.” 기도 후에 예수님은 치료 사역에서 말씀 사역으로 우선순위를 전환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복음 전파에 집중하기 위해서 병든 자들의 요구를 물리치시고 그 동네를 떠나셨습니다. 예수님이 병든 자들에게 도움이 필요함을 아셨지만 병든 인생들의 죄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치료보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는 일에 집중하고자 하셨습니다. 그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는 것이 사람을 돕는 최선의 길이라고 생각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면 병 고치는 일은 그들 스스로 해결해 나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이 일로 보내심을 입었노라” 우리 시대는 다양한 요구가 있습니다. 삶의 스타일도 다양합니다. 그래서 어디에 초점을 맞추어야 좋은지 당황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는데 초점을 맞추셨습니다. 성경은 사단의 나라와 하나님 나라 두 왕국이 있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은 두 나라 중 하나에 속해 있습니다. 중간은 없습니다.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곳에 가야 할 것이고 구원받은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에 가게 될 것입니다. 불타는 집에서 어린 아이를 구해내는 소방관처럼 예수님은 제한된 시간 안에 제한된 자원을 가지고 구원 역사를 이루는 일에 집중하고자 하셨습니다. 나머지 일은 모두 그 후의 일인 것입니다. “나는 이 일로 보내심을 입었노라” 우리도 한 번뿐인 인생을 사는 동안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사명이 무엇인지를 발견하고 그 사명을 이루는데 온전히 헌신하기를 기도합니다. 사도 바울은 행20:24절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그는 하나님께 받은 사명 즉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거하는 일을 완수하기 위해서 자기의 생명을 아낌없이 바치고자 했습니다.

  결론적으로 자신이 어떤 일로 이 세상에 보냄을 받았는지 알지 못하는 인생은 목적지 없이 운항되고 있는 배와 같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해서 간절히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그 방향을 주십니다. 우리 모두 한번 뿐인 인생을 성서 한국과 세계 선교 사명에 바쳐서 완수하고 하나님 나라로 귀환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첨부파일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Total 1,323건 77 페이지
주일메시지 목록
번호 제목 글쓴이 조회 날짜
183 누가복음 섬김이 3304 12-14
182 누가복음 섬김이 2732 12-14
181 누가복음 섬김이 2781 12-14
180 누가복음 섬김이 3350 12-14
179 누가복음 섬김이 2766 12-14
178 누가복음 섬김이 2618 12-14
177 누가복음 섬김이 2730 12-14
176 누가복음 섬김이 2812 12-12
175 누가복음 섬김이 2752 12-12
174 누가복음 섬김이 2827 12-12
열람중 누가복음 섬김이 2816 12-12
172 누가복음 섬김이 2816 12-12
171 누가복음 섬김이 2963 12-12
170 누가복음 섬김이 3022 12-12
169 특강 이엘리야 3375 12-05

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