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2004년 누가복음 제 5 강(눅2:21-52)/ 예수님의 어린 시절
페이지 정보

본문
2004년 누가복음 제 5 강
말씀 / 누가복음 2:21-52
요절 / 누가복음 2:49
예수님의 어린 시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하시니”
일반적으로 청소년기를 ‘질풍노도’의 시기라고 말합니다. 이 시기에 청소년들은 갈등하고, 방황하고, 이유없는 반항을 합니다. 그들은 심한 고독감에 빠지고 자신의 무가치성, 자신에 대한 강한 비판, 열등 의식으로 고독감에 빠집니다. 또한 청소년들은 부모의 별거나 이혼, 경제적 곤란, 부모의 잦은 다툼, 대화부족, 부모의 이해 부족 등으로 심리적 소외감을 느낍니다. 그리고 사회에 대한 불만과 교회 제도 등 비판에 민감합니다. 오늘날 우리의 청소년들은 지나친 입시 경쟁으로 인한 정신적 억압과 학업 부진에 따른 정서적 불안 등으로 심한 갈등을 겪고 있는 실정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아기에서 청소년으로 자라나셨습니다. 그는 신체와 정신, 영적인 면에서 우리와 똑같은 과정을 거쳐서 성장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청소년기를 어떻게 지내셨는가 생각해 보는 가운데 자라나는 세대들을 어떻게 양육해야 하는지 배우기를 기도합니다.
I. 시대의 등불(21-38)
요셉과 마리아는 태어난 아기가 할례 할 팔 일이 되자 그 이름을 ‘세상의 구주’라는 뜻의 예수라고 하였습니다. 아기 이름을 이렇게 거창하게 부르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수태하기 전에 천사가 일러준 대로 순종했습니다. 그들은 모세의 법대로 결례의 날이 차자 아기를 데리고 예루살렘에 올라갔습니다. 그들은 주의 율법에 쓴 바 첫 태에 난 남자마다 주의 거룩한 자라 하리라 한 대로 아기를 주께 드렸습니다. 예수님은 구별되어 주의 거룩한 자로 하나님께 드려졌습니다. 첫 아들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 첫 아들을 하나님께 구별하여 드렸습니다.
그들은 율법에 말씀하신 대로 비둘기 한 쌍으로 제사를 드렸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찢어지게 가난한 가정에서 출생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가난으로 인한 어려움과 불편과 고통이 무엇인지 잘 아는 분이십니다. 그는 목수로 일하면서 손에는 굳은 살이 배기고, 머리 둘 곳 없이 사셨습니다. 예수님은 가난했기 때문에 마음은 더욱 강해질 수 있었습니다. 오래 참는 것이 몸에 배이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태어나면서부터 일생 동안 가난과 버림받음과 고난을 경험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가난한 자들의 위로자요 친구가 되십니다. 그는 본래 부요하신 분이지만 우리를 위해 가난해지셨습니다. 바울 사도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고 증거했습니다(고후 8:9).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노인이었습니다. ‘위로’라는 말은 어루만져 괴로움을 잊게 하고 마음을 즐겁게 해 주는 일입니다. 참된 위로는 하나님께로부터 오고, 하나님의 위로를 받은 사람이 슬픔에 빠진 다른 사람을 위로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었고 현재도 로마의 식민지 치하에 있습니다. 그들은 로마의 속박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이스라엘의 위로는 그들의 고통을 들어주고 죄를 씻어주는 메시야로부터 온다고 믿었습니다. 슬픔 많은 이 세상에 사는 여러분은 어디서 위로를 구하고 있습니까? 어떤 분은 드라마 ‘대장금’을 보면서 위로를 얻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얼마 있으면 끝납니다. 어떤 분은 딸을 통해서 위로를 받습니다. 직장에서 돌아오면 달려와서 안기고 뽀뽀를 할 때 위로가 됩니다. 그러나 딸도 크면 골칫거리가 되기 쉽습니다.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을 위로함으로 위로를 받습니다. 26절을 볼 때 참된 위로는 주의 그리스도를 만날 때 옵니다. 슬픔과 고통 가운데 계신 분들에게 우리 주님께서 위로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26절을 보십시오. “저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 그는 성령께로부터 죽기 전에 그리스도를 보리라는 지시를 받았습니다. 어느날 그는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가고 있었는데 마침 요셉과 마리아가 율법의 전례대로 행하고자 하여 아기 예수를 데려 오고 있었습니다. 그는 성령에 의해서 메시야를 알아보았습니다. 그가 아기 예수님을 가슴에 안았을 때 깊은 감격이 터져 나왔습니다.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29-32)” 그는 이제 마음 편히 죽게 되었습니다. 그 눈으로 주의 구원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께서 보내신 구원자이시며 만민 앞에 예비된 것이요 이방을 비추는 빛입니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뿐 아니라, 땅 위의 모든 백성들을 위하여 예비된 구주이십니다. 특히 하나님에 대해 무지하고 부도덕하며 죽음의 그늘 아래 살고 있었던 이방인들을 위해 참 지식과 의와 생명의 빛이 되십니다. 그 아기에 대한 시므온의 증거를 듣고 그 부모가 기이히 여겼습니다(33).
시므온은 마리아에게 아기 예수님이 장차 어떻게 될 것인가 예언했습니다. 34,35절을 보십시오. “시므온이 저희에게 축복하고 그 모친 마리아에게 일러 가로되 보라 이 아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의 패하고 흥함을 위하며 비방을 받는 표적 되기 위하여 세움을 입었고또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라 이는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려 함이니라 하더라” ‘패하고 흥함을 위하여’라는 말은 ‘넘어지고 일어섬을 위하여’라는 뜻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어떤 이들은 그를 믿어 구원을 받고 어떤 이들은 그를 믿지 않아 멸망을 당함을 의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구원과 멸망의 기준이 되십니다. 예수님은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거치는 돌이요 믿는 자들에게는 반석이 되십니다.
또한 ‘비방을 받는 표적되기 위하여’라는 말과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당하실 고난을 암시합니다.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미움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죽임을 당하셨을 때 이 예언은 그대로 성취되었습니다. 그의 십자가 곁에 있었던 모친 마리아의 마음은 칼이 찌르는 듯한 고통을 당했습니다. 부모와 자식간, 부부 사이에서도 사랑하는 사람이 고통을 당할 때 상대방도 같은 고통을 느낀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손과 발에 대못이 박히고 그 옆구리에 창이 찔릴 때 모친 마리아도 칼이 마음을 찌르는 고통을 맛보았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도 때로 칼에 맞습니다. 목자 생활은 잘하면 잘하는 대로 칼을 맞고 못하면 못하는 대로 칼을 맞습니다. 열심히 하나님의 역사를 섬기기 위해 수고했는데 이를 알아주기는커녕 비난을 들을 때 칼로 마음을 찌르듯이 아픕니다. 열심히 섬긴 사람에게 배신을 당할 때 이런 아픔을 당합니다. 이와 같이 칼 맞는 생활을 통하여 우리는 십자가의 고난을 배웁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십자가 죽음을 통해 사람들의 마음이 얼마나 악한가가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인간 죄악의 극치였습니다. 사람이 얼마나 악하면, 하나님이 보내신 저 의인을 그토록 처참히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할 수 있었겠습니까! 인간은 실로 심히 죄악됩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볼 때마다 회개의 심정을 갖게 됩니다. 또한 십자가를 볼 때마다 나를 위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예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됩니다. 시므온은 아기 예수님이 고난을 통해 구원자가 될 것을 보았습니다.
역사가 누가는 시므온 할아버지에 대해 쓰고 나서 곧 한 할머니에 대해 기록합니다. 그녀의 이름은 안나였습니다. 누가가 자매님들에 대해서 많이 기록한 것은 하나님의 역사에 있어서 자매님들의 중요성을 인정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안나는 어떤 여인이었습니까? 그녀는 아셀 지파 바누엘의 딸로서 선지자였습니다. 이 분은 출가한 후 일곱 해 동안 남편과 함께 살다가 과부 된 지 팔십사 년이 되었습니다. 결혼을 15세쯤 했었다고 가정하면 당시 106세쯤 되었을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안나는 과부로서 보살펴 줄 사람이 없는 외롭고 가련한 노인이었습니다. 그녀는 매우 외로웠고 자신의 처지를 생각할 때 눈물과 슬픔으로 세월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을 위로해 주고 보살펴 줄 사람을 찾지 않았습니다. 대신에 그녀는 슬픔의 때에 성전에 가서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 안에서 진정한 소망을 찾았습니다. 그녀는 자신에게 닥친 불행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찾고 자신의 생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그녀는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로 금식하며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기도했습니다. 그녀의 기도 생활을 통해서 사람들 안에 믿음을 심어주었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어려운 형편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여인으로서의 가장 큰 특권과 의무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녀가 헌신과 사랑을 주님께 드렸을 때 하나님께서 그녀를 그 시대에 기도의 용사요, 믿음의 어미로 귀하게 쓰셨습니다. 그녀는 아기 예수를 알아보고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예루살렘의 구속됨을 바라는 모든 사람에게 이 아기에 대하여 증거했습니다. 예수님의 재림이 가까운 이 때에 우리 가운데 기도하는 믿음의 여인들을 많이 세워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시므온과 안나는 그 시대의 등불이었습니다. 등불은 주위가 어두울수록 밝게 빛납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오시는 길을 비춘 등불과 같았습니다. 어두움 속에서 사람들은 빛을 보고 길을 찾으며 안심을 합니다. 우리는 다시 오실 예수님을 통해 만유가 회복될 날을 기다리며 이 시대에 하나의 등불이 되어야겠습니다.
II. 성전에서의 소년 예수님(39-52)
예수님의 가족은 주의 율법을 좇아 모든 일을 마치고 갈릴리로 돌아가 본동네 나사렛에 이르렀습니다. 아이가 자라며 강하여지고 지혜가 충족하며 하나님의 은혜가 그 위에 있었습니다. 아기 예수님은 정상적인 소년으로 자라났습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해마다 유월절을 당하면 예루살렘으로 갔는데 예수님이 열 두 살 되던 해 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열 두 살의 소년은 매우 아름답고 하루에 다섯 번씩 먹습니다. 한국 학생의 평균 신장치를 조사한 결과를 보면 여학생은 11세, 남학생은 13세에 급성장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1년에 10-15Cm, 체중은 4-5Kg정도 늘어납니다. 유대 사회에서 소년이 13살이 되면 회당의 정회원이 될 자격이 주어집니다. 그래서 열 두 살부터 그들은 회당의 정회원이 되는 자격을 갖추기 위해서 준비를 시킵니다. 그들은 성경 암송과 금식과 같은 의무들에 대해서 훈련을 시작합니다.
예수님께서 열 두 살 되던 해에 예루살렘에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서 올라갔습니다. 유월절은 일주일간 계속되는 축제입니다. 유월절 축제를 마치고 돌아갈 때에 소년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머무셨습니다. 그 부모는 이를 알지 못하고 동행 중에 있는 줄로 생각하고 하룻길을 갔습니다. 대개 같은 방향으로 여행을 떠나기 전에 가족과 친척들은 성전의 구석과 같은 곳에 모이기로 약속을 합니다. 그들은 아이들은 맨 앞에 세우고, 다음에 여인들, 다음에 성인 그룹을 이루고 여행을 시작합니다. 여행하는 시간은 거대한 교제의 시간이기도 합니다. 소년 소녀들은 다른 가족과 친척들 사이에서 친구를 사귀고 정신없이 뛰어 놉니다. 여인들은 자기들끼리 수다를 떨면서 남자들은 자신의 관심사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여행을 합니다. 그들이 항상 이런 식으로 여행을 했기 때문에 예수님의 부모들은 그가 동행 중에 있는 줄로 생각하고 하루를 지냈습니다. 아마 여행객들은 휴식 장소에 이르렀을 때 각 식구끼리 식사를 하기 위해 모였을 것입니다. 그때 그들은 소년 예수님이 거기에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즉시 마리아는 심히 염려가 들어왔지만 요셉은 “어 그래, 걔는 친구들이나 친척들과 함께 있을 거야 가 찾아봐요”하고 말했습니다. 그 후에 그들이 친족과 아는 자 중에서 찾되 만나지 못했습니다. 그들의 마음은 하늘이 무너지듯하였을 것입니다. 예전에 김아브라함 선교사님은 학위를 마치고 한국에 돌아와서 얼마 있다가 세살된 리틀 사라를 잃어버린 적이 있었습니다. 아이를 길거리에서 잃어버린 것을 깨달았을 때 목자님의 마음은 타들어갔습니다. 그는 딸을 찾으면서 “주님, 저의 모든 죄를 회개합니다. 그 아이가 집에만 돌아오면 저의 남은 인생을 주님께 온전히 드리겠습니다”라고 여러 번 서원을 하였다고 합니다. 아마 요셉과 마리아는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을 일일이 붙잡고 내 아이를 보지 못했느냐고 물어보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아마도 김아브라함 선교사님과 같이 서원을 하였을 것입니다. 마침내 그들이 찾으면서 예루살렘까지 돌아갔는데 사흘 후에 성전에서 만났습니다. 그런데 그가 선생들 중에 앉아서 저희에게 듣기도 하시며 묻기도 하는데 듣는 자가 다 그 지혜와 대답을 기이히 여겼습니다.
우리는 소년 예수님으로부터 영적 성장의 비밀에 대해서 몇 가지를 배울 수 있습니다.
첫째, 소년 예수님의 마음은 주의 성전에 가 있었습니다. 대개 청소년들은 밖에 나가면 게임을 하면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즐깁니다. 그들이 성전에 예배를 드리러 왔다고 해도 관심은 다른 것에 가 있습니다. 그들은 고개를 숙이고 졸거나 몸을 뒤틀거나 하면서 오래 앉아 있지를 못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마음은 청소년기의 출발점부터 성전에 가 있었습니다. 나의 마음이 어디에 있습니까? 자매입니까? 시장입니까? 성전입니까? 시84:10절에서 시편 기자는 고백합니다. “주의 궁정에서 한 날이 다른 곳에서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거함보다 내 하나님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주의 날개 아래 있는 달콤함을 아는 여 선지자 안나 는 결코 성전을 떠나지 않고 주야로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섬겼습니다. 죠세펴 목자는 하버드 대학원 시절을 보스턴에서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는 UBF 센타가 없었습니다. 가장 가까이 있는 UBF 바이블 센타가 뉴욕이었습니다. 그는 매주말마다 주일 예배에 참석하기 위해서 뉴욕으로 여행을 해야 했습니다. 편도 여섯 시간이나 걸리는 거리였습니다. 그러한 생활을 2년 반 동안 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가기 바쁜 때에 예수님의 마음은 진정한 집을 찾으면서 성전에 머무셨습니다.
둘째, 소년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열심을 내셨습니다. 예수님의 관심은 하나님의 말씀에 가 있었습니다. 나사렛에서 예수님은 몇몇 훌륭한 성경 선생을 만나셨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에서 예수님은 학자 에스라와 같은 뛰어난 성경 선생들을 많이 만날 수 있었습니다. 소년 예수님은 평소에 이해하기 어려웠던 구절들을 그들에게 묻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축제 기간에 그들은 성인들과 약속이 꽉 잡혀 있었습니다. 소년 예수님은 실망하지 않고 축제가 끝나기를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성경 선생 중 한 사람을 붙잡고 성전의 한 골방에서 일대일 성경 공부 일강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곧 소년 예수님의 엄청난 영적 열망에 성경 선생들의 영적 배터리가 고갈되어 다른 사람의 도움을 찾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도시에 있는 거의 모든 성경 선생들이 하나 둘씩 참여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식으로 성경 공부가 시작되어 예루살렘 성전에서 거대한 바이블 아카데미를 이루기까지 성경 공부 강좌가 커지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마치 국제 여름 수양회와 같았습니다. 세계 최정상에 있는 성경 학자들이 다 모여서 열띤 토론을 하였습니다. 물론 예수님은 그 수양회의 핵심 인물이었습니다. 어떤 음악 프로그램이나 쉬는 시간도 없이 이미 사흘을 지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부모는 감히 그 모임을 방해할 수 없었습니다. 성경 공부는 이스라엘에 있는 모든 성경 선생들의 스테미나가 바닥이 날 때까지 끝날 줄을 몰랐습니다.
이렇게 소년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했습니다. 이러한 열심으로 인해서 그의 소년 시절은 하나님의 지혜로 충만해졌습니다. 나중에 사단의 시험을 받을 때에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단을 넉아웃시킬 수 있었습니다. 또한 그의 말씀은 권세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충만하신 예수님은 온갖 종류의 죄인들을 효과적으로 도울 수 있기까지 자라나셨습니다. 그가 완전히 자라셨을 때 전 세계를 구원하는 사명을 온전히 성취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셋째, 소년 예수님은 겸손하셨고 배우는 자세를 가지셨습니다. 46절을 보십시오. “사흘 후에 성전에서 만난즉 그가 선생들 중에 앉으사 저희에게 듣기도 하시며 묻기도 하시니” 52절을 보면 “예수는 그 지혜와 그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 사랑스러워 가시더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지혜가 자라나셨습니다. 자라난다는 것은 성숙하게 발전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도 지혜 제로에서 시작하였지만 배움을 통하여 그 지혜가 성숙하게 자라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같은 수준에서 시작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성경을 배움으로 자라나셨습니다. 그는 지식에 굶주린 천재였습니다. 기회가 왔을 때 그는 그것을 잡았습니다. 선생들 가운데 앉아서 배우는 마음을 가지고 들으셨습니다. 그 마음에 질문이 떠오르면 만족한 만한 대답을 얻을 때까지 질문을 하셨습니다. 정말로 겸손과 배우는 자세는 영적 성장의 어머니입니다.
47절을 보십시오. “듣는 자가 다 그 지혜와 대답을 기이히 여기더라.” 이것은 소년 예수님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그 누구보다도 더욱 지혜롭고 통찰력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어린 시절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는데 열심이셨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자녀들을 어떻게 교육해야 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소년 사무엘을 이스라엘의 선지자로 세우셨습니다. 캘빈은 기독교 강요를 25세에 썼고, 스펄젼도 17살 때부터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위대한 주의 종들이 어린 시절부터 말씀을 가까이 하고 성경 암송과 다독에 능했습니다. 소년 예수님은 우리 시대 자라나는 모든 청소년들의 희망입니다.
그런데 그 부모가 소년 예수님을 보고 놀라며, 그 모친은 삼일동안 애간장을 태운 것으로 인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이야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 보라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여 너를 찾았노라” 이에 대해서 소년 예수님은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라고 되물었습니다. 마리아는 놀랐습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말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정체성이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무엇을 하면서 살아야 하는지, 왜 이 세상에 왔는지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양친은 그가 하는 말의 의미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이 모든 말을 마음에 두었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이 누구신가에 대해서 영적 눈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소년 예수님의 메시지는 그 모친이 영적으로 성장하는데 도움을 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한가지로 내려가사 나사렛에 이르러 순종하여 받드셨습니다. 그는 자신이 누구이며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았지만 하나님의 때가 되기까지 순종하며 기다리셨습니다. 그는 그 후에도 30세가 되시기까지 또 다시 침묵하셨습니다. 그의 인성에 감추인 신성의 신비는 참으로 큽니다. 그는 30년 준비해서 3년 동안 일하셨습니다. 그러나 누구보다도 큰 일을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맡기신 사명을 완수했습니다. 우리는 철저히 준비해서 큰일을 해야하겠습니다.
결론적으로 예수님은 어린 시절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도 하고 묻기도 하면서 배우셨습니다. 우리가 젊은 시절에 열심히 성경을 공부하는 가운데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배우고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정체성을 확립하기를 기도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하라고 주신 사명을 완수하는 인생을 사실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말씀 / 누가복음 2:21-52
요절 / 누가복음 2:49
예수님의 어린 시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하시니”
일반적으로 청소년기를 ‘질풍노도’의 시기라고 말합니다. 이 시기에 청소년들은 갈등하고, 방황하고, 이유없는 반항을 합니다. 그들은 심한 고독감에 빠지고 자신의 무가치성, 자신에 대한 강한 비판, 열등 의식으로 고독감에 빠집니다. 또한 청소년들은 부모의 별거나 이혼, 경제적 곤란, 부모의 잦은 다툼, 대화부족, 부모의 이해 부족 등으로 심리적 소외감을 느낍니다. 그리고 사회에 대한 불만과 교회 제도 등 비판에 민감합니다. 오늘날 우리의 청소년들은 지나친 입시 경쟁으로 인한 정신적 억압과 학업 부진에 따른 정서적 불안 등으로 심한 갈등을 겪고 있는 실정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아기에서 청소년으로 자라나셨습니다. 그는 신체와 정신, 영적인 면에서 우리와 똑같은 과정을 거쳐서 성장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청소년기를 어떻게 지내셨는가 생각해 보는 가운데 자라나는 세대들을 어떻게 양육해야 하는지 배우기를 기도합니다.
I. 시대의 등불(21-38)
요셉과 마리아는 태어난 아기가 할례 할 팔 일이 되자 그 이름을 ‘세상의 구주’라는 뜻의 예수라고 하였습니다. 아기 이름을 이렇게 거창하게 부르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수태하기 전에 천사가 일러준 대로 순종했습니다. 그들은 모세의 법대로 결례의 날이 차자 아기를 데리고 예루살렘에 올라갔습니다. 그들은 주의 율법에 쓴 바 첫 태에 난 남자마다 주의 거룩한 자라 하리라 한 대로 아기를 주께 드렸습니다. 예수님은 구별되어 주의 거룩한 자로 하나님께 드려졌습니다. 첫 아들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 첫 아들을 하나님께 구별하여 드렸습니다.
그들은 율법에 말씀하신 대로 비둘기 한 쌍으로 제사를 드렸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찢어지게 가난한 가정에서 출생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가난으로 인한 어려움과 불편과 고통이 무엇인지 잘 아는 분이십니다. 그는 목수로 일하면서 손에는 굳은 살이 배기고, 머리 둘 곳 없이 사셨습니다. 예수님은 가난했기 때문에 마음은 더욱 강해질 수 있었습니다. 오래 참는 것이 몸에 배이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태어나면서부터 일생 동안 가난과 버림받음과 고난을 경험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가난한 자들의 위로자요 친구가 되십니다. 그는 본래 부요하신 분이지만 우리를 위해 가난해지셨습니다. 바울 사도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고 증거했습니다(고후 8:9).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노인이었습니다. ‘위로’라는 말은 어루만져 괴로움을 잊게 하고 마음을 즐겁게 해 주는 일입니다. 참된 위로는 하나님께로부터 오고, 하나님의 위로를 받은 사람이 슬픔에 빠진 다른 사람을 위로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었고 현재도 로마의 식민지 치하에 있습니다. 그들은 로마의 속박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이스라엘의 위로는 그들의 고통을 들어주고 죄를 씻어주는 메시야로부터 온다고 믿었습니다. 슬픔 많은 이 세상에 사는 여러분은 어디서 위로를 구하고 있습니까? 어떤 분은 드라마 ‘대장금’을 보면서 위로를 얻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얼마 있으면 끝납니다. 어떤 분은 딸을 통해서 위로를 받습니다. 직장에서 돌아오면 달려와서 안기고 뽀뽀를 할 때 위로가 됩니다. 그러나 딸도 크면 골칫거리가 되기 쉽습니다.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을 위로함으로 위로를 받습니다. 26절을 볼 때 참된 위로는 주의 그리스도를 만날 때 옵니다. 슬픔과 고통 가운데 계신 분들에게 우리 주님께서 위로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26절을 보십시오. “저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 그는 성령께로부터 죽기 전에 그리스도를 보리라는 지시를 받았습니다. 어느날 그는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가고 있었는데 마침 요셉과 마리아가 율법의 전례대로 행하고자 하여 아기 예수를 데려 오고 있었습니다. 그는 성령에 의해서 메시야를 알아보았습니다. 그가 아기 예수님을 가슴에 안았을 때 깊은 감격이 터져 나왔습니다.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29-32)” 그는 이제 마음 편히 죽게 되었습니다. 그 눈으로 주의 구원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께서 보내신 구원자이시며 만민 앞에 예비된 것이요 이방을 비추는 빛입니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뿐 아니라, 땅 위의 모든 백성들을 위하여 예비된 구주이십니다. 특히 하나님에 대해 무지하고 부도덕하며 죽음의 그늘 아래 살고 있었던 이방인들을 위해 참 지식과 의와 생명의 빛이 되십니다. 그 아기에 대한 시므온의 증거를 듣고 그 부모가 기이히 여겼습니다(33).
시므온은 마리아에게 아기 예수님이 장차 어떻게 될 것인가 예언했습니다. 34,35절을 보십시오. “시므온이 저희에게 축복하고 그 모친 마리아에게 일러 가로되 보라 이 아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의 패하고 흥함을 위하며 비방을 받는 표적 되기 위하여 세움을 입었고또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라 이는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려 함이니라 하더라” ‘패하고 흥함을 위하여’라는 말은 ‘넘어지고 일어섬을 위하여’라는 뜻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어떤 이들은 그를 믿어 구원을 받고 어떤 이들은 그를 믿지 않아 멸망을 당함을 의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구원과 멸망의 기준이 되십니다. 예수님은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거치는 돌이요 믿는 자들에게는 반석이 되십니다.
또한 ‘비방을 받는 표적되기 위하여’라는 말과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당하실 고난을 암시합니다.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미움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죽임을 당하셨을 때 이 예언은 그대로 성취되었습니다. 그의 십자가 곁에 있었던 모친 마리아의 마음은 칼이 찌르는 듯한 고통을 당했습니다. 부모와 자식간, 부부 사이에서도 사랑하는 사람이 고통을 당할 때 상대방도 같은 고통을 느낀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손과 발에 대못이 박히고 그 옆구리에 창이 찔릴 때 모친 마리아도 칼이 마음을 찌르는 고통을 맛보았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도 때로 칼에 맞습니다. 목자 생활은 잘하면 잘하는 대로 칼을 맞고 못하면 못하는 대로 칼을 맞습니다. 열심히 하나님의 역사를 섬기기 위해 수고했는데 이를 알아주기는커녕 비난을 들을 때 칼로 마음을 찌르듯이 아픕니다. 열심히 섬긴 사람에게 배신을 당할 때 이런 아픔을 당합니다. 이와 같이 칼 맞는 생활을 통하여 우리는 십자가의 고난을 배웁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십자가 죽음을 통해 사람들의 마음이 얼마나 악한가가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인간 죄악의 극치였습니다. 사람이 얼마나 악하면, 하나님이 보내신 저 의인을 그토록 처참히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할 수 있었겠습니까! 인간은 실로 심히 죄악됩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볼 때마다 회개의 심정을 갖게 됩니다. 또한 십자가를 볼 때마다 나를 위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예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됩니다. 시므온은 아기 예수님이 고난을 통해 구원자가 될 것을 보았습니다.
역사가 누가는 시므온 할아버지에 대해 쓰고 나서 곧 한 할머니에 대해 기록합니다. 그녀의 이름은 안나였습니다. 누가가 자매님들에 대해서 많이 기록한 것은 하나님의 역사에 있어서 자매님들의 중요성을 인정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안나는 어떤 여인이었습니까? 그녀는 아셀 지파 바누엘의 딸로서 선지자였습니다. 이 분은 출가한 후 일곱 해 동안 남편과 함께 살다가 과부 된 지 팔십사 년이 되었습니다. 결혼을 15세쯤 했었다고 가정하면 당시 106세쯤 되었을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안나는 과부로서 보살펴 줄 사람이 없는 외롭고 가련한 노인이었습니다. 그녀는 매우 외로웠고 자신의 처지를 생각할 때 눈물과 슬픔으로 세월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을 위로해 주고 보살펴 줄 사람을 찾지 않았습니다. 대신에 그녀는 슬픔의 때에 성전에 가서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 안에서 진정한 소망을 찾았습니다. 그녀는 자신에게 닥친 불행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찾고 자신의 생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그녀는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로 금식하며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기도했습니다. 그녀의 기도 생활을 통해서 사람들 안에 믿음을 심어주었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어려운 형편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여인으로서의 가장 큰 특권과 의무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녀가 헌신과 사랑을 주님께 드렸을 때 하나님께서 그녀를 그 시대에 기도의 용사요, 믿음의 어미로 귀하게 쓰셨습니다. 그녀는 아기 예수를 알아보고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예루살렘의 구속됨을 바라는 모든 사람에게 이 아기에 대하여 증거했습니다. 예수님의 재림이 가까운 이 때에 우리 가운데 기도하는 믿음의 여인들을 많이 세워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시므온과 안나는 그 시대의 등불이었습니다. 등불은 주위가 어두울수록 밝게 빛납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오시는 길을 비춘 등불과 같았습니다. 어두움 속에서 사람들은 빛을 보고 길을 찾으며 안심을 합니다. 우리는 다시 오실 예수님을 통해 만유가 회복될 날을 기다리며 이 시대에 하나의 등불이 되어야겠습니다.
II. 성전에서의 소년 예수님(39-52)
예수님의 가족은 주의 율법을 좇아 모든 일을 마치고 갈릴리로 돌아가 본동네 나사렛에 이르렀습니다. 아이가 자라며 강하여지고 지혜가 충족하며 하나님의 은혜가 그 위에 있었습니다. 아기 예수님은 정상적인 소년으로 자라났습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해마다 유월절을 당하면 예루살렘으로 갔는데 예수님이 열 두 살 되던 해 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열 두 살의 소년은 매우 아름답고 하루에 다섯 번씩 먹습니다. 한국 학생의 평균 신장치를 조사한 결과를 보면 여학생은 11세, 남학생은 13세에 급성장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1년에 10-15Cm, 체중은 4-5Kg정도 늘어납니다. 유대 사회에서 소년이 13살이 되면 회당의 정회원이 될 자격이 주어집니다. 그래서 열 두 살부터 그들은 회당의 정회원이 되는 자격을 갖추기 위해서 준비를 시킵니다. 그들은 성경 암송과 금식과 같은 의무들에 대해서 훈련을 시작합니다.
예수님께서 열 두 살 되던 해에 예루살렘에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서 올라갔습니다. 유월절은 일주일간 계속되는 축제입니다. 유월절 축제를 마치고 돌아갈 때에 소년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머무셨습니다. 그 부모는 이를 알지 못하고 동행 중에 있는 줄로 생각하고 하룻길을 갔습니다. 대개 같은 방향으로 여행을 떠나기 전에 가족과 친척들은 성전의 구석과 같은 곳에 모이기로 약속을 합니다. 그들은 아이들은 맨 앞에 세우고, 다음에 여인들, 다음에 성인 그룹을 이루고 여행을 시작합니다. 여행하는 시간은 거대한 교제의 시간이기도 합니다. 소년 소녀들은 다른 가족과 친척들 사이에서 친구를 사귀고 정신없이 뛰어 놉니다. 여인들은 자기들끼리 수다를 떨면서 남자들은 자신의 관심사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여행을 합니다. 그들이 항상 이런 식으로 여행을 했기 때문에 예수님의 부모들은 그가 동행 중에 있는 줄로 생각하고 하루를 지냈습니다. 아마 여행객들은 휴식 장소에 이르렀을 때 각 식구끼리 식사를 하기 위해 모였을 것입니다. 그때 그들은 소년 예수님이 거기에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즉시 마리아는 심히 염려가 들어왔지만 요셉은 “어 그래, 걔는 친구들이나 친척들과 함께 있을 거야 가 찾아봐요”하고 말했습니다. 그 후에 그들이 친족과 아는 자 중에서 찾되 만나지 못했습니다. 그들의 마음은 하늘이 무너지듯하였을 것입니다. 예전에 김아브라함 선교사님은 학위를 마치고 한국에 돌아와서 얼마 있다가 세살된 리틀 사라를 잃어버린 적이 있었습니다. 아이를 길거리에서 잃어버린 것을 깨달았을 때 목자님의 마음은 타들어갔습니다. 그는 딸을 찾으면서 “주님, 저의 모든 죄를 회개합니다. 그 아이가 집에만 돌아오면 저의 남은 인생을 주님께 온전히 드리겠습니다”라고 여러 번 서원을 하였다고 합니다. 아마 요셉과 마리아는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을 일일이 붙잡고 내 아이를 보지 못했느냐고 물어보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아마도 김아브라함 선교사님과 같이 서원을 하였을 것입니다. 마침내 그들이 찾으면서 예루살렘까지 돌아갔는데 사흘 후에 성전에서 만났습니다. 그런데 그가 선생들 중에 앉아서 저희에게 듣기도 하시며 묻기도 하는데 듣는 자가 다 그 지혜와 대답을 기이히 여겼습니다.
우리는 소년 예수님으로부터 영적 성장의 비밀에 대해서 몇 가지를 배울 수 있습니다.
첫째, 소년 예수님의 마음은 주의 성전에 가 있었습니다. 대개 청소년들은 밖에 나가면 게임을 하면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즐깁니다. 그들이 성전에 예배를 드리러 왔다고 해도 관심은 다른 것에 가 있습니다. 그들은 고개를 숙이고 졸거나 몸을 뒤틀거나 하면서 오래 앉아 있지를 못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마음은 청소년기의 출발점부터 성전에 가 있었습니다. 나의 마음이 어디에 있습니까? 자매입니까? 시장입니까? 성전입니까? 시84:10절에서 시편 기자는 고백합니다. “주의 궁정에서 한 날이 다른 곳에서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거함보다 내 하나님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주의 날개 아래 있는 달콤함을 아는 여 선지자 안나 는 결코 성전을 떠나지 않고 주야로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섬겼습니다. 죠세펴 목자는 하버드 대학원 시절을 보스턴에서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는 UBF 센타가 없었습니다. 가장 가까이 있는 UBF 바이블 센타가 뉴욕이었습니다. 그는 매주말마다 주일 예배에 참석하기 위해서 뉴욕으로 여행을 해야 했습니다. 편도 여섯 시간이나 걸리는 거리였습니다. 그러한 생활을 2년 반 동안 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가기 바쁜 때에 예수님의 마음은 진정한 집을 찾으면서 성전에 머무셨습니다.
둘째, 소년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열심을 내셨습니다. 예수님의 관심은 하나님의 말씀에 가 있었습니다. 나사렛에서 예수님은 몇몇 훌륭한 성경 선생을 만나셨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에서 예수님은 학자 에스라와 같은 뛰어난 성경 선생들을 많이 만날 수 있었습니다. 소년 예수님은 평소에 이해하기 어려웠던 구절들을 그들에게 묻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축제 기간에 그들은 성인들과 약속이 꽉 잡혀 있었습니다. 소년 예수님은 실망하지 않고 축제가 끝나기를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성경 선생 중 한 사람을 붙잡고 성전의 한 골방에서 일대일 성경 공부 일강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곧 소년 예수님의 엄청난 영적 열망에 성경 선생들의 영적 배터리가 고갈되어 다른 사람의 도움을 찾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도시에 있는 거의 모든 성경 선생들이 하나 둘씩 참여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식으로 성경 공부가 시작되어 예루살렘 성전에서 거대한 바이블 아카데미를 이루기까지 성경 공부 강좌가 커지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마치 국제 여름 수양회와 같았습니다. 세계 최정상에 있는 성경 학자들이 다 모여서 열띤 토론을 하였습니다. 물론 예수님은 그 수양회의 핵심 인물이었습니다. 어떤 음악 프로그램이나 쉬는 시간도 없이 이미 사흘을 지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부모는 감히 그 모임을 방해할 수 없었습니다. 성경 공부는 이스라엘에 있는 모든 성경 선생들의 스테미나가 바닥이 날 때까지 끝날 줄을 몰랐습니다.
이렇게 소년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했습니다. 이러한 열심으로 인해서 그의 소년 시절은 하나님의 지혜로 충만해졌습니다. 나중에 사단의 시험을 받을 때에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단을 넉아웃시킬 수 있었습니다. 또한 그의 말씀은 권세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충만하신 예수님은 온갖 종류의 죄인들을 효과적으로 도울 수 있기까지 자라나셨습니다. 그가 완전히 자라셨을 때 전 세계를 구원하는 사명을 온전히 성취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셋째, 소년 예수님은 겸손하셨고 배우는 자세를 가지셨습니다. 46절을 보십시오. “사흘 후에 성전에서 만난즉 그가 선생들 중에 앉으사 저희에게 듣기도 하시며 묻기도 하시니” 52절을 보면 “예수는 그 지혜와 그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 사랑스러워 가시더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지혜가 자라나셨습니다. 자라난다는 것은 성숙하게 발전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도 지혜 제로에서 시작하였지만 배움을 통하여 그 지혜가 성숙하게 자라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같은 수준에서 시작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성경을 배움으로 자라나셨습니다. 그는 지식에 굶주린 천재였습니다. 기회가 왔을 때 그는 그것을 잡았습니다. 선생들 가운데 앉아서 배우는 마음을 가지고 들으셨습니다. 그 마음에 질문이 떠오르면 만족한 만한 대답을 얻을 때까지 질문을 하셨습니다. 정말로 겸손과 배우는 자세는 영적 성장의 어머니입니다.
47절을 보십시오. “듣는 자가 다 그 지혜와 대답을 기이히 여기더라.” 이것은 소년 예수님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그 누구보다도 더욱 지혜롭고 통찰력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어린 시절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는데 열심이셨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자녀들을 어떻게 교육해야 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소년 사무엘을 이스라엘의 선지자로 세우셨습니다. 캘빈은 기독교 강요를 25세에 썼고, 스펄젼도 17살 때부터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위대한 주의 종들이 어린 시절부터 말씀을 가까이 하고 성경 암송과 다독에 능했습니다. 소년 예수님은 우리 시대 자라나는 모든 청소년들의 희망입니다.
그런데 그 부모가 소년 예수님을 보고 놀라며, 그 모친은 삼일동안 애간장을 태운 것으로 인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이야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 보라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여 너를 찾았노라” 이에 대해서 소년 예수님은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라고 되물었습니다. 마리아는 놀랐습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말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정체성이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무엇을 하면서 살아야 하는지, 왜 이 세상에 왔는지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양친은 그가 하는 말의 의미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이 모든 말을 마음에 두었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이 누구신가에 대해서 영적 눈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소년 예수님의 메시지는 그 모친이 영적으로 성장하는데 도움을 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한가지로 내려가사 나사렛에 이르러 순종하여 받드셨습니다. 그는 자신이 누구이며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았지만 하나님의 때가 되기까지 순종하며 기다리셨습니다. 그는 그 후에도 30세가 되시기까지 또 다시 침묵하셨습니다. 그의 인성에 감추인 신성의 신비는 참으로 큽니다. 그는 30년 준비해서 3년 동안 일하셨습니다. 그러나 누구보다도 큰 일을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맡기신 사명을 완수했습니다. 우리는 철저히 준비해서 큰일을 해야하겠습니다.
결론적으로 예수님은 어린 시절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도 하고 묻기도 하면서 배우셨습니다. 우리가 젊은 시절에 열심히 성경을 공부하는 가운데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배우고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정체성을 확립하기를 기도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하라고 주신 사명을 완수하는 인생을 사실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첨부파일
-
data/message1/2004lk5.hwp (0byte)
70회 다운로드 | DATE : 2004-12-12 22:37:08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