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05창3강(2:4-25)/ 에덴 동산, 하나님이 주신 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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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봄학기 창세기 제 3 강
말씀 / 창세기 2:4-25
요절 / 창세기 2:8
에덴동산, 하나님이 주신 낙원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고"
인간은 이 세상에서 이상향을 꿈꾸었습니다. 동양에서는 무릉도원, 서양에서는 이상국가, 지상 낙원, 유토피아를 세워보고자 하였습니다. 20세기 들어서 서구 선진국들은 “요람에서 무덤까지” 완벽한 복지국가를 만들면 이 땅에 낙원이 오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모든 노력들이 처음 기대와는 달리 실패로 끝이 나고 말았습니다. 그 이유는 인간은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존재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만들어진 영적인 존재라는 사실을 간과한 것입니다. 이 시간 우리는 하나님이 만드신 에덴 동산을 통해서 인간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행복의 조건이 무엇인지 알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삶에 진정한 에덴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무엇에 힘써야하는가 배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하나님이 계실 때 에덴 동산에 행복이 깃들었습니다. 창세기 2장은 하나님의 천지 창조를 사람을 중심으로 다시 보충하여 기록하고 있습니다. 4절을 보십시오. “여호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때에 천지의 창조된 대략이 이러하니라.” 창세기 1장에서는 하나님이라고 하였는데 2장부터는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기록하였습니다. 이는 권능의 하나님에서 사랑의 하나님으로 바뀐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란 백성의 하나님, 경배를 받으신 하나님으로서 창조주 하나님이시며 계약 상대자라는 사실을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었습니다(7). 생령은 산 영혼, 생명의 혼이란 뜻입니다. 즉 인간은 동물과 같이 흙으로 지어져서 동물성이 있지만 하나님께서 생기를 불어넣으심으로 영적인 존재로 지으셨습니다. 인간은 육체를 가졌으나 영의 존재 방식으로 살게 된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영의 양식으로 먹어야 하고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며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없는 인간은 살아있으나 죽어 있는 것입니다(엡2:1). 8절을 보십시오.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고” 에덴은 희락, 기쁨, 즐거움이란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설하신 에덴 동산은 하나님 나라의 원형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버튼 하나만 누르면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 이(e)-편한 세상, 이(e)-편한 아파트를 꿈꾸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것들이 많고, 아무리 생활이 편리해져도, 거기에 하나님이 없으면 그곳은 결코 낙원이 될 수 없습니다. 저희들이 우리의 삶의 공간을 에덴으로 가꾸기 위해서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살아갈 수 있길 기도합니다.
둘째, 에덴 동산은 인간의 행복을 위한 최적의 자연 환경이 갖추어졌습니다(9-14). 9절을 보십시오. “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에덴 동산은 보기에 아름다운 나무와 먹기에 좋은 나무로 가득하였습니다. 소나무, 전나무, 회양목, 백향목, 느티나무, 목련, 개나리, 꽃 중의 꽃 장미, 향기 그윽한 백합, 우리나라 꽃 무궁화, 자칭 꽃 중의 꽃 호박꽃, 날씬한 코스모스, 산세베리아, 난, 동백꽃, 벚꽃 등등 기화요초가 만발하였습니다. 그리고 먹을 것도 사시사철 풍성하였습니다. 복숭아, 사과, 배, 귤, 파인애플, 사과, 앵두, 감, 토마토 등등 과실나무들이 손만 뻗으면 딸 수 있었습니다. 과일들을 보면 하나도 모양이나 색깔이 똑같지 않습니다. 향기나 맛도 다 다릅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해 줍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섬세하게 사랑하시는가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셔서 때마다, 철마다, 다른 메뉴로, 영양도 골고루 섭취하도록 최고의 식단을 꾸미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만큼 우리 인생들을 섬세하게 사랑하시고 우리의 건강과 행복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계신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밥 한 숟가락을 먹을 때도, 사과 한쪽을 먹을 때도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먹어야만 하겠습니다. 무엇보다 그곳에는 생명나무가 있었습니다. 이 나무는 노화를 방지하여 젊음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생명나무는 그것을 먹을 때마다 풍성한 삶을 누리게 하였습니다. 생명나무는 그리스도의 상징으로서 실제 있었던 과수였습니다. 그리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었습니다. 아담은 무죄 상태였기 때문에 그에게는 하나님의 은혜를 항상 기억하도록 하는 경고가 필요하였습니다. 그는 생명의 열매를 먹을 때마다 자기의 받은 생명의 근원이 하나님이심을 기억함이 필요하였습니다. 영적 질서를 세우기 위해서 선악과에 대한 금지 명령을 주셨습니다.
10-14절을 보십시오. “강이 에덴에서 발원하여 동산을 적시고 거기서부터 갈라져 네 근원이 되었으니 첫째의 이름은 비손이라 금이 있는 하윌라 온 땅에 둘렸으며 그 땅의 금은 정금이요 그 곳에는 베델리엄과 호마노도 있으며 둘째 강의 이름은 기혼이라 구스 온 땅에 둘렸고 셋째 강의 이름은 힛데겔이라 앗수르 동편으로 흐르며 넷째 강은 유브라데더라.” 강이 하나만 있어도 물이 풍성하고, 땅이 비옥할 텐데 하나님께서는 에덴동산에 강을 네 개나 만들어 두셨습니다. 그러므로 에덴동산에는 물 걱정이 전혀 없었습니다. 요즘 물이 얼마나 중요한지 다 알 것입니다. 우리나라도 이제 유엔(UN)이 정한 물 부족국가가 되었습니다. 휘발유 값보다 생수 한 병 값이 더 비싼 세상이 되었습니다. 기름은 없어도 살 수 있지만, 물은 없으면 살 수가 없습니다. 기혼강은 지금의 이집트에 흐르는 나일강을 말합니다. 그러면 이집트와 구스는 지금처럼 지중해를 두고 멀리 아시아와 유럽과 떨어진 것이 아니라 함께 붙어 있었다고 보아야 합니다. 또 힛데겔은 티그리스 강으로 이해합니다(단10:4). 지금은 티그리스와 유브라데 강이 가깝게 붙어 있지만 처음에는 그렇게 가깝지 않았을 것입니다. 또 에덴 동산에는 정금이 있었는데 정금은 성막의 지성소에 있는 궤, 향단, 등대와 같은 거룩한 기구를 덮는 데 널리 사용되었습니다. 향료라고 하는 베델리엄, 성막과 성전을 장식하는데(출25:7, 대상29:2) 그리고 대제사장의 의상(출28:9,20)에 널리 사용되었던 호마노가 있었습니다. 호마노는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이름을 두 개의 호마노 위에 새겨 금테에 물리고, 그것을 에봇의 견대에 붙였습니다(출28:9-14). 에덴에 있는 낙원과 좀더 후대의 성막은 하나님의 임재를 연상시키는 상징성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또 우리가 장차 들어갈 새 하늘과 새 땅에도 생명 나무, 강, 보석이 있고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곳입니다.
셋째로, 에덴은 하나님께서 우리가 해야 할 일, 즉 사명을 주셨기 때문에 낙원입니다. 15절을 봅시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사 그것을 다스리며 지키게 하시고.”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에덴에 청지기로 세우시고, 에덴을 잘 가꾸고, 관리하고, 다스리는 사명을 주셨습니다. 에덴동산이 아무리 아름답고, 풍요롭고, 부족함이 없을 정도로 모든 것이 다 갖추어졌다 할지라도 사명이 없으면 그곳은 결코 낙원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창세기 1:28절에서 배운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본래 우리 인생들을 다스리며, 정복하고, 개척하는 사명인의 존재로 지으셨습니다. 때문에, 에덴동산에서도 에덴을 잘 관리하며 경영하는 사명을 감당해야만 인생의 진정한 행복을 맛보며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인생을 하나님의 뜻에 맞게 하나님께 영광이 되도록 잘 경영해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사명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복입니다. 사명은 인간을 위대하게 만듭니다. 우리가 죽으면 그때는 일하고 싶어도 못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살아있을 때에, 청년의 때에 열심히 일을 해야 하겠습니다. “그대가 헛되이 보낸 오늘은 어제 죽어간 이들이 그토록 살고 싶어 했던 내일이었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어제 죽어간 사람들이 그토록 살고 싶어 했던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이 어떻게 이 소중한 하루를 헛되이 보낼 수 있겠습니까? 좀 더 자자 좀 더 졸자 손을 모으고 좀 더 눕자 하면 빈궁이 강도같이 오며 곤핍이 군사같이 온다고 하였습니다(잠6:10,11). 우리는 주님이 주신 생명이 붙어 있는 동안에, 젊었을 때에 열심히 주님께서 내게 맡기신 사명을 힘써 감당해야 하겠습니다. 그때에 우리는 사는 보람을 맛볼 수가 있고, 인생의 즐거움과 행복을 창조하며, 멋있는 인생을 살 수가 있습니다.
넷째로, 에덴은 자유와 함께 하나님의 계명의 말씀이 있었기 때문에 낙원입니다. 16절을 보십시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하나님께서는 군대식으로 아침에는 무슨 음식 먹고, 점심에는 무슨 과일, 저녁에는 무슨 식단. 이렇게 정해 놓지 않으셨습니다. 우리 인생들이 임의로, 마음대로 먹을 수 있도록 자유를 주셨습니다. 심지어는 생명나무 실과를 따 먹고 영생할 수 있는 자유까지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로봇으로 만들어 시키는 대로 순종하는 존재로 만들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격적인 분이시기 때문에 인간도 인격적인 존재로 만드시고 자발적으로 기쁨과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섬기기를 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타락할 위험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유의지를 고귀한 선물로 주셨습니다. 인간에게 이러한 자유의지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에덴동산은 자유를 풍성히 누리면서 꿈과 이상을 펼쳐 볼 수 있는 공간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처럼 우리를 자유로운 존재로 창조하셨기 때문에, 우리 인간은 다양한 문화를 창조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또 충분한 자유가 주어지되 그 자유를 남용하면 안 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일정한 질서를 세우셨습니다. 17절을 보십시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뜻은 무엇일까요? 선악과의 실과를 먹으면 선악을 알게 되는데 이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3:22). 그 나무는 과일 자체가 선악을 알게 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고 선이고, 불순종하는 것이 악입니다. 하나님은 선악의 기준이 하나님이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또 선악에 대한 지식은 궁극적으로 오직 하나님만의 유일한 영역인 어떤 지혜가 있음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잠30:1-4). 그런데 사단의 유혹에 넘어간 인간은 선악과를 먹음으로 자기가 기준이 되어 선악을 분별하고자 했습니다. 하나님은 선악과를 두심으로 지식의 근본인 하나님을 경외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사람이 취해야 할 자세는 지식으로 인한 오만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말씀을 “명하여 가라사대 …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는 절대 명령으로 주셨습니다. 이 말씀의 형태는 십계명을 닮았습니다. 즉 오랫동안 지속되는 금지 명령으로 쓰여 있습니다. 선악과를 먹으면 죽음이 뒤따른다고 직선적으로 경고하고 있습니다. 이는 결코 인간을 율법의 굴레 속에 가두기 위함이 아니라 인간을 진정으로 사랑하시기 때문에 강한 명령으로 주신 것입니다. 이 명령은 인간에게는 절대적인 삶의 좌표가 되는 거룩한 명령의 말씀입니다.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절대적인 삶의 좌표가 필요합니다. 인간에게 이 거룩한 명령이 없을 때 삶의 중심을 잃게 되고 교만하게 되어 에덴의 행복을 상실하게 됩니다. 인간에게 거룩한 명령의 말씀이 있을 때 생명이 있고 삶의 분명한 방향과 목적이 서게 됩니다. 우리 각자에게도 하나님께서 주신 거룩한 명령의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영적 질서를 지키며, 행복을 누리며 살도록 선악과를 만들어 주셨습니다. 인간은 축복된 환경 속에서 하나님을 잊고 자행자지하기 쉽습니다. 하나님께서 에덴 동산 중앙에 선악과를 두신 것은 아담이 이를 볼 때마다 보이지 아니하는 유일하시고 존귀하신 하나님을 기억하고 마음과 성품과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이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세우신 영적 질서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자발적으로 도덕적 본성을 발휘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인간은 자유의지로 순종할 수도 있고 불순종할 수도 있습니다. 이는 인간에게 주어진 선택의 권리입니다. 자유에는 권리와 책임이 따릅니다. 인간이 하나님께서 주신 무한대한 자유를 누리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영적 질서를 지켜야 할 의무와 책임이 있습니다. 선악과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관심의 표현입니다. 하늘에 연이 멋있게 날 수 있는 것은 연이 연줄에 묶여 있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만약에 연이 연줄이 부담스럽다고 해서 연줄을 끊어 보십시오. 그 연은 잠시는 더 높이 자유롭게 날아오를지 모르지만 나중에는 중심을 잃고 흔들리다가 땅바닥으로 곤두박질 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저희들이 창조주 하나님께서 세우신 질서를 따라, 계명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만 하겠습니다. 그것이 곧 행복의 길이요, 생명의 길인 것입니다.
다섯째로, 에덴은 하나님이 세우신 가정이 있기 때문에 낙원이 되었습니다. 무조건 결혼을 해서 가정을 이룬다고 그곳이 낙원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떻게 가정을 이루는가가 더욱 중요합니다. 18절에 보면 누가 결혼에 대해서 문제의식을 가지고, 가정을 이루어 주었습니까? 다같이 18절 말씀을 함께 읽어 보시겠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베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하나님께서 문제의식을 가지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사람을 위하여 돕는 베필을 짓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처음에 사람을 지으시고 심히 좋았더라고 소감발표를 하셨습니다. 그러나 혼자 있는 것을 보시고 별로 좋지 않게 보였습니다. 이 말은 남자면 남자, 여자면 여자, 혼자로는 왠지 쓸쓸해 보이고, 어딘가 부족해 보인다는 뜻입니다. 사람이 아무리 강하고, 철저하고, 완벽해 보여도 혼자로는 부족합니다. 즉 돕는 베필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박정희대통령은 아내 육영수여사가 죽은 뒤부터 급속히 자제력을 상실하고, 과격해지고, 독선적이 되어서 결국 스스로 비극적인 최후를 자초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솔로몬에게도 첩들은 많았지만 자신을 진실로 사랑해주고 신앙적으로 내조해 주는 한 사람의 아내가 없었기 때문에 그의 인생은 빛을 보지 못했습니다. 반면에 이삭은 좀 부족했지만 리브가라는 훌륭한 믿음의 여인이 있었기 때문에 믿음의 역사를 잘 계승할 수 있었습니다. 이를 볼 때에 영육 간에 서로의 부족함을 채워줄 수 있는 믿음의 동역자와 가정을 이룬다는 것은 얼마나 중요하고도 축복된 일인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 가정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이루셨습니까? 21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담으로 하여금 깊이 잠들게 하셨습니다. 이는 마치 수술할 때 마취를 해서 아무 것도 모르게 하는 것과 같습니다. ‘깊이 잠들었다’는 말은 ‘죽었다’는 말과 같습니다. 여자는 남자의 죽음을 통해서 태어났습니다. 남자가 죽을 때 여자가 살아나는 것입니다. 남편된 남자들은 여자인 아내에게 요구하기보다 희생적인 사랑을 해 보십시오. 그 가정이 천국과 같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의 갈비뼈 하나를 뽑아서 여자를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담의 다리나 머리에서 그 재료를 취하시지 않고 갈비뼈에서 가져오셨습니다. 갈비뼈는 옆구리입니다. 여자의 위치는 남자의 옆구리입니다. 여자는 남자의 옆구리에 붙어 있을 때 가장 행복합니다. 왜냐하면 본적이 그곳이기 때문입니다. 여자는 남자의 동료이며 친구입니다. 생명의 유업을 함께 받을 자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여자를 특별하게 만드셨습니다. 남자를 만드시고 그 남자에게서 나온 최고의 작품이 바로 여자입니다.
22,23절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서 취하신 갈빗대로 만드신 여자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셨습니다. 아담은 하나님께서 배우자를 예비하실 때에 그 역사에 조금도 개입한 적이 없습니다. 그는 열심히 동물들의 이름을 지으며 사명만 감당하고 있었습니다. 그때에 하나님께서 아담을 위하여 그에게 최고로 좋은 아내를 이끌어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저희들도 결혼문제를 온전히 주님께 맡기고 양들의 이름을 부르며 열심히 기도하고 사명을 감당해야 하겠습니다.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현숙한 동역자를 이끌어 오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여자를 이끌어 오시자 아담의 반응이 어떠했습니까? “이는 내 뼈 중에 뼈요 살 중에 살이로다” 아담은 ‘저 여자는 또 다른 나’ 라고 고백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남자와 여자는 본질적으로 ‘한 몸’입니다. ‘몸’이라고 하는 것은 결코 나눌 수 없습니다. 이것이 부부입니다. 이것이 부부의 신비이며 오묘함입니다. 특히 여자는 남자의 갈비뼈로 만들었다고 했습니다. 갈비뼈는 사람의 심장, 내장을 보호합니다. 이런 갈비뼈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여자들은 남편과 자식들을 항상 가슴에 품고 삽니다. 이런 갈비뼈와 같은 아내를 구박하고 상처를 입히는 것은 자신의 뼈를 때리는 것만큼이나 어리석은 짓입니다. 특히 몸이 아파 보세요. 나를 간호해주고, 밤새도록 옆에서 같이 지켜 봐 주고. 같이 마음 아파해 줄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동역자 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땅에 남편들이 아내들을 뼈 중에 뼈요, 살 중의 살로서 귀히 여기고 존중하고 사랑하는 성숙한 남편들이 될 수 있길 기도합니다.
24절을 보십시오. 결혼은 남녀가 각각 부모를 떠나서 서로 연합하여 하나의 인격체가 되는 것을 말합니다. 두 사람이 연합하기 위해서는 먼저 문화의 차이를 극복해야 합니다. 남자와 여자가 결혼했다고 해서 갑자기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문화라는 것이 그 사람을 지배하기 때문입니다. 가정, 학교, 살아온 배경이 다르고 부모에게서 길들여진 식습관, 가풍, 물질관리, 대인 관계 등 모든 것이 다릅니다.둘이 만나서 사랑하지만 문화가 맞지 않기 때문에 부부는 문화충돌을 겪습니다. 그러므로 연합하기 위해서는 자기의 것을 포기해야 합니다. 내 것을 포기해야 상대방의 것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또 부부가 잘 연합하기 위해서는 상처와 잘못된 부분을 깨끗이 치유해야 합니다. 남자와 여자가 잘 연합하기 위해서는 각자의 상처와 잘못된 부분이 깨끗이 치유되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연합할 때 사랑과 용서라는 접착제가 필요합니다. 연합이라는 말은 ‘아교로 붙이다’는 뜻이 있습니다. 사랑과 용서라는 접착제, 예수 그리스도라는 접착제가 있을 때 남자와 여자는 진정으로 연합됩니다. 두 사람이 예수님으로 온전히 연합이 될 때 이 세상에 어떤 시험도 두 사람을 나눌 수 없게 됩니다. 아담과 그 아내 두 사람은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부끄러움이 없다는 것은 거짓이 없다는 것이며, 죄가 없다는 것이며 부부 사이가 투명하다는 것입니다. 부끄러움이 없는 관계가 될 때 그 가정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복된 가정이 될 줄 믿습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을 어떻게 세우셨는가 배웠습니다. 에덴은 무엇보다도 주인 되신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에덴입니다. 자유와 함께 계명의 말씀이 있기 때문에 에덴입니다. 사명이 있고, 그 사명을 함께 감당할 동역자가 있기 때문에 에덴입니다. 이 말씀을 따라 우리 가운데 에덴 동산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합니다.
말씀 / 창세기 2:4-25
요절 / 창세기 2:8
에덴동산, 하나님이 주신 낙원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고"
인간은 이 세상에서 이상향을 꿈꾸었습니다. 동양에서는 무릉도원, 서양에서는 이상국가, 지상 낙원, 유토피아를 세워보고자 하였습니다. 20세기 들어서 서구 선진국들은 “요람에서 무덤까지” 완벽한 복지국가를 만들면 이 땅에 낙원이 오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모든 노력들이 처음 기대와는 달리 실패로 끝이 나고 말았습니다. 그 이유는 인간은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존재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만들어진 영적인 존재라는 사실을 간과한 것입니다. 이 시간 우리는 하나님이 만드신 에덴 동산을 통해서 인간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행복의 조건이 무엇인지 알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삶에 진정한 에덴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무엇에 힘써야하는가 배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하나님이 계실 때 에덴 동산에 행복이 깃들었습니다. 창세기 2장은 하나님의 천지 창조를 사람을 중심으로 다시 보충하여 기록하고 있습니다. 4절을 보십시오. “여호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때에 천지의 창조된 대략이 이러하니라.” 창세기 1장에서는 하나님이라고 하였는데 2장부터는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기록하였습니다. 이는 권능의 하나님에서 사랑의 하나님으로 바뀐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란 백성의 하나님, 경배를 받으신 하나님으로서 창조주 하나님이시며 계약 상대자라는 사실을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었습니다(7). 생령은 산 영혼, 생명의 혼이란 뜻입니다. 즉 인간은 동물과 같이 흙으로 지어져서 동물성이 있지만 하나님께서 생기를 불어넣으심으로 영적인 존재로 지으셨습니다. 인간은 육체를 가졌으나 영의 존재 방식으로 살게 된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영의 양식으로 먹어야 하고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며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없는 인간은 살아있으나 죽어 있는 것입니다(엡2:1). 8절을 보십시오.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고” 에덴은 희락, 기쁨, 즐거움이란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설하신 에덴 동산은 하나님 나라의 원형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버튼 하나만 누르면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 이(e)-편한 세상, 이(e)-편한 아파트를 꿈꾸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것들이 많고, 아무리 생활이 편리해져도, 거기에 하나님이 없으면 그곳은 결코 낙원이 될 수 없습니다. 저희들이 우리의 삶의 공간을 에덴으로 가꾸기 위해서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살아갈 수 있길 기도합니다.
둘째, 에덴 동산은 인간의 행복을 위한 최적의 자연 환경이 갖추어졌습니다(9-14). 9절을 보십시오. “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에덴 동산은 보기에 아름다운 나무와 먹기에 좋은 나무로 가득하였습니다. 소나무, 전나무, 회양목, 백향목, 느티나무, 목련, 개나리, 꽃 중의 꽃 장미, 향기 그윽한 백합, 우리나라 꽃 무궁화, 자칭 꽃 중의 꽃 호박꽃, 날씬한 코스모스, 산세베리아, 난, 동백꽃, 벚꽃 등등 기화요초가 만발하였습니다. 그리고 먹을 것도 사시사철 풍성하였습니다. 복숭아, 사과, 배, 귤, 파인애플, 사과, 앵두, 감, 토마토 등등 과실나무들이 손만 뻗으면 딸 수 있었습니다. 과일들을 보면 하나도 모양이나 색깔이 똑같지 않습니다. 향기나 맛도 다 다릅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해 줍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섬세하게 사랑하시는가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셔서 때마다, 철마다, 다른 메뉴로, 영양도 골고루 섭취하도록 최고의 식단을 꾸미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만큼 우리 인생들을 섬세하게 사랑하시고 우리의 건강과 행복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계신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밥 한 숟가락을 먹을 때도, 사과 한쪽을 먹을 때도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먹어야만 하겠습니다. 무엇보다 그곳에는 생명나무가 있었습니다. 이 나무는 노화를 방지하여 젊음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생명나무는 그것을 먹을 때마다 풍성한 삶을 누리게 하였습니다. 생명나무는 그리스도의 상징으로서 실제 있었던 과수였습니다. 그리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었습니다. 아담은 무죄 상태였기 때문에 그에게는 하나님의 은혜를 항상 기억하도록 하는 경고가 필요하였습니다. 그는 생명의 열매를 먹을 때마다 자기의 받은 생명의 근원이 하나님이심을 기억함이 필요하였습니다. 영적 질서를 세우기 위해서 선악과에 대한 금지 명령을 주셨습니다.
10-14절을 보십시오. “강이 에덴에서 발원하여 동산을 적시고 거기서부터 갈라져 네 근원이 되었으니 첫째의 이름은 비손이라 금이 있는 하윌라 온 땅에 둘렸으며 그 땅의 금은 정금이요 그 곳에는 베델리엄과 호마노도 있으며 둘째 강의 이름은 기혼이라 구스 온 땅에 둘렸고 셋째 강의 이름은 힛데겔이라 앗수르 동편으로 흐르며 넷째 강은 유브라데더라.” 강이 하나만 있어도 물이 풍성하고, 땅이 비옥할 텐데 하나님께서는 에덴동산에 강을 네 개나 만들어 두셨습니다. 그러므로 에덴동산에는 물 걱정이 전혀 없었습니다. 요즘 물이 얼마나 중요한지 다 알 것입니다. 우리나라도 이제 유엔(UN)이 정한 물 부족국가가 되었습니다. 휘발유 값보다 생수 한 병 값이 더 비싼 세상이 되었습니다. 기름은 없어도 살 수 있지만, 물은 없으면 살 수가 없습니다. 기혼강은 지금의 이집트에 흐르는 나일강을 말합니다. 그러면 이집트와 구스는 지금처럼 지중해를 두고 멀리 아시아와 유럽과 떨어진 것이 아니라 함께 붙어 있었다고 보아야 합니다. 또 힛데겔은 티그리스 강으로 이해합니다(단10:4). 지금은 티그리스와 유브라데 강이 가깝게 붙어 있지만 처음에는 그렇게 가깝지 않았을 것입니다. 또 에덴 동산에는 정금이 있었는데 정금은 성막의 지성소에 있는 궤, 향단, 등대와 같은 거룩한 기구를 덮는 데 널리 사용되었습니다. 향료라고 하는 베델리엄, 성막과 성전을 장식하는데(출25:7, 대상29:2) 그리고 대제사장의 의상(출28:9,20)에 널리 사용되었던 호마노가 있었습니다. 호마노는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이름을 두 개의 호마노 위에 새겨 금테에 물리고, 그것을 에봇의 견대에 붙였습니다(출28:9-14). 에덴에 있는 낙원과 좀더 후대의 성막은 하나님의 임재를 연상시키는 상징성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또 우리가 장차 들어갈 새 하늘과 새 땅에도 생명 나무, 강, 보석이 있고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곳입니다.
셋째로, 에덴은 하나님께서 우리가 해야 할 일, 즉 사명을 주셨기 때문에 낙원입니다. 15절을 봅시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사 그것을 다스리며 지키게 하시고.”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에덴에 청지기로 세우시고, 에덴을 잘 가꾸고, 관리하고, 다스리는 사명을 주셨습니다. 에덴동산이 아무리 아름답고, 풍요롭고, 부족함이 없을 정도로 모든 것이 다 갖추어졌다 할지라도 사명이 없으면 그곳은 결코 낙원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창세기 1:28절에서 배운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본래 우리 인생들을 다스리며, 정복하고, 개척하는 사명인의 존재로 지으셨습니다. 때문에, 에덴동산에서도 에덴을 잘 관리하며 경영하는 사명을 감당해야만 인생의 진정한 행복을 맛보며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인생을 하나님의 뜻에 맞게 하나님께 영광이 되도록 잘 경영해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사명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복입니다. 사명은 인간을 위대하게 만듭니다. 우리가 죽으면 그때는 일하고 싶어도 못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살아있을 때에, 청년의 때에 열심히 일을 해야 하겠습니다. “그대가 헛되이 보낸 오늘은 어제 죽어간 이들이 그토록 살고 싶어 했던 내일이었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어제 죽어간 사람들이 그토록 살고 싶어 했던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이 어떻게 이 소중한 하루를 헛되이 보낼 수 있겠습니까? 좀 더 자자 좀 더 졸자 손을 모으고 좀 더 눕자 하면 빈궁이 강도같이 오며 곤핍이 군사같이 온다고 하였습니다(잠6:10,11). 우리는 주님이 주신 생명이 붙어 있는 동안에, 젊었을 때에 열심히 주님께서 내게 맡기신 사명을 힘써 감당해야 하겠습니다. 그때에 우리는 사는 보람을 맛볼 수가 있고, 인생의 즐거움과 행복을 창조하며, 멋있는 인생을 살 수가 있습니다.
넷째로, 에덴은 자유와 함께 하나님의 계명의 말씀이 있었기 때문에 낙원입니다. 16절을 보십시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하나님께서는 군대식으로 아침에는 무슨 음식 먹고, 점심에는 무슨 과일, 저녁에는 무슨 식단. 이렇게 정해 놓지 않으셨습니다. 우리 인생들이 임의로, 마음대로 먹을 수 있도록 자유를 주셨습니다. 심지어는 생명나무 실과를 따 먹고 영생할 수 있는 자유까지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로봇으로 만들어 시키는 대로 순종하는 존재로 만들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격적인 분이시기 때문에 인간도 인격적인 존재로 만드시고 자발적으로 기쁨과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섬기기를 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타락할 위험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유의지를 고귀한 선물로 주셨습니다. 인간에게 이러한 자유의지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에덴동산은 자유를 풍성히 누리면서 꿈과 이상을 펼쳐 볼 수 있는 공간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처럼 우리를 자유로운 존재로 창조하셨기 때문에, 우리 인간은 다양한 문화를 창조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또 충분한 자유가 주어지되 그 자유를 남용하면 안 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일정한 질서를 세우셨습니다. 17절을 보십시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뜻은 무엇일까요? 선악과의 실과를 먹으면 선악을 알게 되는데 이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3:22). 그 나무는 과일 자체가 선악을 알게 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고 선이고, 불순종하는 것이 악입니다. 하나님은 선악의 기준이 하나님이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또 선악에 대한 지식은 궁극적으로 오직 하나님만의 유일한 영역인 어떤 지혜가 있음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잠30:1-4). 그런데 사단의 유혹에 넘어간 인간은 선악과를 먹음으로 자기가 기준이 되어 선악을 분별하고자 했습니다. 하나님은 선악과를 두심으로 지식의 근본인 하나님을 경외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사람이 취해야 할 자세는 지식으로 인한 오만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말씀을 “명하여 가라사대 …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는 절대 명령으로 주셨습니다. 이 말씀의 형태는 십계명을 닮았습니다. 즉 오랫동안 지속되는 금지 명령으로 쓰여 있습니다. 선악과를 먹으면 죽음이 뒤따른다고 직선적으로 경고하고 있습니다. 이는 결코 인간을 율법의 굴레 속에 가두기 위함이 아니라 인간을 진정으로 사랑하시기 때문에 강한 명령으로 주신 것입니다. 이 명령은 인간에게는 절대적인 삶의 좌표가 되는 거룩한 명령의 말씀입니다.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절대적인 삶의 좌표가 필요합니다. 인간에게 이 거룩한 명령이 없을 때 삶의 중심을 잃게 되고 교만하게 되어 에덴의 행복을 상실하게 됩니다. 인간에게 거룩한 명령의 말씀이 있을 때 생명이 있고 삶의 분명한 방향과 목적이 서게 됩니다. 우리 각자에게도 하나님께서 주신 거룩한 명령의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영적 질서를 지키며, 행복을 누리며 살도록 선악과를 만들어 주셨습니다. 인간은 축복된 환경 속에서 하나님을 잊고 자행자지하기 쉽습니다. 하나님께서 에덴 동산 중앙에 선악과를 두신 것은 아담이 이를 볼 때마다 보이지 아니하는 유일하시고 존귀하신 하나님을 기억하고 마음과 성품과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이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세우신 영적 질서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자발적으로 도덕적 본성을 발휘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인간은 자유의지로 순종할 수도 있고 불순종할 수도 있습니다. 이는 인간에게 주어진 선택의 권리입니다. 자유에는 권리와 책임이 따릅니다. 인간이 하나님께서 주신 무한대한 자유를 누리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영적 질서를 지켜야 할 의무와 책임이 있습니다. 선악과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관심의 표현입니다. 하늘에 연이 멋있게 날 수 있는 것은 연이 연줄에 묶여 있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만약에 연이 연줄이 부담스럽다고 해서 연줄을 끊어 보십시오. 그 연은 잠시는 더 높이 자유롭게 날아오를지 모르지만 나중에는 중심을 잃고 흔들리다가 땅바닥으로 곤두박질 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저희들이 창조주 하나님께서 세우신 질서를 따라, 계명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만 하겠습니다. 그것이 곧 행복의 길이요, 생명의 길인 것입니다.
다섯째로, 에덴은 하나님이 세우신 가정이 있기 때문에 낙원이 되었습니다. 무조건 결혼을 해서 가정을 이룬다고 그곳이 낙원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떻게 가정을 이루는가가 더욱 중요합니다. 18절에 보면 누가 결혼에 대해서 문제의식을 가지고, 가정을 이루어 주었습니까? 다같이 18절 말씀을 함께 읽어 보시겠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베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하나님께서 문제의식을 가지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사람을 위하여 돕는 베필을 짓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처음에 사람을 지으시고 심히 좋았더라고 소감발표를 하셨습니다. 그러나 혼자 있는 것을 보시고 별로 좋지 않게 보였습니다. 이 말은 남자면 남자, 여자면 여자, 혼자로는 왠지 쓸쓸해 보이고, 어딘가 부족해 보인다는 뜻입니다. 사람이 아무리 강하고, 철저하고, 완벽해 보여도 혼자로는 부족합니다. 즉 돕는 베필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박정희대통령은 아내 육영수여사가 죽은 뒤부터 급속히 자제력을 상실하고, 과격해지고, 독선적이 되어서 결국 스스로 비극적인 최후를 자초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솔로몬에게도 첩들은 많았지만 자신을 진실로 사랑해주고 신앙적으로 내조해 주는 한 사람의 아내가 없었기 때문에 그의 인생은 빛을 보지 못했습니다. 반면에 이삭은 좀 부족했지만 리브가라는 훌륭한 믿음의 여인이 있었기 때문에 믿음의 역사를 잘 계승할 수 있었습니다. 이를 볼 때에 영육 간에 서로의 부족함을 채워줄 수 있는 믿음의 동역자와 가정을 이룬다는 것은 얼마나 중요하고도 축복된 일인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 가정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이루셨습니까? 21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담으로 하여금 깊이 잠들게 하셨습니다. 이는 마치 수술할 때 마취를 해서 아무 것도 모르게 하는 것과 같습니다. ‘깊이 잠들었다’는 말은 ‘죽었다’는 말과 같습니다. 여자는 남자의 죽음을 통해서 태어났습니다. 남자가 죽을 때 여자가 살아나는 것입니다. 남편된 남자들은 여자인 아내에게 요구하기보다 희생적인 사랑을 해 보십시오. 그 가정이 천국과 같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의 갈비뼈 하나를 뽑아서 여자를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담의 다리나 머리에서 그 재료를 취하시지 않고 갈비뼈에서 가져오셨습니다. 갈비뼈는 옆구리입니다. 여자의 위치는 남자의 옆구리입니다. 여자는 남자의 옆구리에 붙어 있을 때 가장 행복합니다. 왜냐하면 본적이 그곳이기 때문입니다. 여자는 남자의 동료이며 친구입니다. 생명의 유업을 함께 받을 자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여자를 특별하게 만드셨습니다. 남자를 만드시고 그 남자에게서 나온 최고의 작품이 바로 여자입니다.
22,23절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서 취하신 갈빗대로 만드신 여자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셨습니다. 아담은 하나님께서 배우자를 예비하실 때에 그 역사에 조금도 개입한 적이 없습니다. 그는 열심히 동물들의 이름을 지으며 사명만 감당하고 있었습니다. 그때에 하나님께서 아담을 위하여 그에게 최고로 좋은 아내를 이끌어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저희들도 결혼문제를 온전히 주님께 맡기고 양들의 이름을 부르며 열심히 기도하고 사명을 감당해야 하겠습니다.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현숙한 동역자를 이끌어 오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여자를 이끌어 오시자 아담의 반응이 어떠했습니까? “이는 내 뼈 중에 뼈요 살 중에 살이로다” 아담은 ‘저 여자는 또 다른 나’ 라고 고백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남자와 여자는 본질적으로 ‘한 몸’입니다. ‘몸’이라고 하는 것은 결코 나눌 수 없습니다. 이것이 부부입니다. 이것이 부부의 신비이며 오묘함입니다. 특히 여자는 남자의 갈비뼈로 만들었다고 했습니다. 갈비뼈는 사람의 심장, 내장을 보호합니다. 이런 갈비뼈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여자들은 남편과 자식들을 항상 가슴에 품고 삽니다. 이런 갈비뼈와 같은 아내를 구박하고 상처를 입히는 것은 자신의 뼈를 때리는 것만큼이나 어리석은 짓입니다. 특히 몸이 아파 보세요. 나를 간호해주고, 밤새도록 옆에서 같이 지켜 봐 주고. 같이 마음 아파해 줄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동역자 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땅에 남편들이 아내들을 뼈 중에 뼈요, 살 중의 살로서 귀히 여기고 존중하고 사랑하는 성숙한 남편들이 될 수 있길 기도합니다.
24절을 보십시오. 결혼은 남녀가 각각 부모를 떠나서 서로 연합하여 하나의 인격체가 되는 것을 말합니다. 두 사람이 연합하기 위해서는 먼저 문화의 차이를 극복해야 합니다. 남자와 여자가 결혼했다고 해서 갑자기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문화라는 것이 그 사람을 지배하기 때문입니다. 가정, 학교, 살아온 배경이 다르고 부모에게서 길들여진 식습관, 가풍, 물질관리, 대인 관계 등 모든 것이 다릅니다.둘이 만나서 사랑하지만 문화가 맞지 않기 때문에 부부는 문화충돌을 겪습니다. 그러므로 연합하기 위해서는 자기의 것을 포기해야 합니다. 내 것을 포기해야 상대방의 것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또 부부가 잘 연합하기 위해서는 상처와 잘못된 부분을 깨끗이 치유해야 합니다. 남자와 여자가 잘 연합하기 위해서는 각자의 상처와 잘못된 부분이 깨끗이 치유되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연합할 때 사랑과 용서라는 접착제가 필요합니다. 연합이라는 말은 ‘아교로 붙이다’는 뜻이 있습니다. 사랑과 용서라는 접착제, 예수 그리스도라는 접착제가 있을 때 남자와 여자는 진정으로 연합됩니다. 두 사람이 예수님으로 온전히 연합이 될 때 이 세상에 어떤 시험도 두 사람을 나눌 수 없게 됩니다. 아담과 그 아내 두 사람은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부끄러움이 없다는 것은 거짓이 없다는 것이며, 죄가 없다는 것이며 부부 사이가 투명하다는 것입니다. 부끄러움이 없는 관계가 될 때 그 가정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복된 가정이 될 줄 믿습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을 어떻게 세우셨는가 배웠습니다. 에덴은 무엇보다도 주인 되신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에덴입니다. 자유와 함께 계명의 말씀이 있기 때문에 에덴입니다. 사명이 있고, 그 사명을 함께 감당할 동역자가 있기 때문에 에덴입니다. 이 말씀을 따라 우리 가운데 에덴 동산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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