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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강 04성탄1(사7:1-14)/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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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엘리야
댓글 0건 조회 3,375회 작성일 04-12-05 0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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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4년 성탄 말씀 1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 말씀/ 이사야 7:1-14☆ 요절/ 이사야 7:14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로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2004년도 성탄 시즌이 다가왔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셔서 은혜 가운데 한 해를 마무리할 수 있게 하심에 감사를 드립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우시되 함께 하시면서 단계적으로 도우십니다. 또한 실제적으로 도우십니다. 오늘은 두려움에 떨고 있는 아하스 왕을 도우시는 하나님을 깊이 배우기를 기도합니다.

  유다 왕 아하스는 요담의 아들이며 그 후계자입니다(왕하 15:38,16:1,대하 27:8,9,28:27,마 1:9). 그는 20세에 12대 왕으로 즉위하여 예루살렘에서 16년(BC 735-721년)을 치리했습니다(대하28:1). 아하스는 열왕 중 가장 악한 왕이었습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앞에서 쫓아내신 이방인의 가증한 일을 본받았는데, 그 중에서도 암몬 신인, 몸은 사람인데 머리는 소인 몰록신에게 자기의 아들을 화제로 드리는 등 온 나라의 산과 푸른 나무를 우상의 제단으로 삼았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에서는 정쟁이 빈번하여 친애굽파, 친앗수르파, 반앗수르파의 세 파로 갈라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왕은 반앗수르파로서, 아람 왕 르신과 결탁하여 반앗수르 세력을 구축하고 유다를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려고 하였습니다(6). 이때 아하스는 성전의 금은으로 예물을 삼아 앗수르 왕 디글랏 빌레셀에게 구원병을 요청했습니다. 아하스가 구원을 하나님께 구하지 않고 이방 왕에게 구한 것은 배신 행위입니다.

  1절을 보십시오. “웃시야의 손자요 요담의 아들인 유다 왕 아하스 때에 아람 왕 르신과 르말리야의 아들 이스라엘 왕 베가가 올라와서 예루살렘을 쳤으나 능히 이기지 못하니라.” 하나님께서는 그가 다윗의 후손이므로 다윗에 대한 약속과 앞으로 일어날 다윗의 계통을 보호하시려는 의미에서 그를 이스라엘-아람 동맹군으로부터 보호해 주셨습니다. 그렇지만 이스라엘 아람 동맹군의 2차 공격을 받고 왕과 백성들의 마음이 어떠했습니까? 그들의 마음은 삼림이 바람에 흔들림같이 흔들렸습니다(2).그들은 국가의 존망이 위태롭고, 자신들의 생사가 바람 앞의 등불과 같았기 때문에 극도로 공포심에 사로 잡혀 당황하고 있었습니다.

  지금 우리 나라도 전쟁의 칼날이 민족의 목을 겨누는 절박한 시점에 직면해 있습니다. 한 순간에 조국이 잿더미로 주저앉을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에 빠져 있습니다. 지난 세기의 화두가 ‘민주화’와 ‘통일’이었다면, 이제는 ‘평화’입니다. 현재 휴전선에는 단거리 스커드 미사일 400기와 대포들이 배치되어 있습니다. 만약 북한이 탄두에 생화학탄이나 생물학탄, 핵을 탑재해서 쏜다면 하루 만에 서울 시민 150만명이 죽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 나라 사람들은 무엇을 믿고 있는지 안보 불감증에 걸린 사람들과 같습니다. 지금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지역이 한반도입니다. 우리를 두렵게 하는 요인들은 안보 문제 외에도 경제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내년 상반기를 기점으로 내수를 진작시켜서 치고 올라가느냐 아니면 중남미와 같이 주저앉느냐의 기로에 서게 된다고 합니다. 장래가 불투명하고 경제가 어려워지면서 많은 사람들 안에 두려움이 엄습해 있습니다. 더구나 세상은 죄악이 점점 깊어감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지 아니할까 두렵습니다.

  이렇게 두려움이 엄습한 때에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아하스 왕을 돕기 위해서 이사야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와 네 아들 스알야숩은 윗못 수도 끝 세탁자의 밭 큰 길에 나가서 아하스를 만나  그에게 이르기를 너는 삼가며 종용하라 아람 왕 르신과 르말리야의 아들이 심히 노할지라도 연기나는 두 부지깽이 그루터기에 불과하니 두려워 말며 낙심치 말라(3,4)”고 하셨습니다. 아람-이스라엘 동맹군이 내습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이사야 선지자에게 당시 5, 6세의 소년이었던 그의 아들 스알야숩을 데리고 아하스를 만나러 가라고 하셨습니다. 스알야숩의 뜻은 `남은 자, 돌아오리라'입니다. 이 때가 BC 734년입니다. 왕을 만나러 가는데 왜 아들을 데리고 가라고 하셨을까요? 그 이유는, 왕이 선지자 이사야와 함께 온 아들의 이름을 물을 때에 하나님의 메시지를 계시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즉 그 소년의 이름을 따라서 아하스 왕에게 하나님께로 돌아오라는 메시지를 주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때 아하스는 전시용(戰時用) 물을 염려하여 저수지를 시찰하러 나갔었습니다. 이사야는 전쟁에 공포심을 가진 아하스 왕에게 적의 모략이 성공치 못함을 예시하므로 저를 격려하였습니다. 5-9절을 보십시오. “시리아 왕과 이스라엘 왕이 너를 해할 음모를 꾸미고 있다. 그들은 유다를 침략하고 백성들을 두렵게 하여 자기들 편으로 끌어들인 다음 다브엘의 아들을 왕위에 앉힐 계획을 세우고 있다. 그러나 결코 이 일이 그들의 계획대로 되지 않을 것이다. 시리아의 수도는 언제나 다마스커스에 국한될 뿐, 르신이 그 영토를 더 이상 넓히지 못할 것이며 이스라엘도 65년 안에 패망할 것이다. 이스라엘의 수도는 언제나 사마리아에 국한되고 베가의 왕권도 더 이상 신장되지 않을 것이다. 만일 네가 내 말을 믿지 않으면 너도 오래 가지 못할 것이다(현대인의 성경).” 

  지금 당장은 아람과 이스라엘 동맹군이 무섭게 보여도 하나님께서 보실 때는 연기를 내면서 꺼져가는 두 부지깽이에 불과하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65년 내에 망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실제로 아람은 2년 뒤에 망했고, 이스라엘은 12년 뒤인 722년 앗수르에게 망했습니다. 그리고 65년 뒤에는 앗수르의 바니팔이 반란파들을 진압하고 그들을 앗수르로 이주를 시켰습니다. 그리고 사마리아에는 앗수르인들이 들어와서 살므로 사마리아는 잡족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을 때 두려움을 이길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야이로를 도우실 때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고 하셨습니다. 믿음을 가질 때 굳게 설 수 있습니다. 위기의 때에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돌아오면 소망이 있습니다.
  우리도 안보 문제에 있어서 미국과의 동맹을 지키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그런데 신자들이 회개하고 삶은 하나님께로 돌이키지 않으면서 강대국을 의지하기만 하면 안 됩니다. 그것은 유다가 앗수르를 의지하는 것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의 방패가 되십니다. 하나님은 약속을 믿지 않는 아하스에게 무엇을 구해보라고 하셨습니까? 10,11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또 아하스에게 일러 가라사대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 한 징조를 구하되 깊은 데서든지 높은 데서든지 구하라.” 하나님께서는 아하스 왕이 믿음을 갖도록 돕기 위해서 깊은 데서든지 높은 데서든지 징조를 구하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깊은 데도, 높은 데도 미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가 비록 우상을 숭배하여 하나님을 슬프시게 했지만 기회를 주고 있는 것입니다. 특히 다윗에게 주신 언약 때문에 그를 긍휼히 여기셨습니다.

  그런데 아하스의 반응이 무엇입니까? 12절을 보십시오. “아하스가 가로되 나는 구하지 아니하겠나이다 나는 여호와를 시험치 아니하겠나이다 한지라.” 그는 믿음도 없으면서 믿음이 있는 것처럼 말합니다. 그는 하나님과 관계성을 맺지 않고자 합니다. 그는 헛된 우상을 섬기고 있으면서 또 자기를 돕기보다 해하게 될 앗수르를 의지하고자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아하스의 불신앙이 너무도 심하였기 때문에 그에게 믿음이 생기도록 징조를 구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신앙이 없으면서 신앙이 있는 듯이, 경건한 모양을 내고 있습니다. 그는 모처럼 하나님께서 징조를 구하라고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거기에 응하지 않고 자기가 오히려 하나님보다 지혜 있는 듯이 처신하고 있습니다. 그는 징조를 구하지 않는 이유를, 징조를 구하는 것은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시험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의심한다는 말입니다. 곧 하나님이 계신가 안계신가 하면서 징조를 구하는 것입니다. 아하스의 이런 태도는 참으로 가증스럽습니다. 그는 벌써 하나님을 믿지 않고 앗수르를 믿는데 있어서 굳어졌습니다. 그가 그리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가장 잘 믿는 자인 듯이 징조도 구하지 않겠다고 경건한 모양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의 이러한 태도는 이사야의 마음을 아프게 했습니다. 또한 하나님을 괴로우시게 했습니다. 하나님은 믿음을 기뻐하시지만 불신과 불순종으로 인해서는 고통을 당하십니다. 사실 아하스는 심판을 받아 마땅한 사람인데 다윗의 은총 때문에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하나님의 마음을 고통스럽게 했습니다.

  하나님은 아하스에게 친히 무슨 징조를 주고자 하십니까? 14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로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는 것은 인간이 전혀 생각지 못했던 것입니다. 학자들은 히스기야가 약속의 징조, 임마누엘의 성취 가능성이 매우 짙다고 주장합니다. 아하스는 “만일 너희가 믿지 아니하면 정녕히 굳게 서지 못하리라(7:9)”는 말씀을 이행하지 않았는데 히스기야는 반대로 앗수르의 침략 소식을 전해 듣자마자 여호와의 성전으로 들어가며(37:1), 이사야에게 메시지를 보냅니다(37:2-4). 그리고 그는 이사야의 응답을 받은 후 성전으로 되돌아갑니다. 앗수르 왕의 새로운 위협을 앞두고 그가 보낸 글을 여호와 앞에 펴 놓고 기도합니다(37:16-20). 그는 자신의 죽음에 대해 여호와와 이야기하며(38:1-6), 병고침을 받은 후에 여호와를 향한 감사의 찬양을 기록합니다(38:10-20). 히스기야는 적극적으로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께서는 그와 함께 하셨습니다. 사38:8절은 말씀합니다. “보라 아하스의 일영표에 나아갔던 해 그림자를 뒤로 십 도를 물러가게 하리라 하셨다 하라 하시더니 이에 일영표에 나아갔던 해의 그림자가 십 도를 물러가니라.” 히스기야에게 주어진 아하스의 일영표는 여호와의 징조를 거절한 아하스와 여호와의 징조를 받아들일 뿐 아니라 그 징조를 요구하는 히스기야를 서로 대조시켜 주는 기능을 하고 있습니다. 히스기야의 출현은 임마누엘에 대한 예언을 성취합니다. 그러나 아하스에게 준 예언과 마찬가지로 히스기야도 본 예언의 말씀을 완전히 성취하지 못했습니다.

  그 예언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으로 온전히 성취가 되었습니다. 마태는 예수님의 탄생을 기록하면서 이사야 7:14절의 예언이 성취되었다고 기록합니다. 마 1:23절은 말씀합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예수님은 동정녀 마리아의 몸을 통해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신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육신을 입으심으로 우리의 죄와 슬픔과 질고를 그 몸에 짊어지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모든 연약함과 고통을 그 몸으로 체험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대속할 자격이 있는 대제사장이십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진노케 하는 그 백성들에게 왜 이런 징조를  주시는 것일까요? 이는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갖도록 도우시는 절대적인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인간이 연약해서 할 수 없는 일을 하나님께서 친히 하십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사람에 의해서 좌우되지 아니하십니다. 그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는 친히 자신이 뜻하신 바를 이루십니다. 또한 하나님은 신실하십니다.

  예수님은 죄없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창3:15절에 예언된 여자의 후손이십니다. 그는 처녀가 잉태하여 낳은 아들이십니다. 그는 육신을 입고 우리와 함께 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슈바이쳐는 소외된 아프리카 흑인들과 함께 하기 위해 그가 누리던 경제적 자유, 학문의 자유, 예술의 자유를 포기했습니다. 인도의 데레사 수녀는 일생을 병들어 죽어가는 인도 영혼을 돌보기 위해서 그들의 가난과 함께 했습니다. 한국 순례자가 그에게 세탁기를 사주겠다고 하자 세탁기는 그곳에서는 사치품에 속하기 때문에 자기는 손으로 빨래를 하겠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죄인들과 함께 하시기 위해 하나님으로서의 모든 영광과 특권도 포기하시고 비천한 인간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으로 오시되 군림하는 군주로 오지 않으시고 섬기는 종으로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비천한 말구유에서 탄생하시고 머리 둘 곳도 없는 가난한 삶을 사셨습니다. 결국은 십자가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죄로 병든 우리를 치료하시기 위해 함께 하셨습니다. 인간은 죄로 말미암아 내면이 병들고 비뚤어졌습니다. 죄 때문에 중풍병자와 같이 무기력해지고, 세리 같이 이기적이 되고, 사마리아 여인과 같이 정욕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인간은 죄로 말미암아 상한 갈대와 같고 꺼져 가는 심지와 같이 되었습니다. 자기 힘으로는 이러한 죄의 세력에서 헤어나올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죄인들과 동고동락하시면서 죄로 병든 내면을 치료해 주셨습니다. 죄인들을 오래 참으시고 교만한 인간들을 기도와 사랑과 말씀으로 섬겨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섬김과 사랑으로 병든 죄인들이 살아났습니다. 쓸모 없던 자가 위대한 하나님의 종이 되었습니다. 음란한 막달라 마리아가 희생적인 믿음의 여인이 되었습니다. 이기적이던 자가 사랑이 풍성한 사랑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사도 마태입니다.

  그는 험한 세상을 살아 나가기 위해서 악명 높은 세리가 되어 악착같이 세금을 모으느라 많은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었고 돈도 많이 벌었습니다. 그러나 이로써 사람들로부터 미움과 멸시와 소외를 당했습니다. 그는 돈으로 행복을 살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오히려 허무와 불안과 고독과 두려움으로 밤마다 악몽을 꾸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부담스러운 그를 제자로 삼으셔서 3년 동안 그와 함께 하시며 그를 치료하셨습니다. 그의 병든 내면을 치료하사 이기적이고 고독하던 세리 마태를 성 마태가 되게 하셨습니다. 이는 오직 함께 하신 주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은 지난 한 해 동안 우리와 함께 해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방패가 되사 그 선하심으로 늘 함께 하시며 지켜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때를 따라 진리의 말씀을 공급해 주셔서 우리의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진리의 길로 인도하셨습니다. 연초에 삼림이라도 개척하라는 말씀으로부터 시작해서 스가랴서, 누가복음, 사도행전 말씀으로 함께 하셨습니다. 또  하나님은 우리가 슬픔을 당할 때도 함께 하시고 핍박을 당할 때도 함께 하셨습니다. 우리가 병들었을 때도 함께 하시고 우리가 죄의 소욕을 이기지 못할 때나 게임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할 때도 함께 하셨습니다. 물질 걱정으로 힘들어 할 때도 함께 하셨습니다. 앞날에 대한 염려로 이불을 뒤집어쓰고 있을 때도 함께 하셨습니다.

  우리는 함께 하는 사람을 닮아갑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닮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세상에서 구별해낸 백성입니다. 지금 복음이 필요한 곳은 세상이 아니라 교회라는 말이 있습니다. 교회 속에 세속적인 것들이 너무나 많이 들어와서 복음과 세속적인 것들이 혼합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다시 생각해보아야 할 형편에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의 소금이라는 사실을 마치 소금이 부패를 방지하듯이 세상의 도덕적 부패를 방지하는 역할을 하라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 말은 세상과의 차별성을 보이라는 요구로 해석하는 것이 더 마땅합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선을 행하는 것과 세상을 선하게 하는 것, 이 양자를 혼동합니다. 우리는 결코 세상을 선하게 만들지 못합니다. 하지만 신자는 선이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본보기는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맛을 잃어버린 교회를 회복함으로써 세상을 구속하는 자가 됩니다. 지금 상태로 우리가 세상을 개혁할 수 있다는 주장은 거짓말이거나 지나치게 순진한 발상입니다. 교회가 세상을 개혁할 수 있다는 말은 이제 고상한 문화적 거짓말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개선할 수 있다거나, 인간을 행복하게는 못해주어도 최소한 좀 더 좋게 만들 수 있다는 믿음을 버려야 합니다. 우리가 먼저 하나님의 백성다움을 회복하는 것이 시급한 과제입니다. 우리가 먼저 예수님의 성품을 훈련하는 공동체가 되고, 십자가를 실천하는 교회가 되면 사람들이 찾아오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을 보게 될 때, 우리 가운데 죄인들이 거룩한 삶을 살고 병든 자가 건강해지고 연약한 자들이 살아나고 이기적이 사람이 사랑이 풍성한 사람으로 변화되는 것을 보는 것 자체가 우렁찬 증언을 하게 됩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하나님은 없고 돈만 있는 '세리 마태'가 행복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돈은 없지만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성 마태'가 행복한 자입니다. 왜냐하면 성 마태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그의 생명책에 기록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입니다. 우리와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 예수님의 은혜가 충만한 성탄이 되시길 기도합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기억하고 마음을 하나님께로 돌이키십시오. 주님께서 여러분의 마음에 평강을 선물로 주시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실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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