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ntitled Document
주일말씀 성경별메시지 심포지엄 성경 검색
문제지 성경별문제지

특강 05부활절 특강(고전15:1-11)/ 다시 살아나신 그리스도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이엘리야
댓글 0건 조회 3,308회 작성일 05-03-27 08:23

본문

2005년 부활절 특강                                                                151,155
말씀/ 고린도 전서 15:1-11
요절/ 고린도 전서 15:3,4

다시 살아나신 그리스도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부활하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부활의 승리와 능력이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그는 유일한 분이 되었습니다. 그는 사망을 정복하시고 완전히 새로운 차원의 존재로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그의 신성과 일치합니다. 그는 자신의 고난을 예언할 때 반드시 부활할 것을 이야기했는데 그대로 되었습니다. 바울은 로마서 서두에서 예수님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다(롬1:4)”라고 썼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많은 증거들이 있습니다. 토마스 아놀드라는 학자는 부활을 “역사상 가장 잘 증명된 사실”이라고 말했습니다. 부활에 대한 증거로 그의 시체가 사라졌습니다. 그의 무덤은 지금도 비어 있습니다. 수의로 썼던 세마포가 헝클어지지 않고 “그 시체가 증발한 것처럼” 놓여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부활하신 주님이 나타나셔서 40일 동안 제자들과 수많은 사람들에게 자신을 보이셨고 대화를 나누셨으며 음식을 드시기까지 했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이후에 제자들이 변화되었습니다. 우리는 그들의 변화를 부활이외에는 달리 설명할 수 없습니다. 이 시간 부활의 증인들을 통해서 다시 살아나신 그리스도를 믿고 살아 있는 신앙생활을 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에게 전한 복음을 다시 알게 하고자 합니다. 고린도 성도들은 이미 복음을 받았고 또 그 가운데 서 있었습니다. 바울이 그들로 복음을 다시 기억나게 하고자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2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만일 나의 전한 그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이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으리라.” 그들은 교회의 분란과 문제로 인해서 믿음을 버리고 아무렇게나 해 버릴 수 있었습니다. 고린도 교회 내에는 나는 바울 파다, 나는 베드로 파다, 나는 아볼로 파다 하는 등 분파가 있었고, 우상의 제물 먹는 문제도 있었고, 교회 내의 음란 문제도 있었습니다. 또한 성령의 은사가 많이 나타나자 교만해져서 시끄러웠습니다. 이런 가운데 헬라 철학자들에 의해서 육체의 부활은 어리석은 것으로 생각하는 자들이 생김으로 복음 신앙을 버리는 자들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이런 가운데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이 받은 바 말씀을 굳게 지키도록 돕고 있습니다.

  3,4절을 보십시오.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바울은 가장 먼저 그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복음은 기쁜 소식, 복된 소식이란 뜻입니다. 무엇이 복된 소식입니까?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아갈수록 자신의 죄성에 대해서 깊이 절감하게 됩니다. 데이빗 브레이너드는 19세기 초 미국의 인디언들에게 전도한 젊은 개척 전도사였습니다. 그의 일기와 편지를 보면 그가 그리스도에게 얼마나 수준 높은 헌신을 했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는 29세의 젊은 나이로 죽을 만큼 심한 고통과 신체의 허약으로 고생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남김없이 사역에 드렸습니다. 그는 말을 타고 밀림을 헤치고 다니면서 쉴 새 없이 설교하고 가르쳤습니다. 그는 들에서 잠을 잤으며 안정된 집이나 가정 생활이 없어도 만족했습니다. 그의 일기는 자신의 “사랑하는 인디언”에 대한 사랑과 기도 그리고 자신의 구주께 드리는 찬양으로 가득했습니다. 사람들은 이 사람이야말로 삶과 일이 죄로 더럽혀진 적이 거의 없는 최고의 성도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일기를 읽어보면, 그는 거듭거듭 자신의 도덕적 “부패”를 한탄하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기도 부족과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의 부족을 한탄합니다. 그는 자신을 “불쌍한 벌레”, “무용지물”, “이루 말할 수 없이 무가치하고 비참한 존재”라고 부릅니다. 그가 자기를 책망했던 것은 병적인 양심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그저 그리스도와 가까이 살았기 때문에 자신의 죄 많음을 뼈저리게 깨닫고 있었던 것입니다.

  성경 기자들은 죄가 보편적이라고 단호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솔로몬은 성전 봉헌식 기도에서 “범죄치 아니하는 사람이 없사오니(왕상8:46)”라고 말합니다. 또 전도자는 전도서에서 “선을 행하고 죄를 범치 아니하는 의인은 세상에 아주 없느니라(전7:20)”고 말했습니다. 시편14편은 인간의 사악함을 매우 비관적으로 기술하고 있습니다. “저희는 소행이 가증하여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 살피사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다 치우쳤으며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1-3).” 만일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만일 우리가 범죄치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는 것입니다(요일1:8,10).

  우리가 십계명에 의해서 보건, 양심에 비추어 보건 죄인인 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런 죄의 결과는 무엇일까요?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우리는 죄로 인해서 죽을 뿐만 아니라 지옥에서 영원한 형벌을 받습니다. 하나님과 단절되고 사람과 분리되고 하나님의 형상이 파괴되어 버립니다. 죄로 인해서 가정이 파괴되고 사회가 병들어갑니다. 우리는 죄로 인해서 고통을 당합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고통을 줍니다. 죄는 선한 것에 미치지 못하는 내적 악함입니다. 죄는 불법입니다. 정의를 어긴 행위입니다.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치 아니하면 죄입니다(약4:17).

  우리의 이런 죄를 위해서 아무 죄 없으신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습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마1:21).” 유대인들은 매년 매월, 매일 성전에서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 제사는 짐승의 피를 흘려 속죄제, 번제를 드리는 것입니다. 짐승의 피를 흘리는 것은 생명이 피에 있기 때문이요 죄를 속하기 위해서는 피흘림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피를 흘리심으로 우리의 죄를 담당하셨습니다. 베드로전서 2:24절에서 베드로는 그가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다”고 말합니다. 죄를 담당한다는 표현은 죄의 결과 다시 말해 죄의 형벌을 담당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는 죄가 없었지만 친히 우리의 죄를 담당하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에 죄사함을 받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물과 피를 다 쏟으셨는데 그 물과 피가 우리의 어떤 죄라도 깨끗이 씻어냅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후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셨습니다. 성령께서는 우리가 죄악된 자아로부터 해방되도록 역사하십니다. 우리는 성령의 역사하심을 통해서 인간의 본성이 변화됨을 체험하게 됩니다. 자기중심적인 사람이 하나님 중심, 다른 사람 중심적인 사람으로, 자기 영광을 드러내는 것을 인생의 목적이요 낙으로 생각하며 살던 사람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고자 결단하고 투쟁하는 사람으로 변화됩니다. 육신적이고 물질적인 세상 가치관을 좇아 살던 데서 하나님을 가장 사랑하며 성경 말씀대로 살고자 하는 영적인 사람으로 변화됩니다. 교만으로 똘똘 뭉쳐 다른 사람들을 심히 부담스럽게 하고 상처주던 사람이 겸손하고 은혜로운 사람으로 변화시키는 능력이 성령의 강력한 역사로 말미암아 이루어집니다. 사도 바울은 이를 매우 극적으로 표현했습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고후5:17).” 우리는 성령의 역사하심을 통해서 새로운 마음, 새로운 본성, 새로운 출생, 새로운 피조물이 됩니다. 이 엄청난 내적 변화를 이루게 하는 것은 성령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았느니라”,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갈5:24,26).” 우리는 죄악된 본성에 대해서는 십자가에 못박았다는 말씀과 같이 강력한 저항과 단호한 거부를 해야 합니다. 반대로 내주하시는 성령께 대해서는 의지하고 복종하여 우리의 삶을 온전히 지배하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가 육체를 부인하고 성령에 굴복하는 습관을 가질수록 육체의 추한 일은 점점 사라지고 아름다운 열매가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될 것입니다.

  죄는 분리하는 경향을 지니고 있습니다. 죄는 하나님뿐만 아니라 동료 인간들에게서도 멀어지게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하나님 사이는 물론이거니와 다른 사람들의 사이에도 화목하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서로 떨어져 있는 개인들을 각각 고립된 채로 부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으로 구속하여 하나님의 소유가 되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교회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우리는 성령 안에서 하나가 되며 성령 안에서 교제합니다. 성령의 첫 열매는 사랑입니다. 성령의 본질은 바로 사랑입니다. 그래서 성령께서는 자신이 내주하는 자에게 사랑을 주십니다. 하나님의 자녀들 사이에 생겨나는 사랑의 관계는 혈육의 관계보다 깊고 아름답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가족의 혈연 관계입니다. 요일 3:14절은 진실로 우리는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 안다”고 했습니다. 죄는 분열을 일으키지만 사랑은 연합시키고, 죄는 이간시키지만 사랑은 화해시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교회 공동체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이 공동체가 불완전해도 그리스도인은 형제 자매들과 함께 어울려 서로 교제하고, 하나님께 예배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증거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본이 되셔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 각자에게 말씀하십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계3:20).”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고 구원을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그의 제자가 되어 일생 그를 배우며 섬기기를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장사 지낸 바 되었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4). 그가 다시 살아나심으로 우리의 죄를 위해서 죽으셨던 분이심이 드러났습니다. 그가 다시 살아나심으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그가 다시 살아나심으로 우리에게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대한 산 소망을 갖게 하셨습니다.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벧전1:3,4).” 예수님이 부활하심으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막힌 담이 헐리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성령께서 우리 각자에게 찾아오사 그를 영접하는 자에게 내주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말미암아 우리는 부활의 능력을 덧입고 거룩한 새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고백과 같이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빌4:13).” 부활의 생명력을 덧입은 사람은 이제 더 이상 허무하지 않습니다. 두려움 대신에 하늘로부터 오는 평화를 맛보며 살아갑니다. 부활의 생명력을 덧입은 사람은 날마다 자기의 십자가를 지면서도 능력있게 복음을 전하며 세상을 이깁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은 하나님께 헌신된 사람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성경에 예언된 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조작된 것이 아니요 갑자기 이루어진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원대한 구속의 경륜가운데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증인이 얼마나 됩니까? 5-8절을 보십시오.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태반이나 살아 있고 어떤 이는 잠들었으며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본문에는 수많은 부활의 증인들이 나와 있지만 우리는 세 명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베드로입니다. 베드로는 주님께서 고난에 대해서 이야기하면 슬그머니 화면에서 사라졌습니다. 그는 그리스도를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삶에서 예수님의 사랑과 은혜를 전혀 받지 않은 사람처럼 저주하고 맹세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그는 그 밤에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했습니다. 예수님이 죽음을 당하던 순간 그는 다른 제자들과 함께 도망을 쳤습니다. 그리고 “유대인을 두려워하여(요20:19)” 문을 닫은 채 다락방에 있었습니다. 그러던 그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예루살렘의 바로 그 집 그 다락방 밖에 있는 돌 계단 위에 서서 수많은 군중들을 향해서 담대하고 능력있게 메시지를 전하여 삼천명이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세례를 받게 했습니다. 그는 사도행전 4장에서 예수님을 정죄하여 죽인 그 공회를 논박하고 그리스도를 위해서 능욕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겨김을 기뻐하는가 하면, 후에 사형이 예상되는대도 그 전날 밤 감옥에서 태평하게 잠을 자는 것을 보게 됩니다. 바람에 날리는 모래는 다 날아가고, 그의 별명에 걸맞게 진정한 반석이 된 것입니다. 무엇이 이런 차이를 생기게 하였을까요?
  둘째로, 야고보는 예수님의 형제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요7:5절에 보면 “그 형제들이라도 예수를 믿지 아니함이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행전 1장에서 누가가 기록한 다락방에 합심 기도하기 위해서 모인 사람들의 명단에 “예수의 아우들”이라는 단어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제 야고보는 확실히 신자가 되었습니다. 그후에 그는 예루살렘 총회의 의장으로서 교회의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무엇이 그를 이렇게 변화시켰을까요? 그 답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셋째로, 사도 바울입니다. 그는 자신을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 교회를 핍박하여 예루살렘에서 다메섹까지 달려가서 신자들을 잡아다가 옥에 가두고 죽이기도 한 사람입니다. 그는 철저한 바리새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다메섹으로 가던 도중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사도행전 9:3절에서 누가는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사울이 행하여 다메섹에 가까이 가더니 홀연히 하늘로서 빛이 저를 둘러 비추는지라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 있어 가라사대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뉘시오니이까 가라사대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네가 일어나 성으로 들어가라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 그는 이후에 그리스도가 왜 고난을 받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어야 했는지, 또 그가 왜 부활하셨는지 깨닫게 되었고 삶의 방향과 목적을 찾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9,10절을 보십시오. “나는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 내가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을 받기에 감당치 못할 자로라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사도 바울은 교회를 핍박하던 데서 이제는 복음을 전하는 사도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그의 생애를 180도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그의 전 생애를 지배했고 그가 충성하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거룩하고 강렬한 감격이 그의 신앙과 충성의 비결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수많은 부활의 증인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부활의 증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역사적인 사실에 대해서 가장 확실한 증거가 됩니다. 우리는 교회의 존재로도 그의 부활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한국에 온 선교사들의 삶을 통해서 부활 신앙이 사람을 얼마나 위대하게 하는지 배울 수 있습니다. 로제타 셔우드 홀은 화상 환자를 돕기 위해서 자기의 피부를 떼어 주었습니다. 그녀의 남편과 딸이 죽었지만 조선 선교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병원 설립, 맹인학교, 대학 설립 등의 일을 했습니다. 선교사들의 눈물겨운 헌신을 통해서 우리는 지금 복음을 듣게 되었고 현재의 이런 축복을 누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은혜를 감당하는 길은 아직도 복음을 알지 못하는 수많은 청년 대학생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계에 선교사들을 파송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캠퍼스에서 복음을 전하고 제자로 키우는 일은 참으로 복된 일입니다. 우리도 캠퍼스에서 방황할 때에 목자님들을 통해서 진리의 말씀을 배우고 영생을 얻게 되었습니다. 부활 신앙은 사람을 위대하게 만듭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동안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담대히 전하기를 기도합니다.

첨부파일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Total 1,323건 75 페이지

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